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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6화 (5/264)

#6

다시 사는 인생 - 6

양복이 없던 경환은 최대한 점잖아 보이는 기지 바지를 입고 종이에 적혀진 주소를 찾아 20층이 넘어 보이는 삼성동의 어느 대형 오피스텔 건물에 서 있었다. 무슨 일이든 일을 찾아야만 했다. 고3인 막내까지 내년에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면 가뜩이나 어려운 집안 살림에 종친회 총무로 일하시면서 한 달에 받는 백만 원 정도의 아버지 수입과 정아가 아르바이트로 버는 돈으로는 세 명의 등록금을 부담한다는 건 답이 없는 계산이었다. 그만큼 경환은절실했고 어떤 일이던 이 일을 꼭 따내야만 했다.

‘15F 화성산업 서울영업본부’

일찍 서둘렀기에 약속된 시간보다 10분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건물 로비 인포메이션에서 위치를 확인한 경환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고 깊게 심호흡을 했다.

‘띵’

엘리베이터는 도착했음을 알렸고 경환은 감았던 눈을 뜨면서 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화성산업에는 10여 명의 직원들이 분주하게 일을 하고 있어 누구에게 말을 건네야 할지 머뭇거렸다.

“어떻게 오셨나요?”

경환의 모습을 한번 슬쩍 쳐다본 여직원이 사무적인 말투로 말을 건넸다.

“저… , 최승화 사장님을 뵈러 왔습니다. 저는 이경환이라고 합니다. 10시에 사장님과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확인 부탁합니다.”

“저기 의자에 앉아 잠시 기다려 주세요.”

여직원은 귀찮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떴고 경환은 의자에 앉아 회사 로고가 적혀진 팸플릿을 집어 들었다. 어떤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이 회사가 무슨 업종의 회사인지는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회사 팸플랏을 넘기던 경환은 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오호, 플랜트 제작업체구먼. 뭐 아직은 플랜트는 무리고 단순 철 구조물 제작업체라고 해야 하나?’

대형 공장이나 발전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철 구조물이 제작되어야 한다. 철 구조물은 단순한 건물 외형의 구조물도 있지만, 특수합금을 이용하여 제작된 대형튜브나 밸브 등도 플랜트 산업의 일종이었다. 90년대 초기라면 특수플랜트를 제작할 수 있는 국내 업체는 대후, 오성 등 대기업 몇 곳을 제외하고는 전무했다. 대기업이라 하더라도 특수철판이나 특수합금은 대부분 일본에서 수입하여야 할 정도로 제반환경이 열악했지만, 특수플랜트는 고부가가치 산업이기 때문에 90년대 초부터 대기업 위주로 플랜트산업에 집중적인 투자를 하고 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화성산업이란 이 회사는 단순 노동집약형 철 구조물 제작업체 이상은 될 수 없었다.

경환은 전생에서 오성 그룹 산하 오성 건설 해외영업부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중동 및 아시아 지역 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많은 노하우를 쌓을 수 있었다. 건설프로젝트에 당연히 따라 오는 것이 플랜트 제작이었기 때문에 국내 플랜트 제작업체는 대부분 알고 있는 경환이었지만, 화성산업은 생소했다.

“들어 오시랍니다.”

경환이 과거의 기억을 스캔하는 동안 사장실에 들어갔던 여직원이 돌아와 짤막하게 말만 전하고 다시 자신의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뻘쭘해진 경환은 여직원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를 표했고 사장실이라고 쓰여 있는 문을 노크했다.

“들어와.”

다짜고짜 들리는 반말에 신경이 날카로워졌지만, 지금 아쉬운 사람은 경환이었기 때문에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 고개부터 숙였다.

“이경환이라고 합니다.”

“어, 반갑네. 소희가 하도 부탁을 해서 말이지. 우선 자리에 앉게.”

