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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40화 (39/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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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40

    명동에 위치한 송정이란 일식집으로 경환이 들어가고 있었다. 오성건설의 황태수의 연락을 받은 경환은 한번은 마주쳐 보고 싶다는 생각에 흔쾌히 황태수와의 약속을 받아들였다. 입구부터 풍기는 일본식의 화려한 인테리어는 일반인이 식사를 하기 위해 들어오기엔 위화감을 풍기고 있었다.

    “일찍 오셨네요. 늦지 않게 오려고 했는데 죄송합니다.”

    종업원의 안내로 들어간 방에는 이미 황태수가 도착해 있었다. 자리에 일어난 황태수는 경환과 악수를 나누었다.

    “제가 좀 일찍 도착을 했습니다. 중국에 계신다고 들었는데 한국에 계셔서 좀 놀랐습니다.”

    경환은 자리에 앉아 황태수가 따르는 술을 한 잔 받았다. 아직 식전이다 보니 목으로 넘긴 청주는 경환의 속을 싸하게 만들고 있었다. 요리가 상위에 펼쳐지고 회 한 점을 떠 입에 넣고는 황태수를 바라보았다. 전생에 경환은 황태수를 멘토로 삼아 빠르게 업무를 숙지하고 일을 배워 나갔었다. 옛 기억이 떠올라 착잡해진 기분을 달래기 위해 청주를 한잔 더 입에 부었다.

    “부장님께서 이 자리에 나오신 이유는 대충 알고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화성산업은 이제부터 KBR을 등에 업고,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처음에 오성에 제안을 드렸던 것은 진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신뢰를 저버린 것도 오성입니다.”

    황태수는 경환의 말에 어떠한 반론도 제기 할 수 없었다. 대기업의 특성상 하청업체와 동등한 자격으로 일을 추진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황태수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저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국내기업 활동을 위해서라도 대기업의 울타리는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 울타리를 오성이 제공을 해 드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국내 활동을 하지 않으면 됩니다. 아직 오성도 갖지 못한 특수플랜트 제작이 가능해 진다면, 굳이 국내 납품에 목을 맬 필요가 있을까요? 더군다나 KBR의 납품업체라고 소문이라도 난다면, 가만히 앉아 있어도 찾아 올 기업은 많다고 봅니다.”

    황태수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국내 납품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단언하는 경환을 보며 40을 이미 넘은 자신의 경험도, 앞에 앉아 있는 젊은 친구에겐 통하지 않고 있음을 느꼈다.

    첫 만남의 그 어리숙해 보이던 경환은 이 자리에 없었다. 황태수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경환이 무섭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20대 중반의 나이에 모든 상황을 꿰뚫어 보고 오성그룹도 어찌 해보지 못하는 KBR을 자신의 손안에 넣을 수 있는 추진력, 황태수는 나이를 떠나 인간적인 존경심마저 들었다.

    “저는 화성산업과 오성의 조화를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제 착각이었습니다. 오성 또한 대기업일 수밖에 없더군요. 그 점이 개인적으로 많이 아쉽습니다.”

    경환의 말로 화성산업과 오성과의 합작은 쉽지 않음을 안 황태수는 한 번 더 경환을 붙잡고 싶었다.

    “물론 이번 일은 저희 오성의 큰 실수이며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열악한 국내의 플랜트산업에 일조를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화성산업 한 기업만을 보지 말고 한국이라는 전체를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경환은 들었던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매섭게 황태수를 쳐다보았다.

    “왜요?”

    경환의 짧은 답변에 황태수는 말문이 막혔다.

    “대기업들도 돌아보지 않는데, 왜 화성산업이 돌아 봐야 된다는 말씀이신지 쉽게 납득이 안가네요. 절 설득 시키실 수 있으십니까?”

    대화는 그것으로 종료되었다. 황태수는 말없이 술잔을 들어 허탈해진 속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황태수를 바라보고 있는 경환의 마음도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지금이야 서로 모르는 사이라지만, 경환은 황태수에게 진 빚을 아직 갚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부장님, 지금 하시는 일에 만족을 하십니까? 대기업의 특성상 부장님의 의견이나 추진방향은 번번이 좌절을 맛보고 계실 텐데요. 좀 더 큰 곳에서 일해 보고 싶으신 생각은 없으신가요? 사실 부장님을 뵙고 싶었던 이유는 이 말을 전하고 싶어서였습니다.”

    느닷없는 경환의 말에 황태수는 어안이 벙벙해 들고 있던 술잔을 멈춘 채 경환을 바라보았다.

    “일 년 후 미국으로 들어갑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이쪽 업종에 종사를 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부장님과 같이 일을 해 보고 싶습니다. 젊은 놈의 허황된 말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신중히 검토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말을 끝낸 경환은 비어있던 황태수의 술잔에 술을 따르고는 말없이 탁자 위에 놓인 회를 젓가락으로 집어 들었다.

