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무대 위 (27/36)

3. 무대 위

다음 촬영 전까지, 학교와 우탄 엔터테인먼트 연습실을 오가는 생활이 계속됐다.

밤늦게 연습이 끝나 돌아오는 길에 현덕은 바로 집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괜히 집 앞 놀이터나 주차장을 한 번 휙- 돌아보는 버릇이 생겼다. 하지만 첫날처럼 우주민이 또 나타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금요일 저녁에는 온 가족이 모여 ‘트라이 온’ 2부 첫 방송을 시청했다. 지난주에 합숙하며 촬영했던 내용이 방송되었는데, 초반에는 방유진이 거리로 나가 사람들을 붙잡고 인터뷰를 하는 장면이 나왔다. 아마도 지난주 합숙 촬영 이전에 찍은 영상인 듯했다.

Q. ‘트라이 온’에서 어떤 연습생을 응원하고 있나요?

이번 데뷔곡 미션에서 어떤 곡에 투표하실 건가요?

유진은 사람들을 붙잡고 어떤 연습생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그 연습생을 위해 어떤 데뷔곡에 투표를 할 건지 물었다.

제일 먼저 교복 입은 여학생들이 나타났다.

“자드래곤! 자룡아, 사랑해!”

“자드 오빠! 오빠는 춤도 랩도 다 되니까, 제일 섹시한 노래로 찍을 거예요!”

“무조건 we are죠! 전국의 자드 오빠 팬분들, 무조건 we are로 단결요!”

꺅꺅, 밝고 맑은 목소리로 사운드가 가득 찼다. 인터뷰를 하는 학생들은 정말로 자룡을 좋아하는 듯했다. 가방엔 자룡의 이름을 새긴 와펜이 달려 있었다.

한 학생은 아주 귀한 것이라며, 커다란 파우치를 열어 안의 내용물을 보여주었다. 그 안에는 자룡을 꼭 닮은 봉제 인형이 들어가 있었다. 파릇파릇하게 자란 양파 싹 같은 녹색 머리가 잘 표현되어 있었다.

“자드래곤, 데뷔하자! 무조건 섹시한 we are!”

여학생들이 봉제 인형을 흔들며 외쳤다.

이어, 다른 연습생들에게 투표한 시청자들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피터를 좋아한다는 회사원을 인터뷰하던 중 유진을 알아보고 쪼르르 달려온 초등학생들이 난입했다.

“준비느님! 저희는 촉에 투표할 건데, 혹시 촉이 싫으면 티비에 나와서 당근을 흔들어 주세요!”

초등학생들이 합창하듯 외쳤다. 이 인터뷰가 다음 주에나 방송될 줄 몰랐던 것 같았다.

이어 현덕에게 투표할 거라는 시청자의 인터뷰도 나왔다. 이제 막 대학교에 입학한 새내기였는데, 카메라를 보고 도망치려다 유진에게 붙잡혔다.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며 두꺼운 전공 서적으로 얼굴을 반 이상 가렸다. 그래도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색을 숨길 순 없었다.

“혀, 현덕아. 응원할게. 귀여운 모습 보고 싶어서 촉촉촉에 투표할 거야. 화, 화이팅!”

조그만 목소리로 국어책을 읽듯 말하고는 몰려든 사람들 틈으로 사라졌다. 그걸 보는 현덕의 얼굴과 귀도 빨개졌다.

“이열, 김현덕- 인기 많아? 응?”

맹덕이 현덕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현덕을 놀렸다. 현덕은 그런 형을 피해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부모님은 더없이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TV를 바라보았다.

“며느리 삼고 싶네.”

“그러게요.”

다른 연습생들을 뽑은 시청자들의 인터뷰가 차례로 지나가고, 마지막으로 우주민을 뽑을 거라는 시청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위풍당당! 중년의 남성이었다. 못해도 50대는 되어 보일 듯했다.

“우주민이 우시영의 아들인데, 춤을 못 춘다고 해서, 그래도 제일 춤이 간단해 보이는 걸로 찍었는데, 뭐가 잘못됐습니까?”

그는 오히려 유진에게 질문했다.

“잘못됐을 리가요. 어떤 노래에 투표를 하셨나요?”

“제일 춤이 간단해 보이는 노래에 했다니까요.”

“그게 어떤 노래였나요.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어, 그…… 뭐시더냐. 아주, 힘 팍팍 주고 추는 춤이었는데……. 손에 뭐 들고 짝짝대는 거나 흐물거리면서 추는 건 영 어려워 보여서, 그런 거 말고 그냥 사나이답게 펄쩍펄쩍 뛰는 노래를 골랐었는데……. 제목이……. 투표는 내 핸드폰으로 하긴 했는데, 딸한테 해달라고 부탁해서…….”

인터뷰이가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하자, 유진은 수습에 나섰다.

“아, 혹시 ‘OH, My!’를 선택하셨나요?”

“오, 그래요. 그거! 그 영어 제목 노래. 아마 그게 맞을 겁니다.”

남자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는 자신이 우시영의 아들, 우주민을 위해 최고의 선택을 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른들이 보기엔 그 곡의 안무가 제일 쉬워 보이는구나.’

현덕은 왜 하필이면 주민이 제일 안무 난이도가 높은 ‘OH, My!’ 팀으로 들어갔는지 알게 되었다.

이후 방송은 세 평가곡의 컨셉이 바뀌었다는 걸 알렸다. 당황한 연습생들이 좌충우돌하면서도 2부의 첫 번째 무대를 준비해가는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트라이 온’ 프로그램의 주요 컨셉은 경쟁과 성장이었다. 아직 ‘연습생’에 불과한 출연자들이 성장하여 멋진 ‘아이돌’로 데뷔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겠다는 것이었다.

평가곡 컨셉이 갑자기 바뀐 것도, 통상 아이돌 데뷔조가 심심찮게 겪는 일이라는 멘트가 흘러나왔다. 다분히 대중의 비난을 의식한 변명이었다.

평가곡 컨셉이 바뀌는 악조건에도 연습생들은 묵묵히 연습에만 몰두했다. 때론 부딪치고, 싸우고, 웃고 떠들고, 무수히 많은 땀을 흘렸다. 그 속에 현덕이 있었다.

현덕은 ‘트라이 온’을 그냥 시청하지 않았다. 부모님과 형의 핸드폰을 거실 바닥에 일렬로 늘어놓고 위, 촉, 오, 각 팀이 노출되는 시간을 체크했다.

고루 노출되긴 했지만, 아무래도 주민이 있는 위팀의 노출 시간이 길었다. 그다음은 오팀이었고 마지막이 촉팀이었다.

‘음…….’

현덕은 방송이 끝난 뒤에도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핸드폰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

토요일, 다시 합숙 촬영이 시작되었다.

이번 주 촬영의 마지막 날, 데뷔곡 무대를 평가하고 우승팀이 결정된다. 때문에 며칠 만에 다시 만난 출연자들은 지난주보다 들떠 있었고, 또 불타올랐다.

자룡이 리더로 있는 오팀은 아예 호텔을 태워버릴 기세였다. 자룡은 씻으려고만 숙소에 잠깐 다녀올 뿐. 아예 연습실에서 살았다.

위팀 또한 병약한 리더를 중심으로 똘똘 단결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긴장이 심해지는지, 유호는 자꾸만 약을 찾았다. 정모는 그런 유호의 주변을 빙빙 맴돌았다.

유호는 파리한 안색으로 자신의 위장에 큰 부담을 주는 주민과 정모를 마음껏 구박했다. 어차피 나머지 연습생들은 다 유호의 편이기 때문에 독재자 유호와 핍박받는 주민, 정모의 구도는 완벽한 균형을 이루었다.

촉팀 또한 연습생들의 성화에 못 이겨 연습시간을 늘였다. 촉팀도 촉팀답지 않게 새벽까지 휘몰아쳤다.

촉팀 내에서는 피터와 소혁의 미묘한 신경전이 시작되었다. 소혁은 지난주 합숙 촬영 이후 전혀 연락이 닿지 않았다. 피터는 그런 소혁에게 적어도 부재중 통화를 200통 이상 남겼었다.