경환은 소파에 앉았지만, 최승화 사장은 경환이를 무시하고 쉬지 않고 전화통을 붙잡고 놓지를 않았다.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최 사장은 비즈니스맨과는 동떨어진 느낌으로 어느 공사판의 십장 같은 인상이었다. 소파에 앉아 있는 경환도 듣기가 거북할 정도로 전화기에서 들리는 말은 욕설이 반을 넘었다. 돈이 원수였다. 과거의 경환이라면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겠지만, 지금은 인내심을 가지고 최 사장의 욕설 섞인 통화를 그대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이경환이라고 했나?”

“네, 그렇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에 철썩 주저앉은 최 사장은 나이도 어린놈이 뭘 알겠느냐는 표정으로 경환을 바라봤다.

“나 최승화의 무남독녀인 소희하고는 어떻게 안 사이인가?”

‘이런 젠장, 똥 밟은 거 아냐?’

경환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지만, 겉으론 황당하다는 듯한 웃음을 띨 수 밖에 없었다. 아마도 소희 그 싸가지가 어제 일을 빌미로 자신을 골탕먹이려는 수작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 , 그게 아무 사이도 아니고… 어제 처음 아는 형의 소개로 아주 잠시 만났을 뿐입니다.”

최대한 아주 정중하게 당신 딸과는 아무 사이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 달라는 간곡한 표정을 담아.

“뭐 아무 사이 아니라니 다행이구먼. 소희 말을 듣자하니 영어를 제법 잘한다고 하던데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하나?”

‘나도 당신 딸 트럭으로 줘도 안 가져’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것을 억지로 삼켰다.

“한양대에서 중문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만, 군대에서 제대하고 복학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영어는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아 혼자서 공부를 했습니다.”

“소희 부탁이라 만나는 봤지만, 전공도 아니고 혼자서 공부를 한 실력 가지고는 우리 일을 할 수 없네. 자네 플랜트가 뭔지는 아나?”

일이 틀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당신보다 내가 더 디테일한 전문갑니다.’라고 말해 봐야 믿어 주지도 않을뿐더러 최 사장 성격상 욕만 바가지로 얻어먹기 십상이었다. 임기응변이 필요한 때였다.

“물론 플랜트에 대해서는 디테일한 사항은 알지 못하지만, 평소 관심이 있어 나름대로 공부는 한 분야입니다. 사장님께서도 밑져야 본전이시니 테스트를 해 주십시오. 그래도 안 되면 제가 부족한 것이기에 포기하겠습니다.”

최 사장은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경환의 눈을 쳐다봤다. 대학을 졸업한 것도 아니고 군대를 갓 제대한 어린놈이 테스트를 해 달라고 하니 기도 안 찼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희의 부탁만 아니었다면 당장에라도 재떨이를 놈의 얼굴로 던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어린놈에게 한계를 느끼게 해주고 쫓아낸다면 소희한테도 면이 설 수 있다고 생각한 최 사장은 소파 옆에 놓여진 인터폰을 눌렀다.

“이 부장, 오늘 미국에 보낸다는 서류하고 시방서 들고 들어와.”

‘됐어, 당신 죽었어.’

경환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히딩크의 어퍼컷 세리모니를 날리고 있었다. 잠시 후 노크 소리가 들리고 서류를 잔뜩 들고 40대 초반의 남자가 들어와 최 사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 부장, 서류 탁자에 놓고 자리에 앉아 봐. 이 친구가 자신을 테스트해 달라고 하더군. 참고로 대학생이네.”

두꺼운 서류를 한 묶음 탁자에 내려놓고 꼿꼿이 허리를 세워 엉덩이 한쪽만 소파에 걸쳐 않은 이 부장은 최 사장을 향해 말도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최 사장은 경환에게 눈짓으로 서류를 한번 보라는 시늉을 하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경환은 앞의 문서를 집어 천천히 넘겼다. 경환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서류들이었다. 설계도면과 세부적인 시방서 화성에서 준비한 오퍼시트가 문서의 전부였다. 경환의 예상대로 단순한 공장 외형의 철 구조물이었고 시방서엔 각각의 구조물에 대한 디테일한 제작방법 등이 적혀져 있었다. 쉽게 말해 인건비 따 먹으려고 단순한 구조물을 제작 의뢰하는 수준이었기에 특수플랜트 영업을 했던 경환에겐 식은 죽 먹기였다.

