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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13화 (12/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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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13

    모든 일을 마무리 하고 오랜만에 맞이한 일요일이었다. 경환은 느지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주간 긴장감 속에 지냈던 탓에 오늘은 느긋하게 하루를 보낼 생각이었다. 다음 주 금요일까지 업무 정리를 하겠다고 최승화에게 통보를 하려 했지만, 한 달 치 월급과 그 보다 더 많은 금액이 들어있는 봉투를 이 부장이 대신 전달하고는 최 사장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계약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인센티브를 받을 수 없어 아쉽기는 했지만, 개학 전까지는 버틸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었기에 천천히 미래를 준비 할 여유가 생긴 게 더 없이 기뻤다. 백만 원을 제외한 나머지는 경환과 막내의 학자금으로 어머니의 손에 쥐어 드렸다. 눈물을 글썽이던 어머니를 보면서 경환은 과거로 돌아온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운전면허가 없어 불편함을 느꼈던 경환은 면허를 따고자 문제집을 살피고 있었다. 운전이야 20년을 넘게 해 왔기에 걱정은 없었지만 필기시험은 은근 걱정이 되었다. 마침 경환의 어머니도 운전면허를 준비하고 계셨기에 다 푸신 문제집을 얻을 수 있었다.

    ‘젠장, 과거로 돌려보냈으면 팁은 하나 줬어야 되잖아. 달랑 몸뚱이 하나 밖에 없으니’

    문제집의 문제가 머리에 들어오지 않은 경환은 애꿎은 마몬만 씹고 있었다. 문제집과 씨름을 할 때 정아가 문을 빠끔히 열고 들어 왔다.

    “노크 좀 하고 들어와라, 속옷이라도 갈아입었다면 어쩌려고.”

    “뭐 나쁜 짓이라도 하고 있었어?”

    정아는 실실 웃으며 냉큼 경환의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수정이 언니하고 연락은 자주 해?”

    경환은 풀던 문제지를 덮고 정아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이유 없이 물어 보는 질문인지 아니면 이유가 있어서 인지 의문이 들었다.

    “자주는 못하지만 일주일에 한번은 통화를 하고 있어. 종종 편지도 쓰고 있고. 그런데 그게 궁금해?”

    정아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머뭇거리고 있었다. 정아를 생각하면 항상 마음이 짠한 경환이었다. 자신이 전생에 사업실패로 인해 가산을 탕진하고 방황했을 때 정아는 경환 대신 부모님과 집안의 일을 돌봤다. 그 미안했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경환은 하루라도 빨리 여대생이 꿈꾸는 대학생활을 정아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히히, 맞아, 오빠가 수정이 언니 엄청 좋아하는 걸 내가 아는데, 좀 이상한 일이 있어서 물어 본거야?”

    정아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궁금한 경환은 정아의 이어지는 말을 듣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어제 저녁에 공연 마치고 누가 찾는다고 갔더니 오빠네 회사 사장님이시더라. 인사를 드렸더니 용돈 하라고 30만원을 주시더라고. 사양은 했는데도 막무가내로 주시기에 어쩔 수 없이 받았어. 그런데 딸을 소개시켜 줘서 인사를 나누긴 했는데, 걔가 오빠하고 친한 사이라고 하면서 자주 만나자고 하더라. 그래서 좀 오빠를 의심했어. 오빠! 바람피우면 벌 받는다.”

    최승화를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참 집요했다. 이러다 수정이에게 말이라도 들어간다면 자신은 죽은 목숨이라는 생각에 어떻게든 소희를 정리 할 필요를 느꼈지만 좀 두고 보기로 했다.

    “정아야, 찾는데 인사를 안 할 수는 없지만 그 딸하고는 가급적이면 어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연한 기회에 그 딸을 알게 됐지만 절대 내 스타일 아니니까.”

    정아에게 신신당부를 하긴 했지만, 소희 그 싸가지를 믿을 수 없어 불안은 가중되었다. 다시 문제집을 보려 했지만, 통 머리 속에 집어넣을 수가 없어 문제집을 책상 위에 집어 던져 버렸다.

