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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20화 (19/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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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20

    이맘때쯤 수정은 극심한 향수병에 시달리며 많은 어려움을 겪었었다. 당시 경환은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게 전혀 없었기에 오히려 왜 견디지도 못할 유학을 가서 사서 고생을 하냐고 수정을 몰아 세웠었다. 그 이후로 수정과의 통화와 편지는 현저히 줄어들었고 서서히 각자 다른 길을 향해 평행선을 걷게 되었다.

    ‘나이를 먹어서야 이해를 하게 되었으니, 나도 참 어리석은 중생이네.’

    경환은 수정에게 알리지 않은 채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미리 여권을 발급 받아 놓았고 항공권과 파리의 호텔을 예약해 놓은 상태였다. 개학을 하게 되면 몸을 움직일 수 없기에 개학을 한 달 앞둔 지금 밖에는 시간이 없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경환은 아버지를 조용히 찾았다.

    “아버지, 다음 달 복학을 하기 전 잠시 여행을 다녀오고 싶습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경환의 아버지는 제대 후 바로 일을 시작한 경환이가 항상 마음에 걸렸기에 경환의 여행을 반대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 너도 좀 여행을 하면서 쉬는 것도 좋겠지. 어디를 갈 생각이냐?”

    아직은 해외여행이 보편화된 시기가 아니었고 수정과의 사이를 미리 말해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던 경환은 국내 여러 곳을 돌아 볼 계획이라는 말로 부모님을 안심시켜 드렸다. 경환은 불편하기는 했지만, 휴대폰이 없다는 게 꼭 나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후, 경환은 여행 준비를 마치고 이른 시간에 김포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파리는 오성건설 시절 중동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몇 차례 가 본 경험은 있었지만, 수정과의 좋지 못한 기억으로 인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특별한 감흥을 느끼지 못한 도시였다. 왜 한국 사람들이 파리에 대해서 열광을 하는 지 파리 여행을 준비하는 지금의 경환도 이해하기 힘든 문제였다. 티켓팅과 출국심사를 마친 경환은 오랜 기다림 후에 비행기에 탑승했고 승무원의안내방송을 듣기도 전에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손님, 식사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스튜어디스의 목소리에 잠을 깬 경환은 맥주 한 잔을 주문한 후 식사를 시작했다. 기내식 내용만 보자면 90년대가 훨씬 좋았다고 생각한 경환은 한 잔의 맥주를 더 주문해 마신 후 식사를 끝낼 수 있었다. 곧 있을 수정과의 재회를 생각하면 오십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설레어만 갔다. 연락도 안 한 상태에서 먼 타국까지 찾아 간다는 게 수정에게는 당혹스러운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순간 고민을 해 본 경환이지만 우선은 부딪혀 볼 생각이었다.

    스튜어디스의 바쁜 움직임이 있은 후 비행기는 오후 6시에 파리의 관문인 샤를드골공항에 도착을 했다. 몇 번 와본 파리였지만 수정이가 머물던 시기에 온 파리는 경환에게는 새로운 흥분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간단한 입국심사를 끝낸 경환은 짐을 찾아 환전소를 향했다.

    “2000불을 유로로 환전해 주십시오.”

    경환의 말에 환전소 여직원은 고개를 들어 경환을 쳐다보았다. 순간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린 경환은 겸연쩍은 미소를 띠였다.

    “죄송합니다. 착각을 했습니다. 프랑으로 환전해 주십시오.”

    공항 인포메이션을 통해 소개받은 택시를 이용하여 우선 호텔로 직행한 경환은 급히 체크인을 서둘렀다. 한국 여행사를 통해 미리 예약과 지불을 끝낸 바우처와 보증금 500불을 제시한 후 방 키를 받을 수 있었다. 방에 들어가 창문과 연결된 테라스에서 보이는 개선문을 보며 경환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여기 어딘가에 수정이 있다는 생각에 경환은 살짝 떨리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수정은 한국여학생과 함께 어학원 기숙사에서 나와 원룸 아파트에서살고 있었고 경환은 아파트를 찾아 갈까 라고도 생각 했지만 이내 포기 하고 말았다. 경환은 수정이 집에 있기를 바라며 전화기를 돌렸다.

