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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33화 (32/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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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33

    국경절 휴일을 처음 맞는 경환과 수정은 한바탕 소동을 벌이고 있었다. 일주일 동안 휴무를 한다는 소리에 급하게 찾은 슈퍼마켓의 진열장은 하나같이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주일 동안 상점을 열지 않는다고 하는데 큰일이에요. 우리 먹을 것도 없는데.”

    “우선 차로 근처의 슈퍼마켓이나 상점을 쫙 돌아보자. 이러다 정말 일주일 동안 굶을 수도 있겠는데.”

    중국은 그 당시 일 년에 두 번의 휴무기간이 있었다. 하나는 최대 명절인 춘절이었고 다른 하나는 10월1일부터 시작하는 국경절 휴무였다. 경환이 전생에 연수를 왔을 때만 해도 국경절 기간에 상점들은 대부분 정상근무를 하고 있었지만, 91년도인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전혀 달랐다. 모든 상점들이 닫는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에 수정을 이끌고 부리나케 달려 나갔을 때는 이미 많은 생필품들이 팔려 나가 있는 상태였고, 야채와 고기도 상태가 안 좋은 것들만 남아 있었다.

    “자기야, 우선은 여기에 있는 것들만이라도 사야겠어요.”

    수정은 남아 있는 것들 중에서 그나마 나은 것들로 싹쓸이를 한 후에 계산을 하고 있었다. 경환은 수정의 뒤에서 계산하는 광경을 지켜보던 중 이상한 점을 발견했지만 수정에게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경환의 그러 모습을 본 수정은 슬쩍 웃기만 하고선 빠르게 지갑을 정리해서 다른 상점으로 향했다. 북경의 동서남북을 뒤진 후에야 겨우 일주일 정도 버틸 수 있는 음식을 비축할 수 있게 된 두 사람은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자기야, 이리로 와서 앉아 봐.”

    수정은 경환의 부름에도 사온 것들을 정리한다며 경환의 눈치를 한참 본 후에야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아까 계산할 때 보니, 와이삐(외국인 전용화폐)를 사용하지 않고 인민폐를 쓰던데 그건 어디서 난 거야?”

    그 당시 중국은 외국인과 내국인을 철저히 분리하는 정책을 펴고 있었다. 사용하는 지폐는 물론이고 교통요금 및 공공요금까지 외국인에게는 내국인에 비해 두 배 많이 적용하고 있었다.

    “사실은 인준이 엄마가 은행에서 환전하는 거 보다 암시장에서 달러를 인민폐로 교환하면 더 받을 수 있다고 해서요…. 은행에서 바꾸면 백 불에 570원인데 암시장에서 바꾸면 천 원을 주는 바람에…. 나 잘못한 거예요?”

    그 당시 와이삐의 환율은 5.7이었지만, 암암리 달러가 필요한 암시장에선 10으로 거래가 되고 있었다. 화폐가 분리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 불합리한 제도였지만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르듯이 중국에선 중국 법을 따를 수밖에 없는 거였다.

    “자기가 알뜰해서 그런 건데 자기가 잘못했다고 그러는 소리는 아니야. 단지 자기가 걱정이 돼서 그래. 여긴 우리가 모르게 지켜보고 있는 눈들이 난 있다고 생각하거든. 그래서 가능하면 여기 사람들에게 꼬투리를 잡히고 싶지 않아. 손해 보는 기분이 들더라도 떠나기 전까지는 자기나 나나 여기 법을 준수하고 살았으면 좋겠어.”

    경환은 수정의 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살며시 웃음을 보여 주었다.

    “알았어요. 사실 나도 환전을 할 때 너무 불안 했어요. 다음부터는 은행에서 환전을 할게요. 미안해요.”

    경환은 중국생활에 스스로 적응을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에 너무 고마웠다. 자신 하나만 보고 중국에 오기란 사실 쉽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수정은 아직까지 힘든 내색 없이 자신의 옆을 지켜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띵~동~’

    예정되어 있지 않은 초인종에 경환은 급히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김창동 식구들이 서 있었다.

    “마침 계셨네요. 본사에서 식자재를 보내 왔어요. 필요할 거 같아서 가져 왔습니다.”

    김창동 식구들이 들고 온 식자재 중에서 라면이 가장 눈에 띄었다. 라면은 물론이고 김치와 김까지 포장된 박스에 들어있는 걸 확인 한 경환은 오랜만에 맛 볼 라면을 생각하며 벌써부터 입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들어오세요. 햐. 이거 다른 건 몰라도 라면하고 김치를 보니 눈물이 앞을 가랍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오랜만에 라면에 소주한잔 어떠세요? 라면을 끓여 주신다면 선물이 하나 더 있습니다만. 하하하”

    “라면에 소주 너무 좋죠. 그런데 다른 선물이라뇨?”

