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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10화 (9/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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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10

    “아…나, 그 자식 도대체 뭐 하는 놈이에요? 어후, 사장님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아작을 내도 골백번은 냈을 텐데.”

    밥을 먹던 최석현이 밥알을 튀겨가며 경환을 씹고 있었다.

    “누가 아니래? 그 자식 사장만 믿고 설쳐대는 걸 도저히 볼 수가 없을 지경이야. 어쩌다 회사가 이렇게 된 거야?”

    어제 종일 전화를 돌리느라 생고생을 한 강동원도 최석현의 말에 동조하고 나섰다.

    “그런데 강 과장님이 어제 종일 찾아 헤매던 걸 단박에 찾아내는 걸 보면 신기하긴 하던데요. 그리고 최 계장님이 머리 아파하던 영문 서류도 깔끔하게 정리한 것도 그렇고. 인정할 건 인정해 줘야죠.”

    최석현과 문서작성 업무를 맡은 이현승이 의외로 경환의 실력을 인정하자는 얘기를 하자 강동원과 최석현은 고개를 푹 숙이고 밥만 퍼먹을 수밖에 없었다.

    회사의 업무시스템을 뜯어고치는 작업은 많은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었다. 경환은 화성산업의 모든 업무시스템을 자기 입맛대로 바꿀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존 업무는 무시하고 이번 KBR의 오더 수주에 맞춰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편법을 쓰기로 처음부터 작정하였다. ISO 인증도 시간상으로 받을 수 없었지만 경환이 노리는 것은 ISO 인증을 받기 위해 한국기업 최초로 제네바사무국과 협의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뿐이었다. 강 과장은 왜 ISO가 중요한지 오 년 후쯤이면 알 수 있겠지만.

    “저.. 팀장님. 다섯 시인데요.”

    다섯 시가 되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경환은 정신없이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자신을 찾는 강동원의 소리에 하던 일을 멈추고 강동원을 쳐다봤다. 다섯 시가 돼서 어쩌라는 표정으로.

    “그게…,저…. 스위스도 출근 시간이라서…”

    강동원은 최석현을 붙잡고 전화를 시켜 보려 했지만, 최석현은 멀리 도망가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재수는 없지만 경환만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경환은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화기를 들어 빠르게 전화를 걸었다. 경환이 한참 동안 통화를 하는 모습을 강 과장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오로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탱큐’밖에 없었지만.

    “한 시간 내로 스위스에서 ISO 인증에 관한 절차 및 양식 샘플이 팩스로 들어올 겁니다. 그 서류를 가지고 화성산업에 어떻게 적용시킬 지 검토해서 늦어도 내일 퇴근 전까지는 보고해 주십시오. 시간이 별로 없다는 건 과장님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말을 마치고 경환은 다시 자신이 하던 일을 계속 했고 강동원은 오늘도 퇴근은 물 건너갔다는 생각에 울화가 치밀어 오는 걸 겨우 막아내고 있었다. 경환은 쉴 수가 없었다. 분명 마산공장에서 일이 터질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산에 내려갈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도 서울 일을 빨리 마무리 지어야 했다.

    경환은 며칠 동안 숙식을 거의 사무실에서 하는 강행군을 통해 이번 프로젝트와 관련된 아웃라인을 잡을 수 있었고 KBR에서 요구하는 자료도 어느 정도 구색은 갖출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자료를 강동원과 최석현에게는 과부하가 걸리지 않도록 속도 조절을 해가며 건네 주었다. 그때 마다 두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느끼며 조금씩이나마 경환을 인정하기 시작했고 최 사장은 일언반구 경환이 진행하는 업무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수지분석에 따른 원가 분석표와 생산공정에 대한 업무의 매뉴얼화에 대한 소식은 아직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출장 보낸 최진호가 이 업무를 완료해야 경환이 생각하는 편법의 마지막을 장식할 수 있었고 이 업무가 완료되지 못한다면 최악의 경우 기존의 오퍼시트를 넣을 수밖에 없었다.

