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9화 (18/264)

#19

다시 사는 인생 - 19

마산공장의 철골제작은 더 할 나위 없이 순조로웠다. 최승호가 공장에서 숙식을 해결할 정도로 생산에 매진한 이유도 있었지만, 직원들의 자신감과 경환의 제안을 받아들인 최승화가 직원들의 복지에 신경을 많이 쓴 이유도 있었다. 특히 직원들에게 자신의 지분 5%를 우리사주라는 형식으로 균등하게 나눠주어 직원들의 애사심 향상에 일조를 하기도 했다. 물론 매매는 불가하고 퇴사시 회사에서 전량 매입을 한다는 조건이 달려 있었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복지정책이었다. 이로 인해 불량률은 현저하게 떨어졌고 이것은 회사의 이익으로 다시 되돌아 왔다.

“조심해서 선적을 하십시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더네이지(DUNNAGE) 작업을 하면 화물이 하중을 견디지 못해 변형이 올 수 있습니다. 목재 아끼지 마시고 하중을 견딜 수 있도록 빈 공간에 채워 넣으세요.”

화성산업의 첫 수출 1차 선적이 이뤄지고 있는 마산 항에는 경환과 최진호가 선적 중인 선박에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면서 선적회사와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최 과장님은 앞으로 모든 수출 물량의 선적을 확인 하셔야 되기 때문에 오늘 눈으로 잘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최진호는 경환을 따라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또한 선박에 달려있는 사다리를 잡고 흔들리는 배 위를 올라가는 것은 그에게는 고욕이었다.

“선적회사에서 목재를 더 투입하면 비용이 올라간다고 투덜거리는데 어쩌면 좋겠습니까?”

최진호는 슬슬 찾아오는 멀미로 인해 속이 부글거렸지만 경환은 배에서 내려 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최 과장님, 선적회사와 선적방안에 대해 협의를 할 때 충분히 검토한 내용입니다. 우선은 비용에 대해 컨펌하시고, 더네이지 작업은 우리의 요청을 받아들이라고 하세요. 몇 푼 안 되는 목재와 와이어 아끼려다 화물이 파손되면 그 이상으로 손실이 발생합니다. 이 점 꼭 기억을 하십시오. 그리고 선적회사가 계속 이런 식이라면 다음 선적부터 선적회사를 교체 하십시오.”

최진호는 경환과 함께 선적회사 담당자와 긴 대화를 나눈 뒤 배에서 내려 올 수 있었다. 부두에는 첫 수출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최승화와 최승호가 선적작업을 바라보고 있었고, 선적업무까지 감독하는 경환을 보며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형님, 이 팀장은 도대체 뭐 하던 사람인데 이런 선적업무까지 알고 있는지 내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저도 이 나이 먹어서 처음 경험하는 일인데. 이번 작업 끝나면 이 팀장이 떠난다니 많이 아쉽네요.”

최승호는 아쉬운 듯 한숨을 내 쉬었고, 최승화 또한, 같은 심정이었다.

“뭐 어쩌겠어. 대학을 때려치우라고 할 수도 없잖아. 아쉬운 대로 우리와 인연의 끈을 계속 가져가게 해 봐야지.”

최승화는 누구보다도 경환의 퇴사를 아쉬워하고 있었다. KBR과의 계약이 성사된 후 물 밀듯이 몰려드는 국내기업의 물량을 오히려 정중히 거절을 해야 될 형편이었다. 마산공장의 생산능력으로는 그 많은 물량을 소화 할 수 없었기에 최승화는 공장 증축을 계획했었지만, 경환의 조언으로 포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단순한 철골 물량을 위해 공장을 증축하는 건 화성의 미래를 단축시키는 지름길 입니다. 점차적으로 고부가가치의 특수플랜트 제작에 투자를 하셔야 합니다. KBR과 오성을 잘 활용하시면 좋은 결과를 얻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공장증축은 그 후에 진행을 하셔도 무리가 없습니다.’

경환은 단순 철골 물량이 92년 중국과의 수교 이후 빠르게 중국으로 넘어가는 것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오일간의 긴 작업 끝에 선적작업을 완료하고 2만 톤에 달하는 거대한 선박은 사우디를 향해 출항을 했다. 최승화는 화물이 빠져 나간 공장 야적장에서 직원들과 조촐한 회식을 하고 있었지만 경환은 그 자리에 없었다.

