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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14화 (13/264)

#14

다시 사는 인생 - 14

다음날 오후 늦게 도착한 잭을 만나기 위해 경환은 호텔로비에서 최 사장 형제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최 계장의 안내를 받으며 잭이 호텔에 들어 왔고 반가운 악수를 나눴다.

“잭, 한국에 다시 온 걸 환영합니다. 기내식이 부실했다면 식사를 같이 할까요?”

최승화로부터 신용카드를 받아 든 경환은 무서울 게 없었다. 카드의 한도까지 다 써버리고 말겠다는 굳은 표정으로.

“미스터 최, 제임스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녁은 생각이 없습니다. 인도에서 하도 배불리 먹어서요. 간단히 술을 한잔 하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인도에서 배불리 먹었다는 말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환은 최승화형제에게 그 말을 전해 주었다.

“그럼 룸살롱으로 가는 게 좋지 않겠어?”

최승화는 다니던 룸살롱 중에서 어디를 가야 될지 고민하고 있었다.

“룸살롱은 오히려 역효과가 납니다. 제가 적당한 장소로 모시겠습니다.”

최승화는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고, 일행은 롯데호텔 지하에 있는 바비런던이라는 호프집으로 향했다.

“인도 출장에 문제가 있었나요?”

경환의 직구에 잭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떡이며 맥주를 들이켰다.

“난 제임스를 볼 때마다 놀랍니다. 상황분석이 너무 예리해서요. 맞춰 보세요. 내가 왜 다시 왔는지. 하하하”

경환은 잭이 왜 웃는 지를 설명해 주었고 최승화와 최승호는 그제야 잭의 말에 동감을 한다며 같이 입을 크게 벌려 웃었다.

“흠…., 인도의 라트람과는 이미 발주가 결정되었기에 계약만 남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잭이 급히 한국에 온 것은 라트람과의 협의가 잘 안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잭이 한국에 온 목적은 한 번 더 화성산업을 들러리로 세워 라트람을 압박 하는 건지 아니면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일부 물량을 화성산업에 발주를 주는 건지 둘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전 개인적으로 후자였으면 좋겠네요.”

잭은 웃으며 항복한다는 듯이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하하하, 제임스 앞에선 포커페이스가 안 통하네요. 그런데 틀렸습니다.”

경환은 좋다 말았다는 듯이 입술을 찡긋 올려 세우며 실망했다는 듯이 장난기 섞인 미소를 보였다.

“하하하, 결론부터 말하겠습니다. 화성의 견적가는 1500만 불이고 라트람의 최종 인상 요청액은 1480만 불입니다. 제 보스인 윌리엄을 설득한 제 얼굴을 봐서 1450만 불로 계약이 성사 될 수 있게 미스터 최를 설득해 줄 수 있겠습니까? 이번 발주가 성공리에 마치게 된다면 KBR과 화성간의 기술제휴를 포함한 다각적인 파트너십을 제 이름을 걸고 추진하겠습니다.”

경환은 잭의 말이 놀라웠다.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미국인인 잭이 알려 줄 수 없는 내용까지 털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경환은 잭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사실 견적가 네고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오퍼한 1500만 불에서 매출이익을 20%로 잡았기에 300만 불의 이익에서 50만 불은 충분히 네고가 가능한 금액이었다. 그러나 경환이 결정할 사항은 아니었다. 경환의 통역에 최승화와 최승호는 주먹을 쥐고 환호를 하고 싶었지만 잭의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최승화는 전권을 경환에게 주었다. 최승화 입장에서도 돈이 문제가 아니라 KBR이라는 거대기업에게 기술이전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더 탐이 났기 때문이었다.

“잭, 당신의 신뢰를 깨지 않을 것입니다. 사장님께서는 흔쾌히 동의를 하셨습니다. 앞으로 화성은 KBR과 동반자로서 윈-윈 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잭은 최승화에게 악수를 청하며 기쁜 마음을 표했고 경환의 어깨를 두들기며 친근한 미소를 보였다. 3일 후에 오는 린다를 통해 발주에 따른 디테일한 내용과 계약 세부조항을 협의하기로 하고 건배를 청하는 잭을 따라 다들 잔을 높이 들었다.

“제임스. 결혼은 했나요?”

뜬금없는 질문에 경환은 마시던 술이 목에 사래가 들렸고 결혼이라는 소리에 최승화는 경계의 눈초리로 잭을 흘겼다.

“하하, 제가 많이 늙어 보이나요? 전 군대를 막 제대하고 복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나 결혼을 생각해 볼 수 있겠죠.”

군대를 제대했다는 사실과 아직 대학생이라는 사실에 잭은 놀라 되물었다.

“이런 질문은 해서 미안하지만 도대체 올해 나이가 몇입니까? 그리고 왜 입대를 했나요?”

서양인들은 나이에 대한 질문을 잘 하지 않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실례를 범하는 질문이기도 했다.

“하하, 건강한 한국 남자들은 성인이 되면 모두 입대를 해서 2년 정도 복무를 해야 됩니다. 한국 남성의 의무죠. 전 올해 25세 입니다. 미국 나이로 계산하면 24살이 되겠네요.”

잭은 한국 남성들이 모두 입대를 해야 된다는 사실에도 놀랐지만 경환이 24살이란 말에 ‘오 마이 갓’을 수 없이 외치고 있었다. 잭은 경환을 최소한 30대 초반으로 생각했다. 좀 어려 보이기는 했지만 그가 만났던 동양인들은 나이보단 어려 보였기 때문에 경환도 당연히 그 범주에 속하는 것이라고 판단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정말 믿을 수가 없습니다. 구사하는 영어도 고급스럽고 국제경제를 파악하는 능력 등을 볼 때 24살 이라고는 상상이 안 됩니다.”