    “김현아 씨, 최 과장님은 연락이 없었나요?”

    경환의 질문을 받은 현아는 미간에 내 천자를 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런 개 썩을 호로 스키, 안 봐도 비디오다. 죽었다고 복창이나 해라.’

    마산공장과는 한번은 부딪힐 각오를 하고는 있었다. 다음 주 수요일까지 작업을 마무리하기 위해선 철야를 각오한다 하더라도 토요일까지는 작업을 마무리 해야만 했다. 지금 당장에라도 내려 가야 할 상황이었다.

    “강 과장님, 김현아 씨 출장 준비하세요. 저는 사장님께 보고하고 오겠습니다.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강동원은 그렇다 하더라도 여자인 김현아는 황당한 표정이었다. 여자는 준비할 게 많은데 이 무식한 놈은 사정을 봐 주질 않을 생각인 거 같았다.

    90년대부터 마이카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강 과장도 소형차인 프라이드를 장만했다. 이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강동원의 차로 이동하기로 하고 세 명은 고속도로를 밟고 있었다. 초보인 강동원의 운전실력을 믿지 못해 경환이 운전을 하려 했지만, 면허가 없음을 알고 허탈해했다.

    ‘끙. 면허부터 따 둘걸. 날 새겠네’

    예상시간보다 훨씬 늦게 마산 공장에 도착을 할 수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최진호를 만난 경환은 어이가 없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공장장님께서 협조를 전혀 안 해 주셔서….”

    경환은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최 과장의 말도 안 되는 변명에 짜증이 났고 경환 옆에서 죽도록 고생한 강동원과 김현아는 최진호와 홍현수를 죽일 듯 쳐다보고 있었다. 강동원과 김현아에게 최 과장 업무를 지원하라고 지시하고 경환은 공장장을 만나러 자리를 이동했다.

    공장장인 최승호 전무는 최승화 사장의 친동생으로 경환이 내려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최진호가 경환을 씹은 것도 일조하긴 했지만, 잘 돌아가는 공장을 휘저으려고 하는 경환이 영 못 마땅했기 때문이었다. 최승호는 경환이 들어와 인사를 하자 서류철을 경환을 향해 집어던졌다.

    “야! 이 새끼야. 네가 뭔데 잘 돌아가는 공장을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야? 나이도 어린 놈의 새끼가 현장에 대해서 알기나 해? 가서 엄마 젖이나 더 먹고 와.”

    최승호의 욕설을 듣는 경환은 열불이 터졌지만,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게 철저히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전무님께서 화를 내시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을 들으시고도 쓸데없는 짓이라고 하신다면 바로 서울로 올라가겠습니다. 딱 삼십 분만 저에게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

    최승호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재떨이를 들었다 놨다를 수차례 반복했다. 자신 앞에서 눈을 똑바로 쳐들고 설명할 시간을 달라고 서 있는 젊은 놈이 한편으론 기가 막혔고 한편으론 호기심이 들었다.

    “만약 삼십 분 안에 날 설득시키지 못한다면 때려치우고 나간다는 말 내가 지켜보겠어.”

    ‘이런 제기랄, 내가 언제 때려치운다고 했냐, 서울 간다고 했지. 등록금은 벌어야 되거든.’

    경환은 자리에 앉아 약속된 삼십 분을 넘겨서까지 최승호와 장시간에 걸쳐 대화를 나누었고 마침내 전무실의 문이 열리며 최승호와 경환이 나왔다. 최 과장을 비롯한 마산공장의 직원들은 자신들이 어린놈 때문에 당했던 울분을 최 전무가 대신하여 복수해 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모두들 최승호와 경환을 즐거운 마음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 이 시각부터 우리 본사는 이경환 팀장의 지시에 따라 최대한의 협조를 해 주도록. 협조에 미온적이거나 불성실한 직원은 즉각 해고 조치를 할 테니까 알아서들 해!”