“린다, 작업을 완료하고 방금 선박이 출항을 했습니다. 늦어도 한 달 후에는 화물이 도착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제임스, 오랜만이네요. 그렇지 않아도 현장 감독으로 가 있는 조에게 전화를 받았어요. 제임스가 현장에서 감독을 한 덕분인지 조도 도착 화물은 전혀 문제가 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수고했어요. 그리고 고맙고요.’

경환은 오히려 자신과 화성산업을 믿어 준 린다에게 고마움을 재차 전달했다. 경환은 앞으로 린다와 잭을 다시 만나게 될 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인연을 쉽게 놓고 싶지는 않았다.

“린다, 저는 이번 일을 끝으로 학교로 돌아갑니다. 당분간 학업에 열중 할 생각입니다. 잭과 린다에게는 항상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언제라고는 장담 할 수 없지만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 번 린다와 잭과 함께 일을 해 보고 싶습니다. 그 동안 고마웠습니다.”

경환은 진심을 담아 린다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예상하지 못한 경환의 말에 린다는 쉽게 말을 꺼내지 않고 있었다.

‘제임스, 잭의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 했다고 들었을 때 무척 아쉬웠어요. 전 이게 제임스와의 끝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지난번 제임스가 약속한 근사한 저녁과 와인을 난 아직 못 먹었으니까요’

경환은 린다의 말에 웃어 주며 약속한 저녁은 반드시 지키겠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시원하기도 하고 아쉽기는 하지만, 화성에서의 모든 일을 후회 없이 끝낸 경환은 전생과는 다른 인연을 하나씩 쌓아가며 자신의 다가올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에 대해 더 이상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경환의 송별회는 서울사무소 직원 전부와 마산에서 올라온 최승호까지 참석하여 아쉬움을 달래고 있었지만, 소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경환에 의해 전파된 소맥은 여지없이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돌았고 회식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하나 둘 취해 가고 있었다. 경환은 짧은 4개월의 시간 동안 이들과 부대끼며 지낸 시간을 소중히 간직하고 화성산업의 성공적인 미래가 찾아오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야! 이 팀장, 내가…꺽, 인마. 사장 자리 준다잖아. 꺽, 내가 회장 되는 게 배 아프냐!”

최승화는 오른 취기를 빌려 맘에 담아 놓은 말을 꺼내고 있었다. 경환은 그런 최승화의 마음도 고맙게 간직하기로 했다.

“사장님 취하신 거 같으니까 내가 모시고 들어가겠네. 다른 직원들은 이 팀장 하고 술 한 잔 더해. 이 팀장 오늘 집에 기어 들어가게 하지 못하면 다들 시말서 쓸 각오해.”

최승호는 급히 최 사장을 데리고 빠져 나갔고, 1차로 아쉬움을 달랠 수 없었던 직원들의 강요에 의해 경환은 그들과 같이 회사 근처의 조그만 호프집을 찾았다.

“이 팀장, 내가 처음에는 이 팀장을 많이 오해했었네. 미안하네. 앞으로 계속 우릴 많이 도와주고 가르쳐 주게.”

이 부장은 경환의 손을 잡으며 따뜻한 미소를 보였다. 경환은 그럼 이 부장의 마음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제 화성산업은 제가 없더라도 잘 움직일 것입니다. 그 동안 여러분들께 무례하게 대한 점 사과드립니다. 저도 화성산업과의 인연을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경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직원들을 향해 고개를 깊게 숙여 감사함을 표했다. 오정미와 김현아는 그런 경환을 보며 아쉬움에 눈물을 글썽거렸다. 경환으로 인해 자신들의 처우가 개선된 것을 누구보다도 자신들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팀장님, 제가 해병대 출신이거든요. 한번 팀장은 영원한 팀장입니다. 앞으로 자주 찾아와 주시고, 떠나시기 전에 한마디 해 주십시오.”

