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한 걸음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촬영이 재개되었다. 유진은 다시 단상 위로 오르고, PD와 촬영 감독들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메인 PD 역시 정중앙 카메라 앞에 섰다. 그는 모자를 꾹 눌러써 얼굴을 가렸다. 겨우 입만 보였는데 입가에 주름이 질 정도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유진은 안색이 창백했다. 그녀가 목을 가다듬는 동안 막내 PD가 연습생들을 체크했다. 화장실에 간다고 사라진 연습생들을 급히 소환하고 흐트러진 연습생들을 바짝 조였다. 그사이 화장이 지워진 연습생들이 몇 있어서 담당자들 몇 명이 급히 올라와 매만져주었다.
촬영이 재개되기 전, 유진은 소혁과 피터를 불러 단상 위로 세웠다. 조금 전 서 있던 것과 자리가 바뀌어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유진은 다시 촬영을 진행하려 했다.
“잠깐만요, 컷하고 다시 가겠습니다!”
한 촬영 감독이 손을 들고 촬영을 중단시킨 뒤에야 모두가 그 실수를 알아챘다.
“아,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유진은 고개 숙여 사과했다. 그 사이 소혁과 피터는 자리를 바꿨다.
“피터 연습생, 이쪽으로 좀 더 와요.”
피터를 부르는 유진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지만 피터는 모르는 척했다.
약간의 우여곡절 끝에 촬영이 이어졌다. 유진이 “마지막 탈락자는 원소혁 연습생입니다.”라고 말하자마자 모두 놀라 얼어붙었다.
메인 PD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연습생들은 경악한 표정으로 단상 위를 올려다보았다. 피터 또한 미간을 찌푸리고 제 옆의 소혁을 바라보았다.
소혁은 트라이 온 초기부터 우주민과 함께 우승 후보로 손꼽히던 연습생이었다. 이번 미션 무대를 준비하며 독선적인 모습을 보여서 순위가 떨어졌다고는 하나. 모두들 더 높이뛰기 전 추진력을 얻기 위한 추락이라고들 생각했다. 이번 일로 동정표를 얻어 다음번에는 더 순위가 껑충 뛸 거라고.
피터 또한 자신이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기에,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서 마음속의 말을 토해낸 것이었다.
그런데 모두의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왔다.
세트장은 말 그대로 정적에 휩싸였다. 바늘 하나를 떨어트려도 종소리처럼 소리가 울릴 듯했다.
오직 소혁만이 담담했다. 자신이 떨어질 줄 알았다는 듯이.
소혁은 이전에 탈락한 연습생들이 그러했듯 허리에 찬 마이크를 빼며 전원을 껐다. 그리고 제 옆에 선 유진과 피터만 들릴 만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까 회의한 거 말이에요. 결과 나온 거로는 내가 떨어져야 하는데, 저 연습생 고백 듣고 나서 나 안 떨어트리려고, 내 옆에 있는 저 연습생 떨어트리려고 회의한 거였죠?”
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눈만 조금 커졌다. 소혁은 피식, 웃었다.
“그렇게 탈락 면하면 누가 고마워할 줄 알았나? 혹시 기회 있으면 PD님한테 전해주세요. 제가 하나도 안 고마워하더라고요.”
소혁은 마이크를 수거하러 스태프가 다가오자 금방 얼굴색을 바꾸고 우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쉬운 듯 마이크를 줄락 말락 하는 모습까지 훌륭하게 꾸며냈다.
촉팀 연습생들은 어색하게 작별 인사를 했다. 고작 여섯 명 중에 세 명이 떨어지고, 세 명이 남은 것이었다. 탈락한 연습생도, 탈락을 면한 연습생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카메라가 그들을 집요하게 비추었으나 침통한 분위기 외에는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다.
“다들 나한테 별로 할 말 없지요? 괜히 서서 시간이나 낭비하지 말고 깔끔하게 헤어집시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소혁은 깔끔하게 인사를 하고는 바로 돌아섰다.
소혁이 떠나자 다른 탈락자 연습생 두 명이 툭, 울음을 토했다. 소혁의 말이 참았던 울음을 쏟게 만드는 기폭제가 된 듯했다.
“원소혁 연습생이야 다른 곳 어디든, 가고 싶은데 골라 갈 수 있겠지만. 난 아닌데……. 이게 정말, 마지막 기회였는데.”
소혁과 함께 편곡을 두고 싸웠던 연습생이 특히나 서럽게 울었다. 그는 카메라 앞인 것도 잊고, 얼굴을 구기고 눈물 콧물을 다 쏟았다. 그러더니 대뜸 피터를 껴안고는 피터의 가슴팍에 눈물 콧물로 얼룩진 얼굴을 마구 문댔다.
“미안해요, 리더님. 진짜, 그동안 미안했어요.”
그는 엉엉 울며 잘 들리지 않는 말로 계속 미안하다고 말했다. 피터는 그를 차마 밀어낼 수 없었다. 제 옷이 콧물로 얼룩지는 걸 지켜만 보았다.
연습생들이 울자 같이 훌쩍이던 준비는 그 모습을 보고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피터가 도와달라는 간절한 눈빛으로 SOS를 쳤으나, 준비는 차마 피터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준비는 초통령으로서 멋짐을 유지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다른 한 명의 탈락자 연습생은 그 모습을 보고 울다가 웃어 버렸다. 그나마 그 연습생은 표정이 밝았다.
그렇게 훈훈한 풍경이 펼쳐지는 가운데 현덕은 자꾸, 먼저 떠나버린 소혁이 신경 쓰였다.
소혁과는 그리 가깝게 지내지 못했다. 1부 때는 내내 다른 기숙사였고, 2부 때 한 팀이 되었지만 둘 다 팀 안무를 다른 연습생들에게 가르쳐주는 임무를 맡게 되어 함께 연습한 시간이 적었다.
그렇다고 아주 안 친한 건 아니었다. 줄곧 함께 연습했다, 소혁은 거리를 두는 듯하면서도 멀어지지는 않고 현덕의 곁을 맴돌았다. 참 친해지기 힘든 들고양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조그만 들고양이 말고 커다란 고양잇과 맹수 느낌으로.
탈락 후에도 훌쩍 떠나버리는 모습만 봐도 그랬다.
현덕은 잠시 고민하다 돌아서, 소혁을 뒤따랐다. 촉팀 연습생들에게 배정된 대기실로 갔다.
문을 열자마자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퍽.
소혁이 소파를 주먹으로 내리치고 있었다. 그걸 본 현덕은 문손잡이를 잡은 채로 굳어버렸다.
소혁이 눈치 채지 못할 때 문을 닫고 나가야 하나, 아니면 이제라도 인기척을 내야 하나.
‘일단 나가자.’
원소혁 성격에 이런 모습을 남이 봤다는 걸 못 견딜 것 같았다. 소혁이 소파를 패는 데 몰입하고 있기에, 설사 문 닫는 소리가 나도 못 들을 같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현덕은 슬그머니 문을 닫으려 했다.
“동작 그만.”
소혁이 이렇게 말하지만 않았다면, 그렇게 온 적도 없다는 듯 사라질 수 있었을 텐데.
“……!”
현덕은 이번에야말로 진짜 얼음이 됐다.
후우. 소혁이 주먹질을 멈추고 허리를 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자태는 소혁의 팬들이 봤다면 비명을 지르며 좋아할 만한 멋진 모습이었지만, 현덕에게는 공포물의 한 장면이었다,
‘설마 내가 소파 대신이 되는 건 아니겠지?’
현덕은 문손잡이를 꼭 움켜잡았다. 머리는 이미 무사히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을 시뮬레이션으로 돌리고 있었다. 문을 방패로 쓰고, 여차하면 발로 소혁의 다리 사이를 까고, 그렇게 하면-.
소혁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현덕을 보며 픽,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챈 듯했다.
“안 팰 테니까 들어와. 나 보러 온 거 아냐? 김현덕 연습생.”
“그렇긴 한데…….”
현덕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가죽 재킷과 징 박힌 바지를 입고, 주먹질하다 땀을 흘린 남자는 매우 위험해 보였다.
“아, 짜증 나. 사람은 안 팬다고.”
“날 양파나 대파 같은 야채라고 생각하고 때릴 수도 있잖아요?”
“꼭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는 것 같다? 경험에서 우러난 두려움 같은데?”
“아니, 딱히. 폭력까진 가지 않았지만.”
현덕은 한숨을 내쉬며 문손잡이를 놓았다. 대화를 하다 보니 긴장이 풀렸다. 소혁의 말마따나 그가 무턱대고 주먹을 날릴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지는 게 정말 싫어.”
소혁은 얼얼한 손을 털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애꿎은 소파를 패고 있었던 거야?’
현덕은 하고 싶은 말을 꾹 참았다.
소파를 고의로 패서 파손시키면 재물손괴죄에 의해 처벌을 받을 수 있는 걸 아냐고도 묻고 싶었다. 고의성만 입증되면 형사 처분을 받을 수도 있었다.
‘증인이 있으니까 실수로, 우연히 소파를 팬 거라고 변명을 하지도 못할 텐데.’
현덕은 소혁이 내려치고 있던 소파를 바라보았다. 한쪽이 움푹 파여 있었다.
어느 정도 값어치가 나가는 소파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사람들이 드나드는 대기실에 놓여 있는 것이니 그리 비싼 것은 아닐 터. 설사 소혁이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 하더라도 그 비용이 그리…….
거기까지 생각하던 현덕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지금은 이런 걸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현덕이 문 앞에 멍하니 서 있자 소혁은 쯧, 혀를 차고 돌아섰다.
“거기 계속 서 있고 싶으면 마음대로 하고.”
빈정 상한 목소리였다. 대개는 이런 상황을 발각당한 것이 부끄럽거나 쪽팔려 화를 낼 텐데. 소혁은 그것보다는 현덕이 자신을 폭력범으로 오해한 게 더 기분이 나쁜 듯했다.
소혁은 짐이 쌓여 있는 벽 쪽으로 가서 자신이 들고 온 캐리어와 짐가방을 끄집어냈다. 커다란 백팩을 한쪽 어깨에 메고, 다른 손으로는 캐리어를 끌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현덕을 스쳐 지나가려고 했다.
“저기, 잠깐만.”
“뭐, 왜.”
“내가 도와줄게요.”
“내가 이런 것도 못 들 것 같아 보여?”
소혁이 또 인상을 썼다.
“아니, 배웅하고 싶어서.”
“배웅?”
“역시 좀 오버인가요?”
말하고 나니 뻘쭘했다.
“뭐, 내키지는 않지만 굳이 원한다면야.”
“역시 불편하다면 그냥-.”
현덕과 소혁은 동시에 말을 뱉었으나,
“어?”
반응은 현덕이 더 빨랐다.
소혁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까처럼 짜증을 내거나 인상을 쓰고 있는 건 아니었다.
‘허락……인가?’
현덕이 멀뚱하니 서 있자 소혁이 발을 굴렀다.
“빨리 안 와? 난 바쁜 몸이거든?”
현덕은 얼떨결에 소혁의 옆에 섰다.
소혁이 든 캐리어나 가방 중 하나를 들어주려고 했지만, 소혁은 내주지 않았다. 널 뭘 믿고 내 짐을 넘겨주냐는 질문에 답할 말이 없었다.
현덕은 그 말을, ‘내 짐이 무거우니 그냥 내가 혼자 들겠다.’라는 뜻으로 해석해도 될지 고민했다. 소혁은 모의고사에서 1등급과 2등급을 구분하는 독해 문제 같은 사람이었다. 말하는 대로 들으면 대체로 오답이었다.