    김창동은 무엇인가 한 가득 들어있는 검은색 비닐봉투를 꺼내 들었다. 경환은 그 봉투를 확인한 순간 입이 쩍 벌어 질 수밖에 없었다. 봉투 안에는 한국에서 방영하고 있는 드라마와 쇼 프로가 녹화되어 있는 비디오테이프들이었다. 그 동안 중국방송만 보느라 지쳐 있던 경환은 김창동 부인과 한참 수다를 떨기 시작하는 수정을 급히 불렀다.

    “우하하, 자기야. 오늘부터 당분간 심심하지는 않겠다.”

    김창동의 선물은 다른 그 무엇보다도 경환과 수정에게 절실히 필요한 선물이었다. 그날 저녁 경환의 집에서는 라면파티가 벌어졌고 TV에서는 한국 쇼 프로가 나오기 시작했다.

    국경절 기간을 이용하여 수정과 오붓한 시간을 보낸 경환은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다음 주 있을 왕바오밍과의 상해 동행까지는 시간이 있었지만, 두 과목의 시험 겹치는 바람에 담당교수와 면담을 하고 있었다.

    “첸 교수님. 교통부의 요청을 받아 가는 출장입니다. 사정을 좀 봐주셨으면 합니다.”

    경환의 평소 수업태도가 맘에 들지 않아서 인지, 첸 교수는 시험을 보지 않으면 학점을 줄 수 없다는 말로 경환을 압박하고 있었다.

    “이 군의 사정도 알겠는데 학교란 교칙이란 게 있는 거 아닌가. 시험을 치르지 않은 학생에서 학점을 줄 수는 없는 것이네.”

    성질 같아서는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낙제라도 하는 날에는 수교 후 유학 올 후배들에게 나쁜 영향을 줄 수도 있었다. 특히 제일그룹이나 정부의 귀에 들어간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포기는 빨라야 좋다는 생각을 하는 경환이었다.

    “알겠습니다. 교수님.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시험은 정상적으로 치루겠습니다.”

    경환은 첸 교수에 항복 선언을 하고 왕바오밍에게 전화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왕 선생님, 제가 시험이 있는 걸 깜빡 잊고 약속을 정했습니다. 중요한 시험이라 빠질 수가 없네요. 괜찮으시다면 다음에 같이 갔으면 좋겠습니다.”

    ‘아, 그래요? 아쉽지만. 다음기회를 봐야겠네요. 출장 갔다 와서 연락하겠습니다. 식사라도 같이 합시다.’

    왕바오밍과의 상해 동행은 아쉽게도 무산되었지만 그와의 만남에 은근히 경환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교통부라는 곳이 이때는 중국의 경제개혁 정책을 수행하는 핵심 부서였기 때문이었다. 산업이 활성화되기 위해선 물류가 뒷받침을 해 줘야 했고 90년대 초반 중국은 각도시간의 고속화 사업과 해상물류기지 건설 등 굵직굵직한 사업이 끊이지 않았고 주관 부서가 교통부였다.

    경환은 벤치에 앉아 아쉬움을 달래고 있을 때 하이힐을 신은 여느 중국의 여성과는 사뭇 다른 옷차림의 여성이 경환의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미스터 리. 맞나요?”

    행여 자신을 찾는 사람일지는 생각하지도 못한 경환은 영어로 질문을 하는 여성을 쳐다봤다.

    “제가 이경환인데 저를 찾으신 건가요?”

    경환의 대답에 그 여성은 환하게 웃으며 경환에게 악수를 청했고 경환은 영문을 몰라 어정쩡하게 그 여성의 내민 손을 잡아 악수를 나눴다.

    “KBR의 북경대표로 나와 있는 안젤라 수라고 합니다. 린다의 요청으로 미스터 리를 정말 한참 찾았습니다.”

    경환은 안젤라를 보면서 KBR은 외모로 여직원을 뽑는 게 아닌지 의심을 했을 정도로 안젤라는 린다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였다. 안젤라는 급히 경환에게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중국인은 아닌 거 같은데 중국계이신가요? 영어가 자연스러워 보여서요.”

    “네, 맞아요. 이민3세에요. 북경에 온지는 일 년이 좀 넘었어요. 제임스라 불러도 되나요?”

    서로 이름을 부르기로 한 두 사람은 벤치에 앉아 북경생활에 대한 사소한 일에 대해서 대화를 시작했다. 첫인상이 그리 나쁜 안젤라는 아니었지만, 중국에서 플랜트 같은 험한 일을 할 여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경환은 아마도 안젤라의 중국인맥이 무시 못 할 위치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우디 입찰이 얼마 남지 않은 거로 알고 있는데 준비는 잘 되고 있나요?”

    경환에 대해 특별히 지켜보고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최대한 도움을 주라는 린다의 지시를 받은 안젤라는 린다의 정확한 뜻을 아직까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몇 번 린다에 전화를 걸어 무슨 이유인지 물어 봤지만, 린다는 정확한 대답을 피한 채 윌리엄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로 얼버무렸다.

    “그 부분은 제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어요. 전 단지 최대한 제임스의 편의를 봐 주라는 지시만 받았어요. 중국생활에 어려운 점은 없나요?”

