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23화 (22/264)
  • #23

    다시 사는 인생 - 23

    아침부터 초조한 경환은 시계만 바라보고 있었다. 수정이가 도착할 시간보다 2시간 먼저 공항에 도착한 경환은, 오늘 있을 수정이 부모님과의 첫 대면을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전광판에는 파리발 대한항공이 도착했다는 표시등이 깜빡 거리고 있었다. 경환은 심호흡을 크게 한 후 입국장으로 향했다. 입국장 주변엔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마중하기 위해 서성거렸고 그 중의 몇 명은 수정과 인연이 있는 사람일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입국장 문이 수십 번 열리고 닫힌 후에 여러 개의 여행 가방이 오르다 있는 카트를 끌며 수정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경환은 먼저 수정을 아는 채 할 순 없었다. 수정은 경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그런 수정의 앞으로 마중 나온 부모님과 언니들이 급히 뛰어가는 모습을 경환은 지켜보고 있었다. 경환은 천천히 수정이를 향해 걸어갔고 수정은 마침내 경환을 보고서 활짝 웃음을 보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경환이라고 합니다.”

    경환은 수정과의 반가운 해후를 뒤로 하고 수정의 부모님을 향해 인사를 했다.

    “반가워요. 수정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난 수정이 엄마에요.”

    “호호, 우린 수정이 언니들이에요. 수정이 말대로 키가 많이 크네요.”

    수정이 어머니와 언니들은 경환을 향해 반갑게 맞아 주었지만, 수정이 아버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굳게 닫은 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런 모습이 불안했던지, 수정은 경환의 옆으로 다가와 경환의 손을 잡았지만 경환은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수정을 향해 웃음을 보여 주며 수정을 안심시켜 주었다.

    “네, 저도 수정이를 통해서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오늘은 수정이와 하실 말씀이 많으실 테니 다음에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러 찾아뵙겠습니다.”

    경환은 수정이 아버지의 좋지 못한 안색을 의식하며 자리를 피해주려 하였지만, 그런 경환의 손을 수정은 놓지 않고 있었다.

    “아빠, 뭐라고 말 좀 하세요. 집에 같이 가도 되죠?”

    평소 막내딸이라면 아까울 것이 없다고 생각한 수정이 아버지였지만, 쉽게 수정의 말을 들어줄 수 없어 입을 굳게 다물고만 있었다.

    “여보, 뭐 하시는 거예요? 그래, 경환이 학생 같이 가도록 해요. 운전 할 줄 아나요?”

    수정의 어머니는 수정이 아버지가 못 마땅한 듯 핀잔을 주고는 경환이에게 차 키를 건넸다. 수정은 경환의 팔을 잡고선, 짐을 받아 든 경환의 뒤를 따라 왔다. 불안해하며 경환의 눈치를 살피는 수정에게 경환은 살짝 웃어 주었다.

    “이 정도면 성공한 거 아냐? 난 맞을 각오도 하고 있었는데.”

    경환의 밝은 목소리에 안심이 되었는지 수정의 굳은 얼굴을 펴졌고 경환은 운전대에 손을 얹었다. 도착한 수정의 집에서 식사를 간단히 하긴 했지만 수정 아버지의 무거운 분위기로 인해 경환은 밥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몇 달 전 수정이를 통해 경환의 얘기를 들었지만, 수정 아버지는 썩 내키질 않았다. 집안도 그렇고 장래가 불안한 학생이란 사실에 수정에게 대노를 했지만 자신을 닮은 수정의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식사 후 차 한 잔이 테이블에 올려지고 수정 아버지는 처음으로 말을 열었다.

    “졸업 후 뭘 할 생각인가?”

    여느 부모와 마찬가지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행여나 고생할 것을 염려하는 질문이었다.

    “미국으로 조만간 유학을 갈 생각입니다. 이미 미국의 대학과는 어느 정도 얘기를 끝내 놓은 상태입니다. 9월에 학기가 시작되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는 사실 없습니다. 아버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빠른 시간 내에 수정과 같이 가려고 합니다.”

    “수정이가 말을 하기는 했는데, 장학금까지 받는 다면서요?”

    분위기를 감지한 수정 어머니의 지원사격에 수정 아버지는 눈을 들어 수정과 수정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요즘 수정과 틀어진 후부터 대화가 단절된 상태라 자신은 전혀 이런 얘기를 들어 보지 못한 상태였다.

    “둘이 같이 간다면 생활은 어떻게 할 건가? 생활능력이 준비된 상태에서 유학을 가겠다는 건가?”