    ‘남들은 돈도 쉽게 버는데, 앞으로 26년간의 미래를 알고 있어도 손가락만 빨고 있으니’

    미래를 알고 있다는 것은 엄청난 기회이긴 했지만, 현재의 경환에겐 빛 좋은 개살구였다. 화가 치솟는 경환은 신경질적으로 잠을 청했다.

    인도 뭄바이에선 때 아닌 불협화음이 계속되고 있었다.

    “미스터 무어, 원자재와 인건비 상승을 감안할 때 이번 7%의 인상요청은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귀사의 넓은 아량을 보여 주실 때 입니다.”

    라트람 사장인 빌하난네루는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잭에게 납품가 인상을 요청하고 있었다. 잭은 출장 전 5%내에서의 납품가 인상에 대한 재량을 받았고 3%선에서 합의를 해 줄 생각이었다. 프랑스코스요리를 눈앞에 두고 햄버거를 먹을 수 없듯이 화성산업 직원들의 열정과 준비된 자세를 본 상태에서 체계화 되지 않고 열악한 생산 환경의 라트람이 눈에 차질 않았다.

    “미스터 네루, 저도 인상에 대해서는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인상계획도 가지고 있고요. 단지 제가 원하는 것은 제작과정에서 오는 불량률과 잘못된 포장으로 인한 파손율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을 요청 하는 것입니다.”

    잭은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웃고 있는 빌하난이 짜증스러웠다. 지난번 쿠웨이트 공사 때 포장불량으로 인해 많은 양의 화물이 파손되었고 현장에서 파손된 화물을 수리하느라 전체공정에 차질을 주기까지 했었기에 잭은 포장방법의 개선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는 중이었다.

    “일부 파손은 있을 수 있지만 불량은 인정을 못하겠습니다. KBR측이 지정한 인스펙션을 우리는 성실히 수행했습니다. 파손 또한 선박 안에서 이뤄진 것이기 때문에 선사를 추궁하시는 게 순서라고 봅니다. 미스터 무어께서 요구하시는 제작공정과 포장작업 변경은 저희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실실 웃으며 변명을 하는 빌하난의 면상에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잭은 이를 악물고 참는 중이었다. 빌하난은 자신의 요구사항은 전혀 들어 줄 생각 없이 제작비용의 인상만 요청하고 있었다. 빌하난은 자신의 요구를 들어 줄 수밖에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라트람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자신의 의견을 무시 하지 못한다는 걸 알 정도로 발하난은 영악했다.

    “좋습니다. 3% 정도라면 저도 합의를 하겠습니다.”

    잭은 짜증스러운 인도를 하루라도 빨리 떠나고 싶은 생각에 자신의 마지노선인 3%를 제시해 버렸다.

    “죄송합니다, 미스터 무어. 저희의 요청은 7%입니다. 네고는 어렵습니다.”

    빌하난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네가 어쩔 건데?’ 라는 표정을 지으며 잭을 바라보고 있었고, 마침내 잭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브레이크타임을 요청했다. 곧 이어 잭은 린다에게 회의를 주관하도록 지시를 한 후 홀로 호텔로 돌아가 자신의 보스인 윌리엄과 장시간의 통화를 나눴다.

    KBR건이 실패를 하긴 했지만, 직원들의 표정은 실패한 사람들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신감과 의욕이 넘쳤다. 수주를 진행하는 과정과 KBR과의 미팅을 옆에서 지켜 본 직원들은 경환을 자신들과는 다른 별종의 사람으로 인정을 했고 각자 경환에게 한 수라도 배우려고 수시로 경환을 찾았다. 영어의 중요성을 이번 미팅으로 경험을 한 강동원과 최석현은 영어학원에 등록하여 늦은 학구의 열을 불태웠고 오정미는 청소와 심부름에서 해방이 되었다. 사무실은 어느 때보다 활기로 가득했고 이런 모습을 최 사장이 모를 리 없었다. 최승화는 경환이 회사를 떠난다는 소리가 듣기 싫어 경환을 피하고 있었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경환은 계속해서 학업과 병행해서 일해 달라는 최 사장의 부탁과 직원들의 만류에 순간 고민을 하긴 했지만, 자신이 영혼을 팔면서까지 과거로 돌아온 이유를 화성산업이 아닌 곳에서 찾기로 결정을 했다. 최승화는 퇴근시간이 다 될 무렵 슬며시 들어왔지만 오늘 종일 최승화를 기다린 경환의 눈을 피 하진 못했다. 경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양복 상의를 걸친 후 사장실 문을 열었고 뒤에서 이 모습을 안타까운 눈으로 직원들이 바라보고 있었다.

