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다시 사는 인생 - 11
다음날부터 공장의 업무는 빠르게 조사를 해 나갈 수 있었다. 성격이 지랄 같은 최승호가 눈을 부라리고 경환의 옆에서 감독을 했기 때문이었다. 한꺼번에 손을 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우선은 KBR의 실사에 초점을 맞춰 생산공정과 자재관리, 포장작업 위주로 문제점을 개선하기로 했고 불량률을 낮추는 방안과 공장의 청결 상태 개선에 대해서도 심도 깊게 협의를 했다. 공장과 이틀간의 회의를 통해 경환이 원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성과를가지고 서울로 올라갈 수 있었다.
“최 과장님과 홍 계장님은 실사가 끝날 때까지 공장에 남아 계시고, 일지를 작성하셔서 김현아 씨에게 보내 주세요. 매일 아침 제가 볼 수 있도록 신경 쓰셔야 될 겁니다.”
뒤끝 있는 경환은 최진호와 홍현수에게 엿을 먹인 후 돌아오는 차에 올라탈 수 있었다. 경환은 돌아오는 차 안에서 미친 듯이 잠에 빠져들었고 운전을 하던 강동원과 김현아는 공장에서 진두지휘하는 경환의 모습에 깊게 매료되었다. 나이를 떠나서 자신들의 상사로 인정을 하고 있었다. 돈 주고도 배울 수 없는 실무를 경환을 통해서 배워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헤이, 조. 캐서린하고는 좋은 밤 보냈어?”
브래드는 출근하는 조를 향해 휘파람을 불며 캐서린과의 데이트 결과에 대해 물었다.
“말도 꺼내지 마. 그 년이 다른 놈하고 양다리 걸친 걸 알고 어제 끝냈어. 젠장!”
놀라운 듯 우스꽝스러운 제스처를 보이는 브래드를 뒤로하고 조는 어깨에 메고 있는 가방을 책상에 던지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신의 책상 위로 흰색봉투로 된 우편물이 배달되어 있는 걸 보며 신경질적으로 봉해진 서류를 찢어 내용물을 꺼냈다. 봉투에서 나온 것은 회사를 소개하는 팸플릿과 함께 한 번 더 밀봉되어 있는 오퍼시트였다.
‘화성산업?’
자신이 알기론엔 인도업체인 라트람을 압박하기 위한 들러리로 알고 있는 업체였다. 자신의 보스들도 크게 의미를 두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선에서 처리해 오고 있었지만, 며칠 전 받은 팩스가 신경이 쓰여 밀봉된 서류를 꺼내 보기로 했다.
조는 흥미를 느꼈는지 서류를 한 장씩 넘겨가며 훑어 보고 있었다. 서류상으로만 본다면 흠 잡을 곳이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거기에 국제표준화를 준수하기 위해 자신도 생소한 ISO9001을 인증받는 중이라는 내용과 ISO 사무국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는 레터까지 첨부되어 있었다. 또한, KBR이 자신들에게 제공된 도면과 시방서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여러 가정의 수를 제시하였고, 이에 따른 비용의 변화와 장단점까지 분석한 정말 완벽한 자료였다. 자신도 이 정도로는 만들 자신이 없었다. 또한, 내용이 지저분하지도 않고 간략하면서도 할 말은 다 하고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피로감을 느끼지 않게 하였고 한국기업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영어 또한 완벽했다.
‘이걸 혼자 보기 아깝군.’
보스와 실무진들이 한국에 출장을 간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한국 출장 기간은 이틀로 인도로 넘어가기 전에 잠시 스톱오버 하며 쉬는 거라고 들었다. 회의시간도 한 시간 정도로 짧게 진행을 하는 거로 들었지만, 이 자료만 보자면 충분히 검토를 해 볼 가치가 있는 업체라고 조는 생각했다.
‘내가 관여할 문제는 아니지만, 보스에게 전달은 해 줘야겠어.’
조는 서류를 집어 들고 보스의 사무실을 향해 뛰어갔다.