    경환은 수정 아버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안주머니에서 통장을 꺼내 놓았다.

    “제가 정당하게 일을 해서 번 돈입니다. 둘이 버티려면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공부를 하면서 일을 할 생각입니다. 도와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수정 아버지는 속 보이는 짓이긴 하지만, 통장을 열어 금액을 확인한 후 내려놓았다. 생각 보다 훨씬 많이 들어 있는 통장을 보고 순간 놀랐다. 경환의 집안에 대한 얘기는 수정이 엄마를 통해 알고 있었다.

    “아버님, 제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아버님 입장이라도 수정일 저에게 주긴 힘들 겁니다. 수정일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말씀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유학생활이 힘들고 어렵겠지만, 저희 둘 재미있게 살 자신은 있습니다.”

    “아빠, 허락해 주세요. 경환이 아니면 저도 힘들어요.”

    경환과 수정의 말에도 수정 아버지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수정 어머니의 지원사격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경환과 수정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오천만 원은 큰돈이네, 이 돈을 어떻게 벌었는지 말해 보게. 그리고 유학을 가게 되면 어떻게 살 건지 자네의 계획을 말해 보게. 그 다음에 판단을 해 보겠네.”

    경환은 제대 후 화성산업과의 일, KBR의 도움으로 편입을 준비하는 과정 등 그 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설명을 했다. 수정 아버지는 경제지에서 읽었던 내용을 경환의 입에서 듣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고, 경환의 진지하고 솔직한 자세에 조금씩 맘을 열어 가고 있었다. 이후 여러 가지의 질문과 답변이 오가는 속에서도 한결 같은 경환의 모습을 본 수정 아버지는 자신이 반대를 한다 해도 둘은 도망을 가서라도 함께 할 것임을 알게 되었다.

    “빠른 시간 내 자네 부모님과 만날 자리를 만들어 보게. 허락을 하더라도 만나 뵙고 허락을 해야겠네.”

    “호호호, 여보 잘 생각했어요.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어요. 둘이 서로 좋아하니 그냥 우리 지켜봅시다. 자네는 우리 수정이 많이 예뻐해 주게.”

    경환과 수정은 수정의 부모님께 크게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그러나 아직 결혼하지 않은 두 언니들은 싸늘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경환이 집에 돌아가고 난 후 수정 어머니는 나지막이 수정 아버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경환이가 파리에서 수정이와 일주일 동안이나 같이 있었답디다. 아시겠어요?’

    경환은 망설임 없이 일을 빠르게 추진해 나갔다. 미리 부모님께 결혼과 유학문제에 대해 신중하게 말을 했고, 경환의 부모님들은 같이 찾아 온 수정이의 모습과 행동에 별 반대 없이 허락을 해 주셨다. 경환과 수정은 양가 집안을 바삐 오가며 며느리와 사위 노릇을 하려 노력했고, 그런 모습을 바라 본 양가 부모님들은 상견례 자리에서 둘의 결혼을 공론화 시켜 버렸다. 경환과 수정은 유학 일정이 촉박한 관계로 식은 나중에 올리더라도 먼저 유학을 가기를 원했지만, 수정 부모님의 반대로 간단하게라도 식은 올리기로 결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 통화의 전화로 인해 경환의 계획은 온통 뒤죽박죽되기 시작했다.

    경환은 린다에게 받은 서류를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미 기본적인 서류는 준비가 다 된 상태에서 미국비자 신청만 남겨 놓은 상태였다. 수정은 맏며느리 노릇을 하기 위해 경환의 집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경환은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자기, 전화 받아요. 학교래요.”

    수정은 이미 경환의 호칭을 자기라고 바꾸고 존대를 하고 있었다. 경환은 어색했지만 남편을 존중해 줘야 된다는 말에 경환은 더 이상 강요하지 못했다.

    “이경환입니다.”

    ‘경환 군인가? 나 학과장인데, 오늘 시간되면 학교로 나와 주게나.’

    심 교수였다. 유학준비로 하루가 바쁜 경환이었기에 학교로 찾아오라는 말에 내심 짜증스러웠지만, 어차피 학과장인 심 교수에겐 편입에 대해 통보를 해 줘야 되었기에 마침 잘되었다는 심정으로 시간 약속을 정했다.

    “수정아, 같이 학교에 가자. 교수님한테 유학 사실도 말을 해야겠고 겸사겸사 같이 갔다 오자고.”

