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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27화 (26/264)

#27

다시 사는 인생 - 27

경환은 좀 전에 받은 한 통의 전화로 인해 망연자실하고 있었다. 점심도 거른 채, 방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경환이가 걱정된 수정은 연신 방에 들락거리고 있었지만, 경환은 그저 미소만 보인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수정은 커피 한잔을 조용히 경환의 앞에 놓고는 자리에 앉았다.

“무슨 고민이 있는지 나한테 말해주면 안돼요?”

“어, 미안해. 이리로 와서 앉아 봐.”

이제 수정과는 평생을 같은 길을 가야 되는 동반자라는 생각에 경환은 현재의 상황을 수정에게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수정은 그저 묵묵히 경환의 얘기를 들어 주고만 있었다.

“내 생각이 아직 정리가 되지 못했어. 미리 말을 해 줬어야 했는데, 미안해.”

수정은 경환의 미안함에 밝게 웃어 주었다.

“난, 자길 믿어요. 나 때문에 너무 고민하지 말고 자기에게 도움이 된다면 중국도 난 괜찮아요.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인데, 별일 있겠어요?”

수정의 말에 경환은 조용히 수정의 손을 잡아 주었다. 이런 여자를 전생에 놓쳤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다시금 깨닫고 있었다.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는 이런 수정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만큼 그 당시의 중국은 모든 것이 너무나 열악한 상황이었다. 이런 걱정을 아는지 수정은 경환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 쪽으로 끌어안았다.

“너무 걱정 말아요. 평생을 사는 것도 아니고, 몇 년 머무르는 건데, 그 정도는 우리 참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중국으로 가게 되면 아이는 못 갖겠네. 자기, 내 가슴 혼자 만지려고 일부러 중국 가려는 거 아니에요?”

수정은 근심하는 경환을 위해 우스갯소리까지 해 주며 경환의 기분을 풀어 주려 애쓰고 있었다. 그런 수정의 마음이 고마웠던지 경환은 수정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옷 위로 비치는 수정의 가슴을 살짝 깨물었다.

“고마워. 네가 그렇게 말해 주니까 힘이 좀 난다. 어딜 가든지 우린 재미있게 살게 될 거야.”

그날 저녁 경환은 아버지에게 미국에 가기 전 중국에 잠시 머물게 될 수도 있음을 말했다. 중국이라는 말에 아버지는 많이 당황한 듯 보였지만, 경환의 결정에 큰 반대는 하지 않으셨다. 단지 수정이를 데리고 가도 괜찮을지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결정을 하라는 말만 전할 뿐이었다.

다음날 경환과 마주 앉은 이영수는 의기양양 한 듯 경환을 향해 웃어 보이고는 급히 김세동을 찾았다. 마주한 세 사람은 탁자 위에 놓인 커피만 마시고 있었다.

“여기 김 부장이 유연탄 수입을 총괄하는 부서장입니다.”

김세동과 경환은 서로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을 뿐 말을 섞지는 않고 있었다. 작은 키에 다부지게 보이는 김세동은 한 눈에 보아도 베테랑이란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어려운 결정을 우리 김 부장이 흔쾌히 수락을 했습니다. 이경환 씨의 요구조건이 충족된 만큼 유학을 서둘러 주셨으면 합니다. 북경에서의 생활에 지장이 없도록 나가 있는 직원들에게 최대의 편의를 제공하라고 이미 지시는 내렸습니다.”

경환은 착잡했다. 이런 식으로 한국을 떠나고 싶지는 않았지만, 상황이 자기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흘러가 버렸다. 마 교수와의 만남을 거절하지 못했던 자신을 책망하고 있었다.

“제가 말씀 드렸던 합의서 내지는 계약서를 먼저 보고 싶습니다.”

경환은 긴 침묵 후에 말을 했고, 김세동은 서류 한 장을 경환에게 건네주었다. 역시 대기업답게 깔끔한 계약서였지만, 함정은 계약서 여러 곳에 숨어 있었다.

“제공되는 주택은 어떤 곳입니까?”

“북경대학 근처로 해서 집을 정하는 게 학교생활 하는데 편리하지 않겠습니까?”

경환은 쓴 웃음을 지었다. 북경에 가 본 적이 없었다면 이영수의 말이 타당하다고 봤겠지만, 경환은 이미 북경생활을 해 본 경험이 있었다. 90년대 당시 북경대학 근처의 주택은 결혼한 외국인 부부가 살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다. 또한 그 당시 중국은 외국인의 거주 지역을 제한하고 있었고, 그 지역은 대부분 고급아파트와 호텔로 국한되어 있었다.

