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Twin (28/36)

4. Twin

탈락한 세 명의 연습생이 세트장을 떠난 후.

남은 스물여섯 명의 연습생들은 지금 심정에 대해 간단히 인터뷰했다. 그러고 나서야 다시 버스를 타고 합숙 촬영 장소인 호텔로 갈 수 있었다.

호텔로 가는 버스 안 분위기는 팀마다 달랐다. 위팀과 오팀이 탄 버스는 잔치집 분위기였다. 연습생들의 얼굴은 더없이 밝았다. 다음 무대는 또 무엇일지 궁금해하며 웃고 떠들었다.

촉팀이 탄 버스의 분위기는 아침과 비슷했다. 날 선 긴장감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연습생들 중 누구도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호텔로 돌아가니, 먼저 도착한 유진이 1층 로비의 무대 위에 서 있었다. 유진은 두 팔을 벌려 연습생들을 반겼다. 그녀의 손에는 금빛으로 반짝이는 봉투가 들어 있었다. 다음 무대의 미션이었다.

[ 앞서간 자의 발자취를 기억하라. ]

헐리우스 블록버스터 판타지 영화에 나올 법한 거창한 문구였으나 내용은 간단했다.

다음 무대에 설 곡은 세 팀 모두 동일했다. ‘트윈 트윙클’의 메인 테마곡, ‘홍문연’이었다. 아쟁과 거문고 등을 사용한 국악을 기본으로 한 곡으로 서정적이면서도 템포가 빨랐다.

미션곡은 하나였고 팀은 셋이었다. 고로 세 팀은 이 하나의 곡을 똑같이 준비해야 했다. 편곡은 가능했으나 따로 전문가가 붙지는 않고 각 팀이 재량껏 해야 했다.

편곡한다고 하나, 현장 관객과 시청자 입장에서는 결국 같은 노래를 세 번 들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 순서는 불리했다.

공정하게 세 팀의 리더가 나와 가위바위보를 했다. 각 팀의 리더는 바뀌지 않고 그대로였다. 오팀의 유호, 위팀의 자룡, 촉팀의 피터.

피터는 내리 3판 모두 져서 꼴등이 됐다. 유호와 자룡은 매번 같은 걸 내서 15차전까지 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두 팀 연습생들의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치열한 접전 끝에 가위로 보자기를 이긴 건 유호였다.

“……!”

유모는 그대로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너무 긴장해서 위통이 도진 것이었다.

“유호 형!”

“유호 형님!”

정모와 한승이 얼른 달려 나와 유호를 들쳐 업고 보건실로 달려갔다. 카메라는 그런 둘의 모습을 끝까지 잡았다.

유호가 투혼을 발휘한 덕에 오팀이 첫 번째 순서를 받았다. 위팀이 두 번째, 촉팀이 세 번째가 되었다.

마지막 순서인데다가 다른 팀보다 팀원이 4명이나 부족한 상태. 거기다 편곡 능력자마저 적었다. 준비는 어렸고, 현덕과 피터는 문외한이었다.

다행히 능력자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두 연습생이 자신들에게 맡겨달라고 나섰다. 소혁과 다른 연습생이었다. 소혁은 기획사에서 꾸준히 작사, 작곡을 배우고 있었다. 다른 연습생은 실용 음악을 전공하는 대학생이었다.

피터는 여전히 리더였지만 이번만큼은 리더의 권한을 두 연습생에게로 넘겼다.

‘다른 팀은 자신이 편곡하겠다고 나서는 연습생만 대여섯 명인데. 우린 둘 뿐이니까, 의견 충돌이 심하진 않겠어.’

피터는 물론이거니와 다른 연습생들도 이렇게 생각하며 안도했다. 그것이 안일한 생각이었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편곡을 할 줄 아는 두 연습생은 음악적 정체성이 확고했다. 각자의 기획사에서 싱어송라이터로 키우고 있었던 터라 자작곡도 여러 개 가지고 있었고, 자존심도 강했다.

그러면서도 편곡 스타일이나 지향점, 취향은 전혀 달랐다. 현재 심취한 장르만 봐도 그랬다. 소혁은 EDM이었고 다른 연습생은 데스메탈이었다. 뽀로로와 다스베이더의 정상회담도 이처럼 이질적이지 않을 터였다.

문제는 편곡해야 하는 트윈 트윙클의 메인 테마곡이 EDM으로 바꿔도 데스메탈로 바꿔도, 너무 잘 어울린다는 데 있었다.

당연하게도 두 사람은 자신의 편곡 스타일을 밀어붙였다. 둘 중 누구도 양보하지 않으려 했다. 피터가 둘 사이를 중재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빠져.”

“이건 그냥 편곡 스타일을 정하는 게 아니에요. 자신의 영혼을 증명하는 일이라고요. 리더님, 비키세요.”

“영혼? 내가 어이가 없어서.”

“원소혁 연습생,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겉멋만 들었다고 했습니다만?”

“그러는 원소혁 연습생은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날 무시하는 겁니까? 잠깐 유행하고 말 그깟 EDM 좀 만져봤다고 꼴에 작곡해봤다고 말하고 다니나 본데-.”

기싸움이 심해져 서로의 음악성을 비하하는 정도로까지 흘러가 버렸다. 둘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골이 생겼다. 다른 팀도 편곡 과정에서 다툼이 있었지만 촉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촉팀은 피터가 없었다면 벌써 한바탕 쌈박질이 나도 이미 예전에 났을 분위기였다. 그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겨우 답을 찾아낸 건 현덕이었다. 피터가 두 사람을 뜯어말리다 지쳐 널부러져 있을 때였다. 현덕은 막 뽑아온 시원한 캔커피를 내밀며 물었다.

“이혼 소송을 할 때, 남편과 아내의 말이 완전히 다를 때, 변호사가 어떻게 대처하는지 아세요?”

“어떻게 하는데?”

피터는 다 죽어가는 얼굴로 물었다.

“두 사람 이야기를 합쳐서 들어요.”

현덕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

피터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현덕을 올려다 봤다. 그리고는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캔커피를 단번에 들이켰다.

빈 캔이 피터의 손안에서 형편없이 찌그러졌다. 와그작. 피터는 아직도 싸우고 있는 두 연습생에게로 뛰어갔다.

“고마워, 현덕아!”

감사 인사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캔커피 하나로 기운을 되찾은 리더는 곡을 아예 전반부와 후반부, 둘로 나누어 버렸다. 그래서 앞부분은 소혁이, 뒷부분은 다른 연습생이 제 스타일대로 편곡하도록 했다. 작곡, 편곡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기에 가능한 구상이었다. 절대 자신의 스타일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두 편곡자를 중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리더님, 리더님이 솔로몬이십니까?”

소혁은 아니꼽게 대꾸하긴 했지만 대놓고 반대하지는 않았다. 다른 연습생 또한 어느 정도 수긍하는 기색이었다. 아무튼 자신의 편곡 스타일만 지킬 수 있으면 되니까. 또 자신이 얼마나 멋있게 곡을 편곡하는지 방송을 탈 수만 있으면 되니까.

결국 두 사람은 피터의 중재안에 오케이 했다.

그리고 2주 뒤.

두 번째 미션 무대의 팀 1위는 오팀이었으며, 연습생 순위에서 1위는 주민, 2위는 자룡이었다. 부동의 위치였다.

팀 3위는 이번에도 촉팀이었다. 그런데 이번 발표는 지난번 발표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순위 발표가 이루어졌다.

MC 유진은 연습생들의 순위를 딱 15위까지만 발표했다. 15위권 밖 순위를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촉 팀의 하위권 연습생 3명 중 2명을 먼저 공개해 탈락시켰다. 편곡으로 소혁과 다퉜던 연습생, 그리고 또 다른 연습생이었다.

이제 촉 팀에 남은 건 네 명이었다. 현덕과 준비, 피터, 그리고 소혁.

유진은 그 네 명을 천천히 훑었다. 촉팀 연습생들은 유진의 눈빛을 받지 않으려 눈을 내리깔았다.

남은 네 명 중 자신이 몇 위인 줄 아는 건 준비뿐이었다. 준비는 초통령이라 불리며 초등학생과 초등학생을 자녀로 둔 부모님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도 8위. 상위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그에 비해 현덕과 피터, 소혁은 순위가 공개되지 않았다. 셋 모두 15위 밖, 하위권이었다.

세 사람의 순위가 하락한 건, 이번 무대를 준비하며 삐걱거렸던 모습이 그대로 방송을 탔기 때문이었다. 메인 PD는 촉팀을 멸망시키려고 작정했는지 촉팀의 내부 분열을 그대로 내보냈다. 편곡을 할 줄 몰라 무능력해진 리더. 자신이 옳다며 싸우고, 다른 연습생들을 통제하려고 들었던 소혁과 다른 연습생. 병풍처럼 가만히 서 있는 현덕.

현덕은 그렇게 똑똑한 척하고 남을 도와주겠다고 나대더니, 정작 이럴 때는 전혀 나서지 않는다는 소리를 들었다. 피터에게 캔커피를 건네며 조언했던 건 방송에 나오지 않았다.

이번 미션이 방영되며 현덕에게는 새로운 별명이 생겼다.

‘웃는 꽃 병풍.’

하는 일 없이 벽에 붙어 싱글싱글 웃고만 있는다 의미였다.

소혁과 다른 연습생이 말다툼을 할 때 어떻게든 둘을 말리고자, 분위기를 애써 부드럽게 하려 웃은 거였건만. 그 모습만 부각돼 방송을 탔다.

웃는 얼굴이 사이코패스 같다는 악플까지 달렸다. 이제 악플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현덕은 허허, 웃고 말았지만. 트라이 온 변호사단은 한층 바빠졌다.

현덕은 유진의 시선이 제게 닿자 눈을 질끈 감았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이번에 떨어지는 건가?’

소혁이나 피터가 떨어질 거 같진 않았다. 그러니 남은 건 현덕, 자신뿐이었다.

“촉팀의 김현덕 연습생.”

유진이 현덕의 이름을 불렀다.

“……!”

숨이 멈췄다.

이번에야말로 탈락하게 되는 거라고 생각했으면서, 그래도 ‘설마’라는 마음이 남아 있었던 걸까.

‘나…… 탈락인 걸까?’

머리가 새하얘졌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탈락하셨습니다.’라는 말이 들리기까지가 천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현덕은 살짝 실눈을 떠 유진을 보았다. 막 그녀의 입술이 움직인다 싶었건만. 그녀는 입술을 열지 않고 그저 미소만 지었다.

