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다시 사는 인생 - 22
26년이란 시간 만에 다시 찾은 대학은 경환에겐 잠시의 즐거움을 선사했다. 정문을 들어서 아스팔트로 깔린 언덕길, 전생에는 힘들어 수업을 빼먹게 만든 백 개가 넘는 계단, 이 모든 게 경환은 새로웠다. 경환은 저절로 나오는 웃음을 머금은 채 산 정상에 위치한 인문대학으로 향했다.
그러나 경환의 생활은 단조로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반복적인 생활은 서서히 경환을 지치게 만들었지만, 린다가 보내 준 편입서류룰 준비해 가며 그 단조로움을 이겨 내고 있을 수 있어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경환아, 심 교수님이 찾으시니 어서 가봐.”
같은 학번이었지만 졸업을 하고 학과 조교를 맡고 있던 혜미가 급히 강의실에 들어와 경환을 찾았다. 눈에 안 띄게 조용히 살고 있었던 경환은 심 교수가 찾는 다는 말을 듣고 의아해 하긴 했지만 특별한 일은 아닐 거란 생각을 하며 학과장실을 노크 했다.
“이경환입니다. 찾으셨다고 하셔서.”
“어, 그래. 이 군, 잠깐 자리에 앉아 보게.”
심 교수는 분명 자신을 기억 못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경환은 자리에 앉으면서도 심 교수가 부른 이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수업시간에 보니 자네의 중국어 실력이 그 중 가장 낫더군.”
“네? 아…, 네, 감사합니다.”
감자기 경환의 중국어 실력에 대해 말을 꺼낸 심 교수를 향해 경환은 감사함을 표했지만, 사실 경환의 중국어 실력은 영어에 비해선 한 참 모자랐다. 중문학을 전공하긴 했지만 취업을 위해 중국어 보다는 영어를 더 우선적으로 공부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이 정도의 중국어 실력을 갖출 수 있게 된 원인은, 과장승진을 하고 지역전문가양성이라는 그룹 내 해외연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90년대 당시 직원들이 가장 가기를 꺼려하는 중국으로 6개월 동안 어학연수를 다녀 온 경험이 있어서였다. 물론 중문학을 전공한 이유로 남들 보단 빠르게 중국어를 습득 할 수 있었고, 중국어의 필요성을 절감한 90년대 후반부터 학원을 다니며 중국어를 배웠기에 그나마 이 정도의 중국어 실력을 갖출 수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경제학과에서 북경대학 경제학교수를 한 학기 초빙했네. 자네도 들어 알겠지만 중국과 외교관계 수립을 진행하고 있는 일환이라고 보면 되네. 그 교수가 영어가 안 되다 보니 언어소통에 문제가 많고, 어딜 다니기도 쉽지 않은 거 같아서 학교에서 고민이 많은 모양이야. 그래서 우리 학과 학생을 소개 시켜 달라는 부탁을 받았네. 자네가 좀 그 일을 맡아 줬으면 하는데. 어떤가?”
경환은 황당했다.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경황이 없는 상태인데 중국에서 온 교수의 시다바리 역할을 하면서 말동무를 해 달라니 어이가 없었다. 분명 이 상황은 전생과는 다른 전개였다.
“교수님, 말씀 고맙습니다만, 저도 장래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수업을 듣는 것도 사실 빠듯한데 힘들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심 교수는 언짢은 눈으로 경환을 바라 봤지만 경환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교수의 말을 어겨 좋은 학점을 받기란 어렵다는 걸 경환도 알고 있었지만 취업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있는 경환에겐 학점은 무의미 했다.
“흠…., 이러면 어떻겠나? 전공수업의 경우 내 자네의 편의를 봐 줄 테니, 그 시간을 이용해 그 교수와 시간을 보내 주면, 자네도 시간을 낭비 하지 않을 거 같은데.”
사실 쳇바퀴 돌아가는 학교생활에 지쳐있는 경환으로서는 전공수업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심 교수의 제안이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심 교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경환은 인문대학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기숙사를 어렵게 찾았다. 손으로 노크를 한 경환은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구십니까?”
