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다시 사는 인생 - 35
미국 발 비행기가 북경수도공항에 도착하고, 입국장으로 잭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잭으로서는 처음 방문하는 중국이었지만, 중국이라는 나라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다. 잭의 머릿속엔 온통 사우디 재입찰만이 가득했다.
“잭, 북경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호텔에서 먼저 체크인을 하시겠습니까?”
안젤라는 본사의 실세인 잭의 북경 방문에 긴장을 하며 굳은 표정으로 잭을 맞이하고 있었다.
“안젤라, 오랜만에 보니 반갑군. 제임스와는 연락을 취했나?”
“그게…. 저……. 연락처를 주지 않아서… 요새는 학교에도 잘 안 온다고 합니다.”
경환은 안젤라에게 집 전화를 알려 주지 않았다. 혹시라도 수정의 오해를 살까, 애당초 안젤라에게는 연락처를 줄 맘이 없었다. 안젤라는 본사의 지시를 받고 학교로 몇 번이나 찾아 갔었지만, 경환을 만날 수는 없었다. 안젤라의 표정을 살핀 잭은 말없이 차에 올랐다.
“먼저 제임스가 다닌다는 북경대학으로 출발하게. 북경 전체를 뒤져서라도, 오늘 중으로 제임스의 연락처를 확보해서, 나에게 보고해.”
안젤라는 잭의 호통에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승용차를 북경대학으로 몰았다. 잭이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항상 웃음으로 자신을 대하던 잭의 달라진 모습에 안젤라는 긴장을 하고 있었다. 지난번 경환과의 일이 혹시라도 잭의 귀에 들어간 건 아닌지 걱정도 들었다.
11월이 넘어서 인지 제법 날씨가 싸늘해지고 있었다. 교통부의 의뢰를 받아, 수행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소문에 학교 측도 경환에 대해 특별한 제재를 하지 않고 있었다. 제안서를 넘긴 지 며칠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왕바오밍의 연락은 오지 않고 있었다. 경환은 조급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왕바오밍에게 연락을 취하지는 않고 있었다. 중국인들과의 거래는 중국인들 보다 더 느긋하고 조급해 하지 말아야 된 다는 것을 경환은 전생의 기억으로 알고 있었다.
“자기야, 우리 오랜만에 데이트라도 할까? 옷 입고 준비해.”
오랜만의 데이트 제의에 수정은 함박웃음을 띠고는 외출준비를 서두르고 있을 때 전화기의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띠리리~~, 띠리리~~.’
‘잭이라고 합니다. 제임스와 통화를 하고 싶습니다.’
수화기에선 다급한 잭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북경의 전화번호라는 사실을 안 경환은 자신의 예상대로 입찰이 무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우디 현장을 총 감독 해야 될 잭이 북경까지 올 정도의 심각한 사태는 그거 말고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잭과 약속을 잡은 경환은 실망한 눈으로 쳐다보는 수정을 향해 웃어 주고는 수정의 손을 잡고 문 밖을 나섰다.
약속장소에 도착한 경환은 마중 나와 있는 잭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포옹을 나누었다. 자신이 지금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잭과의 만남에서부터였기 때문에 경환은 잭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만남은 비즈니스가 우선이었고 인간적인 감정은 잠시 접어두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잭, 오랜만입니다. 이쪽은 제 아내입니다.”
“반갑습니다. 미시즈 리, 제임스 말대로 아름다우십니다. 좀 늦은 시간이지만 식사를 준비했으니 같이 올라가시죠.”
잭은 한국여성은 결혼을 해도 성이 바뀌지 않는 사실을 몰랐지만, 경환은 크게 개의치 않고 수정을 이끌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지난번 안젤라와 같이 식사를 했던 양광대하였지만, 오늘 경환의 곁엔 수정이 있었다. 수정은 50층에서 바라본 북경시내의 경치를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경환은 잭에게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였다.
“잭이 북경까지 왔다니 입찰이 무산이 되었나 보군요.”
경환은 이미 자신이 북경에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한 말투에 오늘의 협상도 만만치 않을 거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제임스의 예상이 맞습니다. 입찰이 무산되었습니다. 나나 윌리엄이 제임스의 충고를 깊게 받아 들였다면 오늘의 이 자리는 없었겠지요.”
경환은 묘한 웃음을 지었고 잭은 그런 경환의 모습을 보면서 인상이 굳어졌다. 주위에 있던 안젤라가 들어와 경환을 향해 눈인사를 하고는, 식사가 준비되어 있음을 알렸다. 경환은 수정과 함께 예약된 방에 들어가 와인으로 가볍게 목을 축이며 식사를 즐겼지만, 잭은 스테이크의 맛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제임스, 시간이 없는 관계로 내일 바로 사우디로 출국을 해야 됩니다. 염치없지만, 제임스의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잭, 난 내 아내와 같이 식사를 먼저 하고 싶습니다. 비즈니스는 식사 후에 하면 안 되겠습니까?”