유진은 그렇게 현덕의 심장을 들었다 내려놓고는 현덕의 옆에 서 있는 소혁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원소혁 연습생, 피터 윤 연습생. 모두 앞으로 나와주세요.”

헉. 참았던 숨이 터져나왔다.

현덕은 최대한 조용히 숨을 들이쉬려고 노력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삐거덕 삐거덕, 왼팔과 왼다리, 오른팔과 오른다리가 같이 움직였다.

주민이 춤을 추려고 팔다리를 움직일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다음부터 절대로 못 춘다고 놀리지 말아야지.’

딱히 놀린 적은 없지만, 놀란 적만 있고. 아무튼 현덕은 깊이 반성했다. 유진은 그런 현덕에게 마이크를 내밀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상황입니다. 동료나 아니면 시청자분들께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지난주와는 다른 방식이었다. 좀 더 자극적인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 탈락자 발표 방식을 바꾼 듯했다.

현덕은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마이크를 잡은 두 손이 덜덜 떨렸다.

잠시간, 현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머리가 백지처럼 하얬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손이 덜덜 떨리는 게 느껴지는데, 그게 내 몸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남이 손 떠는 걸 지켜보는 것 같았다.

“저는…….”

현덕은 어렵게 입을 뗐다. 그래 봤자 입술을 달싹이는 게 고작이었지만, 마이크는 용케 현덕의 목소리를 잡아채 크게 키웠다.

조그만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천둥보다 큰 소리가 되돌아왔다.

낯선 경험이었다.

낯선.

그러고 보면 모든 게 다 낯설었다.

서른세 살 김현덕이 다시 열여섯 김현덕이 되고, 열여덟의 김현덕이 되었다. 똑같은 삶을 살았더라면. 그저 공부를 열심히 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해 판사가 되고 싶다는 꿈만 꿈꾸었더라면. 이렇게 덜덜 떨며 단상 위에 서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덕은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살게 되었으니 이번엔 다르게 살아 보겠다고 결심했다. 그 첫걸음이 길거리 캐스팅에 응한 것이었다. 이후 이전의 삶과 조금씩 빗겨나기 시작하는 새로운 삶을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렀다. 이제는 그저 작은 일탈이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만큼…… 나는 최선을 다했던 걸까.’

소홀하진 않았지만, 돌아보면 자꾸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번 미션 역시 마찬가지였다.

‘편곡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까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라고 생각했어. 괜히 끼어들어 두 사람의 작업을 방해하지 말자고. ……그러지 말걸.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볼걸.’

이제 와서 후회가 들었다.

현덕은 그런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말했다. 처음엔 목소리가 세차게 떨렸지만 곧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예전에 대학교 면접을 볼 때도, 사법고시 3차 면접을 볼 때도 이토록 떨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이렇게 생각하니 그나마 남아 있던 떨림도 사라졌다. 그래서 마지막 말을 할 때에는 차분하게,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할 수 있었다.

“저를 응원해주시는 분들께 죄송합니다. 좀 더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게, 정말 많이 죄송합니다.”

현덕은 크게 심호흡했다. 숨이 달그락거렸다. 숨을 쉬는 건지 쥐어짜내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응원해주시는 분들께 죄송하다는 그 마음, 꼭 잊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김현덕 연습생.”

유진이 마이크를 돌려받으며 말했다. 현덕은 그러겠다고 대답하다가 유진과 눈이 마주쳤다.

유진이 현덕을 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현덕은 그 미소가 어쩐지, 엄마의 미소처럼 자애로워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에 답하듯 유진이 말했다.

“김현덕 연습생. 합격입니다.”

“……네?”

분명 한국말이 귀에 들렸는데, 그래서 뭐라고 말하는지 머리에 입력이 되었는데. 그런데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합격이라고?’

현덕은 멍하니 유진을 바라보았다.

“앞에 선 세 연습생 중에서는 가장 순위가 높았습니다. 그러니 조금 전의 마음, 잊지 말고 좀 더 분발하세요. 김현덕 연습생을 응원하는 시청자분들을 위해서 말이에요.”

“……말도 안 돼.”

현덕은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소혁은 앞만 보고 있었다. 피터는 현덕과 눈이 마주치자 눈꼬리를 곱게 휘며 웃어 보였다. 축하한다고, 잘 버텼다고 위로해주는 듯했다.

“이건 정말…….”

현덕은 탈락을 면했다는 기쁨을 느끼기는커녕, 소혁과 피터 중 한 명이 탈락하게 될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왜? 왜 내가 아니라 저 둘 중 한 명이?’

현덕이 꿈쩍도 하지 않자 뒤에서 준비가 뛰어나와 현덕의 손을 잡아챘다.

“형, 현덕 형. 얼른 이리로 와여어.”

“어? 어어, 어…….”

“다행이예여.”

준비가 숨소리보다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현덕은 버릇처럼 준비를 다독이며 피터와 소혁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겉보기엔 전혀 긴장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유진은 두 사람 앞에 서서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카메라 뒤의 전광판에 올라오는 대본을 자연스럽게 읽어 내려갔다.

“자, 세 사람 중 한 명이 탈락을 면했습니다. 촉팀의 하위 순위 연습생 중 김현덕 연습생이 그나마 순위가 높았으니까요. 이제 단 두 명이 남았습니다. 피터 윤 연습생과 원소혁 연습생. 이들 둘 중 한 명이 오늘, 마지막 탈락자가 됩니다. 각자 김현덕 연습생과 마찬가지로 탈락에 남기고 싶은 말이 있나요?”

유진이 소혁에게 먼저 마이크를 내밀었다.

소혁은 마이크를 들고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탈락할지 모르는 순간에도 그는 당당했다. 탈락자 선발이 아니라 우승 후보를 선발하는 자리에 선 것 같았다.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조금 안 좋은 모습도 보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모습도 저라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 모습을 보고 놀라거나 실망하신 분들도 많으신 줄 압니다. 하지만 단지 착하고 좋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포기하면 안 될 걸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잠시 말을 멈춘 소혁은 한숨 돌리고는 말을 이었다.

“전 최선을 다했고, 비록 그 과정이 저를 좋아하시는 분들께 실망을 안겨드리는 결과가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저는 저의 무대에 만족합니다.”

소혁은 그 어느 때보다 반짝반짝 빛났다. 평소 소혁이 재수 없다고 욕하던 연습생들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소혁에게 홀려 눈을 떼지 못했다.

소혁이 말을 멈추자 유진이 손을 내밀었다. 마이크를 돌려받으려는 것이었다. 소혁은 마이크를 돌려주는 대신 뒤를 돌아 위팀이 있는 쪽을 보았다. 가장 앞자리에 자룡이 앉아 있었다.

자룡은 준비와 꼭 붙어 있는 현덕을 보느라 소혁이 자신을 보는 줄 몰랐다. 옆에 앉은 연습생이 옆구리를 쿡 찌르며 알려줘서야 알았다. 자룡이 뒤늦게 고개를 돌리자 소혁은 다시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언제나 저에게 좋은 자극이 되어준 박자룡 연습생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어? 나?”

자룡이 화들짝 놀라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두 눈은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안 그래도 부리부리한 눈을 크게 뜨니 눈이 툭, 굴러 나올 것 같았다.

소혁은 픽, 웃으며 ‘그래, 너.’라는 오만한 눈초리로 자룡을 내려다 봤다. 소혁이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자 이내 상황을 파악한 자룡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씨-앗. 정말로 나? 내가? 나한테 하는 말이야?”

그런 자룡을 본 소혁은 한숨 덜어낸 듯 개운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유진에게 마이크를 내밀었다.

“아, 음.”

유진은 잠시 숨을 골랐다.

“1부에서부터 시작된 우정인 것 같군요. 서로 경쟁하며 발전하는 사이였나 보네요. 아주 멋진 우정입니다.”

갈등이 잦아 앙숙이라 생각했건만 사실은 서로를 선의의 라이벌로 생각하며 우정을 쌓아온 관계였다니. 편집을 통해 둘이 관계성을 그려내기 좋은 지점이었다.

유진은 제작진이 보내는 신호를 보고는 자룡과 소혁이 트라이 온 1부에서부터 어떤 관계였는지를 길게 말했다. 그러고 나서야 마지막으로 피터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마이크를 받아든 피터는 멋쩍게 웃음을 지었다.

“음-.”

스피커를 타고 피터의 목소리가 울렸다. 울림이 풍부한 저음이었다. 이 목소리는 항상 묵직하게 깔려 다른 연습생들의 음색을 감싸 주곤 했다.

트라이 온 1부에서 피터는 장난을 치며 밝고 가벼웠다. 하지만 2부에 들어서는 달랐다. 촉팀의 리더로 활약하며 든든한 맏형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탈락자를 선발하는 단상 위에 서서도 역시나 단단했다. 이런 날을 예견했다는 듯, 혹은 기다렸다는 듯.

“언제부터인가 항상, 이런 자리를 꿈꿨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이전에도 기회는 여러 번 있었는데, 그래서 말하지 못했습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거 같다는 생각이 드니 더는 물러설 수가 없네요.”

탈락할지도 모를 위기에 처한 연습생의 소감이라기엔 뭔가 이상했다. 소혁의 돌발 행동으로 수군대던 연습생들이 하나둘 입을 다물었다.

한쪽으로 물러서 있던 유진이 제작진을 향해 손짓했다. 괜찮냐고, 뭔가 이상한데 끊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묻는 것이었다. 메인 PD가 손가락을 빙빙 돌렸다. 끊지 않고 계속 가겠다는 뜻이었다. 유진은 불안해하면서도 독단으로 피터의 말을 끊지는 않았다.

주변이 조용해지고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자, 피터는 자신을 찍고 있는 카메라가 아니라 그 너머에 서 있는 메인 PD를 바라보았다.

“저한테는 쌍둥이 누나가 한 명 있습니다. 이름은 윤우희. 트윈 트윙클에 출연했던 출연자 중 한 명이었지요.”

순간, 세트장에 정적이 흘렀다.

메인 PD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는 황급히 모자를 꾹 내려 얼굴을 가렸다. 우주민 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메인 PD를 바라보는 피터의 얼굴에 찬 웃음이 서렸다.

피터는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으나 이내 입을 닫았다. 여러 번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쉬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세트장에 있는 사람들은 제작진, 연습생 할 것 없이 모두 피터가 울고 있으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피터는 울고 있지 않았다.

“아무리 용기를 내도 제정신으로 말하기는 힘드네요. 써오길 잘한 것 같습니다.”

