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3화 (2/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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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 - 3

“인마, 도착했다. 빨리 일어나라. 뭔 잠을 그리 깊게 자?”

마몬과의 찐한 정사 후에 빠져든 잠에서 좀처럼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잠결에 들리는 굵은 목소리가 경환이 신경을 건드렸지만,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강원도 산속일텐데 이 목소리는 도대체 뭐야?’

실눈을 뜨고 주위를 바라본 경환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산속에 있어야 할 자신이 고속버스 의자에 누워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경환 자신은 예비군 견장을 단 군청색의 군복을 입고 있었고 옆자리엔 같은 군복을 입고 있는 시커먼 놈이 자신을 흔들어 깨우고 있었기에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야, 서울 도착했다. 드디어 우리가 민간인이 된 것이야. 음하하하”

‘마몬과의 계약이 허황된 꿈이 아니란 건가?’

옆 좌석에서 자신을 흔들던 놈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낯은 익은 얼굴이었지만, 도통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아 군복 상의에 있는 명찰을 확인했다.

‘심석우’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자신의 군대 동기로 전경대에서 개고생하며 군생활을 한 동기였다. 제대 후 만날 기회가 전혀 없었지만, 기억으로는 연세대 정치외교학을 전공하고 국회의원 보좌관을 거쳐 국회의원이 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모습은 군바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석우야, 오늘 90년 8월 2일이 맞냐?”

‘퍽’

경환의 뒤통수를 세차게 내려친 석우는 한심하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좌우로 흔들었다.

“미친놈, 정신이 나갔냐? 에휴, 군대 짬밥이 이래서 무서워요. 뭔 약을 섞었는지 짬밥만 먹으면 애들이 맛탱이가 가버리니..쯧쯧”

경환은 뒤통수가 저려옴을 느꼈지만, 꿈이 아니란 사실에 오히려 감사함을 느꼈다. 정신이 없었다. 이 상황을 이해하려 했지만 자신의 머리로는 도저히 납득도 이해도 할 수 없었기에 어떻게 이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한 상태였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석우는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차며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야, 장난 그만 치고 후딱 내리자고, 27개월 만에 민간인으로 서울 공기 좀 맡아 보자고.”

“그…그래.”

석우를 따라 고속버스에서 내려 동기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여섯 명이 모여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동기들의 표정에는 어서 헤어져 집으로 가려는 모습으로 들떠있었다. 26년 전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야, 적어도 일 년에 두 번 이상은 동기 모임을 갖자. 한번 동기는 영원한 동기 아니냐.”

“당연하지. 꼭 연락해서 정기적으로 만나자고.”

‘피식’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낯이 익은 동기가 모임을 하자고 했고 다들 열렬히 찬성하고 있었지만, 이날 이후로 서로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음을 알고 있었기에 경환은 가볍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동기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나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지만 경환은 쉽게 그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이 상황이 현실이고 사실이라면 돌아가신 부모님은 오늘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지만, 그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는 자체가 경환에게는 두렵고 당혹스러웠다.

“자식, 왜 이리 센티해?”

경환의 어깨에 손을 감싸 걸치며 석우를 바라보았다. 머릿속으로 정리를 해 나가며 이것이 현실이고 사실이란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석우야, 우리 앞으로 종종 보자. 다른 동기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너하고는 계속 보고 싶다.”

“자식이 웃기기는. 같은 서울 안에서 못 볼 게 뭐 있냐? 너 복학해서 예쁜 후배들 보이면 형님에게 바로바로 토스해라.”

“자식이, 네 대가리엔 온통 여자밖에 안 들어가 있냐?”

“마, 그렇단 소리지 자식아. 자주 연락해서 술 한잔 하자. 나 먼저 간다.”

국회의원이 될 녀석. 이 녀석만큼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전생엔 자격지심으로 인해 잘난 놈들과의 교류에 적극적이지 않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자살까지 결심을 했을 때에는 자격지심, 자존심과 같은 유치한 허영심은 다 버릴 수 있었다.

석우를 떠나 보내고도 한 시간 넘게 버스정류장에 앉아 움직이질 않았다. 이 현실을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경환의 머릿속엔 한가지의 사실만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희수, 사랑하는 내 딸’

자신의 영혼까지 마몬에게 저당 잡히며 계약을 한 것은 오로지 딸을 다시 보고 싶다는 단 하나의 이유밖에 없었다. 남은 시간 6년, 6년 후엔 딸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고 딸애가 다시 자신의 품에 안을 수 있다면 같은 삶을 주고 싶지 않았다. 이전 보다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 보자고 스스로 결심을 한 경환은 머리가 맑아 오는 것을 느꼈다.