급한 잭과는 달리 경환은 서두를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 비즈니스는 서두르는 사람이 패한다는 걸 경환은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느긋하게 수정과 늦은 점심을 즐기고 있는 경환은 지금 이 상황을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방향으로 끌어내기 위해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잭, 오늘 점심은 잘 먹었습니다. 이 건물 앞의 공원이 좋은데, 잠깐 저와 산책을 하시겠습니까?”
경환은 잠시 수정을 방에 두고 영문을 몰라 눈만 크게 뜨고 있는 잭을 반 강제적으로 끌고 나갔다. 양광대하 앞의 공원은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 없이 한가했다. 초겨울에 접에 들어서인지 앙상한 나무들만 좌우로 서 있었고 떨어진 낙엽이 인도 위를 덮고 있었다. 경환은 잭을 이끌고 벤치에 앉았다.
“중국은 조심을 해야 됩니다. 우리는 느낄 수 없지만, 항상 눈과 귀가 우리를 향해 있다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잭을 여기로 모셨습니다.”
그 당시 북경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은 대부분 중국 사회안전부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집과 사무실 전화도청은 아주 기본에 속할 정도로 외국인의 행동에는 제약이 따르고 있었다. 대 놓고 감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고 경환은 생각하고 있었다.
“잭, 무엇이 궁금한가요? 제가 알기론 처음 예정가 23억 불에서 22억5천만 불로 입찰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는 분명 제 정보를 KBR에 드렸고, 제가 진 빚은 충분히 갚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잭은 머리가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이미 제임스는 KBR이 입찰한 금액까지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휴우, 제임스 말이 맞습니다. 제임스의 정보를 활용하지 못한 것은, 우리의 실수지만, 이런 정보를 가지고 있는 제임스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그저 황당할 뿐이네요. 입찰이 무산된 원인이 무엇인지 말해 줄 수 있습니까?”
“잭, 아까도 말했듯이 제가 진 빚은 갚았습니다. 윌리엄에게도 다음부터의 거래는 비즈니스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잭을 인간적으로 존경하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저 혼자만의 사업이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정보는 드릴 수 없어 안타깝습니다.
잭은 경환이 다른 정보조직과 연계가 되어 있다고 판단을 했다. 자신 혼자만의 사업이 아니라는 경환의 말에는 잭으로서도 상상할 수 없는 정보카르텔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생각 할 수밖에 없었다.
“제임스, 어떤 비즈니스를 원하나요? 윌리엄에게 일정부분 제임스와의 거래에 대한 위임을 받아 온 상태입니다.”
“좋습니다. 그럼 이 계약서를 읽어 보십시오. 사인을 하고 안하고는 잭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말을 마친 경환은 안주머니에서 준비된 봉투 하나를 꺼내 잭에게 건네주었다. 봉투를 열어 계약서를 확인한 잭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잭은 이 정도로 치밀하게 준비를 하고 있던 경환에 대해서 무섭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자신의 북경방문을 예상이라도 한 듯 서류에는 입찰 예정가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400만 불의 커미션을 KBR이 제공한다는 내용이었다.
“잭, 400만 불이 많아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번 입찰은 500만 불내에서 당락이 결정될 것입니다. 저는 그 500만 불의 차이를 백만 불로 줄이고, 차액 400만 불을 커미션으로 원하는 겁니다. 우선권을 KBR에 드리는 거니, 판단은 잭이 하십시오. KBR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저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KENTZ나 TECHNIP쪽에 제안을 해 볼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 그쪽에서는 천만 불 이상으로 제안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심으로 잭과 척을 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저 혼자만의 비즈니스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 주십시오.”
잭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벌린 채로 경환을 쳐다 만 보고 있었다. 경환의 입으로 혼자만의 비즈니스가 아니라고 밝힌 이상 자신이 이 제안을 거절하게 된다면 이 제안은 KBR의 경쟁업체로 갈 것은 분명했다. 입찰만 성공하게 된다면 400만 불은 사실 큰돈은 아니었다. 결심을 굳힌 듯 잭은 경환을 향해 고개를 끄떡이고는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경환의 건넨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경환 또한 사인을 한 후, 계약서 한 장을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잭, 잭이 KBR의 대표가 아닌 이상 이 계약서를 KBR이 부정할 시, 그냥 종잇조각에 불과하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즈니스는 이번 한번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는 KBR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잭을 믿어 보겠습니다. 술탄의 압력을 누룰 수 있는 사람은 압둘라 왕세제 밖에는 없습니다. 그 다음은 잭의 몫입니다.”
말은 마친 경환은 주머니에서 다른 봉투 하나를 꺼내 잭에게 건네주었다. 잭은 서류를 꺼내 적혀있는 숫자를 확인 하고는 라이터를 꺼내 숫자가 적혀진 종이를 불살라 버렸다.