피터는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 종이를 펴는 손이 파르르, 떨렸다. 현덕의 눈에 그 떨림이 고스란히 보였다.

“제 누나는 저와 함께 미국 유학을 하던 중 다시 한국에 유학을 왔습니다. 한국에서 생활하던 중 트윈 트윙클을 출연하였고, 출연 중 누나는 갑작스러운 뺑소니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마이크를 타고 피터의 저음이 잔잔히 울렸다. 모두 숨소리마저 죽인 채 피터의 이야기를 들었다.

***

트윈 트윙클 촬영 당시, 피터는 당시 대학생이었다. 한국에 있던 부모님은 피터에게 우희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다. ‘공부에 집중해야 하는 아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드라마에 나올 법한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부모님은 우희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당신들이 인정하지 않은 현실을 바다 건너에 있는 아들에게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피터는 늦게, 아주 뒤늦게 우희의 죽음을 알았다.

당시 피터는 미국 명문대에 진학한 후 살인적인 학습량에 치여 하루하루를 악으로 깡으로 버티고 있었다.

학교 밖으로 거의 나가지도 못했다. 일주일에 하루, 가끔 봉사 활동을 하러 갈 때나 교문 밖을 나서는 정도였다. 필요한 생필품은 미국에 사는 이모가 정기적으로 기숙사에 보내주었다.

그래서 한인사회에서도 떠들썩했던 우희의 죽음을 피터만 몰랐다.

“아, 진짜. 윤우희 요즘 뭐 한데요? 동생한테 전화도 안 하고? 전화기도 계속 꺼져 있고. 정말 한국에서 유명해져서 바쁜 거예요? 이모는 연락이 되죠?”

피터는 2주 넘게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며 주요 과제를 해치운 후 이모에게 전화를 걸어 투덜댔다.

우희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이상 피터에게 전화했다. 흥에 겨울 때는 매일 전화하기도 해서 공부에 미쳐가는 피터를 약 올렸다.

“전화 요금 아버지한테 내달라 하지 말고 꼭 니 알바비로 내라.”

“니? 누나!”

“누나는 무슨. 고작 20분 차이로.”

“20분이 얼마나 긴 줄 알아?”

“생물학적으로 따지면 나중에 태어난 애가 먼저 만들어진-.”

“아, 됐고. 누나라고 해라.”

전화비 아까우니까 전화 좀 작작하라고 구박하긴 했지만, 괜히 말로만 그런 것이었다. 단 한 번도 우희의 전화가 귀찮았던 적은 없었다. 내일 당장 내야 할 페이퍼가 세 개고, 그 중 단 하나도 완성하지 못한 밤에도 우희의 전화는 반갑기만 했다.

우희는 홀로 먼 타지에서 공부하고 있는 동생을 항상 걱정했다. 굳이 한국에서 있었던 일들을 구구절절 먼저 말하고는 너는 거기서 무슨 일 있었는지 냉큼 다 털어놓으라고 살벌하게 물어보곤 했다.

피터는 미국에서 자신을 서포트해주는 이모에게도, 가끔 통화해 안부를 묻는 부모님에게도 하지 못할 이야기를 우희에게만 했다. 학교에서 당한 인종차별, 따라가기 벅차고 힘든 공부, 교수들의 은근한 무시와 차별, 청결하고 깔끔하게 하고 다녔더니 게이로 오해받았던 일, 등등.

우희에게만 말할 수 있었다. 우희도 그걸 알기에 아무리 바빠도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전화를 걸어준 것이었다.

‘뚱땡아, 공부는 잘 하고 있냐? 누나는 한국에서 엄청 잘 나가는 중이다?’라고 말하는 쌍둥이 누나와의 전화는 피터의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 창구였다.

그런데 그런 우희가 아무 말도 없이 2주가 넘도록 연락하지 않았다. 피터는 섭섭해 할 망정 그걸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많이 바쁜가 보지, 그래도 어떻게 전화를 한 번 안 하냐? 그러면서 누나는 무슨.’

우희는 ‘트윈 트윙클’이라는 한국 TV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었다. 우희 본인의 말에 의하면 꽤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미국의 ‘아메리칸 아이돌’같은 거라나 뭐라나.

‘정말 인기가 많아졌나 보네. 이제 진짜 연예인이 되는 건가? 벌써 바쁜 거야?’

피터는 막연하게, 그리고 태평하게 생각했다.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동생 있는 걸 까먹으면 안 되지. 안 그래요, 이모? 윤우희한테 유명해진 다음에 완전 건방져졌다고 제가 한국 매체에 인터뷰 영상 보낼 거라고 좀 전해주세요. 다음 주까지 연락 안 되면 진짜 영상 찍어서 유튜브에 올려 버릴 거라고.”

그저 서운한 마음에 이모에게 투덜거렸건만.

“얘, 아이고, 너를 어쩌면 좋니.”

이모는 대뜸 울음을 터뜨렸다.

오랫동안 전화하지 않는 우희. 우희가 잘 살고 있냐고 묻자마자 우는 이모.

그제야 피터는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이모, 무슨 일이예요? 윤우희, 우리 누나한테 무슨 일 있어요? 네? 이모! 이모! 말해 봐요. 어서 말해 줘요!”

“그게 말이다, 사실은…….”

이모는 우희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 때문에 한국이 얼마나 떠들썩한지 말해주었다. 그제야 피터는 자신의 쌍둥이 누나가 죽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린 쌍둥이잖아? 그러니까 너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난 다 알 수 있어. 그니까 부모님은 속여도 날 속일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 알았지?”

피터가 무슨 일만 있으면 귀신같이 전화해서 잘 지내냐고 물었다. 그게 신기해서 어떻게 알고 전화했냐고 물으면 이렇게 말하곤 했다. 피터는 그 말을 그리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우희는 아무 일 없을 때도 무슨 일 있을 때도 늘 전화 통화를 했으니까. 그 중 유독 인상 깊었던 순간만 기억에 남아 그렇게 느끼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우희에게는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피터도 마음 속으로는 우희의 말을 믿고 있었다. 믿고 싶었다.

‘우리는 평범한 남매가 아니니까. 이란성이기는 해도 쌍둥이니까. 우희의 말대로 서로에게 무슨 일이 있다면 알아차릴 수 있겠지. 남들과 다른 특별한 교감이 우리에게는 있겠지.’

그런데 몰랐다.

우희가 죽은걸.

장장 2주가 지날 동안.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다는 촉이 왔다던 우희의 말이 거짓이었던 걸까.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우희를 보러 가야 했다. 살아 있는 우희든 죽어 있는 우희든. 아무튼 우희를 만나서 확인해야 했다.

피터의 머릿속엔 오직 우희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당장 내일 제출해야 하는 페이퍼, 산더미 같은 과제, 추천서를 받기 위해 오랫동안 준비한 자선 행사 등은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었다.

피터는 그날 바로 학교를 뛰쳐나갔다. 무슨 정신으로 공항까지 가서 티켓을 사고 비행기에 올랐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기숙사에서 이모와 통화를 하고, 눈을 감았다 뜨니 몸뚱이가 한국에 와 있었다.

피터가 한국에 입국했을 때는 모든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아 있던 때였다. 윤우희, 누나의 죽음엔 온갖 루머가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다. 국민 여동생, 국민 남친, 국민 배우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윤우희는 국민 껌이었다. 마음껏 씹고 씹다 툭- 뱉어버리는.

어딜 가든 ‘윤우희’라는 이름이 들렸다. TV, 신문, 카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입, 손에 들린 핸드폰의 화면과 메신저 창.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이 윤우희의 죽음에 대해 떠들어 댔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우희의 죽음을 슬퍼했다면, 그런 기색이라도 내비쳤다면, 피터는 우희를 사랑해주는 한국 국민에게 감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아무도 우희의 죽음을 슬퍼해주지 않았다.

우희의 죽음이 알려진 직후엔 애도의 물결이 쏟아졌다던데. 이모가 말했던 애도는 어디에도 없었다. 인기 프로그램에 출연했다가 요절한 연습생을 향한 세상의 시선은 그저 잔혹했다.

그녀의 죽음은 가벼운 가십이었다. 사실 윤우희가 뭐였다더라, 스폰이 있었다더라, 자살이라더라, 사고가 아니라 살인이라더라, 등등. 온갖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 당연하게 나돌았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나오는데 택시 기사가 물었다.

“한국인이지? 한국엔 얼마 만에 돌아온 거야? 혹시 그 윤우희 사건에 대해 좀 들은 게 있어? 요즘에 그거 모르면 간첩이야.”

그는 아무렇지 않게 윤우희, 그 이름 석 자를 입에 담았다.

오디오에서는 두 패널이 진지하게 토론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주제는 ‘여자 아이돌 연습생의 죽음을 통해 살펴보는 서바이벌 경쟁 TV 프로그램 폐해’였다. 두 패널은 멋대로 윤우희에 대해 떠들어 댔다.

[사실 그 죽음이 석연찮은 점이 많은 건 사실입니다. 단순히 뺑소니 사고라기엔 아직 뺑소니범이 잡히지도 않았고, 네티즌들이 제기하는 의혹도 너무 많은 게 사실입니다. 저는 그러한 정황 증거들을 토대로 이 사건이 단순 사고가 아니라고 보고 있습니다.]

[제가 믿을 만한 방송 관계자에게 전해 듣기로- 실제로 서바이벌 경쟁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탈락했을 때, 또는 탈락의 위기를 맞이했을 때 극심한 우울증이나 공황장애에 시달리다가 자살에 이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하더군요.]

[선생께서는 자살로 보시는군요. 저는 극에 달한 경쟁 체제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이 되기도 합니다만.]

[뭐어- 제가 꼭, 반드시, 뭐시냐…… 자살로 본다기보다느은- 그럴 확률이 있을 수도 있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만. 물론 저의 개인적인 의견은 아니고- 사실 많은 사람이-]

더는 견딜 수 없었다.

피터는 헛구역질을 했다. 신나게 운전하던 택시 기사는 기겁하며 차를 갓길에 세웠다. 피터는 지갑에서 집히는 대로 지폐를 꺼내 앉았던 좌석에 던지고는 택시에서 내렸다.

택시 기사는 남의 영업차에서 뭐 하는 짓이냐고 삿대질하다 피터가 한 움큼 집어 뿌린 지폐 더미를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택시는 곧바로 떠났다. 갓길에 홀로 남은 피터는 도로 난간을 붙잡고 계속 헛구역질 했다.