‘쯧쯧, 어이가 없네.’

Simple is The Best. 서양 애들은 복잡한 걸 싫어한다. 특히 비즈니스 상으로 주고받는 서류들은 서로 필요한 핵심을 잡아 작성하기 때문에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구구절절 장황하게 문안인사부터 시작해서 써 내려가는 내용을 이해해 주질 않는다. 경환 또한 입사 초기 오퍼시트를 작성하면 일 년 열두 달을 상사에게 깨져가면서 겨우 전수받을 수 있었다. 그만큼 화성산업의 오퍼시트는 한국식 사고방식과 콩글리쉬에 기반을 둔 최악의 문서였다. 미국업체가 이 서류를 받는다면 ‘Shit!’ 이라는 소리와 함께 휴지통으로 직행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잘 봤습니다. 대단한 프로젝트를 준비하시고 계시네요.”

“핵심을 말해 보게.”

최 사장은 ‘네가 봐야 뭘 알겠냐’라는 듯한 표정으로 시계를 쳐다보고 있었다. 시간 없으니 빨리 끝내고 꺼지라는 듯이 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충격요법이 필요할 때였다.

“알겠습니다. 핵심만 말씀드리면 이 프로젝트는 실패하실 겁니다.”

아주 단언을 하는 통에 최 사장은 파던 손을 멈추고 탁자를 내리쳤다.

“이 자식! 네가 뭘 안다고 떠들고 지랄이야? 당장 꺼져! 이 새끼야.”

다혈질인 최 사장이 입에 거품을 물기 시작했고 경환은 묵묵히 참고 있었다. 앞에 앉은 이 부장이 약간 흥미롭다는 듯이 경환을 쳐다봤고 최 사장은 분을 주체 못 하고 씩씩 거친 숨을 내뱉었다.

“사장님, 고정 하십시오. 젊은 학생 같은데 말을 함부로 하지 말게나. 자네는 어떤 근거로 그런 식으로 말을 한 건가?”

충격요법은 통했고 미끼는 물었다. 그나마 이성적인 사고를 하려는 이 부장이 이 자리에 동석을 한 것이 경환에게는 천만다행이었다. 다혈질의 최 사장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한 방에 끝내야 했다.

“그럼 짧은 소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실패 요인으로 생각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설계도면에 따른 시방서가 너무 부실하다는 것입니다.”

“그건 우리도 인정하네. 그러나 오더를 수주한 후에 좀 더 세밀한 시방서가 올 수도 있는 거네.”

최 사장과 이 부장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신들도 시방서가 부실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전공도 아닌 젊은 휴학생이 도면과 시방서를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다는 것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보안을 위해 견적샘플용 시방서를 보냈을 수도 있습니다만 KBR이란 곳이 그렇게 허술한 곳이 아니라는 점에 있습니다.”

“자네 KBR이란 곳이 어떤 곳인지 아는가?”

당연히 알고 있는 경환이었다. 미국 휴스턴에 본사를 두고 있는 다국적 플랜트 업체로 전 세계 플랜트 업체 중에서 탑10으로 꼽을 수 있는 막강한 맨파워를 지닌 업체라는 것을. 오성건설 시절 해외수주를 놓고 KBR과는 매번 경쟁을 하였고 가격경쟁력 빼고는 KBR을 이길 수 없었던 경환을 수 없이 절망시켰던 업체였기에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미국 휴스턴에 본사를 둔 플랜트업계에서는 전설로 통하는 업체라고 알고 있습니다. 국내의 대후나 오성도 이 정도로 허술한 시방서를 만들지는 않습니다. 하물며 플랜트 업계의 선두를 자부하는 KBR이라면 입만 아프죠. 예를 들어 도면상에 나온 45미터 H빔의 경우 L형과 T형으로 복잡한 구조물이기 때문에 반드시 복잡한 컷팅작업이 들어가야 하는데 시방서엔 아무런 언급이 없이 간단히 컷팅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컷팅작업에 따라 비용이 달라지는 건 기본인데도 말이죠.”

