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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21화 (20/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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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21

    한국에 돌아온 경환은 복학준비와 더불어 빠르게 유학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중국과 미국을 놓고 고민을 했지만 아직 중국과는 수교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유학을 가기 어렵다고 판단한 경환은 미국으로 결정을 한 상태였다. 몇 번의 망설임 끝에 경환은 수화기를 들었다.

    “린다, 오랜만입니다. 제임스입니다.”

    ‘제임스! 반갑네요. 자주 연락 좀 주지 그랬어요? 우리 키스한 사이란 걸 잊었나요? 호호’

    살갑게 맞아 주는 린다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경환의 귀에 흘러들었다. 잭에게 전화를 할까 고민을 잠시 했지만 사우디 현장에서 총감독을 하고 있기에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잭에게 부탁을 하게 되더라도 결국은 린다가 일 처리를 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잭에게 피해를 주기 싫은 경환은 린다에게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 화성산업과의 업무가 원활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확인한 경환은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어 린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린다, 사실은 부탁이 있어 전화를 했습니다. Rice University의 편입과 자격조건에 대해 좀 알아봐 주었으면 합니다.”

    Rice University는 KBR 본사가 있는 휴스턴에 위치한 미국 남부의 최고 명문 사립대학이었다. 수정과의 앞날과 위해 빠른 시간 내 한국을 떠날 계획이었지만 아직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대학의 편입허가를 받기란 사실상 불가능 했다. 그래서 선택한 대학이 Rice University였다. 얄팍한 생각이긴 하지만 경환은 KBR이 같은 소재지의 Rice University 공학부에 많은 투자와 지원을 하고 있는 걸 알고 있었다. KBR의 직원들 중 많은 인원들이 이 대학출신이란 걸 전생의 기억으로 알고 있는 경환은 염치 불구하고 린다에게 부탁을 하고 있는 이유였다. 다른 이유는 수정과 같이 생활하면서 가지고 있는 오천만 원으로는 몇 년 버틸 수 없는 걸 알고 있었기에 아르바이트 형태로 KBR의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숨은 뜻도 있었다.

    ‘제임스, 미국 유학을 결정한 건가요? Rice University는 KBR에서 많은 지원과 투자를 하는 대학이에요. 다른 사람이라면 이런 청탁은 받지 않겠지만 제임스와의 인연을 생각해서 한번 알아보도록 할게요. 저녁이 한 번 더 늘어나는 건 알고 있겠죠?’

    경환은 자신의 현 상태에 대해 가감 없이 린다에게 알려 주었다. 눈치 빠른 린다는 왜 경환이 Rice University를 선택하려는지 알고 있겠지만 경환에겐 일절 내색하지 않고 일에 관해 몇 분 통화를 더 한 후에 전화를 끊을 수 있었다. 경환은 린다나 잭에게 빚을 지고 싶지 않았지만 곧 귀국할 수정이를 위해선 이 방법을 제외하고는 좋은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오랜만에 찾은 명동은 아직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많은 인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린다로부터 긍정적인 소식이 들어온다면 1학기를 마친 후 수정과 함께 미국으로 출국을 할 생각이었다. 집에만 붙어 있는 게 불쌍해 보였던지 정아는 데이트 신청을 했고 경환은 흔쾌히 받아 들였다. 정아와 약속한 2층의 카페에는 빈 좌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손님들로 꽉 차 있었다.

    “오빠, 여기야.”

    손을 흔들며 자신의 위치를 알린 정아를 보며 경환은 싱긋 웃어 주었다.

    “일찍 왔네. 갑자기 뭔 데이트야? 남자 친구 하고나 만나지.”

    “하도 오빠가 방바닥 긁고 있는 게 불쌍해서, 바람이나 쐬라고 부른 거야.”

