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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8화 (7/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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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8

    경환은 오정미가 옆으로 올 수 있도록 책상을 옮겨 주었고 KBR과 관련된 모든 문서와 마산 본사공장을 포함한 모든 직원인사카드를 일일이 살피고 있었다. 일부 젊은 직원들은 나름대로 회의를 준비하는 듯 보였지만, 대부분의 직원들은 별 관심이 없는 듯 신문을 들춰 보거나 잡담으로 오전 일과를 허비하고 있었다.

    ‘그래, 쭉 놀다 들어와 봐. 죽었다고 복창하고.’

    집에서 싸온 도시락으로 혼자서 점심을 해결하고 제일 먼저 회의실에 들어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시계는 1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이 부장을 포함한 서너 명의 고참직원들은 아직까지 회의실에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후후후,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놀고 있네. 이걸 보려고 최 사장을 회의에서 못 오게 한 거야..’

    시간을 확인 한 경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현석 계장님 죄송하지만, 회의실 문을 잠가 주시기 바랍니다.”

    “네? 저…. 아직 부장님과 차장님들께서 들어 오지 않으셨는데…..”

    최석현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비즈니스의 생명은 신용과 시간 엄수입니다. 회의는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분들과 하겠으며 참석하지 못하신 분들은 프로젝트팀 구성에서 제외시키겠습니다. 이것은 사장님과 사전에 조율을 끝낸 부분입니다. 최 계장님 문 잠가 주십시오.”

    최석현은 왜 자신이냐는 듯한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잠그고 자리에 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인생 꼬였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오정미 씨와 김현아 씨는 회의내용을 발췌해서 워드로 정리해 놓으세요.”

    “저…, 워드가 뭔가요?”

    오정미가 부끄러운 듯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질문을 했고 경환은 순간 당혹스러웠다.

    “컴퓨터로 문서를 만드는 것을 워드 작성이라고 합니다. 컴퓨터 조작은 나중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자 그럼 회의 시작하겠습니다.”

    회의에 참석한 직원들의 표정은 반반 있었다. 얼마나 하는지 보자 라는 표정과 약간은 기대감이 섞인 표정으로 확연히 나뉘고 있었다.

    “우선 이번 프로젝트에 대해서 간략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사우디 전력청인 SEC의 발주로 제다에 건설될 복합화력발전소 1단계 공사로 총 12억 불의 수주금액으로 미국의 KBR이 계약자로 선정되었습니다. 공사기간 3년을 기준으로 턴키계약이며 KBR은 설계 제작 시공 시운전까지 일괄적으로 주관을 하는 방식입니다. KBR이 어떤 회사인지는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KBR이 화성산업에 제작 의뢰한 플랜트규모는 1500만 불, 한화기준 105억 규모이며 제작기간 2년으로 연간 53억 규모라고 보시면 됩니다. 1500만 불은 여러분이 만든 오퍼시트를 기준으로 했습니다.”

    다들 말이 없었다. 견적을 준비하는 3개월 동안 나름 이 프로젝트에 대해서 귀동냥으로 알음알음 알고는 있었지만, 경환이 말하는 디테일한 내용은 오늘 처음 접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어떻게 하루 만에 이런 내용을 다 파악할 수 있었는지 다들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지피지기 백전불패로 신입사원 시절 빡세게 중동 프로젝트를 스터디 한 보람을 느끼네.쩝.’

    경환은 오성 건설 신입사원 시절 OJT의 일환으로 중동의 각 플랜트 프로젝트를 스터디 했고 마침 KBR의 이 프로젝트를 운 좋게 기억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철컥, 철컥’

    회의실 문고리를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이 부장을 포함한 인원들이 회의에 들어오려고 하는 듯했다. 회의는 잠시 중단을 할 수밖에 없었고 직원들은 좌불안석이었다. 자신이 나서야 할 때인 것을 안 경환이 회의실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죄송합니다. 이미 회의가 시작되었으니 방해하지 마시고 다른 업무를 보시기 바랍니다.”

    밖에선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경환은 문을 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시건방지게 시리.”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감정 섞인 목소리가 들렸고 회의실 밖은 이내 잠잠해졌다. 회의실 중앙에 돌아와 다시 자리에 앉은 경환은 불안해 어쩔 줄 모르는 직원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회의를 계속 진행했다.

    “자, 개요에 대해선 이해를 하셨으리라 봅니다. 그럼 KBR이 무슨 이유로 우리에게 견적의뢰를 했는지와 과연 우리가 KBR을 만족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의구심이 드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최고참이신 강동원 과장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왜 하필 내가….’

    위에서 만들라는 지시를 받아 아무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경환이 내놓는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주도권은 이미 경환에게 넘어가 있는 상태였고 강동원은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저… 그러니까, 음…., 생산 사이트를 다변화해서 비용절감을 유도할 목적이지 않을까요? KBR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기존 마진율을 인하하여 코스트를 다운시킨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봅니다.”

    자신의 입에서 이렇게 멋진 말이 나올 줄 몰랐다는 듯 엄청 만족한 모습으로 어깨를 으쓱거리는 강동원이었다. 그런 강동원을 후배 직원들은 '역시 강 과장이야'라며 고개를 끄떡거렸지만, 경환은 묘한 미소만 보일 뿐이었다.

    “비용절감을 위해 생산사이트를 다변화하는 건 기본입니다. 왜 하필 화성산업이냐는 것을 알아야 대응전략을 수립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회사의 이익을 대폭 줄인다면 KBR이 우리와 계약을 할까요?”