우희의 일을 알게 된 뒤로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았다. 비행기에서 주는 기내식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 먹은 게 없으니 보이는 건 아무것도 토하질 못했다. 위액만 역류해 목이 타는 듯한 고통을 주었다.

대신 피터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끊임없이 토했다. 먹고 싶지 않았는데 사방에서 꾸역꾸역 피터의 입에 처넣었던 타인의 악의. 죽음을 비웃는 희롱.

이유 없는 악의는 이유 있는 악의보다 더 잔인했다. 한국의 공기는 이미 그따위 것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찐득한 검댕이 코와 목을 타고 꿀렁꿀렁 들어왔다. 목과 폐를 시꺼멓게 더럽히고 온몸을 까맣게 물들였다.

숨을 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살기 위해 숨을 쉬어야 했다. 좆같은 일이었다. 윤우희가 죽었다는데. 자신은 산다고, 살고 싶다고 숨을 쉬고 있었다.

‘누나가 죽었을 리 없어. 누나, 네가 왜 죽어. 그럴 리 없어.’

피터는 아득해지는 정신줄을 가까스로 붙잡고 이를 악다물었다.

오기가 생겼다.

사방팔방에서 우희의 죽음을 떠들어대는 이 땅, 이 나라에서, 우희가 죽었을 리 없다.

그 생각이 논리적인지 이성적인지, 가능성이 있는지 따위를 고민할 이유는 없었다. 우희는 살아 있을 테니까. 우희가, 다른 누구도 아닌 윤우희가 죽어서 고작 이런 취급을 받을 리 없으니까.

분명 우희는 여러 번 말했다. 자신은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사람 중 하나라고. 사람들이 다 자기를 좋아한다고.

우희를 좋아한다던 그 사람들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우희의 죽음을 계기로 단체로 이민이라도 갔단 말인가. 아니라면, 그리고 정말로 우희가 죽었다면, 거리를 뒤덮고 있는 건 우희의 죽음에 대한 조롱이 아니라 엄숙한 슬픔이어야 했다.

그러니 우희가 죽을 리 없다.

피터는 근거 없는 오기를 연료로 삼아 자신의 몸을 움직였다. 터덜터덜, 무거운 걸음을 이끌고 도로변을 걸었다.

어디로 가야 부모님이 있는 병원으로 갈 수 있는지, 걸어가도 되는지, 택시를 다시 잡아타야 하는 건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걸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빌어먹을 상황은 반복됐다. 대로변에서도, 어떻게 접어든 골목 안에서도, 온통 윤우희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어머, 진짜? 윤우희가 정말로 그랬대?”

“내 아는 사람이 진짜 윤우희 섹스 동영상을 가지고 있다고. 그거 유출돼서 자살한 거라던데.”

“불쌍하긴 하다. 어쩌다 그렇게 죽었대? 좀 더 버텼음 뭐가 어찌 됐든 트윈 트윙클 합격 인원 안에 들었을 텐데. 그럼 인생이 완전 폈을 텐데.”

“윤우희가-”

“그 윤우희 말인데.”

윤우희, 윤우희, 윤우희, 또 윤우희. 그리고 다시 윤우희. 한국 사람들이 할 줄 아는 말은 오직 ‘윤우희’뿐인 듯했다. 어딜 가나 윤우희가 살아 움직였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윤우희는 피터가 알고 있는 윤우희가 아니었다.

피터는 어느 가게의 유리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우희와 전혀 닮지 않은 얼굴만 보였다. 어떻게든 자신이 알고 있는 우희의 모습을 찾아보려 애썼지만, 찾을 수 없었다. 둘은 달라도 너무 다르게 생겼으니까.

“엄청 유명한 TV 프로그램 나간 거라며. 인기 많다며. 한국 사람들 중에 누나 모르는 사람 없다며. 다 뻥이었네. 아무도 윤우희에 대해서 모르잖아. 제대로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잖아.”

목소리는 허탈했다. 입가의 웃음은 공허했다.

겨우겨우 병원을 찾아가니 어머니는 병실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 옆 간병인용 침대에 웅크려 있었다.

“의사 선생님, 벌써 회진 시간-.”

아버지는 피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몸을 일으켰다가,

“……어떻게 알고 왔니.”

피터를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더 놀라지 못했다. 그럴 힘이 없는 듯 했다.

피터와 우희의 아버지는 그 나이대 치고 풍채가 좋았다. 살은 아닌데 근육도 아닌 단단한 몸이었다. 우희와 피터는 맨날 그런 아버지의 탄탄한 뱃살을 보며 저것이 살일까 근육일까 토론하곤 했다.

‘예끼, 이놈들.’

그러면 아버지는 등을 긁던 효자손으로 우희와 피터의 머리를 콩콩 때리곤 했다.

그게 불과 얼마 전 일이었건만. 아버지는 공기 빠진 풍선 같았다. 뼈와 거죽만 남아 몸에 걸쳐만 놓은 와이셔츠가 헐렁했다. 머리는 하얗게 세어 있었다. 눈 밑이 패이고 뺨이 푹 꺼진 얼굴은 어릴 적 봤던, 돌아가시기 직전의 할아버지를 생각나게 했다.

아버지가 두 손으로 얼굴을 비비며 물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어떻게 알고 온 거니.”

“이모요.”

피터가 대답했다. 스스로 놀랄 만큼 목소리가 차분했다.

부자는 서로를 바라보며 한동안 침묵했다.

근 반년 만에 만나는 것이었다. 부모님은 피터를 만나러 바다를 건너가기엔 너무 바빴다. 피터는 부모님이 지원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다. 그러니 서로 연락이 뜸했다. 우희가 아니었다면 일 년에 한 번 전화할까 말까 한 사이가 되었을 것이다.

우희만 아니었다면.

지금만 해도 그랬다. 우희가 없다는 것만으로 부자의 사이가 이렇게나 어색하고 서먹해졌다.

먼저 침묵을 깬 건 아버지였다. 그는 다시 한번 긴 한숨을 내쉬고는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피터에게는 고모가 되는 이가 오자 병실을 부탁하고는 피터를 데리고 도시 외곽으로 나갔다. 한적하고 풍경 좋은 곳에 납골당이 있었다.

들어가는 입구에는 기자들 몇 명이 어슬렁대고 있었다.

아버지는 피터의 머리에 챙이 큰 모자를 씌웠다.

“내가 들어가고 좀 있다가 들어 와라. 곧바로 따라 들어오지는 말고.”

그렇게만 말하고는 홀로 휘적휘적- 걸어 나갔다.

“윤우희 아버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번에야말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윤우희 씨가 모 재벌가 셋째 아들에게 스폰을 받았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아버님! 아버님, 한 말씀 해주십시오!”

기자들은 아버지에게 몸을 들이댔다. 카메라와 마이크가 아버지를 에워쌌다.

아버지는 그것들을 쳐내며 묵묵히 걸었다. 기자들은 아버지의 반응을 이끌어 내려 온갖 자극적인 질문을 던졌다. 무례하게도 욕설에 가까운 말을 하기도 했다.

“씨발, 할 말이 있으면 말 좀 해보라고! 딸 가지고 재미 좀 보려다가 박살나서 기분이 어떠냐고!”

“아무 말도 안 하는 건, 모든 걸 이정하겠다는 뜻입니까?”

“시청자들은, 국민들은 모든 걸 알 권리가 있습니다! 대답해 주시죠!”

그래도 아버지는 묵묵부답이었다.

피터는 그 모든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영화 속의 한 장면을 보는 듯 했다. 전혀 현실감이 없었다.

피터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길을 가다 교복 입은 학생들이 담배 피우는 것만 봐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길 가다 험상궂은 젊은 남자가 여자를 때리거나 윽박 지르는 걸 보면 딸 같은 마음에 달려들어 머리부터 박고 보았다.

어머니가 요즘 10대가 얼마나 무서운 줄 아냐고, 몸 좀 사리라고 말하면 화를 내곤 했다.

‘가만히 있으면 똑같은 인간이 되는 거야. 나는 내 양심대로 행동하는 거야.’

그런 사람이 저렇게 변했다. 이만큼 지치고 무력해져 있었다.

피터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아버지를 향한 분노인지, 아버지를 저렇게 만든 그들을 향한 분노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냥, 가만두고 볼 순 없었다.

아버지를 밀치는 기자들에게 달려들려 했다. 그 때, 아버지가 돌아서 피터에게 눈짓했다. 입가에 주름이 질 만큼 입을 굳게 다문 무표정한 얼굴이 나서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피터는 아버지보다 더 무력한 인간이 되었다. 우두커니 서있다 기자들이 떠나간 뒤에야 납골당으로 들어가 우희를 만났다.

우희는 조그만 단지 안에 들어 있었다.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이 걸려 있어서 그게 우희인 줄 알았다. 그 모습을 보자 겨우 실감이 났다. 이 세상에 자신의 반쪽이 영영 없어져 버렸다는 것을.

그걸 깨닫는 순간. 그동안 피터를 버티게 해주었던 이성이라는 압박이 사라졌다.

”말해줬어야지. 나한테는, 나한테는 말해줬어야지!“

피터는 아버지를 붙잡고 절규했다.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오기 전부터, 전화기로 이모의 울음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내내 그의 안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던 말은 이것, 단 하나뿐이었다.

“다른 누구는 모르더라도, 나는, 나는 알고 있었어야 했는데!”

심장을 쥐어짜 낸 비명이었다.

“미안하구나.”

아버지는 피터가 밀면 미는 대로 당기면 당기는 대로 흔들렸다. 텅 빈 눈은 멍하니, 유리벽 안에서 활짝 웃고 있는 우희를 향했다.

아직도 딸의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 이제 홀로 남은 아들의 슬픔을 지켜봐야 한다는 현실. 그게 아버지가 감당해내야 하는 ‘지금’이었다.

그런 아버지는 피터가 원망할 수 있는 표적이 될 수 없었다. 누구에게도 쏟을 수 없는 원망은 독이 되어 피터를 가득 채웠다.

“왜 선산에 묻지 않았어요. 왜 누나를 이렇게 만들었어요. 누나가 뜨거운 걸 얼마나 싫어하는데. 여름에는 에어컨 없으면 못 산다 그러고, 뜨거운 것도 못 먹어서 맨날 식혀서 먹고 그랬는데…… 왜…… 왜…….”

피터는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속 우희를 보며 물었다.

아버지는 한참 침묵하다 쉰 목소리로 말했다. 교통사고를 당해 죽은 마지막 모습이 너무 아파 보여서, 그런 모습을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고.