둘은 별말 없이 어색하게 긴 복도를 걸었다.
“나한테 할 말이 있어?”
소혁이 물었다. 현덕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짧지만 같은 팀에서 함께 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어요.”
“비꼬는 건가? 난 떨어지고 넌 붙었으니까, 그동안의 원한을 풀려고 나한테 이러는 거야?”
“우리가 원한을 가질 만한 사이인가요?”
현덕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
뭐가 말하려던 소혁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현덕을 보고는 입을 닫아걸었다.
“그리고 비꼬는 거 아니고 진심을 담아 말하는 거예요. 지금 아니면 못 할 말이니까. 그동안 말은 못 했지만, 정말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자룡 형 말고 이렇게나 존경스러운 연습생은 소혁 형이 처음이라서요.”
“……뭐?”
소혁이 인상을 팍 썼다.
“소혁 형한테 꼭 말하고 싶었어요. 아, 소혁 형이라고 불러도 되죠? 형도 내게 마음대로 반말하니까 저도 편하게, 내 마음대로 소혁 형이라고 부를게요.”
현덕도 마음 편히 하고 싶은 말을 했다.
트라이 온 2부 촬영에 들어가며, 소혁은 협조적인 듯 비협조적으로 굴었다. 합숙 촬영을 할 때는 뻗대기는 해도 피터가 시키는 대로 연습에 참여했다. 자신보다 한참 못하는 같은 팀 연습생들에게 짜증을 내지 않고 차근히 안무를 가르쳐주었다.
다만 합숙이 끝나고 개별 연습을 하게 될 때는 영 연락이 닿지 않아, 피터가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다. 그런 피터를 곁에서 지켜보던 현덕도 늘 걱정스러웠다.
평가 무대는 개인전이기도, 단체전이기도 했다. 팀 연습생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칼군무를 추고 하나로 뭉쳐 움직여도 다른 팀에 밀리는 판국에, 팀에서 제일 실력이 좋은 사람이 따로 노니 걱정이 될 수밖에.
무대에 서기 전까지만 해도 소혁이 다른 연습생들과 어우러지지 못하고 너무 튈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그 걱정은 방송을 통해 촉팀의 무대 영상을 보는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소혁은 정말로 실력 있는 연습생이었다. 그는 무대 위에서 완벽하게 촉팀의 일원이었다. 자신의 개인 파트에서는 누구보다도 화려하게 빛났지만 단체 안무를 출 때는 철저히 다른 연습생들에게 맞춰주었다. 그래도 그가 도드라져 보이긴 했다. 하지만 그건 그가 가진 존재감 때문이니, 그의 탓이 아니었다.
현덕은 TV로 자신이 속해 있는 촉팀의 무대를 보며 소혁에게 감탄해 마지않았다. 언제나 현덕의 마음속에서 최고의 아이돌 연습생은 자룡이기 때문에 그만큼 존경스럽지는 않았지만, 바로 밑의 2등 자리까지는 줄 수 있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소혁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너, 넌 부끄러움이라는 걸 모르는 거야?”
소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목청 한 번 끝내줬다. 으으. 현덕은 신음을 내뱉으며 두 손으로 귀를 가렸다.
“어, 뭐, 그렇게까지……. 괜찮아?”
소혁은 얼른 목소리를 줄였다. 얼굴은 아직 빨갰다.
부끄럼을 타는 원소혁이라니. 현덕은 이 광경을 오래도록 기억하기 위해 소혁을 빤히 바라보았다.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좀 더 친해질 수 있었을 텐데.’
새삼 아쉬움이 몰려왔다. 물론 생각하기 무섭게 어디선가 자룡의 외침이 들리는 듯했다. ‘아니야, 아니라고! 속지 마! 걘 절대 안 돼!’ 라고 절규하는 자룡을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소혁은 시시각각 표정이 바뀌는 현덕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소혁이 주저하더니 물었다. 현덕은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소혁이 걸음을 멈췄다.
이제 저 앞에 꺾인 복도만 돌면 주차장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나가는 입구에 거의 다 도착해서는 빙글, 뒤를 돌았다.
소혁이 왔던 길을 돌아갔다. 털털털, 캐리어가 뒤따랐다.
“뭐 두고 나온 거 있어요?”
현덕이 물어도 소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더 빠르게 걸을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꼬박꼬박 뒤를 돌아보았다. 현덕이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복도는 끝없이 계속 나타났다. 방송국은 테러리스트들에게 공격당할 것을 대비하여 미로처럼 짓는다던데, 그렇다 해도 이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갑자기 길을 헤매는 거지?’
현덕은 촬영 때문에 여러 번 이 방송국을 와 봤다. 대기실에서 주차장, 혹은 정문까지 가는 길은 이제 눈에 익었다. 그런 현덕이 보기에 지금 소혁이 걷는 길은 밖으로 나가는 길이 아니었다. 오히려 방송국 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쪽이었다.
‘혹시 길치인가?’
만약 그런 거라면 바로 출구 앞에 도착해 전혀 딴 길을 찾아 나선 게 이해가 됐다.
뭐든지 완벽할 것 같은 원소혁이 길치라니. 여러 번 와본 방송국 내에서 길을 헤매다니. 어쩐지 친숙함이 들었다.
“저기, 길이-”
현덕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려 하였으나,
“나 길치 아냐.”
어떻게 알았는지 소혁이 단번에 쳐냈다.
“아, 음. 대개 그런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이 길치라는 걸 인정하기 힘들어 하더라고요.”
“길치 아니라니까.”
“우리 아버지도 그러셨거든요. 일단 저쪽으로 가는 게-”
“나 길치 아니라고. 일부러 이쪽으로 온 거야.”
“어, 그런데 아까부터 생각했던 건데요. 원소혁 연습생, 왜 갑자기 말이 짧아지나요. 내가 기억하기로 우리는 아직 말을 놓지 않은 사이였던 거 같은데.”
“꼬우면 너도 놓든가. 내가 너보다 형이라는 것만 기억하고.”
방송에 탈락했다고 막 나가는 듯했다. 현덕은 덩달아 반말을 하는 대신 웃고 말았다.
소혁은 현덕의 예상대로 방송국의 가장 후미진 곳에 도착했다.
‘역시나.’
아버지 덕분에 길치가 멈추는 곳은 항상 막다른 골목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큰 충격은 없었다.
‘지금이 몇 시쯤 되었을라나.’
현덕은 마음 속으로 시간을 가늠했다.
세트장 촬영 시간이 길어져서 방송국 구내식당에서 식사하고 합숙 촬영지로 간다고 했다. 이렇게 소혁과 오랜 함께 하면, 밥을 못 먹을지도 몰랐다. 촬영한다고 내내 굶었던 터라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계속 났다.
현덕은 막다른 길에 들어서자마자 돌아섰다.
“자, 이제는 제가 가자는 대로 가볼까요?”
“일부러 여기로 온 거야.”
등 뒤에서 들린 소혁의 목소리가 현덕의 발을 턱, 붙잡았다.
“여기까지 찾아오진 못하겠지. 개코가 아닌 이상.”
소혁이 두려워하는 ‘그 놈’은 필요하다면 방송국에 사냥개 100마리 정도는 예사로 풀어 놓을 수 있는 인물인지라. 소혁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현덕은 그제야 소혁의 얼굴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깨달았다.
“누굴 말하는 건가요?”
“너 박자룡이랑 친하지.”
“자룡 형이요? 친하죠.”
현덕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덕이 자룡과 친하다는 건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트라이 온 제작진도 알고, 우주민도 아는 일이었다.
“우주민 조심해라.”
소혁이 대뜸 말했다.
“주민 형을요?”
현덕이 뭔 말을 하냐는 듯 되물었다.
“한번 말하면 좀 알아들어.”
소혁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냥 조심하라고. 우주민. 걔 가만 뒀다가는 박자룡한테 해코지하고도 남을 놈이니까. 넌 박자룡이랑 친하잖아. 박자룡 다치는 꼴, 보고 싶지는 않을 거 아냐.”
“잠깐. 잠깐만요.”
현덕은 손을 들어 소혁의 말을 멈추었다.
박자룡과 우주민은 현덕에게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누구보다 존경하는 박자룡과 보기만 해도 안쓰럽고 좋은 우주민.
누군가 현덕에게 10억을 주고 둘 중 누구 편을 들어 다른 사람을 미워하라고 시킨다면. 현덕은 그 10억으로 긴 종이 노끈을 꼬아 그런 말을 한 사람의 입을 칭칭 막아 버릴 터였다. 그런데 지금, 소혁이 현덕에게 그런 걸 시키고 있었다. 10억 따위도 주지 않으면서.
현덕은 소혁의 입을 꿰매 버려야 할지, 아니면 소혁의 다리 사이를 발로 까버려야 할지 고민했다. 그런 고민을 하며 힐끗, 소혁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소혁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소혁은 불안하고 조급해 보였다. 나쁜 마음을 먹고 자신과 주민의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방금 탈락한 소혁이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다. 이유가.
그래서였다.
“천천히, 육하원칙에 의해서 제대로 말해주세요. 내가, 여기서, 지금부터, 우주민을, 왜 조심해야 하는지. 또 어떻게 조심해야 하는지.”
“…….”
소혁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제 와서 주저하는 듯했다.
“아무 설명도 없이 대뜸 그렇게 말하면 저는 형의 말을 믿을 수 없어요. 저는 자룡 형이랑 친한 만큼 주민 형이랑도 친하니까.”
“그 새끼랑 친하다고?”
소혁이 발끈하였다.
“박자룡이랑 친하면서 어떻게 그 새끼랑 친할 수 있어!”
현덕은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을 맛봤다.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구나.’
그건 아마도 자룡과 주민에 관련된 일이리라. 소혁도 껴 있을지 모른다. 그 일을 겪은 소혁은 주민이 자룡에게 나쁜 짓을 할지 모른다고 의심을 하게 된 게 분명했다.
현덕은 주먹을 쥐었다. 너무 힘이 들어가서 손등의 뼈가 하얗게 도드라졌다.
“그러니까 왜 그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지 말해주세요. 지금 당장.”
소혁이 놓친 캐리어가 현덕의 앞까지 굴러왔다. 현덕은 발로 바닥에 달린 바퀴를 막아섰다. 현덕은 캐리어의 손잡이를 소혁의 목줄인 듯 움켜잡았다.
“아이씨.”
머리를 쓸어 넘기는 소혁의 손이 어쩐지 불안해보였다. 소혁은 불안한 듯 다리를 떨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소혁은 그간 주민과의 사이에서 있었던 일들을 빠짐없이 말했다. 꽤 방대한 분량이었다. 현덕이 알고 있던 일도 있었고, 전혀 몰랐던 일도 있었다.
“……주민 형이 자룡 형을 가지고 협박을, 했다고요?”
“그래.”
“주민 형, 우주민이?”
“그렇다니까.”
“……말, 도 안 돼.”
“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그 자식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놈인데.”
“…….”
주민이 정말로 그 협박을 행동으로 옮길 의사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우주민이 박자룡을 다치게 하려고 했고 그걸 협박의 도구로 사용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문득, 아버지와 맹덕 형이 즐겨 보는 주말 드라마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잘생기고 능력 없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는 그동안 뒷바라지해준 여주인공을 배신하고 부잣집 외동딸과 약혼하여 새 삶을 살고자 했다. 뒤늦게 그걸 알게 된 여주인공이 커다란 무로 남자의 머리를 후려치며 이렇게 외쳤다.