    주문한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경환은 밝아진 정아의 모습에 맘이 놓였다. 대학입학 때부터 지금까지 대학생활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 정아였다. 자신의 용돈뿐만 아니라 학비까지 벌기 위해 매일 저녁 고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지만 그런 정아를 과거의 경환은 무관심으로 일관 했었다. 경환은 미리 준비한 상품권 한 장을 정아에게 건네주었다.

    “나가서 네 구두라도 하나 사자. 더 좋은 걸 해 주지 못해 미안하다.”

    정아는 환하게 웃으며 구두상품권을 집어 들고는 가방 안에 급히 집어넣었다.

    뭐가 할 말이 있는 듯 한데 정아는 말을 꺼내지 않고 있었다.

    “오빠, 나 부탁 하나만 들어주라.”

    정아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무슨 부탁인지 알아야 들어줄지 말지를 결정하지, 뜬금없이 뭔 소리야?”

    경환은 혹시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겼는지 불안한 마음으로 정아를 향해 독촉을 했고 그 순간 뒷목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흠칫했다.

    “오빠, 오랜만이네. 아빠가 무지 서운해 하시던데 연락도 한 번 없다고.”

    소희의 갑작스런 등장에 경환은 할 말을 잃고 정아와 소희를 번갈아 가며 쳐다 만 보고 있었다. 그런 경환의 모습에 정아는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가 하도 부탁을 해서 말이지. 오빠 미안, 난 구두나 사러 갈게.”

    빠르게 카페 밖으로 나가는 정아를 경환은 그저 황당한 표정으로 물끄러미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소희는 정아가 빠져 나간 자리에 앉고서는 경환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잊고 있었던 소희의 등장과 정아의 배신으로 경환은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우리 뭐 할까? 술 마시기엔 너무 이른데.”

    정신을 차린 경환은 오늘은 소희와의 일을 마무리 하려고 결심을 굳혔다. 자칫 귀국하는 수정의 귀에라도 들어가는 날엔 상당한 악영향으로 작용할 게 눈에 선했기 때문이었다.

    “정아를 언니로 부른다니 내가 소희 너한테 말 놓을게.”

    그 동안 자기에게 말을 놓지 않던 경환이 오늘부터 자신을 여자로 인정해 주겠다는 말로 착각한 소희는 기쁜 표정을 지었지만 경환의 얼굴은 풀어지지 않고 있었었다.

    “내가 프랑스에 애인이 있는 건 너도 알고 있을 거야. 그 친구가 얼마 있으면 귀국해.”

    애인이 귀국한다는 소리에 웃던 소희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고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고 있었다.

    “물론 소희 네가 여자로서 매력이 없다는 건 아니야. 그러나 내가 그 사람을 너무 좋아한다. 다른 사람이 비집고 들어 올 자리가 없을 정도로. 혹시라도 네가 그 자리에 비집고 들어 올 까봐, 내가 그 동안 일부러 모질게 대한 거고. 미안하다.”

    경환은 할 말을 마치고 식은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소희의 반응이 궁금하긴 했지만 소희를 빤히 쳐다 볼 자신이 없었다. 갑자기 소희의 웃음소리에 경환은 급히 눈을 들었다.

    “호호호, 뭐, 내가 여자로서 매력이 있다는 말 기분은 좋네. 그래서 용서해 줄게. 그 대신 오늘은 나하고 술 한 잔 해야 돼.”

    예상하지 못한 소희의 반응에 경환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지어 보였다.

    “그래, 오늘 술 한 잔 하자. 그리고 소희 네가 조신하게 2년만 참아 준다면 너하고 정말 어울리는 남자 하나 내가 안겨 줄게. 진심이다 이 말은.”

    경환의 말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소희를 앞에 두고 경환은 급히 전화 부스로 향했다.

    ‘저 가시나 앞에선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된다. 잘못 코 꿰면 인생 조진다.’

    전화 부스 안에서는 다른 약속이 있어 못 나오겠다는 군대 고참 김인철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경환의 모습이 보였다. 그날 경환은 소희의 물불 안 가리는 육탄공세를 온몸으로 저지하며 힘든 저녁을 보냈다.

