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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12화 (11/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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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12

    화성산업의 회의실엔 평소보다 일찍 출근 한 직원들이 모여 있었다. 경환은 최종 점검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KBR의 실사 일정이 이 틀에서 삼 일로 변경이 된 터라 점검 할 부분이 그만큼 많아졌다. 경환은 바쁘게 움직이는 직원들을 불러 모았다.

    “그 동안 절 믿고 따라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는 화성산업이 새로운 도약을 하는 계기가 될 것 입니다. 성공이냐 실패냐가 오늘만큼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충분히 강해졌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 강해질 것을 믿습니다. 오늘을 발판 삼아 세계로 향하는 화성산업이 될 것을 제가 여러분들께 자신합니다. 주눅 들지 않는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직원들은 자신감에 차 있는 모습이었다. 더 이상 이번 프로젝트의 성공에 연연해하는 않았다. 경환의 말처럼 기회는 앞으로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전화를 받고 돌아 온 오정미가 경환에게 말을 전했다.

    “최 계장님 전화입니다. 방금 공항에서 손님들을 픽업해서 출발 했다고 합니다.”

    미팅에 대한 리허설을 여러 번 해서 자신의 위치와 업무를 이미 숙지하고 있지만 직원들은 다시 한 번 꼼꼼히 되새기고 있었고, 최 사장은 경환이 작성해 준 예상 질문에 대한 답변 지를 넘기고 있었다.

    “잭, 제가 생각하고 있는 한국의 모습과는 너무 다르네요. 놀라워요. 넓은 강을 끼고 도로도 잘 되어있네요.”

    잭이라는 사내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고층건물과 수많은 차량들을 보며 린다의 말에 동의를 했다. 한국이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전쟁의 포화로 잿더미로 변한 도시와 고아를 수출하는 후진국으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대도시의 모습은 상상하지 못한 그였다.

    “잭을 한국에 오게 만든 화성산업이란 곳이 기대되고 흥미롭네요. 사실 저도 그 회사의 서류들을 보고 놀란 게 사실이구요.”

    생각에 잠겨 있는 잭은 린다의 쉬지 않는 수다에 슬슬 짜증이 밀려오고 있었다. 잭은 이번 사우디SEC 프로젝트를 총괄하여 수주를 성공시켰고 공사가 완료 될 때까지 현장에서 진두지휘를 할 책임자로 내정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번 공사를 무리 없이 완료하고 현재 추진 중인 가스복합발전소의 수주까지 성공한다면 파트너로 승격되어 KBR내에서의 입지를 굳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원래 자신은 한국은 건너뛰고 인도에서 실무진과 조인을 하려 했지만 화성산업이 제출한 서류들을 검토한 후 급히 한국행을 결정해 버렸다.

    자신의 보스인 윌리엄의 부탁으로 한국기업 한곳을 참여시키기는 했지만 애당초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았던 관계로 들러리로 밖에는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어떠한 KBR의 양식을 제공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KBR 조차도 시도 해 보지 않은 합리적인 사고력과 단순 철골 제작이 아닌 제작과 투입시기에 따라 전체공정에 미치는 영향까지 포괄하는 새로운 접근방식을 접목시키고 있는 내용에 잭은 기절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기본 틀은 변할 수가 없었다. 잠정적으로 인도의 라트람과 계약을 하는 것으로 내부 정리는 끝나 있는 상태였다. 잭은 화성산업이란 곳이 어떻게 반응을 할지를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회의실엔 실사팀 인원과 화성산업의 인원으로 자리가 꽉 차 보였다. 경환은 최 사장을 옆에 앉히고 실사팀들과 악수를 건네며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아마도 실사팀의 키맨은 후덕하게 생긴 잭 무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간단한 인사말을 나눈 후 경환은 화성산업에 대한 소개를 간략하게 브리핑 해 주었다. 여자의 수다는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다는 듯 린다쿡이라는 여자가 말을 꺼냈다.

    “미스터 리, 영어가 상당한 실력이시군요. 미국에서 유학을 하셨나요?”

    “감사합니다. 미스 쿡, 저는 아직 해외를 나가 보지 못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미국을 한번 방문해 보고 싶습니다.”

    린다를 포함한 실사팀들은 크게 눈을 뜨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경환은 명함을 교환하면서 잭무어와 린다 쿡은 15년 후 KBR의 회장과 사장으로 임명되는 인물이란 것을 알았기에 무척 놀라워했다. 잭 무어가 총괄한 프로젝트에서 오성은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경환은 쓴 웃음을 삼켰다. 여러 대화들이 오간 후 잭이 직설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오퍼시트라고 해야 될지 컨설팅 리포트라 해야 될지 구분이 애매한데 이러한 방식으로 접근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경환은 미소를 지었다. 경환이 작성하여 전달한 서류는 10년 후가 지나야 보편화된 방식이었기에 잭이 놀라워하는 게 새삼스럽지 않았다. 아마도 잭의 부하들은 무척이나 시달렸을 것이다.