문이 열리며 방안에서는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나와 경환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 대학에서 중문학을 전공하는 이경환이라는 학생입니다. 교수님께서 북경에서 오셨다는 말을 듣고 평소 관심이 있었던 중국에 대해 배워 보고자 찾아뵙습니다.”
경환의 말에 교수는 반갑다는 듯 한 표정을 보이며 경환의 어깨를 잡고 어서 들어오라고 환영을 했지만, 방안에는 가득한 담배연기와 흩어져 있는 책들도 인해 경환은 쉽게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중국어 실력이 상당하군요. 우선 내 소개를 하지요. 북경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마바오웨이 라고 합니다.”
서로 인사를 나눈 후 마 교수는 급히 북경에서 가지고 온 우롱차 한 잔을 경환의 앞에 내려놓았다. 잠시 어색한 시간이 지났지만 서로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경환은 자신의 경험을 총 동원해서 북경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마 교수님, 아직 한국과 중국은 외교관계가 수립되지 않아 쌍방 방문이 쉽지 않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교수님이 계시는 북경대학이 위치한 오도구를 찾아가 보고 싶습니다.”
경환의 말에 마 교수는 신기하다는 듯이 경환을 바라보았다.
“학생이 오도구를 알고 있다니 참 놀랍네요. 조만간 중국과 한국은 빠른 시간 내 서로 교통하는 시간이 올 겁니다. 중국과 한국은 예전부터 떨어질 수 없는 사이니까요.”
우월감에 섞인 마 교수의 대답에 경환은 살짝 부아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걸 표정에 담지는 않았다.
“한국의 현 경제상황을 봐서는 중국과의 외교수립은 필연이라고 생각합니다. 중국과는 총 칼을 맞댄 사이지만 경제논리가 우선시 되는 상황이니까요. 중국의 입장도 재작년 있었던 천안문 사태로 인해 국제고립이 장기화 되고 일본마저 경제 제재에 동참한 마당에 이 문제를 타결하기 위해서라도 한국과의 외교수립은 필수 아니겠습니까? 한국의 정치가들이 경제논리에 집착한 나머지 대만을 버리면서까지 중국과의 외교수립에 매달린다는 게 개인적으로 많이 안타깝습니다.”
한국이 중국과의 수교를 위해 대만을 포기한 후부터 대만의 혐한은 시작되었다. 대만은 한국의 60,70년대 어려웠을 시절 든든한 우방의 역할의 해 줌과 동시에 많은 경제적 지원까지 아끼지 않았었다. 그런 대만인들의 배신감을 경환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일부러 대만을 화두로 꺼낸 경환은 마 교수의 신경을 긁었다. 마 교수 또한 어린 학생이 경제논리와 천안문사태를 말할 때부터 기분이 상해 있었다.
“대만은 엄연한 중국의 일부 입니다. 학생이 뭘 잘못 알고 있는 거예요.”
“대만이 중국의 일부라면 북한이 말하는 남조선도 북한의 일부겠습니까? 같은 민족이고 같은 역사를 쓰고는 있지만 현실은 서로를 적대시 하고 있습니다. 물론 설득과 포용을 통해 통일을 지향해야 되는 건 기정사실이지만 현실상황을 서로 인정을 해 줘야 된다는 게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마 교수의 말을 그대로 받아 친 경환은 대화가 너무 지나쳤다는 생각에 급히 마 교수를 향해 사과를 했다. 2000년 이후 급성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주변국들을 압박하던 중국을 경환은 평소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91년인 지금 중국은 단지 세계의 하청공장 그 이상은 아니었다.
“허허, 그래요. 우리 모두 격해진 거 같으니 진정을 해 봅시다.”
