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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32화 (31/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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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32

    경환은 마 교수의 제안을 받아들인 후 나름 편한 유학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영문과 교수들의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교수들과의 면담을 통해 가능한 수업은 빠지지 않는 조건으로 리포트 제출에서 해방을 맞이할 수 있었다. 물론 좋은 학점을 기대 할 수는 없었지만, 북경대학에서 낙제만 받지 않아도 경환은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경환은 집에서 혼자 있을 수정이 걱정되어 한동안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집에 일찍 들어왔지만 사실 수정은 경환보다 더 바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정은 북경의 생활에 조금씩 적응을 해 나갔고, 주위의 한국 사모님들과 어울리며 나름대로 북경생활에 즐거움을 찾아 가는 중이었다.

    “요즘 나보다 더 바쁜 거 같은데, 하늘같은 남편은 머리털 빠져가며 공부하고 있는데, 마누라 얼굴 보기가 하늘에 별 따기니.”

    경환의 투정 아닌 투정에 수정은 조금은 미안했던지 쪼르르 달려와 경환의 팔에 매달리며 애교를 부렸다.

    “자기야. 미안. 아줌마들하고 이곳저곳 다니는 게 재미있어서요. 내가 아무 것도 안하고 집에만 있으면 자기가 더 불안하잖아요. 헤헤”

    수정은 북경에 도착한 첫날의 그 불안함에 경직되었던 사실을 다 잊어버린 듯 예전의 활기찬 모습으로 서서히 돌아가고 있었다. 경환은 적응해 가는 수정이 너무 고마웠다.

    “오늘 운전면허증 바꿔야 되니까 같이 나갔다 오자.”

    수정은 뭐가 좋은지 외출준비를 서둘렀고, 경환은 택시를 타고 북경시내에 위치한 공안국 외사처로 향했다. 북경의 중심이란 말이 무색하게 공안국 외사처는 기와지붕의 옛 건물이었고 마치 선술집 같은 허름한 곳이란 인상을 주었다.

    “거류증과, 여권, 면허증.”

    군청색 제복을 입고 있는 직원이 사무적이고 퉁명스럽게 경환을 향해 말했지만, 경환은 군말 없이 준비한 서류를 제출했다. 그 당시 중국은 완장을 찬 사람이 장땡이었던 시절이었기에 한국에서와 같은 서비스를 기대한다는 거 자체가 무리였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한국면허증을 맡기고 중국면허증을 받을 수 있었다.

    “나도 면허 따고 올걸.”

    수정은 면허를 따지 못한 게 못내 아쉬운 듯 경환의 중국면허증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면허증도 받았으니 매주 주말에는 같이 드라이브 다니자.”

    경환과 수정은 그날 왕푸징 거리를 구경하면서 중국에서의 신혼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중국의 국경절이 다가옴에 따라 북경대 학생들도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일주일이상 연휴가 시작됨에 따라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은 열차표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는 모습이 곳곳에서 보이고 있었다. 경환이 속한 영문학과도 다른 과와 마찬가지로 학생들은 어딘가 모르게 어수선하고 들떠있었다. 그때 평소 수업시간에 안면이 있던, 교환학생으로 와 있는 외국인 여학생 몇 명이 경환의 앞으로 다가왔다.

    “저… 부탁이 있어서 왔어요.”

    “뭔데요? 말해 봐요.”

    평소에 안면이 있다 하더라도 대화를 주고받은 적이 없었던 경환은 여학생들이 자기를 찾는 이유를 몰라 그 여학생을 멀뚱히 쳐다 만 보고 있었다.

    “저, 야윈춘에 산다고 들었어요. 기숙사에서는 목욕하기가 자유롭지 않아서, 실례가 안 된다면 경환 집에서 목욕을 좀 해도 될까 해서요.”

    경환은 황당했다. 기숙사 환경이 열악하다는 건 전생시절부터 들어 알았지만, 친하지도 않은 남자에게 욕실을 빌려 달라고 할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여학생들은 절박해 보이는 표정으로 경환에게 사정을 하고 있었다.

    “제 아내가 있어서 나 혼자는 결정을 못해요. 아내의 의견을 물어 본 후에 내일 알려 줄게요.”