‘우주민, 니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물론 드라마에 나오는 남자의 이름은 우주민이 아니었다.
“하…… 우주민이, 우주민이 그랬단 말이죠.”
현덕은 소혁의 캐리어를 놓고 돌아섰다.
“야. 어디가. 어쩌려고 그래.”
“걱정 마요. 우주민이 자룡 형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할 테니까.”
현덕은 저를 잡는 소혁의 팔을 밀어내고는 길을 걸어 나갔다. 뒤에서 소혁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귀에 닿지 않았다.
우주민을 만나야 한다. 오직 이 생각만으로 걷고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드라마처럼 현덕의 앞에 우주민이 딱 나타났다.
“김현덕. 너 어디 갔었어.”
어째서인지 우주민은 화가 나 있었다. 하지만 현덕은 그보다 더 화가 나 있었다.
“야, 우주민!”
현덕이 이를 악물고 주민을 바라보았다. 그것만으로 주민은 모든 전투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
주민은 현덕이 다른 사람과 붙어 다니는 게 싫었다. 그런 현덕을 보느라, 촬영 중에 내내 신경이 곤두섰다.
현덕은 TE엔터테인먼트 연습생 시절에는 다른 연습생들과 그다지 가까이 지내지 않았다. 자신의 주변에 선을 긋고 자룡 외에는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트라이 온에 참가하면서부터는 사교적인 인간이 되어버렸다. 헤프게 웃고 아무한테나 정을 퍼주고, 툭하면 딴놈이랑 붙어 다니고.
현덕이 작정하고 흘리고 다니니, 주변 연습생들은 당연히 헬렐레해져서는 현덕에게 들러붙었다. 어린놈이나 나이 든 놈이나 현덕에게서 헤어 나오질 못했다. 주민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오늘은 또 현덕이 어떤 연습생을 홀릴까. 누구에게 자신의 매력을 뽐낼까. 생각만 해도 짜증나는데, 그걸 두 눈으로 지켜봐야 하다니. 신경쇄약에 걸릴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 사랑스러운 미자는 끝내 주민이 감당할 수 있는 선을 넘고야 말았다.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건만 다른 놈이랑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꼴이라니.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졌다.
방송 촬영이고 뭐고 내팽개치고 둘 사이를 찢어 놓고 싶었다. 도발하듯 눈을 흘기는 피터를 본 주민은 정말로 그럴 생각이었다. 주민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챈 정모와 한승이 양옆에서 주민을 잡아 붙잡지만 않았다면.
정모는 덩치 큰 한승이 옆에 있는 걸 천운으로 여겼다. 혼자서는 절대 이 싸가지를 감당해 낼 수 없었을 테니까.
“이거 안 놔?”
“한 번만, 한 번만 봐줘라. 우주민. 너 여기서 사고 치면 유호 형 정말로 죽어. 관짝에 들어가는 거야. 넌 그 관 뚜껑에 못질하는 놈이 되는 거고.”
“그게 나랑 뭔 상관인데.”
“우, 우주민 연습생님. 제발 이러지 말아주세요. 한 번만 부탁드릴게요.”
“그러니까 내가 왜 이러지 말아야 하는데.”
주민은 한 몸뚱이처럼 붙어 있는 현덕과 피터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이를 갈았다.
바로 눈앞에서 현덕이 딴 놈이랑 암수 짝짓기 하듯 정답게 노닐고 있는데. 왜 자신은 외따로 떨어져 그걸 지켜만 봐야 한단 말인가.
주민은 자신을 막아서는 한승과 정모를 노려보았다. 피터가 내심 겁먹었던 그 눈빛 그대로였다. 족히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눈빛.
“엄마야.”
한승은 겁에 질려 주민을 놓쳤다. 그는 우람한 체격에 어울리지 않게 마음이 여렸다. 눈이 돌아버린 주민을 감당할 수 없었다.
정모는 한승과 비교하면 덩치가 작고 호리호리했으나, 한승보다는 깡이 셌다. 주민의 돌아버린 눈빛을 보고도 겁먹기는커녕 오히려 이놈을 절대 풀어줘선 안 된다는 생각을 확고히 다졌다.
“너 지금 깽판 쳐봤자 달라지는 거 하나도 없어. 오히려 화제성이나 더 몰아줘서 제네 둘 밀어주는 꼴이지. 너, 쟤네 둘 앞으로도 계속 저러고 있게 놔둘 거야?”
정모가 꾀를 내어 주민을 도발했다.
“……뭐?”
정모마저 털어내고 일어서려던 주민이 우뚝, 멈춰 섰다. 안 그래도 잘생긴 얼굴인데, 딱딱하게 굳으니 정말 석고 조각상 같았다. 정모는 주민의 외모에 넋을 잃을 뻔하였으나 금세 정신을 되찾았다.
“뭔 개소리야.”
“사람 소리다, 인마. 일단 앉아 봐.”
트라이 온 2부를 촬영하며 주민의 성질머리는 충분히 겪어 온 터라, 정모는 흔들리지 않았다. 대신 한승에게 눈짓했다.
‘절대 놓치지 마라. 큰 일 난다.’
‘네, 넵.’
한승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주민의 팔을 붙잡았다.
“넌 꺼져.”
주민은 손쉽게 한승을 털어내고는 자리에 앉았다.
“우주민 연습생니임…….”
한승은 울상이 되어 주민을 바라보았다. 큰 키와 넓은 어깨, 싸한 인상만 보면 경찰이 조폭인 척하며 몇 년 구르다 결국 거대 조직의 일인자가 되는 느와르 영화의 주연감이었다. 그런데 마음이 약해서, 열 받은 우주민의 팔 하나 제대로 붙들고 있질 못했다.
“니가 가서 날뛰면 어떻게 되겠냐. 저 사람들 좋다고 찍어댈 거야. 안 그래도 지금 저걸 어떻게 덮나 전전긍긍하고 있을 텐데, 니가 괜히 판 벌여줄 필요가 뭐 있냐. 지금만 참으면 피터 윤이라는 연습생은 알아서 떨어져 줄 텐데.”
정모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주민에게 속삭였다.
“조금 전에 단상 위에서 말한 걸 제작진에서 공개하지 않을 거라는 건가?”
주민은 곧바로 정모의 말을 알아차렸다.
“당연하지. 이건 너랑 다른 케이스야. 아무리 발을 빼도 제작진이 욕먹게 되어 있어. 여기 트라이 온 제작진은 트윈 트윙클 찍은 제작진 그대로잖아. 자기들한테 똥물이 튀길 텐데, 그걸 가만히 맞을 턱이 있나? 터트리느니, 그냥 스태프들 입단속 시키고 촬영분은 삭제하겠지.”
정모는 심상치 않은 제작진의 분위기를 단번에 읽어냈다. 유호의 곁에 있어 상대적으로 태평하고 별생각 없어 보이나 상황 판단력은 그 누구보다 뛰어났다.
“굳이 이용당하고 싶다면 나서도 상관은 없는데. 가만히 있느니만 못할 거야. 안 그래도 뭔가 대체할 게 필요할 텐데, 굳이 소스를 줄 필요는 없잖아?”
정모의 말에 주민은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정모는 주민을 보며 씩, 웃었다. 싸가지 없고 주는 것 없이 얄밉긴 하지만. 그래도 우주민은 같은 팀의 팀원이었고, 그 팀을 하드캐리하는 메인 멤버였다. 그런 주민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을 뿐더러, 주민이 가지고 있는 화제성을 촉팀과 나누고 싶지도 않았다.
‘카메라 밖에서 다른 연습생과 지지고 볶고 싸우는 건 내 알 바 아니지만. 적어도 카메라가 찍히는 상황에서, 다른 팀 연습생이랑 붙어 있는 꼴은 내 못 보지. 절대로.’
정모는 슬쩍, 유호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유호는 또 가슴팍을 부여잡고 있었다. 자신의 팀 일이 아니라 남의 팀 일인데도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타는 듯싶었다. 그 팀에 1부에서 친하게 지냈던 현덕이 있어서 더 그러는 건지도 몰랐다.
‘아무튼 무르다니까.’
정모는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꾹 눌렀다.
유호는 항상 위염을 안고 다닐 정도로 예민하고 섬세했다. 겉보기에는 가냘파 보이면서도 날카로워, 사람들은 지레 유호가 까칠하고 남에게 정을 잘 안 준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정반대였다. 겉보기와 다르게 유호는 정이 많았다. 너무 정이 많아 신경 쓰는 게 많아서 위염을 달고 사는 사람이었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유호는 잔뜩 인상을 찡그리고 촉팀을 째려보고 있다. 주변에서는 유호가 촬영을 멋대로 중단한 제작진과 괜한 분란을 일으킨 촉팀에게 짜증나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정모가 보기에는 그저, 걱정되고 안쓰러워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거였다.
유호는 현덕이 탈락자 후보가 되는 걸 볼 때부터 오만 인상을 다 쓰고 있었다.
현덕이 탈락자 후보에서 제외되자 그나마 얼굴색이 나아졌으나 이내 피터가 자신의 사연을 고백하자 와그작- 얼굴이 굳어졌다. 피터의 사연이 안쓰러워 전전긍긍하는 것이리라.
‘김현덕한테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이건 경쟁 프로그램이라고. 우리 팀의 보물이 남의 팀으로 굴러가게 둘 순 없지.’
물러 빠진 유호를 대신해서, 아니 그런 유호를 위해서라도 정모는 주민을 단속해야 했다.
“내 생각엔 피터 윤이라는 연습생 안 떨어지고 붙을 거 같은데.”
유호의 말에 주민이 인상을 썼다.
“탈락자가 원소혁인 것 같다는 건가?”
“내 생각엔 그래. 좀 의외긴 한데…… 그러니까 제작진도 당황해서 저러는 거겠지. 화제성 높은 원소혁이 떨어지는 것도 별로인데, 저런 폭탄 발언을 하는 연습생을 남겨두고 싶진 않겠지. 대놓고 조작 한번 해보겠다는 건데, 어디 쉽겠어? 논의가 이렇게 길어지는 걸 보니 분명 내부에서 반대하는 목소리가 꽤 큰 가봐.”
“그렇겠지.”
“그러니까 넌 더 가만히 있어야 해, 우주민 연습생. 분명 지금 상황은 통편집일 텐데 갑자기 네가 나서서 저 둘 사이에 끼어들어 봐. 어떨 거 같아?”
“신나서 찍어대겠지.”
“맞아. 안 그래도 땜빵 거리가 필요한데. 정답게 우정을 나누는 촉팀 연습생 두 명에게 괜히 시비를 거는 오팀의 우주민. 그런 우주민의 반대에도 꿋꿋하게 붙어 있는 김현덕과 피터 윤의 뜨거운 우정! 카피 딱 나오지 않아?”
트라이 온 제작진이 툭하면 써먹는 편집 방식이었다. 남자 연습생만 100명, 그리고 30명이건만. 그 안에서 어떻게든 러브 라인을 만들려고 애썼다. 즐기고 좋아하는 연습생들도 있었지만 끔찍해 하는 연습생들도 있었다. 주민은 후자였다.
“그렇게 한 번 정다운 모습이 방송을 타기라도 하면, 계속 그 둘을 붙여 두려고 할걸? 너랑 박자룡 연습생처럼.”
정모는 기꺼이 주민의 역린을 건드렸다.