경환의 사과에 마 교수는 급히 굳은 얼굴을 풀었다. 경환은 사과하는 의미로 외출이 힘들었던 마 교수와 동행하여 대학로를 찾아 술을 곁들인 간단한 식사를 함께 하며 중국경제의 성장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교환했다. 그 이후로 경환은 마 교수와 지속적인 만남을 통해 서로의 생각과 의견을 교환하였고. 마 교수의 통역을 수행 하면서 외부 활동을 도왔다. 이러한 인연이 경환의 미래에 큰 역할을 하게 되지만 지금은 그 사실을 알 수는 없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기말고사를 마치고 방학이 시작되고 있었다. 다음 달에 도착하는 수정이를 생각하며 경환도 미래에 대한 생각을 굳혀 가고 있었다. 오늘은 귀국하는 마 교수를 위해 경환은 조촐한 식사자리를 준비해서 마 교수를 맞이하고 있었다.
“교수님과의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겠습니다. 북경에 돌아가시더라도 보중하십시오.”
서로 첫 만남은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나이를 떠나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으며 인연을 쌓았기에 마 교수 또한 경환과의 헤어짐을 아쉬워했다.
“이 군, 자네도 중문학을 전공하니 꼭 한번 북경으로 찾아오게. 가끔은 자네가 중국에서 살았던 사람은 아닌가 착각을 할 때가 아주 많네. 실제로 중국을 체험 하는 것도 자네에게 나쁘진 않을 걸세.”
짧긴 하지만 6개월 정도 북경에서 살았던 경환은 중국에서 다시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 교수의 요청에 꼭 한번 찾아 가겠다는 말로 인사치레를 했다.
“이 군은 앞으로의 중국경제를 어떻게 보고 있나?”
가끔씩 중국과 한국경제에 대해 토론을 할 때에도 경환은 마 교수를 놀라게 했었다. 나이답지 않게 미래를 예측하는 눈썰미가 대단하다고 생각한 마 교수는 단순하게 경환의 의견을 물어 보는 게 아니었다.
“저는 중국이라는 나라가 무섭습니다.”
의외의 답을 들은 마 교수는 경환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웃음을 보였다.
“현 경제력을 봤을 때 아직 중국은 한국의 70년대 수준이네. 20년 정도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중국이 무섭다 라니 이해가 잘 안되네만.”
경환은 마 교수와 독한 고량주가 따라져 있는 술잔을 들어 부딪친 후 단번에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지금 중국은 저렴한 인건비를 무기로 해서 전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고 있지만, 중국기업들은 하청생산에 머물지 않고 빠르게 기술을 카피하며 습득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의 자본이 중국으로 집중되고 카피로 습득한 기술력이 축적되고 있는 시기이기도 하구요. 또한 매년 10%가 훨씬 넘는 경제성장력은 소비의 급 증가를 가져 올 것입니다. 이 세 박자가 순탄하게 돌아가게 된다면 짧게는 10년 길어도 15년 내에 중국은 강력한 자본력과 소비력을 가지고 화려하게 세계무대에 등장을 하게 될 거라고 봅니다.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을 기다려도 늦지 않는다는 말처럼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복수를 위해 중국은 백 년을 기다리고 있다는 게 저는 무서운 겁니다. 중국이 등장하는 날 중국의 행동여하에 따라, 미국을 위시로 한 일본, 한국, 대만이 한 축을 이뤄 중국을 향해 칼을 겨누느냐, 아니면 동반자로 나가느냐가 결정 될 것이라 봅니다. 이에 더해 중국의 아킬레스건인 소수민족과의 갈등,연안과 내륙의 소득격차, 그리고 주변국들과의 마찰을 조절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부메랑이 되어 중국을 향하게 될 거라고 봅니다.”
경환은 말을 마친 후 목이 타는 지 냉수를 한 컵 들이 켰다. 마 교수는 예리한 경환의 미래 예측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신이 판단한 예측과 정확히 일맥상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 머물면서 중국에 대해 경환과 같이 정확하게 예측한 한국의 경제학자들을 쉽게 만나지 못했었다. 자신이 가르치는 북경대학의 학생들도 이러한 답변을 할 수 있는 학생은 전혀 없었다.
“자네, 말문이 막히는군. 난 오히려 자네가 무섭네. 내 자네를 초청이라도 해서 북경으로 데리고 가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네.”
마 교수와의 술자리는 밤늦게까지 지속되었고, 마 교수는 며칠 후 홍콩을 통해 북경으로 귀국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