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다시 사는 인생 - 16
호텔에 돌아와 점심을 같이 하고 있던 KBR직원들은 오전에 있었던 회의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누고 있었지만, 린다는 식사도 거른 채 맥주 한잔을 마시며 속을 달래고 있었다.
“잭,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평소의 수다스러운 린다의 모습이 아닌 진지한 표정으로 잭에게 조언을 구했다.
“린다, 계약협상의 팀장은 자네야. 자네가 결정을 할 문제지만 내 조언이 혹시라도 필요하다면 한 마디 해 주겠네.”
“그래 주세요. 잭”
린다는 지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자신이 임의대로 수정한 계약서로 인해 윌리엄까지 승인한 이번 계약이 잘못 될 경우 자신의 커리어에도 상당한 영향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잭의 요청으로 윌리엄은 계약서 사인을 위해 한국출장을 준비하고 있는 상태였다. 경환의 요구사항을 일부 조정해서 받아들이면 쉽겠지만, 그건 자신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흠…, 그럼 한마디 해 주겠네. 오늘 미팅을 보니 제임스는 이미 린다의 머리 위에서 놀고 있더군.”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자신이 경환보다 못했다는 잭의 말에 화가 치밀어 올라 잭에게 오늘 오전에 쌓인 스트레스를 날렸다.
“워워, 린다 진정해. 냉철하게 잘 생각해 봐. 제임스는 어디서 정보를 얻었는지 모르겠지만, 라트람과의 지불조건까지 다 알고 있더군. 그런 제임스가 린다가 수정한 계약서 조항을 몰랐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만약 린다였다면 SEC의 계약서를 10분 만에 확인하고 정확히 오류를 찾아내는 게 가능했을까? 잘 생각해봐 린다, 거기에서 이미 승패는 결정된 거라고 생각해 나는.”
잭의 말을 아무리 곱씹어도 반론을 할 수가 없었다. 경환이 하나하나 계약서의 오류를 짚어 갈 때마다 린다는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후~~, 잭 그럼 난 어떡하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한숨을 내쉬는 린다를 보며 KBR내에서 지독한 여전사로 통하는 린다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경환이 한편으로 괘씸하기도 했다.
“린다가 가지고 있는 최대 무기는 우리가 발주처라는 거야. 이미 대세는 제임스로 기울었다는 걸 인정하고, 린다는 보스인 윌리엄과 인터뷰를 한다는 생각으로 지지 않는 싸움을 해야 돼. 화성과 제임스가 이번 계약으로 얻으려고 하는 게 뭐라고 생각해? 나는 거기에 린다가 얻을 수 있는 답이 있다고 봐. Give and Take! O.K?”
팔은 안으로 굽게 마련이었다. 잭의 조언에 린다는 환한 미소를 띠며 급히 접시에 있는 스테이크를 입에 넣기 시작했다.
ISO 심사원들과 식사를 마친 경환은 이른 시간이지만, 회의실에 도착하여 오후 미팅을 준비하고 있었다. 경환은 진작 이런 무리한 계약서가 린다의 작품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최승화는 계약이 잘못 될까 조마조마한 심정이었지만 경환의 한 마디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차피 실패라고 생각한 계약입니다. 지금 잘못을 바로 잡지 않으면 영원히 KBR의 똘마니가 돼서 던져 주는 밥찌꺼기나 얻어먹어야 될 겁니다. 계약이 안 되면 다음을 준비하면 됩니다.”
잠시 후, 회의실로 들어오는 린다의 모습이 매우 밝았다. 가볍게 오후 인사를 마친 경환으로서는 내심 불안했다. 암만해도 잭의 작업이 있었던 거 같아 잭을 순간 쳐다봤지만, 잭은 먼 산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린다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오전 회의에서 매너가 없었던 점 사과드립니다. 오전 회의는 참 건설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희 실무진들과 협의를 한 결과 화성산업의 수정 요구를 일부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경환의 통역에 화성 직원들은 기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지만, 경환은 인상을 찡그리며 눈을 살짝 감았다 떴다. 쉽게 백기를 들 린다가 아닌 걸 알고 있는 경환은 분명 뭔가가 있다는 감은 들었지만, 그 뭔가가 뭔지 쉽게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KBR의 큰 결정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양 사가 좋은 파트너십으로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를 희망합니다.”
경환은 여기서 계약에 대한 마무리를 지으려 했지만, 린다는 이런 경환에게 살짝 윙크를 보이며 말을 이었다.
“화성산업에서 요청한 인스펙션과 L/C문제는 동의를 하겠습니다. 페널티 부분은 0.5%로 조정하고 기술제휴와 이전에 대한 문맥 삽입은 불가능 하다는 게 저희의 입장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기술제휴와 기술이전에 대한 것은 중요했다. 경환은 화성산업에 뼈를 묻을 생각은 없었지만, 자신의 오점은 남기고 싶지 않았다. 기술제휴와 이전 문제는 화성산업에게 차후 20년 이상을 내다보게 하는 핵심이었다. 그래서 경환은 이 문제만큼은 양보 할 생각이 없었지만, 마땅한 명분이 화성산업에는 없었기에 린다를 보며 한숨을 내 쉬었다. 잭은 역전된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손으로 턱을 괴고 경환을 지켜봤다.
경환은 최승화를 바라보았다.
“사장님, 사장님께서 나서셔야 될 거 같습니다.”
경환은 회의를 준비하면서 최승화에게 큰 역할을 부탁했었다. 협상의 막바지에 다다른 지금 경환이 할 수 없는 부분을 최승화가 해 주어야만 했다.
