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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28화 (27/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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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28

    중국으로 출국하는 문제는 제일그룹에 위임을 한 상태였기에 경환은 특별히 준비해야 될 것은 없었다. 단지 학점의 고난에서 벗어나고, 수월하게 유학생활을 하기 위해 당초 중문학과에서 영문학과로 전과를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별 무리 없이 진행이 되고 있었다. 경환과 수정은 미국비자를 신청하기 위해 대행업체에 급행으로 의뢰를 한 상태였기에 미국영사와의 인터뷰도 빨리 잡힐 수 있었다. 수정이가 다소 염려가 되긴 하였지만, 부모님을 재정보증인으로 채택을 하고 이번 미국 방문의 목적을 정확히 설명하였기에 무리 없이 인터뷰를 마칠 수 있었다.

    오늘은 린다에게 사실을 통보해 줄 생각이었다. 그 동안 자신의 부탁으로 진행을 해 온 미국유학을, 자기 손으로 깰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린다에게 설명할 마땅한 이유를 찾기 못하고 있었기에, 요즘 며칠 동안은 수정과의 잠자리도 하질 못하고 있었다. 전화기에선 신호음이 계속 울리고 있었다.

    “린다? 저 제임스입니다.”

    ‘제임스? 반가워요. 유학준비는 잘돼 가고 있나요?’

    “그게…, 미국유학을 2년 후로 미뤄야 될 것 같습니다. 린다에게 말을 해야 될 것 같아 전화를 드렸습니다.”

    경환은 그 동안의 과정을 가감 없이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한국의 정치를 이해 할 수 없는 린다는 경환의 말을 충분히 이해 할 수는 없었다.

    “미스터 유트나, 잭에게도 정말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에 제가 직접 찾아가 미스터 유트와 학교 측에 사과를 할 생각입니다. 린다가 미스터 유트와의 미팅을 잡아 주셨으면 합니다. 이번에 KBR에 진 빚을 비즈니스로 갚을 생각입니다.”

    ‘윌리엄의 스케줄은 봐야 알 수 있어요. 이번에 유학을 오지 못한다니 실망스럽네요. 윌리엄은 확실하지 않고, 나하고 먼저 보도록 해요. 빚이라 생각하진 않지만, 제임스가 갚겠다고 한다면, 기대는 해 볼게요.’

    일단 급한 불은 끈 상태였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KBR에 진 빚을 왜 자신이 이렇게 머리 아파가며 해결을 해야 되는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경환과 수정의 불안한 동거는 양가 부모님들의 걱정을 사고 있었다. 그 걱정은 수정의 부모님들이 더한 상태였다. 허락을 하긴 했지만, 결혼 전에 동거를 하고 있는 모습이 딸을 가진 수정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그리 썩 좋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수정 부모님의 눈에 보이지 않는 압력에 경환은 양가 부모님들이 자리를 서둘러 마련했다.

    “그 동안 격조했습니다. 사돈.”

    “죄송합니다. 제가 신경을 써야 됐었는데, 사돈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경환의 아버지와 수정의 아버지는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결혼날짜를 구체적으로 잡을 심정으로 수정 아버지가 먼저 운을 뗐다.

    “딸 가진 부모 마음이 이렇습니다. 저희 부부야, 아들이 하나 생겨 든든하긴 하지만, 주위의 눈총을 무시할 수도 없고, 해서 결혼을 좀 서둘렀으면 합니다. 사돈.”

    경환이 수정의 집에서 지내고 나서부터 주위의 수군거리는 모습이 은근히 신경이 쓰인 것은 사실이었다. 경환은 자신의 편의만 생각했던 게 못내 죄송스러웠다.

    “백번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저희도 오늘은 둘의 결혼날짜를 잡는 게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두 아버지의 의견 통일로 경환과 수정의 결혼날짜는 빠르게 잡혀갔다. 경환과 수정이 여행 겸 출장으로 미국을 다녀온 이주 후 토요일에 결혼식을 하기로 했고, 경환 어머니의 부탁을 받아들여 교회에서 식을 하기로 했다. 수정 부모님은 결혼식 날짜가 잡히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경환의 어머니는 한참을 망설이다 말을 꺼냈다.

    “저…, 저희가 형편이 그리 좋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죄송하지만, 혼수를 최소한으로 했으면 해서요. 얘들도 바로 유학을 떠나야 되고….”

