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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34화 (33/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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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34

    시험도 그럭저럭 마치고 경환은 간만에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수정은 아줌마들과 어울려 여전히 바쁜 생활을 보내고 있어 경환의 근심을 하나 덜어 주고 있었다. 마침 상해를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왕바오밍의 전화에 경환은 서둘러 약속장소로 향했다.

    “상해 일정을 같이 하지 못해 많이 아쉽습니다. 중국의 제2시의 도시라 저도 많이 기대를 했었는데.”

    “괜찮습니다. 시험이 더 중요하긴 하지요. 같이 가 볼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다름이 아니라 오늘 경환 씨를 만나고자 한 것은 지난번 모임 때 경환 씨가 말한 SOC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서였습니다.”

    왕바오밍의 느닷없는 질문에 경환은 마땅한 대답거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못 찾는다는 것이 아닌 이 질문을 한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은 한발 물러서야 될 때라고 경환은 생각했다.

    “글쎄요. 그 문제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단지 보이는 현상을 제 나름대로 말씀 드린 것뿐입니다. 아직 유학생이고 나이도 어리다 보니 제가 할 대답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하하.”

    왕바오밍은 웃음에 경환은 그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난 지난번 모임 때 이경환 씨의 말을 듣고 상당히 놀랐습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부분을 너무 아프게 찌르더군요. 물론 중국인이 아니라는 것이 안타깝긴 하지만 덩샤오핑 주석께서 말씀하신 흑묘백묘론을 생각했습니다. 말 돌리지 않겠습니다. 중국은 해외자본 유치를 위해 온 힘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환 씨가 지적한 SOC 투자부분이 화두로 떠 오른 것도 사실입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한 경환 씨의 의견이 듣고 싶어 오늘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경환은 생각에 잠겼다. 투자유치를 활성화하기 위해선 SOC의 투자와 더불어 물류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다. 이후 중국의 개발 방향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경환은 왕바오밍이 필요한 부분에 대한 답은 이미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그냥 넘겨 줄 수는 없었다.

    “왕 선생께서 저를 높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물론 제 나름대로의 생각은 가지고 있습니다. 필요하시다면 제 생각을 정리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경환의 말을 듣는 왕바오밍의 눈빛이 빛났다.

    “저도 필요한 부분이 있는데 왕 선생께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답을 알고 있는 경환은 답지를 절대 공짜로 왕바오밍에게 넘겨 줄 생각은 없었다. 중국에서의 사업은 애당초 생각하지 않고 있었지만, 경환이 계획하고 있는 유연탄 사업의 밑바탕은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경환은 왕바오밍과 거래를 할 생각이었다.

    “좋습니다. 제 선에서 들어 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경환 씨의 부탁을 들어 드리겠습니다. 어떤 부탁인지 말해 주십시오.”

    “제가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엄연히 왕 선생의 부탁은 컨설팅의 일환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제가 돈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겠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제가 아직 학교에 소속되어 있다 보니, 시간적인 부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이 부분을 해결해 주실 수 있으시다면 심혈을 기울여 보겠습니다. 또 하나 중국의 유연탄 수출과 관련해서 저에게 일정부분 한국에 수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제가 만든 자료가 왕 선생을 만족시켜야 된다는 전제하에서입니다.”

    경환의 말을 들은 왕바오밍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후 천천히 경환을 바라보았다. 경환의 부탁은 자신의 집안과 자신이 가진 인맥으로 충분히 들어 줄 수 있었지만, 경환을 전적으로 확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지난 모임에서 자신을 놀라게 했던 경환의 의견을 듣기 위한 단순하게 생각한 만남이었지만, 경환은 자신이 생각하지도 않은 제안을 하고 있었다.

    “좋습니다. 우선 먼저 학교부분은 제가 손을 써 보겠습니다. 교통부에서 경환 씨에게 의뢰를 하는 형식으로 학교에 협조요청을 구해 보겠습니다. 유연탄 문제는 경환 씨의 제안서를 확인한 후에 진행을 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의뢰비는 오천 원으로 책정을 하겠습니다. 괜찮겠습니까?”

    그 당시 중국 돈 만 원은 한화 백만 원의 가치로 경환에게는 큰 액수는 아니었지만, 중국 공무원의 월급이 오백 원 정도였기에 중국인들이 느끼는 만 원은 상당히 큰 액수였다. 돈이 목적은 아니었지만, 준다는 돈을 마다할 필요는 없었기에 경환은 왕바오밍의 제안을 받아 들였다.