    믿을 수 없는 말이 최승호의 입에서 나오는 걸 들은 직원들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알 수가 없어 연신 서로의 표정만 살피고 있었다. 그중에서 최진호와 홍현수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 가고 있었다. 최승호만 믿고 마산공장에서 매일 회를 먹으며 휴가 아닌 휴가를 보내고 있었던 두 사람이었다.

    ‘쓰바, 좆 됐다,’

    그런 두 사람을 강동원과 김현아가 불쌍하다는 듯이 혀를 치고 있었다. 내일부터 두 사람은 인생을 쓴맛을 경환으로부터 보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늦은 시간 최승호와 경환은 돼지갈비를 뜯으며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 팀장의 말을 백 프로 이해하는 건 아니야. 그러나 자네가 말한 내용은 피부로 실감하고 있거든. 사회 경험이 없는 특히 현장에 대해 전혀 모르는 자네가 어떻게 나보다 상황을 더 잘 알고 있는지 신기할 뿐이네.”

    최승호는 서류철을 날리던 모습에서 한풀 꺾여 있었다. 경환은 국내 기업 하청업체의 현실에 대해 설명하며 그 대안으로 현재 주먹구구식의 관리방식을 좀 더 효율적으로 매뉴얼화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로스 부분을 해결하고 이를 통해 비용절감을 해야지만 앞으로 살아남을 수 있음을 설명했다.

    “저는 사장님께서 국내 기업의 하청업체 수준에서 벗어나 해외로 눈을 돌리신 것은 선경지명의 탁월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너의 그런 추진력을 밑에서 받쳐 줘야 되는데 사실 화성의 능력으로는 벅찬 게 사실입니다. 이게 제가 본 화성의 현실입니다.”

    경환은 말을 끊고 잔을 들어 최승호와 부딪힌 후 고개를 옆으로 돌려 마셨다.

    “대기업은 하청의 이익을 고려치 않습니다. 오히려 하청을 쥐어짜서 자신의 이익을 불리는 집단이죠. 원자재가격이 상승하고 인건비가 뛰고 원가상승의 압박으로 하청의 이익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지만, 대기업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습니다. 원가는 상승하지만, 납품가는 하락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생기게 되는 거죠. 그 차액만큼 대기업의 이익은 불어나는 구조입니다. 화성같이 전문화된 기술력이나 특허가 없는 단순 플랜트 공장들은 짧게는 오 년 길게는 십 년내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될 것입니다.”

    경환의 말에 최승호는 소주잔을 털어 넣으면 고개를 끄덕였다. 근래 들어서 납품가 인하에 대한 압박이 심하게 들어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양자택일이 뭔가?”

    최승호는 경환을 바라보며 물었다. 경환이 25살이란 사실은 잊은 지 이미 오래였다.

    “인건비가 싼 동남아로 공장을 이전하든지 아니면 폐업을 하든지 둘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최승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형제가 서로 대 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서로 위기감은 서서히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걸 경환이 지적을 했기 때문에 경환의 말에 많은 공감을 하고 있었다.

    “그럼 자네는 이번 KBR이 우리에게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건가? 어떤 근거에서?”

    최승호는 맘이 급했는지 계속해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이번 KBR건의 성사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KBR은 화성을 들러리 정도로 밖에 생각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화성은 이번 건을 계기로 체질을 개선하는 작업을 할 수만 있다면 KBR이 아니더라도 앞으로 해외수주 업무를 충분히 수행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와 병행하여 전무님께서는 생산공정을 단순화 체계화시킴과 동시에 화성만이 가질 수 있는 기술력 개발에 심혈을 기울이셔야 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화성의 미래는아주 밝다고 생각합니다.”

    경환의 말에 최승호는 그제서야 굳었던 얼굴을 풀 수 있었다. 시계를 보던 경환은 흠칫 놀랐다.

    ‘이런 젠장, 휴대폰은 도대체 언제 나오는 거냐고.’

    수정과 통화를 하기로 약속된 시간이 되었지만 휴대폰이 없는 90년에 국제전화를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경환은 쪽팔림을 무릅쓰고 가게 주인에게 사정사정해서 수정과 짧게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음식값 외에 만원을 더 주기로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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