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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5화 (4/264)

#5

다시 사는 인생 - 5

한 달은 너무 빠르게 흘러갔다.

수정은 제대 후 딱히 할 일이 없었던 경환을 거의 매일 불러냈고 경환은 사회생활을 했던 경험을 살려 수정의 유학준비를 도와주었다. 이미 유학원을 통해 숙소와 모든 걸 준비를 해 놓은 상태였지만 경환은 수정이 안심할 수 있도록 직접 어학원과 숙소에 전화를 걸어 일일이 확인을 해 주었다. 수정은 경환이의 내츄럴한 영어 실력에 놀라워했지만, 경환은 군대에서 틈틈이 공부해 왔다고 얼버무렸다. 휴대폰과 이메일이 대중화되려면 몇 년이 흘러야 하었기에 만 원짜리 공중전화 카드는 은근히 경환에게 부담되었고 이를 눈치챈 수정은 전화카드를 항상 준비해 오는 센스를 발휘했다. 마지막 헤어질 때 해주는 수정의 적극적인 키스는 경환의 피로를 씻는 청량제 역할을 했지만. 키스 그 이상을 바라지는 않았다.

‘비행기가 뜰 시간이네.’

경환은 시간을 확인한 후 아무것도 없는 창밖의 하늘을 쳐다보며 보이지도 않을 비행기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김포공항으로 배웅을 나가고는 싶었지만, 아직은 수정이의 부모님 앞에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수정은 바람피우면 죽여버린다는 무지막지한 말을 남기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제대 후 매일 저녁 막내인 승연이의 공부를 봐주면서 공부의 요령을 터득시켜준 덕분인지 지금은 스스로 핵심을 찾아 대입준비를 해 나갈 정도가 되었고 이번 치른 모의고사에서 무려 50점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일류대학은 안되지만, 서울 소재의 4년제 대학은 가능해 보였다. 과거로 회귀해 자신의 잘못을 하나씩 고쳐가고 있지만 정작 경환 자신은 앞길이 막막했다..

‘미래를 알고 있으면 뭐 하냐고. 당장 내 주머니엔 천 원짜리 한 장밖에 없는데.’

미래를 알고 있다고 떠들어 봐야 미친놈 취급당하기 십상이고, 수정이를 보낸 지금 서서히 앞날을 준비해 가야 할 시간이지만 당장은 등록금을 마련해야 될 상황이었다.

‘방법을 찾으라고. 머리를 굴려보라고. 마몬 이 가시나, 특별한 능력이라고 하나 줬으면 좀 좋냐고.’

머리를 쥐어짜 내고 있었지만, 딱히 방법이 보이지 않아 애꿎은 마몬만 씹어대고 있었다.

“경환아, 전화 받아라.”

“네.”

친구 놈들이겠거니 생각한 경환은 달랑 천 원 한 장 가지고는 만날 엄두가 나지 않아 대충 핑계를 대고 만나지 않을 작정이었다. 어머니께서 주시는 용돈을 더 이상은 받기 민망하기도 했다.

“전화 바꿨습니다.”

“어. 이 수경 살아 있었네.”

반가운 목소리였다.

“김 수경 님이세요?”

“그래, 인마. 자식이 제대하고 연락을 한번 안 하냐. 인정머리 없게시리.”

“먹고 살기 바빠서 그랬습니다. 제가 김 수경 님하고 같은 처지도 아닌데요.”

“자식이 주둥이는 아직도 안 죽었구먼. 나와라, 고참이 술 한잔 받아 줄 테니까.”

압구정동의 채플린이란 카페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가 어두운 실내로 들어섰고 카페 구석에 앉아 있는 김인철의 모습이 보였다. 마침 김인철도 경환을 발견하고 손을 들어 흔들었다. 인철은 이미 술 한잔을 했는지 벌게진 얼굴로 경환을 맞이했고 인철의 맞은편엔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 두 명이 앉아 있었다.

