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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25화 (24/264)

#25

다시 사는 인생 - 25

경환은 오랜만에 수정과 함께 화성산업을 찾았다. 직원들로부터 몇 번 연락을 받긴 했지만, 차일피일 시간을 미루다 불 같이 화를 내는 최 사장의 성화에 못 이겨 결혼인사도 드릴 겸 오늘에야 시간을 내서 찾아 갈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사무실은 여느 때와 같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인원을 보강했는지 모르는 얼굴들이 많이 보이고 있었다.

“팀장님, 좀 자주 얼굴 좀 보이시지 너무 하신 거 아니세요?”

경환을 발견한 최석현이 한 걸음에 달려오며 섭섭한 마음을 전했다. 최석현의 말에 모든 직원들이 일어나 경환과 수정을 반겼다.

“바쁘신데 자주 찾아오는 게 실례죠. 사장님께 먼저 인사를 드리고 나오겠습니다.”

최승화는 경환을 반갑게 맞아 주었지만 옆에 서 있는 아가씨가 못내 궁금했다.

“저와 결혼할 여자입니다. 청첩장이 나오면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수정의 인사를 받은 최승화는 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몇 달 전 소희로부터 말은 듣긴 했지만, 실제 경환이 수정과 함께 나타나자 최승화는 마지막 남은 희망이 사라진 듯 허탈함을 느꼈다. 자신이 보기엔 소희가 이 아가씨에 비해 빠지는 부분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요즘 어떠세요? 린다 말로는 무리 없이 진행이 되고 있다고 하던데, 다른 문제는 없으신가요?”

경환의 말에 최승화는 고개를 흔들어 잡생각을 떨쳐 버리고 있었다.

“흠…, 흠, 사우디 납품은 예정대로 잘 진행이 되고 있네. 근데 복잡한 일이 하나 있어 머리가 좀 아프긴 하다네.”

경환은 자신이 퇴사 전 놓친 부분이 있는지 생각해 보았지만 특별한 문제는 없었기에 최승화에게 자세한 내용을 말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KBR에서 가스복합발전소 수주를 진행하고 있는 건 자네도 알거라 보네. KBR에서 플랜트 제작원가를 우리에게 부탁을 했는데, 특수화로와 튜브가 우리 능력으로는 아직 생산이 힘들지 않나. 일반 철골이야 문제가 없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서 우리도 특수플랜트 쪽으로 진출을 해 보고 싶은데, 그게 만만치가 않아. 이 부장과 강 과장이 오성과 협의는 하고 있지만, 입장차이가 있다 보니 진행이 잘 안 되고 있네.”

경환은 대략 상황을 파악 할 수 있었다. 사실 특수화로의 경우엔 오성도 아직은 생산에 무리가 있었다. KBR을 통한 기술이전이나 이미 기술을 가지고 있는 일본 업체와의 합작이 아니고서는 당장은 어려웠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제 개인적인 급한 일을 해결해 놓고나 서, 도움을 드릴 수 있는지 연구를 해 보겠습니다. 사장님 말씀대로 이번 기회가 화성이 특수플랜트 제작을 시도해 볼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경환의 말에 최승화는 굳었던 인상을 풀고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최승화의 강요와 협박에 경환과 수정은 화성산업의 회식자리에 참석 할 수밖에 없었다.

“자, 잔들 들으시고. 신입들은 잘 모르겠지만, 이 분이 우리가 누누이 말하는 화성산업의 레전드 이경환 팀장님이시다. 앞으로 언제 어디서든 팀장님을 뵙게 되면 깍듯이 대하는 거 잊지 말고. 참고로 지금 우리가 마시는 소맥의 제조자이시기도 하다. 원샷!”

최석현의 장황한 설명에 경환은 얼굴이 벌개졌지만. 어떻게 교육을 시켰는지는 몰라도 신입사원들은 동경의 눈으로 경환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경환이 받은 인센티브가 생각이 나서겠지만. 술잔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좌. 우로 돌기 시작했다.

