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24화 (23/264)

#24

다시 사는 인생 - 24

대학총장실엔 심 교수와 이혁수 총장이 마주 앉아 있었다.

“흠…, 좋은 기회 일 수도 있을 텐데, 그 학생이 거절을 했다니 아쉽군요.”

“사실 이 군은 학과에서 특출 난 학생은 아닙니다. 학과 성적도 그리 좋은 편도 아니고요. 이왕지사 이럴 바에는, 좀 더 실력 있는 학생을 추천하는 게 좋을 거 같아서, 몇 명의 이력서를 보내 드린 겁니다.”

경환이 중국유학을 거절하자, 심 교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을 따르는 조교와 대학원생 중에서 몇 명을 골라, 제일그룹을 통해 중국무역대표부에 전달을 한 상태였다.

“그런데 북경대학에서 다른 학생들에 대해선 거절을 했다고 합니다. 방금 제일그룹에서 꼭 이경환 학생을 설득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난감하군요. 제일그룹의 얘기는 외교수립 문제에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일이라고 보고 있는 거 같습니다. 심 교수께서 다시 한 번, 그 학생을 설득해 주실 수 없으신가요?”

이 총장의 부탁을 받은 심 교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복학생들에겐 취업을 위해 전공과목의 점수가 후한 편이었지만, 경환의 경우엔 예외였다. 좋은 학점을 선심 쓰듯 주지 못한 걸 후회하는 심 교수였다. 그 당시 제일그룹은 중국과의 수교문제를 정부 뒤에서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하고 있었고, 그룹회장이 북경 무역대표부의 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북경대학에서 경환에게 초청장을 보낸 것을 좋은 계기로 삼고자 했다. 그러한 제일그룹의 부탁을 모른 채 한다면, 졸업생들의 취업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었기에, 총장은 이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경환은 학교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수정의 무릎을 베고 누워, 결혼과 유학계획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자기야. 난 공부 안하고 싶어요. 집에서 취미로 그림 그리고 살림하면서 지내고 싶은데….”

경환은 베고 있었던 머리를 들어 수정을 바라 봤다.

“왜? 학비 때문에 그래? 난 공부를 주목적으로 미국에 가려는 게 아니야. 도착하면 일부터 찾을 거야. 그러니 돈 걱정은 하지 마.”

경환은 오천만 원이 들어 있는 통장을 이미 수정에게 준 상태였다. 수정은 통장을 받은 후 학비와 생활비를 계산기로 두들겨 봤지만, 자신까지 공부를 하기엔 그리 많은 액수가 아닌걸 알았다.

“아, 참. 그리고 아버님이나 어머님이 혹시라도 돈을 주시면 안 받았으면 좋겠어. 그냥 우리끼리 재밌게 살아보자. 내가 맹세 컨데 밥은 안 굶기게 할 테니까.”

“알았어요. 어차피 난 당장 학교에 들어갈 수 없으니까, 상황을 봐서 다시 결정하기로 해요.”

여전히 수정이의 존대가 적응이 안 되는 경환이었지만, 말을 놓으라는 부탁을 끝끝내 들어주지 않고 있어, 이젠 경환도 서서히 수정의 존대에 적응을 해 가고 있었다.

“미안하다. 신혼여행도 못 가주고. 학기 끝나면 미국에서 같이 여행 가자. 그때까지만 참아줘.”

신혼여행을 갈 수도 있었지만, 시간이 워낙 촉박했던 관계로 경환은 신혼여행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수정은 그런 경환의 미안함을 이해 한다는 듯 가벼운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수정은 맏며느리 노릇을 못하고 떠난다는 죄송함에 매일 경환의 집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식구들의 감시와 눈총에 같이 밤을 보낼 수는 없었지만, 이런 소소한 애정행각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그때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고 정아가 얼굴을 디밀었다.

“가시나야, 노크 좀 해라 노크.”

“참말로, 눈꼴사나워서, 그냥 두 분이 밖에 나가셔서 방을 잡으세요. 그리고 수정언니, 너무 이렇게 다 받아주면 안 돼. 남자는 초장에 고삐를 확 잡아야 나중이 편한 거야.”

갑작스런 정아의 침입에 경환과 수정은 부리나케 매무새를 고쳤고, 그럼 두 사람의 모습을 정아는 재미있다는 듯이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언니하고 오빠 없었을 때 전화 왔었어. 난 갈 테니까 다시 하던 일 계속 해. 호호”

정아는 전화번호가 적혀 있는 메모지를 건네주고 방을 나갔다. 정아가 건네 준 메모지엔 제일그룹 비서실이라고 적혀 있었다. 메모지를 바라보는 경환은 대충 상황을 이해 할 수 있었다.

