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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29화 (28/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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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29

    휴스턴 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경환과 수정은 일본 나리타공항에서 환승을 기다리며 면세점을 구경하고 있었다.

    “프랑스 이후로 자기하고 여행은 처음이라 많이 설레네요.”

    “그렇게 좋으면서 왜 미국은 나 혼자 가라고 한 거야?”

    수정은 뾰로통해진 얼굴로 입술을 삐죽거리고는 화장품을 이것저것 매만졌다. 수정이의 마음을 모르는 경환은 아니었다. 북경에 가더라도 충분한 생활비가 나온다고는 했지만, 아직 직업이 없는 상태에서 미국유학까지 가려면 최대한 모와 둬야 한다면서 수정은 미국행을 가지 않겠다며 버텼었다. 그러나 공항으로 린다가 마중 나올지도 모른다는 경환의 한마디에 생각을 바꿔 버렸다. 매만지던 화장품을 끝내 사지 않은 수정은 경환의 손을 잡고 서둘러 게이트로향했다.

    11시간이 넘는 긴 비행 후에 비행기는 휴스턴에 도착 할 수 있었다. 경환과 수정은 입국심사원의 까다로운 질문에 답을 한 후에야 겨우 입국 심사를 통과할 수 있었다. 경환은 입국장을 빠져 나가려는 순간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는 피켓을 발견하고는 카트를 밀었다.

    “제가 제임스 입니다. 혹시 KBR에서 나오셨나요?”

    피켓을 들고 있는 한 덩치 하는 흑인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반갑게 내 손을 잡고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미스터 리, 반갑습니다. 브래드라고 불러 주십시오. 따라오시죠.”

    브래드는 경환의 말을 듣기도 전에 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다. 미리 부탁을 하지 않은 마중이라 경환은 의아했지만, 린다의 성의를 무시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앞선 브래드를 따라 갈 수밖에 없었다. 차 유리 밖으로 보이는 휴스턴은 정돈이 잘 된 계획도시라는 느낌이 들었다. 석유와 우주항공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휴스턴을 바라보는 경환은, 자신의 꿈이 이 도시에서 펼쳐지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언젠가는 다시 이곳에 돌아올 것을 다짐하고 있었다.

    경환이 사색에 잠겨 있을 때 차는 호텔 정문에 도착을 했다.

    “브래드, 덕분에 편안하게 올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짐을 벨 보이에게 맡긴 후, 수정과 함께 체크인을 위해 프런트로 향하고 있었다.

    “제임스, 오랜만이네요. 거의 일 년 만이죠?”

    경환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생각치도 못한 린다가 요염한 자세로 경환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환은 수정이의 굳은 얼굴을 보며 눈을 찔끔 감아 버렸다.

    “린다, 오랜만입니다. 체크인을 하고 전화를 하려고 했습니다. 린다가 나와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경환은 린다와 악수를 나누면서도 수정의 따가운 눈초리에 등이 터져 버릴 거 같았다.

    “린다, 이쪽은 제 피앙세인 김수정입니다.”

    린다는 환한 얼굴로 수정과 포옹을 나누었지만, 수정은 미소만 살짝 띄울 뿐 싸늘한 눈초리로 경환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녁을 준비를 했다는 린다의 말에 경환은 서둘러 체크인을 한 후, 벨 보이의 안내에 따라 빠르게 이동을 했다. 그러나 수정은 최 과장의 말이 떠오른 듯 경환의 옆구리를 인정사정없이 꼬집었다.

    ‘윽’

    “섹시하던데, 린다라는 여자. 키스까지 했다면서? 좋았겠네. 오늘은 아주 노브라더라.”

    결혼을 약속한 이후 처음으로 듣는 반말과 함께, 경환은 수정으로부터 나오는 살기에 몸서리를 쳤다. 수정을 겨우 달래 로비로 나온 두 사람은 린다와 함께 준비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제임스, 유학이 연기된 일로 잭이나 저나 실망을 많이 했어요.”

    처음부터 유학문제를 거론하며 경환을 당혹스럽게 했지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경환은 구차하게 변명을 다시 하고 싶지는 않았다.

    “린다, 이번 미국유학이 개인적인 일로 연기 된 상황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제일 아쉽고 안타까운 사람은 바로 저라는 것은 알아 줬으면 합니다. 제가 이번 미국에 오게 된 것은 물론 정식으로 사과를 하는 것도 있지만, 제가 진 빚을 갚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오늘 드리는 말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미스터 유트와의 만남을 주선해 주십시오.”

    “알았어요. 제임스가 하는 말을 듣고 결정을 하도록 할게요.”