    “없습니다. 나름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한국기업에서 제 편의를 봐 주고 있기 때문에 안젤라의 도움은 아직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제가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안젤라는 자존심이 상해 있었다. 나름 북경에서 잘 나가는 여자로 인정을 받고 있었고, 자신의 외모 또한 빠지지 않는다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눈앞의 경환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자신의 말만 끝내고서는 자리를 떠나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임스, 저도 제임스를 찾느라 오후 내내 고생을 했는데, 남자가 매너도 없이 그냥 가려는 거예요?”

    상해 일정이 틀어져 기분이 다운되어 있던 경환은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는 표정을 한 채 말없이 안젤라를 쳐다봤다.

    “제가 좋은 곳을 알고 있는데 같이 식사라도 했으면 해요. 저도 최소한 린다에게 보고할 내용은 만들어야 되니까요.”

    안젤라의 당돌한 말에 경환은 물끄러미 안젤라를 바라보다 입 꼬리를 올려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분간 KBR의 소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경환은 좋은 곳을 안내하라는 말을 하고 각자의 차를 이용해 양광대하로 향했다.

    양광대하에 도착한 경환은 안젤라와 함께 50층에 위치한 멤버십 식당에 도착을 했다. 아무나 들어 올 수 없는 곳의 멤버십을 가지고 있는 안젤라가 궁금했지만. 자신과는 별 상관이 없다는 생각에, 단독 방으로 분리된 식당에서 보이는 북경의 경치를 감상하고만 있었다. 수정과 같이 와 보고 싶었지만, 멤버십이 없는 경환으로서는 다시 올 수 없는 곳이기도 했다.

    “와인 한잔해도 되죠? 여기가 맘에 들면 언제든 저에게 전화 줘요. 그런데 제임스는 영어를 어디서 배웠나요? 미국국적이라고 해도 믿겠는데요?”

    안젤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경치를 감상하는 경환의 곁으로 다가와 와인 잔을 건네주었다.

    ‘가시나, 왜 이리 끈적거려? 수정이가 보면 또 난리 나겠네.’

    휴스턴에서 있었던 악몽이 생각난 경환은 건네받은 와인 잔을 들고 빠르게 자리에 앉았다.

    “잭과 린다는 저에게 좋은 친구이자 파트너입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지금은 북경대 졸업 후엔 휴스턴으로 가게 될 겁니다. 제가 이미 린다의 신세를 한번 졌기 때문에 북경에서 다시 린다의 신세를 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안젤라의 호의는 고맙지만,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안젤라는 경환이 휴스턴으로 가게 될 것이라는 말에 눈을 반짝거렸다. 자신도 본사에서 성공을 해 보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양계인 자신이 미국 남부기업이 KBR에서 성공을 하는 것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잭과 린다는 KBR 내에서 이미 성공을 보장 받은 인물들 이었다. 특별한 대형사고만 터지지 않는 다면 둘은 최고 경영자의 위치까지 오를 사람들인 걸 알고 있는 안젤라는 경환에 대해 급격히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잭과 린다와 막역한 사이인 경환을 잘만 이용하면 자신의 성공가도에 일조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프랑스 코스요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안젤라는 와인 한잔을 더 따랐다. 그 당시엔 음주운전이 관대한 시기였기에 경환도 부담 없이 와인 한잔을 더 추가했다. 북경생활에 대해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던 중 안젤라는 덥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블라우스 맨 위의 단추 하나를 풀었다.

    “결혼생활은 재미있나요?”

    뜬금없는 질문에 안젤라의 의도가 무엇인지 대충 이해한 경환은 나이프를 접시에 올려놓고 냅킨으로 입을 훔친 후 안젤라를 보며 웃어 주었다.

    “아주 행복합니다. 제가 4년 동안 목매달고 쫓아다니던 여자와 결혼을 했는데 당연히 재밌어야 되지 않겠어요?”

    경환은 말을 마친 후 놓았던 나이프를 들어 쓸던 고기를 다시 썰었다. 안젤라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자신의 유혹을 뿌리치는 남자들을 하나도 보지 못했기에 경환의 자신을 무시하는 듯 한 행동에 자존심마저 상해 있었다. 안젤라는 테이블 밑으로 하이힐을 벗고는 긴 다리를 뻗어 경환의 허벅지를 쓸어 내렸다. 자신의 손가락을 입으로 무는 안젤라를 경환은 웃으며 쳐다보았다.

    “안젤라, 그거 알아요? 내가 린다하고 찐하게 키스를 했던 사이라는 거.”

    경환의 말이 끝나자 안젤라는 순간 자신의 다리를 경환의 허벅지에서 급히 빼며 자세를 바로 했다. 린다의 눈 밖에 난다면 자신의 현 위치도 보장을 받을 수 없다는 걸 안젤라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행동을 술에 취한 행동이라고 경환에게 재차 사과를 한 후 급하게 식사를 마무리 했다. 경환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안젤라와 헤어져 집으로 향했다.

    ‘김수정, 기다려라. 너 오늘 죽어봐. 나 무지 급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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