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7화 (16/264)
  • #17

    다시 사는 인생 - 17

    최승화는 요새 웃음이 얼굴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각종 경제지의 인터뷰 요청들이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었고, 평소에 관심조차 주지 않았던 대기업들이 앞 다투어 업무 협력을 요청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고 해준 20만 불 이상의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는 중이었다. 계약서에 기술제휴와 기술이전을 협의한다는 달랑 한 줄을 넣고 20만 불을 인하 해 준다는 건 최 사장은 이해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국내기업들은 KBR이 선택한 화성산업을 무시 할 수 없게 되었고 오히려 화성을 통해 KBR과 연결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또한 은행들은 주거래은행으로 자신들을 선정해 달라는 요청과 함께 거의 매일 화성산업에 출근을 하고 있었다. 이게 다 경환을 믿어준 결과였다.

    ‘이 팀장만 꽉 잡으면 만사 튼튼인데…., L/C가 들어오면 인센티브부터 챙겨줘야 챙겨줘야겠구먼.'

    이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경환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군대시절 자신의 손금을 봐준 할아버지의 말을 무시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넨 물 건너에서 살 팔자야. 그걸 거스르면 고달픈 인생을 살게 될 걸세’

    ‘꼭 한번 기회가 올 걸세. 그 기회를 놓치지 말길 바라네. 내 부탁함세.

    유학인지 이민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생활근거지가 외국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알겠는데, 그게 어디인지를 모르니 답답할 뿐이었다. 자신의 전공을 살려 중국으로 가야 될지, 수정이 있는 프랑스로 가야 될지, 아니면 잭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들여 미국으로 가야 될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데 경환은 마땅히 갈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직원들이 다 퇴근하도록 고민에 빠진 경환은 퇴근도 잊고 줄 담배만 피워 대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를 들고 수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정을 부르러 간 시간이 훨씬 지나서도 수화기에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려는 순간.

    ‘경환이니? 미안 좀 씻느라 늦었어.’

    목소리는 밝아 보였다.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기에 주위 환경에 적응을 하고 있는 거 같아 한결 맘이 놓였다.

    “목소리 한번 들으려고 전화 했어. 목소리가 밝아져서 참 좋다. 잘 적응하는 거 같아서.”

    ‘응, 처음엔 좀 힘들었는데 주위에 한국학생들도 있고 해서 도움을 많이 받아. 지금은 좀 지낼 만 해. 넌 좀 어때?’

    수정과 소소한 대화를 하고 있는 지금 경환은 전생에서 느낄 수 없었던 행복감을 느꼈다. 대화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될 무렵 수정에게 마지막 질문을 했다.

    “수정아, 내가 혹시 미국이나 중국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면 나 따라 같이 가 줄래? 내가 밥은 안 굶길 자신 있는데.”

    수화기에선 아무런 소리가 없었다. 갑작스런 질문에 수정이 당황한 거라고 생각했다.

    ‘경환이 너 유학준비 하니? 내가 생각해도 네가 꿈을 펼치기에는 한국은 좁아. 난 당연히 따라가야 되는 거 아냐? 뭐야, 너 혼자 가려고 지금 수 쓰는 거야? 너 혼자 가면 죽을 줄 알아. 조강지처 버리고 잘 된 놈을 내가 못 봤다고.’

    경환은 웃었다. 전생의 자신은 수정을 이해하지 못해 서로 맘 아파했지만, 수정은 그런 경환을 이해해주려 최소한 노력하는 여자였다. 그런 잘못을 현세에선 다시 할 수 없는 경환이었기에 하루라도 빨리 수정과 함께 하고 싶었다. 수정을 겨우 달래고 어디든 같이 간다고 맹세를 한 후에야 전화를 끊을 수 있었다.

    오성건설 회의실에는 그룹 내 계열사인 오성건설, 오성물산, 오성엔지니어링 등 플랜트 관련 담당자들이 모여 대책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번 KBR의 움직임은 상당히 놀랍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기업을 협력업체로 선정한 이유가 자못 궁금합니다.”

    건설의 해외영업부 황태수 부장이 말을 꺼냈다.

    “우선 화성산업은 저희 엔지니어링의 2차 하청업체입니다. 대후건설의 일부 물량도 제작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고요. 그러나 규모나 기술력을 봤을 때 이번 KBR과의 계약은 솔직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엔지니어링의 고승철 이사가 인상을 찡그리며 이해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 이사의 말을 들은 참석자들은 이해 할 수 없는 KBR의 행동에 심각한 표정들이었다. 아직 대후건설이나 아동건설의 해외수주 실적 면에서 많은 격차를 보이는 후발주자였지만 플랜트산업을 미래 산업으로 지정하고 그룹차원의 전략적인 투자를 하고 있는 오성이었다. 이를 위해 건설과 물산을 합병시키는 계획을 세우고 있지만, 이것은 몇 년 후의 일이었다.