카메라가 꺼져 있는 틈에, 두 사람은 짤막한 대화를 나누었다. 언제 카메라가 켜질지 모르는 상황이기에 둘 다 싱글싱글 웃고 있었으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시베리아 벌판에서 퍼 온 것 같은 냉기를 풍겼다.

피터는 소혁을 ‘멋대로 약속을 어기는 무책임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소혁은 ‘스토커, 난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끄시지.’라고 대꾸했다.

그러던 중 사고가 났다. 촉팀에서 부상자가 나온 것이다. 밤새 연습하던 연습생 한 명이 발을 헛디뎌 촬영 조명 쪽으로 쓰러졌다.

연습생은 무거운 조명과 촬영 기계에 깔려 비명을 질렀다. 촬영 스태프들이 달려갔을 때는 이미 상황은 벌어진 후였다. 119 구급대가 출동했다. 메인 PD가 보호자 역할을 자처하며 구급차에 올라탔다.

근처 병원으로 실려 간 연습생은 다리가 부러지고, 팔 한쪽에 화상을 입었다는 진단을 받았다. 전치 몇 주인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부상은 심해 보였다. 거기다가 호텔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기삿감을 찾고 있던 기사들에게 들켜, 사진이 찍히기까지 했다.

상황을 수습하지 않으면 내일 아침 기사로 [인기 서바이벌 프로그램 트라이 온 : 부상자 발생. 부실한 안전망, 이대로 괜찮은가.] 따위의 기사가 올라올 터였다.

메인 PD는 연습생에게 하차를 권했다.

“아니에요, 저 괜찮아요. 압박붕대를 하든 뭘 하든, 하고 진통제 맞으면 춤출 수 있어요. 제발요.”

연습생이 울며 매달렸지만, 메인 PD는 연습생의 건강을 위해, 또 여론을 의식해 다친 연습생의 퇴소를 강행했다.

치료를 받은 연습생이 호텔로 돌아왔다. 카메라는 그 연습생이 절뚝절뚝 걸어가는 모습부터 찍기 시작했다. 연습생은 숙소에서 짐을 챙기며 펑펑 울었다. 옷소매로 얼굴을 슥슥 닦아내는 뒷모습은 더없이 안쓰러웠다.

연습생은 캐리어 가방을 질질 끌고 연습실로 내려오자, 촉팀은 당황했다. 그 모습 또한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다.

“내 몫까지 힘내줘.”

연습생은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현덕은 물론이거니와 촉팀 연습생 모두가 느꼈다. 그 말이 그 연습생의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할 수만 있다면 두 손으로 물구나무를 서서라도 무대에 오르고 싶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포기하고 무대를 등지는 그 마음이 어떨지, 현덕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촉팀은 다른 팀보다 한 명 적은, 9명으로 무대에 올라야 했다. 퇴소한 연습생이 맡았던 파트의 노래는 준비가 소화하기로 했다. 그의 빈자리를 가리기 위해 안무 동선도 변경해야 했다.

몇몇 연습생들은 불길한 징조라며 두려워했다.

“좋은 결과를 내기 전에 작은 나쁜 일이 있었을 뿐입니다. 걱정들 하지 마세요.”

피터는 불안해하는 연습생들을 다독이며 연습을 이어갔다.

그리고 두 번째 합숙 촬영의 마지막 날.

트라이 온 연습생들은 아침 일찍, 커다란 관광버스를 타고 호텔을 떠났다. 목적지는 그들이 데뷔곡 평가 무대가 열릴, 케이블 방송사의 자체 세트장이었다.

1부와 달리 2부에서는 평가 무대를 시청자들에게 공개했다. 다만 모든 시청자에게 공개한 것은 아니었다. 데뷔곡 투표를 한 시청자들 중 300명을 선발하였다.

연습생들은 그들을 관객으로 두고 무대를 펼쳐야 했다. 밀폐된 호텔 내에서 연습생들끼리만 모여 평가 무대에 오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무대였다.

세트장으로 향하는 내내, 버스 안은 조용했다. 연습생들은 정말 데뷔 무대에 서는 신인 아이돌처럼 긴장했다. 거기에 위팀, 촉팀, 오팀, 세 팀 사이의 날 선 경쟁심이 분위기를 더 싸늘하게 만들었다.

연습생들은 세트장에 도착하자마자 준비된 무대 의상을 입고, 머리를 만지고, 분장했다. 커다란 판넬이 덕지덕지 붙은 무대 뒤편에 모인 상태에서 제정신을 유지하는 연습생들은 몇 없었다.

다들 미친 사람처럼 굴었다. 얌전하던 연습생이 환각제라도 먹은 양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떠들었다. 안무를 잊어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연습생들도 있었다. 그들은 구석으로 가서 계속 안무를 연습했다.

목을 풀려고 아이우에오, 도레미파솔라시도를 계속 소리쳐 부르다가 목이 쉬어버린 연습생들도 여럿이었다. 긴장감을 견디지 못해 분장한 얼굴로 우는 연습생도 있었다.

물론,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멀뚱히 서 있는 연습생들도 있었다. 주민이나 소혁이 그러했다. 주변의 연습생들은 그런 그들을 터미네이터를 보듯 바라보았다.

현덕은 회색 지대였다. 긴장했으나 차분했고, 아무렇지 않다고 하기엔 많이 긴장한 상태였다. 현실감을 잃은 상태라고 말하는 게 적당할 듯 했다.

현덕은 스태프들의 손에 떠밀려 의상을 갈아입고, 머리를 왁스로 세우고, 렌즈를 끼고, 화장을 했다. 마찬가지로 적당히 긴장한 준비에게 붙잡혀 촉팀 연습생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안녕하세요, 트라이 온 시청자 여러분!]

무대 위에서 오프닝을 여는 유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 호응하는 관객석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그 함성은 무대 뒤쪽으로 고스란히 전달됐다.

제멋대로 굴며 긴장감에 미쳐가던 연습생들 전원이 일제히 굳었다. 아주 잠깐, 숨 막힐 듯한 침묵이 찾아왔다.

잠시 후.

“으아아악!”

“집에 가고 싶어.”

“실수하면 어쩌지?”

“난 망했어. 아니, 우리 팀은 망했다고.”

사방에서 한탄이 터져 나왔다.

“형, 형. 나 노래 까먹은 거 같아여. 어쩌죠?”

준비가 현덕에게 매달렸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현덕보다 더 태연했건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무대를 보러 왔다는 걸 실감하자, 잔뜩 긴장해버린 것이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하나도 안 까먹었어. 수백 번 불러 봤잖아. 응?”

“하, 하지만여. 혹시 모르잖아여.”

준비가 잔뜩 울상이 된 얼굴을 들어 현덕을 올려다보았다. 언제나 자신만만하던 푸른 눈이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럼 형이랑 지금 한번, 같이 불러보자.”

현덕은 준비를 데리고 구석으로 가 서로의 입 모양을 보며 노래 가사를 최종 점검했다. 후렴구를 부를 즈음엔 피터가 슬그머니 합류했다.

“자자, 오팀! 무대 올라갈 준비하세요!”

스태프의 외침이 들렸다. 오팀 연습생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팀 연습생들도 잔뜩 굳어서는 무대로 향하는 계단을 돌아보았다. 오팀은 자룡을 중심으로 모여 큰 소리로 하이파이브를 하고는 힘차게 무대로 뛰쳐나갔다.

“꺄아아아아-.”

객석에서 들리는 함성이 커졌다.

오팀의 데뷔곡, ‘We are, I was……’의 반주음이 울렸다. 남은 촉팀과 위팀의 연습생들은 무대를 비춰주는 커다란 TV 화면 앞으로 다가갔다.

준비 동작 자세로 서 있던 자룡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어깨가 들렸다 내려가는 게 보였다.

‘천하의 자룡 형도 긴장을 하는 건가?’