    ‘알로?’

    전화기에선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프랑스 여자 같지는 않았기에 경환은 우선 한국말로 말을 건넸다.

    “김수정 씨와 통화 할 수 있겠습니까?”

    ‘잠시 기다리세요.

    파리에서 듣는 한국말이 경환은 반갑게 느껴지는 순간 수정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전화 바꿨습니다. 누구세요?’

    잠시 멈칫한 경환은 수정이의 반응이 어떨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나야 경환이, 네 목소리를 들으니 좀 살 거 같다.”

    수정은 갑작스런 경환의 전화가 반가운 듯 보였다.

    ‘서울은 늦은 시간인데 무슨 일 있어?’

    “무슨 일 없어, 너 보고 싶어서 나 지금 파리에 왔어. 개선문 근처에 있는 나폴레옹 호텔인데 지금 나올 수 있겠어?”

    경환의 느닷없는 말에 수정은 자신을 놀리지 말라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화를 냈지만, 경환은 그런 수정의 모습마저도 사랑스러웠다. 경환의 말이 사실인 것을 안 수정은 정확한 위치도 묻지 않은 채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어 버렸다. 경환은 방 호수도 모르는 수정을 위해 앉아 있을 공간도 부족한 좁은 프론트 앞에서 마냥 수정을 기다려 줄 수밖에 없었다.

    호텔 정문 앞으로 택시 한 대가 정차하며 급히 내리는 수정의 모습이 보였다. 호텔 정문을 나가 수정을 마주 한 경환은 누가 먼저라고 하기도 전에 서둘러 수정을 깊게 끌어안았고 수정은 가볍게 몸을 떨며 두 손을 펼쳐 경환의 허리를 껴안았다.

    “많이 보고 싶었다. 견디기 힘들어서 무작정 찾아 왔어.”

    수정은 아무 말 없이 글썽이는 눈으로 경환을 빤히 쳐다 볼 뿐이었다. 경환은 환하게 웃으며 수정을 바라 봤고, 호텔 정문 앞에 서있던 두 사람은 깊은 키스로 서로의 그리움을 채워 나갔다.

    “얼마나 머무를 거야?”

    수정은 경환의 허리에서 손을 빼지 않은 채 고개를 들어 경환을 바라보며 물었다.

    “일주일, 네가 싫다고 하면, 뭐, 내일 갈 수도 있고.”

    경환의 농담에 수정은 경환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쳐 가며 화를 냈다. 그런 수정을 달래며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은 샹젤리제의 한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영어가 통하지 않는 레스토랑에서의 주문은 수정의 몫이었다. 와인 한 병과 간단한 요리를 시킨 둘은 와인 한 병을 다 비울 동안 그 동안에 있었던 일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고 경환은 주로 수정의 얘기를 들어 주고 있었다. 수정은 향수병에 지쳤었는지 쉴 새 없이 그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경환에게 쏟아내고 있었다. 그런 수정을 바라보는 경환은 과거 자신이 좀 더 많이 수정을 이해 해 주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어느덧 시간은 11시를 향해 가고 있었고 수정은 시간을 힐끔 확인하고선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수정의 이런 모습을 귀엽다는 듯 쳐다 본 경환은 안주머니에서 자그마한 상자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너는 나에게 있어서 특별한 사람이야. 그러나 오늘 이후론 나만의 여자로 남아 주었으면 해.”

    테이블 위에 놓인 상자 안에는 18K 민짜 커플링 반지가 있었고 경환은 그 중 작은 반지를 빼어 수정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널 공주로 만들어 주진 못해. 손에 물도 많이 묻혀야 되고 고생도 함께 해야 될 거야. 내가 딱 하나 약속해 줄 수 있는 건, 같이 늙어 죽을 때까지 함께 해 주겠다는 거 밖에는 없다.”

    경환은 반지가 끼워진 수정의 손을 힘껏 잡았다. 수정은 목이 매여 말이 안 나오는 듯 경환의 눈을 바라보지 못한 채 고개만 끄떡였다. 그렇게 둘의 첫날밤은 조용히 시작 되었다.