경환의 옆에서 가장 맘고생이 심했던 최석현이 맥주잔을 들어 건배를 제의한 후 경환에게 환한 웃음을 보이며 한 마디 해줄 것을 청했다. 경환은 급히 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직원들을 일일이 쳐다보았다.

“깔끔하게 떠나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되네요.”

경환의 말에 직원들은 모두 크게 웃었다.

“화성은 동종업계에서 주목 받는 회사가 되었습니다. 이미 그 결과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여러분들도 아실 겁니다. 안주하려는 순간 화성은 서서히 무너질 것입니다. 또한 앞으로 여러분들 개개인에겐 많은 유혹이 찾아 올 것입니다. 아니 이미 찾아 온 분들도 계실 거구요. 화성이 있기에 여러분들이 존재 한다고 봅니다. 역으로 말하면 여러분들이 계시기에 화성의 존재가치가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유혹을 이기지 못한다면 잠시는 좋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사막 한 가운데 서있는 마른 고목이 될 것입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는 건 어렵기 때문입니다. 계속 여러분들과 화성이 공생하며 발전하는 모습을 저는 보고 싶습니다. 그 동안 진심으로 고마웠습니다.”

경환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 앉았지만 직원들은 경환의 말을 되새기고 있었다.

“휴, 내가 귀신을 속이면 속였지, 팀장님은 못 속이겠네요. 대후에서 스카우트 제의 받았습니다. 사실 고민을 좀 하긴 했는데, 지금 이 순간 접었습니다.”

강동원의 자백에 모두들 크게 웃었고, 맥주잔은 계속 돌고 있었다. 그렇게 경환은 화성과의 인연을 잠시 마무리 했다. 그날 경환은 최승호의 엄명을 받은 직원들에 의해 술 테러를 당했고 결국 최석현의 등에 업혀 모텔에서 자는 신세가 되었다.

경환은 그 동안 지쳤던 몸과 마음을 휴식을 통해 달래고 있었다. 4개월 전 등록금 마련을 위해 전전긍긍 했던 자신의 모습을 회상하며 ‘피식’ 혼자 웃었다. 급한 불은 껐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걸 경환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조급해 하지 않기로 맘을 굳힌 경환은 우선 복학을 한 후 천천히 고민을 해 보기로 했다.

경환의 집으로 기쁜 소식이 찾아 들었다. 아슬아슬한 점수이긴 했지만, 막내인 승연이가 중앙대 전산학과에 당당히 합격을 한 것이 그것이었다. 경환은 자신이 알던 전생과 달라지는 모습을 보며 일말의 희망을 갖게 되었다. 집에서 쉬고 있던 경환은 급히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석우냐, 나 이경환이다. 잘 살고 있었냐.”

‘야! 살아는 있었나 보네. 웬일이냐? 너도 복학 준비하느라 바쁠 텐데.”

경환은 군대동기였던 심석우와 술 한 잔 하기로 약속을 한 후 급히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평일 저녁이었지만, 신촌은 젊은 청춘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이 인파로 가득 차 있었다. 경환은 석우와 약속된 주막을 찾아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자식, 제대로 좀 알려주던지.’

경환은 연세대를 목표로 입시준비를 했었다. 그러나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어 한양대 경제학과를 지망했고, 결국은 2지망인 중문학과에 합격 할 수 있었다. 눈치작전이 극심했던 80년대엔 점수보다는 운에 따라 대학과 학과가 정해지는 경우가 많았었다. 그 이후 경환은 심한 자격지심으로 인해 신촌에 나가는 걸 극도로 꺼려했었다. 간신히 석우와 약속된 주점을 찾은 경환은 서둘러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야, 이경환. 여기다 여기. 자식 일찍 좀 오지. 술 다 식었잖아.”

이미 한잔 걸치고 있던 석우가 급히 손을 흔들며 경환을 불렀다. 주점 안은 방학인데 불구하고 학생들로 꽉 차 있었다. 주점 안 가득찬 술 냄새로 인해 경환은 살짝 인상을 찡그리면서 석우가 앉아 있는 자리를 향해 갔다.

“미안하다, 신촌에 다녀 봤어야 알지. 좀 헤맸다.”

급히 경환의 잔에 술을 따른 석우는 반갑다는 듯 술잔을 들어 건배를 하고는 경환을 쳐다보지도 않고 먼저 술을 급하게 넘긴 후 경환을 향해 물었다.