    경환 어머니는 말을 얼버무렸다. 부모의 마음이야 장남의 결혼이기에 잘 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기에 부모로서 미안한 감정이 앞섰다.

    “너무 걱정 마세요. 사부인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저희도 한시름 놓을 수 있겠네요. 저희도 죄송하지만 유학을 가기 전까지 만이라도 얘들을 저희 집에 있게 해도 될까요? 수정이가 프랑스에서 귀국 한지도 얼마 안됐고, 갑자기 보내려니 너무 서운해서 그렇습니다.”

    수정 어머니는 경환의 집에선 둘의 신혼생활이 불가능 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걸 내색 하지는 않았다. 그런 마음이 고마웠던 경환 부모님은 흔쾌히 동의를 했다. 그럼 부모님들의 마음에 경환과 수정은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경환은 결혼이라는 큰 산을 넘기고 나서야, 미국여행에서 있을 KBR과의 일에 신경을 집중 시킬 수 있었다.

    화성산업을 회의실에는 경환과 이 부장과 강동원 그리고 오성건설의 황태수가 자리를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KBR과의 계약을 이경환 팀장님이 주관 했다는 말을 듣고 사실 많이 놀랐습니다. 예전에 실례를 많이 했습니다.”

    황태수는 경환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이해를 구했다.

    “아닙니다. 제가 오히려 부장님께 실례를 범했습니다. 저야말로 부장님께 죄송했었습니다.”

    경환은 미국으로 출국 전 화성산업과 오성과의 일을 마무리 하고 KBR과의 연결을 시도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서로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할 수도 있는 문제였기 때문에, 그 성공여부는 아직은 확실하지는 않았다.

    “이번 KBR의 가스복합발전소 입찰이 두 회사의 큰 이슈라고 알고 있습니다. 현실을 말씀 드리자면, 화성산업은 KBR과의 계약관계에 있지만, 아직은 특수플랜트로 진입하기에는 기술력에 문제가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은 오성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플랜트산업을 집중 육성시키고는 있지만 아직은 대후나 대현건설과는 격차가 있는 게 사실입니다. 제 말에 오류가 있다면 지적을 해 주십시오.”

    경환의 현실적인 문제 지적에 이 부장과 황태수는 입을 닫은 채 고개만 끄떡였다.

    “막말로 줘도 못 먹을 판입니다. 물론 오성 입장에서는 몇 달 전만해도 단순 철골 하청업체에 불과 했던 화성과 공동으로 작업을 한다는 게 못마땅할 수 있습니다. 화성의 입장에서도 현재처럼 단순 철 구조물만 제작을 하겠다고 한다면 일이 더 쉬워 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특수플랜트 생산은 요원해 지겠지요. 황 부장님께 여쭙고 싶습니다. KBR의 기술제휴 없이 독자적으로 생산이 가능하시겠습니까?”

    아직은 오성의 기술력으로는 가스화복합발전소의 플랜트의 자체제작은 무리였다. 오성의 기술로는 진출은 할 수 있었지만, 고부가가치의 특수제작이 필요한 플랜트는 일본이나 독일에 재 발주를 줄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오성엔지니어링을 통해 기술제휴를 빠르게 추진하고는 있지만, 최소한 10년 후에나 자체 제작이 가능 할 것을 경환은 이미 알고 있었다.

    “오성으로서도 기술제휴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화성산업도 또한 특수플랜트 제작의 노하우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이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KBR에서도 한국과의 전략적 제휴의 필요성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지금 선점하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오성과 화성 두 업체가 공생을 해서 앞으로 나가느냐, 각 자의 험한 길로 가느냐는 두 분이 결정을 하십시오. 가능하시면 제가 미국에 가기 전에 결정을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경환은 말을 마치고 두 사람을 남겨둔 채 회의실을 빠져 나왔다. 회의실 밖에선 최승화가 경환을 반갑게 맞아 주고 있었다.

    “제가 할 역할은 여기까지 일 거 같습니다. 나머지는 두 사람에게 달려 있다고 봅니다. 사장님께서도 KBR이나 오성에만 기대를 하지 마시고 여러 가지 대안에 대해 검토를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전 세계에 플랜트업체가 KBR만 있는 건 아니니까요. 직원들을 한번 믿어 보십시오.”