피터가 여기까지 오며 들은 이야기 중에는 윤우희가 높으신 분의 스폰이었다가 반항하자 독살을 당해 죽었다는 말도 있었다. 그들은 엄청난 비밀을 상대에게 말해주듯 목소리를 낮추고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서둘러 화장한 거래. 나중에라도 시신 부검을 하거나 국과수에서 조사가 들어가면 다 밝혀질까 봐.”

그들은 모르리라. 사랑하는 딸을 잃은 부모가 피투성이가 된 딸의 시체를 보며, 그 시체를 닦아 염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우희의 편안한 안식을 위해 시신을 화장한 부모님. 우희의 죽음이 수상쩍기에 시신을 화장한 거라 말하는 사람들. 우희의 죽음을 조그만 단지에 들은 뼛가루로 확인해야 하는 자신. 무엇을 믿고 무엇을 부정하고 무엇을 슬퍼해야 할까.

피터는 울지도 못하고 하염없이 우희를 바라보았다. 사진 속에서 활짝 웃고 있는 우희는 아무 말이 없었다.

한참 후.

피터는 휘청이는 아버지를 모시고 납골당 뒷문으로 나와 택시를 탔다. 타고 온 아버지의 차 근처에 기자들이 서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병원으로 가서 피터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머니를 마주해야 했다. 어머니는 실어증이었다. 우울증이 의심된다고도 했다.

어머니는 하루의 대부분을 잠든 채 흘려보냈다. 가끔 잠에서 깨어나면, 피터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하염없이 울었다.

“우어…… 어어어…… 우…… 흐으…….”

피터는 어머니가 자신을 부르는 건지, 아니면 우희를 찾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소중한 딸, 가족을 잃은 세 사람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괴로워하며 슬퍼하며, 어여쁜 우희를 그리워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건 우희를 너무도 사랑한 가족의 정당한 권리였다.

하지만 그 가련한 권리는 루머를 즐길 의무를 가진 대중에게 짓밟혔다. 그들의 의무는 알 권리라는 아름다운 포장지를 뒤집어썼다. 우희의 가족이 가진 슬픔의 권리는 발가벗겨진 채 대중 앞에 서서 자아비판을 당해야 하는 의무로 오역되었다.

피터는 하루, 하루, 밤이 지나고 다시 아침이 되는 게 두려웠다. 자고 일어나면 우희의 죽음엔 자꾸 새로운 오물로 덧칠되었다. 그리고 그 오물엔 항우영이 꼭 딸려왔다.

피터는 ‘항우영’이라는 사람을 알았다. 우희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름이었다.

우희의 목소리로 들었던 항우영이라는 사람은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한국에 와서 보고 들은 항우영은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우희를 이용하고, 질투하고, 짓밟고 죽음에 이르게 한 악당이었다.

어떤 항우영이 진짜인지는 알았다. 우희가 말한 항우영이 피터에게는 진실이었다. 그래야 했다.

하지만 피터는 자꾸 방향을 잃었다. 사방팔방에서 쏟아지는 우희의 루머를 거짓이라고 믿으면서, 정작 항우영에 대한 루머는 밀쳐내지 못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항우영이 불쌍하다가도, 증오스러웠다. 죽여 버리고 싶다가도 우희를 생각하면 안쓰럽고 미안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어쩌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환멸했다.

그러던 중 일이 일어났다.

어느 날, 어머니가 밤새 한숨도 못 자고 울었다. 아버지와 피터는 그런 어머니를 지키느라 덩달아 밤을 꼬박 새웠다.

아침 식사 대신 묽은 죽을 겨우 먹인 뒤 어머니를 재웠다. 어머니는 잠들지 않으려 했지만 약 기운을 이기진 못했다. 잠든 어머니를 지켜보던 아버지와 피터는 조는지도 모르고 꾸벅, 졸았다. 딸과 누나를 잃은 두 남자는 아내와 어머니가 아픈 와중에도 잠을 이겨내지 못했다. 살겠다고 졸아버렸다.

그 대가는 끔찍했다. 설핏 눈을 뜨니 침대 위가 비어 있었다. 잠깐 졸았을 뿐인데 그사이 어머니가 사라졌다.

아버지와 피터는 혼비백산하여 어머니를 찾아 나섰다. 갑자기 사라진 어머니가 다른 층의 화장실에서 발견되었다.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이 입원해 있는 층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층의 화장실은 인적이 드물었다. 어머니가 그걸 어떻게 알고 그 층을 찾아갔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어머니는 화장실에서 죽은 딸을 따라가려고 했다. 긴 끈을 세면대에 묶고 앉은 채로 스스로의 목을 졸랐다. 아슬아슬했던 순간. 어머니는 남편과 아들만 남은 현실에 다시 붙잡혔다. 화장실 앞을 지나가다 이상한 소리를 듣고 안을 들여다본 간호사 덕이었다.

사라진 어머니를 찾아 병동을 헤매던 피터와 아버지는 어머니를 되찾고 기뻐하거나 슬퍼할 시간이 없었다. 외부에 이 일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조치해야 했다.

아직도 병원 근처에는 기자들이 어슬렁대고 있었다. 그들은 윤우희의 가족들이 뭔가 한 건 해주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 사건을 공론화해 방송국이나 기획사로부터 크게 뜯어내자며 달려드는 브로커들도 한 트락이었다.

어머니의 자살 시도는 그들에게 좋은 먹잇감이었다. 우희의 죽음에 또 한 번 오물이 묻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뛰어다니고 아들은 초조해하며 어머니를 지켰다. 어머니를 치료하고, 병원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사과하고 감사하고, 입막음했다.

그렇게 지친 하루를 보낸 뒤 남은 시간을 흘려보내려 했건만. 아직 깨어나지 않은 어머니를 지키고 있는 피터와 아버지에게 누군가 찾아왔다. 기자도, 브로커도 아니었다.

그녀는 기자들의 눈을 피해 오느라 변장을 한 채였다. 모자를 쓰고 안경을 쓰고 있었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은 두꺼운 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엔 그 사람이 누구인 줄 몰랐다. 기자나 브로커, 뭐 그쪽 계열이 어떻게 사람들의 눈을 피해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피터는 그런 인간에게까지 정중하게 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나가요, 나가십시오. 나가라고요!”

피터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그 사람을 밀쳤다. 아버지는 불안정해 보이는 아들을 보고도 말리지 않았다.

피터가 휘두른 손이 빗겨나 그 사람이 쓰고 있는 모자를 쳤다. 그 바람에 모자가 날아가고, 모자 속에 감췄던 긴 머리가 쏟아졌다. 얼굴도 드러났다.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항우영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반쪽이 되어 있었다. 눈 밑은 푹 꺼져 있었다. 얼굴색은 창백했다. 입술은 새하얗게 말라붙어 있었다.

TV에 나오던 씩씩하고 강단 있는, 건강미 넘치는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방금 피터가 툭 쳤을 때 쓰러지지 않은 게 용할 정도로 메말라 있었다. 실제로도 휘청이고 있었다.

우영의 그 모습이 피터를 자극했다. 참고, 참고 또 참고 있었건만. 그런 피터를 더는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차라리 그녀가 TV에 나왔던 것과 같은 모습이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덜,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우희가 말했던 그녀의 모습과 어디 하나 닮은 점이 남아 있었다면. 이 사람이 ‘우희가 말했던 그 항우영이구나,’라고 알아볼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항우영은 오히려 피터와 닮아 있었다. 피터의 등 뒤에서 죽어가는 어머니를 닮아 있었고, 눈이 까맣게 죽어버린 아버지를 닮아 있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이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 우희를 잃은 가족은 폭풍 속에 난파된 배였다. 더 이상 살아남을 의욕이 없지만 배가 뒤집히지 않았으니 살아야 했다. 하지만 망가진 배는 키를 움직일 수도, 돛을 내릴 수도 없었다. 그저 파도가 밀치는 대로 흘러가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피터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런 건 변명이 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고작 이런 변명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상태였다.

반쪽을 잃은 슬픔에 미쳐버렸던 걸까. 사방팔방에서 들려오는 끔찍한 루머에 씌어버렸던 걸까.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한국에 온 이후, 피터가 맞닥뜨린 모든 것은 언제나 알지 못할 것들뿐이었으니까. 자신의 상태 또한 자신이 알지 못할 것 중 하나였다.

“당신이 여기에 왜 와? 여기가 어딘지 알고 와? 왜? 왜!”

태어나서 이렇게 큰 소리를 내본 적이 있었던가. 우희와 함께 태어나 처음 세상의 빛을 봤을 때도 이렇게 울진 않았으리라.

우희가 없는 세상에서, 피터는 절규하며 항우영을 노려보았다. 내내 원망할 대상만 찾으며 끓고 있던 분노가 드디어 표적을 찾은 것이다.

“나, 나는……. 나는…… 그러니까, 저는, 우희의…….”

항우영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뒷걸음질 쳤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그 모습마저 피터는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였다.

“내 누나 이름을 입에 담지 마!”

감히 우희를 부르는 그 입을 용서할 수 없었다.

“당신이 죽인 거잖아. 당신 때문이잖아!”

절대 그녀를 향해서는 안 되는 원망이 그녀를 향했다. 동시에 귓가에서 우희의 활기찬 목소리가 스쳤다.

“난 우영이가 너무 좋아. 우영이랑 계속 같이 있고 싶어. 그래서 열심히 할 거야. 우영이가 무조건 우승할 거 같거든? 그러니까 나, 진짜 열심히 해야 돼. 프로젝트 그룹이라도 좋으니까, 꼭 같은 팀으로 데뷔하고 싶어.”

우영에 대해 말하는 우희의 목소리는 언제나 밝았다. 반짝거리는 은하수를 귀로 듣는 것 같았다. 전화기를 타고 그 빛나는 별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것 같다고 느낄 정도였다.

“뭐야. 남이 들으면 내가 아니라 그 항우영이라는 사람이 님 쌍둥인 줄 알겠어?”

그래서 피터는, 솔직히 좀 질투하기도 했다.

“질투하나? 남자가? 추하게스리. 니가 그러니까 여친이 없는 거야. 너 아직도 여친 없지?”

“질투라니. 불쌍히 여기는 거야. 그 항우영이란 사람을 어쩌다 이런 윤우희 같은 찰거머리를 만나서 인생 조지나 싶어서.”

“닥쳐.”

“여긴 닭이 없는데?”

“어쭈, 이게 손 안 닿는 데 있다고 자꾸 개긴다? 아니면 물 건너 살고 있다고 벌써 한국말 잊어버린 거냐? 암튼, 개기지 마라. 우영이는 진짜 천생 연예인으로 태어난 애라고. 진짜 멋있어.”