“입 닥쳐.”
주민이 이를 악물고 정모를 노려보았다. 정모는 얼른 두 손을 들고 항복했다.
“말이 그렇다는 거잖아. 진정해. 나도 그런 거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퍽이나?”
주민이 정모를 비웃었다.
트라이 온에는 국민 브로맨스 커플이라 불리는 연습생 조합이 몇 있었다. 그중 시청자들의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커플은 주민과 자룡이었다. 둘을 붙여 놓은 영상과 팬아트가 매일같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주민과 자룡은 그걸 알고 서로를 더욱 싫어하게 되었건만. 어째서인지 시청자들은 사이가 나쁜 자룡과 주민의 모습을 보는 걸 좋아했다.
병약한 유호와 튼튼한 정모도 마님과 돌쇠 커플로 인기가 높았다. 정모는 주민과 다르게 그런 관심을 꽤나 즐겼다. 유호는 그런 분위기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가끔 정모가 자신들의 팬아트 커플링 중 순한 것을 찾아 보여주면 고개를 갸우뚱 저었다.
“아니, 왜 이 뛰어난 능력을 허무하게 낭비하는 거지?”
“헛되다니. 이거 만드신 분들 섭섭할라.”
“안타까워서 하는 소리야. 나나 너를 그리지 말고 좀 더 생산적인 것을 그렸으면 금전적인 이득을 얻거나 좀 더 명예를 얻었을 수도 있잖아?”
“그런 쪽으로 명예와 금전을 얻을 수도 있을걸?”
“그런 쪽?”
“어, 뭐, 그런 쪽.”
“트라이 온 제작진들이 이런 걸 사들이기라도 하는 건가?”
유호의 상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한계는 거기까지였다. 정모는 유호의 그런 무지함이 귀여웠다. 유호가 정모의 속마음을 안다면 어디서 어른한테 그딴 망발이냐고 혼나겠지만.
아무튼 이쪽에 대해 전혀 모르는 유호와 달리 정모는 꽤 빠삭하게 알고 있는 편이었다. 연년생의 누나 덕분이었다. 누나가 수년째 모 남자 아이돌의 지극한 팬인지라, 어릴 적부터 집에 동인지나 굿즈가 굴러다녔다. 그래서 굳이 그런 커플링 문화를 유도해내는 제작진의 수작도 적당히 알아챘다.
정모는 그걸 주민을 막는 데 써먹었다. 현덕과 피터가 들러붙어 있는 걸 카메라에 비치게 둬선 안 된다고, 아예 여지를 주지 말라며 충고해준 것이다.
덕분에 주민은 또 한 번, 없는 인내심을 어떻게든 만들어내야 했다.
인내라는 단어 자체를 모르고 살아 왔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주민은 인내심이 많은 편이었다. 그가 살아온 환경 자체가 언제나 그에게 인내심을 요구했다.
우주민에게 김현덕은 또 다른 깊이의 인내심을 요구하는 존재였다. 그간 주민이 가지고 있던 인내심은 생존, 혹은 복수를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현덕을 만난 이후 주민이 새롭게 가져야 하는 인내심은 전혀 결이 달랐다. 현덕의 앞에서 어떻게든 사람인 척은 해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나온 필사적인 노력이었다. 현덕이 피터를 껴안고 있는 걸 지켜보는 상황에서의 인내심 또한 그러했다.
현덕을 다른 누군가에게 빼앗기기 싫어서, 주민은 매 순간 참고 또 참고 있었다. 현덕은 항상 주민에게 인내심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하지만, 그건 주민의 속내를 들여다보지 못하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안 돼.
무조건 안 돼.
참아야 돼.
주민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뇌었다.
씨발.
그래도 이번에는 정말 참기 힘들었다.
현덕은 뭐가 그리 좋은지 자꾸 피터를 껴안고 만지작거렸다. 그러고도 모자라 촬영이 끝난 뒤엔 소혁을 따라가 버렸다.
피터까지는 어떻게든 참고 견뎠건만. 현덕이 소혁을 쫓아 함께 사라지는 걸 보는 순간. 주민은 폭발하고야 말았다. 그 순간 우주민의 인생에서 ‘인내’란 단어가 잠시 지워졌다. 오직 김현덕이 원인이었고 과정이었고 결과였다.
‘찾기만 해 봐, 가만 안 둬.’
뭘 어떻게 가만 안 둘지는 일단 찾고 나서 생각해 볼 예정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두 다리를 부러뜨리고 아무도 안 보는 곳에 가둬두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야, 우주민!”
현덕의 고함을 듣는 순간, 온몸에 꽉 차올랐던 분노가 단번에 사그라졌다.
그 빈자리에 금세 다른 감정이 들어찼다. 복종, 비굴, 두려움, 걱정 따위. 우주민의 인생 사전엔 전혀 없었던 것들.
주민은 제게 다가오는 현덕을 보며 뒤로 도망치지도, 앞으로 다가가 현덕을 붙잡지도 못했다.
‘왜 화가 난 거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걱정이 되고 두려움이 몰려들었다.
‘벌써 날, 싫어하게 된 건가?’
현덕에게 미움 받게 된다는 생각만으로도 주민의 심장은 오그라들었다.
화가 난 김현덕은 우주민 따위가 감당해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주민은 무조건 복종하며, 미워하지만 말아 달라고 애원해야 했다.
현덕은 머뭇거리는 주민의 모습에 더욱 화가 났다. 차라리 평소처럼 뻔뻔하게 당당했더라면, 현덕은 쉽게 이성을 되찾았을 것이다.
‘정신 차리자, 김현덕. 어느 한쪽의 말만 듣고 화내는 건 옳지 않아. 양쪽의 말을 다 들어 봐야 해. 아무리 우주민, 이 자식이 원소혁 말대로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긴 하지만. 그래도 원소혁이 말하기를, 무슨 이유가 있긴 있었다고 했잖아. 어떤 이유로든 협박과 폭력은 옳지 못한 방법이야. 사법적 폭력은 법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금지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잘못된 거긴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무슨 사정이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이래저래 찔린 구석이 많은 주민은 현덕의 고함 한 번에 사기를 잃고 평소와 달리 현덕의 눈치를 보았다. 현덕은 그런 주민의 모습을 보며 확신했다.
‘분명 뭔가 있어. 나한테 쫄린 거잖아.’
현덕은 보폭을 크게 하여 주민의 앞에 섰다. 주민을 올려다보며 눈을 마주쳤다.
“나한테 뭐 할 말 없어요?”
현덕이 물었다.
주민은 침묵했다.
할 말은 너무 많았다. 무엇을 말해도 되고 무엇을 말하면 안 되는지 모를 뿐이었다.
“나한테 할 말 없냐고 물었어요.”
“…….”
“다른 연습생이 누군가와 대화하는 걸 지나가다 들었는데.”
현덕은 우선 소혁의 신변을 감췄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주민이 모를까 싶긴 했지만. 또 소혁을 내부고발자라 부르는 건 맞지 않겠지만. 아무튼 내부고발자에 준하는 신분 보호가 필요할 것 같았다. 소혁이 괜히 방송국 건물의 구석진 곳까지 숨어들어 현덕에게 남몰래 말한 건 아닐 테니까.
“자룡 형을 두고 협박했다면서요. 날 건드리면 자룡 형 가만 안 두겠다고.”
“아, 그거. 난 또.”
주민은 안심했다.
혹여나 현덕이 자신의 시꺼먼 속내를 알아차리고는 질겁하고 도망갈까 봐 겁먹었다. 또 이래저래 신경 쓰이는 것들도 몇 가지 있었다. GPS 설치라든가, 핸드폰 해킹이라든가, 사람을 붙여 놓은 거라든가, 등등. 그게 들키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긴장이 한풀 꺾였다.
그런 주민의 태도를 본 현덕은 이를 악다물었다.
“아, 그거? 난 또? 나 몰래 또 뭔 짓을 하고 다닌 겁니까?”
“아니, 아무것도.”
주민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면서도, 현덕이 ‘고작 그런 것’에 화를 내는 게 이해가 안 가 고개를 갸웃, 저었다.
정말로 자룡을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다. 원소혁의 약점이 박자룡이었기에 언급했을 뿐이다.
‘왜 이렇게나 화를 내는 거지? 고작 그걸 가지고?’
불명확한 것은 언제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공포를 몰고 온다. 어머니의 죽음이 그랬고 아버지의 집착이 그러했다. 주민은 아까보다는 덜하지만 여전히 겁에 질린 눈으로 현덕을 바라보았다.
‘또 뭔 짓을 하고 다닌 거야.’
현덕은 다른 뭔가가 또 있다는 느낌을 받았으나 일단 밝혀진 죄에 집중했다. 드러난 죄가 커도 너무 컸다.
“왜 그랬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룡 형을 왜 건드려요.”
“진짜로 건드린 거 아냐. 말만 그렇게 한 거야. 그렇게 하면 원소혁이 절대 너 못 건드릴 테니까.”
“나 때문에 자룡 형을 다치게 만들 생각을 했다고?”
“그래. 어쩔 수 없었어.”
주민은 고민 없이 대답했다.
현덕을 지키기 위해 그보다 더한 일도 했다.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다. 오직 현덕을 곁에 두기 위해서 죽기보다 싫었던 일 또한 하지 않았던가. 제 발로 시황 그룹이라는 지옥에 걸어 들어갔다. 그것에 비하면 연습생 한 명을 협박한 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주민은 당당했다. 해야 할 일을 했다는 태도였다. 그건 현덕이 바라는 모습이 아니었다.
“너, 진짜!”
현덕은 참지 못하고 주민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주민은 휘청이며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말뿐이라 해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게 있어.”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더운 숨과 함께 주민의 얼굴을 덮었다.
“내가 좋다며. 그럼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소중히 여겨줘야지.”
보통은 이러지 않는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지키겠다고 그 사람이 소중히 여기는 다른 사람을 협박에 이용하지 않는다. 그게 상식이다.
그런데 우주민은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했다. 자신에게 나쁜 짓을 하려 했던 원소혁이 겁먹고 물러설 만큼 살벌하게. 그리고 그걸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현덕은 그 점에 화가 났다.
“네가 좋아한다고? 누굴? 양파, 그 자식을?”
주민은 현덕과 다른 의미로 싸해졌다.
“……뭐?”
“좋아한다는 거잖아, 박자룡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아니, 난 그게 중요해.“
주민이 현덕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그 자식이 그렇게 좋아? 나보다? 나한테 이렇게 화낼 만큼?“
주민의 눈이 살벌하게 빛났다.
“주민 형……. 우주민, 너…….”
현덕은 처음으로 주민에게 이질감을 느꼈다.
평소 주민은 자룡을 대파나 양파라고 불렀다. 현덕은 그걸 마냥 편하게 듣진 못했다. 자룡은 주민보다 나이가 많은 형이었다. 현덕이 생각하기에 자룡을 양파나 대파라고 부르는 건 그리 좋은 버릇은 아니었다. 그래서 몇 번이고 주민에게 자룡을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말했다.
주민과 사이가 가깝지 않던 시절에, 주민은 번번이 코웃음을 치며 현덕의 말을 무시했다. 그런 주민이 못마땅해 뚱한 표정을 지으면 오히려 자룡이 현덕을 말렸다.
‘놔둬, 말해봤자 입만 아프지.’
‘그래도 계속 저렇게 말할 텐데,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요.’
‘쟤 나름대로 가깝게 지내고 싶다는 의미 아니겠어?’