    “미스터 무어, 저희 회사의 규모는 작습니다. 작은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들과 같아서는 안 됩니다. 다른 기업과는 차별화된 화성산업만의 스타일이고 해외 첫 입찰에 참여시켜 준 KBR에 대한 서비스라고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잭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오더를 달라고 매달려도 시원찮은 판에 단지 서비스를 제공한 게 전부라는 식의 말에 은근 오기가 생겼다.

    “하하하, 미스터 리, 서비스 감사하게 받겠습니다만, 계약을 하게 될지에 대해서는 확답을 드릴 수 없는 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잭은 앞에 앉은 젊은이의 반응이 궁금해 일부러 부정적인 발언을 했다. 어서 매달려 보라는 듯이.

    “하하하, 영어에 대한 배움이 짧다 보니 제 표현이 좀 서툴렀나 봅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화성산업은 현재 글로벌 시대를 예측하고 체질을 개선하고 있는 중입니다. 앞으로 무역장벽은 무너지게 될 것이고 세계화에 적응 하는 기업만이 21세기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기업 최초로 ISO인증을 받기 위해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잭은 앞에 앉은 젊은이의 입에서 세계화에 적응하는 기업을 만들어 가고 있는 중이라는 말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현재 자신들의 기업 모토가 세계화란 사실을 비웃기라도 하듯.

    “화성산업의 규모로는 시기상조이지만 KBR의 경우 WORLD-WIDE NETWORK SYSTEM을 구축하고 있으시라 생각합니다. 이것도 세계화의 일종이지 않겠습니까? 미스터 무어, 저희는 당신들이 왜 화성산업을 선택했는지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잭은 긴장을 바짝 하고 있었다. 단순한 통역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이 젊은 친구의 입에서 나오는 내용은 최고경영자 회의나 각종포럼에서나 나올 법한 내용들 이었다. 잭은 정신을 차리고 질문을 던졌다.

    “미스터 리의 의견에 동의를 합니다. 마지막으로 말한 우리가 화성산업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듣고 싶은데 말해 줄 수 있겠습니까?”

    놀라움을 떠나서 기대감을 생기게 하는 젊은 친구였다. 비즈니스를 떠나 개인적으로 친분을 쌓고 싶을 정도로 대단한 친화력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저희는 KBR이 제공한 부실한 자료를 가지고도 최선의 노력으로 최상의 답변을 드렸다고 자부합니다.”

    경환의 이 말에 잭을 비롯한 실사팀들은 겸연쩍은 듯이 웃음을 보냈고 경환은 말을 계속 해 나갔다.

    “KBR은 인도에 라트람이라는 하청업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저희와 가격경쟁을 유도한다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지분참여를 통해 라트람을 KBR의 네트워크에 넣으려는 하는 상황에서 라트람을 무시하고 저희와 계약을 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아마 내부 방침은 이미 라트람으로 결정이 됐을 겁니다. 따라서 이번 한국 방문은 라트람을 컨트롤 하는 차원, 그 이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미스터 무어, 제가 왜 KBR에 화성산업이 서비스를 제공했다고 했는지 이해가 되셨나요?”

    잭은 허탈했다. 이 조그만 회사 아니 젊은 친구 앞에서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KBR의 백분의 일 아니 천분의 일도 안 되는 손톱만한 회사가 이렇게 자신감 넘치고 당당한지 또한 KBR의 내부사정에 대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알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잭은 이 상황을 어떻게든 수습하고 주도권을 찾아오려고 했다.

    “하하, 무슨 오해가 있으신가 봅니다. 그런 이유였다면 서류로 정리를 하지 13시간을 넘게 비행기를 타고 오지 않았습니다. 물론 라트람이란 업체에 대해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만 KBR은 화성산업이 경쟁력이 있는 업체인지를 판단하기 위해 이 자리에 마주 앉아 있는 겁니다.”

    경환 또한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그만큼 잭은 노련했고 잡힐 듯 잡힐 듯 했지만, 미꾸라지처럼 기막히게 빠져 나가고 있었다. 양쪽 직원들은 경환과 잭의 설전을 긴장된 표정으로 쳐다보기만 할 뿐 감히 비집고 들어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린다를 비롯한 실무 팀들은 자신들만 한국에 왔다면 입도 뻥긋 못하고 얼굴은 다 팔린 상태로 한국을 떠났을 것이라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다.

    “미스터 무어, 제 말을 오해 하신 거 같습니다. 저희는 KBR에 무한한 감사를 느끼고 있습니다. KBR로 인해서 기업의 체질을 개선하는 전환점이 되었고 세계화에 동참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번 오더의 성공여부는 저희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희에게는 앞으로 많은 기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기회가 KBR이 될 수도 있고 KENTZ가 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단순 철골제작에서 벗어나 기술제휴를 통한 특수플랜트 사업에도 진출 할 계획으로 있습니다. 아무쪼록 이번 실사를 통해서 우리 화성산업에게 많은 조언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미스터 무어의 지적을 통해 한걸음 더 발전을 하고 싶습니다.”