집으로 향하는 길은 26년 전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새삼 과거로 왔다는 걸 다시금 느낄 수 있는 푸근함이었다. 골목을 걸어 올라가니 작은 동산 밑에 자리 잡은 연립주택 단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부모님께서 처음 집을 장만하시고 좋아하시던 모습이 생생히 남아 있던 곳이었다. 경환의 중학교 시절부터 결혼 전까지 생활했던 이 연립주택을 다시 볼 수 있으리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10년 후 재개발로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을 때 경환은 추억이 사라진 것에 대해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 있었다. 너무나 반가웠다.

놀이터를 돌아 자신의 집 앞에 섰지만 쉽게 초인종을 누를 수가 없었다.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떨리는 손을 들어 초인종을 조심스럽게 눌렀다.

‘딩동’

“누구세요? 경환이니?”

“네, 저….저에요.”

반가운 목소리가 집 안에서 들려왔고 경환은 마침내 안심할 수 있었다. 어머니였다. 자신을 위해 항상 눈물로 세월을 보내시다 치료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하시고 세상을 등지셔야 했었던 어머니였다. 현관문이 열리고 아직은 젊으신 어머니가 활짝 웃는 얼굴로 경환을 반겼다.

“어휴, 고생했다. 그리고 제대 축하하고.”

눈물을 살짝 비추신 어머니는 경환을 품에 안았다.

“오빠, 드디어 민간인이네. 축하해.”

어머니의 뒤에서 경환을 향해 환한 웃음을 보이며 손을 흔드는 여동생의 모습도 보였다. 대학에서 국악을 전공하는 여동생은 대학등록금을 벌기 위해 대원각이라는 한정식집에서 해금을 연주하고 있었다. 기억으론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집안 사정으로 인해 경환의 등록금 일부도 여동생의 수입에서 보태지고 있는 걸 알았지만, 그 당시엔 내색할 수 없었다. 다시 찾은 삶에선 여동생에게 고생을 시키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지만, 아직 아무것도 가진 것이없는 경환으로서는 현실이 그리 녹록하지 않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그래, 고맙다. 정아야. 엄마 고마워요.”

“얘가 별소리를 다 하네. 빨리 들어와서 옷 갈아입어라. 아버지도 일찍 퇴근하신다고 하셨으니까.”

군복을 벗어 장롱에 걸어 놓으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남동생과 같이 쓰는 방은 정리가 깨끗이 되어 있었다. 아마 어머니의 닦달을 받은 남동생이 투덜거리면서 정리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경환아, 나와서 과일 먹어라”

“제대가 뭔 대수라고 엄만 오빠만 챙겨?”

여동생의 투정도 경환에겐 너무 반갑게 느껴졌다. 입꼬리가 올라가고 흐뭇한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너무나도 오랜만에 느껴보는 포근함과 다정함에 경환은 제발 꿈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랬다.

‘최선을 다해 보자. 다시 실패할 수는 없잖아.’

‘가진 것도 없고 능력도 없고, 쉽지는 않겠지만 죽기밖에 더하겠냐고.’

옷을 갈아입고 나와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자리를 잡은 경환은 정아를 바라 보았다.

“너는 데이트도 안 해? 왜 이 시간에 집에 있어?”

“치, 나 좋다는 인간들 많거든? 내가 있고 싶어 있는 줄 알아? 엄마의 강압적인 독재에 무릎을 꿇은 거라고.”

정아의 투정을 듣던 어머니는 손부터 올라가 정아의 등짝을 후려쳤다.

‘퍽, 퍽’

“이놈의 기집애가 뭐 어째? 독재? 강압? 너 지금까지 밥해 먹인 거 다 토해내 기집애야!”

“엄만 툭하면 토해내래. 헤헤”

예전이라면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것이지만 다시 찾은 삶 속에선 어느 하나 놓치지 싫을 정도로 지금 어머니의 정아와의 말다툼이 경환에겐 정겨움으로 비쳤다.

“아, 참, 승연이는 방학인데 집에 없네요?”

“고3이잖니. 학교에서 보충수업을 한다고 요새 계속 학교에 나가고 있다.”

“아..네, 승연이도 공부하느라 힘들겠네요.”

막냇동생은 대학 운이 너무 없었다. 삼수 끝에 성남에 있는 대학에 겨우 합격을 할 수 있었지만,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대학이다 보니 대학생활에 쉽게 적응을 하지 못하고 방황을 했었다. 그 당시에는 그런 막내를 자신은 등한시했다.