    화성산업과 KBR과의 지분인수와 기술이전 계약은 윌리엄이 돌아간 후 급물살을 타고 있었다. 계약은 휴스턴 KBR 본사에서 진행하기로 했지만, 경환은 중국으로 다시 돌아가야 되었기에 참석을 할 수는 없었다. 화성산업으로 국내 대기업의 끊임없는 러브콜이 몰려들고 있었지만, 화성산업은 이런 제안을 모두 거절하고 있었다.

    경환은 최승화의 지분양도를 극구 거절을 하였지만, 최승화의 강압에 못 이겨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생각하지도 않은 화성산업의 주주가 된 경환은 당분간 홍콩의 최석현을 통해 화성산업에 대한 컨설팅 업무를 맡아 주기로 하고 잠시 손에서 일을 놓고 있었다. 중국으로 돌아가기 전 제일그룹을 찾아 가려다 아직 자신의 손에 확실한 카드가 쥐어 지지 않은 상태에서의 만남은 밑천을 내 보이는 꼴이라 생각한 경환은 생각을 접어 버렸다.

    경환은 홍콩에 도착하여 페이퍼컴퍼니 설립을 시작했다는 최석현의 보고를 받았다. 귀국 후 너무 바쁘게만 보내다 보니 제대로 쉬지를 못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맞는 휴일에 경환은 침대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자기야, 많이 힘들어 보여요. 너무 일에만 몰두하지 말고 건강도 신경을 좀 써요.”

    수정은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경환이 안쓰러웠던지 경환의 이마를 손으로 짚어 열이 있는지 확인을 하고 있었다. 경환은 수정의 허리를 손으로 잡아끌어 자신의 옆에 눕혔다.

    “내가 요새 밤일이 시원찮았나? 나 아직 튼튼하니까 걱정하지 마. 앞으로 더 많이 바빠질 수도 있어. 그래도 자기가 내 옆에 있어서 내가 든든해. 이렇게 쭉 내 옆에 있어 주기만 하면 돼.”

    경환의 농담 섞인 말에 수정은 경환을 향해 눈을 흘겼지만, 이내 경환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알았어요. 자기가 제발 떠나라고 빌어도 껌 딱지처럼 딱 붙어 있을 테니까,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요. 그런데 우리 어머님 아버님 모시고 며칠이라도 여행을 다녀오고 싶은데 자기는 생각이 어때요?”

    이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바쁘게 일을 만들어 가야만 했다.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후에는 가족을 위한 인생을 살아가겠다고 경환은 다짐하고 있었다.

    “자기야, 아직 밥 멀었어요? 배고픈데.”

    “아버지, 밥은 다 되어 가는데, 찌개는 영 맛이 안 나네요.”

    수정의 부탁을 받은 경환은 주말을 이용해 식구들과 함께 제주도의 콘도를 빌려 여행을 와 있었다. 여행지에선 여자들은 물 묻히는 게 아니라는 수정이의 강요에 주방은 경환과 경환 아버지 막내인 승연이의 몫이 되어 버렸다.

    “그냥 대충 먹자. 여기에 고기나 좀 구우면 한 끼 먹는데 지장이야 있겠냐.”

    어렵게 남자들이 준비한 저녁식사는 여자들의 날카로운 비평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고야 말았다. 식사가 끝나고 수정이는 준비해온 와인을 식구 수대로 잔에 따랐다.

    “경환아, 중국유학이 끝나면 미국으로 간다고 들었는데, 네 계획은 어떤 거냐.”

    경환은 아버지의 말에 마시던 와인을 내려놓았다. 자신도 한국에서 살고는 싶지만,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설명해 줄 수는 없었다.

    “아버지, 제가 하고 싶은 일은 한국에서 힘듭니다. 이미 준비 작업은 시작을 했습니다. 저도 아쉽기는 하지만 좀 더 큰 꿈을 꾸고 싶습니다. 중국유학이 끝나면 바로 미국으로 들어 갈 생각입니다. 미국에 얼마나 머물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자주 오겠습니다.”

    경환의 아버지는 아들이 한국을 또 다시 떠난다는 생각이 못 내 아쉬웠던지 잔에 든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해준 거 없이 자신 스스로의 힘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 대견하기도 하였지만, 그만큼 미안함도 가지고 있었다.

    “난 너 안보는 건 괜찮은데, 수정이가 많이 보고 싶어서 걱정이다. 손주들도 생길 테고.”

    경환의 어머니가 수정이의 손을 잡고서 자주 만날 수 없는 아쉬움을 달래고 있었다.

    “저희가 자리를 잡으면 자주 모실게요. 아버님 은퇴하시면 미국으로 거주지를 옮기셔도 되고요. 너무 걱정은 하지 마세요. 그리고 아가씨는 졸업을 했으니 어쩔 수 없고 도련님은 유학 오시는 것도 생각을 해 보세요.”

