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26화 (25/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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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 - 26

다시 제일그룹을 찾은 경환은 지난번과는 달리 반갑게 자신을 맞아 주는 이영수와 마주 하고 있었다.

“제가 저번엔 실례가 많았습니다. 이경환 씨가 대학생이라고만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렇게 능력이 있는 인재에게 홀대를 해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영수는 부하직원들을 통해 얻은 경환의 정보를 보고 받았었다. 규모는 작지만 화성산업이라는 회사의 팀장을 하면서 미국기업과의 계약을 성공시키고, 그 미국기업의 지원으로 유학을 가게 된 사실을 알고는 적잖게 놀랐었다.

“과찬이십니다. 아직은 대학생일 뿐입니다. 오히려 저는 실장님이 더 대단하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조 의원님과는 어떤 사이이신가요?”

경환은 탐색전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 직접적으로 조 의원을 거론해 버렸다. 이영수는 경환의 질문에 놀라긴 했지만 관록이 있어서 인지 잘 빠져 나갔다.

“기업에 있다 보면 한 다리 건너 다들 연결이 되더군요. 그렇다고 오해 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이번 유학 건에 대해 저희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닙니다. 저희는 단지 경환 씨 편의에 대한 지원을 담당할 뿐입니다.”

경환은 이미 이 실장을 만나기 전부터 짜증이 난 상태였기에, 이영수의 뜬구름 잡는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기업과 정치는 분리가 될 수 없는 공생의 관계이니까요. 실장님께서는 정부나 기업을 위해 가족을 희생시킨 적이 있으신가요? 지금 제 경우가 이 상황인 것 같아 조언을 구하고자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영수는 경환이 당돌하다고 생각했다. 그룹 내 수많은 직원들도 자신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드는 사람은 없었지만, 자신의 앞에 있는 학생은 자신도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해 대고 있었다. 더구나 국가가 아닌 정부로 국한시켜 버렸기에 오히려 더 할 말이 없어진 이영수였다.

“경환 씨를 희생해 달라고 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중국이란 곳에서도 기회는 얼마든지 잡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 기회를 제일그룹이 제공해 줄 수도 있고요.”

경환의 도발에도 이영수는 특유의 침착함을 유지하였다. 그런 모습에 경환은 회장 비서실장을 고스톱 쳐서 딴 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좋습니다. 그 기회가 어떤 것인지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중국행을 결정했다고 생각하진 말아 주십시오. 전 중국행을 거절할 명분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참고로 제일그룹에 특채로 입사 시키겠다는 말씀을 하지 말아 주십시오. 제일그룹에서 제 꿈을 펼치고 싶진 않습니다.”

이영수도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지만, 회장의 무조건 중국으로 보내라는 지시 때문에 경환에 향한 분노를 억지로 억누르고 있는 중이었다. 쉽게 생각한 이번 일로 인해 회장의 눈 밖에 날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떤 답변이 이경환 씨가 원하는 기회인지, 제가 판단을 할 수 없을 거 같네요. 이경환 씨가 원하는 것을 말해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답이 나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 경환은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후 천천히 잔을 내려놓았다.

“학비, 주택, 차량은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외에 과장급 주재원의 체재비와 중국과 외교관계 수립 후 제일그룹 추진 예정인 중국 비즈니스 중에서 아이템 하나를 저에게 주십시오. 이 조건을 수락하신다면, 저도 긍정적으로 중국행을 고려하겠습니다.”

이영수는 황당한 표정으로 경환을 말없이 쳐다 만 보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경환이 비즈니스 달라고 할 줄은 전혀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20대 중반 밖에 안 되는 젊은 놈이 그룹의 아이템을 달라고 하니 이 실장은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화성산업이란 듣지도 못한 회사에서 실적을 올렸다고는 하나, 그건 운이 따른 것이라고 치부를 했었던 이영수였다. 회장의 지시만 없었다면 가서 공부나 하라고 호통을 쳐서 내치고 싶었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그럴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허허, 이경환 씨가 우리 제일그룹을 너무 쉽게 생각하셨나 봅니다. 좋습니다. 달라고 하신 아이템이 어떤 것인가요?”