    “사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 좀 바쁜데 다음에 하면 안 되겠나?”

    최승화는 경환과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결재 판을 바라보며 바쁜 시늉을 했다. 경환은 맘을 먹은 듯 최승화가 보던 말든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KBR건이 실패를 해서 면목은 없습니다만, 제가 더 이상 있을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직원들도 스스로 잘 움직이고 있고요. 금요일까지 정리를 하겠습니다.”

    경환의 일방적인 통보에 그제야 최승화는 눈을 들어 경환을 바라봤다. 경환의 결심이 선 모습에서 최 사장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을 꺼내려고 하는 순간 급히 사장실 문이 열리고 이 부장이 들어와 최승화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순간 최승화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이 팀장, 자네와 내가 계약을 할 때 분명 KBR건이 종료될 때까지라고 한 걸 기억하나?”

    “네? 네…, 그렇습니다만.”

    최승화는 자신의 의자에 허리를 깊게 묻으며 한 장의 팩스를 경환에게 전해 주었다.

    “잭 무어가 내일 온다는군, 아직 KBR건이 종료되지 않았으니 이 팀장도 그만 둘 수 없는 거 아닌가? 하하하.”

    경환은 잭이 보낸 팩스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잭이 다시 오는 이유가 무엇인지 고민스러웠고 더욱이 최승화가 한 말에 이의를 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최승화의 양해를 구하고 팩스에 적혀 있는 번호로 전화를 돌렸다.

    “잭? 제임스입니다. 팩스를 받고 전화를 드렸는데 갑자기 한국에 오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하하하, 제임스가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네요. 와이프가 알면 오해를 하겠지만. 좋은 소식을 가지고 갈 수도 있으니 지난번 마셨던 소맥한잔 더 합시다.”

    공항으로 출발하기 위해 짐을 싸고 있는 중인 상황이라 길게 통화 못한다는 말을 끝으로 짧은 통화를 마쳤다. 좋은 소식이라고 한다면, 경환은 대충 감이 잡혔다. 잭이 다시 온다는 소식에 눈치 빠른 직원들은 환호를 했고 경환은 급히 공장장인 최승호를 급히 서울로 불러올렸다.

    ‘그래, 내 인센티브는 아직 죽지 않았어. 흐흐흐’

    경환은 바쁘게 움직였다. 오정미에게 저녁을 배달시켜 달라는 부탁과 함께 야근을 지시했지만, 모두들 당연한 듯 야근을 받아 들였다.

    “강 과장님, ISO인증관련 준비 작업은 어디까지 되어 있습니까?”

    강동원은 급히 정리된 서류를 들고 경환 앞에 섰다.

    “서울사무소는 마무리 했고 마산본사는 다음 주면 대충 마무리 됩니다. 마산의 경우 정리되지 않은 서류들이 워낙 많아 정리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있습니다. 그래도 양식을 보내 주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과장님이 하시는 일은 저희에게 상당히 중요합니다. 매일 확인을 해 주시고, ISO사무국엔 제가 직접 인원 파견 요청을 하겠습니다.”

    경환은 ISO에 항공권과 숙식을 제공하겠으니 인증서 발급을 위한 검증인원 파견을 요청하는 문서를 팩스로 보냈다. 오늘은 이 부장과 차장급들도 견적비용에 대한 재검토 작업을 도왔기에 경환은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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