    “자료가 필요합니다. 천진, 대련, 청도, 상해, 심천의 수출입 물동량과 각종 경제 지수와 통계 등에 대한 자료를 빠른 시간 내에 저에게 보내 주십시오. 빠른 시간 내에 1차 제안서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다음날 경환의 집으로 많은 서류가 전달되었고, 학교는 교통부의 정식의뢰를 받은 경환의 편의를 봐 주는 것으로 일단락이 되었다. 그러나 경환은 각종 서류에 묻혀 전생의 기억을 쥐어 짜내게 되었다.

    KBR 본사의 문을 열어젖히고 급히 잭이 뛰어 들어갔다. 인포메이션의 인사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잭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사정없이 누르기 시작했다.

    “윌리엄,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어요.”

    린다의 말에도 윌리엄은 대꾸를 하지 않은 채,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2년을 넘게 준비해 온 사우디 가스화복합발전소 입찰이 아람코에 의해 무산되었다는 소식은 윌리엄을 당혹시키기에 충분했다.

    “예정가를 넘었다는 이유라고는 하지만, 통상적인 관례에서 수용되었던 범위인데, 이번 무산 선언이 쉽게 납득 할 수 없는 처사에요.”

    “잭은 아직 도착을 안했나?”

    윌리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잭이 가쁜 숨을 몰아시며 방문을 열어 젖혔다. 잭을 확인 한 윌리엄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로 향했다. 이번 입찰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윌리엄 자신은 물론이고 잭과 린다에게도 치명상으로 다가 올 수도 있는 문제였기에 세 사람은 심각한 표정들이었다.

    “잭, 아람코의 정확한 의도는 뭐라고 생각하나?”

    “아람코와 우리는 그 동안 좋은 협력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한 문제는 없다고 봅니다. 아람코 보다는 다른 쪽에서의 압력이 행사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아람코 내부의 문제였다면 아람코 내에 가지고 있는 미국지분을 이용하여, 압력을 행사할 수 는 있었지만, 왕실이라면 상황이 달랐다. 미국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왕실이긴 하지만, 미국정부도 왕실은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사우디 왕실 내부의 권력투쟁은 겉으로 들어난 부분보다는 상당히 복잡하고 치열했기에 월리엄은 이 상황을 헤쳐 나가기가 만만치 않음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피드 국왕이 나설 일은 아니라고 보는데, 압둘라 왕세제인가?”

    KBR은 현 사우디 국왕인 피드와 왕세제인 압둘라 측과 연결의 끈을 놓고 있었다. 만약 두 세력이 KBR과 등을 돌렸다면 심각해 질 수도 있는 문제였다.

    “본사로 오기 전에 두 세력의 측근들과 만남을 가졌습니다. 그쪽의 입김은 아닌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술탄 쪽이 좀 의심은 되고 있지만 아직 술탄의 세력이 압둘라 왕세제를 능가 할 정도는 아닙니다.”

    상황을 분석을 하고 있는 잭은 마음이 급했다. 2차 입찰이 한 달 후로 연기된 지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이번 입찰은 포기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윌리엄, 우선은 압둘라 왕세제 측과 더 긴밀하게 이 문제에 대해 협의를 할 생각입니다. 윌리엄은 캘리포니아스탠더드와 만남을 가지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람코의 지분을 11.3% 가지고 있는 캘리포니아스탠더드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면 이 문제를 풀 수도 있다고 잭은 생각하고 있었다.

    “윌리엄, 잭,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 봐야 될 문제가 있는데, 제임스는 이런 상황을 예측했다는 거예요.”

    린다의 말에 두 사람은 몸이 경직됨을 느꼈다. 제임스의 말을 그 당시에는 귀 담아 듣지 않았던 윌리엄이었다. 경환이 준 정보를 제대로 활용을 하지 못한 윌리엄은 땅을 치고 후회를 하고 싶었지만 엎어진 물은 다시 담을 수가 없었다.

    “제임스라는 그 친구 아직 북경에 있다고 했지?”

    “네, 북경에 나가 있는 안젤라에게 편의를 봐 주라고는 했는데 아직까지 특별한 요청은 없었다고 하네요.”

    잭은 입을 다물고 조용히 신음을 흘렸다. 제임스의 말을 듣고 자신 또한 크게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단지 상황을 분석하는 능력을 높게 보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로 입찰 내부의 정보까지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상상을 하지 못했다. 그것을 놓친 잭은 크게 후회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윌리엄, 제가 사우디로 돌아가기 전 제임스를 한번 만나 보겠습니다. 입찰 무산까지 예상을 하고 있었다면 그 결과도 제임스는 가지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린다는 잭에게 선수를 빼앗긴 것이 아쉬웠지만, 지금 상황은 잭이라도 가서 제임스를 설득할 필요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잭, 그렇게 하게. 자네가 한 조언을 내가 놓친 게 후회는 되지만, 지금이라도 자네가 가서 제임스의 의중을 파악해 보게.”