    다음날 아침 먼저 잠에서 깬 경환은 아직 잠들어 있는 수정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어제의 격정적인 첫날밤에 수정은 많이 지쳐 있는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고 경환은 잠들어 있는 수정의 긴 머리카락을 손 등으로 쓸어내리고 있었다.

    “일…어 난 거야? 부끄러우니깐 쳐다 보지 마.”

    수정은 시트로 몸을 가리며 손을 들어 경환의 얼굴을 반대편으로 돌리려 했지만 경환은 수정의 손을 잡아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 입을 맞추고는 테이블에 놓여 있던 웰컴 샴페인을 잔에 따라 수정이에게 건네주었다.

    “어제 나 자세히 봤거든. 앞으로도 계속 볼 거고. 계속 널 보고 있어도 실감이 안나. 꿈이 아니기만 바라고 있어.”

    경환은 수정의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고, 수정은 경환의 입맞춤을 눈을 감으며 받아들였다. 경환은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는 수정을 안아 들고 욕실로 향했다.

    “수정이 네가 미대생이라 루브르를 좋아하는 건 알겠는데, 나는 좀 힘들다.”

    경환은 수정이의 손에 이끌려 3시간을 넘게 루브르 박물관 안을 끌려 다니고 있었다. 수정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경환으로선 무지 참기 힘든 중노동이었다. 과거 스톱오버로 파리에 며칠 묵었었던 경환은 직원들의 성화에 못 이겨 루브르를 방문 했었지만 단 20분 만에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빠져 나왔었다. 그 만큼 경환으로서는 지금 이 순간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괴로운 시간이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인데, 그것도 못 참아? 그럼 오늘 따로 자던지. 치!”

    벌써부터 협박을 하는 수정 이였다. 경환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고 결국은 수정의 협박에 굴복하며 2시간을 더 끌려 다닌 후에야 루브르박물관을 겨우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수정이 다니는 어학원은 아직 2학기가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에 수정은 온전히 경환과 같이 보낼 수 있었고 둘은 마치 신혼여행이라도 온 듯 둘의 시간을 최대한 만끽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바라보는 석양이 너무 좋아. 여길 올 때 마다 너와 같이 이 경치를 보고 싶었었는데…, 다행이야, 오늘 너와 같이 볼 수 있어서.”

    수정의 손에 이끌려 찾은 곳은 몽마르트 언덕이었다. 사크레쾨르 성당을 뒤로 하고 둘은 난간에 손을 얹어 파리의 정경으로 조용히 내려앉고 있는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환은 뒤에서 가볍게 수정을 감싸며 이 행복이 오래도록 지속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수정과의 일주일은 너무 빠르게 지나갔다. 낮엔 수정이의 손에 이끌려 이곳저곳을 따라 다녔고 밤엔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누었다. 둘은 헤어짐이 아쉬워 호텔방과 연결된 테라스에 나와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나 한국으로 돌아갈까?”

    수정의 힘없는 소리에 경환은 수정의 어깨를 감싸 주었다. 수정은 기댄 경환의 어깨위로 한 두 방울의 눈물이 떨어트렸다. 그런 수정의 모습이 안쓰러운 듯 경환은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 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혼자서 식구들과 떨어져 외국에서 생활한다는 건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하물며 여자인 수정이가 겪었을 어려움이 생각나 경환은 맘이 먹먹해져 갔다.

    “힘들었을 널 생각하면 맘이 많이 안 좋다. 혼자서 다 견뎌야 했을 텐데. 복학을 하면 나도 우리의 앞길에 대해서 준비를 하려고 해. 그리고 네가 걱정하는 이유 아니까, 날 생각해서 여기에 머무를 필요는 없어. 언제든지 아무 때나 돌아와. 그 다음은 내가 알아서 할게.”

    수정은 언제부터 인지 모르게 자신보다 부쩍 커 있는 경환을 느끼고 있었다. 이젠 경환을 믿고 따라갈 자신감이 생긴 수정이었다. 몸과 마음 모두.

    수정과의 짧은 만남을 뒤로 한 채 경환은 귀국길에 올랐고, 수정은 2학기만 마친 후 학교에 진학을 하지 않고 돌아오기로 결정을 했다. 과거의 3년의 유학기간은 1년으로 단축되었고, 수정을 위해서도 자신을 위해서도 경환은 앞날을 준비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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