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36화 (35/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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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36

    북경의 아침은 자전거의 물결로 시작되고 있었다. 넓은 도로에 비해 다니는 차량은 한가했지만, 넘치는 자전거들로 인해 도로는 어느새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경환은 김 차장과 마신 소주로 인해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오늘 왕바오밍과 약속된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서둘러 운전을 하고 있었다.

    “왕바오밍 선생과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이경환이라고 합니다.”

    교통부 정문에 차를 세워 놓고 경환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오늘 있을 왕바오밍과의 만남이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는 몰랐지만, 경환은 개의치 않았다. 이미 잭과의 계약을 성사시켜 4백만 불의 사업초기 자금을 확보했기 때문에, 오늘 있을 왕바오밍과의 만남은 인맥을 쌓고 부수입을 챙기는 정도라고 밖에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는 주차장에 주차시키시면 됩니다. 입구에서 기다리시면 사람이 내려 올 겁니다.”

    피던 답배를 급히 비벼 끄고 경환은 빠르게 차를 몰아 주차를 시켰다. 교통부 일층에서 여직원의 안내를 받아 회의실에 도착한 경환은, 모여 있던 십여 명의 사람들 중에서 왕바오밍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급히 악수를 청했다.

    “이경환 씨 교통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들 중에는 교통부의 담당 직원들뿐만 아니라 대외경제무역부에서도 참석을 했습니다.”

    경환은 회의실에 모여 있던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며 인사를 나눴지만, 회의실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예상과 달리 젊은 동양인이 나타나자, 매우 당황한 표정들이었다. 왕바오밍은 자리에서 일어나 오늘의 회의에 대한 주제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다들 대외투자유치에 대한 제안서를 검토 했으리라 봅니다. 이경환 씨는 현재 북경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한국유학생입니다.”

    젊은 한국유학생이란 소리에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은 다들 믿을 수 없다는 듯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다들 조용히 해 주세요. 나이로 사람을 판단하지 마시고, 이 제안서에 대해서만 토론을 하겠습니다.”

    웅성거림을 진정 시킨 왕바오밍이 자리에 앉자, 자신을 연구원이라고 소개한 남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 제안서는 단기와 중. 장기계획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서비스의 개념을 도입했다는 것에 대해서, 저는 충분히 이 제안서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경환은 이 연구원의 말에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아직 중국은 서비스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였다. 특히 관공서의 업무처리는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이 제안서의 중. 장기 계획으로 나와 있는 대련, 청도, 연운항, 상해 항만의 개발과 전력 확보 방안은 저희가 준비해온 계획과 일맥상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안과 내륙의 투자유치 활성화를 위한 물류기지 설치 및 도로망 확충 계획 등의 제안은 미래를 보는 상당히 획기적인 제안으로 볼 수 있습니다.”

    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시작되는 물류망 확충 계획을, 경환이 5년 이상 빨리 제안을 하였기 때문에, 회의에 참석한 연구원들은 경환의 제안서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이후 연구원들과 경환의 질문과 답변이 이어지고 제안서에 대한 타당성에 대해 긴 토론을 하고 있었다.

    “대대적인 투자가 필요한 부분들 외에 저의 부에서는 경환 씨가 제안한 ONE-STOP SERVICE란 제안에 상당히 관심이 많습니다. 이 제안에 대해 제안자인 이경환 씨의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대외경제무역부에서 나온 연구원이 급히 경환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경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번 제안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ONE-STOP SERVICE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저는 해외 투자자의 입장에서 생각을 했습니다. 중국 관공서의 벽은 아주 높습니다. 관공서 직원들의 태도는 고압적이고, 브로커를 통하지 않고서는 서류하나 제대로 처리가 되지 않습니다. 현재 대외경제무역부에서는 투자유치에만 관심을 보일 뿐 그 이후에 벌어지는 각종 인허가 문제에 대해서는 각 해당 부서에 떠넘기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점은 투자자에게는 큰 불만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ONE-STOP SERVICE의 핵심은투자자의 입장에서 인허가 문제를 처리를 해 준다는 개념입니다. 다시 말해 대외경제무역부, 공상행정관리국, 세무서, 공안국, 외환관리국, 해관 등 복잡한 인허가 절차를 하나의 독립된 부서에서 빠른 시간 내에 처리를 해 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도는 간편해진 인허가 절차로 투자자들의 불만족을 해소시키고 더 많은 유치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경환은 자신의 의견을 말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경환의 답변을 요구했던 연구원은 경환을 주시하고 있었다. 경환의 제안은 확실히 획기적이긴 하였지만, 이러한 제도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기존 관공서들과 연결된 브로커들의 반발 또한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충분히 획기적인 제안인 것은 사실이지만, 현재 중국의 시스템에 적용시키기는 무리가 있다고도 봅니다. 그러나 연구할 가치는 충분하다고 봅니다.”