“아, 눼에~ 눼에~”

“니가 뭐라든 난 꼭 우영이랑 같이 데뷔할 거야.”

그렇게 우희는 항우영과 함께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다. 그러니까 우희가 죽은 건 항우영 탓이었다.

항우영이 윤우희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윤우희는 그렇게 열심히 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금방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펑펑 울며 자신에게 전화했을 것이다. 훌쩍 미국으로 날아왔을지도 모른다. 위로를 받기 위해서. 그러면 자신은 모든 과제를 다 미루고, 우희와 어울렸을 텐데.

그러면 우희는 교통사고로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우희를 이렇게 모욕하고 짓밟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아무도 함부로 윤우희란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항우영 때문이다. 항우영이란 사람이 우희의 앞에 나타나서. 자신이 곁에 없는 동안 항우영이 우희의 곁에 있어서, 그래서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이다.

만약 저 사람이 없었다면. 저 사람이 우희의 곁에 없었다면. 내 누나는 죽지 않았을 텐데.

내 반쪽, 태어나면서부터 함께였던 내 누나가, 바다 건너에 있어도 항상 날 걱정해줬던 내 누나가, 날 놔두고 죽지 않았을 텐데.

“당신이 내 누나를 죽인 거야. 당신이 윤우희를 죽인 거야!”

피터는 제 안에 가득 차 있던 독을 쏟아 부었다.

그 순간. 제가 토해낸 독을 뒤집어 쓴 항우영의 얼굴이 눈에 박혔다.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아 활짝 열린 눈, 벌어진 입술. 핏기가 가신 얼굴.

그리고.

눈물.

그건 살인자가 가질 수 없는 슬픔이었다. 파도에 떠밀려 갔다가 겨우겨우 헤엄쳐 와서 난파선에 손을 내밀었건만. 난파선에 타고 있던 사람이 그녀를 태울 수 없다며 그 손을 쳐낸 것이었다.

‘지금 내가…… 뭘 한 거지?’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피가 식는 게 느껴졌다.

피터는 항우영을 보았다. 항우영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그 얼굴에 절망과 공포가 드리웠다.

“뭐 하는 짓이냐!”

그때. 아버지가 피터의 어깨를 잡았다. 피터는 힘없이 무너져 돌아섰다.

아버지가 피터의 뺨을 내리쳤다. 철썩- 소리가 나며 피터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뺨이 시큰하게 아려왔다. 피터는 차라리 그 통증에 감사했다.

“정신 차려라. 너마저 이러지 마라.”

아버지의 목소리가 떨렸다.

피터는 고개가 꺾인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그런 피터의 어깨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어깨가 바스러지는 것같이 아팠다. 그래서 눈물이 났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없어야 했다. 고작 어깨가 아파서, 눈물이 나는 것이었다.

“미안합니다. 내가 대신 사과를 사과하겠습니다.”

아버지는 피터를 대신해 허리를 숙였다.

“아, 아니요, 저는…….”

그녀는 두 손을 휘저으며 뭐라 말하려 했지만, 그보다 아버지의 말이 빨랐다.

“그러니 부디, 이대로 그냥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우리가 다시 만날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요. 미안합니다. 우리는…… 당신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항우영은 돌처럼 굳었다. 아버지는 항우영을 외면했다.

잠시였을까. 아니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던 거였을까. 무거운 침묵이 병실을 움켜쥐었다. 그 속에서조차 항우영은 철저하게 이방인이었다.

“죄, 죄송, 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자신이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거듭 확인한 항우영은 자신을 밀쳐내는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죄송할 일을 하지 않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적어도 이 병실 안에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괜찮다고 말해줄 사람 또한 이 병실 안에는 없었다.

피해자와 또 다른 피해자가 서로를 껴안고 서로의 상처를 대신 아파해준다는 미담 따위는 없었다. 적어도 여기에는 없었다.

우영은 모자를 줍지도 못하고 돌아서 병실을 뛰쳐나갔다. 그녀를 등지고 선 피터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아버지는 그런 피터를 끌어안았다.

“아아아악!”

피터는 아버지의 어깨에 자신의 머리를 박으며 울부짖었다. 그건 갈길 잃은 분노와 증오를 담고 있었다.

***

어쩌면.

어쩌면.

그 뒤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피터는 항상 ‘어쩌면’으로 시작되는 말의 환영에 시달리며 살아왔다.

어쩌면.

그때 항우영은 마지막 구명줄을 붙잡는 기분으로 찾아왔을지도 모른다.

숨이 막혀서.

너무 힘들고 아파서.

우희를 알고, 우희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어서.

세상의 비난과 삿대질을 피해 마지막 피난처로 도망 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희의 가족은, 아니 피터는 그런 그녀를 포용해줄 수 없었다. 미국에서 우희의 죽음을 들었던 그 순간부터, 피터에겐 그런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내내, 후회했다. 그건 우희의 죽음을 루머거리로 전락시킨 사람들을 향한 증오와는 별개로 피터의 심장에 박혀 있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 피터는 우영과 우희가 꿈을 이루기 위해 섰던 자리에 섰다.

시작은 원망이었고 증오였다. 어떻게든 분탕질을 쳐서 복수하고야 말리라.

우희의 죽음을 웃고 떠든 사람들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다. 모든 게 다 너희 잘못이라고, 왜 그랬냐고 비난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이제는, 그간 자신을 뒤덮고 있던 악몽을 걷어내고 싶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말로 나를 정당화하고, 당신에게 상처를 줬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그랬어도, 적어도 우리 가족은 그랬으면 안 됐는데……. 적어도 나는 그러면 안 됐는데. 내가, 그리고 우리 가족이…… 우희 누나의 가족인 우리가 당신을 배신했습니다.”

원망할 사람이 필요했다. 잡히지 않은 뺑소니범, 온갖 사람들이 떠들어 대는 루머. 그 속에서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었다.

“그래서야 누나의 죽음에 대해 멋대로 떠들어대는 사람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데.”

피터의 얼굴에 자조적인 웃음이 스쳤다.

“우희 누나는 절대, 그런 걸 바라지 않았을 텐데.”

피터의 목소리는 하얀 화선지 위에 떨어뜨린 날카로운 못 같았다. 창백하리만치 조용한 세트장 위에 피터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스쳤다.

“항우영 씨. 분명 어디선가 보고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피터는 고개를 들었다. 카메라에 피터의 얼굴이 정면으로 잡혔다.

“우리 누나의 꿈은 당신과 함께 무대에 서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서바이벌 무대가 아니라, 진짜 무대에.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누나랑 함께 꿨던 꿈을 포기하지 말아 주세요. 우리 누나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 누나가 좋아했던 당신을 위해서라도요.”

피터는 이를 악물고, 울음을 참으며 말을 이었다.

“이런 제 말이 이기적이고 염치없게 들릴 거라고 생각합니다. 미안합니다. 저를 영원히 용서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쌍둥이였다. 함께 태어나고 함께 자랐다. 서로 다른 길을 향해 달려가면서도 계속 함께일 거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곁을 지켜주지 못했다.

그때, 자신이 비웠던 그 빈자리, 꼭 절반이었던 그 빈자리를 가득 넘치도록 채워주었을 우희의 또 다른 반쪽에게.

피터는 고개를 숙였다.

“……우리 누나를 잊지 말아주세요. 우리 누나가 당신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당신의 노래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제발 잊지 말아주세요.”

툭, 투둑.

눈가에 맺힌 눈물이 떨어졌다.

“부탁드립니다.”

***

촬영이 중단되었다.

메인 PD는 손짓하여 촬영을 끊고 스태프들을 소집했다. 촬영 카메라 뒤에 모여 있는 그들이 무얼 의논하는지 연습생들에게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연습생들은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대기했다. 평소라면 촬영이 끊긴 짤막한 시간을 틈타 장난치고, 떠들기도 하련만. 무거운 분위기에 눌린 연습생들은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단상 위에 서 있던 소혁은 자리로 돌아와 앉았으나 피터는 잠시 스태프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세트장을 나섰다. 화장실에 가서 얼굴을 씻은 뒤 메이크업을 다시 받고 돌아왔다. 눈물은 씻겼으나 눈가가 붉게 부어오른 건 분장으로도 감추지 못했다.

주변 연습생들이 피터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차마 말은 못 걸지만, 하고 싶은 말은 많다는 표정들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부담스럽기도 하련만. 피터는 아무렇지 않게 그것들을 감당해냈다. 그 모습이 더 안쓰러워 보였다.

현덕은 의자 아래 두었던 생수병을 들어 피터에게 내밀었다. 피터는 살짝 웃으며 물병을 받아들었다. 물병이 오갈 때 두 사람의 손이 스쳤다. 피터의 손은 차가웠다. 피가 통하지 않는 얼음덩이 같았다.

“많이 놀랐지?”

피터가 생수병을 따 반쯤 마시고는 현덕에게 돌려주며 물었다.

“안 놀랐다고 하면, 거짓말인 게 너무 티가 날까요?”

“응. 그럴 거 같아. 현덕아. 너는 거짓말 잘 못 하잖아.”

“그럼 솔직하게 놀랐다고 할게요.”

현덕은 순순히 시인했다.

피터가 단상 위에 서서 자신이 윤우희의 동생이라고 밝히는 동안, 다른 연습생들은 피터의 말을 듣고는 현덕에게 속삭여 물었다.

“김현덕 연습생, 알고 있었어요?”

“저 말 진짜예요?”

현덕은 두 눈을 피터에게 고정한 채 고개를 저었다. 그들의 기대와 다르게, 현덕은 그들만큼이나 모르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친하면서 눈치를 못 챘어요?”

“진짜 칼을 갈았나 보네. 딱 탈락할 때 타이밍 좋게 터트리려고.”

“그런다고 뭐 달라질 게 있나. 들어내면 그만 아냐?”

주변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현덕은 피터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 택했다. 함부로 아무 말이나 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피터에게도, 그리고 피터의 누나와 항우영에게도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피터는 그런 현덕의 마음을 안다는 듯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현덕은 울다 웃으면 엉덩이에 뭐가 날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자, 주변 연습생들의 엉덩이가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아, 내가 너무 가만히 있어도 안 되겠구나.’

현덕이 피터보다 먼저 그 상황을 눈치챘다. 평소라면 현덕보다는 피터가 먼저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현덕이 피터보다 먼저 알아차렸다.