    얼마 전 큰맘 먹고 차를 장만 하신 어머니에게 기름을 가득 채워 오는 조건으로 차 열쇠를 건네받아, 오래간만에 수정과의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었다. 방학기간이지만, 학교엔 많은 학생들로 분산해 보였다. 차를 주차한 후 경환은 수정을 이끌고 학과장실로 향했다.

    “교수님, 그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옆에 있는 사람은 제 약혼녀 입니다.”

    “김수정 이라고 합니다. 교수님”

    경환은 심 교수에게 수정을 인사 시켰고 심 교수는 아직 졸업도 하지 않은 학생이 약혼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이 두 사람을 쳐다봤지만, 이내 반갑게 둘을 반겼다. 자리에 앉은 두 사람에게 심 교수는 급히 서류 한 장을 꺼내 놓았다.

    “경환 군, 지난번에 통역을 해 주던 마 교수 생각나나?”

    “네, 교수님. 북경으로 잘 돌아 가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경환은 갑자기 마 교수의 얘기를 꺼내 놓는 심 교수를 불안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자네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주겠네. 다름이 아니라 중국 무역대표부에서 며칠 전 학교로 이 초청장을 보내 주었네. 북경대학에서 자네를 교환학생으로 초청을 하겠다고 하네. 자네에겐 좋은 기회가 될 거 같아 이리 급하게 불렀네.”

    그 당시에는 수교 전인 관계로 양국의 무역대표부만 개설한 상태로 외교수립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경환은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테이블 위의 초청장을 급하게 펼쳐 들었다. 심 교수의 말처럼 북경대학의 요청을 받은 중국교육부의 날인이 찍혀 있는 초청장이었다. 요청도, 아니 원하지도 않은 초정장이라 경환은 어떻게 상황이 돌아가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91년 만해도 아직 외교수립이 되어 있지 않았기에 중국과의 인적 교류는 상당히 어려웠다. 전생의 경환이었다면 초청장을 받아 들고 뛸 듯이 기뻐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교수님, 사실 제가 오늘 약혼녀와 같이 찾아 뵌 이유는 미국대학으로 편입을 준비하고 있는 사실을 말씀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미 서류 준비는 다 끝냈고 비자 신청만 남겨 놓은 상태입니다. 그렇다 보니 지금 상황이 좀 당혹스럽습니다.”

    “흠···,”

    심 교수는 깊은 탄음을 흘렸다. 대학총장과 북경 주재 무역대표부를 주관하고 있는 제일그룹 회장 비서실의 전화를 받고, 이미 자신이 문제가 없을 것이란 확답을 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경환이 아직 3학년이기에 미국유학을 준비하고 있으리라곤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이 군이 미국유학을 준비하고 있을 줄은 몰랐었네. 그런데 전공을 살리는 것도 좋지 않겠나? 자네가 북경대학으로 편입을 하게 된다면, 졸업 후엔 제일그룹에 특채로 입사 할 수도 있는 기회가 생기는데.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게나.”

    심 교수는 제일그룹의 특채를 힘주어 말하고 있었지만, KBR의 스카우트도 거절한 마당에 제일그룹은 안중에도 없었다. 수정은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 유학 얘기가 나와 불안 했던지 두 손을 꼭 쥔 채 경환과 심 교수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부족한 저에게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미국유학을 준비하기 전에 이런 제의를 받았다면 저도 좋았겠지만, 미국유학 수속이 마무리 단계인 상태에서 저는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 거 같습니다. 학과에 유학을 꿈꾸는 다른 학우들에게 기회를 주는 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경환은 심 교수에 거절의 의사를 명확히 밝혔지만, 심 교수의 안색은 빠르게 굳어져 갔다. 심 교수의 눈치가 보여 더 이상 학과장실에 남아 있을 수 없었던 경환은 심 교수를 향해 정중한 인사를 한 후 인문대학을 빠져 나왔다. 경환을 건방지다고 생각한 심 교수는 대체 할 학생들을 머릿속에서 꼽고 있었다.

    “자기야. 난 중국 가는 거 솔직히 무서워요.”

    그 당시엔 공산주의 국가라는 안 좋은 이미지로 인해 중국에 가는 것을 꺼려하던 시기였다. 그렇기에 수정의 불안은 어쩌면 당연 할 수밖에 없었다. 수정은 경환의 손을 맞잡은 채 불안한 듯 물었지만, 결코 중국에 갈 일은 없다고 수정을 안심시키고는 학교 이곳저곳을 거닐며 오랜만의 데이트를 즐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