화면 너머 자룡의 긴장감이 전염되었다. 현덕은 마른 침을 삼키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 옆에 주민이 섰다. 무대 의상을 차려입은 주민은 어두침침한 무대 뒤편에서 홀로 은은하게 빛났다.

현덕은 주변을 확인한 후 슬그머니, 주민의 손을 잡았다. 주민은 현덕의 손에 깍지를 꼈다. 고작 손을 맞잡았을 뿐인데 마음이 편해졌다.

‘We are, I was……’는 본래 피아노와 바이올린 음이 주력인 감성적인 곡이었다. 하지만 재편집되어 재즈풍으로 바뀌었다. 랩은 재즈의 변주에 맞춰 늘어져, 마치 조선시대의 시조와 같은 느낌이 났다.

안 그래도 어려운 곡이 더 어려워졌건만, 무대 위에서 자룡은 빛이 났다. 다른 연습생들도 잘했지만 단연 자룡이 빛났다. 자룡은 가장 어려운 파트의 랩을 수월하게 소화해냈다. 쉼 없이 움직여야 하는 안무는 난이도가 높았지만, 그만큼 아름다웠다. 안무를 완벽히 소화해 낸 자룡은 유일한 백조였다.

TV 화면을 통해 무대를 지켜본 연습생들은 저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짝짝짝. 현덕도 마찬가지였다.

현란하고 아름다운 무대가 끝나자, 객석은 함성으로 가득 찼다. 오팀 연습생들은 유진과 간단한 인터뷰를 마친 후 상기된 얼굴로 무대를 내려왔다.

무대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오팀, 촉팀 연습생들이 일제히 박수치며 그들을 반겼다.

“힘내.”

자룡이 현덕과 주민의 사이를 스쳐 지나가며 두 사람의 어깨를 꾹 잡았다. 어깨에 닿은 손이 심하게 떨렸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렇지도 않았건만.

현덕은 그 순간, 자룡의 감정이 궁금했다.

‘아직도 무서운 걸까. 아니면, 만족한 걸까. 흥분된 걸까? ……기쁘고 행복할까?’

그 답을 알아내기 전에, 자룡이 섰던 무대 위로 올라가야 했다.

두 번째로 무대에 오를 팀은 현덕이 속해 있는 촉팀이었다. 촉팀의 아홉 명이 무대 위에 올랐다.

연습생들은 얼굴에 얇은 하얀색 가면을 쓰고 있었다.

후우.

현덕은 제 자리에 서며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그건 아마도, 조금 전 자룡의 숨과 닮은 것이었다.

딱-

소혁이 손에 든 캐스터네츠를 부딪치는 것과 동시에 음악이 시작되었다.

본래 ‘촉! 촉! 촉!’은 캐스터네츠를 이용한 딱딱이 춤이 포인트인 귀여운 곡이었다. 하지만 재편집 된 ‘촉! 촉! 촉!’은 파워풀했다.

손에 든 캐스터네츠를 부술 듯 두들기며, 발을 굴렀다. 쿵. 쿵.

까만 가죽 재킷을 입고 징 박은 소품을 몸에 두른 아홉 명의 거친 사내들이 무대 위 조명을 받으며 높이 뛰었다. 몸이 유연한 준비가 제일 앞에서 백덤블링을 뛰고, 소혁이 등을 바닥에 대고 두 다리를 높이 들어 올려 회전했다. 동시에 무대 위로 불꽃이 튀었다.

연습생들이 얼굴을 가렸던 가면을 벗어 던졌다. 눈이 멀 정도로 쨍-한 스포트라이트가 그들을 비췄다. 현덕은 그 빛을 받으며 눈을 크게 떴다.

우주가 멈췄다.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멈추고, 달이 ‘얼음’ 상태가 되었다. 숨조차 쉴 수 없는 진공 상태였다. 온 세상이 하얬다. 그 속에서 ‘김현덕’이라는 이름마저 지워졌다.

고작 눈 한 번 깜빡거릴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현덕은 그렇게 믿었다.

“현덕아.”

누군가 현덕의 등을 쳤다. ‘땡!’

진공 상태가 깨졌다. 현덕은 현실로 돌아왔다.

“허억.”

현덕은 급히 숨을 들이쉬었다. 바다 깊이 잠수했다가 막 끌려 나온 사람처럼 산소가 모자랐다.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가 너무 밝았다. 눈이 부시다 못해 아팠다. 현덕은 눈을 찌푸리며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하아, 하아. 주변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쿵쾅쿵쾅 심장 소리가 들렸다.

‘누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걸까.’

현덕은 덜컥 겁이 들었다.

‘무대 시작 전에 너무 긴장한 걸까? 아까부터 준비가 계속 긴장하던데, 설마 준비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반대쪽 대칭점에 준비가 있었다.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한쪽 팔로 무릎을 짚고 있었다. 셔츠를 죽 늘어뜨려 얼굴을 닦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푸른 하늘을 닮은 파란 눈이 투명하게 반짝였다. 당장이라도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지쳐 보이는데, 입가엔 만족스러운 웃음이 가득했다.

“괜찮아. 많이 힘들어?”

현덕을 얼음 상태에서 ‘땡!’ 시켜준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현덕의 어깨를 감싸 쥐고 가볍게 흔들었다.

현덕은 괜찮다고, 하나도 안 힘들다고 대답하려고 했다.

“네……. 저…….”

하지만 말하지 못했다.

입을 여니 나오는 건 뜨거운 숨이었다. 심장을 입으로 토해내는 것처럼 목구멍이 뜨거웠다.

현덕은 고개를 내저었다. 머리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그제야 현덕은 거친 숨소리와 심장 소리가 자신의 몸에서 나는 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아…….”

현덕은 제 어깨를 쥔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피터였다. 그는 현덕만큼이나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러면서 현덕을 내려다보고 웃었다.

“잘했어. 현덕아. 아주 잘했어.”

현덕의 머리를 잡아 자신의 가슴팍으로 끌어당겼다. 현덕의 작은 머리통은 피터의 한 손에 다 들어왔다. 현덕은 비틀거리다 피터의 가슴팍에 얼굴을 쿵, 박았다.

언제나 피터가 뿌리고 다니는 청량한 향수 냄새가 났다. 땀 냄새도 났다. 의상이 땀에 젖어 축축했다. 그런데 하나도 찝찝하지 않았다.

“현덕아, 김현덕!”

바로 눈앞에서 함성이 쏟아졌다. 파도를 바로 눈앞에서 맞닥뜨리는 것 같았다. 귀가 멀 것 같았다. 숨이 막혔다.

누군가. 아니, 여러 사람이. 아니, 많은 사람이 현덕을 부르고 있었다. 현덕은 피터에게 기댄 채로 고개만 돌려 앞을 바라봤다.

새하얀 스포트라이트가 꺼지자 사람들로 빼곡히 찬 객석이 보였다. 사람들은 일어서서 자신들이 응원하는 연습생의 이름이 크게 적힌 패드나 현수막을 들고 있었다. 그중에는 현덕의 이름도 있었다.

현덕은 자신의 이름을 들고 흔드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 사람들과 눈이 마주친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도 그렇게 느낀 걸까. 손에 든 현덕의 이름을 마구 흔들었다. 잔상이 보일 정도였다.

김현덕!

김현덕!

현덕아! 잘했어! 너무 잘했어!

그들이 현덕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응원해주었다. 다른 연습생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하는 함성에 섞였지만, 현덕은 분명히 들었다. 너무도 선명히 귀에 와 박혔다.

현덕은, 그들이 말하는 김현덕이 자신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아…….”

눈물이 툭, 터졌다.

눈물은 막을 새도 없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현덕은 두 손으로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눈가를 훔칠 때마다 더 많은 눈물이 났다.

“윽, 흑……. 자, 잠깐만요.”

현덕은 피터의 품에서 벗어나려 뒤로 물러섰지만 피터가 놔주지 않았다. 피터는 아예 두 손으로 현덕을 꼭 끌어안았다.

“괜찮아, 다 끝났어. 그리고 너, 아주 잘했어.”

