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다시 사는 인생 - 18
그날 저녁 경환은 식구들과 함께 외식을 할 생각으로 그 당시 한창 유행하던 프라이데이라는 레스토랑에 와 있었다. 식구들 모두 처음 와 보는 곳이라 주문을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망설였고 경환은 능숙하게 메뉴판을 들어 여러 가지 음식들을 주문했다.
“형, 여기 분위기 괜찮다. 여기 비싸다고 하던데. 내 친구 종신이가 한번 와 봤다고 자랑하더라고.”
“오빠, 센스 있네. 이런 곳도 다 알고. 오늘 오빠 덕 본다. 헤헤.”
경환은 식구들의 밝은 표정을 보며 전생의 자기 모습에 대해 많은 반성을 하고 있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다들 처음 맛보는 음식에 정신이 팔렸지만, 경환은 그런 모습들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오늘은 식구들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식사를 하고 후식이 나올 무렵 경환은 어렵사리 봉투를 어머니께 드리며 말을 꺼냈다.
“아버지, 엄마. 봉투에 오천만 원 들어 있어요. 이 정도면 승연이 졸업 할 때까지는 등록금 걱정 안 하셔도 될 거에요. 정아 아르바이트도 그만 두게 하시구요.”
경환의 부모님은 봉투에 오천만 원권 자기앞수표 한 장이 들어 있는 것을 확인 하고 깜짝 놀랐다.
“아니 네가 어떻게 이런 큰돈을 만지게 된 거냐?”
경환의 아버지는 혹시라도 아들이 옳지 못한 수단으로 돈을 번 게 아닌지 걱정스럽게 경환에게 되물었다.
“제가 다니는 회사에서 요번에 큰 계약을 하게 되었어요. 그 계약의 보너스로 받은 돈이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사실 받은 돈은 일억인데 나머지 오천만 원은 제가 가지고 있어요. 쓸 데가 있어서요.”
오천만 원도 놀랄 금액이지만 일억이라는 소리에 식구들은 입을 쩍 벌렸다. 그 당시 일억이면 강남은 아니더라도 서울에서 아파트 한 채는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염치없지만 고맙게 받을게. 그런데 무슨 계획인데 오천만 원이나 네가 가지고 있어야 되는 거니? 나한테 맡겨 놓으면 네가 필요할 때 알아서 줄 텐데.”
역시 경환의 어머니도 여자였다. 어머니의 주머니에 들어가서 돈이 다시 나오는 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거 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내년에 복학한 후에 편입을 하던지 졸업을 하고 가든지 빨리 유학준비를 하려고요. 한국 보다는 좀 큰 곳에서 눈을 떠 보고 싶어서요.”
해외로 나가지 않으면 삶이 고달파진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경환의 말을 들은 부모님은 내심 걱정스러운 모습이었다. 경환은 정아와 승연이 에게도 봉투를 한 장씩 건네주었다.
“너희들 용돈이다. 앞으로는 내가 용돈을 챙겨 줄 테니까 엄마한테 손 벌리지 말고, 정아 너는 꼭 아르바이트 그만 두고 학교만 열심히 다녀.”
용돈을 확인한 동생들은 눈을 크게 뜨고 봉투 속의 돈과 경환을 번갈아 쳐다봤다. 생각보단 훨씬 많은 금액이 봉투 안에 있었다. 부모님은 이런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 봤지만 경환의 유학 계획에는 쉽게 말문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유학비용은 걱정하지 마세요. 오천만 원이면 충분하고 유학을 가서도 제가 일을 할 생각이에요.”
“그래. 어디로 갈 생각이냐?”
경환의 굳은 의지에 경환의 아버지는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이 능력이 된다면 자신의 손으로 경환을 유학 보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 한탄스러웠다.
“아직 결정은 하지 않았어요. 복학을 해서 알아보려고요. 가능하면 대학을 졸업하고 갈 수도 있지만 빨라 질 수도 있어요. 결정이 되면 아버지께 먼저 말씀을 드릴게요.”