“흠…. , 계속해 보게.”

최 사장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비용분석을 하는 과정에서 이 문제가 지적되었지만, 별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최 사장은 경환의 말에 관심을 보이며 대답을 독촉했다.

“KBR은 인도에 철 구조물 하청업체를 가지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로 화성산업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제 판단으로는 화성산업을 들러리로 해서 인도업체를 압박하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게 첫 번째 이유입니다.”

최 사장은 눈을 감았다. 국내 기업의 하청만 가지고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인맥을 다 동원하여 해외거래처 오더에 목을 매었고, 반년 전 NASA에서 근무하고 은퇴한 외삼촌의 도움으로 어렵게 KBR과 연결을 할 수 있었다. 경환을 대하는 태도가 한풀 꺾였다.

“자네가 말한 두 번째 이유는 뭔가?”

“제가 보는 두 번째 이유는 화성산업이 해외 오더를 수주할 정도의 맨파워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오퍼시트가 그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KBR정도면 기본적인 오퍼시트 양식이 있을 겁니다. 그걸 화성산업에 주지 않았다는 것은 화성산업의 자격을 테스트하려는 의도였다고 판단을 합니다. 화성산업이 작성한 오퍼시트를 KBR에 보낸다면 장담하건대 휴지통으로 직행을 하게 될 겁니다.”

자신이 주관하여 작성을 하였기 때문에 이 부장은 얼굴이 붉어졌다. 처음의 고자세에서 많이 누그러진 최 사장이 몸을 일으켜 탁자에 바싹 다가섰다.

“이주 후에 공장 실사팀이 들어오네. 그래도 기회가 없다고 보는가?”

“뭐 인도를 가기 전에 잠깐 한국에 들러 쉬다 가는 거겠지요. 인도업체는 바짝 긴장을 하겠지만요.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하지만…”

경환은 일부러 말을 얼버무렸다. 이제부터는 을이 아닌 갑의 입장으로 갑질을 해야 될 차례였다.

최 사장은 기가 막혔다. 딸애가 통역할 학생을 써 보라고만 했을 때도 대충 시늉만 하고 돌려보낼 작정이었다. 영문과 교수에게 어렵사리 통역을 부탁해 논 상태였다. 전혀 기대감 없었던 젊은 놈에게 지적질을 당했는데도 일언반구 대꾸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하고 예리했다.

“방법이란 게 뭔가?”

맨입에 자신의 노하우를 알려 줄 정도로 미련한 경환이 아니었다.

“저를 쓰십시오. 이번 프로젝트는 장담할 수 없지만, 적어도 KBR의 차기나 차차기 프로젝트엔 당당히 참여할 수 있을 정도의 기반은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최 사장의 이마에 주름이 깊게 잡혀가고 있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기는.’

경환은 기분 좋게 화성산업을 나와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최 사장은 경환에게 백기를 들었다. 이주 후 실사팀이 방문할 때까지 모든 KBR 관련 업무를 총괄하기로 했고 부장급 한 달 급여에 해당하는 비용을 받기로 했다. 혹시 오더 수주에 성공하게 된다면 수주금액의 1%에 해당하는 인센티브는 계약과 동시에 일괄 수령하기로 했다. 일단 숨통은 틔었다. 고민했던 등록금은 마련했기에 천천히 미래를 준비할 시간적 여유를 번거에 만족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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