“저희의 요구를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페널티는 반드시 0.1%가 되어야 함을 다시 한 번 요청 드리며, 기술제휴와 기술이전에 대한 협의를 진행한다는 조항은 저희에게 꼭 필요한 부분인 만큼, 계약서 문안에 삽입이 된다면 저희는 기존 오퍼 1450만 불에서 1430만 불로 조정할 의사가 있음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경환은 최 사장의 말을 통역해 주었고 계약서에 한 줄 넣어주는 대가로 20만 불을 네고 해 주겠다는 말에 린다는 살짝 미소를 비췄다.
“린다, 무승부라고 생각하는데 여기서 그만 끝내고 목이나 축이러 갑시다. 우리는 더 이상 물러 설 곳이 없습니다.”
더 이상 무리한 요구를 한다면 계약을 파기 할 수도 있다는 뉘앙스를 보내고 경환은 여기서 끝내자는 의미로 린다에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린다도 이 정도면 자기의 입장이 선 것 같다는 생각에 일어나 경환의 손을 맞잡고 악수를 나눴다. 기본 틀이 합의 되었기에 나머지 소소한 부분들은 빠르게 넘어갔다.
“제임스, 당신이 대학생만 아니었으면 내가 오늘 덮쳤을 거예요. 그냥 지금 확 덮쳐 버릴까? 호호호”
린다의 뇌쇄적인 눈빛에 경환은 살짝 당황스럽다는 듯이 린다를 바라봤다.
“제가 애인만 없었다면, 그 말을 그대로 린다에게 해 주고 싶군요.”
린다의 간곡한 부탁으로 대원각에서 저녁을 하게 되었고, 지난번과는 달리 경환을 제외한 모두는 후련하다는 듯 공연을 감상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미치겠네, 싸가지 저 가시나가 여길 왜 오냐고.’
최승화는 소희를 대원각으로 불렀고, 린다와 잭에게 마치 경환의 애인이라는 듯 한 뉘앙스로 소개를 시켰다. 경환은 입에 거품을 물고 두 손을 저었지만.
경환은 화성산업에서의 마지막 작품을 준비했고 그 결과가 지금 펼쳐지려 했다. 경환은 잭의 보스인 윌리엄이 계약 사인을 하기 위해 한국에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20만 불을 네고해 준 대가를 받아내기 위해 조인식을 최대한 화려하게 준비를 했다. 장소부터 조선호텔 홀을 임대 계약하여 조인식과 함께 만찬을 할 수 있도록 세팅을 했다.
“강 과장님, 기자들이 많이 안 보입니다.”
경환은 걱정스러운 듯 강동원을 찾았다.
“아직 시간이 남았습니다. 떡 고물 다 받아먹었으니 인사치레라도 하려고 올 겁니다. 제가 전화를 돌려 다시 확인을 하겠습니다.”
경환은 홀을 채우기 위해 최 사장의 인맥을 최대한 동원했고 일간지 경제부 기자들에게는 일일이 촌지를 돌리며 참석을 부탁했었다. 잭과 린다는 KBR의 인맥을 통해 미국 쪽 인물들을 요청해 자리를 빛내고 있었다. 경환은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상황을 점검했고 소희가 아는 척을 하며 경환의 앞으로 다가왔다.
“오빠. 오빠가 일하는 거 보니까 너무 멋있고 설레는데?”
“소희 씨, 나 무지 바쁩니다. 지금”
“알았어. 오빠, 방해 안 할게. 참, 나 요번 주말에 정아 언니하고 영화 보러 가기도 했는데. 오빠도 시간 나면 같이 보고.”
경환은 어이가 없어 뒤 돌아 가는 소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지만, 소희는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최승화와 윌리엄이 착석하고 조인식이 시작되려 했고 경환과 린다는 최승화와 윌리엄 옆에 앉아 보스들을 챙겼다. 최석현과 오늘 하루 고용한 동시통역사가 프로젝트의 개요와 KBR과 화성산업간의 플랜트 제작 및 기술제휴와 이전에 대한 의미를 간단히 설명했다.
“황 기자, 이거 잘 하면 뉴스거리가 되겠는데? 내가 알아보니까 KBR이란 데가 플랜트 건설에선 전 세계 탑10에 드는 회사라고 하더라고.”
데일경제신문의 김 기자가 자신과는 라이벌 신문사인 선조경제의 황 기자에게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식으로 물었다.
“화성산업이라고 들어 보지도 못한 회산데 이해가 안 돼. 수주금액이 1500만 불이나 된다니 말이야. 그리고 저기 보이는 사람이 미국 경제협력 담당 영사잖아. 대후나 오성, 아동건설 애들 열 좀 받겠는데…. 난 결정했어. 보도자료 준비해서 데스크에 넘기기로.”
삼삼오오 모여 있던 기자들이 수군덕거리며 기자수첩에 무엇인가를 빠르게 적어 나가고 있었고. 그런 모습을 경환은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니들에게 뿌린 게 얼만데 밥값 좀 해 줘야지.’
조인식 다음날 일간경제지엔 화성산업에 대한 두 가지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
‘화성산업 플랜트산업의 공룡인 KBR과 플랜트 공급계약 및 기술제휴 체결, 수주금액 1500만 불.’
‘화성산업 아시아기업으로는 최초로 ISO 9001 인증 획득’
조인식을 무사히 마친 윌리엄은 잭과 함께 마산공장을 둘러보는 짧은 일정을 마치고 KBR직원들과 함께 휴스턴으로 돌아갔다. 전날 만찬을 겸한 술좌석에서 린다는 술에 취해 기습적으로 키스를 경환에게 날려 주위 모든 사람의 눈에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