    경환의 말을 들은 수정은 흔쾌히 허락을 했고, 다음날 세 명의 여학생을 집에 데려온 경환은 벌쭘하게 여학생들이 목욕하는 집을 수정이의 감시 하에 서성거리게 되었다. 여학생 중 한 명이 프랑스 유학생이란 사실을 안 수정은 오랜만에 만나 프랑스인이 반가워서인지 금세 친해져, 그 다음부터는 정기적으로 경환의 집은 그 여학생들의 대중목욕탕으로 변하게 되었다.

    마 교수와 함께 경환은 오늘 있을 모임을 위해,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식당에 도착해 있었다. 식당의 구석진 방안에는 이미 여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마 교수와 함께 들어온 경환을 다들 궁금한 듯 쳐다보고만 있었다.

    “지난번 내가 얘기를 했던 한국에서 온 이경환 학생일세. 다들 서로 인사들 나누도록 하게.”

    경환은 먼저 간단히 인사를 했고, 모여 있던 사람들의 명함을 전해 받으며 눈인사를 나누었다. 다들 30대로 보이는 참석자들은 중국의 미래를 짊어져야 된다는 자부심에 차 있는 모습들이었다. 경환은 명함을 살피고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몇 몇은 분명 들어 본 이름들인데 기억은 도대체 떠오르지 않았다. 식사를 하기 전 잠시 차를 마시며 서로간의 대화가 이어졌다.

    “개방의 속도를 더 내야 되지 않겠습니까?”

    “속도도 중요하지만 조화도 필요합니다. 개방에 따른 지역격차가 벌써부터 나타나고 있다는 게 우려가 됩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경제 원조를 받아서야 되겠습니까? 지역격차나 부의 집중은 당분간 우리가 감수를 해야 된다고 봅니다. 지금은 우리 중국이 수모를 당하고 있지만 중국의 미래를 위해 최대한 기술력을 확보해야 될 시기입니다.”

    모인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의견을 거침없이 말하고 있었지만, 옵서버로 참석한 경환은 그들의 대화를 아무런 표정 없이 묵묵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우리 중국은 아직 언어가 통일되지 않았다는 게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언어의 통일을 위해서는 지방간의 연결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우리가 연안의 개방으로 부를 집중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도시간의 고속도로화 작업의 속도를 내야 된다고 봅니다.

    다들 각자의 의견들을 주고받고 있었고, 이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경환은 이런 젊은 인재들을 육성하고 키워나가는 중국이란 나라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참석자들은 경환을 의식하지 않은 채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고 있었고 경환 또한 그들의 대화에 참여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 경환의 모습을 마 교수는 웃음을 지으며 바라보고 있었지만, 경환은 마 교수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했다.

    “한국에서 온 이경환 군에게 내가 질문을 하나 하고 싶은데 다들 주목해 주겠나.”