    경환은 자신을 대신해 식구들을 챙기는 수정이를 고마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2박 3일의 짧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경환은 서울에서의 일정을 정리하고 있었다. 구정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구정이 지나면 바로 출국을 할 생각이었다.

    “계장님, 일은 어느 정도 진척이 있나요?”

    ‘네, 팀장님. 팀장님 말씀대로 변호사를 통해 일을 무리 없이 진행을 하고 있습니다. 변호사사무소의 말로는 다음 주면 절차가 마무리 된다고 합니다.’

    “그래요? 반가운 소식이네요. 절차가 완료되면 준비한 INVOICE를 KBR에 바로 발송을 하세요. 린다에게는 제가 따로 연락을 취해 놓겠습니다.”

    최석현의 보고에 경환은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화성산업의 지분 10%는 최승화의 강요에 받아들이긴 했지만, 자신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언제든지 다시 되돌려 줄 생각을 하고 있던 경환이었다.

    “지내시는데 불편한 점은 없으세요? 돈이 모자라실 텐데, 제가 들어갈 때 가지고 가겠습니다. 그때까지만 기다려 주세요.”

    ‘아닙니다, 팀장님. 충분합니다. 지금 아파트를 보러 다니고 있습니다. 팀장님 말씀대로 팀장님도 같이 지낼 수 있는 괜찮은 곳으로 찾고 있습니다. 팀장님이 오시기 전에는 임대를 할 생각입니다.’

    최석현과의 전화를 끊은 뒤, 경환은 린다에게 다음 주에 발송될 INVOICE 처리를 부탁했다. 한국에서의 급했던 일을 대부분 처리 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는 경환은 중국에서의 나머지 일 년의 시간 동안 자신이 해야 될 일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대외경제무역부의 자문위원 역할과 제일그룹의 유연탄사업, 그리고 가장 골치 아픈 유학생활 등 모든 일이 아직은 미지수였지만, 조급해서 될 일은 아니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올 8월이면 중국과 정식 외교관계가 성립이 되고 한중간의 무역교역은 물밀듯이 커져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때를 잡지 못한다면 시간이 없는 경환으로서는 중국과의 비즈니스는 포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죽으려고 작정을 한 놈인데, 뭘 못하겠냐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구정을 지내고 경환은 바로 출국을 준비했다. 중국에 다시 들어가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홍콩에 있는 최석현을 하루라도 빨리 만나보고 싶었다. 이미 KBR측에서 자금을 송금 했다는 린다의 연락을 받은 경환은 서둘러 짐을 꾸리고 있었다.

    “한 달이나 있었는데 그렇게 아쉬워?”

    “아니에요. 언제 한 달이 지났는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너무 북경 집을 오래 비워둬서 걱정이 많이 되긴 해요.”

    “자기도 한국에서 양쪽 집안 신경 쓰느라 고생 했으니까 홍콩에서 며칠 쉬다 북경 들어가자.”

    아쉬워하는 수정의 손을 경환은 잡아 주었고, 그런 경환의 어깨에 수정은 자신의 머리를 기대왔다. 경환은 손을 들어 수정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기장의 방송과 함께 스튜어디스들은 빠른 몸놀림으로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여러 번 와본 홍콩이었지만 오늘은 그 기분이 다른 경환이었다. 입국장을 나서는 경환과 수정 앞으로 최 계장이 빠르게 다가와 짐을 받아 들었다.

    “팀장님,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사모님도요. 하하하”

    최석현의 밝은 모습을 보니 경환은 안심을 할 수 있었다. 적응력이 빠른 최 계장이라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현지인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최석현은 홍콩생활에 적응을 한 모습이었다. 수정은 사모님이란 소리에 얼굴이 빨개져 손사래를 치고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최 계장님. 자세한 건 호텔에 도착한 후에 얘기를 나누기로 하죠.”

    “저…. 팀장님께 보고를 드리지 못한 게 하나 있습니다.”

    경환은 혹시 일이 잘못 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게 최석현을 바라보았다.

    “케이티, 이리로 와서 인사 드려.”

    최석현 뒤에서 예쁘장한 여자 한 명이 경환과 수정에게 인사를 했다.

    “이 친구가 제 일을 많이 도와주고 있습니다. 팀장님이 허락만 하시면 같이 일을 하고 싶은데….”

    최석현은 경환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고, 케이티는 혹시라도 일이 잘못된 건 아닌지 좌불안석이었다.

    “푸하하하, 일하라고 홍콩에 보냈더니, 연애만 하셨나 보네요. 우선 호텔에 도착해서 식사라도 같이 하면서 얘기를 좀 나눠 보시죠.”

    경환의 밝은 표정을 확인한 최석현은 케이트를 향해 윙크를 하고선 경환과 수정을 앞서 준비한 차로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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