    세 사람은 잠시 말을 중단하고 음식이 테이블 위에 오르기를 기다렸다. 경환은 짧게 수정에게 지금까지의 일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린다는 두 사람의 모습에 살짝 질투를 느끼기도 했지만 현 상황에서는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린다, 이번 아람코에서 발주한 가스화복합발전소 입찰과 관련해서, 아람코의 예정 가는 20억 불, KBR은 23억 불에서 ± 5%로 입찰을 준비하고 있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만약 제 말이 사실이라면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봅니다. 제가 빚을 갚겠다는 게 바로 이 문제입니다.”

    이 말을 끝으로 경환은 더 이상 이 프로젝트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았다. 린다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입찰 예정 가는 몇 명의 핵심만 알 수 있는 거였기에, 경환이 쉽게 알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린다는 이후 경환에게 수차례 질문을 했지만 경환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린다와의 저녁을 무사히 마친 경환과 수정은 바뀐 시차에 잠을 이루지 못해 호텔 주변을 산책하는 거로 저녁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수정아, 아쉽더라도 좀 기다리자. 곧 다시 오게 될 거야.”

    깨끗하고 부유한 도시인 휴스턴에 수정은 이미 마음을 빼앗긴 듯, 주변경치를 살피며 아쉬움을 달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괜찮아요. 도시가 예쁘네요. 북경은 이 정도는 아니겠죠?”

    기분이 풀어진 수정은 다시 존대를 하고 있었지만, 돌변하는 수정이의 모습을 본 경환은 매 순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우리 미국에서 첫날밤인데….., 빨리 방에 들어가면 안 될까?”

    경환은 수정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팔을 잡아채고는 서둘러 호텔로 돌아갔다.

    시차로 인해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샌 두 사람은 아침 일찍 서둘러 방을 빠져 나갔다. 로비에 도착한 경환은 서둘러 컨시어지를 찾아 나사우주센터 투어를 신청했다. 어릴 적 우주에 대한 환상에 빠져 있었던 경환은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투어버스로 이동한 우주센터는 경환의 예상과는 달리 썰렁한 벌판에 건물 몇 동이 늘어서 있고 모형물과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어, 경환의 기대감을 충족시켜 주기엔 한참 모자랐다. 오후엔 수정과 약속된미술관에서 고통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경환에게는 잘 풀리지 않았던 하루였다.

    종일 흘린 땀으로 인해 옷을 갈아입기 위해 호텔로 돌아온 두 사람은 티 테이블 위에 메시지 봉투가 놓인 것을 보았다.

    ‘전화요망. 린다’

    메시지를 확인 한 경환은 서둘러 전화를 걸었고, 린다의 목소리를 확인 한 경환은 급히 린다를 찾았다.

    “린다, 죄송합니다. 관광을 하느라 지금 메시지를 봤습니다.”

    ‘그런 거 같았어요. 제가 회의를 들어가야 돼서 간단히 말할게요. 내일 10시 윌리엄과 미팅 잡았으니까, 내일 10시에 봐요.”

    린다는 자신이 할 말만 끝내고서는 급히 전화를 끊어 버렸다. KBR의 위치를 모르는 경환은 황당한 표정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호텔에서 간단히 식사를 마친 경환과 수정은 초저녁부터 잠자리에 들어 시체처럼 잠에서 허우적거렸다.

    다음날 조식을 마친 두 사람은 윌리엄과의 만남을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경환은 프런트로 향했다.

    “수고하십니다. KBR이란 회사를 혹시 아신다면 위치를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

    KBR의 주소가 적혀진 메모지를 전해 받은 프런트 여직원은 미소를 띠며 경환을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경환은 혹시 자신이 말을 잘못 한 건 아닌지 생각을 해 보았지만, 특별히 생각나는 것이 없어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손님, KBR은 호텔 정문 맞은편 건물입니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린다가 호텔을 예약을 했을 때는 KBR의 주변이란 생각을 하긴 했지만 바로 앞에 있는 호텔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경환이었다. 위치를 확인한 경환은 수정을 호텔에 남겨둔 채 서둘러 KBR로 향했다.

    경환은 일층 인포메이션에서 어제 마중을 나와준 브래드의 안내를 받아, 윌리엄의 사무실로 향할 수 있었다. 사무실에는 이미 윌리엄과 린다가 경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스터 유트,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미스터 리, KBR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자리에 앉으시죠.”

    서울에서 있었던 조인식 이후 두 번째 만남이었다. 고급스러운 슈트를 착용한 윌리엄은 50대 후반이라고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젠틀하고 젊은 보이는 인상이었다. 자리에 앉은 경환은 린다와 반갑게 눈인사를 나눴다.

