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화 (1/264)

#1

다시 사는 인생 - 1

1990년

“야! 자식이 뭐가 이리 굼떠? 후딱 나와라.”

“저도 작대기 네 개라구요.”

“어쭈, 말년 꼬장 안 무섭나 보네. 흐흐흐”

“우 씨, 나갑니다. 나간다고요.“

충북 도경 경무계 소속의 전경숙소에선, 제대를 한달 앞둔 김인철 수경의 독촉이 시끄럽게 퍼지고 있었다. 경무계 소속 전경의 주 임무는 도경경비로 그 인원은 1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오늘은 김인철 수경의 후임을 선발하기 위해 분대장인 이경환 수경과 전경대를 찾아갈 예정이었다.

다른 전경 부대와는 달리 도경경비를 목적으로 한 총인원 10명의 단출한 이 부대는 하루 6시간 근무시간을 제외하고는 개인 시간과 외출을 어느 정도 허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꿈의 보직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사실 이경환 수경의 경우 충북대학의 데모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화염병에 부상을 당해 도경에서 확인서를 받는 과정에서 큰 키로 인해 고참의 눈에 띄어 후임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나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엄청난 뒷 배경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허황된 소문이 나기도 했었다.

“이 수경, 내 후임은 내가 고를 테니까, 토 달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또 청탁 들어 왔습니까?“

슬슬 곁눈질로 이 수경의 눈치를 보는 김 수경의 태도를 보니 분명 청탁이 들어온 게 분명해 보였지만, 이 수경은 가는 말년의 심기를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왜 자꾸 청탁은 받고 그럽니까?“

“야야, 내가 이러고 싶어서 그러겠냐? 우리 집 노땅이 하도 난리를 피잖아. 그리고 막말로 내 후임은 이미 결정된 거나 마찬가지잖아. 그냥 우리는 오는 자식 상판대기 한번 보러 가는 거구만“

이 수경은 입꼬리를 말아 올려 불편한 심기를 표출하긴 했지만 김 수경은 전혀 개의치 않은 듯 가볍게 휘파람을 불며 앞서 걸어나갔다. 부대원들 대부분은 한국사회에서 한자리하는 집안의 자식들로 김 수경만 하더라도 부친이 서울고법 부장판사였다. 부대에서 결원이 발생 되기만 기다리고 있는 힘 있는 자식들이 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김 수경의 후임은 이미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고, 부대원들의 1차 평가 소대장의 2차 평가 계장국장의 결재가 필요하긴 하지만 그건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아무런 뒷 배경이 없는 상태로 이 수경이 이 부대로 전출되어 왔을 당시 모든 고참들은 전생에 네가 나라를 구했구나라고 놀라워할 정도였다.

“그래도 키 180은 넘어야 합니다.“

“줄자로 재 보자고. 하하“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김 수경은 폴짝거리고 있었고, 그런 김 수경을 이 수경은 물끄러미 쳐다보며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사람 좋은 김 수경의 제대는 이 수경에게도 많은 아쉬움을 느끼게 하지만 군대란 곳이 평생 머물 수 없는 곳이었기에 오는 자가 있으면 가는 자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보시게, 손금 좀 보고 가시게나“

걷고 있는 이 수경을 향해 좌판을 펼치고 앉아 있던 노인네가 힘없는 목소리를 뱉었다.

“할아버지, 저는 군인이라서 돈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가? 오늘은 통 손님이 없네그려. 허허“

아쉽다는 듯한 노인네의 한숨에 이 수경은 맘이 저려 왔지만, 동전 하나 없는 상태에서는 자신도 어쩔 수 없었기에 안타까운 표정을 노인네를 향해 지어 보였다.

“어? 할아버지, 저 좀 봐 주세요. 한 달 후면 제대하는데 잘 먹고 잘살 수 있나요? 하하“

옆에 있던 김 수경이 주머니에서 5천 원을 꺼내 좌판에 올려놓으며 손을 꺼내 들었다. 손바닥만 한 돋보기를 꺼내 김 수경의 손금을 살피던 노인네가 김 수경을 안경 너머로 올려 보았다.