    “제 생각은 KBR이 한국기업의 플랜트시장 진입을 상당한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물산의 전승희 이사가 자신의 생각을 말을 했고, 모두들 전 이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저희 오성은 아직 KBR에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지만, 대후나 아동은 KBR과 수시로 경쟁을 해 오며 일진일퇴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대후는 KBR의 경쟁사인 KENTZ와의 기술제휴로 공동영업을 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화성산업을 전략적 차원에서 기술이전을 포함한 계약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지금까지의 한국기업의 수주전략은 특화된 기술력이라기보다는 저가 입찰 전략입니다. KBR은 대후나 아동의 저가공세를 견제할 목적으로 화성산업이라는 포석을 둔 것이 아닐까요?”

    전 이사의 말에 다들 공감을 하는 듯 한 표정이었다. 이러한 오성그룹의 자화자찬을 KBR이 알았다면 콧방귀를 뀌었을 것이다. KBR은 한국기업을 위협적인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KBR의 주 타깃은 가스열복합발전, 열병합발전, 원자력발전 등으로 아직은 한국기업의 기술력이 닿을 수 없는 것들 이었다. 10년이 지난 후라면 모를까 90년인 지금은 KBR은 한국기업들에게 먼 산이었다. 이번 계약이 KBR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닌 화성산업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계약이란 사실은 꿈에도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포석이라면 무엇을 의미 하는 건가요?”

    황 부장이 전 이사를 향해 설명을 부탁했다.

    “고 이사님의 말씀대로 화성산업은 그저 고만고만한 업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BR이 화성산업을 선정한 이유는 더 큰 그림이 있을 거라고 봅니다. 화성산업 입장에서는 KBR의 이번 제의에 감지덕지 했을 겁니다. 즉 화성산업을 매개체로 해서 한국의 전략적 파트너를 찾겠다는 메시지가 아니겠습니까? 이번 조인식에 중동 및 아시아 담당사장인 윌리엄유트와 그의 수족인 잭무어가 동시에 참석을 했다는 게 이런 의미 아닌가 생각합니다.”

    잭이 윌리엄을 부른 이유는 경환을 소개시켜 스카우트를 할 목적이었다. 이런 단순한 이유가 지금 회의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큰 의미로 과대 해석되고 있었다.

    “흠, 전 이사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이해가 됩니다. 그럼 KBR은 조만간 화성산업을 이용해서 파트너를 찾을 거라는 말씀이시군요. 대후나 아동은 물 건너갔으니 우리 오성이나 삼환, 대신건설이 유력하구요.”

    황 부장은 발 빠르게 움직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을 했다. 현재는 KBR의 기술력이 오성에겐 절실히 필요할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우선 황 부장님께서 화성산업과 접촉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희 물산은 미국지사를 통해 KBR과 접촉을 시도 해 보겠습니다. 다른 곳에서 움직임을 보이기 전에 우리가 먼저 선점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한참을 더 회의실에서 전략을 수립한 후에야 다들 밝은 얼굴로 회의실 문을 열고 나왔다. 이런 오성의 과대해석이 화성산업에겐 또 하나의 발판이 되리라고는 경환도 알지 못했다.

    경환은 무료한 날을 보내고 있었다. 서울사무소는 지시를 하지 않아도 직원들이 스스로 업무를 찾아 하고 있기에, 드라이브로 즐길 겸 해서 업무차량을 지원받아 마산공장에 내려가 제작회의에 참여하는 것 외에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마산공장은 최승호의 진두지휘 아래 생산 작업을 마무리 해 놓고 L/C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고 경환은 공장 직원들에게 납기일의 중요성을 수시로 강조를 하고 있었다. 특히 미국기업과의 거래에서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지구가 멸망한다 하더라도 납기일은 지키고 죽어야 된다는 말로 대신했다. 그때 최진호와 홍현수가 뛰어와 경환에게 인사를 했다.

    “팀장님, 오셨습니까?”

    경환에게 찍혀 아직까지 서울로 올라오지 못하고 있는 두 사람은 초췌한 모습으로 경환에게 선처를 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환은 두 사람을 아직 서울로 불러들일 생각이 없었다.

    “최 과장님, 홍 계장님 수고 많으시네요. 두 분의 어깨에 화성의 미래가 걸려 있습니다. 플랜트 제작에 있어서만큼은 전문가가 되십시오. 그러기 위해선 1차분이 선적될 때까지는 공장에서 수고를 해 주셔야겠습니다. 그 후에 서울로 올라 오십시요.”

    경환의 말이 끝나자 두 사람은 먼 하늘만 쳐다보며 아무 말이 없었다.

    “이 팀장님, 미국에서 전화 왔습니다.”

    여직원이 경환을 찾았고 경환은 급히 수화기를 찾아 들었다. 린다였다.

    “린다, 꽤 늦은 시간인데 아직 퇴근을 안 했네요.”

    미국 휴스턴은 저녁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저희 일에 밤낮이 어디 있어요? 그나저나 그날 저녁 제임스와의 키스가 너무 생각나는 밤이네요. 호호호.”

    만찬에서 있었던 린다의 기습적인 키스로 인해 경환은 며칠 동안 주위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만 했다. 나이도 10살 이상 많은 린다의 키스는 경환에게 유쾌한 일은 아니어서 두 번 다시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하하하, 애인한테 혼나면 어쩌려고 그래요?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가볍게 농담으로 응수하고 대화를 주제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싶었다.

