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30화 (29/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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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30

    경환이 떠난 후 윌리엄과 린다는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윌리엄, 잭에게는 전달을 했어요. 빠지는 정보를 차단하기 보다는 역 정보를 흘려 활용하는 게 지금 우리로서는 최선일 거 같아서요.”

    “린다는 제임스라는 저 친구의 말을 믿는 눈치로군.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린다의 조치는 적당하다고 생각해”

    윌리엄은 폭풍처럼 몰아치고 홀연히 떠나버린 경환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쉽게 믿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무시 할 수 없을 정도로 KBR의 내부문제에 대해서 정확히 진단을 내리고 있었다.

    “린다, 만약에 이 친구가 우리 입찰 예정 가를 가지고 KENTZ에 갔었다면 어땠을까? 흠…., 잭의 말대로 내 사람으로 만들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적으로는 만들지 말아야 될 인물인 거 같아.”

    윌리엄은 시가를 집어 입에 물었다. 시가의 연기가 윌리엄의 얼굴에 퍼져 나가고 있었다. 린다는 경환이 경고한 1차 입찰이 무산 될 수도 있다는 말을 린다는 마음속에 담아 두기로 했다.

    “저도 윌리엄의 말에 동감해요. 최소한 우리와 끈을 만들어 놔야 될 사람이에요. 제임스는 이번 일로 우리에게 빚진 것을 갚았다고 생각할 거예요. 행동이 자유로워진 만큼 제임스가 딴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북경지사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우리와 연결이 되도록 해야겠어요.

    “우선은 이번 입찰을 지켜 본 후에 그 친구를 다시 판단해야 될 거 같아. 쉽게 버릴 수 있는 정보는 아니라고 봐. 우선 린다는 그 친구가 미국에 있을 동안 최대의 편의를 봐 주도록 해. 피앙세와 같이 왔다고 하니, 섭섭하지 않을 정도로 선물도 신경 쓰고.”

    미국의 일은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다. Rice University 이사장이 윌리엄의 친구여서 윌리엄은 경환과의 저녁자리를 흔쾌히 만들어 주었다. 경환의 사과와 윌리엄의 지원사격으로, 경환의 유학은 2년 후로 미룰 수 있게 되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KBR과 화성산업간의 기술제휴 업무를 마무리 하지 못한 것이었다. 윌리엄은 이번 프로젝트의 성공여부를 확인한 후, 다시 협의하자는 말로 매듭을 지어 버렸기 때문에, 경환으로서도 입찰결과를 기다릴 수밖에는 없었다. KBR과의 일을 어느 정도 정리한 경환은 수정과의 여행에 온 힘을 쏟아, 북경에서 고생해야 될 수정의 기분을 최대한 맞춰 주기 위해 노력했다.

    일주일이라는 짧은 일정 속에서도 어느 정도의 성과를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온 경환과 수정은 결혼과 유학준비에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이경환 씨? 이영수 실장입니다.’

    “네, 말씀 하세요.”

    ‘다음 주에 두 분의 입국허가증이 나올 예정입니다. 출국은 언제로 생각하십니까?’

    이미 8월말을 넘어가고 있었고, 다음 주부터는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기 때문에 더 이상 출국을 미룰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결혼식이 끝나면 바로 출국을 하겠습니다. 토요일이 결혼식이니 월요일에 출국하는 거로 일정을 잡아 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항공편은 홍콩을 경유하는 것으로 준비를 해 드리겠습니다. 출국하시기 전 시간이 나시면 회사를 한번 방문해 주십시오.’

    이영수와의 통화를 마친 경환은 계획하고 있는 중국에서의 생활을 천천히 정리를 해 나가고 있었다. 외국인에 대한 경제적 개방이 아직 이뤄지지 않은 중국이었기 때문에 경환은 중국에서의 사업은 애당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중국은 수교와 동시에 대규모의 경제사절단까지 조직하여, 한국의 인건비 상승으로 인해 허덕이고 있는 노동집약형 중소기업을 타깃으로 투자유치에 혈안이 되었었다. 싼 인건비와 임대료, 세금우대정책에 현혹된 많은 중소기업들이물밀듯이 중국으로 진출을 했고 몇 년간은 큰 성공을 거두는 듯 보였다. 그러나 2000년을 넘기면서 중국의 태도는 돌변하여 하이테크 및 중국의 기술이 미치지 못하는 고부가가치 업종을 제외하고는 모두 중국정부에 의해 떠밀리 듯 빠져 나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총 맞지 않은 이상, 중국에서 사업은 못하지.’