    윌리엄의 말을 듣던 린다는 제임스가 했던 말이 생각이 났는지 급히 말을 꺼냈다.

    “그런데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어요. 입찰이 무산된다면 자신에게 연락을 달라고는 했는데, 비즈니스로 거래를 하고 싶다는 말이 많이 신경이 쓰이네요.”

    “우선은 제임스의 의중을 파악해 보게. 그가 원하는 게 뭔지 자네가 판단해서 결정을 하도록 해. 제임스가 원하는 게 너무 크지 않기를 바래보자고.”

    이후에도 윌리엄의 방에서는 늦은 시간 동안 심각한 대화가 오고 가고 있었다.

    경환은 제안서를 작성하느라 밤낮없이 컴퓨터와 책상 위에 쌓인 각종 자료들 사이에서 폐인처럼 지내고 있었다. 수정은 그런 경환이 걱정이 되었는지 커피와 과일을 들고 서재로 들어왔다.

    “자기야, 좀 쉬면서 해요. 몸 상할까, 나 걱정 많이 돼요.”

    거의 한 달을 서재 안에서 두문분출하고 있던 경환은 그제야 뒤를 돌아 수정을 바라보았다.

    “자기가 걱정을 많이 했나 보네. 일 년 좀 지나면 우린 중국을 떠나게 될 거야. 빈손으로 갈 수는 없잖아. 내가 만드는 이 제안서가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 줄 초석이 될 지도 몰라. 그러니 자기가 좀 참고 기다려줘.”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는 말아요. 난 지금 생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는데, 자기는 더 높은 곳을 보는 거 같아서 어쩔 때는 불안하기도 해요.”

    경환은 그런 수정을 살며시 안아 주며 등을 토닥거렸다. 전생이었다면 지금 이 정도의 성공으로도 충분히 만족했겠지만, 지금의 경환은 아니었다. 자신의 영혼까지 저당 잡혀 있는 상황에서, 자신과 자신이 지켜야 될 사람들을 위해 더 먼 곳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생각한 시간 보다는 좀 빨리 준비가 되었군요.”

    경환은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준비한 제안서를 왕바오밍에게 전달을 해 주었다.

    “제가 중국어가 짧다 보니 영어로 작성을 했습니다. 불편하더라도 이해해 주십시오. 이 분은 제가 처음 뵙는 분이신 거 같은데…”

    왕바오밍과의 자리에는 경환이 처음 보는 인물이 한 명 동석해 있었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인물에게 경환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나누었다.

    “이 분은 대외경제무역부 부장 조리로 계시는 왕샹첸 조리십니다. SOC투자 부분은 경무부에서도 관심 있게 지켜보는 사항이라서 오늘 같이 동석을 했으니 경환 씨가 이해 바랍니다.”

    경환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대외경제무역부는 외국투자와 합작을 유치하고 주관하는 총괄부서로 90년대 해외자본 유치를 하며 막강한 파워를 가지고 있던 부서였기 때문이었다.

    “바오밍에게 말은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인사만 간단히 하고자 나왔습니다.”

    “왕 조리께서 나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앞으로 많은 지도편달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세 사람은 식사를 겸해 술잔을 돌리며 중국의 열악한 인프라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경환 씨의 제안서는 우리 부서에서도 검토를 하게 될 것입니다. 마 교수님의 부탁도 있고 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좋은 결과가 나와 경환 씨와 자주 만나기를 희망합니다.”

    왕샹첸은 다른 일정이 있는 듯 식사를 마친 후 자리를 떴지만, 경환은 이 자리에 왕샹첸이 참석한 이유를 아직도 정확히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리란 직책은 부장의 비서 역할을 수행하지만, 한국의 비서와는 다른 개념으로 차기 부장의 자리를 노릴 수 있는 실세중의 실세였기 때문에 이런 자리에 동석을 했다는 자체가 사실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하, 경환 씨의 표정을 보니 궁금한 게 많은 가 봅니다. 사실 왕 조리께서는 제 사촌 형님이십니다. 형님께서 경환 씨에 대해 궁금하신 거 같아 오늘 자리를 같이 한 것입니다. 이 제안서가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있다면 경환 씨가 부탁한 일은 쉽게 풀릴 수도 있습니다.”

    “부족함이 많은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신 점 깊이 감사드립니다. 아무쪼록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제안서를 받아 든 왕바오밍은 서둘러 경환과 헤어져 어디론가 빠르게 사라졌다. 이들과 인연을 만들 수만 있다면 원치 않았던 중국유학이 자신의 미래에 큰 일조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경환이었다. 그렇게 경환은 또 하나의 인연을 만들어 가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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