    마 교수는 뜬금없이 경환을 지목했고 경환은 당황한 눈빛으로 마 교수를 향해 고개를 저었지만, 마 교수는 그런 경환의 눈빛을 무시하고 있었다. 다른 참석자들은 한국에서 온 어린 유학생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이 모임을 주관하는 마 교수의 말을 무시 할 수는 없어, 다들 마 교수와 경환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이 군은 우리 중국이 해외자본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현실적으로 어떤 조치가 필요하다고 보나?”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마 교수의 행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수교도 되지 않은 한국에서 온 유학생에 할 질문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다들 이 유학생이 무슨 대답을 할 지 일말의 기대감도 없는 눈으로 경환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환 또한 마 교수의 갑작스런 질문에 황당한 표정이었지만, 지금 모인 사람들의 시선을 받아야만, 자신이 계획하는 중국 일이 수월해 질 수도 있다는 판단을 하고,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런 모임에 참석할 수 있어서 저 개인에게 좋은 기회가 된 것 같습니다. 이 자리에서 제 의견을 낸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기는 하지만 교수님께서 질문을 주셨기 때문에 제 생각을 잠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경환은 말을 한번 끊고 참석자들을 바라보았지만, 여전히 네가 뭘 알겠느냐 라는 식의 표정들이었고 그 중에서는 조소를 띄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른 건 제가 잘은 모르겠지만, 외국기업의 입장에서 본다면 중국에 투자를 하는 것은 큰 모험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로는 첫 번째 열악한 SOC 환경입니다. 중국의 수도인 북경도 가끔씩 전기가 끊기고 있는데, 지방도시야 말해 뭐 하겠습니까. 투자유치를 논하기 전에 인프라구축에 대해 논의를 하는 게 우선이라고 봅니다. 두 번째로는 외상 투자에 관련된 법령의 중복과 복잡한 절차입니다. 법령이 중복되고 충돌하며 서로 모순되는 부분들 때문에, 브로커를 통하지 않고는 스스로 설립절차를 진행하기도 어렵습니다. 이런 문제는 나중에 관공서와 기업 간의 문제가 발생할 요지가 많고, 이는 해외기업의 불만으로 표출 될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는 중국정부에서 유도하는 합작기업 설립입니다. 이것은 기술력을 확보하고 노하우를 쌓아야 되는 부분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하이테크 산업의 유치에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최신기술에 대한 노하우를 중국에 주려는 기업은 없으니까요. 개방속도나 투자유치를 말하기 전에 내부의 이런 모순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경환은 말을 마치고 앞에 놓인 차를 단숨에 마셨다. 마 교수는 흐뭇한 표정을 짓는 반면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경환의 현실문제 지적에 놀라운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사실 경환이 지적한 문제점들은 이미 자신들도 아는 것들이지만 아직 20대 중반의, 그것도 한국에서 온 유학생의 입에서 나올 줄은 전혀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상당히 타당성이 있는 현실적인 지적이라고 보네. 우리 정부가 투자 유치에 힘을 쏟고는 있지만 이 군의 지적대로 반석을 다지는 일에 소홀 한다면 사상누각이 될 수도 있다고 나는 판단하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여기 모인 사람들이 계획하고 준비해야 된다고 생각하네. 그리고 이 군, 자네가 지적한 부분을 우리 또한 심각하게 검토하고 다각적으로 연구를 하고 있네.”

    마 교수의 말을 끝으로 음식이 나오기 시작하며 모인 사람들은 개별적으로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시작했다. 테이블의 빈 공간이 없을 정도로 접시 위로 접시가 쌓여 가는데도 요리는 그치지 않고 나오고 있었다. 경환은 이 많은 음식을 어떻게 처리를 할지가 무지 궁금했다.

    식사가 마무릴 될 즈음 경환이 귀가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자신의 맞은편에 있던 참석자 중 한 명이 다가와 악수를 신청했다.

    “이경환 씨의 의견에 듣고 많은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유학생의 신분으로 이렇게 정확히 중국의 현 문제점에 대해 지적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많이 놀랐고요.”

    “과찬이십니다. 남들이 하는 소리를 주워들은 것뿐입니다. 중국은 분명 세계경제를 좌지우지 하는 나라가 될 것임은 분명하지만, 그 과정에서 주위의 인정을 받느냐 마느냐는 전적으로 중국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경환의 대답에 상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명함을 꺼내 경환에게 건네주었다. 처음 인사 때 명함을 건네주지 않았던 인물 중의 하나였다. 명함에는 교통부 왕바오밍으로 적혀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이주 후 상해로 출장을 갑니다. 이경환 씨가 시간이 되신다면 같이 동행을 해 보고 싶은데 같이 가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왕바오밍으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은 경환은 중국 제2의 도시인 상해에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 동행을 결정했다.

    앞으로 지속될 모임에 경환이 옵서버 자격으로 참석을 하는데 모두 동의를 하였다. 경환은 이 모임으로 인해 자신의 중국인맥을 쌓아가는 좋은 기회로 만들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모임을 끝내고 경환과 마 교수는 잠시 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다.

    “교수님, 오늘은 저에게 좋은 자리가 된 거 같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아닐세. 우리 중국인이 바라보는 중국보다는 다른 시각으로 봐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네. 그걸 자네가 해 주어서 나도 오늘 이 자리가 뜻 깊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야. 앞으로도 저들과 많은 교류를 한다면 이 군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거라고 보네.”

    경환은 돌아오는 차 안에서 예정되어 있지 않았던 중국유학이 자신의 인생에 어떠한 기회로 작용할지 어떻게 자신의 미래와 접속을 시켜야 될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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