정작 자룡은 태평했다.
‘억지로 형 소리 들어봤자 소름만 돋을 거 같아. 저 우주민이 나한테 형, 형, 한다니, 으으. 뭐, 절대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말야.’
자룡은 그렇게 말을 덧붙이며 하하, 웃었다. 자신을 채소 취급하는 주민을 보고도 그러려니 했다.
물론 가끔은 주민에게 화를 내기도 했다. 그건 자룡 나름의 제스처였다. ‘고만 좀 틱틱대고 이제 좀 친하게 지내자고, 이 싸가지야. 어?’
자룡은 그런 사람이었다.
툭하면 투덕투덕 싸웠지만 그래도 자룡은 주민을 아꼈다. 주민이 기획사 뒷문에서 납치당할 뻔할 때도 몸을 날려 막아주었고, 트라이 온 촬영을 하면서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걱정해주었다. 현덕과 함께 춤 연습을 도와주기도 했다.
바로 얼마 전, 트라이 온 2부 첫 평가 무대 때에도 가장 먼저 무대에 섰던 자룡은 내려오며 현덕과 주민을 격려해주었다. 셋 모두 다른 팀에 속해서 서로 탈락하지 않으려 경쟁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자룡은 현덕과 주민을 챙겼다.
그런 박자룡이었다. 다른 연습생도 아니고 박자룡. 김현덕, 우주민과 함께 ‘테두리’로 묶이는 박자룡.
셋을 TV로만 봐 온 시청자들도 셋을 테투리라 묶어 부르며 친하다고 생각하건만. 주민만 자룡을 생판 모르는 남처럼 대했다. 아니, 남보다도 못했다.
“자룡 형이야. 박자룡.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 마.”
이런 상황에서까지 자룡을 함부로 취급하는 건 가만 듣고 있을 수 없었다.
“그래, 박자룡. 나랑 있는데 왜 그 자식을 생각하는 건데?”
“그 자식이라고 하지 마.”
“그럼 너도 그 자식 이름을 내 앞에서 말하지 말아야지. 아니, 생각도 하지 마. 적어도 나랑 둘만 있을 때는 나만 생각해.”
주민이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사람을 홀리려는 듯 작정한 웃음이었다.
주민은 누가 봐도 잘생긴 외모로 항상 싸가지 없는 표정만 지었다.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사람을 홀리려는 듯 웃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현덕은 맥없이 끌려가 버렸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어- 하는 새에 주민에게 넘어가 버렸다.
우습게도 이런 상황, 이런 분위기에서도 주민을 보면 설렜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쉬이 끌려가지 않았다. 현덕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꾹 내리누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대로 대충 흐지부지 넘어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싫어. 그럴 수 없어. 다른 때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더더욱.”
“왜?”
“내가 지금 자룡 형이랑 관련된 일 때문에 주민 형, 너한테 화가 나 있으니까.”
현덕의 입에서 또 ‘자룡’이란 두 글자가 나왔다. 주민의 얼굴에서 웃음이 가셨다. 무표정한 얼굴은 손을 대면 베일 듯 서늘해졌다.
“그러니까 왜. 왜 그렇게 그 자식 걱정만 하는 건데. 갑자기 그 자식이 나보다 더 좋아지기라도 했어?”
주민이 한 걸음, 현덕에게 다가갔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난 지금 화나 있는 거지, 주민 형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게 아니잖아.”
현덕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걸 본 주민의 눈빛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런데 왜, 도망가?”
악다문 잇새로 억눌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듣는 사람의 심장이 얼어붙을 만큼 싸늘했다.
현덕은 새삼, 그런 주민을 바라보았다.
현덕이 보기에 주민은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어릴 적 겪었던 가정환경이 워낙 복잡하였으니, 그로 인해 약간의 애정결핍이 있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약간의 애정결핍이라니, 이런게?’
현덕은 주민의 까만 눈을 들여다보았다.
주민의 눈은 놀랍도록 텅 비어 있었다. 깊어서 까만 게 아니었다. 텅 비어 있어서 까만 것이었다.
‘내내 이랬던 걸까?’
그동안 애써 이런 모습을 숨겨왔던 걸까. 아니면 언뜻 이런 모습을 내비쳤는데도 못 알아채고 넘어갔던 걸까. 아마도 둘 모두이리라.
또 뒤늦게 눈치챘다.
지난겨울, 홀로 서 있는 주민을 보며 느꼈던 감정이 다시 한번 현덕을 움켜쥐었다. 죄책감을 닮은 그 감정은 우주민을 좋아하는 김현덕이기에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나는 왜 항상 이렇게 늦는 걸까.’
현덕은 눈을 깜박였다. 눈가에 물기가 스몄다.
“박자룡이 그렇게 좋냐고 물어보잖아.”
주민은 다급하고 또 절박하기만 했다.
삐- 삐- 삐-. 어디선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시끄럽게 울렸다. 무언가를 경고하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주민의 머릿속에서 울리는 그 경고는 채 심장에 닿기도 전에 사그라졌다.
주민은 조금 전, 피터 때문에 속을 까맣게 태웠다. 피터에 이어 원소혁까지. 남아 있는 인내심을 싹싹 긁어모아 써버렸다.
그걸 알 리 없는 현덕은 이제 주민의 앞에 서서는 자룡이 좋다고, 자룡이 걱정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도 모자라 주민을 겁내며 뒷걸음질까지 치고 있고. 이 모습을 보고도 제정신을 유지하는 건 불가능했다.
아니, 어쩌면 단지 오늘 일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현덕 앞에서는 아닌 척했지만. 사실 주민은 이미 오래전부터 한계에 달해 있었다.
바로 눈앞에 현덕이 얼쩡거리는데 두 손에 움켜쥘 수도 없었다. 가끔 몸을 맞대고 다급히 입을 맞추고 숨 막히도록 꽉 끌어안는 게 고작이었다. 죽기 직전까지 몰린 상황에서 겨우 현덕을 만나 그 하얀 목에 얼굴을 묻고 숨을 가득 들이쉬었다.
그렇게 버텨왔다.
매일, 매 순간. 주민은 끊임없이 고민하고 머리를 굴리고 또 참아야 했다.
보통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을 대할 때는 어떻게 하는 걸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처럼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둬두고 자신만 보게 하는 건 아닐 텐데.
저렇게 남들과 웃고 떠들게 놔둬도 되는 걸까. 저러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어떡하지. 다른 사람이 더 좋아졌다고 나한테 안녕이라고 말하면?
다른 사람들과 있는 게 보기 싫다고, 제발 그러지 말라고 말하면 싫어하겠지. 이상하게 볼지도 몰라. 그러니까 아무렇지도 않은 척해야 해.
늘, 늘 주민은 허덕였다.
입 맞추고 싶었다. 몸을 만지고 싶었다. 김현덕을 모조리 가지고 싶었다.
현덕이 우는 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목이 졸린 듯 숨이 막혔다.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제 밑에 깔려 헐떡이며 우는 현덕을 상상하는 게 지독하게 짜릿했다.
홀로 잠드는 밤이면 현덕을 생각하며 자위했다. 제 밑에 깔려 달뜬 숨을 내쉬던 현덕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보고 싶었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었고, 볼 수 없을 때는 더더욱 보고 싶었다.
우주민이라는 우주는 김현덕을 중심으로 미쳐 날뛰었다. 현덕이 중심에서 떠나버리면 우주민은 더는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주민이 뿌리를 내린 곳에 어른은 왕회장 하나였다. 왕회장은 자신, 그리고 아들에서 손자로 이어지는 광기를 기꺼워하여 김현덕에게 집착하는 우주민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부추겼다.
‘역시, 내 손자구나. 내 피가 흐르는 내 손자.’
남자를 좋아한다니. 조금 놀라긴 했다. 그건 대를 어떻게 이어야 할 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자신처럼 회사에 집착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러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 대상을 손 안에 넣기 위해서 시황 그룹을 움켜잡고 싶다는 탐욕이 생기면 되니까.
그래서 단지 김현덕 하나 때문에 시황 그룹 법무팀을 움직여도 가만 지켜만 보았다. 주민이 온갖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해 현덕을 보호하고 감시하는 걸 나서서 도와주었다. 사설 경호팀을 꾸리고, 유령 회사를 만들고 전문 인력을 투입 시켜 아예 현덕을 전담으로 마크하도록 했다.
‘네가 집착하는 그 것을 온전히 손에 넣기 위해서는 시황 그룹을 가져야 할 거다.’
왕회장은 행동으로 보였다. 주민은 제 할아버지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가 주는 모든 걸 당연히 받아들였다.
그럴수록 아버지의 그림자를 향해 한 발자국씩 가까워졌다. 그걸 스스로도 자각하고 있었으나 그만둘 수는 없었다.
왕회장을 통해 드리워지는 제 아버지의 그림자 속에서 주민은 조금씩 지쳐갔다. 지친 마음에 가느다란 균열이 일었다. 그의 핏줄을 타고 흐르는 더러운 본성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스며들었다.
‘역시, 아버지처럼 해야 했어.’
불연 듯 든 생각이었다. 주민은 스스로에게 놀라 몸서리쳤다.
할아버지를 따라 어느 기업 회장님의 가든파티에 참석했을 때였다. 현덕을 못 만난지 고작 하루 밖에 안 지났는데. 현덕이 보고 싶다 못해 그런 생각을 했다.
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왕회장을 따라다니며 사람들을 상대해야 했다. 미혼의 딸을 가진 정재계 인사들은 왕회장과 주민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얼굴을 붉히는 또래의 남녀를 보며 토악질이 날 정도로 역겨움을 느꼈으나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주민은 상냥히 웃으며 그들을 대했다. 그렇게 시황 그룹의 차기 세대로서 자신의 가치를 높여나갔다.
그런 순간마저도 주민은 현덕을 생각했다. 그리고 잠시나마 아버지가 어머니를 망쳤던 것과 같은 더러운 짓거리를 현덕에게 하고 싶어졌던 자기 자신을 자책했다.
하지만 그 후로도 종종, 저도 모르게 같은 생각을 반복했다. 남에게 웃어주는 현덕을 볼 때마다, 헤어질 때 순순히 손을 흔들고 돌아서는 현덕을 볼 때마다.
나는 너랑 헤어지는 그 순간부터 숨을 제대로 쉴 수조차 없는데. 너는 왜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걸까.
그렇게 조금씩 닳고 닳았던 마음이 이제야 바스러져 버렸다.
“박자룡이 그렇게 좋아? 나보다?”
이렇게 묻는 심정이 얼마나 비참한지, 현덕은 모르리라.
‘이렇게 빨리 빼앗겨 버릴 것을. 왜 그동안 그토록, 정상적인 사람인 척 연기하면서 저 애의 옆에 있으려고 애를 쓴 거니. 그냥 붙잡아서 네 곁으로 끌고 오면 되는 건데. 너 말고는 아무도 저 애를 보지 못하게 했어야지. 피터나 자룡 같은 날파리가 꼬일 수 없도록 가둬놓고 너만 보면 되는데.’
누군가 주민의 귀에 속살거렸다.
‘어차피 네가 아는 사랑이란 그런 것을.’
사랑이라는 건 결국 상대방의 모든 걸 빼앗아 내 손안에 움켜쥐는 것이다. 그러자면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하는 게 있다. 상대방의 사랑과 웃음. 언젠가는 유통기한이 다해 사라질 것들. 그런 것들을 미리 포기하면, 현덕을 영원히 가질 수 있다.
영원히.