피터는 겉보기엔 멀쩡해 보였지만, 그건 겉모습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조금 전 서 있던 빈 단상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자신이 했던 말을 되씹고 있을까, 아니면 예전에 그 단상 위에 올라 울고 울었을 우희와 우영을 떠올리고 있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지금의 피터가 남에게 방해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덕은 의자를 살짝 들어 피터의 옆에 좀 더 붙였다. 그리고는 피터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피터의 머리를 제 어깨에 기대도록 했다.

피터는 놀란 듯 흠칫, 떨었다. 현덕은 괜찮다는 의미로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그러자 피터는 긴장을 풀며 현덕에게 몸을 기댔다.

어깨에 피터의 머리가 닿았다. 살랑대는 머리카락의 감촉과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피터가 현덕보다 키가 큰 탓에 목이 불편하게 꺾였지만, 피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현덕은 소혁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소혁은 다리를 꼬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몇몇 연습생들이 소혁에게 넌 안 떨어질 거라고, 이번엔 운이 안 좋았던 거라고 위로를 하고 있었다. 소혁은 그런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다.

소혁 역시 겉으로 보기에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지만, 그 속내가 어떨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현덕은 소혁에게서 시선을 떼고, 온전히 피터에게 집중했다.

피터와 속삭이듯 피터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다른 사람들이 피터에게 말 걸지 못하도록 얕은 수작을 쓰는 것이었다. 둘 사이의 대화는 그저 현덕이 피터의 어깨를 천천히 쓸어주는 것뿐이었다.

피터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며 무대를 바라보았다. 피터는 우연히, 혹은 필연적으로 방유진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제작진과 함께 있었다. 격렬하게 무언가 논의하는 그들 속에 껴 있었으나 계속 피터 쪽을 보고 있었다.

거리가 멀어 무슨 말을 해도 닿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굳이 그것 때문이 아니라도 둘은 서로에게 할 말이 없었다.

혹자는 항우영이 자진 하차했기에 그녀가 우승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떠들어댈지 모른다. 윤우희의 죽음 덕에 강력한 라이벌을 손쉽게 제칠 수 있었으니, 피터에게 죄책감 따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본인이 그런 부채감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피터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피터는 그녀에게 어떤 감정도 없었다.

피터는 눈을 감으며 먼저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그 뒤로도 그녀는 한동안 피터를 계속 바라보았다. 주변 연습생들마저 그 시선을 눈치챌 즈음, 그녀는 뭔가 단단히 마음먹은 듯 입술을 꼭 깨물고는 제작진의 논쟁 속으로 뛰어들었다.

제작진의 회의는 대책 없이 길어졌다.

분위기에 눌려 침묵하던 연습생들은 좀이 쑤시는지 몸을 들썩였다. 아예 자세를 잡고 꾸벅꾸벅 조는 연습생들도 있었다. 그 속에서 현덕은 약간, 무념무상의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제 어깨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을 때, 바로 그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했다.

“여기 와서 경험해 보고야 알았어.”

“아…… 네에.”

그래서 이렇게 얼빵해 보이는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어, 뭐가요?”

뒤늦게 물으니 피터가 피식, 웃었다. 여전히 현덕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은 채였다.

“전화로 들었을 때 그 반짝이던 목소리는 진짜였다는 걸. 적어도 여기 있을 땐, 힘들고 괴롭기만 했던 건 아니었던 거야.”

피터가 들릴 듯 말 듯 하게 속삭였다.

“누나는 정말, 여기 출연해서 행복했던 거였어. 여기에서 지냈던 모든 시간이 누나에겐 꿈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었던 거야.”

“…….”

“그랬겠지?”

피터가 현덕에게 동의를 구하듯 물었다. 현덕은 바로 답하는 대신 잠시 침묵했다. 그간 ‘트라이 온’ 촬영장에서 있었던 일들, 새롭게 만났던 사람들, 그 모든 것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피터 형의 누나가 느꼈던 감정이 나와 다른 것이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은 하나였다. 감히,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은 마음. 현덕은 그 마음을 피터에게 전하고 싶었다.

“형은 어땠는데요?”

“나?”

“항상 힘들고, 항상 고통스러웠어요? 아니면 그래도 나랑 준비랑, 그리고 다른 연습생들이랑 함께 지내면서 재미있고 즐거웠어요? 형, 저는요. 서로 경쟁해야 하고, 평가 무대 준비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자서 피곤하고 힘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즐거웠어요.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고. 형이랑 준비랑 함께여서 좋았어요.”

현덕은 트라이 온 1부를 촬영할 때를 떠올렸다. 그 바쁜 와중에도 주민이 걱정되어, 밤잠을 줄여가며 주민을 도왔다. 그 모습이 방송을 타며 세간의 비난을 받고 괴롭긴 했지만 후회하진 않았다.

마지막 평가 무대를 앞두고는 다른 연습생들의 도움도 받았다. 거기엔 피터도 포함되어 있었다. 피터는 주민의 파괴적인 춤사위에 좌절하고 괴로워했다. 그뿐이랴. 자룡과 준비가 투덕투덕 다툴 때마다 중간에 끼어들어 준비를 말리느라 바빴다. 꾸벅꾸벅 조는 현덕을 챙겨주다가 주민에게 싸가지 없는 한 소리를 듣기도 하고. 그러면서 허탈해서라도 웃었다.

그때 보았던 웃음은 분명 거짓이 아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언제부터인가, 나와 준비한테 마음을 열어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웃어준 게 아닐까?’

그러니까.

“형이 즐거웠던 만큼 형의 누나도 즐거웠을 거예요. 행복했을 거고, 보람 됐을 거예요. 여기 나온 걸 절대 후회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리고 그 항우영이란 분, 형 누나랑 많이 친했다면서요. 형 누나가 많이 좋아했다면서요. 그런 사람이랑 함께 있었는데, 힘들기만 했을 리 없어요. 저랑 준비처럼요. 형이 함께여서 저랑 준비는 무척 좋았거든요.”

그러니 몇 년 전, ‘트윈 트윙클’에 출연했던 항우영과 윤우희 역시 그러하지 않았을까. 현덕은 감히 생각했다.

“그럴까?”

피터는 전화로 들었던 우희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막 ‘트윈 트윙클’ 촬영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아, 너무 기대된다. 나랑 똑같은 꿈을 꾸고 있는 애들이 오십 명이야. 거기서 친구도 잔뜩 사귀고, 노래도 많이 부르고 춤도 많이 출 거야! 많은 사람 앞에서 무대에 서고 올 거라고!”

별가루가 쏟아지는 듯 반짝거리던 목소리. 그 목소리는 계속계속 이어졌다. 매주, 매주. 촬영이 거듭되어도 우희의 목소리는 달라지지 않았다.

한때는 그 목소리가 가짜로 꾸민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촬영하면서 힘든데, 바다 건너에 있는 동생에게 걱정 끼치기 싫어서 일부러 목소리를 밝게 꾸며낸 게 아닐까. 동생한테까지 아무 말도 못 하고 꾹꾹 참고 있었던 게 아닐까.

‘트윈 트윙클’ 방송을 보면 우희는 항상 밝게 웃고 있었다. 항우영과는 찰떡처럼 꼭 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전부 믿을 수 없었다.

죽은 우희를 그렇게 끔찍하게 짓밟는 것을 직접 겪었건만. 살아 있는 우희를 어떻게 괴롭혔을지 알게 무언가. 저 환한 웃음 뒤에서 우희는 얼마나 괴롭고 슬펐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어쩌면 그렇게 생각했던 것 또한 내 멋대로 누나의 삶을 재단하고, 누나의 죽음에 어떻게 해서든 이유를 붙이려고 했던 게 아닐까. 내가 누나의 죽음에 또 다른 루머를 뒤집어씌우고 있었던 걸지도 몰라.’

어쩌면 그렇게 생각해서라도, 무언가를 원망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항우희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애써 모른 척하면서.

피터가 끼고 있던, 원망과 증오로 점철된 안대를 벗겨 준 건 현덕이었다. ‘트라이 온’을 촬영하며 그와 함께 보낸 시간 속에서 피터는 다시 한번 우희를 되돌아볼 수 있었다. 자신이 전혀 몰랐던 ‘트윈 트윙클’을 촬영하던 시절의 우희를.

‘트라이 온’ 촬영은 현덕의 말대로 꽤 즐거웠다. 현덕, 준비와 함께 웃을 때면 우희가 생각났다.

‘누나도 이랬을까. 누나도 항우영이랑 사람이랑 이렇게 웃었을까.’

경쟁에 내몰려도 연습생들은 서로 친해지고 서로 도왔다. 아이돌로 데뷔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그 꿈의 무대에 서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더러운 연못 위에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오르듯, 그렇게 다들 꽃송이를 피우고 있었다. 우희처럼, 현덕처럼.

피터가 한숨을 내쉬듯 속삭였다.

“고마워, 현덕아.”

그 한 마디에 얼마나 많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는지, 현덕은 알지 못했다.

“저한테 고마워하지 마세요. 그냥, 형이 버텨낸 거예요. 형이 형 누나를 사랑해서, 잘 이겨낸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으니 슬퍼 마땅하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슬프게 슬퍼하고 또 슬퍼하고 나면, 이제는 그 슬픔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해주었던 나 자신을 위해, 다시 살아가야 한다.

타의에 의해 슬퍼할 기회를 잃어버린 피터는 이제야 슬픔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다.

‘피터 형이 나한테 고마워하는 걸 보니, 내가 어떤 계기가 되었던 걸까. 하지만 그렇다 해도, 결국 이렇게 이겨낸 건 피터 형의 힘이야.’

현덕은 이전 삶의 기억 한조각을 떠올렸다.

시험공부를 하던 중 민철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민철은 현덕의 시험공부에 방해되기 싫다며 연락을 하지 않았다. 다행히 다른 친구들이 연락해줘서 모른 채 지나가지 않을 수 있었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였지만 갈까 말까 고민하지 않았다. 당연히 민철의 곁을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빈소를 찾았다. 그리고 사흘 동안 민철의 곁을 지켰다.

장례식장에서는 의외로 힘을 쓸 일이 많았다. 자잘하게 처리해야 할 일도 많았다. 슬픔의 독에 갇힌 민철의 가족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게, 현덕과 친구들은 각자의 부모님께 물어물어 장례식장 일을 도왔다.

민철은 상주로서 아버지의 영정을 지키며 상을 치르는 내내 차분했다. 빈소를 찾은 어르신들은 장남이 듬직하게 잘 버티니, 어머니와 동생들이 다행이라며 민철을 칭찬했다. 그게 민철이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보며 통곡 한 번 제대로 할 수 없도록 옭아매는 사슬이라는 걸 아무도 몰랐다.