“야, 이 수경. 제대한 지 한 달도 넘었는데, 고참이 쫄따구한테 전화를 해야 쓰겠냐?”

“김 수경 님 공사가 다망하신 걸 뻔히 알고 있는데 감히 쫄따구인 제가 어떻게 연락을 합니까?”

둘의 대화가 웃겼는지 인철의 앞에 앉아 있는 여자들이 깔깔거리며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야, 먼저 인사부터 해라. 여긴 내 군대 후배 이경환이고 한양대에서 중문학 전공하는 친구야.”

“처음 뵙겠습니다. 이경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앞에 있는 친구들은.. 에이 귀찮으니까 너희가 직접 소개해.”

인철은 맥주병을 들어 경환의 잔에 따라 주면서 여자들을 다그쳤다.

“김미애에요.”

“저는 최소희에요.”

“아..네, 반갑습니다.”

“미애는 성신여대에서 성악 전공하는 내 먼 친척 동생이고 소희는 미애 친구. 둘이 하도 남자 소개시켜 달라고 들들 볶아서 너 불렀다. 내 주위에 있는 놈들은 하나같이 못 믿을 놈들밖에 없어서.”

경환은 별 관심이 없었다. 세련된 여대생이란 건 알겠지만 경환의 마음엔 이미 수정이가 꽉 차 있었기에 더 이상 다른 여자들이 치고 들어올 자리는 없었다. 여자들은 이것저것 경환에게 질문을 했지만, 경환은 단답형으로 대답을 마무리하였기에 대화는 오래 연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전생의 기억에도 이 두 여자는 찾을 수가 없었다. 경환의 삶이 조금씩 갈라지고 있음을 아직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이 수경, 너 숙맥이었냐? 스킬이 확 떨어진다.”

“민간인 된 지 한 달 됐습니다. 스킬은 무슨 스킬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여성분들을 지루하게 해서야 쓰겠냐? 젠틀맨의 매너를 좀 보여봐 봐.”

“제가요, 머릿속이 무지 복잡하거든요. 낼모레가 복학인데 등록금 마련한 방법은 막막하고요. 애인은 공부한다고 오늘 비행기 타고 프랑스로 날아 갔거든요.”

“어? 너 애인 있었어?”

군대 생활에선 수정이의 존재를 철저히 비밀로 했었다. 가끔씩 오는 편지도 대학 동창이라고 숨겼기 때문에 인철은 놀라며 눈을 크게 떠 경환을 바라보았다. 놀라기는 맞은편의 여대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치, 뭐야 오빠. 애인 있는 사람을 소개해 주구.”

먼 친척이라던 미애라는 여대생은 인철을 향해 눈을 흘기며 짜증스럽게 목소리를 높였다. 미애의 친구인 최소희는 경환에 별 관심이 없다는 듯 생긋거리며 말했다.

“애인이 떠나서 많이 속상하시겠네요. 남자들은 여자 앞에서 애인 있다고 떳떳하게 밝히지 않는다고 하던데. 우리가 매력이 없어 보이는 거 같아 자존심이 좀 상하긴 하네요”

생글거리며 할 말 다하는 최소희가 당돌해 보였지만, 기분을 맞춰 줄 생각은 없었다. 한가하게 여대생들과 노닥거릴 여유가 없을 정도로 경환의 머릿속은 복잡했기 때문이지만 눈을 부라리며 자신을 쳐다보는 인철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제 개인 사정을 가지고 본의 아니게 무례했다면 사과할게요. 기분 푸시고 사과하는 의미로 술 한잔 따르겠습니다.”

경환은 맥주병을 두 손으로 받치고 최대한 공손한 자세로 술을 따랐고 그제서야 인철은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서로가 의미 없는 말들을 이어가며 술잔을 비워가고 있을 무렵 카운터 앞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손님들의 시선이 카운터로 향했고 그중에는 경환 일행도 포함되어 있었다. 카운터엔 가족으로 모이는 서양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듯 카운터를 지키는 여직원은 울상이 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뿐이었다.