피터의 품은 딱딱했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과 달리 몸은 강철로 만든 듯했다. 하지만 따뜻했다. 현덕은 그 품에 얼굴을 묻고 펑펑, 눈물을 터트렸다.

무대가 끝났다.

시작한 줄도 모르게 끝이 났다. 아쉽다는 말을 할 수조차 없게, 멋대로 시작하고 끝이 나 버렸다. ‘내가 제대로 잘한 걸까.’라는 걱정 따위는 들지 않았다. 그런 걱정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서러웠다. 그리고 행복했다. 하지만 억울했다. 또는 기뻤다. 역시나 무서웠다. 그러므로 떨렸다. 그러나 설렜다. 그래서 좋았다. 그러면서도 아쉬웠다.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있지만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몰아쳤다.

첫 무대였다.

연습생들끼리 모여서 서로에게 보여주는 연습이 아니라, 기획사 직원이나 트라이 온 프로그램 트레이닝 선생님들에게 평가받기 위해 준비한 게 아니라. 그저 이 무대를 보러 온 사람들을 위한 무대.

객석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알거나 모르거나, 자신을 응원하거나 응원하지 않거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아니, 중요한 것은 그것이었다.

‘이 무대에 서기 위해서, 나는 그렇게도 오래 준비했던 거구나.’

트라이 온 2부 촬영을 시작했던 날부터 오늘까지, 고작 그 1, 2주의 기간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중학교 3학년 때, 학교 교문 앞에서 캐스팅 매니저의 명함을 받았던 그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자꾸, 자꾸 울음이 나왔다.

어떻게 춤을 췄는지, 노래를 제대로 부르긴 했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무대에 올라선 그 순간, 온 세상이 하얘졌다. 현덕은 그저 맥없이 존재했다. 아니, 자신이 김현덕인 것도 모른 채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추워서 그런 게 아니었다.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몸 안에 가득 차다 못해 끓어 넘쳐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건 희열이었다. 그리고 두려움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할까, 이 세상에서.’

지난 삶에서는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방금 무대가 끝났을 텐데, 기억도 하지 못하는 그 무대가 그리웠다. 또다시 이런 감각을 맛보고 싶었다. 손끝에서부터 아스러지듯 사라지는 이 감정을 놓치기 싫었다.

무서웠다. 마약에 중독된 게 이런 게 아닐까.

문득, 자룡이 보고 싶었다.

중학교 3학년 때, 현덕은 TE엔터테인먼트 연습생 생활을 시작했다. 첫날부터 얼결에 데뷔조에 포함될 뻔했는데, 그 데뷔조가 무산되었다.

데뷔조가 깨졌던 날, 현덕은 캐비닛 복도 한쪽에서 울고 있는 자룡을 만났다. 자룡은 철제 캐비닛 사이에 웅크리고 앉아 펑펑 울고 있었다. 그렇게 서럽게 울 수가 없었다.

그때, 자룡은 물었다. 넌 괜찮은 거냐고. 현덕은 자룡에게 연민을 느꼈을 뿐. 자룡의 그 말에 담긴 마음을 알지 못했다. 오랜 시간이 걸려, 길을 빙 돌아 이제야 그때 자룡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걸 빼앗겼던 거구나, 자룡 형은. 박자룡은. 이런 걸 자꾸자꾸, 빼앗겼던 거구나.’

조금 전, 위팀이 무대에 섰을 때 자룡은 어땠을까. 무대가 끝난 뒤엔 또 어땠을까. 자신처럼 이렇게 서러웠을까. 기뻤을까. 행복했을까. 아니면, 슬펐을까. 그 무대에서 내려오며 현덕과 주민을 응원할 때 그 마음은 또 어땠을까.

상상이 가질 않았지만 상상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처음 이런 감정을 겪어 본 주제에, 이해한다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자체가 지독한 오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해가 됐다.

지금 이 순간, 현덕은 처음으로 자룡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단 한 번도, 자신과 자룡이 똑같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아무리 진지해지고 최선을 다한다 한들, 자룡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꿈을 좇으며 전력 질주하는 자룡이 존경스러웠다. 자룡을 볼 때마다 스스로를 돌아보며 반성했다.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살았던 나는 저만큼 최선을 다했을까?’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건만, 연습생으로 살아가는 자룡을 보면 그런 생각이 민망스러웠다.

현덕은 자룡을 동경했다. 또 존경했다. 그건 이해와 가장 먼 감정이었다.

자룡이 왜 아이돌이 되고 싶어 하는지, 주간 평가와 월말 평가를 앞두면 집에 안 가고 회사 연습실에서 밤을 새우곤 했는지, 번번이 데뷔가 무산되어 괴로워하면서도 그 꿈을 포기하지 못하는지. 이제야 감히 알았다.

“형, 왜 울어여. 형 완전 멋있었는데, 울지 마여.”

준비가 쪼르르 달려와 현덕의 품에 안겼다. 현덕은 곰 인형을 껴안듯 준비를 꽉 끌어안았다. 울음이,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따끈따끈한 준비를 껴안으니 조금 진정될 뻔했던 감정이 다시 울렁울렁해졌다.

준비는 현덕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다가 현덕의 감정에 물들어 금세 울상이 되었다.

“촉팀. 멋진 무대 잘 보았습니다. 처음에 이 노래를 들었을 때는 무척 귀여운 곡이라고 생각했는데, 편곡된 걸 보니 장난이 아니네요. 상남자도 이런 상남자들이 없어요. 거칠고 섹시했습니다. 그렇죠?”

유진이 객석을 향해 마이크를 내밀었다. 네에- 객석에서 커다란 함성이 쏟아졌다.

유진은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보이고는 촉팀 연습생들을 돌아보았다. 유진의 눈길이 현덕에게 닿았다.

“특히 김현덕 연습생의 이미지 변신이 눈에 띄었는데, 아이구. 무대가 끝나니까 다시 순딩이가 되어서 리더 형한테 꼭 안겨 있네요.”

유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객석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현덕아, 울지 마!”

울지 말라는 말을 들으니 더 눈물이 났다.

세 사람이 끌어안고 있는 모습은 다른 연습생들을 울컥하게 만들었다. 촉팀의 다른 연습생들이 슬금슬금, 셋에게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달려들어 서로를 얼싸안았다. 연습생들이 순식간에 한 덩이가 되었다.

가장 안에 들어가 있는 현덕과 준비는 갑작스러운 압박감에 놀라 울음을 그쳤다.

“리더님, 자꾸 개겨서 미안해요.”

“우리 팀 진짜 좋았어요. 완전 멋있었어.”

“무대, 한 번만 다시 하면 안 돼요? 그럼 진짜 잘할 자신 있는데…….”

다들 벅차오르는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훌쩍였다.

땀에 젖어 끈적끈적하고 열기 때문에 후끈했지만, 그게 싫지 않았다. 현덕은 군대에서도 맛보지 못했던 진한 전우애를 느꼈다.

여덟 명이 들러붙자, 소혁은 카메라를 등지고는 이상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현덕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쯧쯧, 혀를 차지나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방에서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그럴 리가 없겠지만.

‘응?’

예상외로 소혁은 곤란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왜 그런 표정인지 의아했으나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소혁이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애써 숨기고는, 그들의 열정적인 포옹에 합류했다.

소혁은 깔끔한 걸 좋아했다. 그런 그가 땀범벅인 동성을 끌어안는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일이 지금, 현덕의 눈앞에서 벌어졌다.

소혁은 제일 바깥쪽에 섰다. 최대한 다른 연습생들과 최소한만 닿으려 애쓰며 팔을 벌려 다른 연습생들을 안는 듯 마는 듯했다. 그게 카메라를 의식해서인지, 아니면 현덕과 비슷한 감동을 겪었기 때문인지, 현덕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의 땀에 젖은 머리와 얼굴이 현덕에게 말해주었다. 소혁도 이번 무대에서 최선을 다했노라고. 그거면 충분했다.