경환은 어제 저녁 수정과의 뜨거운 밤을 보내기 전 제일그룹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딱히 자신과 연결된 적이 없었던 제일그룹이라, 고민을 하던 중 건설과 물산이 합병을 한 후 물산 쪽 직원들이 제일그룹과 경쟁했던 아이템이 떠올랐다. 이 아이템만큼은 제일그룹이 국내에서 가장 큰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영수는 뭘 얼마큼 대기업 업무에 알고 있는지 말해 보라는 듯이 경환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리 회장의 지시가 있었더라도 이번만큼은 자신도 참을 수 없다고 스스로 다짐을 하고 있었다. 회장에게 질책을 받게 되겠지만, 그건 나중의 문제였다.

“현재 제일그룹에서는 다량의 유연탄을 국내 발전소에 공급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중 많은 부분을 호주에서 수입을 하고 있지만, 알게 모르게 중국에서도 일부 탄이 들어오고 있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만약 중국과 수교가 된다면, 중국과의 유연탄 거래는 본격적으로 진행이 될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유연탄 수입 업무에 대한 커미셔너 역할을 해 보겠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물론 가격경쟁력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조건이 붙겠지만, 그건 국제광물표준가격과 중국 수출가를 기준으로 하면 된다고 봅니다. 이 조건을 수락해 주신다면 저도 긍정적인 답변을 드릴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이영수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어디에서 들었는지 모르지만 경환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자신이 대답해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상황이 이영수에 있어서는 공을 다른 곳으로 보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실무부서에서 반대를 하고 회장이 반대를 한다면 자신도 면피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제가 확답을 드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실무부서와 협의를 한 후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려는 이영수에게 경환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만약 수락을 하신다면 모든 내용을 문서화 하겠습니다. 입으로 하는 거 보다는 도장 찍힌 종이가 더 효력이 있으니까요.”

이 말을 마치고 경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환은 자신의 제안을 제일그룹에서 쉽게 수락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만약 수락을 하게 되더라도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중국석탄공업협회와 끈이 닿아야 되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건 자신을 골탕 먹인 마 교수의 멱살을 잡아서라도 풀게 만들면 되었기 때문이었다.

‘머리 좀 아파 봐라. 고마해라, 나도 호구 많이 묵었다 아이가.’

경환은 수정 부모님의 묵인아래 수정과 동거 아닌 동거를 하고 있었다. 경환은 막내와 방을 같이 쓰는 관계로 수정과 같이 지내기가 불가능 했기에, 부모님을 설득 할 수밖에 없었다. 낮에는 수정과 함께 자신의 집에서 보내고, 저녁엔 수정의 집으로 가는 피곤한 나날이었지만, 두 사람은 같이 밤을 보낼 수 있어, 그 정도의 불편함은 충분히 감수 하고 있었다.

“수정아, 상의할 게 있는데...”

“뭔데요?”

팔베개를 하고 있는 수정을 경환은 살짝 끌어안으며 말했다.

“난 결혼하고 나서 20대는 너와 둘이서 보내고 싶어. 어차피 아이도 생각을 해야 되긴 하지만, 오 년 정도는 둘이서만 지내면 어떨까?”

그 동안 이 문제로 고민을 해 왔지만 수정이가 혹시라도 빨리 아이를 갖기 원한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 볼 생각이었다. 자식이 꼭 한 명일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처음은 둘이 같이 지내고 싶긴 하지만, 그래도 나이 들기 전에는 아이를 갖고 싶은데.”

“오 년 후에도 우리 팔팔 하거든. 아이 생기면 이 예쁜 가슴도 아이하고 나눠야 되잖아. 그게 견딜 수 없이 싫어서 그래. 오 년 동안 나만 만지고 싶어.”