“실장님은 저를 범법자로 만들려고 하십니까? 지원을 해 주시겠다고 공언 하셨던 분이 중국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신다는 게 납득이 안 됩니다.”

“저…, 그….게, 경환 씨를 범법자로 만든다니요?”

이영수는 순간 당황하여 말까지 더듬거리며, 자신이 놓친 부분이 무엇인지를 머릿속으로 찾아보았지만 경환의 말을 통 이해 할 수 없었다.

“중국은 외국인의 거주를 제한하고 있습니다. 북경대학 근처에 외국인인 제가 살게 된다면, 중국의 법을 어기게 되는 것입니다. 저를 보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을 하신 겁니까?”

당황한 이영수는 경환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는 말과 함께 회의실을 급히 빠져나갔다. 북경의 한국무역대표부와 급히 전화연결을 시도한 이영수는 잠시 후 풀 죽은 모습을 한 채 회의실로 다시 들어왔다.

“저…, 제가 현지 사정에 대해 파악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경환 씨의 말이 맞더군요. 죄송했습니다. 특별하게 원하시는 곳이라도 있으시면 말해 주십시오.”

이영수는 경환이 어떻게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의아했지만 지금 상황에선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칼자루가 경환에게 넘어가 있다는 게 더 큰 문제라 생각한 이영수는 살 곳을 골라 보라는 말로 넘어 간 칼자루를 빼앗으려 했다.

“좋습니다. 실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제가 고르겠습니다. 연사의 양광대하 아파트, 혹은 중국대반점 아파트 그리고 야윈춘의 국제회원아파트 이 정도면 됩니다. 셋 중에 어디가 좋을지는 실장님이 지금 고르십시오. 전 아무 곳이나 상관없습니다.”

이영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은 어디가 어딘지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경환의 당황한 모습을 본 후, 무역대표부에 나가 있는 직원을 통해 적당한 수준의 아파트를 구해 볼 생각이었다. 경환은 속으로 이영수를 비웃고 있었다. 이영수는 또 다시 전화를 하기 위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영수가 빠져 나간 회의실엔 김세동과 경환만이 남아 있었다. 경환은 계약서를 살펴보고는 김세동을 향해 말을 건넸다.

“제가 ‘을’이 되는 군요. 뭐, 상관은 없습니다. ‘을’이던 ‘갑’이던 그런 건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이 조항을 보면, 제가 제공하는 탄을 ‘갑’의 선택에 의해 결정한다. 라고 쓰여 있는데, 확실하게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계약서 하나 못 보는 어린 애라고 생각하셨나 봅니다. 김 부장님.”

경환은 감정이 격앙되어 목소리가 높아지는 걸 긴 호흡으로 참으며 말을 이어갔다.

“문구 전체를 수정해 주십시오. ‘을’이 호주 탄의 SPEC.과 동일한 탄을 공급 시 ‘갑’은 우선적으로 수입을 한다는 문구를 원합니다.”

김세동은 경환의 얘기를 들으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현재 석탄사업부에선 이미 일본의 상사를 통해 중국과 물밑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경환이 이 일을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기에 크게 관심을 쓰고 있지는 않지만, 어딘가 모르게 찝찝함을 느끼고 있었다.

“탄의 검수작업이나 수입가격도 확인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수입 할 수 있는 업무가 아닙니다. 잘 모르시겠지만 유연탄 비즈니스는 상당히 복잡하게 움직입니다. 일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실장님께서 안 계셔서 하는 말이지만, 좀 더 현실적인 제안을 하는 게 경환씨도 좋지 않겠습니까?”

김세동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유연탄 업무는 사실 경환으로서도 생소한 비즈니스여서 쉽게 장담을 할 수 없는 아이템 인 건 분명했다. 그러나 제일그룹에 요구할 것은 유연탄 말고는 딱히 없다는 게 더 문제였다. 제일그룹의 주력은 정유 산업이었지만, 석유는 경환의 상황으로는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유연탄 말고 좋은 아이템이 있으시면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요구하는 것은 동일한 스펙과 중국의 석탄 수출기준가를 기준으로 공급을 하는 것입니다. 부장님께는 죄송하지만 제가 그리 좋은 감정을 가지고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아닙니다. 가부결정을 하십시오. 저도 마냥 기다려 줄 시간이 없습니다.”

“흠.., 흠.”

김세동도 정신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게 실수였다고 자책을 하고 있었다.

“중국 유연탄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아십니까?”