“수정 씨라고 하셨죠? 팀장님 하고 결혼하시는 거 진짜 땡 잡은 겁니다. 능력 있지, 키 크지, 뭐. 인물은 좀 떨어지지만 나름 봐 줄만은 하지 않습니까? 잘 사십시오. 제가요. 팀장님께 하도 많이 깨져서 어쩔 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납니다. 하하하”

수정에게 술을 권하던 강동원의 말에 수정도 기분 나쁜 표정은 아니었다. 수정은 경환이 이렇게 인정받으면서 일을 하고 있었는지 오늘에서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럼요. 수정 씨 정말 결혼 잘 하시는 거예요. 사장님께서 사위 삼으려고 얼마나 노력하셨는데요. 그리고 KBR의 섹시한 여자 팀장이 팀장님한테 키스까지 할 정도였다니까요. 하하하.”

입을 막을 사이도 없이 눈치 없는 최진호는 수정이 앞에서 경환의 과거에 대해 폭로를 했고, 경환은 사색이 되어 수정에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지만, 수정의 얼굴은 점점 굳어져 갔다. 그날 경환의 허벅지는 수정이의 꼬집힘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 동안 경환에게 당한 일에 대한 복수를 제대로 할 수 있었던 최진호는 홀로 화장실에서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미국비자를 신청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던 경환은 수정 아버지의 호출을 받고 수정과 함께 서초동으로 향하고 있었다. 결혼도 하기 전에 수정이 너무 자신의 집안일에만 매달리게 한 건 아닌지 은근 신경이 쓰였다.

“아버님, 저희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자주 찾아뵈어야 되는데 유학핑계로 그러질 못했습니다.”

“괜찮아. 그리고 자네 오늘 나하고 술 한 잔 하세. 집에선 술 맛이 안 나니 밖으로 나가세.”

평소 집에서 약주를 하는 걸 좋아하는 수정 아버지가 밖으로 나가자는 말에 경환은 수정을 향해 고개를 갸우뚱거린 후 얼른 뒤를 따라 나섰다. 집 앞 지하에 위치한 조그마한 카페엔 손님 하나 없이 한적했다. 경환은 주문한 양주가 나오자 급히 잔에 술을 따랐다.

“자네, 몇 일전 중국유학 제안을 받은 거로 아네만. 어떻게 할 생각인가?”

경환은 그제야 수정이 아버지가 자신을 따로 부른 것을 이해 할 수 있었다. 아직은 공산국가라는 낯선 곳에 딸을 보내고 싶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한 경환은 빈 잔에 급히 술을 채웠다.

“아버님, 그런 제안을 받은 건 사실입니다만, 이미 거절을 했습니다. 너무 걱정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흠…..,”

경환의 대답에 수정 아버지는 크게 한 숨을 내 쉬고서도 한참을 말이 없었다. 이런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은 경환은 급히 다시 물었다.

“아버님,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맘에 안 드시는 부분이 있으시면 저희가 고쳐 나가겠습니다.”

그 동안 유학을 준비 하면서, 수정 아버지는 제일 많은 격려와 조언을 해 주었다. 이런 수정 아버지의 모습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경환이었다.

“내 친구 중에 조병연이라고 있네. 자네도 정치에 관심이 있다면 들어 본 사람일거야. 그 친구가 어제 나에게 부탁을 했네. 자네가 중국으로 유학을 가게 설득을 해 달라고 하더군. 자네를 보내 한중간 가교역할을 맡기고 싶다고 하던데. 내 답은 주지 않았지만, 자네의 의견이 듣고 싶어 오늘 부른 거야. 조병연이란 친구가 대통령의 측근이란 건 자네도 들어 알겠지만, 군인 출신들은 명령을 받으면 무조건 수행을 해야 된다고 하더군.”

수정 아버지의 말을 들은 경환은 제일그룹의 집요함에 치를 떨고 있었다. 자신의 명확한 거절의사를 받고도, 이런 식으로 사람을 뒤통수 칠 지는 정말 몰랐다.

“아버님,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중국도 기회의 땅이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제 개인적인 기회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수정이를 고생시키고 싶지는 않습니다. 중국을 유학지로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부분으로 미국으로 결정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 미국유학을 준비하면서 미국기업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 문제도 저에겐 중국유학을 꺼리게 하는 부분입니다.”

경환은 수정 아버지가 따라주는 술을 얼른 받았다. 수정 아버지 자신도 막내딸이 중국으로 가기는 바라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도 이 문제에 대해서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사실 고민이 되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한국사회에서 권력자의 눈 밖에 난다는 것은 크게 신경 쓰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야 괜찮지만 아직 젊은 자식들에게까지 피해가 가는 건 견딜 수가 없었다. 경환은 수정 아버지의 얼굴에서 많은 고민이 스쳐 지나가고 있다는 것이 보였다.