촉팀은 유진과 간단한 인터뷰를 마치고 무대 뒤로 내려갔다. 올라가는 걸음은 새털같이 가벼웠는데, 내려오는 걸음은 발에 천 톤의 추를 단 것처럼 무거웠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음을 뗄 때마다 온몸에 가득 차 있던 환희가 한 움큼씩 떨어져 나갔다. 몸은 잼이 가득 찬 병 같았다. 걸음을 걷는 건 누군가 커다란 스푼으로 한 스푼씩 뚝뚝 떠가는 것 같았다.

무대 뒤로 완전히 내려왔을 때 김현덕이라는 잼병은 거의 다 비워졌다. 그 많던 잼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빈 병에는 지독한 공복감만이 남았다.

현덕은 팀의 다른 연습생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현덕처럼 허기진 표정으로 자신들이 내려온 무대를 돌아보고 있었다.

“마지막 무대는, ‘OH, My!’입니다!”

유진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울려 퍼졌다. 뒤이어 편곡된 오팀의 데뷔곡 ‘OH, My!’의 전주가 울려 퍼졌다.

현덕은, 촉팀 연습생들은, 위팀 연습생들은. 그러니까 무대 뒤로 내려온 모든 연습생은 무대의 정면이 보이는 TV 화면이 아니라 자신들이 걸어 내려온 무대의 뒤편을 올려다보았다. 무대에 올라 있는 그들이 부러워 미칠 것 같았다.

첫 소절을 부르는 주민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무대에 가득 찼다.

듣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현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스크린의 무대 화면을 바라보았다.

한가운데에 스탠딩 마이크가 놓여 있고, 주민이 홀로 서 있었다. 주민은 연인을 껴안듯 두 팔로 스탠딩 마이크를 끌어안고 눈을 내리깔았다. 하얀 셔츠가 반사판 역할이라도 하는지 주민의 얼굴이 희게 빛났다.

스탠딩 마이크 주변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추고, 아홉 명의 연습생들은 마치 주민의 날개라도 되는 듯 양옆으로 갈라서 격렬한 안무를 추었다. 누구 하나 삐끗나지 않게 완전한 칼군무였다.

자신의 파트를 마친 주민이 어둠 속으로 끌려가듯 옆으로 비켜나자 유호가 스탠딩 마이크에 서서 자신의 파트를 소화했다. 주민은 제일 끝에 서 함께 춤을 추었다. 확실히 오팀의 다른 연습생들에 비해 손짓이나 발동작이 어설펐다. 하지만 팀의 조화를 망칠 정도는 아니었다.

주민의 목소리에 빠져 넋이 나가 있었으나 주민의 춤을 보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현덕은 주민이 다른 연습생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춤을 추는 기적적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지막 파트는 주민이었다. 노래를 클로징하는 나지막한 목소리는 한숨을 닮았다. 안개로 만든 나비의 날개 같았다.

순식간에 곡이 끝났다.

객석은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잠시 뒤.

귀청이 찢어질 정도로 커다란 함성이 울렸다.

현덕은 그제야 돌아설 수 있었다.

유진이 흥분한 객석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쓰는 멘트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현덕은 자룡을 찾아 나섰다.

자룡의 쨍한 녹색 머리는 어디에서도 눈에 띌 만큼 유니크한 것인데, 이상하게 어두침침한 무대 뒤 어디에서도 눈에 띄지 않았다. 현덕은 발이 닿는 대로 정처 없이 무대 뒤 구석진 곳을 돌았다. 자룡은 가장 자룡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곳에 있었다.

얼기설기 쌓아 놓은 박스 더미와 패널 벽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었다. 자룡은 거기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주민이 양파 머리라고 부르는 녹색 머리가 눈에 띄었다.

“자룡 형.”

현덕이 자룡에게 다가갔다.

혹시나 울고 있을까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자룡은 패널 벽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현덕이 자룡의 발 앞에 서자 그제야 눈을 떴다.

“여-.”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형…….”

막상 자룡을 찾으니 할 말이 없었다. 자룡이 피식, 웃으며 제 옆자리를 두드렸다.

현덕은 자룡의 앞에 웅크리고 앉았다.

“울었냐?”

마디지고 거친 손이 현덕의 눈가를 쓸었다.

“……아니. 아닌데요.”

“아니긴. 울었네. 눈 밑이 뜨끈뜨끈하다.”

“……조금.”

“그래, 잘했어.”

자룡이 현덕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여기서 뭐 해요?”

“그냥, 좀 혼자 있고 싶어서.”

“그럼 내가 괜히 찾은 건가요?”

현덕이 일어서려 하자 자룡이 현덕의 손을 붙들었다. 현덕은 앉은 것도 아니고 일어선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멈춰 섰다. 자룡은 팔을 당겨 현덕을 다시 앉혔다. 현덕이 앉은 뒤에도 손목을 움켜쥔 손을 풀지 않았다.

자룡의 손은 뜨거웠다. 현덕은 불로 된 고리를 팔목에 두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 여기에 있어요?”

현덕이 다시 물었다.

“…….”

이번엔 자룡도 쉽게 답하지 못했다.

박스 너머에서 다른 연습생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이크를 타고 전해지는 유진의 목소리도, 오팀 연습생들의 인터뷰하는 목소리도 들렸다. 객석의 함성도 고스란히 들렸다. 그 함성에 자룡의 손이 살짝 떨렸다. 그건 현덕도 아는 감각이었다.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은 감격을 경험한 이 순간, 현덕은 자룡의 떨림을 이해할 수 있었다.

현덕은 자룡의 손등에 손을 얹었다. 눈이 마주치자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보며 웃었다.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아, 씨앗.”

자룡이 오랜만에 씨앗을 찾았다. 오랜만에 듣는 정겨운 단어였다.

“고마워. 현덕아. 다 네 덕분이야.”

“그건 우주민이 할 말이지 형이 할 말이 아니에요. 내가 형한테 춤을 가르쳐준 게 아니잖아요?”

현덕은 자룡의 말이 뜬금없게 들렸다. 그래서 농담처럼 흘려 넘기려 하였으나 자룡은 순순히 받아주지 않았다.

“아니, 난 네가 아니었으면 여기에 안 나왔을 테니까. 아니, 못 나왔을 테니까. 다 네 덕이야.”

자룡은 홀로 대교 위에 서 있던 그 언젠가를 생각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쫓아왔던 주민과 현덕을 보면서도 아무런 감흥이 들지 않았다. 그때의 자룡은 실컷 씹어 단물이 빠진 껌이었다. 하도 씹히고 밟혀서 더는 화내거나 울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

긴 연습생 생활의 끝, 허황된 꿈을 꿨다고 생각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아서, 그 꿈만 바라보며 전력 질주했건만. 사실 그 꿈은 너무 멀리 있어서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심정을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다. 그런데 그 꿈이 지금, 자룡의 손안에 들어왔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벌써 김칫국을 마신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아직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출연 중이면서, 우승한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느냐고 그러겠지. 꿈을 이루려면 아직 멀었으니 더 노력하라고. 하지만 그거야말로 자룡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까 할 수 하는 말이었다.

자룡의 꿈은 거창한 게 아니었다.

유명한 아이돌이 되고, 커다란 돔에서 콘서트를 열고, 광고와 드라마를 잔뜩 찍고, 슈퍼스타가 되어서 일본이나 중국, 동남아시아에 미국까지 진출하고. 그런 게 아니었다.

자룡은 그저 무대에 서고 싶었다. 기획사 직원에게 평가를 받기 위해 서는 무대가 아니라 자신의 춤과 노래, 랩을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봐주는 무대를.

유명해지지 않아도 좋았다. 돈을 많이 벌지 못해도 괜찮았다. 마음에 맞는 동료들과 마음껏 노래하고 춤을 추고 랩을 하면서 무대 위에 설 수만 있다면.

그러니 오늘의 무대는 자룡이 꿈을 이룬 첫 번째 무대였다.

5분 남짓한 시간이 찰나와 같았다. 1분, 1초가 아쉬워 기억하려고 애썼다. 무대 위에서 날뛰는 게 미치도록 행복했다. 2주 동안 몸을 부딪치며 안무와 노래를 맞춰 온 팀의 동료들,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관객석의 팬들. 그 속에서 자룡은 자신이 완벽해지는 것을 느꼈다.