경환은 분위기가 무거워 짐을 느끼고 얼른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려 승연이의 대학준비 상황을 물었고, 모의고사 점수가 계속 오르고 있다는 말에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대입학력고사가 한 달도 남지 않은 상황이라 경환은 승연의 대학입시가 무척 걱정이 되었다.
길거리에선 온통 크리스마스 캐럴 송이 울려 퍼졌다. 경환은 다음 달 있을 1차 선적 분에 대한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KBR의 검수작업은 까다로웠지만, 최승호는 이를 전부 수용하고 매뉴얼화 시켜 같은 지적이 반복되지 않도록 보완 작업을 했기 때문에 KBR은 이런 화성의 노력에 오히려 감사 할 정도였다. 경환은 서서히 화성산업과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 달 남은 시간 동안 후회가 남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화성산업을 변화시키려 노력하고 있었다.
“팀장님, 계속 전화가 오는데 어떡할까요? 마냥 무시할 수는 없을 거 같은데요.”
중국이냐 미국이냐 유학 갈 곳을 정하지 고민하던 경환에게 강동원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몇 주 전부터 오성건설에서 만남을 요청하는 전화가 오고 있었지만, 경환은 쉽사리 만남에 응해 주질 않고 있었다.
“과장님이 이러실 정도라면 대충 무르익었네요. 우선 대신건설과 오후 2시로 해서 만남을 주선하신 후에 오성과 미팅을 오후 3시로 통보 하십시오. 장소는 반드시 저희 회의실 이어야 됩니다. 그리고 강 과장님은 이 부장님을 도와 제가 없더라도 앞으로 오성과의 일을 처리 하셔야 되기 때문에 회의에 참석 하시구요.”
그 동안 오성에 많이 시달렸던지 강동원은 경환의 말에 환하게 웃으며 급히 전화기를 들었다. 오성에서 누가 올지는 모르겠지만 반가운 얼굴일 것이라고 경환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환은 더 이상 오성의 사람이 아니었다. 경환은 급히 이 부장의 자리로 찾아가 미팅에 있어서 주관해야 될 내용과 앞으로 오성의 활용 방안에 대해 이 부장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부장님, 화성과 오후 3시 미팅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쪽으로 오랍니다.”
박화수 차장이 애 먹인다는 듯이 황태수에게 보고를 했다. 황태수은 기가 막혔다. 오성건설이라고 하면 다들 만나지 못해 안달들인데 화성은 오히려 바쁘다는 핑계로 만남을 몇 주 동안 피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아쉬운 건 화성이 아니라 오성이었다. 미국지사를 통해 KBR과 접촉을 했지만, 한국의 모든 업무는 화성산업과 하라는 싸늘한 대답뿐이었다.
“굳이 이런 조그만 회사에게 끌려 다녀야 됩니까?”
박화수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황태수를 바라봤다.
“아쉬운 건 우리지 화성이 아니야. 영업을 위해선 거지에게도 고개를 숙일 줄 알아야 돼. 넌 인마 성격 좀 고쳐. 그리고 화성이 혹 할 정도의 밑밥 잘 챙기고”
황태수의 질책에 고개를 긁적이며 자료를 챙긴다고 급히 자리에서 사라졌다.
황태수도 열불 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대후건설과의 격차가 갈수록 커지는 지금 KBR과의 기술제휴는 그 격차를 빠르게 줄일 수 있는 돌파구였다. 임원들의 기대가 큰 만큼 황태수의 어깨는 무거워졌다.
‘화성에게 밑밥을 주고 KBR과의 메신저로 이용을 하면 되겠지.’