“허, 자네는 먹고사는 건 걱정 안 해도 되겠네그려. 집안의 창고에 재물이 넉넉하니 말일세. 부모 덕을 크게 볼 운세이니 별 어려움은 없어 보이는구먼.“

“헉, 할아버지 귀신이네요. 그럼 결혼 운은 어떤가요? 절세미녀를 얻을 수 있는지 봐 주세요. 하하“

김 수경은 노인네와 이런 저런 얘기를 주고받았다. 김 수경 자신도 노인네를 도와주려는 마음으로 손금으로 보는 거지 딱히 믿는 눈치는 아닌 표정이었다. 한 참을 얘기를 나눈 후 김 수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군복을 매무시하며 이 수경을 향해 어서 가자는 듯한 눈짓을 보냈다.

“자네는 안 보시려나?“

“저는 돈이….”

없는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은근 짜증이 나기 시작한 이 수경을 어깨에 손을 얹어 말을 끊은 후 김 수경이 호탕하게 웃으며 노인네에게 말을 건넸다.

“하하, 할아버지 잔돈 주지 마시고 이 친구도 손금 봐 주세요.”

평소 마음 씀씀이가 좋은 김 수경이 이 수경에게 윙크하며 자리에 앉기를 권했고 초췌한 노인네에게 5천 원은 큰돈이라 생각한 이 수경은 못 이기는 척 자리에 앉아 손을 내밀었다.

“흠..,”

“이 친구는 별로 안 좋은가요?”

노인네는 이 수경의 손금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깊은 탄식을 흘렸고, 그런 모습을 재밌다는 듯 바라보고 있던 김 수경이 장난스럽게 말을 꺼냈다.

“내 밥값은 해 줘야 되니 말을 해 주겠네.”

“네, 저희가 빨리 가봐야 하기 때문에 그냥 말씀해 주세요.”

어차피 손금이나 운세 이런 미신을 애당초 믿을 생각이 없었던 이 수경은 연신 시계를 바라보며 노인네를 재촉했다.

“자넨 물 건너에서 살 팔자야. 그걸 거스르면 고달픈 인생을 살게 될 걸세.”

“물 건너면 외국이란 말씀이신가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이 수경은 노인네에게 되물었지만, 노인네는 지그시 눈을 감을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야, 이 수경 너 유학이라도 가야 하는 거야? 하하하.”

‘이 자식이! 고참만 아니면 넌 벌써 죽었어… 괜히 시간만 낭비했네’

김 수경의 놀림에 순간 욱하고 터져 나오는 것을 억지로 눌렀다. 혹시나 좋은 말을 듣지 않을까 일말의 기대를 해 봤지만 역시나 라고 생각한 이 수경은 좀 허탈해졌다. 다복한 가정이긴 하지만 동생의 대학등록금 때문에 자신이 휴학하고 군대에 올 수밖에 없는 형편에서 외국에서 공부한다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일인지 그 자신이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안정된 직업을 구해 부모님의 짐을 덜어 드리는 것이 최대 목표일 뿐 유학은 자신과는 동떨어진 삶 그 자체였다.

“자네….”

일어나려는 이 수경을 향해 노인네가 마지막 말을 전했다.

“꼭 한번 기회가 올 걸세. 그 기회를 놓치지 말길 바라네. 내 부탁함세.”

“아,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마지막 말을 건네고 이수경은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기분이 언짢았다. 노인네를 향해 건성으로 대답한 후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 수경 너 전공이 중국어라고 했지? 중국하곤 아직 수교가 되지 않아서 유학 못 갈 텐데 어쩌냐?”

“한 번만 더 놀리면 계급장 뗍니다.”

“아, 네. 이 수경님. 시정하겠습니다. 그래도 아쉽네, 중국에 미녀가 그렇게 많다는데. 하하하”

김 수경의 장난에 발끈하려 했지만,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인상 한번 써 주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저 멀리 손금으로 봐 주던 노인네는 좌판을 걷고 멀리 사라지는 이 수경의 뒷모습을 한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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