‘여기가 미국도 아니고 한국땅인데 영어 좀 못한다고 죄지은 표정을 하기는, 지들이 한국에서 살려면 한국어를 배우는 게 기본이구먼.’

경환은 심사가 뒤틀렸지만,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이는 젊은 여직원이 쩔쩔매는 모습에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향했고 인철을 포함한 일행은 경환의 행동을 놀란 듯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제가 통역을 해 드리겠으니 무슨 문제인지 말해 주십시오.”

서양인을 향해 경환은 유창한 영어를 선보였고 서양인 가족과 카운터 여직원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경환은 서양인과 한참을 서로 얘기를 한 후 카운터 여직원에게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별일 아니네요. 이 손님은 계산서의 금액과 자신이 계산한 금액이 다르다고 합니다. 계산서상에는 전체 금액만 표기되어 있어 확인할 수가 없으니 계산서를 세분화시켜 달라고 합니다. 이분들이 무엇을 드셨는지 자세히 적어 주세요.”

여직원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떡이며 볼펜을 들어 하나하나 써 내려갔다. 여직원이 써 내려간 계산서를 들고 경환이 설명을 하자, 서양인은 한참을 계산한 후에 자신이 착각했음을 알 수 있었고, 여직원을 향해 연신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지갑을 꺼내 급히 계산을 마치고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고맙습니다.”

“큰일도 아닌데요. 괜찮습니다.”

여직원 고개를 크게 숙여 감사를 표했고 경환은 미소로 답을 대신하고 자리에 돌아와 앉아 마른 목을 맥주로 축였다.

“오, 영어는 언제 배운 거야?”

“김 수경 님 배 깔고 TV 보실 때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경환은 전생에 대학 졸업 후 운 좋게 대기업에 입사할 수 있었지만, 신입사원 시절 영어를 잘 못 한다는 자괴감에 빠졌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신입사원 시절부터 3년 동안 고가의 원어민 일대일 영어를 배웠었다. 3년 후에는 자유롭게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고 자신의 부서로 찾아오는 해외거래처 손님들의 통역과 접대는 온전히 경환의 몫이 되었다.

“제가 영어는 잘 못 하지만 잉글리쉬와 콩글리쉬는 구분은 할 줄 아는데, 오빠는 퍼펙트한 잉글리쉬던데요? 군대에서 배운 실력이 아닌 거 같은데….”

‘엥? 내가 언제부터 지 오빠가 된 거야?’

최소희는 경환에 대해 급격한 관심을 보이며 호칭 또한 저기요에서 오빠로 바꾸는 파격을 보여줬다. 김인철이 술 한잔 하자고 할 때 무턱대고 나온 이유를 말해야 할 때가 왔기에 최소희의 관심은 무시하기로 했다.

“김 수경 님 아니, 형님, 나 등록금 벌어야 해서 그런데 좋은 아르바이트 있으면 소개 좀 해줘요.”

“갑작스럽게 뭔 아르바이트를 소개시켜줘?”

난감해하는 인철을 바라보며 경환은 구차하게 보이고 싶지 않아 더 이상 매달리기를 포기했다.

“그래요. 그냥 오늘은 술이나 마시고 죽을 랍니다. 꺼이꺼이.”

“야,야. 그래 그냥 오늘은 술이나 왕창 마셔 보자고.”