황태수는 화성산업을 쉽게 컨트롤 할 수 있으라고 생각했다. 경환이 없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겠지만 경환은 그런 황태수를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황태수와 박화수는 시간에 맞춰 화성산업에 도착 한 후 회의실에서 빠져 나가는 대신건설 직원들과 마주 치자 당혹감에 빠져 들었다. 대신건설과는 평소 안면이 있었기에 가벼운 인사를 나누긴 했지만 자신들 보다 먼저 대신 측과 미팅을 한 이유에 대해서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이런 두 사람이 당혹감을 느끼고 있을 때, 경환은 회의실 밖으로 보이는 황태수와 박화수를 바라보며 잠시 감회에 사로 잡혔다. 신입사원 시절 경환은 두 사람에 의해 가혹할 정도의 훈련을 받았었다. 황태수의 지시에 의해 경환의 사수를 담당한 박화수는 다른 입사 동기들 보다 더욱 경환을 몰아붙였다. 밤을 새며 작성한 서류가 매일 욕설과 함께 경환의 면상으로 날아 다녔고 부서의 모든 잔무는 경환에게 주어졌다. 더한 고통은 부서장의 눈 밖에 났다는 소문과 함께 입사 동기들의 차가운 시선과 냉대였다. 동기들의 모임조차 참석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자 경환은 심각하게 퇴사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경환을 잡아 준 사람이 아이러니 하게도 황태수와 박화수였다.
‘좀만 참아. 오성은 아직까지 학벌과 지연이 판 치고 있는 곳이야. 일류대학 출신이 아닌 자네가 살아남기 위해선 그들보다 열 배 이상의 노력으로 앞서 나가야 되는 거야.’
경환은 그날 이후 죽도록 배워 나갔다. 여전히 결재 판이 경환의 얼굴로 날아 다녔지만 이를 악물고 참고 버텼다. 그런 성실함과 끈기로 동기를 보다 빠르게 진급을 할 수 있었다. 황태수가 본부장으로 승진하고 박화수가 부장으로 승진을 하면서 경환은 부서의 핵심 멤버로 성장을 했지만 잘못된 결혼의 여파와 IMF로 시작된 명퇴바람을 벗어나지 못했다. 명퇴신청서를 수리하던 날, 황태수는 눈물을 흘리며 경환의 얼굴을 주먹으로 내리친 후 경환을 힘껏 안아 주었었다.
‘야, 이 새끼야. 예전의 네 모습이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
해외영업부 차장을 끝으로 경환과 오성과의 인연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이 팀장님, 상당히 젊어 보이십니다. 하하”
옛 기억을 떠올리고 있던 경환은 정신을 가다듬고 자신에게 말을 건 낸 황태수를 쳐다보았다. 자신의 기억에 남아 있던 그 모습이었다. 순간 반가운 마음에 얼싸 안고 싶었지만 지금은 철저히 자신을 숨겨야만 했다.
“사실 제가 많이 젊습니다. 막 말로 새파란 놈이 운 좋게 자리를 차지 한 거라, 옆에 계시는 이 부장님이 아니었으면 애를 많이 먹었을 겁니다. 하하하”
황태수도 경환을 키맨으로는 결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 만큼 한국의 기업문화는 연공서열이 아직까지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다. 황태수는 경환이 집안의 뒷배경으로 운 좋게 팀장 자리를 차고앉은 것이라 생각했고 자연스럽게 대화는 이 부장과 이어지게 되었다.
“요번 KBR과의 계약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화성산업의 기술력이 그 만큼 높다는 걸 반증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황태수의 입에 침 바른 말에 경환은 과장된 몸짓으로 우쭐하는 모습을 일부러 보였다. 그 때, 이 부장이 진중한 모습으로 황태수의 말을 받았다.
“부장님의 축하 감사합니다. 그러나 아직 저희는 갈 길이 멀다고 봅니다. 이번 계약을 기초로 저희 화성산업을 한 단계 더 끌어 올리려고 합니다. 부장님도 아시겠지만 저희 화성은 아직 이쪽 업계에선 걸음마 단계이니까요.”
이 부장의 말에 황태수는 단번에 이 부장을 화성산업의 브레인이라고 맘을 굳혔다. 우선은 이 부장에 대해 좀 더 알아 볼 필요를 황태수는 느끼고 있었다. 이미 경환은 황태수의 시선에서 떠 난지 오래였다.
“과유는 불급이라고 했습니다. 이번 계약은 화성의 발전성을 KBR이 인정 한 것이라고 봅니다. 부장님 같으신 분이 계시니 화성의 미래는 밝지 않겠습니까?”