‘이것들이 사람을 아주 호구로 보네.’

경환은 제일그룹의 전화를 받지 않고 있었지만, 심 교수의 전화까지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심 교수의 부탁에 경환은 어쩔 수 없이, 제일그룹과의 만남을 받아 들였다.

“여기까지 오게 해서 미안합니다.”

경환은 이영수 비서실장이라고 적혀 있는 명함을 건네받았다.

“이경환이라고 합니다.”

간단히 인사를 마치고 여 비서가 들어와 차를 놓고 나갔다. 이영수는 경환을 바라보며 빨리 끝내자는 듯이, 바쁘게 할 말을 늘어놓았다.

“북경대의 초청을 거절한 이유가 미국유학이라고 들었습니다. 만약 이경환 씨가 이번 초청 건을 수락해 주신다면, 저희는 그룹차원에서 지원을 해 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졸업을 하시고 돌아오시게 되면, 특채로 입사를 보장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 오늘 자리를 갖게 된 것입니다.”

이영수는 경환을 어린 아이 다루듯 대하고 있었다. 대학생에게 유학지원과 입사라는 미끼는, 절대 거절 할 수 없을 거라고 이영수는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환은 산전수전 다 겪은 50세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지는 못했다.

“미국 유학은 저 혼자만의 결정은 아닙니다.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기 때문에 쉽게 포기할 수는 없는 문제입니다. 궁금해서 여쭤 보는데, 지원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구체적인 내용을 알고 싶습니다.”

이영수는 지원과 입사라는 당근이 먹히고 있다고 생각해 살짝 미소를 띠였다. 이미 경환의 집안사정을 학교로부터 전달받아 알고 있었기에, 이 정도의 당근이면 생각을 바꿀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학비 전액과 생활비 명목으로 매월 50만 원을 보조해 드리겠습니다. 입사도 보장을 하는 조건이구요.”

이영수는 이 정도면 파격적인 제안이니 어서 받아들이라는 식으로 경환을 쳐다보았다. 경환은 어이가 없어 허탈한 웃음을 보이고는 이영수를 향해 자세를 바로 고쳤다.

“실장님의 제안 감사합니다. 그러나 받아들이긴 어려울 거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오늘 아침 무조건 성사 시키라는 그룹회장의 지시를 받고, 여러 고민 끝에 제시한 당근을 일언지하에 경환이 거절을 하자, 이영수는 순간 당황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영수를 바라보며 경환은 말을 이었다.

“50만원이 적다거나 제일그룹에 특채로 입사를 한다는 게 나쁘다고 말씀 드리는 건 아닙니다. 단지 제가 꿈을 펼치기엔 중국보다는 미국이 기회가 많기 때문입니다. 유학을 갈 정도의 가정형편이 안 된다는 건 실장님께서 알고 계시리라 봅니다. 그래서 등록금과 주택 일체를 장학금 형식으로 지원받는 조건이고, 졸업 후 미국기업의 특채조건까지 받아서 가는 유학입니다. 이런 조건에서 실장님은 어디를 선택 하시겠습니까?”

KBR은 주택까지 제공한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경환은 사실을 부풀려 얘기를 했다. 경환의 질문에 이영수는 할 말이 없어져 버렸다. 자신이라도 그런 조건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이 미국행을 선택해야만 하는 조건이었다. 회장의 지시라고는 하지만 경환을 설득이 힘들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제가 곧 결혼을 합니다. 아내 될 사람과 같이 가는 유학인데, 아내와 자식들의 생활환경까지 고려해 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제안을 주신 것은 정말 감사하지만, 제 입장이 이러하니 이해를 해 주십시오.”

경환은 말을 마치고 몸을 소파에 기댄 채 이영수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합니다만, 제가 이해를 할 수 없어서 묻겠습니다. 경환 씨의 학업성적이나 기타 상황을 고려해 봤을 때, 그런 조건을 미국대학에서 제시를 했다는 게 사실 납득이 잘 안 갑니다. 혹시 저희 조건에 만족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제안을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영수의 말을 끝남과 동시에 경환은 아무 말 없이 혹시 몰라 준비해온 서류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학비 전액을 장학금으로 지불하겠다는 미국회사의 서류와 Rice University라는 대학의 편입 서류들이었다. 이영수는 손을 들어 안경을 쓸어 올렸다.

“제가 나이는 어리지만 사실이 아닌 내용을 가지고 흥정할 정도로 썩은 물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제 입장을 충분히 아셨으리라 봅니다. 다시 한 번 좋은 제안을 해 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잠시 만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경환을 이영수가 급히 막아섰다.