환희.

그 자체였다.

자룡은 그 느낌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간직하고 싶어서, 사람들을 피해 구석으로 숨어들었다.

삼 년여 전, 현덕과 친해진 계기가 되었던 그날과 비슷한 자세였지만 엄연히 달랐다. 그때의 자룡은 손에 닿지 않는 꿈에 좌절하며 울었지만, 지금의 자룡은 끝내 그 꿈에 한 발자국 더 다가섰다.

‘이 세상에 신이란 게 있다면 내게 꽤나 미안했던 것 같아.’

무교인 자룡은 현덕을 보며 신의 존재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동안 번번이 데뷔 한 걸음 앞에서 막혔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신은 실패하고 또 실패하는 자신을 보고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걸까. 아니면 아득바득 계속 덤벼대는 자신을 보고 기특한 마음이 들었던 걸까. 그래서 현덕을 자신에게 보내준 게 아닐까.

자룡은 자신을 이 길로 이끌어준 사람을 바라보았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내젓는, 세 살 어린 동생이었다. 모든 걸 포기하려고 할 때 끝까지 따라와 막아주었다. 언제나 믿고 존경한다는 눈빛으로 바라봐주었다.

그런 현덕으로 인해 자룡은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다시 꿈을 향해 뛰어갈 수 있었다.

“모두 네 덕이야.”

자룡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자신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현덕에게 전해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현덕은 마음 한구석이 간질간질해지는 기분에 멋쩍게 웃었다.

“저도 형이-”

주저하던 현덕이 부끄러움을 떨치고 무어라 말하려 할 때였다.

“양파머리, 수경 생활 끝내고 이젠 흙에 묻혔나 보지?”

잠깐의 감동을 와장창 무너뜨리는 목소리가 현덕의 목소리를 덮었다.

둘 다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았기에 자룡은 한숨을 닮은 숨을 내쉬었다. 하아. 현덕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자룡은 현덕의 등 뒤를 넘겨다보았다. 현덕도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주민 형?”

현덕이 그를 불렀다.

“너, 내가 한 살 형이라고-”

자룡은 부리부리한 눈을 부라리며 연장자의 위엄을 세워보려고 했지만 무리였다. 주민은 자룡에게 요만큼의 관심도 없었다. 그의 두 눈은 오직 현덕에게 꽂혀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자룡과 현덕이 맞잡은 손을 노려보고 있었다.

주민은 방금 무대에서 내려왔는지, 아직 숨이 거칠었다. 찰랑거리는 소재로 만든 흰 와이셔츠는 땀에 젖어 있었다. 혼자 조명을 등 뒤에 달고 다니는지 어두침침한 틈바구니에서도 홀로 빛났다. 성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웠고, 약간은 야한 느낌까지 났다.

그런 외모를 하고서는.

“양파한테 형이라고 부르는 취미 없어.”

이딴 말밖에 할 줄 몰랐다. 우주민이란 놈은.

“야, 우주민.”

자룡이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주민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정말로 진절머리내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어휴, 이놈을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고 궁리하는 느낌이었다.

예전에, 그러니까 주민이 처음 TE엔터테인먼트에 왔을 때부터 자룡은 주민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민이 싸가지 없다며 항상 투덜댔다.

그랬던 자룡이 이제는 주민을 스스럼없이 대한다. 여전히 개싸가지라고 구박하지만 그 목소리에 온기가 담겨 있었다. 자룡은 주민을 친하게 알고 지내는 싸가지 없는 동생 정도로 생각하는 듯했다. 정작 자룡에게 물어보면 무슨 씨앗 같은 소리냐며 펄쩍 뛰겠지만.

현덕은 이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빙그레 웃었다. 주민은 현덕을 내려다보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 뭔가 굉장히 마음에 안 드는 걸 봤을 때 하는 행동이었다.

주민은 뚜벅뚜벅 현덕에게 걸어가 한 손으로 현덕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번쩍 들어 올렸다.

“어엇?”

현덕은 순간,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얼결에 자룡의 손마저 놓쳤다.

“뭐 하는 거예요.”

현덕이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항의했지만 주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민은 현덕을 되찾자마자 심히 만족하며 돌아설 뿐이었다.

“적당히 굴 파고 나와라. 진짜 땅에 뿌리 박힐라.”

자룡을 걱정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게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자룡은 그런 주민의 뒷모습을 보며 ‘허, 참.’ 한숨을 내쉬었다. 주민에게 붙잡혀 끌려가는 현덕에게 손을 흔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우주민 저 자식이 왔다고 그렇게 훅 가버리다니.”

자룡은 약간 섭섭했다.

언뜻 보기에 현덕은 주민에게 끌려가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현덕은 그냥 주민을 따라가는 거였다. 정말 싫었다면 반항하며 주민의 다리 사이를 발로 까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현덕은.

“언제 저렇게 친해진 건지.”

현덕이 주민에게 너그러워진 자룡을 신기해했듯 자룡도 주민과 현덕 사이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현덕은 자룡이 자신에게 섭섭해하는 걸 전혀 알지 못하고 자신의 허리를 잡고 놔주지 않는 주민의 나쁜 손을 찰싹찰싹 때리기 바빴다.

“이거 좀 놔봐요. 응?”

“왜?”

“왜냐니……. 지금 그 이유를 몰라서 묻는 거예요?”

현덕은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물었다. 바삐 뛰어다니는 스태프들과 무대에 오른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연습생들이 가득했다.

여긴 인적이 드문 놀이터도, 단 둘뿐인 호텔 방도 아니었다. 그런데 주민은 현덕의 허리를 한 손으로 휘감고, 현덕에게 꽉 붙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부담스럽건만. 주민은 음향 기계를 담아 놓는 커다란 철제 박스에 걸터앉아 아예 현덕을 등 뒤에서 껴안았다.

현덕의 등이 주민의 어깨에 닿았다. 주민의 두 손이 현덕의 허리를 감싸고 깍지를 꼈다. 그러고는 현덕의 등에 이마를 대고 문질렀다.

“뭐 어때. 남들이랑은 이보다 더한 짓도 했으면서. 왜, 나랑은 하면 안 돼?”

나직한 목소리가 현덕의 등허리를 타고 내렸다. 오싹하게 소름이 돋았다. 으으, 현덕은 일부러 우스꽝스럽게 신음을 내며 몸을 앞으로 구부렸다. 주민의 숨에서 벗어나려는 것이었으나 주민이 깍지 낀 손으로 현덕의 배를 끌어당겨 실패했다.

“어어?”

앞으로 한껏 쏠려 있던 현덕의 몸이 뒤로 휙- 넘어갔다. 현덕의 어깨가 주민의 어깨에 부딪쳤다. 주민의 어깨는 넓고 탄탄했다. 부딪치니 어깨가 얼얼하게 아려왔다.

“아, 뭐야. 피터 형보다 더 딱딱……어?”

생각나는 대로 내뱉으며 투덜거리던 현덕이 뭔가 깨달았다.

“설마? 내가 아까 무대 위에서 피터 형이랑 같이 있었다고 이러는 거예요?”

“그놈 뿐이 아닐 텐데?”

주민의 미간에 주름이 깊었다. 현덕은 손을 어깨 뒤로 넘겨 주민의 미간을 꾹꾹 눌렀다.

“맙소사.”

웃음이 나왔다.

‘우주민이 질투를 한다고? 피터 형한테?’

한 놈만이 아니라 말하는 걸 보니 준비나 자룡한테까지 질투하는 듯했다.

‘질투한다는 건 날 그마큼 좋아한다는 뜻이겠지?’

뭔가 쑥스러우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짜식, 귀엽기는.’

지금의 우주민은 고작 스무살이었다. 그게 새삼 실감 났다. 물론 풋풋한 설레임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중증이다, 나도. 나잇값도 못 하고.’