민철은 아버지의 관이 땅속에 묻히는 그 순간까지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다들 민철이 괜찮은 줄 알았다. 슬픔을 잘 갈무리해 일상으로 되돌아 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상중에 의연하게 버텼던 민철은 그 이후 꽤 오랫동안 방황했다.

슬플 때 슬퍼할 수 없는 현실은 사람의 마음을 곪게 만든다. 마음이 아픈 건 쉬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본인조차 알아차리지 못한다. 민철이 그런 상태였다.

다행히 술이나 도박 따위엔 빠지진 않았지만. 취업 준비에 의욕을 잃었다. 무슨 생각인지, 스펙에 전혀 도움이 안 될 아르바이트나 막노동을 하러 다녔다. 받은 돈으로 생활비를 보태고 동생들에게 용돈을 주며 장남 노릇, 오빠 노릇을 했지만 그 뿐이었다. 오늘을 살 뿐, 내일을 욕심내지 않았다.

친구들이 연락해도 잘 받지 않았다. 만나기로 약속해도 나타나지 않았다. 집으로 찾아가면 언제나 가족들이 대신 반겼다. 도통 집에 붙어 있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사람을 만나러 나돌지도 않았다.

현덕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생각이 나면 받지 않는 민철의 핸드폰에 전화를 걸었다. 없는 번호라고 뜨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가끔씩 부재중 통화를 남기고, 문자를 보냈다.

[오늘 날씨가 좋아서 네 생각이 나더라. 시간 나면 하늘 좀 한번 올려다 봐라.]

[비 오는데 우산은 들고 다니나 싶어서 연락한다. 괜히 청승 떨면서 비 맞지 말고 우산 써.]

[어제 니 생일이었는데 미역국은 얻어먹었냐. 신림동에 미역국 잘 끓이는 집 있다. 생각나면 언제든 와.]

[나 시험 또 떨어졌다.ㅎㅎ]

그렇게 일 년 남짓을 보내고 나서야 연락이 왔다.

조금 야윈 얼굴엔 수염이 듬성듬성 나 있었다. 허름한 남방과 철 지난 골덴 바지를 입고 있었다. 낡은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쳐 멨는데, 다 낡은 러닝과 수건, 닳은 칫솔과 생수병 따위가 들어 있었다. 평소 깔끔 떨던 민철은 어디 갔는지 없었다. 속세의 패션과는 거리가 먼 신림동 고시촌에서도 민철의 모습은 눈에 띄었다.

현덕은 민철과 해장국을 먹으며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털털하게 웃으며 다시 취업 준비를 해야겠다고 말하는 민철은 어딘가 모르게 개운해 보였다.

훗날 민철이 말하기를, 그 일 년 남짓한 기간이 케이크 칼로 잘라낸 듯하다고 했다. 이것저것 몸 쓰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막노동 현장을 쫓아다니며 정신없이 살았던 것 같은데. 누굴 만나고 무슨 이야기를 하고, 무슨 정신으로 살았는지는 전혀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현덕은 피터를 보며 그때의 민철을 떠올렸다. 상황이 전혀 다르지만, 어쩐지 비슷하게 느껴졌다. 그때도 민철은 현덕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현덕은 그때도, 지금도 왜 자신이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현덕은 오히려 그때의 민철이, 지금의 피터가 고마웠다. 먼 길을 돌아야 했지만 그래도 돌아와 주었다. 영영 다른 길로 가버리지 않고, 제 몸을 학대하거나 나쁜 짓을 하지도 않고. 자기 자신을 다시 소중히 여겨 주었으니까.

“진짜 저한테 고마워요?”

그래도, 이왕 고맙다는 말을 들었으니까. 현덕은 제 것이 아닌 감사를 한 스푼 정도 욕심내 보았다.

피터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우면 저한테 뭐 하나만 알려줘요.”

“뭐든 물어봐.”

피터는 제 심장을 꺼내 크기를 재어 줄 수도 있다는 듯 굴었다. 하지만 현덕이 궁금한 건 그런 괴이한 게 아니었다.

“한국 이름이 뭐예요?”

“이름?”

“형 누나 이름이 윤우희라면서요. 그럼 형도 한국 이름이 있을 거 아녜요.”

“아, 이름. 이름 말이지.”

의외의 질문이었던지, 피터가 당황했다. 현덕은 그가 제 한국 이름을 기억해 낼 때까지 기꺼이 기다려주었다.

“내 이름은 윤강우야.”

“강우?”

어쩐지 강해 보이는 이름이었다.

현덕은 이미 입에 익숙해진 ‘피터’라는 이름 대신 ‘강우’를 혀 위에 놓고 굴려 보았다. 피터와 어울리는 듯하면서 어울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좀 별난 분이셔서 이름을 그렇게 지었어.”

“이름이 왜요? 별로 별나지 않은 이름인 거 같은데요.”

“내 항렬이 우자 돌림인데, 쌍둥이라고 나는 뒤에 ‘우’를 붙였어. 누나는 앞에 ‘우’를 붙이고. 할아버지 몰래 동사무소에 신고하고 나서 대판 싸우셨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족보엔 윤우관이라고 올라가 있어. 그래서 이름이 두 개, 아니, 세 개지.”

파란 눈의 준비보다 더 외국인처럼 느껴졌던 유학생의 구수한 이름과 족보 이야기를 들으며, 현덕은 그저 웃음 지었다.

피터가 고개를 들어 웃는 현덕을 바라보았다.

‘지금 같은 분위기면, 한번 해봐도 된다고 허락해주지 않을까?’

현덕이 딱 한 스푼 욕심을 낸 것만큼, 피터도 이같이 훈훈한 분위기에서 한 국자 정도의 욕심이 생겼다.

현덕을 만져보고 싶었다. 얼굴을. 말랑말랑하고 부드럽고 따뜻할 것 같았다.

평소엔 생각만 하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현덕이 거절할 것 같아서는 아니었다. 현덕의 옆에 지옥에서 불붙어 돌아온 케르베로스 같은 초대형 지랄견이 한 마리 있어서 물릴까 봐 무서워서였다.

오늘도 역시나. 떨어져 앉아 있어도 그 지랄 맞은 초대형견은 제 주인이 남과 닿는 꼴을 못보고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피터는 현덕의 뺨을 만져볼까 고민하다 말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피터 형, 어지러워요? 좀 더 기대고 있을래요?”

착하디착한 현덕은 피터에게 제 한쪽 어깨를 내주었다. 그 때문에 갑자기 피터의 생존 가능성이 급격히 떨어졌다는 걸 전혀 몰랐다.

“더 기대 있으면 내 목숨이 위험해질 것 같은데.”

“목숨이? 왜요? 목이 아파서 숨을 못 쉴 정도인가요?”

현덕은 단지 피터가 기대기 불편해 거절하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음, 뭐. 아니, 그렇게 생각하자, 우리.”

피터는 빙그레 웃었다. 이번엔 자신의 의지로 현덕의 어깨에 팔을 둘러 어깨동무했다. 그리고 현덕의 저편에 앉아 있는, 소름 끼치도록 잘생긴 연습생의 동태를 살폈다.

“난 아직 그리 생에 의욕이 없으니까, 이 정도는 감수해 볼까.”

그리 말하긴 했지만 괜히 등골이 쭈뼛 서긴 했다.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바로 지금의 우주민을 말하는 것이리라. 우주민은 그야말로 눈에 칼을 품고 피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조금 전 피터가 단상에서 토해낸 슬픈 사연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피터에게 이리도 화를 낼 수는 없으리라.

피터는 조금 전, 가족을 잃고 힘겨운 시절을 보냈던 서글픈 사연을 고백했다. 그 여운에 괴로워하며 옆에 앉은 연습생의 어깨를 빌린 것뿐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비슷한 상황을 경험해 본 주민이라면 이해하고 넘어가 주어도 좋으련만.

김현덕과 관련되면 그런 알량한 동정심마저도 들지 않는 듯했다.

‘뭐, 어쨌든 덕분에 기운이 좀 나네.’

때론 자신을 특별 취급하고 조심히 대하는 것보다는 그게 뭔 대수냐는 듯 막 대하는 눈빛에 더 위로를 받을 때도 있는 법. 주민의 눈빛이 너무 무시무시하긴 했지만, 기운 차리는데 도움이 되긴 했다.

피터는 자신이 금방 기운을 차릴 수 있도록 도와준 주민에게 꼭 답례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현덕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현덕아, 정말 고마워.”

“제가 하고 싶은 말인데요. 피터 형.”

현덕은 그런 피터를 두 팔로 안아주었다. 제 등 뒤에서 우주민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턱이 없었다.

피터는 문득, 특이했던 군대 후임이 생각났다. 현덕과 닮은 듯 안 닮은 듯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겪어보니 결국 닮은 형제였다.

‘아, 제 동생은 완전 형 닮아서 대박이지 말입니다. 아이돌 경쟁 프로그램? 제 동생 나가면 그냥 게임 끝입니다. 무조건 제 동생이 우승할 겁니다. 다들 한 번만 봐도 제 동생의 매력에 풍덩 빠져 버릴 테니 말입니다.’

맹덕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피터가 넌지시 서바이벌 경쟁 프로그램의 더러움과 비열함에 대해 운을 떼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고집이 세서 한 번 한다고 마음 먹으면 무조건 해야 하는 녀석입니다. 그런데 공부도 잘해서, 이미 사전 조사 같은 것도 끝냈을 거라서 말입니다. 윤 병장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런 것들 다 파악하고 나서 할지 말지 결정했을 겁니다. 본인이 다 알고도 하겠다는데 어떻게 말립니까. 걘 지가 하고 싶다고 하면 그냥 하게 놔둬야 됩니다.’

맹덕의 얼굴에는 하나뿐인 동생을 향한 애정이 그득했다.

우희가 ‘트윈 트윙클’에 나갔을 때, 피터도 맹덕처럼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현덕을 보면 자꾸 우희가 생각났다. 우희를 생각하면 이어서 항우영이 떠올랐다.

오늘의 고백이 TV로 방영되면, 정말로 항우영이 봐줄까?

설마…… 하는 두려움, 그리고 아직도 심장을 짓누르는 죄책감이 다시 한번 피터의 목을 졸랐다. 피터는 살기 위해 현덕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토닥토닥 어깨를 쓸어주는 그 손길은 어쩜 이렇게도 따뜻한지.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하는 누군가의 눈빛을 감당해낼 가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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