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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7화 (6/264)

#7

다시 사는 인생 - 7

힘든 하루를 보낸 최승화는 거래처와의 술 약속도 뒤로 미룬 채 서둘러 귀가했다. 뭐에 홀린 듯이 젊은 놈에게 사정없이 휘둘림을 당했고 결국엔 그놈의 요구조건을 백 프로 수용을 할 수밖에 없었다.

‘허, 천하의 최승화를 가지고 놀다니’

최승화는 허탈해하며 양복 윗도리를 던져 버리고는 소파 위에 너부러졌다.

“아빠, 오셨어요? 피곤하시죠? 헤헤.”

학교에서 돌아왔는지 소희가 쪼르르 달려와 어깨를 주무르며 애교를 떨었다. 자식 욕심은 많았지만, 이상하게 소희 이후로는 둘째가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소희에 대한 사랑은 과할 정도로 심했다.

“허허허, 이 맛에 딸 키우는 거야. 소희 너 용돈 필요한 거구나.”

“히히히”

최승화는 양복에서 지갑을 꺼내 십만 원권 수표 두 장을 소희의 손에 들려주었다.

“역시, 우리 아빠 센스는 알아줘야 한다니깐. 아빠 고마워요. 쪽”

소희는 수표를 얼른 주머니에 넣고 최승화의 볼에 뽀뽀를 해 주었고, 최승화는 뭐가 좋은지 연신 허허 웃으며 소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참, 소희 너 잠깐만 앉아 봐라. 경환이라는 학생하고는 어떻게 안 사이냐?”

“어, 맞다. 오늘 찾아 갔었죠? 어때요?”

아들이 없는 최승화는 자신의 사업을 물려 주기 위해 데릴사위까지 볼 생각이었다. 어린 나이면서도 날카로운 분석력을 가지고 있는 그놈이 사업적으로 필요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하고는 어제 하루 만났기 때문에 잘은 모르는데…. 아빠가 영어 잘하는 사람이 필요 한 것 같아서 소개한 것뿐이에요. 영어는 잘 하는 거 같아서…”

“음…., 그랬구나.”

“아빠가 보시기에는 어때요? 써먹을 수 있어요?”

“제법 똑똑하긴 한 거 같더라.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당분간 일은 주기로 했다. 네 부탁도 있고 해서.”

딸 앞에서 차마 그놈한테 박살이 나도록 깨졌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건 딸 앞에서 지켜야 될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근데 소희야. 그 학생과 사귈 생각이 있어서 아빠한테 소개시켜 준거니?”

“아빠! 농담으로도 그런 소리 하지 마. 그런 노땅을 누가 사귄다고, 그리고 그 노땅 애인도 있단 말야.”

버럭 소리 지르며 화를 내는 소희의 모습을 보고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지만, 붉어지는 소희의 얼굴은 발견하지 못했다.

“남편이 들어왔는데 네 엄마는 어째 코빼기도 안 보여?”

최승화는 급히 말을 돌리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경환은 아르바이트를 구했으니 등록금 걱정은 하지 마시라고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고, 한숨 돌리시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며 안도했다. 경환은 집에 돌아온 후부터 전화기 앞에서 종일 서성거렸다. 이미 도착할 시간은 지났고 시차를 확인해 봐도 지금쯤은 전화가 와야 하는데 아직까지 수정의 전화는 오지 않고 있었다. 기다려야 될 2년에서 겨우 하루만 지났을 뿐인데 초조해 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러다 수정일 놓친 거잖아. 담대하게 믿어 주자고. 나이를 50이나 처먹은 놈이.’

50대의 사고방식을 가진 경환은 초조하게 기다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순간 창피함을 느꼈다. 우선은 내일부터 출근하게 될 화성산업의 일부터 고민해 봐야 될 것 같아 방에 들어와 책상에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야 될 일이었기에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될지 무척 어려운 현실이었다. 경험만 가지고는 열악한 조직을 움직일 수는 없다는 걸 경환은 잘 알고 있었다. 그날 저녁 경환은 책상에 앉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오정미는 닭장 같은 지하철을 헤집고 나와 진이 다 빠진 상태로 출근을 하고 있었다. 여상을 졸업하자마자 화성산업에 들어와 경리를 담당하고 있지만 일에 대한 만족도는 높지 않았다. 다른 직원보다 30분 전에 출근하여 책상을 닦고 재떨이를 비우는 일로 하루를 시작해야만 했고 커피에 담배 심부름까지 직원이기보다는 사환이나 다름없었다. 아르바이트 학생이 온다는 소식에 심부름 정도는 맡길 수 있겠거니 좋아했지만, 요즘 사장이 신경 쓰는 KBR이라는 회사의 일을 총괄하는 일을 한다기에 오정미의 꿈은 나라가 버렸다.

‘어? 어제 분명 문을 잠그고 퇴근을 했는데’

문을 열기 위해 열쇠를 가방에서 꺼내려는 순간 이미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도둑이 들었는지 걱정스럽게 문을 열어젖혔다. 순간 오정미는 없는 애가 떨어질 정도로 놀라 들어가던 발을 뒤로 뺐다.

“누… 누구세요?”

“아, 놀라셨나 보네요. 오늘부터 일하게 된 이경환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하겠습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서로 간단하게 눈인사를 나눈 후 오정미는 자리에 앉았다. 아마 아르바이트 학생인 것 같았지만, 대 놓고 물어볼 용기는 없었다. 서둘러 걸레를 챙겨 들고 물에 적신 후에 직원들의 책상을 닦기 시작했다.