겉모습은 열여섯이라 하나 안에는 서른세 살의 영혼이 담겨 있었다. 서른세 살이 스무 살에게 질투 당하며 좋아나 하고 있다니. 자괴감이 들었다. 현덕은 우주민이 등 뒤에 있어 지금 자신의 표정을 못 보는 걸 다행으로 여겼다.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들은 현덕과 주민을 보고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앟았다. ‘어? 어? 어어? 게, 게이다! 우주민하고 김현덕이 붙어 있어요. 분위기가 뭔가 묘해요, 꼭 사귀는 거 같아요!’ 라고 소리치는 사람도 없었다.

현덕은 트라이 온 촬영 내내 준비, 피터와 많이 붙어 다녔다. 준비는 나무에 매달린 매미처럼 현덕만 보면 달려들었다. 덕분에 현덕이 누군가와 스스럼없이 붙어 있어도, 사람들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스킨십 참 좋아하네.”

“엄청 친한가 보네.”

그 정도로 생각할 뿐이었다.

스킨십을 현덕이 먼저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정작 소문은 현덕이 스킨십을 좋아한다고 났다.

다른 연습생 중에도 몇몇이 격 없이 스킨십을 하고 붙어 다니는지라 다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다만 그 우주민이 저러고 있다는 게 놀랄 일이라면 놀랄 일이었다.

“우주민, 저 개싸가지. 진짜 김현덕 연습생이랑은 친한가 보네.”

“몇 년 동안 계속 같은 회사에 있었으니. 친하겠지. 뭐, 자드래곤이랑도 야야, 하는 사이라던데?”

“자드래곤이 한 살 더 많지 않아? 근데 말을 튼 거야? 둘이 진짜 친한가 보네.”

“그래서 벌써 커플링도 있다잖아. 쩔어.”

그래 봤자 이 정도 선이었다.

남이 뭐라 떠들거나 말거나, 주민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주민에게 중요한 건 딱 김현덕 하나뿐이었다.

“아무튼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지, 미자. 응?”

오늘만 해도 벌써 넷이었다. 피터 윤이라는 능구렁이. 장준비라는 꼬맹이. 원소혁, 쭉정이. 땅에 파묻힌 것 같은 양파 한 알까지.

주민은 목울대를 울리며, 현덕의 뒷목에 대고 이를 갈았다. 등 뒤에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 있는 느낌이었다.

“아니, 아니에요. 절대 아니라니까.”

현덕은 바짝 긴장하여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주민은 같잖은 변명을 들었다는 듯 웃었다.

“미성년자면 미성년자답게 굴어. 사람 미치게 하지 말고.”

주민은 현덕을 꽉 움켜쥐었다.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다는 듯이.

‘김현덕, 널 정말 어떻게 하면 좋을까.’

주민은 속에서 천불이 날 지경이건만. 현덕은 ‘난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표정으로 주민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이지 잠시라도 눈을 떼려야 뗄 수가 없었다.

남의 품에서 울더니, 남을 덥석 안기까지 하고. 남과 눈빛을 교환하는 것도 모자라 남과 어두운 구석에서 단둘이 몸을 맞대고 숨어 있기까지 하다니.

생각만으로도 치가 떨렸다.

어떻게 손에 넣었는데. 어떤 마음으로 감히 손도 못 대고 지켜만 보고 있는데. 현덕 주변에 날파리가 꼬이는 걸 그냥 지켜만 봐야 한다니. 한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어리든 나이가 많든, 사람이든 채소든, 용납이 안 됐다.

겨우 현덕을 이 두 손안에 쥐었다. 그건 기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일이었다. 남은 삶을 통틀어 이런 기적이 또 나타날 수 있을까.

단언컨대 불가능하리라.

그렇기에 주민은 제 손안에 들어온 현덕을 누구에게든 빼앗길 생각이 없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실제로 온갖 짓을 하고 있지만, 물론 현덕 모르게.

‘차라리 어디 가둬두고 나만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음습한 생각이 늪처럼 주민을 잡아당겼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발밑에서부터 천천히, 가라앉았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현덕을 가둬두면 어떨까. 아무도 못 보고 오직 자신만 볼 수 있는 곳에.

오직 자신만 바라보고, 자신만 만질 수 있는 김현덕. 생각만으로도 짜릿했다. 하지만 그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오직 주민만 들을 수 있는 비명이었다.

‘싫어, 차라리 날 죽여. 싫어어!’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의 어머니였다. 언제나 아버지가 오면 굳게 닫히는 안방의 문, 그 안에서 들렸다.

격한 숨소리.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아버지의 목소리. 제발 그만 하라고 빌던, 울부짖던 어머니의 목소리. 비명. 그리고 울음. 하나하나가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되어 주민의 심장에 박혀 있었다. 살겠다고 숨을 쉴 때마다, 심장이 떨 때마다 유리 조각이 심장을 찔렀다.

그 조각들은 때때로 자신들의 존재를 알렸다. 그러면 늘 숨이 막혔다. 지금처럼.

주민은 자신이 숨을 안 쉬고 있다는 걸 깨닫지도 못한 채 숨쉬기를 멈췄다. 몸이 긴장하여 가늘게 떨렸다.

그때였다.

“형, 주민 형?”

현덕이 주민을 흔들어 깨웠다.

‘미자답게’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며 주민을 마구 구박하려 했다. 그런데 주민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놀라 그를 붙든 것이었다.

현덕이 주민을 붙잡았다. 그 바람에 주민은 다시 숨을 쉴 수 있었다.

주민은 느릿하게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떴다. 눈앞에 현덕이 있었다. 아무 경계심 없는 말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김현덕. 어쩜 이럴 수 있을까. 주민은 두려운 감격에 사로잡혔다.

“갑자기 왜 그래요. 말해도 대답도 없고, 표정도 이상해지고. 혹시 어지럽거나 그래요?”

현덕이 주민의 품 안에서 몸을 반대로 돌렸다. 주민의 깍지 낀 손은 현덕의 배 대신 등에 닿았다. 마른 허리가 고작 한 줌이었다.

주민은 당연하게 손을 느슨하게 풀어 두 손으로 현덕의 등을 받쳤다. 손바닥에 현덕의 등허리가 닿는 것만으로도 안도감이 들었다. 그 기분이 표정으로 드러났다.

“형, 주민 형?”

현덕은 주민의 머리를 쓸어 올리며 주민을 바라봤다. 그 까만 눈엔 오직 걱정과 염려만이 담겨 있었다. 그 눈을 보노라면, 조금 전까지 하던 망상이 토악질 나도록 부끄러워졌다.

주민의 머릿속에서 현덕은 세상과 단절되어 어딘가에 갇혀 있었다. 오직 주민만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다른 사람을 만나지도 못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고, 포옹도 할 수 없었다.

주민은 그런 곳에 갇혀 평생 불행했던 사람을 알았다. 결국 그 사람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두 눈으로 지켜보기도 했다. 그랬으면서 잠시나마 그런 곳에 현덕을 가둘 생각을 했다. 이렇게 자신을 걱정해주는, 아무것도 모르는 김현덕에게 그딴 짓거리를 하려고 했다.

“주민 형. 괜찮아요?”

현덕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주민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꿈에라도 생각지 못할 순수였다.

‘응. 괜찮아.’

그렇게 대답해야 했다. 그래야 현덕은 안심할 테고, 자신의 음습한 속 따위는 영영 모를 테니까.

그런데,

‘아니, 하나도 안 괜찮아. 힘들어 죽을 거 같아.’

속마음을 그대로 토해내고 싶었다.

‘아무도 만지지 마. 아무한테 웃어주지도 마. 나만 봐. 나한테만 웃어줘. 내 옆에만 있어. 내 손만 잡아줘. 나 말도 다른 사람한테도 널 보여주지 마. 날 알게 하지 마. 나만 알게 해줘. 나한테만 널 줘. 널 어디다 가둬두고 싶어. 나만 볼 수 있는 곳에 두고 나만 보고, 나만 사랑하게 만들고 싶어. 가지고 싶어. 안고 싶어. 입 맞추고 싶어. 널 만지고 싶어.’