경환은 자리에 앉아 담배를 입에 물어 불을 댕겼다. 비흡연자들에겐 미안했지만, 이 시기엔 사무실에서의 흡연이 가능했기에 망설임은 없었다. 그동안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게 일에 매달렸다. 처음 냉소적이던 직원들도 어느새 적극적으로 변하려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으니, 이젠 자신이 할 일은 다 한 셈이었다. 회사의 체질을 매뉴얼에 맞게 변화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건 남은 직원들의 몫이었고 경환이 할 일은 이틀 후에 있을 실사팀과의 미팅이 전부였다. 예전 같았으면 직원들과 회식을 하며 회포를 풀었겠지만 도시락 싸가며 하루 천원으로 버티고 있는 경환에겐 무리였다. 오랜만에 일찍 집에 들어가 쉬려고 퇴근 준비를 할 무렵 최승화가 공장장인 최승호와 같이 회사에 들어오며 퇴근하려는 경환을 막아서고 있었다.
“오늘 열외 없이 회식에 참석하기 바라네. 그동안 고생했으니 목에 낀 때를 좀 벗겨 보자고.”
“와!”
최승화의 회식 얘기에 직원들은 함성을 질러 댔다. 역시 사장은 괜히 사장이 아니었다. 회식이 필요한 적절한 시기였기에 경환도 군말 없이 최승화를 따라 나섰다.
‘엥? 저 싸가지는 왜 온 겨? 어쭈구리, 오늘은 홀랑 벗지는 않았구먼. 가시나 여우 짓 하는 꼴 좀 보소’
회식장소인 고깃집엔 싸가지인 최소희가 무릎까지 덮는 투피스를 입고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경환은 속으로 욕을 해 대고 있었다. 직원들이 자리를 찾아 앉았고 경환은 본의 아니게 최승화와 최승호 맞은편에 최소희와 같이 앉게 되었다. 영 분위기가 찝찝했고 눈치 빠른 직원들은 그 의미를 대번 알 수 있었다.
“자, 그동안 일하느라 수고 많았어. 오늘은 아무 걱정 하지 말고 취해 보자고. 그리고 내일은 좀 늦게 출근해도 뭐라 안 할 테니까.”
높은 사람들은 레퍼토리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다는 게 참 신기할 따름이었다. 경환은 과거 회식 자리에서 최승화가 하는 똑같은 말을 상사에게 듣고 그다음 날 숙취로 지각을 하는 바람에 삼박사일을 고참 직원한테 깨졌었다. 따라서 술 먹고 늦게 출근해도 된다라는 소리는 술 처먹고 늦게 나오면 사표 쓸 각오 해라라는 뜻이었다. 최승화의 건배 제의를 시작으로 고기가 구워지고 술잔이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돌기 시작했다.
“이 팀장, 수고했어. 잔 받아.”
최승화는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경환에게 잔을 권했고 그걸 마다할 경환이 아니었다.
“이 팀장, 자네 덕에 공장도 체계가 많이 잡혀가고 있어. 처음 자네 뜻을 이해 못 해 미안했네. 내 잔도 받아.”
최승화에 이어 동생인 최승호도 잔을 건넸다. 경환은 잔을 받아 한 번에 꺾은 후 최승화와 최승호에 잔을 따라 주었다.
“저보다는 직원들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나이도 한참 어린 상사 비위 맞추느라 속이 다 썩었을 겁니다.”
겸양은 동양의 미덕이라 했으니 일단은 직원들을 좀 띄워 주기로 했다. 옆에서 고기를 쌈 싸서 먹던 강동원이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팀장님께서 다 하신 일입니다. 처음엔 사실 시기도 하고 불만도 많았지만, 팀장님께서 보여 주신 분석력 추진력, 저는 정말 감동했습니다. 많이 배웠고요. 제가 나이는 많지만 죽었다 깨나도 팀장님 못 따라갑니다. 하하”
강동원은 아부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전했다. 강 과장 옆에 있던 최석현도 고개를 연신 끄덕거리며 강동원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경환은 소주병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동안 사무실에 각을 세웠던 이 부장의 잔에 술을 따랐다.
“부장님껜 죄송했습니다. 부장님을 모시고 일을 하기엔 제 연배가 아직 낮아서 부장님이 많이 부담스러웠습니다.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시오.”