얼마나 달콤한 단어인지.
현덕을 바라보는 눈가에 어슷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현덕은 그런 주민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보았다.
“왜? 내가 자룡 형을 믿고 존경하는 형으로서 좋아하는 게, 그게 우리 사이에 무슨 문제가 되는 건데?”
이건 박자룡과 우주민을 좋아하는 현덕의 마음을 갈라 양쪽 저울에 올려 두고 어느 쪽이 더 무거운지 재야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우주민이 우주민과 김현덕의 소중한 사람을 함부로 대하고 아무렇지 않게 협박의 도구로 사용했다는 게 문제였다.
현덕은 그걸 말하고자 했으나 주민은 제대로 귀담아듣지 않았다.
끝없는 평행선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답답함. 그 숨막힐 것 같은 답답함을 어쩌지 못하고, 현덕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 내가 좋아한다. 박자룡 형을 겁나 좋아한다고! 너보다 더 좋아해, 됐냐?”
그때 현덕의 등 뒤에 있는 벽에 나 있는 문이 벌컥 열리며, 찐-한 녹색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니들 여기 있었냐. 밥 먹……어?”
아끼는 두 동생을 찾아 나섰던 자룡은 난데없는 고백에 입을 떡 벌렸다.
“…….”
“…….”
“…….”
셋 사이에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혀, 형이 왜 거기서 나와요?”
현덕이 화들짝 놀라며 자룡을 돌아보았다. 그 반응에 자룡도 덩달아 당황해 버렸다.
“어…… 어어? 그, 그러게.”
자룡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처음으로 받아본 고백이 회사 후배가 한 고백이라니. 오로지 데뷔 외길 인생을 살아온 이십 대 초반 박자룡 선생의 인생에 그린 라이트가 켜지는 순…… 간이기는 개뿔.
자신을 흉흉한 눈빛으로 노려보는 주민 덕분에 얼굴의 열기는 빠르게 식었다.
“양파머리, 너.”
으득. 이를 악무는 소리가 자룡에게까지 고스란히 닿았다. 이런 싸가지 없는 찬물 세례가 또 없었다.
‘이 자식들, 지들끼리 말싸움하다가 애꿎은 날 끌어들였구만.’
잠깐 분위기에 휩쓸려 흔들렸던 자룡은 금방 이성을 되찾았다. 두 동생을 양손에 붙잡고 바른길로 끌고 가야 한다는 책임감이 마음을 붙들어주었다.
“그렇게 쳐다봐도 나 못 죽인다, 우주민.”
자룡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그리고 현덕아, 일단 고맙다. 네가 날 그렇게 좋아해 주는지는 몰랐네. 음- 알겠지만, 형도 너 많이 좋아해. 우리 꼭 같이 데뷔하자. 파이팅!”
이어 현덕에게는 훈훈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저도요, 형.”
현덕은 얼른 자룡의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주민은 두 사람의 우정 어린 악수를 노려보며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시 말해봐. 누가 누굴 좋아한다고?”
“내가, 김현덕이 자룡 형을 겁나 좋아한다고 그랬어요. 왜요? 뭐가 잘못됐어요?”
현덕의 뜨거운 고백은 주민과 자룡의 사이를 다시 한번 갈라 놓았다. 자룡을 바라보는 주민은 평소의 싸가지 없는 모습이 그리워질 정도로 살벌했다.
“그렇게 쳐다봐도 나 못 죽인다니까.”
자룡은 태연한 척 말했지만, 몸은 여차하면 도망갈 준비를 끝내놓은 상태였다. 여전히 몸을 반만 내민 채로, 한 손으론 문 손잡이를 꽉 붙들고 있었다.
‘내가 데뷔 운이 없지, 가오가 없나. 딴 놈도 아니고 우주민한테 밀릴 순 없지. 그건 아니지.’
어린 동생에게 쫄아서 도망갈 궁리를 하는 게 쪽팔리긴 했지만. 어쩌랴, 다른 사람도 아닌 우주민인 것을.
‘뭐 때문에 싸우는 지 모르겠지만, 이 늙은 형은 끼워 넣지 좀 말아주라. 나는 니들 굶을까봐 걱정돼 찾으러 온 것 뿐이란다.’
“야, 싸가지. 넌 눈깔아. 누가 보면 내가 니 철천지원수인 줄 알겠다.”
자룡은 주민과 기싸움에서 눌리지 않으려 애쓰며 태연히 말했다.
“현덕이 이렇게 큰 소리 내는 건 처음 보는 거 같은데. 도대체 무슨 잘못을 한 거냐? 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조건 네 잘못일 테니까 현덕이한테 싹싹 빌고 용서받아. 무조건 우주민, 네 잘못이야. 이 싸가지야.”
“마침 당사자가 왔으니, 됐네.”
주민이 자룡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으면서 자룡을 향해 성큼 걸어갔다. 자룡은 바짝 긴장했다.
‘……일단 후퇴할까.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
자룡은 문을 닫고 튀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그런 자룡의 앞에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현덕이 둘 사이에 끼어든 것이다.
“자룡 형 건드리기만 해봐, 진짜 가만 안 있을 거야.”
현덕이 자룡을 보호하겠다며 두 팔을 들어 올렸다.
“현덕아, 너…….”
자룡은 고마운 것도 고마운 거지만, 어쩐지 짠하고 안쓰러워서. 코를 훌쩍이고야 말았다. 병아리가 어미 닭을 지키겠다고 삵을 막아 서서는 걸 보는 기분이랄까.
“현덕아, 난 괜찮아.”
자룡은 손을 뻗어 현덕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무슨 일로 싸우는지는 모르겠지만 쟤가 저러는 거 하루 이틀이냐. 우주민이 싹싹 빌면 받아줘. 내가 촬영팀이랑 너희 팀에는 말해둘 테니까, 천천히 와. 여기서 어떻게든 풀고. 알았지?”
“풀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형, 같이 가요.”
현덕은 자룡을 따라나서려고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자룡은 현덕의 어깨 너머로 주민을 보았다.
그렇게 살벌하고 무시무시했던 삵이 순식간에 주인에게 버림 받은 강아지 꼴이 되어버렸다.
‘뭐야, 저 몰골은.’
자룡은 잘못 봤나 싶어 눈을 껌벅였다. 그 큰 눈을 비벼뜨고 다시 봐도 주민의 상태는 그대로였다.
아이고. 자룡은 앓는 소리를 내며 현덕의 어깨를 붙잡고 돌아서지 못하도록 막았다. 옛말에,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준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형?”
“현덕아, 형 말대로 하자. 저거 저렇게 두고 가면 어쩌니. 싫든 좋든 너랑 내가 챙겨야지.”
자룡이 현덕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감정 상하는 일 있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풀어야 해. 생각해본다고 자리 피하고 날 바뀌면 서로 어색해지기만 할 거야. 내가 보기엔 무조건 우주민 잘못인 거 같으니까, 네가 마음 풀릴 때까지 사과받고 나와. 알았지?”
자룡이 현덕을 보며 씩, 웃었다.
해맑게 웃는 자룡을 보니, 지금까지 주민과 으르렁거렸던 것들이 모두 다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네, 형.”
현덕의 굳어 있던 어깨가 풀렸다.
현덕이 그렇게 평안을 되찾는 동안 주민은 다시 살벌한 상태로 돌아갔다. 자룡은 그런 주민에게도 말을 건넸다. 어느새 익숙해졌는지 주민과 눈을 마주치는 게 그리 두렵지 않았다.
“어이, 싸가지. 네가 현덕이한테 손을 댈 정도로 개쓰레기는 아닐 거라고 믿어서 그냥 간다. 한 살이라도 나이 많은 형 말 무조건 들어. 무조건 네 잘못이니까 현덕이한테 용서받고 와. 나중에 나한테 고맙다고 꼭 백 번 절하고. 알았지?”
자룡은 그렇게 둘만 놔둔 채로 문을 닫았다. 현덕은 닫힌 문 너머로 멀어지는 자룡의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자룡의 활약 덕에 주민과 현덕 사이에 공백이 생겼다.
현덕은 문 손잡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룡은 문을 잠그지 않았다. 그러니 손만 뻗으면 얼마든지 문을 열고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자룡 덕분에 마음이 진정됐다. ‘진정됐다’는 건 그 이전까지는 진정되지 않았다는 뜻이니. 현덕은 자신이 꽤 많이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분명히 화가 치솟아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대로 계속 주민과 둘만 있었다면 둘 사이에 큰 골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형, 고마워요.’
현덕은 다시 한번 자룡에게 감사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뒤에는 닫힌 문이, 앞에는 우주민이 있었다. 아까야 열 받아서 주민을 놔두고 가버릴 생각을 했지만. 지금은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일단 정리를 좀 했으면 좋겠어요. 형.”
현덕의 말에 주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민 또한 자룡 덕분에 맥이 풀린 듯했다. 더는 이상한 말을 하지 않고 순순히 현덕만을 바라보았다.
현덕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들어는 주겠다는 주민의 태도가 고마웠다. 그러니 속마음을 내보이는 걸 부끄러워하지 말고 용기를 내야 했다.
현덕은 마른 세수를 했다. 벌써부터 몽글몽글 솟는 부끄러움을 쓸어내리며 눈을 내리 깔았다.
“주민 형. 나는 형을 좋아해요. 다른 사람들을 좋아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로 형을 좋아해요. 나는 자룡 형을 처음 봤을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자룡 형이랑 뽀뽀하고 싶다는 생각을 꿈에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주민 형이랑은 그런 거 여러 번 했잖아요. 좋아하는 방향이 애초부터 다르다고요.”
차근차근, 유치원생에게 1+1이 2라는 걸 설명해주는 마음으로 말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자괴감이 들었다. 하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현덕이 보기에 주민은 기본적인 상식이 부족했다. 김현덕이 우주민 말고 다른 남자를 쉽게 좋아할 리 없다는 상식이. 그러니 그 상식을 머리에 박아 넣어야 그 다음 단계의 대화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주민은 김현덕이 우주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아야 했다.
“그러니까 내가 자룡 형을 좋아하게 된 것 같다느니 그런 해괴한 말을 하지 말고 날 좀 믿어줘요.”
이어서 현덕은 자신이 왜 화가 났는지, 자룡이 자신과 주민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천천히 말했다.
PPT 없이 말로만 하려니, 스티브 잡스를 뛰어넘는 천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스티브 잡스도 시각 자료를 활용해 프레젠테이션을 하건만. 자신은 오직 말만으로 저 우주민을 납득시켜야 했다.
그런데 주민이 현덕의 스티브 잡스를 뛰어넘으려는 시도를 막아버렸다.
“내 어머니도 한때 아버지를 좋아했었대. 그런데 아버지의 실체를 알고 도망갔어. 좋아할 수 없게 됐다고. 너도 그럴 거잖아?”
질문이 아니었다. 반드시 그럴 거라는 결론이었다. 이게 주민의 진짜 속마음이었다. 현덕은 그의 생각이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실망스러우면, 내 안을 들여다보고 놀라서 도망갈 거잖아.”
“내가 왜 도망을 가요?”
“…….”
주민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현덕은 계획을 변경했다. 자신이 주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려주려 했건만. 그 보다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게 있었다. 주민의 안에 꽉 들어찬 말을 끄집어내는 것.
“형, 말해봐요.”
현덕이 한 걸음, 주민에게 다가갔다. 주민은 그만큼 뒤로 물러섰다.
“형?”
현덕은 약간 충격을 받았다.