    “제임스한테 결혼 해 달라고 매달리는 수밖에 없죠 뭐. 호호호, 다름이 아니라 L/C 케이블은 내일 열릴 거예요. 제작에 차질이 없이 준비 해 주세요.”

    “신경 써 주셔서 고마워요. 린다.”

    기다리던 L/C가 내일 오픈이 된다는 소식이었다. 이삼일 후에는 한국의 주거래은행에서 확인이 가능하기에 경환은 화성산업과의 이별을 준비해야 될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통화를 마치려고 했지만 린다는 급히 경환에게 말을 건넸다.

    “그리고 오늘 한국의 오성그룹에서 찾아 왔었어요.”

    오성의 발 빠른 대처에 경환은 다시 한 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한 발 빠른 정보입수와 대처 능력으로 2000년 이후에는 세계를 아우르는 글로벌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전생에선 오성의 직원으로 자부심을 느낀 경환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혹시, KBR과의 기술제휴와 공동수주를 제안하던가요? 한국의 대후건설의 대항마로 오성과 손을 잡자고 했을 거 같은데.”

    “후후후, 제임스는 정말 잭의 말대로 내 머리 위에 있네요. 맞아요, 제임스의 말대로 그런 제안을 해 왔어요. 그런데 내가 오성에게 어떤 답을 줬을까요?”

    린다가 전화를 해 올 정도면 화성산업에 유리한 답변을 했다고는 생각하지만, 백 개의 여우꼬리를 감추고 있는 린다를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

    “다음에 린다를 만나게 되면 근사한 저녁을 사겠습니다. 좋은 와인과 함께.”

    “호호호, 그 약속 잊으면 안돼요. 저는 기술이전에 따른 기술제휴는 화성산업과 독점으로 체결했으니 화성산업과 실무협의를 하라고 했어요. 화성산업의 요청이 있으면 검토를 진행할 수도 있다는 말과 함께.”

    경환은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을 린다에게 전하고 급히 전화를 끊었다. 사실 오성의 입장에서 화성산업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는 건 경환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오성의 이번 행동은 괘씸했다. 급할 게 없는 경환이었기 때문에 오성은 천천히 지켜 볼 생각이었다.

    며칠 후 L/C가 도착을 했고 화성산업은 L/C를 담보로 은행의 대출을 받아 냈고, 마산공장은 납기일을 단축시키기 위해 야간 조까지 편성하여 생산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첫 수출인 만큼 생산초기 경환은 마산공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수출실적이 없던 화성산업이 L/C로 은행의 대출을 받는 다는 건 쉽지 않았지만 KBR의 이름이 주는 무게감 속에서 주거래 은행을 변경할 수도 있다는 경환의 협박 아닌 협박을 통해 30%선에서 대출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경환은 공장 일을 마무리 하고 서울사무소로 돌아 온 상태였다.

    “이 팀장, 자네 덕분에 우리 화성산업이 드디어 해외진출을 하게 되었네. 그리고 이건 자네와 약속된 인센티브일세.”

    최승화는 흰 봉투 한 장을 꺼내 경환에게 내 밀었다. 약속된 1%의 금액에서 세금을 공제하면 7천만 원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봉투에는 1억이 들어있었다.

    “사장님, 너무 많은 거 같습니다.”

    “세금은 회사에서 지불하는 조건으로 계산을 했네. 더 많이 주고 싶지만 다른 직원들의 눈도 있고 해서 그 정도만 넣었으니 섭섭하더라도 이해해 주게나.”

    최승화는 부드러운 눈으로 경환을 쳐다봤다. 이렇게 해서라도 경환과의 인연을 끊고 싶지 않았다.

    “자네의 뜻이 너무 확고해서 더 이상은 잡지 않을 생각이네. 그렇지만 자네가 빠지게 된다면 불안한 것도 솔직히 많네. 그래서 하는 말인데 학교에 복학을 하더라도 자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도와주기 바라네. 그리고 졸업한 후에는 절대 다른 곳에 가면 안 되네, 사장자리를 달라고 해도 내 줄 테니 꼭 우리한테 와야 되네. 내 이건 진심으로 하는 말일세.”

    최승화의 간곡한 요청에 경환은 짠한 마음을 전달 받았다. 최승화가 자신을 믿어 주지 않았다면 오늘의 결과는 나오지 못했음을 경환은 알고 있었다.

    “사장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화성산업은 제게 있어서 처음 사회를 경험시켜 준 회사입니다. 저도 화성산업에 대한 애정이 있습니다. 제가 졸업을 하고 한국에 머물게 된다면 화성과 다시 일 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겠습니다.”

    경환은 최승화에게 인사를 하고 사장실을 빠져 나왔지만 최승화는 자리에 앉아 경환의 말을 다시 생각해 내고 있었다.

    ‘한국에 머물지 않아? 유학이라도 생각을 하는 건가?’

    그 동안 겪어 왔던 경환은 허튼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최승화는 급히 전화를 돌려 소희에게 당장 영어학원에 등록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