황태수의 아부를 들으며 경환은 속으로 웃고 있었다. 영업에서 잔뼈가 굵은 황태수답게 대화 초기 상대방을 무척이나 띄워 주고 있었다. 경환은 검지를 들어 이 부장의 시선을 의식하며 미간에서부터 코끝까지 미끄러지듯 쓸어 내렸다.
“부장님께서도 바쁘신 분이시니 인사치레는 접겠습니다. 오늘 방문하신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참, 그리고 몇 주 전, KBR 본사를 오성의 미주지사에서 방문을 하셨더군요. 그 이유와 더불어 같이 설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부장타이틀을 그냥 딴 것은 아니었다. 이 부장은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황태수와 박화수를 쳐다보았다. 황태수는 만만치 않은 이 부장의 모습에 순간 당황했지만 20년 가까이 영업으로 단련된 황태수의 표정은 변화가 전혀 없었다.
“아, 네. 죄송합니다. 우선 미주지사에서 KBR을 방문한 건 화성산업과는 별개로 가스열복합발전소 입찰에 공동수주를 제안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화성산업을 불편하게 했다면 사과를 드립니다. 저희 오성은 KBR과는 다른 시각에서 화성산업과의 업무협력을 제안하고자 오늘 찾아 뵌 것입니다.”
황태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박화수는 서류봉투 하나를 슬며시 이 부장에게 전달을 했다. 서류를 살펴 본 이 부장은 형식적으로 보일 정도로 경환에게 오성의 서류를 건네주었다.
“황 부장님 이건 울산 석유화학단지 증설에 필요한 철 구조물 도면이네요. 혹시 이 물량을 저희에게 주시는 건가요? 우리가 오성과도 계약을 할 수 있다니 사장님께 빨리 보고라도 해야 되겠습니다. 하하하”
“이 팀장, 좀 기다리게. 미팅을 끝낸 후 보고를 드려도 되지 않나.”
이 부장은 근엄한 표정으로 경환을 나무랐고 경환은 마지못해 의자에 다시 앉는 모습을 보였다. 이 부장은 서류를 한 쪽으로 치우고는 황태수를 바라보았다.
“황 부장님, 결론부터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금 주신 물량은 감사합니다. 그러나 저희 화성이 추구 하는 방향은 이런 단발성 물량 보다는 미래 동반자적인 파트너 관계를 원합니다. 걸음마를 떼려면 그만한 스킬을 보유하고 있어야 되지만 아직 우리 화성은 그런 스킬을 보유하고 있지 못합니다. 기술력을 보유하기 위해 저희는 이번 많은 불이익을 감내하면서 KBR과의 기술이전 계약을 체결한 것입니다. 부장님께서 저희를 찾으신 것은 저희 화성이 아닌 KBR과의 연결을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다 좋습니다. 저희는 저희가 필요한 기술력을 확보하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 업체와 함께 하고 싶습니다.”
경환은 이 부장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표했다. 경환은 오성이 찾아 온 이유와 대응 방법에 대해 알려주었지만 이 부장은 그 이상으로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기 때문이었다. 경환은 이 부장의 이 말이 진심에서 나온 말이라는 걸 깨닫고는 자신이 떠나고 없을 화성이 쉽게 쓰러지지 않을 것이라 느꼈다.
“흠, 이 부장님의 말씀 뼈에 각인을 하겠습니다. 오히려 얕은 수를 쓰려 했던 제가 부끄럽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저희 오성과 화성간의 전략적 협력관계에 대해 검토를 한 후 진지한 자세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황태수는 역시 노련한 영업맨이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 그 자리에서 사과를 한 후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를 다시 챙겼다. 경환이 아는 황태수의 성격상 오성과 화성간의 협력관계는 급물살을 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 줬던 걸 그냥 다시 가져가면 어쩌자는 거야?’
경환은 황태수가 챙긴 울산단지 물량이 못내 아쉬웠지만 웃으며 황태수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