    경환 또한 그 연구원의 답변에 대해 충분히 공감을 하고 있었다. 이 제도는 2005년 상해 시정부에서 처음 선보인 제도였고 대단한 호평을 받았었다. 그러나 아직 서비스란 개념조차 없는 상태의 중국에선 쉽게 적용할 수 있는 제도는 아니었다.

    “관료는 국민들을 이끌고 가야 되는 게 아닙니다. 관료는 앞으로 나가려고 하는 인민들을 뒤에서 밀어 주는 역할을 하는 존재여야 됩니다.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거 잘 압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다면 국민들의 저항을 받게 될 것입니다.”

    경환은 건드리지 말아야 될 부분을 건드리고 나서 ‘아차’하고 실수를 인정하고 있지만, 이미 말은 뱉은 상태였다. 인민들의 저항이란 소리에 참석자들의 얼굴을 급격히 굳어졌다.

    “자. 자, 오늘은 이미 합시다. 이경환 씨가 준비한 제안서가 우선은 검토할 가치가 있다고 증명된 만큼 좀 더 시간을 두고 연구를 해 보도록 합시다.”

    분위기를 파악한 왕바오밍이 급하게 회의를 정리했다. 왕바오밍은 경환을 이끌고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

    “솔직히 경환 씨가 만든 제안서를 보고 많이 놀랐습니다. 윗분들도 흥미를 갖고 계시구요. 대외경제무역부에서도 경환 씨의 제안에 상당히 공감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데 대외경제무역부 산하 연구기관에서 경환 씨를 자문위원으로 위촉하려는 것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왕바오밍의 말을 듣던 경환은 급히 왕바오밍의 말을 끊었다. 자문위원으로 위촉되는 것은 둘째 문제고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아직 듣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환이 제안서를 만든 목적은 자문위원이 아니었다.

    “왕바오밍 씨, 제가 제안서를 만든 이유를 알고 있으리라 봅니다. 거기에 대한 답부터 듣고 나서 자문위원에 대해 생각을 해 볼 생각입니다.”

    “하하하, 제가 미리 앞서 갔군요. 경환 씨가 부탁한 유연탄은 긍정적으로 진행이 될 것입니다. 지금은 연말이라 정신이 없고 춘절이 끝나고 나면 좋은 소식을 줄 수 있을 겁니다.”

    경환은 단기간의 자문위원 위촉이라면 긍정적으로 검토를 해 보겠다는 답변을 끝으로 교통부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중국에서의 사업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경환이었지만, 경환의 의사와는 다르게 중국과의 인연이 깊어져 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최석현 계장은 정체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에 요즘 들어 고민이 많아졌다. 작년 초 경환을 만나 힘들기는 했지만 일을 배우면서 성장해 가는 자신이 스스로 대견스러웠지만 경환이 떠난 이후 회사 일에 서서히 의욕을 잃어 가고 있었다.

    ‘하…, 이 팀장이 나한테는 먼 산이지만, 그래도 그때가 그립네.’

    최석현은 영어를 배우면서도 자신의 허함을 만족시켜 주지 못하자 최석현은 중대한 결심을 하고 말았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한번 가보자.’

    이 부장을 찾은 최석현은 안주머니에서 자신의 사직서를 꺼내 올려놓았다. 이 부장은 최석현의 사직서를 보고는 깜짝 놀라 보던 서류를 접어 둔 채 최석현을 쳐다보았다.

    “아니, 최 계장. 이게 무슨 사직서야? 자네 다른 곳에 스카우트라도 된 건가?”

    이 부장은 혹시라도 최석현이 경쟁사의 스카우트 제의에 회사를 떠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닙니다. 부장님. 제 스스로 한계를 느껴 그만두는 것입니다. 좀 더 큰 곳에서 눈을 한번 다시 떠 보고 싶습니다.”

    그때 사장실 안에서 최석현의 사표얘기를 들은 최승화가 급히 사장실 문을 열어젖히며 뛰쳐나왔다.

    “최 계장! 나하고 잠깐 얘기 좀 하세.”

    최석현과 마주 앉은 최승화는 마음이 착잡했다. 직원들 모두를 자신의 가족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우선은 최석현이 회사를 떠나려는 이유를 알아야 했다.