    린다의 소식은 일주일이 지나도록 오지 않고 있었다. 수정의 귀국날짜가 다가옴에 따라 경환의 마음은 서서히 초초해지고 있었다. 수정의 부모님이 수정을 얼마나 끔찍이 아끼는지를 경환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확실한 미래에 대한 계획이 없는 상태에선 수정의 부모님을 설득시키기란 매우 어려웠다. 린다에게 전화를 걸어 보고 싶은 마음을 경환은 억지로 참아 내고 있었다.

    “경환아, 내려와서 전화 좀 받아 봐라. 미국사람인데 뭐라고 하는지 통 모르겠다.”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경환은 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제임스입니다.”

    “제임스, 나 잭입니다.”

    잭이 전화를 하리라고는 전혀 예상을 하지 못한 경환은 잭의 목소리가 반갑기는 했지만 전화를 건 이유가 궁금했다.

    “잭, 목소리가 좋아 보이는 걸 보니 공사가 순조롭게 흘러가나 봅니다.”

    “하하, 날씨가 죽을 만큼 더운 거 말고는 일정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린다에게 소식을 들었습니다. 편입을 준비한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아마도 린다는 자신의 상사인 잭에게 경환의 유학준비 소식을 말한 거 같아 보였다. 힘든 현장의 일을 감독해야 될 잭이 일부러 전화를 줬다는 것에 대해 경환은 고맙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많은 부담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Rice University는 우리와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는 대학입니다. 자세한 건 린다가 다시 얘기를 해 주겠지만, 제임스가 편입을 원한다면 우리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거 같네요.”

    잭에겐 미안했지만 급한 건 경환이었기에. 잭의 호의를 받아들일 수밖엔 없었다.

    “잭에게 큰 부담을 준 거 같아 맘이 불편합니다. 그러나 잭의 호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염치 불구하고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저 혼자가 아니라 애인과 같이 가려고 합니다. 기숙사 생활이 힘들 거 같기 때문에 학교 주변의 저렴한 원룸도 소개를 받았으면 합니다.”

    경환의 부탁에 잭은 크게 웃었다.

    “하하하, 난 제임스를 가까이 두게 되어 더 좋습니다. 그런데 제임스가 애인과 같이 간다고 하면, 린다가 좀 실망을 하겠네요. 제임스, 내가 제안을 하나 할까 합니다. 알겠지만 그 대학은 사립이라 유학생에 대한 학비가 만만치 않습니다. 만약 제임스가 거절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학비 전액을 장학금 형식으로 지원을 하겠습니다. 그 대신 학업에 지장을 주지 않는 선에서 우리 일을 도와주는 건 어떻게 생각합니까?”

    뜻밖의 제안이었다. 사실 경환은 만만치 않은 학비와 생활비 때문에라도 잭에게 일을 부탁해야 될 처지였지만, 오히려 잭이 이런 제안을 해 왔기에 경환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경환의 대답에 린다가 곧 전화가 갈 것이라는 말과 함께 잭과의 통화는 끝을 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린다의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

    “제임스, 나 실연당한 건가요?”

    느닷없는 린다의 말에 어떻게 반응을 해야 될지 몰라 경환은 우물쭈물 대답할 말을 찾고 있었다.

    “호호호, 제임스 보기 보단 순진하네요. 농담이에요. 제임스와 일을 같이 하게 되면 우리에게도 큰 힘이 될 거라고 봐요. 이미 윌리엄의 허락이 있었으니 편입은 어렵지 않을 거예요. 편입관련 서류는 우편으로 보내 줄 테니 받게 되면 전화 줘요. 휴스턴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린다에게 고마움을 전한 후 통화를 끊을 수 있었다. 경환은 큰 산 하나를 넘었다는 안도감에 크게 심호흡을 했다. 돌아오는 수정이를 자신 있게 맞이할 수 있는 하나의 무기를 손에 쥔 경환이었다.

    그러나 일이 쉽게 풀릴지는 지금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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