    경환은 유학기간 동안 최대한 많은 인맥을 쌓으려는 계획을 짜고 있었다. 제일그룹의 유연탄을 수입하려 해도 인맥이 없이는 시도조차 해 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고민해 봐야 딱히 없는 방법이 나오는 게 아니었기에 그 문제는 현지에서 몸으로 부딪혀 가며 풀 수밖에 없었다.

    “이 팀장님, 축하드립니다. 드디어 상투를 트시는 군요.”

    “결혼하자마자 술 한 잔도 못하고 떠나신다니 아쉽습니다. 첫날밤은 아니겠지만 힘 많이 쓰십시오. 하하”

    강동원과 최석현이 하객을 맞고 있는 경환을 보며 축하를 전했다. 예상외로 몰려드는 하객들로 인해 경환은 식은땀을 흘리며 연신 인사를 하기에 바빴다. 멀리서 최승화가 부인과 소희와 함께 경환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사장님,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축의금 많이 넣어 주십시오.”

    “일 없어. 오늘은 그냥 공짜 밥 한 그릇 얻어먹으러 온 거야.”

    최승화는 경환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툴툴거렸지만, 안내 석에 가서는 슬쩍 흰 봉투 하나를 내려놓았다.

    “오빠, 축하해. 내가 좀 억울하긴 하지만 어쩌겠어. 이젠 내 남자도 아닌데.”

    소희는 경환을 보며 입술을 씰룩거렸지만, 경환은 그런 소희를 보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소희 너, 내 말 잘 들어. 딱 2년만 조신하게 대학생활 보내봐. 너한테 좋은 일 생길 테니까.”

    “치, 그때까지 나보러 수녀생활 하라는 거야?”

    소희는 별 관심이 없다는 듯 최승화의 곁으로 향했고, 경환은 찾아오는 하객과 친구들로 인해 정신이 없었다.

    두 번의 결혼을 하는 경환이지만, 전생의 결혼과는 다른 의미로 경환에게 다가왔다. 결혼식은 많은 하객들의 축복 속에 무사히 끝을 맺었고 경환과 수정은 모레 있을 출국을 준비하느라 첫날밤은 서울의 한 호텔에서 머물기로 했다. 결혼식에 지쳐서 인지 경환과 수정은 침대에 너부러졌다.

    “고생했어. 두 번 할 건 못 되는 거 같아.”

    “자기는 결혼 또 하려고 하는 거예요? 정아 말대로 초장에 고삐를 잡던지 해야지 어이가 없네요.”

    “말이 그렇다는 소리지. 그래도 법적인 첫날밤인데 이러고 있으면 안 되지 않겠어?”

    경환의 농담에 순간 발끈한 수정을 경환은 살포시 끌어안으며 수정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전생에 헤어지고 땅을 치며 자신을 후회하게 만들었던,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하면서 까지도 뇌리에 떠나지 않는 아쉬움으로 남았던, 그래서 더 지금 이 순간이 경환은 고마웠다.

    “이렇게 내 옆에 네가 있어줘서 고마워. 네가 옆에 있으면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웃으며 넘길 수 있을 거야. 사랑한다.”

    경환은 지금까지 사랑한다는 말을 해 준 적이 없었다. 50살이나 먹어서 닭살 돋는 말을 입 밖으로 낸 다는 게 쑥스러워서였지만, 지금은 너무나 수정이 사랑스러웠다. 경환은 수정의 입술에 찐한 입맞춤을 하며 침대 위로 쓰러졌다.

    북경 수도공항 입국장에는 수많은 학생들과 간간히 보이는 기자들까지 섞여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학생들 중에는 꽃다발까지 든 학생들까지 보이고 있었다. 경환과 수정은 입국장을 빠져나오며 제일그룹에서 마중 나오기로 한 직원을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순간 박수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자기야, 우리한테 박수 쳐 주는 거 같은데 이상하지 않아요?”

    수정은 공산국가인 중국에 왔다는 사실에 긴장을 하고 있어서인지 경환이의 팔을 꼭 잡은 채 경환에게 물었고, 경환은 ‘설마, 아니겠지’라고 생각을 했지만, 빨간 천으로 만들어진 플래카드를 보고 기절 하는 줄 알았다.

    ‘이경환 학우 열렬환영’

    중국의 접대문화는 화려하고 상대방의 기분을 최대로 맞춰준다고는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전혀 몰랐다. 기자들의 사진기 소리가 연신 들리고 북경대학 학생으로 보이는 여자 둘이 꽃다발을 경환과 수정에게 건네주었다. 경환과 수정은 익숙하지 않은 이 상황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경환의 원수와도 같은 마 교수가 경환의 앞으로 다가 섰다.