“어? 왜 다른 사람의 책상을 혼자 닦으시는 건가요?”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해 쓴웃음만 보여주고 책상을 계속 닦아 나갈 무렵 걸레를 누군가 채 가는 걸 느꼈다.

“저도 막 출근해서 심심한데 같이 닦아요.”

“그래도 제가 할 일인데 걸레 저에게 그냥 돌려주세요.”

“하하, 싫은데요.”

걸레를 돌려주지 않아 할 수 없이 빗자루를 들어 바닥을 쓸고 어지럽게 흩어진 서류와 신문지를 정리했다. 덕분에 일은 빨리 끝날 수 있어 좋았지만, 왠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워요. 덕분에 일을 빨리 끝낼 수 있었어요.”

“별말씀을요. 저도 즐거웠습니다. 근데 혼자서 청소를 도맡아 하는 것은 좀 그렇긴 하네요.”

나이가 자신과 비슷해 보이는 이 남자로 인해 오랜만에 상쾌한 하루를 보낼 것 같았다.

경환은 여직원과 같이 청소를 마친 후에 여직원이 가져다준 시원한 냉커피를 한잔 들이키고 있었다. 고민을 하긴 했지만, 구색은 맞춰야 될 것 같기에 눈물을 머금고 어머니에게 부탁해 의류 할인매장에서 가장 저렴한 양복을 한 벌과 흰색 와이셔츠 세 장을 구입했고, 넥타이는 아버지 것 중에서 하나 골랐다. 예전의 기억을 살려 정아의 무스를 빌려 머리 정돈도 해 보았다. 184의 작지 않은 키 때문인지 양복은 의외로 경환에게 어울렸다.

직원들이 하나둘 출근을 시작하고 경환을 힐끗거리며 쳐다보았지만 경환은 가볍게 눈인사만 건넬 뿐 오정미에게 했던 것처럼 반갑게 인사를 나누진 않았다. 마침내 최승화는 경환을 일으켜 세웠다.

“오늘부터 KBR을 총괄하기로 한 이경환 팀장이고 임시직이기는 하지만 부장대우이니만큼 이 팀장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길 바라네. 만약 이 팀장의 지시에 불응한다면 바로 해고조치 하겠네.”

최승화의 말에 오정미를 비롯한 십여 명의 직원들이 놀란 눈을 크게 뜨고는 최승화와 경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 팀장, 한마디 하게.”

경환은 천천히 직원 모두와 시선을 교환한 후 입을 열었다. 사회경험이 전무한 나이 어린 애송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직원들에게 강렬한 첫인상을 심어 줘야만 했다.

“반갑습니다. 이경환입니다. 올해 나이 25살이고 군대에서 제대한 지 한 달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젖비린내도 안 가신 새파란 놈이 부장대우 팀장이라고 자리 차고앉았으니 배알이 꼴리시겠죠. 너 한번 엿 먹어 보라고 속으로 벼르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경환은 잠시 말을 끊었다. 직원들은 경환의 직설적인 화법에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직원들은 불만과 냉소가 가득한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할 뿐 실무에 들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임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 직원들의 표정을 읽은 경환은 비웃고 있었다. 명퇴를 당하긴 했지만 오성 건설 해외영업부 차장이란 직위는 쉽게 얻을 수 없는 자리였다. 막말로 산전수전 거기에 공중전 잠수전까지 치러내고 피범벅이 된 후에야 겨우 얻을 수 있는 직급이었기에 실무만큼은 경환을 따라갈 인재는 화성산업 내에는 전혀 없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저는 2주 동안 KBR 프로젝트 업무를 총괄할 것이고 사장님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았습니다. 이 자리는 여러분의 이해를 구하는 자리가 아니라 통보를 하는 자리입니다. 나이가 개인의 능력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비즈니스맨의 능력판단 기준은 철저하게 실적과 결과로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더 이상 장황하게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점심 식사 후 오후 1시부터 KBR관련 회의를 하겠습니다. 주제는 프로젝트의 분석과 대응전략으로하겠으니 준비 철저히 해 오시기 바랍니다. 사장님을 제외한 전 인원이 참석하셔야 됩니다. 마지막으로 컴퓨터를 다룰 수 있으신 분 거수해 주십시오.”

경환의 말을 듣던 직원들이 황당해하고 있었고 컴퓨터란 생소한 단어까지 꺼내자 모두를 서로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경환 자신도 대학 4학년이 되어서야 겨우 만져볼 수 있었던 286 컴퓨터를, 90년인 지금 다룰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걸 경환은 알고 있었다. 일단은 기를 눌러 놔야 다루기가 편하다는 걸 경환은 잘 알고 있었다.

“흠… , 타자를 치실 수 있으신 분은 계신가요?”

서로 눈치를 보다 오정미와 다른 여직원이 슬며시 손을 들었다.

“두 분이 계시네요. 불행 중 다행입니다. 오정미 씨는 프로젝트가 종료될 때까지 자리를 제 옆으로 옮겨 주시기 바랍니다. 이 부장님 도착하는 컴퓨터는 한 대는 제 자리에 나머지 두 대는 타자를 치시는 분들 자리에 설치해 주십시오.”

“그.. 그럽시다.”

이 부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맘에 없는 대답을 했고 최승화는 경환의 강압에 못 이겨 필요 없는 컴퓨터를 세대씩이나 구입한 이유를 아직도 납득하지 못했다.

‘니들이 게 맛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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