“아버님, 제가 빠른 시간 내에 제일그룹과 다시 한 번 만나 보겠습니다. 그런 다음에 진지하게 아버님께 상의를 드리겠습니다. 염려하시는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어리다고만 생각한 경환이의 모습이 오늘은 자신보다 크게만 느껴지고 있었다. 이런 수정 아버지의 마음 아는지 모르는지, 경환은 제일그룹의 이 실장을 씹고 있었다.

‘날 두 번이나 호구로 봤다 이건데, 썩을, 기분 더럽네.’

집에서 자고 가라는 수정 아버지의 말에, 기대감에 부풀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수정 아버지를 모시고 들어 왔지만, 경환의 기대는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수정이 큰언니가 쓰던 방이니, 오늘은 거기서 자면 될 거야.”

취기가 오른 수정 아버지는 그 한마디만을 남기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경환은 잠을 이룰 수 없어 책상에 앉아 담배를 한대 물었다. 퍼지는 담배연기처럼 자신의 미래도 오리무중의 짙은 안개 속으로 빠져 버린 느낌이었다. 담배를 비벼 끄고 머리를 의자 뒤로 깊게 젖힌 경환의 입에선, 깊은 한숨이 터지고 있었다. 학업을 위해 떠나려던 유학이 아니었다. 미국에 간다면 학업보단 KBR을 발판으로 컨설팅 비즈니스를 계획하고 있었다. 물론 대부분이 KBR을 위한 컨설팅 업무가 되겠지만, 앞으로 있을 대형 플랜트 프로젝트의 진행과정과 결과가 경환이 머릿속에 있는 만큼 경환으로서는 땅 짚고 헤엄치기 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을 기반으로 자신의 꿈을 펼쳐 나갈 생각이었던 경환은 뜻하지도 않은 중국유학 건으로 인해 머리가 복잡해지고 있었다.

‘내가 총 맞지 않은 이상, 이 나이에 애들하고 공부하게 생겼냐고.’

혹시라도 중국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면 학업성적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1호 한국유학생이란 타이틀 속에서 학점의 부담감에 허덕일 게 불 보듯 뻔히 보였다. 경환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강한 부정을 표시했지만, 수정 아버지의 근심 어린 표정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수정아, 자니?”

여러 가지 복잡한 일들로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경환은 수정의 방문을 조용히 두드렸다.

“자기? 안자요.”

“그럼 나와서 술 한 잔 같이 할래?”

수정은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왔다. 다행히 언니 둘이 같이 여행을 갔었기에 둘은 식탁에서 맥주 한잔을 할 수 있었다.

“아빠가 왜 자기를 불렀는데요?”

경환은 아까 마신 술이 모자란 듯 두 번째 맥주 캔을 따고 있었다.

“유학 가는 문제 때문에 걱정되시는 게 많으셨던 모양이야.”

수정은 별일 아니라고 생각한 듯 과도를 집어 들고 사과를 깎았다. 그런 수정의 모습을 경환은 흐뭇하게 바라보며, 프랑스 이후로 참아왔던 야릇한 생각에 수정을 물끄러미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런 경환의 마음을 알았는지, 수정은 목덜미가 빨개지는 걸 느꼈다.

“안 돼요. 엄마, 아빠 다 계셔서.”

경환은 머리를 긁적이며 깎아 놓은 사과를 집어 들어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너희들 안자고 맥주 마시니?”

도둑질 하다 들킨 도둑처럼 경환은 마시던 맥주 캔을 떨어트리며 급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어머님 나오셨어요? 같이 맥주 한잔 하시죠?”

수정의 어머니는 뭐가 좋으신지 둘을 바라보며 웃으시고는 안방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난 저녁에 술 안 마신다. 그리고 아버님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오늘부터 수정이 방에서 같이 자.”

천상의 목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경환은 식탁을 정리하지도 않은 채, 급히 수정의 손을 잡고는 순식간에 수정의 방으로 들어갔다. 소리라도 새어 나오지 않을까, 두 사람은 밤새 힘들고 뜨거운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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