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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4화 (3/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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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4

    다음날 수정과의 약속 반 시간 전에 방배동 까페골목에 도착을 하였고 달빛한스푼이라는 주점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수정과의 오래된 추억이 남아 있던 곳이라 그런지 낡은 탁자 위에 놓인 메뉴판과 숟가락을 보는 것만으로도 깊은 감회에 빠져들기 충분했다. 아직 수정이 도착하려면 한참 남았지만, 어제의 일을 사과도 할 겸 미리 도착했고 그 당시 유행했던 레몬 소주와 안주를 간단하게 주문한 후 수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문했던 레몬 소주가 탁자 위에 세팅되고 경환은 주전자를 들어 소주잔에 한잔 따라 부었다.

    ‘이 맛이었나? 전엔 참 맛있었다고 생각했는데’

    한잔을 더 따른 후 담배를 입에 물었다. 하루가 지났지만, 경환은 과거로 돌아온 것을 충분히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순간순간 꿈이 아니기를 기원하며 자신의 손으로 뺨을 치기를 반복했다. 꿈이라면 깨지 말기를 빌면서.

    담배를 한 모금 빨아 연기를 내 뿜으며 두 번째 레몬 소주를 마시는 순간 문이 열렸다. 청바지에 흰 티를 입고 들어오는 수정이가 경환의 눈에 들어왔다. 한순간도 잊을 수 없었던 수정이를 다시 본 경환은 들었던 소주잔을 탁자에 놓는 것마저 잊은 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오는 수정이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뭐 자세는 되었네. 일어나기까지 하는 걸 보면”

    “오…오랜만이야. 수정아.”

    “야, 징그럽게 왜 빤히 쳐다봐? 오늘 각오 단단히 해. 나 아직 화 안 풀렸거든. 치”

    수정이는 경환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맞이하고 말까지 버벅거리는 모습을 보고 착각을 하며 화났던 기분이 조금 풀려가고 있었다.

    “술 한잔 따라줘. 나 술 마시고 싶어.”

    “어..어, 그래.”

    경환은 주전자를 들어 소주잔을 채웠고 수정은 빠르게 첫 잔을 비웠다.

    “한잔 더 줘.”

    “무슨 고민 있니? 안주 좀 먹어가면서 마셔. 속 버린다.”

    “고민이야 있지. 술이라도 마셔야 입이 떨어질 것 같거든.”

    그 이유를 알고 있는 경환은 내색을 하지 않은 채 수정이의 빈 소주잔에 다시 술을 채웠다. 경환은 수정이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려 주려고 했지만, 예전 기억으로는 수정이가 만취해서 토하기를 반복한 후에야 힘들게 말을 꺼내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이 상황을 자신이 풀어 가려고 했다. 다시 만난 수정이를 힘들게 하고 싶진 않았다.

    “우선 내가 어제 약속을 잊은 건 주둥이가 있어도 변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내가 잘못 했다. 용서해 주라.”

    “맨입에?”

    주도권을 놓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사를 표현하는 수정이가 경환은 마냥 귀엽기만 했다.

    “오우, 맨입이라뇨. 오늘의 이 잘못은 내가 평생을 두고 갚아 나갈 텐데.”

    “정말이야? 평생 동안 갚겠다는 그 거짓말 정말이냐고.”

    “한번 속아 보는 셈 치는 것도 좋지 않겠어?”

    “치, 내가 알면서 속아 주는 거니깐 나한테 잘해”

    긴장이 좀 풀렸는지 수정은 왼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건배를 제안했고 둘은 서로 잔을 마주쳤다.

    “늦었지만 제대 축하해. 그리고 이건 선물이야.”

    수정은 핸드백에서 자그맣게 포장된 박스를 꺼내 경환의 앞에 내놓았다. 경환은 이 선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내색 할 수가 없었다.

    “뭐 이런 걸 다 준비했어? 뜯어 볼게.”

    조심스럽게 포장된 박스를 뜯고 나온 선물은 검은색 지갑이었다. 지갑 하단에 자그맣게 흰색 별이 박혀 있는 몽블랑이었다. 수정이와 헤어진 후 몇 번을 버리려고 했었지만 끝내 버리지 못하고 끝까지 간직했었던 지갑이었기에 경환은 잊을 수가 없었다.

    “어? 뭘 이렇게 비싼 걸 샀어? 부담되잖아.”