“허허허, 이 팀장 뭘 용서하고 말고 하나. 다 회사를 위한 건데, 난 괜찮으니까 맘 쓰지 말게.”
인간은 마무리를 잘해야 뒤탈이 생기지 않는 법이다. 이 부장과 엉켜진 실타래를 풀고 있을 때 김영철 차장과 김진성 차장의 얼굴은 죽을상을 하고 있었지만, 두 차장을 대우해 줄 생각은 애당초 없었던 경환이었다. 경환은 과거의 경험을 되살려 분위기를 업 시키고자 가게 주인에게 부탁한 맥주잔을 일렬로 쭉 세웠다.
“제가 가끔 마시던 술입니다. 사실 독한 소주를 넘기는 게 힘들 때가 많아서요. 잔을 꺾으면 안 됩니다. 소맥의 기본은 원샷”
말을 마친 경환은 소맥을 인원수대로 제조하고 건배 제의를 한 후 먼저 원샷을 날렸다. 경환이 모습을 본 후 최 사장을 시작으로 모두 원샷을 했지만 다들 의외로 괜찮다는 표정들이었다. 소맥의 시초가 경환으로부터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회식이 무르익을 무렵 최승화의 눈빛이 묘해지더니 동생인 최승호를 힐끗 쳐다봤지만, 경환은 직원들의 잔을 받느라 정신이 없어 그 눈빛을 보지 못했다.
“어허, 이 팀장.”
최승호가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경환을 불렀다. 묘한 분위기를 느낀 경환은 잔을 내리고 최승호를 바라봤다.
“내가 듣자니 소희가 이 팀장을 소개시켰다고 하던데, 소희를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옆에 앉혀만 둘 생각인가? 내가 보기엔 두 사람 잘 어울리는데 술 한 잔 주고 그래.”
경환은 그제야 이 회식자리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썩소를 날리며 옆에 앉아 있던 싸가지에게 두 손을 모아 술을 따라 주고는 최승호의 강요에 못 이겨 소희와 단독으로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경환의 썩소를 무시하고 직원들은 박수를 쳐 댔고 최승화는 흐뭇한 표정으로 소희와 경환을 바라봤다.
‘이 가시나, 이 싸가지 잔 꺾는 것 좀 보소. 아이고 인상 쓰는 거 봐라.’
경환은 채플린에서 맥주와 양주를 스트레이트로 마시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지만, 자신은 요조숙녀라는 듯 오만 가지 인상을 써 가며 살짝 목만 축이고 술잔을 내려놓는 소희의 모습을 보며 저 싸가지는 전생에 여우였을 거라고 확신을 했다.
회식자리가 끝나고 뿔뿔이 흩어지면서 젊은 직원들은 나이트클럽을 가는 눈치였지만, 경환은 2차까지 같이 갈 생각은 없었다. 직원들의 동행제의를 뿌리치는 모습을 본 최승호는 급히 경환의 손에 십만 원 짜리 수표를 한 장 건네주었다.
“이 팀장, 내가 오래간만에 서울에 올라와서 형님하고 술 한잔 더 하려고 하니까 미안하지만 소희 좀 집까지 데려다 주게. 밤은 기니까 둘이 술 한잔 더 해도 되고.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고 하지 않았나. 껄껄껄.”
경환은 황당한 표정으로 최승호에게 거절의사를 표하려 했지만 경환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이 최승화를 끌고 바쁜 걸음으로 사라져 버렸다. 길거리엔 경환과 소희만 남았고 그제서야 소희는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술 마시고 싶었는데 눈치 보느라 입맛만 다셨네. 오빠 나 술 한잔 사 줘요.”
아주 호칭을 오빠로 굳힐 생각인 소희를 어이없이 쳐다보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택시를 잡기 위해 도로를 서성거렸다. 그 모습을 본 소희는 하이톤으로 경환을 쏘아 붙였다.
“등록금 필요하다고 해서 좋은 아르바이트 소개시켜 줬으면 소개료는 못 줄망정 술 한잔은 사 줘야 되는 게 당연하잖아요.”