“중국의 최대 석탄생산지는 산서성입니다. 산서성의 대동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쿼터를 중국석탄공업협회에서 주관을 하고 있지만, 아직은 유명무실 하다고 봅니다. 굳이 협회를 통하지 않더라도 정치권이나 군부를 통해서도 수출이 가능 한 것으로 압니다. 이 정도면 대답이 되겠습니까?”

김세동은 할 말을 잊고 회의실 위의 천장만 바라보았다. 문이 열리고 이영수가 들어오고 있었다.

“저…, 야윈춘의 국제회원아파트면 되겠습니까?”

그 당시 북경의 외국인아파트는 월 임대료가 상당히 비싼 편이었다. 외국인은 많지만 외국인이 거주가 가능한 아파트는 한정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교 후 개인사업을 위해 북경에 들어온 많은 한국인들이 비싼 외국인아파트에 거주하지 못하고 중국 로컬아파트에 거주하다 공안에게 체포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2000년을 들어서면서 이 제한조치는 풀렸지만 불합리한 조치인 것은 분명했다.

“그 중에서 가장 저렴한 아파트네요. 제가 드릴 말씀은 다 드렸습니다. 제 요구를 수용하시겠습니까? 거절하시겠습니까?”

경환은 씁쓸한 표정으로 제일그룹을 빠져 나와 공중전화를 찾았다. 수정이를 부른 경환은 달빛한스푼에 먼저 도착을 해 있었다. 수정이가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이후 처음으로 찾은 곳이었지만 낯설지는 않았다. 수정이를 기다리며 경환은 먼저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내가 결정을 잘 한 것일까?’

좀 전에 있은 제일그룹과의 만남은 경환의 요구가 받아들인 계약서로 작성을 완료했다. 결정을 하긴 했지만, 아직은 많은 후회가 남아 있는 상태였기에 경환은 술잔을 들어 뻑뻑한 목을 축였다. 그래도 전생의 암울했던 시간 보다는 낫다고 자위를 해 보려고 하다가도, 회귀 후 처음으로 꺾인 자존심은 쉽게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자기, 빨리 왔네요. 여기 오랜만에 오니 좋다.”

경환은 자리에 앉은 수정의 술잔에 술을 한잔 따랐다.

“미안, 같이 자주 나와야 되는데, 내가 좀 무심했다.”

“치, 잡아 놓은 물고기라고 소홀하게 대하면, 어항 깨고 탈출 할 수도 있으니까 나한테 잘해요!”

오늘 있었던 좋지 못한 기억들이 수정이의 이 한마디 농담으로 인해 잊혀 가고 있었다.

“내가 제일 무서운 사람이 수정이 너야. 내가 벌벌 떠는 거 안 보여?”

“오늘 나간 일은 잘 됐어요?”

수정도 못내 궁금했던지 비워진 경환의 술잔에 술을 따라 주고는 경환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미안, 중국을 먼저 가기로 했어. 길면 2년이니까, 그때까지만 참아 보자.”

수정은 밝은 미소를 경환에게 보내 주었다. 아직까지는 학교에서 이뤄지는 반공교육으로 인해 공산국가에 대한 이미지는 최악의 상태인 시기였다. 그렇기에 경환은 수정의 불안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래요. 결정을 했으면 후회하지 말아요. 나도 잘 할 수 있으니까 너무 내 걱정하지 말고요.”

그런 수정의 마음이 고마운 경환이었다. 수정이와 몇 년 후 태어날 딸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빨리 털어 버려야 했다.

“오, 우리 마누라 이런 면도 있었네. 그러니 내가 4년을 목매고 쫓아다녔지. 역시 난 자기 없으면 안 돼.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음…, 돈을 좀 써야 되는데…, 한 사백 만 꺼내 주면 안 될까?”

경환은 손 크게 통장과 경제권을 수정에게 모두 넘겨주었다. 그런데 그게 실수였다. 수정도 여자인지라 한 번 들어간 돈을 빼내는 건, 과거로 회귀하는 거 보다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요즘 경환의 생활은 화성산업 입사 초기와 마찬가지로 하루 이천 원으로 버티고 있었다. 경환의 말에 수정은 아껴 쓰라며 주머니에서 백 원짜리 동전 네 개를 건네주며 인상을 썼다.

“그렇게 큰돈을 어디에 쓰려는 거예요!”

통장을 넘긴 걸 다시 한 번 후회하며 경환은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수정에게 애걸하다시피 통 사정을 했다.

“결혼 전에 신혼여행을 먼저 가려고 그러지.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같이 미국에 다녀오자. 내가 가서 풀어야 될 일이 있어.”

비상금이 필요하다는 걸 절실히 느낀 경환은, 수정이 몰래 비상금을 만들기 시작했지만, 그리 오래 가지 못하고 들키기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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