    “그래, 잘 알겠네. 그나저나 결혼식 날짜는 잡힌 건가?”

    “삼 주 후에 할 예정입니다. 청첩장은 미국에서 돌아온 후에 드리겠습니다. 축의금 많이 넣어 주십시오. 하하하.”

    “뭔, 축의금! 배 아파 죽겠는데, 축의금은 꿈도 꾸지 말게. 흠. 흠.”

    경환은 최승화의 농담 섞인 말에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화성산업은 여전히 활기차고 바쁘게 움직여 가고 있었다. 술 한 잔 하자는 직원들의 성화에 못 이겨 그날 저녁 다시금 술 테러를 당했고, 밤새 수정이의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수정은 경환의 어머니와 함께 동네 금은방을 찾았다.

    “좋은걸 해주고는 싶은데, 수정이 네가 이해를 해 주렴. 좋은 건 나중에 경환이한테 해 달라고 하고. 미안하구나.”

    “어머니 정말 괜찮아요. 경환 씨 하고는 이미 반지 해서 같이 끼고 있어요. 다이아는 평소에 하고 다니지도 못할 텐데요. 나중에 경환 씨 돈 많이 벌면 제가 어머니와 제 꺼 해 달라고 하면 돼요.”

    금은방에선 0.3캐럿 다이아 반지를 놓고 수정과 경환 어머니가 옥신각신 중이었다.

    “내가 맘이 안 좋아서 그래. 마음은 남들처럼 보석을 몇 세트씩 해 주고 싶다만, 이거 밖에는 해 줄 수가 없구나.”

    수정은 이런 경환 어머니의 마음을 받기로 했고, 다이아 반지 하나와 금 목걸이와 귀걸이 세트를 사는 거로 하고 금은방을 나올 수 있었다.

    “얘, 너도 오늘 시험이지? 나랑 같이 가자, 전철보다는 차를 가지고 가는 게 빠를 거 같다.”

    반지를 고르느라 필기시험에 늦을 수도 있었기에 경환 어머니는 몰고 온 차로 수정과 함께 운전면허 시험장으로 향했다. 간신히 시간에 맞출 수 있어 필기시험을 볼 수 있었던 수정은 전광판에서 자신의 점수를 확인 하느라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어머니! 저 88점이에요. 합격했어요. 호호호.”

    “필기는 누구나 다 붙는 거야. 중요한 건 실기야, 실기. 필기 붙었다고 너무 좋아 하지 말고 학원에서 알려준 거 다시 복습해봐.”

    경환의 어머니도 아직은 초보딱지를 떼지 못하고 있었지만, 말만 들어서는 경력 10년 이상 된 베테랑처럼 수정이에게 코스와 주행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하고 있었다.

    “학원에서 계속 연습했어요. 저 운동신경 은근히 좋아요, 어머니. 오늘 면허 따면 제가 운전해서 집에 가도 되죠? 헤헤.”

    “얘가, 얘가, 운전이 하루아침에 할 수 있으면 운전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니? 네 차례인가 보다. 어서 빨리 가서 줄 서고, 긴장하지 말고 학원에서 배운 대로만 하면 된다.”

    수정은 코스를 보는 줄을 찾아 급히 뛰어 갔다. 오늘 운전면허증을 품에 안을 부품 꿈을 꾸며 자신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24번 수험자님 승차 하세요.”

    수정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자신에게 배정된 차에 올랐다. 주위의 많은 시선을 의식한 듯 백미러로 자신의 얼굴을 확인한 후 핸들에 손을 올렸다.

    “안전벨트 했고, 기아 1단에 고정, 클러치 살짝 떼면서….”

    수정은 학원에서 가르쳐준 공식을 기억해 내며 T자 코스를 향해 천천히 차를 몰았다.

    “삐~~”

    “124번 수험자님 탈락이십니다. 차에서 내려 주십시오.”

    수정은 얼굴이 빨개져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린 채, 경환 어머니가 기다리는 곳으로 바삐 뛰어 갔다.

    “부창부수라더니 어째 너희들은 운전면허 떨어지는 것도 똑 같니? 경환이도 T자에서 떨어 졌었다. 쯧쯧.”

    운전면허 탈락의 악몽이 걷혀갈 즈음, 수정이의 탈락으로 인해 그날 저녁 경환과 수정은 어머니의 시달림에 고생을 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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