    경환의 말에 으쓱해 하던 강동원이 똥 씹은 얼굴로 끙끙거렸다. 혹시라도 경환과 눈이 마주 칠까 모두들 바닥만 살피고 있었다. 이러한 토론식 회의가 처음인 직원들은 아주 죽을 맛이었다. 사지선다형에 익숙하게 만든 한국교육의 문제점이 여과 없이 나타나고 있었다.

    ‘니들은 더 깨져야 하지만 시간이 없는 걸 다행으로 생각하쇼.’

    과거 경환이 오성 건설 시절 거의 일 년 동안을 하루도 빠짐없이 고참직원들한테 깨지고 박살 나기를 반복했었다. 해외에서 들어오는 팩스나 텔렉스를 처리해야 되었기에 저녁 9시 전에는 퇴근은 꿈도 꾸지 못했다. 퇴근 후 소주병을 나발 불며 상사를 씹는 낙이라도 없었다면 진작에 때려치웠을 정도로 신입 시절의 고통은 컸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깨지는 횟수가 줄어든 만큼 자신이 인정받아 간다는 걸 차츰 알게 되었다. 그래도 뒤끝 있던 경환은 자신이 당한 이상으로 후배 직원들을 사랑으로 깨 주었었다. 그러나 실사팀이 오기 이 주를 남겨 놓은 상태에서 화성직원들을 환골탈태시켜줄 여유가 없었다. 명령과 지시에 따라오기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나이는 어리지만, 절대적인 카리스마로 끌고 나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 경환은 답답했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현재 화성산업의 능력으로는 1%의 가능성도 없다고 단언합니다. 현실은 냉혹합니다. 화성산업이 국내 대기업의 하청에만 머무른다면 화성의 미래는 밝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KBR 프로젝트는 화성에 미래의 희망을 주는 시초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너무 깨기만 하면 반발심이 생기는 게 당연한 이치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기 때문에 경환은 약간의 희망을 양념 치 듯이 뿌려 동기부여를 제공했다.

    “우리가 해야 될 일은 현재 1% 미만의 가능성을 최소 30% 이상으로 올려야 한다는 겁니다. 이번 프로젝트를 화성산업의 체질을 바꾸는 계기로 삼아 해외기업 오더에 참여할 수 있는 자생력을 확보하고 국내 기업의 단순 하청수준에서 벗어나 적어도 그들과 동등한 자격을 마련하는 계기로 삼아야 될 것입니다.”

    경환은 말을 마치고 직원들의 얼굴을 살폈지만, 대부분의 직원들은 ‘그래서 뭐 어쩌라고?’ ‘어린놈이 입만 살아서 뜬구름 잡고 있네’라는 표정으로 턱을 괴고 빤히 경환을 쳐다보고 있었다. 경환은 직원들의 표정을 무시하고 말을 이어 갔다.

    “우선 화성산업을 국제표준화 규격에 맞는 시스템으로 개선을 추진하겠습니다. 강동원 과장님은 한국표준협회에 ISO 인증에 대해 문의를 하시고 자료가 없다면 스위스대사관을 통해 확보하시고 이 일을 전담하시기 바랍니다. 제 기억으로는 ISO 사무국이 제네바에 있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네, 네?”

    강동원은 성의 없이 답변을 하다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국제표준화 규격, ISO라는 생뚱맞은 단어를 이해조차 못하는데 담당까지 하라니 경환을 죽일 듯이 쳐다봤다. 하기야 ISO나 GATT, WTO가 나오려면 몇 년 더 있어야 되니 강 과장의 황당함을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일일이 설명을 해 줄 시간이 없었기에 경환은 무시하고 최진호 과장에게 서류를 주며 말을 이었다.

    “최 과장님은 홍현수 계장과 함께 내일 아침 마산공장으로 내려가셔서 자재 공급을 포함한 생산업무 전체에 대한 흐름을 파악하여 정리하십시오. 누가 보더라도 공장업무를 쉽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용은 제가 드린 서류를 참고하시고 회의가 끝난 후 다시 설명을 하겠습니다.”

    최진호는 서류를 보며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업무프로세서라고 적혀진 서류를 넘겨 보았지만, 자신은 전혀 이해 할 수 없는 내용들만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최현석 계장님은 영문과 출신이시네요. 앞으로 KBR관련 모든 서류는 최 계장님과 이현승씨가 담당을 하시되 서류 전체는 제 확인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국내부분은 모르겠지만 해외수주와 관련된 공문서를 메뉴얼화 할 테니 이 작업까지 같이 병행을 하십시오.”

    죽을상을 짓는 최석현과 이현승을 바라보며 경환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영문서 작성은 하루 이틀만으로 습득할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경환에게 제일 많이 박살 날 사람이 두 사람이었다..

    “오정미 씨는 저와 최 계장님을 도와 문서작성을 해 주시고, 김현아씨 는 최 과장님을 도와 문서화 작업을 진행 하십시오.”

    “네.”

    눈만 껌벅거리는 남자직원들과는 다르게 여직원들은 생기 있게 대답을 했다.

    장시간의 회의를 마치고 경환은 사장실에 들어가 회의의 내용을 간략히 보고를 했다. 최승화는 경환의 보고를 대부분 이해 할 수는 없었지만, 지켜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 부장과 차장들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경환을 흘겼지만, 철저히 무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마침 구입한 컴퓨터와 프린터가 도착하자 경환은 직접 설치를 하고 간단한 워드프로세서 조작방법을 알려 주었다. 90년의 컴퓨터는 타자기의 업그레이드버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시기였다.같은 시간 회의에 참석했던 남자 직원들은 줄담배를 피워 가며 경환을 씹기 바빴다.

    ‘갈 길은 먼데 시간은 없구나. 근데 왜이리 귀가 가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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