“난 제임스와 척을 지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제임스의 정보대로 우리가 입찰에 성공을 한다면, 윌리엄의 모가지를 비틀어서라도 계약된 내용이 이행되도록 할 겁니다. 그리고 앞으로 제임스와는 오랫동안 파트너로 지내고 싶습니다. 이것이 내 진심입니다.”
수정을 너무 오랫동안 혼자 둔 것이 못내 걱정된 경환은 잭을 독촉해 식당으로 다시 돌아왔다. 수정은 안젤라와 와인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자기야. 여기 안젤라가 파리에서 유학을 했었다고 해요. 나중에 둘이 자주 만나기로 했어요.”
수정의 말을 들은 황당한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았고, 안젤라를 향해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주었다. 잭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온 경환을 아파트 일층 인포메이션 직원이 급히 불렀다.
“이 선생님, 댁에 계시지 않을 때 전화가 왔었습니다.”
급히 메모지를 확인한 경환은 안도의 큰 한숨을 내 쉴 수 있었다.
“자기야, 무슨 안 좋은 일이에요?”
갑자기 큰 한숨을 내 쉬는 경환이 불안한 듯 수정은 경환을 쳐다보았고, 경환은 아파트 로비에 사람이 있든 말든 수정을 크게 안아 들었다.
‘왕바오밍 전화 급 요망’
집으로 올라 온 경환은 급히 전화기를 돌렸다.
“저는 이경환이라고 합니다. 왕바오밍 씨와 통화를 하고 싶습니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왕바오밍과 통화연결이 될 수 있었다.
‘이경환 씨 내일 오전에 교통부로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제안서의 내용이 아주 좋았습니다.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 협의를 하라는 지시를 위에서 받았으니 바쁘시더라도 잊지 마시고 와 주십시오. 그럼 내일 기다리겠습니다.’
왕바오밍은 자신의 할 말만 한 채 전화를 끊어 버렸다. 주먹을 불끈 쥐어 본 경환은 내일 있을 회의가 중국에서의 사업을 좌지우지 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자신의 서재로 들어온 경환은 갑자기 터져버리기 시작하는 일에 정리를 하고 있었다.
KBR은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긴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가 성공한 후에는 집중적으로 관리를 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교통부와의 SOC부분에 대한 제안서가 통과 되었기에 그쪽과의 일에도 신경을 써야만 했다. SOC부분과 유연탄수출업무가 동시에 시작이 되기라도 한다면 자신 혼자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을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절대적으로 사람이 필요했지만 아직 자신에게는 일을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이 없었다.
‘할 일은 많은데, 사람이 없으니….’
그나마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들은 화성산업의 직원들이었지만, 그들은 이미 화성산업 내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만약에 그들을 빼가기라도 한다면, 최 사장 성격에 총이라도 짊어 들고 북경으로 쳐들어 올 것은 뻔했다. 그렇다고 경환 혼자 이 많은 업무들을 끌고 갈 수는 없는 문제였다.
답답한 마음에 경환은 소주라도 한잔 하려는 마음에 수정과 함께 김창동의 집을 찾았다. 수정은 김창동 부인과 언니, 동생 하면서 허물없이 지내고 있었다.
“경환 씨 무슨 고민이라도 있습니까?”
김창동은 경환의 안색이 좋지 못한 것이 걱정되는지 담배를 하나 건네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생각하지도 않은 일들이 봇물 터지는 쏟아지고 있는데, 함께 할 사람이 없어 고민이 되네요.”
급히 소주를 한잔 넘기고 잔을 김 차장에게 건네주었다. 경환의 푸념에 김창동은 학교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하는 건 아닌지 경환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학교생활이 많이 힘이 드나 봅니다.”
경환은 김창동의 질문에 웃어 주고는 또 한잔의 소주를 한 번에 마셔 버렸다.
“학교생활은 이미 적응이 되었습니다. 몇 가지 구상한 사업이 있는데, 갑자기 동시에 터져 나오다 보니 힘에 부치네요.”
생각하지도 않게 유학생의 입에서 사업얘기가 나오자 김창동은 크게 웃으며 소주잔을 들어 건배를 제안했다.
“하하하, 큰 사업인가 봅니다. 수교가 되면 저는 귀국을 할 겁니다. 뭐 나라도 좋다면 써 주세요. 하하.”
김창동은 경환에게 맘에도 없는 농담을 했지만, 경환은 김창동의 꼬투리를 잡고 늘어졌다.
“정말입니다. 각서 쓰세요. 자기야! 종이하고 펜 가지고 와.”
수정은 영문도 모른 채 종이와 펜을 가지고 왔고, 경환은 급히 각서를 쓴 후 김창동에게 사인을 하라고 강요를 했다. 김창동은 껄껄 웃으며 경환이 내민 각서에 아무 생각 없이 사인을 하고 말았다.
‘김 차장 정도면 중국 일은 확실히 맡길 수 있지.’
김창동은 경환의 의도도 모른 채 기분 좋게 경환과 술잔을 나눴고 자신이 각서에 사인을 한 일은 이미 까맣게 기억에서 지워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