잭은 그제야 화성산업의 체질개선작업에 대한 모든 전략과 정보가 경환의 머리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되었다. 잭은 인간적으로나 사업적으로 경환에게 흥미와 호기심을 더욱 갖게 되었고 이 친구를 자신의 브레인으로 쓸 수만 있다면 어느 누구와의 경쟁에서도 이길 수 있을 거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잭의 눈이 반짝거렸다.

다음날 화성산업에서는 아침부터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최승화는 직원들에게 KBR과의 계약을 아침조회를 통해 발표했다. 직원들은 서로 얼싸 안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또 하나의 기쁜 소식은 ISO 사무국에서 검증을 하기위해 인원 2명을 파견하겠다는 공식 문서를 받은 거였다. 엉켜있던 매듭이 한 번에 풀리기 시작했고 직원들은 한층 더 자신감에 찬 모습들로 변하고 있었다. KBR과의 계약협상을 위해 기쁨을 잠시 접은 직원들은 자신들이 맡은 업무에 매진하느라 분주했고 경환은 최승화와 자리를 마주 하고 있었다. 경환은 화성산업과의 관계를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소희의 문제를 포함해서.

“사장님의 말씀대로 계약이 마무리 되고 초기 물량이 생산될 때까진 자리를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일차 선적이 내년 1월부터 시작되기에 그때까지 마무리를 하고 복학을 한다면 일정상 문제가 없어 보였다. 경환의 입장에서는 사실 대학에 대한 미련은 없었지만 앞으로 사회생활에 있어서 대학졸업장은 반드시 필요했다.

“험…., 이 팀장의 뜻은 잘 알았네. 학교를 다니면서도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출근 하면 무리가 없다고 보는데… 아직 시간이 있으니 천천히 생각해 보자고.”

경환을 통해 회사의 발전과 미래를 확인한 최승화는 경환을 놔줄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ISO준비상황을 강동원으로부터 확인하며 간단한 지시사항을 전달한 후 경환은 외출을 서둘렀다. 잭은 최석현과 함께 서울시내 관광을 하고 있어 경환은 남는 시간을 활용하여 운전면허를 딸 생각이었다.

“엄마, 좀 늦었죠? 죄송해요.”

“얘, 얘기는 나중에 하고 빨리 들어가자. 오 분 남았다.”

강남면허시험장에 겨우 시간에 맞춰 뛰어오는 경환이었다. 시험시간이 다 될 때까지 경환이 도착하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던 경환의 어머니가 경환의 손을 이끌고 시험장으로 급히 들어갔다.

‘끙’

사지선다형이긴 했지만 준비를 많이 하지 못한 경환은 알쏭달쏭한 문제들을 보며 머리를 쥐어짜며 펜을 열심히 굴리며 찍고 있었다. 그럭저럭 필기시험을 끝내고 경환은 어머니와 함께 시험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찍은 문제가 너무 많았기에 불안하기도 했고 자신만만한 어머니를 보며 ‘제발 붙어라’를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호호호, 얘 경환아. 난 90점이다. 네 수험번호가 뭐더라?”

‘헉’

90점을 받으신 어머니를 보며 경환은 ‘제발, 제발’을 평소 찾지 않는 하느님과 부처님을 간절히 찾으며 전광판에서 자신의 번호를 찾았다.

“경환이 넌 82점이네. 겨우 턱걸이 했구나.”

대학생인 아들보다도 자신의 점수가 높다는 사실에 고무된 듯 경환의 어머니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경환은 필기시험을 합격한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엄마, 필기야 대충 봐도 되는 거구, 중요한 건 코스와 주행이에요.”

현재의 운전시험과는 달리 90년대엔 실기시험으로 S자 T자 코스통과와 주행이 있었다. 20년을 넘게 무사고 운전을 한 경환은 의기양양 한 모습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여자가 실기를 한 번에 붙기란 사실 쉽지 않았기에 경환은 벌써 떨어질 어머니를 위로 해 드릴 말을 찾는 중이었다.

‘어, 어, 왜 이리 잘 하시지?’

경환의 어머니는 학원에서 배운 운전 실력을 유감없이 뽐내며 코스시험을 통과하더니 주행시험까지 단번에 합격을 해 버리고 말았다.

“엄마, 축하해요. 너무 잘해서 놀랄 정도네요.”

“호호호, 내가 한다면 하거든, 곧 있으면 네가 볼 차례네. 학원도 안 다니고 시험을 어떻게 본다고. 요번에 떨어지면 엄마가 가르쳐 줄게,”

‘컥, 엄마 나 20년 동안 운전 한 사람이거든.’

의기양양한 어머니를 뒤로 하고 코스시험을 보기 위해 자신에게 배정된 차 위에 오르는 경환이었다.

‘좌석 조정했고, 안전벨트 맸고, 기어 1단에 고정, 클러치를 살짝 떼면서…’

차는 천천히 출발해 T자 코스에 진입하고 있었다.

‘삐~~,’

“98번 수험자님 탈락이십니다. 차에서 내려 주십시오.”

마이크에선 탈락통보가 나왔고 경환은 순간 얼음이 되었다.

‘뭐 이런 개떡 같은….’

경환은 황당한 표정으로 차에서 내려 선을 밟고 있는 차바퀴를 황망하게 바라보았다. 창피하신 듯 경환의 어머니는 빨리 나오라며 손은 위 아래로 힘차게 저으셨고, 경환은 쪽팔림에 눈을 감아 버렸다. 열이 올라 다음날 재시험을 통해 면허증을 받아 내기는 했지만 두고두고 어머니의 놀림을 감당해 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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