경환은 다른 손을 들어 수정의 가슴을 급히 찾아 헤맸다. 이 문제는 다음에 다시 얘기를 꺼내야 될 것 같다고 생각한 경환은, 급히 수정의 입술을 찾아 자신의 입술로 덮쳐 갔다.

제일그룹 석탄사업부 부장인 김세동은 황당한 듯 이 실장을 쳐다보았다.

“실장님, 석탄사업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지금 말씀 하신 거 농담이시죠?”

“나도 자네에게 농담한 거라고 생각하고 싶네. 자네보다 내가 더 죽을 맛이야. 담배나 하나 줘봐.”

이영수는 김세동에게 담배를 건네받아 입에 물고는 깊게 한숨을 토해냈다. 경환의 조건을 회장에게 보고를 했지만, 어린애가 무슨 석탄사업을 할 수 있겠냐며 하라는 대로 먼저 해 주라는 지시를 받은 터라 죽을 맛이었다.

“김 부장이 머리 좀 써봐. 그 놈이 문서로 써 달라고 하는데, 어린놈이 아주 맹랑해.”

“흠…”

김세동은 자신에게 왜 이런 불똥이 떨어졌는지 도대체 이해를 못하고 있었다. 그룹회장까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에 머리가 지끈거리기 두통이 찾아오고 있었다.

“실장님, 어차피 해 줘야 될 거라면 해 주시죠. 계약 조건을 충당시키지 못하면 하고 싶어도 못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영수는 김세동의 말에 급히 담배를 끄고 자세히 설명을 해 보라고 독촉을 해 대기 시작했다.

“중국도 석탄은 국가에서 관리하는 수출품목입니다. 당연히 쿼터제로 움직입니다. 어린놈이 그 복잡한 룰을 이해 할 수 없을 겁니다. 설사 이해한다 하더라도, 중국의 비즈니스는 블랙머니가 요소요소에 뿌려져야 됩니다. 절대 불가능 한 일입니다. 그러니, 그 놈을 살짝 충족 시켜주면서 우리 조건을 계약서에 삽입한다면 별 문제가 없을 거 같은데, 실장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김세동의 말에 이영수는 꽉 막힌 안개가 개는 듯 한 쾌감을 맛보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그 놈 경력이 좀 수상해. KBR이라는 미국회사와 계약을 성사시킨 게 그 놈이더라고. 미국유학과 특채를 보장까지 하면서 그 놈을 미국으로 데리고 갈 정도면 뭔가가 있지 않나 싶기도 해. 조사를 해 봤더니 오성에서도 목을 매달고 있는 업체더라고.”

이영수는 일말의 불안감에 다시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김세동의 말에 신뢰를 하긴 하지만,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싶은 것이 이영수의 마음이었다.

“실장님, 뭐 어떻습니까? 천분의 일 아니 만분의 일의 확률이겠지만, 행여나 그 친구가 우리 조건을 만족시킨다면, 저희가 손해 볼 이유는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럴 리 없겠지만 불안해 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김세동의 말이 맞는 말이었다. 단지 어린놈이 괘씸하고 맹랑하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지, 혹시라도 그 놈이 제대로 커미셔너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면, 그룹의 이익에 보탬이 되는 일이기에 자신이 왜 반대만 해 왔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좋아. 그럼 김 부장이 그 놈하고 만들 서류 좀 만들어 봐. 내 이번 일이 잘되면 자네의 공으로 회장님께 보고를 드리겠네.”

“알겠습니다. 너무 걱정 하지 마십시오. 저도 그 맹랑한 친구를 한번 보고 싶군요. 다른 조건들은 그냥 놔둘까요?”

“어차피 다른 건 해 주려고 한 거니까, 나머지는 다른 조건 달지 말고 수락하는 거로 하자고.”

김세동으로 인해서 복잡했던 상황이 의외로 손쉽게 정리를 할 수 있었다. 이젠 자신을 힘들게 했던 그 놈의 당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거 같아 앓던 이가 빠져 나가는 시원함을 맛보고 있었다. 이영수는 제반 서류문제를 김세동에게 위임하고 급히 회장실로 뛰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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