    “어제 린다로부터 흥미로운 말을 들었습니다. 어떤 소스인지 말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모든 프로젝트 진행과정을 스터디해서 얻은 전생의 기억입니다 라고 말해 줄 수는 없었다. 혹여 다른 정보소스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걸 알려 줄 바보는 아무도 없었다. 윌리엄은 경환의 정보에 대해 린다로부터 보고 받고 화들짝 놀라 사우디 현지에 나가 있는 잭과 장시간의 통화를 해야만 했다.

    ‘윌리엄, 전에도 말씀 드렸듯이 제임스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정보라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번 화성과의 계약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상당히 디테일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최소한 우리의 적이 되게 하지는 말아야 됩니다.’

    윌리엄은 잭과의 통화 내용을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있었다.

    “미스터 유트, 우선 KBR의 도움에도 미국유학이 연기된 점 우선 사과드립니다. 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이번 유학이 좌절되어 가장 상심한 사람은 저라는 것을 먼저 말씀 드립니다. 전 학업보다는 사업적으로 미국유학을 계획했습니다. 제가 어제 린다를 통해서 드린 정보는 아마 제 첫 번째 컨설팅 작품이 되었을 것입니다. 미스터 유트, 제 말이 사실이라면 이 정보의 가치는 어느 정도 될까요? 천만 불 이상의 가치는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정보를 사과의 의미로 KBR에 드리겠습니다. 아울러 이 첫 비즈니스를 기반으로 2년 후 제가 이 자리에 왔을 때 KBR과 좋은 거래를 다시 시작해 보고 싶습니다. 아…, 그리고 제 정보의 소스는 말씀 드릴 수 없음을 이해 바랍니다.”

    경환의 말을 묵묵히 듣던 윌리엄은 생각에 잠겼다. 사실 잭이 스카우트 요청을 했을 때만 해도 경환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단지 잭이 자신보다는 사람을 보는 안목이 뛰어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경환에 대해 약간의 흥미를 보인 것뿐이었다. 그러나 2년 넘게 준비한 이번 프로젝트가 혹시라도 실패를 하게 된다면 윌리엄 개인도 회사 내에서의 입지가 좁아지는 결과로 나타날 수 있는 일이기에 경환의 말을 흘려들을 수는 없었다.

    “좋습니다. 미스터 리의 말을 듣고 판단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우리의 입찰 예정 가를 미스터 리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제 관심을 끌었습니다.”

    사실 경환은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 전체적인 흐름만 스터디 했기 때문에 그 과정을 가지고 내막을 유추 해 볼 수밖에는 없었다. 윌리엄을 설득해야만 2년 후 KBR의 환영을 받으며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었다. 경환은 크게 숨을 들어 쉰 후 말을 이어갔다.

    “아람코는 사우디 왕실과 밀접한 연결고리가 형성되어 있는 곳입니다. 물론 KBR도 왕실의 끈은 한 두 곳 가지고 있겠지요. 다만 KBR에 대한 정보가 지금 다른 경쟁사로 소리 소문 없이 흘러 들어가고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외부의 라인들을 다시 점검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번 입찰 예정가도 아마 KBR의 연결고리와 협의된 금액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번 낙찰은 오백만 불내에서 당락이 결정될 것이기 때문에 신중하게 처음부터 살피셔야 될 것입니다.”

    대형플랜트 프로젝트에서 오백만 불로 당락이 결정이 된다는 건 낙찰을 받은 곳이 모든 상황을 모니터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기 때문에 윌리엄은 팔짱을 낀 채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윌리엄은 경환의 말을 백 프로 믿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요새 들어 경쟁사들과 왕실인물들과의 빈번한 접촉이 신경 쓰이고 있었다.

    경환은 큰 도박을 하고 있었다. 사실 이 프로젝트는 1차 입찰이 무산되고 2차 입찰에서 오백만 불 차이로, KBR이 경쟁사를 누르고 수주를 한 프로젝트였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KBR이 경쟁사의 정보를 모니터링 하는 것이지만, 아직까지는 그 작업이 이뤄지고 있지 않는 것을 경환은 하늘에 감사를 하고 있었다.

    “상대의 입찰 예정 가는 알고 있습니까?”

    윌리엄은 혹시나 하고 경환에게 물었지만 경환은 쉽게 답을 주지 않았다.

    “미스터 유트, 죄송합니다. 그 부분까지는 말씀을 드릴 수 없습니다. 제가 미스터 유트에게 갚는 빚은 여기까지 입니다. 혹시라도 1차 입찰이 아람코에 의해 무산되면, 2차 입찰에 신경을 많이 쓰셔야 됩니다. 제 정보가 사실로 판명이 된다면, 다음 프로젝트는 비즈니스 대 비즈니스로 거래를 하고 싶습니다.”

    린다는 맘이 급했는지 경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신의 방으로 급히 뛰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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