주민은 언제나 현덕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면 다가왔지 멀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주민이 현덕을 피해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아까 내가 그랬을 때 우주민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거부당한 기분이 들어서 숨이 답답해졌다.
“형, 주민 형-.”
“내가 어떤 놈이든 날 사랑해 줄 수 있어?”
주민이 고개를 들었다. 앞으로 우수수 쏟아진 머리카락 사이에서 까만 눈이 번뜩였다. 현덕은 그 눈빛에 눌려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주민이 거보라는 듯 피식, 웃었다.
“없잖아.”
“형.”
“더럽다고, 사랑을 줄 가치가 없다고 떠나버릴 거야.”
“아녜요.”
“아니, 맞아. 왜냐면 지금도 그러니까.”
“자룡 형 일이라면-”
“맞아. 난 너 말고 아무도 안 중요해. 너만 있으면 돼. 딴 사람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나조차도. 널 못 가진 내가 무슨 의미가 있지?”
까만 두 눈은 한 번 깜박이지도 않고 현덕을 집요하게 바라봤다.
“날 끔찍하다고 생각해도 할 수 없어. 그래도 못 놓아줘. 이제 와서, 고작 이만큼 날 보고서 도망친다고? 안 놔줄 거야. 끝까지 쫓아가서, 붙잡아서 내 옆에 가져다 놓을 거야. 내 옆에서 도망치지 못하게 할 거야. 절대 못 놔줘.”
현덕은 그 까만 두 눈에 넘실거리는 무언가를 보았다. 그건 커다란 댐에 갇혀 숨겨져 있던 주민의 진짜 마음이었다. 그동안은 알지 못했던 주민의 마음.
세찬 바람에 출렁거리다 결국 선을 넘어 흘러내리는 그 감정이 애틋할 정도로 가엾고 숨막힐 정도로 짙어서, 현덕은 쉽사리 그 마음에 답하지 못했다
현덕이 침묵하자 주민이 잠에서 깬 듯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아냐, 아냐. 이게 아냐. 이게 아닌데. 이러면, 안 되는 건데.”
주민이 뒷걸음질 쳤다.
“잠깐만. 현덕아. 이게 아냐. 김현덕. 나는…… 나는…….”
주민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구원을 바라듯 절실하게 현덕을 바라보다가도 금세 고개를 내젓고는 현덕에게 닿지 않으려는 듯 물러섰다.
“형?”
현덕이 손을 뻗었다. 주민은 겁에 질려 그 손을 바라보았다.
“안 그럴게. 한 번만 봐줘. 내가 잘못했어. 내가 다시 잘해볼게. 앞으로 절대, 박자룡 털끝 하나 안 다치게 할 거야.”
이번엔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았다. 조금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연약한 말들이었다.
“현덕아, 나 원래 그런 사람 아냐. 진짜 그냥 해본 말이었어.”
주민은 필사적이었다. 자신의 억울함을 알아달라고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였다.
주민은 지킬이었고 또 하이드였다. 그 양면이 모두 다 우주민이었다. 그런데 사실, 그 두 가지 모습 모두 다 진짜 우주민이 아닌 것도 같았다. 슬프게도, 주민이 하는 모든 말이 현덕의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주민 형.”
현덕이 주민을 불렀다.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주민이 흔들리는 눈으로 현덕을 보았다. 현덕은 그게 마음 아팠다.
“나는요. 많이 서툴러요. 사람을 사귀고 만나는 게 너무 서툴러서 누구를 제대로 좋아해 본 적이 없었던 거 같아요. 누굴 정말로 싫어하지도 못했고. 그렇게 살다가 형을 만났어요.”
상대방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먼저 내보여야 한다. 그래서였다. 현덕은 종종, 주민을 마주할 때마다 느꼈던 무력감을 솔직히 고백했다.
“주민 형. 우주민. 누굴 좋아하는 것도, 누군가에게 이렇게 화를 내는 것도 다 형이 처음이에요. 그래서 난, 내가 듣고 본 것 밖에 믿을 수 없어요. 나는 항상 느리고 둔해서, 말을 해주지 않는 건 알아채지 못하고 흘려보내고 말아요. 그리곤 항상 뒤늦게 후회하고. 나는 그래서 무서워요. 또 주민 형, 우주민, 너랑…… 너하고 관계에서 또 그럴까봐.”
“…….”
“그래서 항상 네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널 조금이라도 더 많이 보려고 노력해요. 그것만으론 부족하다는 걸 알지만, 그것 말고는 또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몰라서, 나는…… 그것만이라도 겨우 하려고, 노력하고 노력해요. 형을 좋아하니까. 진짜로 좋아하니까.”
“…….”
“주민 형. 우주민. 믿고 싶을 때까지 몇 번이고 말해줄게요. 난 형이 좋아. 정말로 좋아. 그래서 나는 주민 형, 네가 말하면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어.”
울컥, 치솟는 감정은 슬픔일까. 슬픔이 아닌 다른 의미의 눈물일까. 무엇이든 지금의, 조금도 솔직하지 못한 우주민에게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현덕은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주민에게 물었다.
“그런 나한테 계속 이렇게 굴 거야? 형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진짜 형의 모습을 안 하나도 안 보여주고 겉을 꾸며서, 내가 그 겉만 보고 형을 좋아하게 만들고 싶어? 그러다가 내가 형 말대로 진짜, 형한테 실망하고 형한테서 멀어졌으면 좋겠어?”
그럼에도 울컥, 치솟는 울음을 어쩌면 좋을까.
“말해봐요. 그래도 돼요? 그래도 되겠어? 그랬음 좋겠냐고. 우주민! 말을 해 봐!”
차라리 주민에게 달려가 주민을 붙들고 마음껏 울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고작 몇 발자국 떨어져 있을 뿐인데. 그 사이가 수천 킬로미터나 되는 것처럼 너무 멀게 느껴졌다. 주민이 손을 내밀어주지 않으면 현덕은 그에게로 갈 수 없었다.
다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주민이 파놓은 골이었고, 알아차리지 못한 현덕의 죄였다.
‘어느새 이렇게 멀어져 버렸을까. 아니, 한순간도 가까웠던 적이 없었던 걸까.’
현덕은 저와 주민 사이의 깊은 골을 내려다보며 허망히 웃었다.
기회가 될 때마다 함께 있으려고 안달했다. 사람들 시선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가 입술부터 들이미는 주민을 밀어내곤 했지만, 정말로 싫진 않았다.
껴안고 입을 맞출 때면 맞닿는 주민의 무게와 온기가 좋았다. 온몸으로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주민이 자신도 너무나 좋아서, 참지 못하고 그를 마주 안았다.
때로는 얄밉기도 했다. 종종 재수 없게 굴 때면 분통이 터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저 주민이 좋았다.
현덕은 그 마음에 꼬박꼬박 애정이란 물을 주고 세월이란 밝은 햇살을 띄워 무럭무럭 키우고 싶었다. 어떤 태풍이 와도 흔들리지 않는 커다란 아름드리나무가 되어 평생을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랐다.
오늘, 원소혁에게 들었던 일은 그 마음에 스치는 장마라고 생각했다. 당장은 치고 받고 싸우겠지만. 그래서 사이가 냉랭해질 수도 있겠지만. 곧 화해한 후 사이가 더 돈독해지리라 믿었다.
그랬기에 현덕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주민에게 화를 냈다. 주민을 믿었고, 주민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 정도로 화를 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실망하고 멀리했겠지.
주민도 자신과 같은 마음일 거라 생각했건만.
아니었다.
언제나 온 감정을 드러내어 전력으로 부딪친 건 현덕뿐이었다. 주민은 제 속마음을 솔직히 보여주지 않았다. 전전긍긍하며 애달파 하면서도 현덕에게 온전히 제 마음을 주지 않았다.
현덕은 이제 네가 날 미워할까 봐 숨겼다고 말하는 주민에게, 그럼 나한테 보여주었던 그간의 모든 모습도 다 꾸며낸 거였냐고 물어봐야 할 처지에 놓였다.
“난 싫어. 그런 거. 난 널 좋아해서.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거…… 살면서 한 번도 가능하다고 생각도 해본 적 없지만 괜찮았던 거야. 그런데 정작 우주민, 주민 형, 네가 날 믿지 못하고 자기 마음을 나한테 숨겨왔던 거라면…… 내가 어떻게 버텨? 무얼 믿고 살아야 해?”
“진짜 내 속을 알면 넌 더 버틸 수 없을 거야.”
“버틸 수 있을지 없을지 결정하는 건 나야. 멋대로 판단하지 마.”
“아니, 너는 몰라. 모르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야.”
“나한테 네 맘을 제대로 보여준 적이 없으니까, 나는 모를 수밖에 없지. 내가 알고 있는 건 하나뿐이야. 내가 욕심쟁이라는 거.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전부를 원해. 우주민, 네가 내 전부를 원하듯이 나도 그렇다고.”
현덕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눈이 너무 시리고 아려서, 눈을 뜨고 주민을 볼 수가 없었다.
‘이렇게 좋아하는데, 이렇게 좋아하게 됐는데…… 왜 마음이 통하지 않는 걸까.’
서른세 살까지 살았던 이전의 삶에서 현덕은 꽤 오랫동안 텅 빈 채로 살아왔다. 그래서 텅 빈 채로 산다는 게 무엇인지 않다. 단지 숨 쉬며 움직이는 게 정말 살아 있는 건 아니라는 것 또한 안다.
그렇기에 우주민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지금이 행복했다. 우주민도 그러길 원했다. 하지만 주민은 아니었단다. 제 안이 너무 더러워서 내줄 수가 없단다.
서로를 마음에 가득 채운 관계라 믿어 의심치 않았건만 그게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 현덕은 주민에게 등을 보이고 돌아서야 했다.
자룡은 어떻게 해서든 이 자리에서 해결하라고 말했지만. 현덕은 그럴 자신이 없었다. 주민을 뒤덮은 벽은 너무 두꺼워서 지금 당장 깰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우주민을 포기하겠다는 건 아니었다. 그저, 지금은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슬퍼서, 더는 주민에게 다가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시간이 필요했다. 주민에게 까인 마음을 다독이고, 저 우주민의 단단한 껍질을 깨트려 그 안에 숨어 있을 여린 속살을 꺼낼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는 시간.
현덕은 자룡이 닫고 나간 문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주민에게 간다는 말도 없이 문을 열고 나가려 했다.
그런데.
“씨발.”
“뭐, 씨발?”
현덕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사람이 너무 큰 충격을 받으면 미친다는데. 이런 상황에서 욕을 하는 주민이 미친 걸까. 그걸 듣고 웃고 마는 자신이 미친 걸까.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고마워.”
그 목소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고맙다고. 고마웠다고. 계속, 내내 고마웠다고.”
주민에게서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었다. 현덕은 제 청각 이상을 의심했다.
‘아까 소리 지르다가 고막이 터진 건가?’
그게 아니고서야 지금 이 순간에, 이런 말이 들릴 리가 없지 않은가.
이건 환청이었다. 환청이어야 했다. 그런데 그 환청이 계속 들렸다.
“내가 다 말하면 어쩔 건데. 고맙다고 말했으면 날 더 안 봤을 거잖아.”
그 환청에 물기가 어렸다. 등이 축축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현덕은 차마, 돌아설 수 없었다.