    “자네는 이 팀장이 떠난 이후 KBR과의 모든 업무 연락을 하고 있네. 자네가 떠난다면 업무가 중단될 수도 있는데, 왜 이런 중요한 시기에 회사를 떠나려고 하는 건가?”

    최석현은 최승화를 향해 고개만 숙인 채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있었다.

    “사장님. 제가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그리고 제가 없더라도 KBR과의 업무연락은 문제가 없을 겁니다. 새로 들어온 직원들에게 이미 전부터 업무를 이관시키고 있었습니다. 사장님, 이 팀장이 떠난 이후, 제가 정체되어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이라는 나라에 가서 좀 더 배워보고 싶습니다. 죄송합니다.”

    최승화는 허공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미 최석현의 마음이 떠났다는 사실을 안 이상 더 이상 잡아 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아쉬웠다. 그리고 먼 미국에 혼자 가서 고생해야 될 최석현이 안쓰럽기도 했다.

    “최 계장. 내 자네에게 제안을 하나 하겠네. 자네가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는 것도 좋지만, 이 팀장과 같이 일을 해 보는 건 어떤가? 이 팀장이 이번 학기가 끝나게 되면 잠시 한국에 돌아온다고 들었어. 그때까지 여기 있으면서 밑의 직원들을 좀 많이 가르쳐주게. 이 팀장이 들어오면 내 최 계장을 이 팀장에게 부탁해 보겠네. 미국유학을 가게 되더라도 이 팀장이 자네를 봐 주는 게 좋지 않겠나.”

    최석현은 최승화의 진심을 받아들였다. 최석현은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고 경환과의 만남을 준비하고 있었다.

    왕샹첸은 교통부에서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연구원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경환의 제안서를 살펴 본 왕샹첸은 참신한 발상에 흥미를 느껴 연구원에게 검토를 하라는 지시를 내렸었다.

    “회의는 잘 끝냈나? 자네가 보기에 이 제안서의 가치는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지?”

    “건설적인 많은 내용들이 회의에서 토론이 되었습니다.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봅니다. 제 판단으로는 이 제안서는 시대를 앞서가는 제안이라고 봅니다. 반드시 이 제안서의 내용이 필요한 시기가 올 것이지만, 지금 중국의 상황에 접목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연구원의 답변에 왕샹첸은 고개만 끄떡거렸다. 자신도 미래를 예측하고 분석하며 중국에 적용시키는 방안까지 세세하게 작성된 것을 보고 한편으론 놀라웠지만, 연구원의 말대로 너무 시기를 앞선 내용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이 내용을 우리 중국에 적용시킨다면 반발이 심하겠지?”

    “그렇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이 제안의 내용대로 변해야 되는 건 사실입니다. 제 사견이지만, 이경환이라는 친구를 우리 쪽 자문위원으로 위촉하는 건, 저도 반대 하지는 않겠습니다. 도움이 될 만한 사람입니다.”

    왕샹첸은 책상 위에 놓인 경환의 제안서를 펜으로 ‘톡톡’치고 있었다. 곧 있을 한국과의 수교는 아직 기술력이 떨어지는 중국의 제조업에 숨통을 틔게 해 줄 좋은 기회로 작용할 것이 분명하였다. 그때를 위해서라도 경환을 잡아 두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을 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경환에게 던져줘야 될 떡밥이 필요했다.

    “자네의 의견에 나도 동감해. 얻을 건 얻어야겠지. 그럼 나도 그 친구에게 줄 대가를 준비해야 되겠군.”

    한국과 중국에서 경환을 사이에 두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하는 경환은 수정의 무릎을 베고 누워, 한가한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자기야, 내가 말이야. 나중에 사업을 하게 될 때를 생각해서 회사이름을 만들어 봤는데 한번 자기 생각을 말해볼래?”

    “회사이름이 뭔데요?”

    수정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경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음…, SHJ 투자컨설팅. 어때? 자기하고, 태어날 아기들 이름의 첫 이니셜을 따서 만들었는데.”

    “아직 아이도 없는데 아이 이름을 벌써 지어 놓은 거예요?”

    수정은 생각해 보지도 못한 아이 이름이란 소리에, 경환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나 경환은 수정에게 진실을 말해 줄 수는 없었다.

    “딸이면 희수라고 하고, 아들이면 돌림이 정이니 아버지께 부탁하지 뭐.”

    경환의 뜬금없는 말에 수정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경환은 하루라도 빨리 자신의 딸을 보고 싶었지만, 아직은 기다려야만 했다. 수정의 무릎 위에서 경환의 꿈을 실현시켜줄 회사이름이 만들어 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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