다운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경환과 인철은 과한 리액션을 주고받았고 그런 둘의 모습은 최소희는 순간 며칠 전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최소희의 부친은 철 구조물을 제조하는 중견기업의 사장으로 마산에 큰 공장을 가지고 있었다. 제2의 중동 붐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해외 시행사의 굵직굵직한 오더를 수주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까다로운 기준에 막혀 번번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국내 대기업의 하청만 가지고는 앞날이 불투명하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체감하고 있었기에 해외 시행사의 오더만이 유일한 대안이었다.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시행사인 미국업체의 일차 협상대상자에 선정되었고 실사만을 남겨둔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 영문서 작성과 통역을 담당하던 직원이 경쟁사의 스카우트 제의에 회사를 퇴사하는 바람에 얼마 남지 않은 실사를 제대로 준비할 수가 없었다. 식탁에서 부부가 나누던 이런 대화를 무남독녀인 최소희가 듣게 되었지만, 당시 자신이 도와줄 방법은 전혀 없었다.

‘이 사람이라면 다른 건 몰라도 통역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럴 여유가 없었다. 자신이 듣기론 얼마 후에 미국에서 실사팀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최소희는 급히 전화를 찾아 카운터로 향했다.

“얜 갑자기 어딜 간 거야?”

이 자리가 영 못마땅한 듯 김미애는 종일 투덜거렸다.

“투덜거리지 말고 미애 네가 나가보면 되잖아.”

인철의 따끔한 일침에 입을 쭉 내밀었지만 그래도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인상을 풀지 않고 있었다.

“저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시니 제가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김 수경 님 나중에 전화 한번 드리겠습니다.”

“야 이 수경 너 지금 일어나면 내 입장이 뭐가 되냐?”

계속해서 말리는 김인철을 잘 설득한 후 경환은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해야 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뭐 하나 풀려가고 있지 않으니 경환은 차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허탈한 발걸음으로 지하철역에 막 도착할 즈음 멀리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아다 보았다.

“저기요! 저기 경환 오빠!”

저 멀리서 최소희가 미니스커트를 상관하지 않고 뛰어 오는 모습이 보였고, 경환은 뭔 꼬투리를 잡으러 오는 건지 몰라 내심 불안했다.

“헉… 헉… , 사람이 부르면 들어야죠!”

숨을 헐떡거리며 최소희는 경환을 쏘아붙였다.

“제가 소희 씨 기분을 또 상하게 했나요?”

“헉…헉…그건…아니고…”

뛰어 오느라 참았던 숨이 아직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은 듯 숨을 가쁘게 몰아쉬느라 제대로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경환은 난감했다. 거의 벗은 듯한 차림의 젊은 여자가 자신의 앞에서 헉헉거리고 있는 모습은 오해를 사기에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지나가던 행인들은 벌써부터 경환과 소희의 모습을 힐끗거리며 수군대기 시작했다.

“무슨 얘기인지 빨리 말해 줘요.”

어떡하던 이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 싶은 경환은 소희를 다그쳤고, 소희는 기분이 상한 듯 톡 쏘아붙였다.

“아르바이트요, 아르바이트. 등록금 벌어야 한다면서요. 기껏 생각해 줬더니…”

아르바이트란 소리에 경환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싸가지 없어 보이던 소희도 다시 보니 예쁘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르바이트요? 진작 말을 하지 그랬어요? 어이구,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여 감사를 표하긴 했지만 어떤 아르바이트 인지 무척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근데 어떤 아르바이트인지…..”

소희의 기분을 최대한 맞춰 주려 노력을 해야만 했다. 지금은 소희가 갑이었고 자신은 을의 본분에 최대한 머리를 숙여야만 할 처지였다.

“이거 받아요.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혀 있으니까 내일 아침 10시까지 찾아가 봐요.”

종이쪼가리 한 장을 경환을 향해 휙 던져 버리고는 쳐다보지도 않고 뒤로 돌아오던 방향으로 총총히 걸어갔다.

‘아, 이 가시나 골 때리네, 뭔 아르바이트인지 말을 해줘야 될 거 아냐. 역시 싸가지야 싸가지’

경환은 몰랐다. 이 한 장의 종이쪼가리로 인해 자신의 인생이 변하기 시작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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