“나 때문에 네가 다칠 뻔했다고. 그 자식들이 널 건드릴 뻔했는데. 그걸 말하라고? 그러면 넌 나한테서 멀어졌을 거야. 그게 싫어서, 박자룡을 팔아서라도 협박했어. 그게 왜? 뭐가 잘못됐는데?”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이윽고 그가 숨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현덕을 뒤에서 껴안았다.
현덕은 손잡이를 움켜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저를 옥죄듯 끌어안는 주민을 뿌리칠 수 없었다. 고작, 문손잡이를 움켜쥐어 주민에게 끌려가지 않으려 하는 게 고작이었다.
주민은 현덕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다른 한 손으로는 문손잡이를 움켜쥔 현덕의 손을 덮었다.
“가지 마. 나 버리지 마.”
“…….”
“고마워, 고마웠다고. 고맙다고. 뭐든 말할 테니까…….”
주민이 현덕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나 버리지 마. 제발.”
숨이 뜨거웠다. 닿은 어깨가 녹아내릴 것 같았다.
시간이 멈추고 세상이 정지했다. 여전히 지구엔 중력이 존재하나 영혼의 무중력 상태는 시작되어 마음이 몸에서 빠져 나와 허공을 맴돌다 흩어졌다.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그렇게, 그렇게 이대로 세상이 끝나 버리는 가 싶었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했고 현덕과 주민도 여전히 존재했다.
현덕은 울음을 삼켰다.
“안 떠나요.”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대답했다. 목이 메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지금 떠나려고 했잖아.”
“화가 나서 잠깐, 머리 식히려고 그랬던 거예요.”
“그러고 나한테 안 돌아오면?”
주민의 말에 현덕은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어떤 감정이 발끝에서부터 차올라 단번에 현덕을 가득 채웠다. 차고도 넘칠 듯 그 감정이 출렁였다. 현덕은 그것을 쏟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못 믿어.”
“어떻게 하면 믿을래요?”
“떠나지 마. 네가 하지 말라고 하는 건 아무것도 안 할 테니까.”
어깨가 뜨거워진다 싶더니 금세 축축해졌다.
현덕은 문손잡이를 놓고 돌아섰다. 여전히 주민의 품속이었다.
“주민 형.”
두 손으로 제 어깨에 기댄 주민의 얼굴을 들었다. 주민은 순순히 고개를 들었다.
주민이 울고 있었다.
현덕이 주민의 뺨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주민은 그 온기를 느끼듯 눈을 감았다. 긴 속눈썹을 타고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처연한 눈물이었다.
현덕은 주민의 눈물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마음이 아팠다. 누군가의 눈물이 이렇게 아프게 다가올 수 있는 줄 몰랐다.
“내가 시키는 대로 말해요.”
“뭐든지 할게.”
현덕의 허리를 끌어안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일단 지금은 고맙다가 아니라,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 거예요.”
“미안해.”
주민은 바로 말했다. 현덕의 허리를 감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고맙다고 말해준 건 고마워요. 나는 계속 주민 형한테 그 말이 듣고 싶었거든요.”
“고마워.”
주민이 또 냉큼 대답했다.
현덕은 그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눈물은 전염이 되기도 하는지,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나도, 나도 고마워요. 정말로.”
우주민이라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었다. 서툴러서, 너무 서툴러서 이렇게나 안타깝고 사랑스러웠다.
아득히도 먼 옛날처럼 느껴지지만. 한때, 주민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를 듣고 싶어서 안달이 내던 적이 있었다.
왜 그리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에 그렇게 열을 올렸을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주민과 좀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그랬던 것 같다.
별것 아닌 일에 생색을 내고 주민이 고마워하길 바랐다. 고맙다는 말을 들으면 ‘천만에요.’라고 말하면서 웃어주고 싶었다. 그렇게 친해지고 싶었다. 자룡만큼 가까워지고 싶었다.
어느새 자룡보다 더 가깝고 내밀한 사이가 되어 잠시 잊고 있었건만.
주민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현덕과 주민이 알고 있는 ‘고맙다’라는 말의 정의가 너무 달랐다. 현덕에겐 관계 지향적인 그 한마디 말이 주민에게는 그나마 있던 관계도 정리해 버리는 이별의 말이었다. 어째서 그런 차이를 가지고 있는지 고민하거나 묻기에 앞서, 현덕은 그저 담담히 그 차이를 인정했다.
주민이 틀리고 현덕이 옳은 게 아니었다. 단지 둘의 생각이 다른 것이었다.
“내가 고맙다고 말해달라고 했던 건 형이랑 좀 더 가까워지고 싶어서였어요.”
현덕은 주민의 뺨을 만졌던 손으로 주민의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눈에 젖은 눈물이 머리카락을 뒤로 고정해 주었다. 주민의 눈이 커진 게 보였다.
“거짓말.”
“진짠데.”
“하지만 넌…….”
“내가 뭘요?”
“아니.”
주민이 슬그머니 현덕의 손을 움켜쥐었다. 현덕이 가만히 있으니 간지럽히듯 손등을 쓸었다. 그걸로도 만족을 못 하겠는지 아예 깍지를 꼈다.
현덕도 주민의 손을 꼭 맞잡았다.
“고마워해줘서 고마워요.”
“고마워.”
“미안하다고 말해준 것도 고맙구요.”
“미안해.”
주민은 고장 난 테이프처럼 말을 반복했다.
고작 그 한마디 말에 현덕의 마음이 사르르 녹아버렸다. 현덕은 주민에게 한해서만큼은 이리도 물렀다. 주민은 그걸 모르는 것 같지만.
아니, 모르는 척하는 것일 뿐. 아는 것 같았다.
“고마워, 미안해. 그러니까 이젠 만지게 해줘.”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부탁을 할 리가 없었다.
현덕은 못 들은 척했다. 그러자 주민이 깍지 낀 손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다시 말했다.
“만지고 싶어. 내 앞에 있는 널 확인하고 싶어. 응?”
눈은 여전히 현덕을 바라보고 있었다.
“…….”
용법이 잘못됐다고 말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엔 현덕은 주민에게 너무 물렀다.
현덕은 그렇게 말하는 대신에 깍지 낀 주민의 손을 들어 올렸다. 깍지 낀 손가락을 풀고, 이번엔 주민의 손등을 자신의 손으로 덮었다. 그리고 주민의 손을 제 뺨에 댔다.
조금 전 주민이 그랬듯 이번엔 현덕이 주민의 손에 제 뺨을 부볐다. 종잇장처럼 힘없이 끌려 다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주민이 현덕의 뺨을 움켜잡았다. 조심스럽지만, 다급하고 거칠었다. 현덕은 그 손길에 그대로 저를 맡기고 눈을 감았다. 그걸 온전한 허락이라고 여겼는지 주민이 현덕을 문 쪽으로 밀어 몰아붙였다.
주민은 좀 더 현덕을 만지고 싶었다. 만지고 있는데도 더 만지고 싶었다. 갈증으로 메말라 죽어버릴 것 같았다.
우선 어깨를 쥐었다. 피터가 기대고 있던 쪽이었다.
얇은 어깨가 한 손에 들어왔다. 피터의 흔적을 지우려는 듯 꽉 움켜잡자,
“으…….”
현덕이 얼굴을 찡그렸다. 주민은 얼른 손에 힘을 풀었다.
그렇다 해도 나중에 옷을 벗고 보면 어깨에 자국이 남아 있으리라. 그걸 알려주면 주민이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해주지 말아야지.’
현덕은 생각했다.
주민의 손이 현덕의 왼쪽 가슴 위에 닿았다.
쿵쿵.
박동하는 심장의 감촉이 손바닥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심장을 손에 쥔 것 같았다.
평소에도 이렇게 뛰느냐고, 아니면 내가 닿아서 이렇게 된 거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입안이 바싹 말랐다.
손이 아래로 내려가 마른 배 위를 더듬었다.
현덕은 가죽 재킷을 벗고 얇은 민소매 셔츠만 입고 있었다. 얇은 천 한 겹을 사이에 두고 주민의 손이 현덕의 몸을 훑었다. 옷을 안 입고, 벌거벗은 채 주민에게 만져지는 느낌이었다.
주민의 손은 뜨거웠다. 닿는 곳마다 화상을 입을 듯 화끈했다. 피하고 싶었지만 등 뒤는 벽이었다. 얼굴 옆에는 주민이 손을 짚고 있었다.
벽과 주민 사이에 갇혔다. 내쉬는 숨이 주민의 얼굴에 부딪칠 정도로 가까웠다. 도망칠 수 없었다. 그저 주민의 손길을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주민 형.”
현덕은 어째서인지 울고 싶었다. 분명히 자신이 허락한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이런 우주민은 언제나 감당하기 벅찼다.
“응, 응. 괜찮아.”
주민은 말로만 현덕을 달래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아래, 더 아래. 주민이 자신의 어디를 보고 있는지 깨닫는 순간, 다리 사이가 찌릿하게 저렸다.
이상한 기분을 감추려 다리를 오므리려 하자 주민이 현덕의 다리 사이에 제 다리를 밀어 넣었다. 동시에 주민의 손이 셔츠 안으로 들어왔다. 맨살에 주민의 손이 들러붙었다.
“잠, 깐만!”
현덕은 주민의 양쪽 어깨를 붙잡았다.
셔츠 위로 만져질 때도 옷을 벗고 맨살을 맞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건만. 그건 얼토당토않은 생각이었다. 실제로 맨살이 닿는 감촉은 천 위로 만져지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뜨겁고, 무서웠다.
“잠깐만, 잠깐만. 주민 형.”
“현덕아. 조금만, 조금만 더.
주민의 손이 현덕의 마른 배를 쓸어내리고 허리를 움켜쥐었다. 현덕은 저도 모르게 주민의 어깨를 껴안고 매달렸다.
현덕의 몸이 떨렸다. 주민은 그 떨림을 제 몸으로 덮었다.
주민이 현덕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쉬었다.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았다. 하얀 목을 물어뜯고 싶어 입맛을 다셨다.
주민은 현덕의 마른 허리를 쓸었다. 따뜻하고, 말랑하고, 한 팔에 들어오는 감각이 미칠 정도로 좋았다.
이 모든 걸 놓칠 뻔했다.
단 한순간에.
생각만 해도 현덕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윽, 하는 신음이 귓가에 닿았다.
더는 참지 못하고 현덕에게 입을 맞췄다. 한 손으로 현덕의 뒷머리를 움켜잡았다.
”흐읍…….“
현덕의 입안은 축축하고 따뜻했다. 메마르고 뜨거울 뿐인 주민의 혀가 단번에 젖어 들었다. 주민은 주린 사람처럼 정신없이 현덕의 혀를 빨아 당겼다.
달아서, 너무 달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으응, 흐으…….”
현덕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 울림이 맞붙은 몸을 타고 주민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랫배에서 불덩이가 확, 치솟았다.
‘절대 못 놓쳐. 겨우 손에 넣었는데. 어떻게 해서 가졌는데. 절대 못 놔.’
주민은 제 목에서 바르작대는 현덕의 두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붙잡아 다시 깍지를 꼈다. 두 손을 벽에 밀쳐 고정시키고, 현덕의 몸을 제 몸으로 밀어붙였다.
현덕과 주민의 몸이 한 치 틈 없이 맞붙었다. 주민은 현덕의 손가락을 으스러뜨릴 듯 세게 움켜쥐며, 깊이 키스했다.
손안에 어린 새를 움켜쥔 기분이었다. 꽉 움켜쥐어 터트리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이 사랑스러움을 놓칠 뻔했던 순간의 기억이 심장을 억죄고 놔주지 않았다. 그 또한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