말을 마친 소희는 경환의 팔짱을 강제로 끼고 길거리 옆에 보이던 호프집으로 향했다.
같은 시간 최승화는 동생인 최승호와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형님, 소희가 이 팀장을 확 잡을 수만 있다면 좋겠는데 말이죠. 소희가 인물도 있고 애교도 있으니 말이죠.”
최승호는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실실 웃으며 술잔을 권했다. 최승화도 처음엔 경환이 사윗감으로는 한참 모자란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경환이 회사에 들어와 짧은 시간 동안 회사를 변화시키는 모습과 추진력을 보고 마음을 바꾸게 되었다. 소희도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리 싫지는 않은 모습이었고 아들이 없는 최승화 입장에서는 경환이 만한 사윗감이 없었다. 경환과의 약속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동생인 최승호와 상의를 했더니 쌍수를들고 환영을 했고 회식을 빌미로 두 사람의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었다.
“이 팀장이 워낙 강골이고 유학 가 있는 애인도 있다고 하는데 그게 좀 걸리긴 해.”
“형님은 이 팀장도 혈기왕성한 남자 아닙니까. 떨어져 있는 여자보다는 가까이 있는 여자에게 동하는 게 남자의 심리라고요? 오늘 둘이 사고라도 치면 딱 좋겠구먼. 쩝.”
동생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소주 한잔을 급히 털어 넣었다. 열 여자 싫어하는 남자 없는 것은 자신의 경험상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동안 지켜봐 온 경환의 모습으로는 장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요즘 소희에게 경환의 나이에 걸맞지 않은 능력과 회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란 얘기를 수시로 해 주고 있었다. 막말로 무남독녀인 딸애가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잠자리를 했다면 누구든 간에 요절을 냈겠지만, 오늘은 경환이 소희를 덮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는 최승화였다.
최승화와 최승호가 음흉한 계획을 아는지 모르는지 경환은 소희의 손에 이끌려 생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아빠가 오빠 꽉 잡으라고 신신당부를 하시던데요?”
소희가 두 손을 턱에 괴고 재밌다는 듯이 경환을 바라보았다. 경환은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소희 씨, 제 애인이 시퍼렇게 눈 뜨고 지켜 보고 있습니다. 저 맞아 죽는 꼴 안 보시려면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시간도 늦었는데 빨리 마시고 나가죠.”
보통 여우가 아니라고 생각한 경환은 이 자리를 후딱 정리하기 위해서 반 잔이나 남아 있는 생맥주를 벌컥거리며 잔을 비웠다. 소희는 경환을 따라 잔을 비우더니 경환의 의사를 무시한 채 두 잔을 더 주문하고선 화장을 고친다고 자리를 떴다. 사실 소희 정도면 빠지는 외모는 아니었지만, 첫인상을 별로 좋게 받지 못한 경환은 여자로서의 매력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가시나, 수 쓰고 있네. 내가 아무리 궁해도 넌 안 묵어.’
그때 화장실을 다녀온 소희는 느닷없이 경환의 옆자리에 앉아 팔짱을 끼면서 머리를 경환의 어깨에 기댔다. 경환은 흠칫 놀라 소희의 손을 빼려고 했지만 두 손으로 꽉 잡은 소희의 손은 빠질 기색이 안 보였다.
“오빠, 나 정도면 괜찮지 않아? 인물이 빠져, 그렇다고 몸매가 부실해, 무남독녀라 회사도 이어받을 수 있는데.”
이젠 말까지 놓으며 자신의 가슴을 앞으로 내보이며 경환에게 적극적으로 덤벼들었다. 경환은 자신의 어깨에 놓인 소희의 머리통을 쥐어박고 싶었지만, 며칠 후면 받게 될 월급을 생각하며 점잖게 타이르듯 소희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소희 씨, 지난번보다 술이 좀 약해졌네요. 외모며 몸매며 어후,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그런데 제가 임자가 있는 몸이라서 꾹 참겠습니다. 하하”
경환은 어색한 웃음을 띠며 계산서를 집어 들고 카운터로 향했고, 소희는 귀엽다는 듯 그런 경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병신, 줘도 못 먹네. 두고 보자고 누가 이기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