    “이 군, 북경에 온 걸 환영하네. 자네를 환영하기 위해 북경대 학생들이 나온 거네.”

    “교수님, 환영을 해 주셔서 감사하긴 하지만,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마 교수는 이해 한다는 듯 큰 소리로 웃고 있었지만, 경환은 마 교수로 인해 꼬여버린 계획으로 인해 썩은 미소만 날려 주고 있었다. 마 교수의 안내로 북경대 교수들, 학생대표들과 가벼운 인사를 나눈 후, 신문기자와의 간단한 인터뷰까지 끝낸 후에야 입국장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이경환 씨! 이경환 씨!”

    정신을 차릴 수 없어 인파들의 이끌림에 공항을 빠져 나가려던 경환과 수정은 뒤에서 급하게 들리는 한국말에 뒤를 돌아다보았다.

    “헉..헉.., 제일상사의 김창동 차장입니다. 오다 사고가 나는 바람에 좀 늦었습니다. 분위기를 보니 오늘은 북경대학으로 먼저 가셔야 될 거 같네요. 급한 일 먼저 보시고, 환영인사가 끝나시면 호텔로 오셔서 전화 주십시오. 짐은 제가 호텔로 가져다 놓겠습니다.”

    김창동은 호텔주소와 자신의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경환의 손에 쥐여 주고 많은 인파들 뒤로 떠밀려 나갔다. 경환과 수정은 학교 측에서 제공해 주는 차를 타고 마 교수와 함께 북경대학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차 밖으로 보는 북경의 거리는 중국의 수도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음산해 보이기까지 하는 빛바랜 회색빛 건물들뿐이었고, 도로 옆으론 우마차가 다니고 있었다. 수정은 차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불안한 눈으로 말없이 쳐다 볼 뿐이었다. 경환은 그런 수정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서울과는 많이 차이가 있네. 북경도 점차 나아 질 거네.”

    마 교수는 경환과 수정의 표정에서 두 사람의 생각을 읽었는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을 했고, 경환은 ‘왜 이런 곳에 날 초청했느냐’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뱉어내지는 않았다. 차는 북경대 정문을 지나 외국어학원에 정차했고 그 앞에서 공항에서와 같은 또 한 번의 환영인사를 받은 후에야 마 교수의 안내로 회의실에 들어 갈 수 있었다.

    “대한민국 서울에서 온 이경환입니다. 이쪽은 제 아내인 김수정 입니다.”

    경환과 수정은 모여 있는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중국어가 유창하시군요. 우리 북경대는 두 분을 환영합니다. 아무쪼록 중국과 한국 간 교류의 장을 이경환 학생으로부터 시작되기를 진심으로 희망합니다.”

    이후에도 여러 사람이 일어나 경환에 대한 환영인사를 한 마디씩 한 후에야 겨우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속마음과 달리 외형적인 인사치레를 중요시 하는 중국인들이라 이해 할 수밖에 없었지만 경환과 수정은 급격히 지쳐 가고 있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통에 경환은 듣는 둥 마는 둥 시간만 가지를 빌고 또 빌었다. 지친 경환과 수정을 위해 만찬은 다음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경환과 수정은 마 교수를 따라 회의실에서 나올 수 있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마 교수님.”

    조금은 감정이 섞인 말투였지만 마 교수는 개의치 않았다.

    “자네도 여기에서 생활을 하려면 이런 중국의 모습에도 적응을 해야 만 되네. 자네를 초청하고 자네에게 많은 일이 있었다고 들었네. 미국유학이 결정되었다는 말을 듣고 사실 초청을 취소하려고 했었네. 그걸 밀어 붙인 건 우리가 아니라 한국정부였네. 자네와 먼저 상의를 하지 못한 것은 미안하네.”

    마 교수의 말을 들은 경환은 이 썩을 정부와 제일그룹을 당장에라도 요절을 내고 싶었다.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지만 마 교수에 표현을 할 수는 없었다.

    “어찌 되었건 제가 지금 이 순간 북경에 있다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교수님 오늘은 많이 피곤합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호텔로 돌아가서 쉬고 싶습니다.”

    마 교수의 양해를 받고 경환과 수정은 학교에서 제공해 주는 차를 이용해 호텔로 돌아올 수 있었다. 경환의 연락을 받은 김창동은 이미 호텔에 도착을 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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