    잭은 자신이 졌다고 판단을 했다. 계약은 필요 없으니 우리가 발전할 수 있게 조언을 해 달라는 놈을 이길 수는 없는 거였다. 잭은 한편으로 경환이 괘씸하기도 했다. KENTZ는 자신이 노리는 가스복합발전소 프로젝트에 최대 라이벌이었기 때문에 이걸 슬쩍 건드린 경환이 도대체 어떤 정보력이 있는지 무척 궁금했다. 이런 기업을 놓친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그러나 경영진의 내부조율이 끝난 상태라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상태였다. 경환 또한 예전의 기억을 쥐어 짜내서 라트람과 KENTZ를 기억해 내야만 할 정도로 집중 할 수밖에 없었다. 차후라도 잭과는 설전을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지쳐 있었다.

    “화성산업의 호의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내일 아침 저희는 일정대로 화성산업의 공장을 방문하여 실사를 진행 하도록 하겠습니다.”

    공장은 방문을 해 주는 게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 잭은 일정대로 움직일 뜻을 경환에게 전달했다.

    “미스터 무어, 정말 감사드립니다. 시스템 상으로 화성산업이 부족한 부분을 신랄하게 비판 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저녁은 저희가 준비를 했으니 사양하지 말아 주십시오.”

    KBR 직원들은 회의실 구석에서 조용히 대화를 나누며 지친다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경환은 강동원에게 접대 부분을 점검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성북동에 위치한 대원각은 뛰어난 주위 경관과 식사를 하면서 국악을 즐길 수 있었기에 해외 바이어 접대에 많이 이용이 되는 한정식 식당이었다. 2000년을 넘어서 요정으로 업종이 변경되기 전까지는 경환도 자주 이용했던 장소였다.

    저녁 접대에는 최 사장과 경환 둘이 동석을 하였고 강동원과 최석현을 옆방에서 대기하며 식사를 하도록 했다. 온돌방에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 있는 이상한 구조였지만, 이것은 좌식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KBR에 대한 경환의 배려였다. 또 하나의 배려는 각 음식을 개인별 코스로 준비한 것이었다. 한국의 음식문화는 여럿이 숟가락 젓가락을 섞어 가며 먹는 것이지만, 서양인들은 쉽게 이해를 하지 못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소주로 간단히 목을 축인 후 음식이 세팅되기 시작했고 앞에선 국악연주를 비롯한 춤사위가 공연되어지고 있었다.

    “오우 원더풀, 미스터 리, 정말 황홀합니다. 산속에 있는 전통가옥이란 것도 신기한데 음식과 공연은 정말 판타스틱 하네요.”

    린다가 엄지손가락을 펼쳐 들고 국악공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잭이 경환을 불렀다.

    “미스터 리, 나이는 많지 않은 것 같은데 국제적인 안목이 상당하네요.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번 오더가 성사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화성산업과 KBR은 반드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말을 당신의 보스에게 전달 해 주시기 바랍니다.”

    경환은 최승화에게 잭의 말을 통역해 주었고 최승화는 환하게 웃으며 자신 또한 KBR과의 협력을 기대한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최승화는 이 정도의 성과를 얻으리라고는 상상을 하지 못했다. 최승화의 머릿속엔 온통 경환을 사위로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미스터 무어, 앞으로는 제임스라고 불러 주십시오. 동양의 속담에 소탐대실이란 말이 있습니다. 작은 것을 얻으려다 큰 것을 놓친다는 뜻입니다. 화성산업은 작은 것에 연연하는 회사가 아닙니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진정한 파트너십을 KBR과 이뤄 가기를 희망합니다.”

    잭은 기쁜 마음으로 경환에게 앞으로 자신을 잭이라고 불러 달라고 하자 공연을 관람하던 린다도 자신의 이름을 불러 달라며 윙크를 날렸다. 이후 플랜트산업의 비전과 국제정세의 변화 등에 대해 가벼운 대화를 하며 저녁 자리를 마무리 했고 린다의 부탁으로 국악공연자들과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 중 한 명이 경환의 여동생이란 사실을 알고 린다와 잭은 놀라운 집안이라고 떠들었고 최승화는 보물을 찾았다는 표정으로 급히 지갑을 열어 과할 정도의 팁을 주었다.

    다음날 마산공장을 찾은 실사팀들은 다시 한 번 화성산업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게 되었다. 공장은 최 전무의 노력으로 변화를 하고 있는 과정이었기에 미흡한 부분이 많기는 하였지만, 생산관리시스템을 적용하는 과도기였기 때문에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었다. 공장의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실사팀의 눈에 들어 왔고 자신들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제공해 주었다. 특히 새로운 포장기술에 대한 힌트는 의외의 수확이었는데 화물의 파손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방안이라 최 전무는 잭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할 정도였다. 계약은 실패 하였지만, 서로 기분 좋게 일정을 마무리 하고 그 다음날 실사팀은 인도를 향해 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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