    “비즈니스맨들의 필수품이라니까 오랫동안 써야 해. 내 생각하면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레몬 소주를 한 주전자 더 주문하고서도 수정은 일상적인 얘기만 꺼낼 뿐 오늘 자신이 하려 했던 말은 꺼내지 않고 있었다. 경환은 수정이를 다시 만난 기쁨에 잠시 잊고 있었지만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수정아, 내가 군대 있을 2년 동안 기다려 줘서 고맙다.”

    “새삼스럽게 뭔 소리야, 애인도 아니고 친구사인데.”

    경환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사실 대학 1학년 미팅으로 만나 4년을 넘도록 만난 사이긴 하지만 손을 잡은 것 말고는 더 이상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경환은 발전된 관계를 원했지만, 수정은 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못을 박아 버렸다. 주위에선 이런 우리의 이상한 관계를 통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라고 했지만, 그 당시 경환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그래, 친구로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 그래서 하는 말인데 수정이 네가 군대에 가게 되면 나도 2년 동안 널 기다려 주려고. 아주 기쁜 마음으로. 운동화 거꾸로 신지 않고.”

    “치, 내가 왜 군대엘 가냐? 군대는 아니더라도 너도 친구로서 2년은 날 기다려 줘야 서로 비슷해지겠지?”

    경환은 수정이가 뭘 고민하는지 알고 있었다. 사실 수정은 올해 초 대학을 졸업하고 직업을 구하지 않은 채 지내고 있었다. 수정은 위로 언니가 세 명인 네 명의 자매 가운데 막내딸이었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막내딸을 부모님은 옆에 끼고 지내길 바라셨다. 이러한 이유로 수정은 사회생활을 할 기회가 없었고 수정 스스로도 직업을 찾을 이유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수시로 들어오는 선을 거절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고 수정은 결혼을 미뤄야 될 돌파구가 필요했다. 아직 경환이가 졸업하려면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찾은 돌파구가 프랑스 유학이었다. 혼자서 준비를 마무리하고 반대하는 부모님을 겨우 설득은 했지만, 막상 경환이에게 통보하는 이 자리가 수정으로서는 많은 부담이 되고 있었다.

    수정 자신도 처음엔 경환을 친구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대학 1학년 때부터 습관처럼 만나 왔고 없으면 없는 듯 있으면 있는 듯 큰 존재감을 찾을 수 없는 사이였지만, 가랑비에 옷 젖듯이 4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 속에 수정의 마음속엔 어느새 커다랗게 경환이 자리 잡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고민도 많았고 이별도 생각해 보았지만, 수정은 경환을 저버릴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된 후부터 유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직은 부모님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을 그 당시 경환은 알지 못했다. 오히려 유학통보를 듣고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을 수정이에게 보여 줬을 뿐이었다. 수정과의 모든 걸 정리하고 헤어지는 마지막 자리에서 독백처럼 쏟아내는 수정의 말을 들은 후에서야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를 알았지만, 너무 늦어버렸기 때문에 떠나는 수정을 잡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내가 수정이를 잡아 줘야 해. 미안하다 수정아 두 번의 실수는 없을 거야.’

    경환은 미소를 지으며 수정이의 빈 잔에 술을 따라 채웠다.

    “수정아, 너도 기다린 2년 나라고 못하겠냐? 덤까지 해서 3년은 기다려 주마. 푸하하”

    “어쭈, 말 함부로 하네. 남아일언 중천금이라고 했으니까 딴말하기 없기다.”

    “옛썰! 그러니 말해봐 뭔 고민인데? 이별통보 말고는 다 들어 줄 테니까.”

    “애인도 아니면서 뭔 이별. 너 오버하지마”

    경환은 예전의 실수를 만회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다. 아니 기뻐하고 있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수정이가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경환아, 나 사실은…..”

    수정은 쉽게 뒷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지만 경환은 독촉하지 않고 웃으며 기다려 주었다. 수정은 결심했다는 듯, 소주를 급히 마시고 꽉 다문 입을 열었다.

    “나…, 나 다음 달에 프랑스로 유학 가. 짧게는 2년 길게는 3년 정도로.”

    누가 쫓아 오기라도 한 듯이 빠르게 말을 꺼낸 수정은 경환의 눈치를 살피지도 못하고 눈을 감아 버렸다. 혹시라도 경환이 화를 내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기에 경환을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어…., 그래? 우 씨, 이거 말이 씨가 돼 버렸네. 괜히 기다릴 수 있다고 했구먼.”

