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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 - 9
경환은 등록금 마련도 중요했지만, 화성산업을 이용하여 자신의 실력을 점검하고 미래를 대비하는 준비기간을 벌 생각이었지만, 그건 두고 볼 일이었다. 경환은 내일 출장을 가야 할 최진호와 홍현수에게 자신이 만들어 준 서류에 대해 간단히 이해를 시키며 해야 될 업무를 상세히 지시를 내렸고 최석현을 박살 내고 있었다.
“최 계장님, 도대체 제대로 작성된 문서가 전혀 없습니다. 이걸 KBR 애들이 읽고 얼마나 웃었을지 제가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양식에 맞지 않는 건 둘째 치더라도 문법과 어법은 맞게 작성되어야 하잖습니까.”
“저…, 그게 제가 작성을 한 것들이 아니고 퇴사한 직원이 모두 작성한 것이라서…”
최석현은 억울했다. 사회생활도 없는 새파랗게 젊은 놈이 팀장이라고 자리에 앉아 자신을 나무라는 것도 화가 났지만 정작 퇴사하고 그만둔 놈이 작성한 서류를 가지고 자신이 깨지고 있다는 게 납득 하기 힘들었다.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해고를 한다는 사장의 말만 아니라며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회사 일에 관심이 없으십니까? 자기가 작성을 하지 않았다고 면피 되는 건 아닙니다. 모든 문서를 문법과 어법에 맞게 수정해서 내일 아침까지 보고 하세요.”
최석현이 깨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던 강동원은 급히 표준협회와 스위스대사관에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지만 난감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당연하지. 애 좀 먹어봐.’
ISO 인증은 92년 이후에나 한국에 진출을 하기 때문에 90년인 지금 강 과장이 전화통을 돌려봐야 쉽게 정보를 입수할 만한 곳은 국내에는 없었다. 경환은 나름대로 수주전략을 짜느라 9시를 넘어서야 퇴근을 할 수 있었다.
“저녁은 먹었니?”
늦은 퇴근에 걱정되신 어머니가 경환을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네, 회사에서 간단히 먹었어요. 혹시 저 찾는 전화는 없었나요?”
그때 정아가 방문을 빼꼼히 열어젖히더니 고개만 삐죽 내밀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왜? 수정이 언니 전화 기다려? 전화가 오긴 했는데, 전화번호를 하나 알려주더라고. 그런데 내가 기억이 가물가물하거든, 생각이 날 듯 말 듯..”
과거라면 한대 쥐어박았겠지만, 새 삶을 살고 있는 지금 그런 정아의 모습도 귀여워 보였다.
“흠…, 월급타면 선물 하나 주려고 했는데, 나도 기억을 할지 모르겠다.”
정아는 그제서야 선물 잊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나서야 전화번호가 적혀 있는 종이를 넘겨 주었다. 전화를 하고 싶었지만, 인터넷전화가 없는 90년의 국제전화 요금은 상상을 초월한 정도로 비싼 시기였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오늘 하루만 써. 다음부턴 안된다.”
어머니가 경환의 마음을 읽었는지 짧게 쓰라는 당부와 함께 안방으로 자리를 피해 주셨다. 경환은 고마움을 느끼며 급히 수화기를 들어 전화번호를 눌렀다.
“알로?”
수화기에선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분명 수정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공용전화다 보니 수정이가 직접 받을 거라 곤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상대방이 영어를 하지 못한다면 곤란한 상황이었다.
“여보세요? 부탁을 드려 죄송하지만, 어제 유학 온 한국 학생 중에서 502호실의 김수정과 통화를 하고 싶습니다.”
“잠시 기다리세요.”
좋은 발음은 아니었지만, 상대방이 영어를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여보세요? 경환이니?.”
시간이 꽤 흐른 뒤 수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아니라면 어쩌려고 그래? 잘 도착한 거 같아 안심이 좀 된다. 많이 바쁘지?”
“히히, 나한테 남자는 너 하난데 그걸 모르겠어? 너 바람 피우면 죽는다.”
수정은 어김없이 다시 한 번 주의를 주었다. 길게 통화를 할 형편이 아니었기에 사무실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서로 전화통화를 시간을 정하고 아쉬운 통화를 끝냈다. 짧게 했다고는 했지만, 통지서를 나오면 분명 놀라실 게 뻔했다. 내일부터 전쟁이 시작되기에 오늘은 일찍 쉬어야 했다.
다음날 경환은 최석현을 박살 내는 거로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영문서를 몇 장 넘겨 보다 최석현을 불렀다.