“어떻게 지냈냐? 복학 준비는 다 했어?”

석우의 질문에 경환은 고개만 끄떡이고는 가득 차 있는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석우는 자신의 전공을 살려 정치에 입문을 할 사람이란 걸 알고 있는 경환은 우선은 석우에 대해 알아 볼 필요가 있었다. 전생의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국회의원 초선시절 술집 여종업원과의 스캔들 문제로 인해 큰 곤욕을 치러야만 했고 당 쇄신차원이란 명분하에 석우는 제명처리와 동시에 쓸쓸히 정계에서 사라져야만 했었다.

“그 동안 아르바이트 하느라 좀 바빴다. 그 덕에 등록금을 벌 수 있었고. 복학하기 전에 너하고 군대얘기나 하면서 술 한 잔 먹고 싶어서 불렀다.”

“자식, 잘 했다. 나도 네가 많이 궁금하긴 했다. 난 또 네가 여자라도 소개시켜 주는 줄 알고 기대 많이 하고 있었다.”

그런 석우를 보면서 경환은 아직도 여자 타령이냐며 핀잔을 주었지만, 석우는 경환의 핀잔에 아랑곳 하지 않고 여성 예찬론에 대해 침을 튀기며 한 참을 떠들었다. 경환은 그런 석우의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석우와 군대얘기를 포함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어느 정도 술을 마신 경환은 자신이 잘 못 생각한 건 아닌지 한 참을 고민한 후에 석우에게 물었다.

“석우 넌 졸업하고 뭐 할 거냐? 농담으로 물어 보는 거 아니니까 진지하게 말해 봐.”

경환의 진지한 모습을 확인 한 석우는 마시던 술잔을 내려놓았다.

“글쎄, 아직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꿈이 대통령이었다. 커 가면서 그게 얼마나 허황된 꿈인지 알게 되었지만. 꿈을 접는다는 게 참 힘들더라. 그래도 정치에 관심이 죽은 건 아니니 대충 그쪽으로 나가지 않겠나 싶다.”

경환은 석우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는 술을 한잔 따라 주었다.

“자식아. 너는 여자 때문에라도 대통령 못해 인마. 프랑스에나 가서 대통령 해 먹던지 해라. 아랫도리 단도리 잘 해라. 나야 정치하고는 상관없지만, 정치하겠다는 놈이 간수 제대로 못하면 한 방에 훅 간다."

나름 진지하게 자신의 꿈에 대해 대답을 했다고 생각한 석우는 발끈했다. 왜 경환이 프랑스 대통령이란 소리를 했는지는 알 수는 없었지만, 듣기 좋으라고 한 소리는 아닐 거라는 걸 눈치로 알고 있었다.

“인마, 나 이래봬도 아직 총각이거든. 자식이 사람 맘 아프게 하네. 그런 넌 꿈이 뭔데?”

석우가 아직 여자경험이 없다는 말에 경환은 사실 많이 놀라고 있었다. 군대에 있을 때부터 입에 여자얘기를 달고 살았던 석우의 다른 모습을 보는 경환은 석우를 새롭게 다시 보게 되었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기에 석우를 휘어잡을 수 있는 여자를 얻게 된다면 석우의 다른 미래가 나타날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보는 경환이었다.

“나? 난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면서 떼돈을 벌어 보는 게 내 꿈이다. 이왕이면 자가용비행기도 한대 가지면 좋고.”

“미친 놈, 내가 프랑스 가서 대통령 해 먹는 게 더 빠르겠다, 쉰 소리 그만하고 술이나 마셔 인마.”

석우는 어이없다는 듯 벌컥거리며 술을 넘겼고 경환은 석우를 따라 잔을 들었다.

“나중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다. 대통령은 못 해도 국회의원은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형님이 돈 많이 벌면 너 팍팍 밀어 주마. 누가 아냐, 예쁜 여자도 한 명 소개 시켜 줄지.”

석우는 경환의 허황된 말에 손사래를 쳤고 경환은 석우가 알지 못하는 웃음을 보이며 머릿속으로 한 명의 여자를 떠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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