“저도 다 잊어버리긴 했지만 승연이 공부를 좀 봐 줄게요. 공부는 열심히 하는데 핵심을 찾아내는 방법이 미숙 해 보여요.”

“어이구, 좀 그래라. 형이 가르쳐 주면 승연이도 도움이 많이 되겠네.”

경환은 기뻐하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진즉 왜 이러지 못했는지 한탄스러워했다.

“정아 너도 아르바이트하느라 고생 많지? 지금은 내가 아무것도 없지만, 나도 노력해서 내 앞가림은 하도록 할게. 그동안 미안했다.”

“어 오빠 이상하네. 군대 가면 사람이 돼서 나온다는 말 틀린 거 아닌가 봐. 어른스러워진 거 같은데? 헤헤”

정아와의 대화를 바라보시는 어머니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시며 아들이 부쩍 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복학하려면 아직 시간이 있는데, 뭐 하고 지낼 생각이니?”

아들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물어보시는 어머니를 경환은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며칠 쉬면서 생각을 해 보려고요. 등록금은 제가 한번 마련해 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등록금은 준비해 놨으니 신경 쓰지 말아라. 복학 준비나 열심히 하고 여행도 좀 다니고 그래.”

예전의 경환은 군대를 제대하고 등록금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당연히 부모님이 마련하리라 철석같이 믿었고, 자신은 부모님의 손을 빌려 학원에 등록하여 자기개발에만 힘을 쓸 뿐 집안의 사정에 대해선 나 몰라라 했었다. 경환은 그 기억이 떠올라 너무 부끄러웠다. 다시 태어난 지금 이전의 삶 자체를 뜯어고치기 위해 경환도 준비를 해야만 했다.

“하다 힘들면 말씀드릴게요. 엄마, 피곤해서 그런데 아버지 오실 때까지 방에서 좀 쉬고 있을게요.”

“그래라. 아버지 오시면 깨워 줄 테니 어서 들어가 쉬어라.”

경환은 방에 들어와 자리에 눕지 않고 책상에 걸터앉아 노트를 꺼내 들었다. 마몬과의 계약으로 과거로 회귀는 했지만, 자신이 가진 것이라고는 전공한 중국어와 취직을 위해 배운 영어 그리고 50세까지 겪었던 사회경험과 세계에서 일어나는 굵직한 사건 사고밖에는 딱히 없었다. 맘이 급한 지금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내용만이라도 정리를 시작했다.

‘대통령은 이 순서이고, 92년 중국수교, 94년 성수대교 붕괴, 95년 삼풍백화점 붕괴, 98년 IMF, 2001년 911테러, 이라크 전쟁, 곡물파동, 석유인상, 금값 폭등, 원자재 가격상승,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애플의 스마트폰, 일본의 원자력발전소 폭발….’

대략 적어 나갔지만, 발생하는 연도만 기억할 뿐 날짜와 시간 세세한 내용까지는 다 기억해 낼 수는 없었다. 내용을 써 놓긴 했지만 갑갑했다. 이걸 써먹을 방법이 딱히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내용을 이용하려면 자신이 막대한 자금을 운용할 수 있을 정도의 위치에 있어야 되지만, 내년도 등록금을 준비하기도 벅찬 경환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씩 준비를 하다 보면 기회가 찾아오겠지. 긍정적으로 현실을 바라보자.’

써 놓았던 내용을 머리에 다시 각인을 시키고 누가 볼세라 노트를 촘촘히 찢어 놀이터 옆에 있는 연립주택 공동 쓰레기통에서 불태워 버렸다. 반나절도 안되는 시간 동안 많은 일을 겪은 경환은 피로가 엄습해 왔고 깔아 놓은 이불 위에 몸을 던졌다.

“경환아, 경환아. 아버지 오셨다. 어서 일어나서 인사드려야지.”

“아…네. 제가 많이 피곤했나 보네요.”

이불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힘껏 켠 후 방문을 열고 나갔고, 마루엔 환한 미소를 띠는 무척이나 그리웠던 아버지가 계셨다. 눈물을 왈칵 쏟을 뻔했지만, 억지로 참으며 아버지께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 제대했습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죠?”

“허허, 고생은 무슨. 어쨌든 몸 성히 제대한 널 보니 이제야 안심이 되는구나. 수고했다. 와서 소주 한잔 받아라. 술 한잔 하자.”