    화를 낼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수정은 오히려 미지근하게 반응하는 경환의 모습에 한편으론 다행으로 생각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자신을 진짜 친구로 밖에는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은근 화가 나기도 했다. 여자의 마음을 남자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 진리 그 자체였다. 수정의 뾰로통한 모습을 웃는 얼굴로 바라보던 경환은 이런 수정의 모습도 무척이나 사랑스러워 보였다.

    “수정아”

    “응? 왜?”

    수정을 부른 경환은 다시 소주잔에 소주를 채우고 웃음을 띠며 수정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힘들었을 텐데 유학을 결정한 거 축하해.”

    ‘……’

    수정은 물끄러미 소주잔 위의 소주를 바라볼 뿐 고개를 들지 않고 있었다.

    “수정아, 난 널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어.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그리고 오히려 기쁘다. 이젠 내가 널 기다려 줘야 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잖아. 정말 다행이야, 내 진심을 너에게 보여줄 기회가 생긴 거라서.”

    “고…고마워. 그렇게 말해줘서.”

    경환은 탁자 위로 손을 뻗어 수정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수정은 화들짝 놀라긴 했지만 평소와 다르게 잡힌 손을 빼지는 않았다.

    “잘 다녀와. 항상 너에게 미안했다. 내가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어서. 오히려 나한테도 자극이 되고 좋은 기회가 될 거야. 네가 가 있는 동안 나도 좀 멋지게 변해 보려고 노력해 볼 테니 기대해봐.”

    “경환아…”

    수정은 경환의 진심을 듣게 되어 안심되면서 고마움을 느꼈다. 평소와는 다른 경환의 모습에 살짝 놀라기도 했지만 경환을 마음에 담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수정은 다른 한 손을 뻗어 자신의 손을 잡고 있던 경환의 손 위에 얹어 경환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서로 전화 자주 하고 편지도 자주 하자. 일주일에 하루는 지구가 망하더라도 전화하기로 약속하고.”

    “그래, 꼭 그러자”

    Out of sight, out of mind.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하지만 경환은 자신이 있었다. 아니 수정을 다시 놓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술자리를 정리하고 둘은 주점을 나와 수정의 집까지 걸어가고 있었다. 경환의 어른스러운 모습에 수정은 안 부리던 애교까지 떨어가며 경환을 즐겁게 해 주었고 경환은 그런 수정의 모습을 마냥 사랑스럽게 바라봐 주었다.

    “근데 너 좀 이상해.”

    “뭐가?”

    “갑자기 네가 오빠처럼 느껴진단 말이야”

    “하하하, 내가 원래 오빠 맞거든? 너 일 년 일찍 학교 들어갔잖아”

    수정은 이상하다는 듯 경환을 바라보며 입술을 앞으로 내밀며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죽었다 깨어나도 그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어느덧 삼풍백화점이 보이기 시작했고 수정의 집은 삼풍백화점 아래 삼호가든이었기 때문에 거의 도착을 할 무렵이었다. 수정은 팔짱을 낀 채로 걷고 있었고 경환은 팔짱을 끼고 있는 수정의 손을 낚아채 도로에서 떨어진 골목으로 급히 수정을 이끌었다.

    “경…경환아. 왜 그래.”

    “오늘은 우리에겐 새로운 날이잖아. 이날을 잊지 않고 싶다.”

    수정은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고 경환은 그런 수정의 턱을 천천히 받쳐 올렸다. 순간 수정은 눈을 감았고 경환은 수정의 입술을 찾아 자신의 입술을 살며시 포개기 시작했다. 4년 동안 참아왔던 첫 키스였고 수정은 입술을 벌려 경환을 받아들였다. 황홀했던 첫 키스를 마치고 둘은 수정의 집 앞에서 헤어짐에 아쉬워 했다.

    “잘 들어가고, 준비하느라 바쁘니까 굳이 나한테 시간 내려고 무리 하지 마.”

    “통 모르겠어. 네가 이런 말까지 하다니. 그래도 시간 내도록 할게. 가기 전까지는 자주 보고 싶어.”

    아파트 입구로 들어가는 수정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경환은 급히 수정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수정아! 저….그게 말이지. 그게….”

    “뭔데? 왜 말을 더듬고 그래? 뭐 숨기는 거라도 있어?”

    “숨기기는….그게 말이지…, 집 전화번호 좀 다시 알려주라. 내가 요새 기억력이 떨어져서.”

    수정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내 입술 돌려내라고 한참을 방방 뜬 후에야 집 전화번호를 다시 알려주었고 한 번 더 까먹으면 죽여버린다는 무시무시한 소리를 남긴 후 휑하니 사라져 버렸다.

    ‘젠장, 26년이 흘렀는데 전화번호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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