“아까 오해를 해서 죄송했습니다. 사실 이번 경환 씨에 대한 북경대학의 초청을 우리 정부나 저희 제일그룹에서는 한중간 인적 교류의 시작으로 보고 있습니다. 경환 씨의 상황이라면 당연히 미국을 가는 게 정상이지만 정부가 추진하는 중국과의 외교수립에 일조 한다는 사명감으로 한번만 더 생각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경환은 어이가 없었다. 전쟁 시기도 아닌 지금 국가를 위해 개인을 희생해 달라는 이영수의 말은 경환에겐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였다.

“실장님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어 저도 정말 안타깝습니다. 미국유학을 준비하기 전이었다면, 저도 실장님의 제안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을 것입니다. 저도 좀 난처합니다. 죄송합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경환은 다시 한 번 이영수에게 인사를 한 후 행여 다른 말을 꺼낼까 무서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일그룹을 빠져 나갔다. 경환이가 빠져 나간 비서실에는 이영수의 고함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경환이의 그 동안 있었던 행적, 그리고 사돈의 팔촌까지 다 조사해서 보고해. 아, 그리고 결혼을 한다고 하니 그 집안도 같이 알아봐.”

회장의 지시만 없었다면, ‘너 말고도 갈 놈 많아’라고 고함이라도 쳤겠지만 이미 북경대학에선 이경환이라는 놈 말고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 너무 안이하게 대처 했다고 생각을 한 이영수는, 경환을 설득할 다른 방법을 찾아보려 했다.

경환은 흐뭇한 표정으로 수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혼도 하기 전이지만, 수정은 이미 식구들과 허물없이 지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잘못된 결혼으로 인해 자신뿐만 아니라 식구들과의 관계로 소원해졌던 전생의 기억이 경환은 아직도 상처로 남아 있었다.

“어머니, 제가 끓인 된장찌개가 맛이 너무 이상해요.”

“된장을 너무 조금 풀어서 그래. 한 숟가락만 더 넣어 봐라.”

자신의 집에서는 설거지 한번 해 본적 없는 수정이가 노력하는 모습에, 경환은 고마움을 느끼며, 오랫동안 이 행복을 지키고 싶었다. 경환의 아버지도 그런 수정의 모습이 좋았던지, 퇴근 후에 즐기던 술자리도 마다하고 항상 정시에 퇴근해 같이 식사를 하는 자리가 많아 졌다. 수정이 한 명으로 인해 집안에 활력이 생기고 있었다.

“설거지는 내가 할 테니까 집에 갈 준비하고 있어.”

“괜찮아요. 오늘 자고 간다고 했어요.”

“그래라. 경환이 네가 해. 너무 여자한테만 맡기는 거 보기 안 좋더라. 유학 가더라도 경환이 네가 자주 도와주고 그래라.”

경환은 설거지를 시작했지만, 경환의 아버지는 어머니의 눈치만 보며 헛기침만 하고 있었다. 수정이가 아무리 자고 간다고 해도 못 먹는 감이었다. 이럴 땐 방이 3개인 게 너무 맘에 안 드는 경환이었다.

“어이 철수, 너무 격조했네. 술 한 잔 받아”

“허허, 바쁠 친구가 뭔 시간이 나서 날 부른 거야.”

수정의 아버지는 오랜만에 불알친구인 조병연을 만나고 있었다. 조병연은 육사출신으로 사단장을 마지막으로 예편하여, 자신의 상관이었던 현 대통령의 부름을 받아, 정계에 입문을 한 인물이었다. 곧 있을 개각에 청와대로 입성한다는 소문이 나 있는 터라, 한가하게 술 마실 시간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오늘의 술자리가 평범한 자리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둘은 말없이 서너 잔의 양주를 마시고 있었다.

“자네 막내가 아마 수정이었지? 결혼 한다는 소리가 있던데, 사실인가?”

조 의원은 스트레이트로 양주를 넘긴 후, 잔을 넘기며 말했다.

“그래, 어찌하다 보니 결혼을 하게 되었네. 아쉽기는 하지만, 둘이 죽고 못 산다는 데 차마 반대를 못하겠더군.”

조 의원이 넘긴 술잔을 받아 들고, 수정 아버지는 좀 의아해 하며,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자네 사위될 놈이 이경환이란 놈 맞나?”

수정 아버지는 마시던 술잔을 급히 테이블에 내려놓고, 친구인 조 의원을 쳐다봤다. 정치인의 입에서 경환의 이름이 나오는 게 심상치 않다고 느끼고 있어서였다. 수정 아버지는 병연을 급히 쳐다보았고, 병연은 한참 동안 말을 이어갔다. 두 사람의 얼굴은 시간이 흐를수록 심각해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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