“형, 나도 여기 있거든? 축하해. 헤헤”

아버지 옆으로 막내가 눈인사를 해왔다. 가족이 다 모였고 마루에 펼쳐진 상 위엔 어머니가 준비한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다시 보게 된 단란한 가족의 모습에 경환은 목이 메여 음식을 넘길 수가 없었다.

‘고맙다 마몬. 내 영혼을 가져간다 하더라도 이 은혜는 잊지 않으마.’

즐거운 저녁 식사가 끝날 무렵, TV 옆에 놓인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따르릉…따르릉’

“엄마 제가 받을게요. 일어나지 마세요.”

전화를 받으려 일어나시려는 어머니를 막으며 경환은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경환이 집에 들어왔나요?”

‘이 목소리는?....수…수정이?’

경환이에게 가슴 시린 첫사랑의 아픔을 주었던 그녀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 것만으로도 경환의 가슴은 심하게 뛰고 있었다.

“저…, 경환이 친구 김수정이라고 합니다. 경환이가 오늘 제대한다고 해서요. 아직 안 들어 왔나요?”

“나야. 내 목소리도 까먹었냐?”

“야!! 이경환! 너 죽을래!”

수화기로 수정이의 날카로운 하이 소프라노의 울려 퍼졌고 경환은 잠시 수화기를 귀에서 뗀 후 환한 웃음을 지었다.

“하하, 목소리 아주 우렁차네. 다짜고짜 왜 화를 내는 거야? 우리 살살 말하자고.”

“허…, 기가 막혀. 이경환 너 아주 많이 컸다. 날 세 시간 동안이나 바람 맞추고, 넌 집에서 퍼질러 있어? 이게 말이 되냐? 군바리 불쌍해서 그동안 밥 사주고 술 사주면서 만나 줬더니만 제대해서 민간인 됐다고 안면 바꾼다 이거지?”

“뭐? 내가 널 왜 바람을 맞춰?”

26년 전에 있었던 일을 일일이 기억하기란 경환의 머리 상태로는 불가능 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약속은 했던 건 분명해 보이는데 경환은 통 기억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오늘 할 얘기 있다고 집에 가기 전에 잠깐 보자고 했어 안 했어? 방배동에서 세 시간 동안 너 기다리면서 커피만 석 잔을 마셨다고. 아주 배 터져 죽을 거 같다 내가 지금.”

수정이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수화기가 터져 나갈 듯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식사를 하던 식구들도 시선을 들어 전화기를 향했고 어머니는 뭐가 못마땅하지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아….., 오늘이 그날이구나.’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 26년 전 오늘 경환은 집에 가기 전에 잠깐 수정을 만났고 수정으로부터 엄청난 내용을 통보받았다. 그 당시 경환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결국 오늘 있었을 수정의 통보로 인해 경환은 수정과의 가슴 아픈 이별의 시초가 되었다.

“수정아! 미안, 내가 죽을죄를 졌다. 군바리가 갑자기 민간인이 되다 보니 뇌에 과부하가 걸렸나 봐. 한 번만 이해해 주라. 내일 저녁같이 먹자고. 응?”

“흥, 죽을죄 진 건 아나 보네. 내일 각오 단단히 하고 와. 6시까지.”

“어어, 그래. 내일 6시에 어디서?”

“야! 우리가 만나는 곳도 모르는 거야? 방배동 달빛한스폰도 까먹었냐?”

화난 수정이를 겨우겨우 달래며 전화를 끊을 수 있었다. 아들이 쩔쩔매는 모습이 못마땅하신지 어머니는 여전히 인상을 쓰고 계셨다.

“걔는 화차를 삶아 먹기라도 했다니? 전화기 깨지는 줄 알았다.”

오늘만큼은 아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어머니는 한마디를 하시고는 굳게 입을 닫으셨다.

“제가 오늘 약속을 했는데 깜빡 잊었어요. 그래서 화가 난 거니까 엄마가 좀 이해를 해 주세요.”

“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수정이 착한 애라는 건 엄마도 아시잖아요. 오늘 한번 눈 감아 주세요.”

“군바리 안 버리고 그래도 꾸준히 만나 줬잖아. 성모마리아야 수정이 언니. 오빠가 볼 게 뭐 있다고 말이지. 이화여대 미대생에 한 미모까지 하면서 오빠를 왜 여태껏 만나는지 참 알다가도 몰라, 불가사의야 불가사의.”

정아의 지원사격에 어머니도 화가 수그러드셨는지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으셨다. 경환은 정아에게 윙크를 함으로써 고마움을 표시하고 남은 식사를 다시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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