“최 계장님, 지금 회의실에서 잠깐 미팅 좀 하시죠.”
경환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로 향했고 최석현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경환의 뒤를 따랐다.
“최 계장님, 노력하신 건 알겠지만, 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좋을지 모르겠네요.”
최석현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대학을 다니던 시절은 독재정권에 맞서 수업보다는 데모를 밥 먹듯이 할 때였다. 명색이 영문과 출신이긴 하지만, 자신의 능력으로는 손도 대질 못 하고 어제 밤눈을 꼬박 새웠다.
“저… 그게, 졸업한 지도 오래되고….”
최석현은 말을 잊지 못했다. 경환은 컴퓨터로 작성 출력된 서류를 최석현에게 건네주었다.
“제가 수정한 것입니다. 가지고 가셔서 살펴보시고, 이것을 근거로 해서 앞으로 해외로 나가는 문서의 규격과 형식을 통일시키는 작업을 해 보세요. 마지막 문서는 오정미 씨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타이핑을 시키셔서 KBR에 보내시고요. 그리고 다음 주까지는 KBR에 오퍼시트가 들어가야 하니 기존의 오퍼시트를 무시하고 처음부터 다시 작성해서 보고하시고요.”
경환은 먼저 회의실을 나갔고 최석현은 경환이 수정한 문서를 보며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잘은 모르지만 경환이 수정한 내용은 간략하고 깔끔했으며 무엇을 얘기하는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이런 쓰바, 지가 할 거면서 왜 나를 물 먹이느냐고.’
최석현은 회의실 탁자에 머리를 박으며 자신의 능력을 한탄하고 있었다. 비전공자가 하면 얼마나 하겠냐는 생각이었지만, 경환이 작성한 문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자신은 흉내도 낼 수 없을 정도였다.
‘나도 하고 싶어 한 게 아니라고. 시간이 없잖아 시간이.’
회의실을 나온 경환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강동원이었다.
“강 과장님,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똥 마려운 강아지 마냥 머리를 긁적거리는 강동원을 바라보며 경환이 물었다.
“그게…., 도통 ISO란 게 뭔지를 모르겠습니다. 전화를 수십 군데 돌려도 모른다고만 하고 스위스대사관도 모른다고만 하니 도대체 ISO가 뭡니까?”
강동원은 죽을 맛이었다.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 젊은 놈의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고 싶지만, 마누라와 자식들이 눈에 선해 혼자 속만 끓고 있었다. 경환은 강동원을 자리에 세워 놓고선 스위스 대사관에 전화를 걸었다. 국제협력을 주관하는 담당 영사와 몇 마디 통화를 한 경환은 ISO 사무국의 전화번호와 담당자의 이름을 받을 수 있었다.
“ISO 사무국의 전화번호입니다. 스위스는 한국과 시차가 8시간 차이가 있으니 오후 5시 전화를 걸어 절차를 확인해 보세요.”
전화번호와 담당자 이름이 적힌 메모지를 받은 강동원은 어안이 벙벙했다. 반나절 동안 찾아 헤매도 찾을 수 없는 걸 이 젊은놈은 전화 한 통화로 손쉽게 얻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강동원은 아무 말 없이 메모지를 들고 자리에 돌아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난 영어를 못한다고.’
강동원이 자리에 돌아가는 걸 기다렸다는 듯이 오정미가 타이핑한 서류를 가지고 최석현이 검토를 요청했다.
“무슨 내용인지는 아시겠죠?”
경환의 질문에 최석현은 자신 있게 목소리를 높였다.
“네, 수정된 오퍼시트는 기한에 맞춰 다음 주 수요일까지 보내주겠다는 것과 실사팀의 한국 방문을 환영한다는 내용입니다.”
“제 전결로 KBR에 팩스 넣으시고, 최 계장님은 문서 통일화 작업과 오퍼시트 수정에 전념하세요.”
경환은 머리가 아파져 왔다. 오퍼시트를 작성하기 위해서는 마산 공장과 생산회의를 진행하여야 했지만, 현장 사람들이 따라와 줄지가 의문이었다. 이건 오늘 출장을 간 최진호의 몫이었고 정 안되면 최승화의 파워로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경환은 집에서 싸 온 도시락을 꺼내 들었다. 주머니가 넉넉하지 못한 이유도 있었지만, 이번 일만 마치면 떠나야 할 처지라 직원들과 식사를 같이 하면서 인간적으로 친해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