감정이 들끓었다. 뱃속에 뜨거운 불덩이가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토해내고 싶은데. 그럴 수 없었다. 혹여나 현덕이 다칠까 봐. 지금처럼 자신을 봐주지 않을까 봐, 두려워서.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 웃어주지 마. 네가 이렇게 빛나는 존재라는 걸, 다른 사람들까지 알아차리게 하지 말아줘.’

주민은 차라리 현덕의 앞에 무릎을 꿇고 사정하고 싶었다.

둥근 이마, 까만 눈썹. 눈꼬리가 살짝 처진 눈. 눈을 내리깔 때마다 파르르 떨리는 긴 속눈썹. 발갛게 달아오른 뺨. 살짝 마른 입술. 가는 턱 선과 이어지는 더 가는 목. 말 할 때마다 오르락내리락 움직이는 목젖, 마른 쇄골까지.

얼룩 하나 없이 새하얀 사람이 주민의 품 안에 다소곳이 안겨 있었다.

아직도 꿈인 것 같아서, 현덕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과 팔에 닿는 현덕의 온기를 느끼고야 이게 환각이나 망상이 아니라고 안심할 수 있었다.

“윽, 아픈데.”

현덕이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속삭였다. 그러면서도 주민의 손을 쳐내고 도망가려 하지 않았다. 주민은 그런 현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다 이런 사람이 내 눈에 띈 걸까.

어쩌다 내 손에 잡힌 걸까.

불쌍하게도.

이건 현덕에게 있어 너무 큰 불운이었다. 불행이었다. 반대로 주민에게는 기적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내 주민의 삶에는 이런 사람이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터였다. 그래서 주민은 필사적이었다.

어떻게 하면 계속 이렇게 현덕과 함께 있을 수 있을까.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자칫 한 발이라도 잘못 내디디면 영영 헤어 나올 수 없는 그런 미궁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기분이었다.

아무에게도 도움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이건만.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조언을 바랐다. 정말이지 간절히 매달려서라도 정답을 얻고 싶었다.

현덕과의 관계에서 주민은 항상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그건 지도 없이 미궁을 걷다 갑자기 굳게 잠긴 문 앞에 서게 된 것과 같았다.

문을 열기 위해 미궁 곳곳에 여러 열쇠가 놓여 있겠지만, 주민은 언제나 단 하나의 답만 쥐고 있었다. 그런데 그건 절대적인 오답이었다. 절대 선택해선 안 되는 답이라는 걸,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신들의 삶을 통해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정답은 뭘까. 정상적인 답은 뭘까.

주민의 손엔 절대적인 오답뿐이었다. 그러니 주민은 최고의 사기꾼이 되어야 했다.

주민은 두려움에 떨며 고민했다. 하지만 언제나 주민에게는 답이 없었다. 그 절대적 오답을 숨기고, 제 손엔 아무것도 없다는 듯 빈손을 벌리고 있으면, 착한 김현덕은 순진하게도 그걸 믿어주었다. 그리고 주민이 단 한 순간도 가져본 적 없었던 것을 손에 쥐여 주었다.

웃음과 뜨거운 숨이 섞인 입맞춤과 걱정스럽게 올려다보는 따뜻한 눈빛. 용기를 내 껴안아도 거절하지 않는 따뜻함. 그리고 서로의 몸을 맞대고 나누는 온기. 그 온기를 통해 느껴지는, 상대방의 마음.

현덕에게 손을 뻗을 때마다, 입을 맞출 때마다 주민은 지독한 겁쟁이가 되었다. 숨긴 오답을 발견한 현덕이 자신을 경멸할까봐. 밀어낼까 봐. 전력을 다해 자신을 거부할까 봐. 싸늘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밀어낼까 봐.

그래서 자꾸 현덕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신을 거부하지 않는, 자신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봐주는 현덕을 실감하기 위해서.

현덕은 항상 지금은 안 된다고, 진정하라고, 기다리라고, 주민을 밀어내곤 했다. 하지만 정말로 매몰차게 밀어내지는 않았다. 자꾸 여지를 주었다. 그래서 주민은 그 틈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건 살기 위한 본능과 같았다. 주민은 살기 위해 현덕에게 매달려 입맞춤을 구하고, 몸을 맞대는 걸 애걸복걸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주민이 약하디약한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약했으면 좋았을 것을. 안타깝게도 주민은 너무 위험했다.

두 손은 날카롭게 벼린 칼이었다. 영화 가위손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아니 그보다 더한 흉기였다. 그 두 손으로 현덕을 다치게 만들 수도, 붙잡아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둬둘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현덕이 자신을 이렇게 안아주고 걱정해주는 한, 절대 그래서는 안 됐다.

이 온기를 잃고 싶지 않았다. 현덕을 어머니처럼 만들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현덕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지금처럼, 아니 지금보다 더욱더 많이. 할 수 있는 한 영원히.

현덕을 독점하고 싶은 마음과 현덕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주민의 안에서 격렬하게 들끓었다. 두 마음은 함부로 섞이지 않았다. 극명하게 둘로 나뉘어 치열하게 치고받을 뿐이었다.

주민의 몸은 전쟁터가 되었다. 몸뚱이와 심장은 금세 너덜너덜해졌다. 하지만 현덕에게 티를 낼 순 없었다.

주민은 한숨을 쉬듯 긴 숨을 내쉬며 현덕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역시 힘들죠. 수고했어요. 춤 진짜 잘 추던데.”

현덕은 주민이 무대를 끝내고 힘들어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제게 기대는 주민을 감당해내며 그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주민은 그 손길이 언제나 미치도록 좋았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얄미웠다.

어쩜 이렇게 태평할 수 있을까. 김현덕이어서 가능한 건지, 아니면 본래 평범하게 자란 사람들은 다 이런 건지. 어느 쪽이든 현덕이 야속한 건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역시 어디다 가둬버려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순수하고 착한데, 계속 밖에 내놨다가 누군가 채가면 어떡하지?’

현덕을 독점하고 싶은 마음이 속살거렸다. 언제 들어도 끝내주게 달콤한 유혹이었다. 하지만 주민은 그따위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현덕이가 나한테 웃어줄 거 같아? 아니, 절대로 안 그럴 거야. 더는 날 좋아해 주지 않을 거야. 날 향해 웃어주지 않을 거야. 나를 싫어하겠지. 진심으로 밀어내겠지. 그걸 내가 버틸 수 있을까?’

반대쪽 마음이 주민을 붙들었다.

‘아니, 절대로 못 버텨.’

주민은 그 마음 쪽으로 기울었다. 아직은 이쪽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힘든 거 알면, 알아서 잘 좀 해봐, 미자야. 응?”

주민은 현덕을 꼭 끌어안으며 애써 제 마음을 갈무리했다. 주민의 속을 전혀 모르는 현덕은 하하, 웃었다.

“내가 미자라서 뭐요. 내가 미자인 거랑 주민 형이 지금 힘든 게 무슨 상관이라고?”

애끓는 남의 속도 모르고 이런 말이나 하면서.

***

세 팀의 무대가 모두 끝나고도 객석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관객들은 자신들이 응원하는 연습생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했다. 무대 뒤에서 그 소리를 듣고만 있어야 하는 연습생들은 몸이 달았다. 어느 쪽도 쉽게 진정될 것 같지 않았다.

결국 메인 PD는 연습생들을 다시 무대 위로 올려주었다. 연습생들은 메인 PD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우르르 무대 위로 올라갔다.

“꺄아아악! 자룡악!”

“준비야!”

“현덕 혀엉-!”

“피터 잘생겼다아아아악!”

연습생들을 본 관객들은 목이 쉬어라 소리를 질렀다. 연습생들은 객석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한 사람씩 돌아가며 마이크를 쥐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관객들은 들고 온 작은 인형과 꽃, 플래카드를 무대 쪽으로 던졌다. 신기하게도 모두 다 연습생들의 발치에 떨어졌다. 실수로라도 연습생들의 몸에 맞은 건 단 하나도 없었다.

“혹시 투포환이나 배구 같은 거 하시는 분들이 단체로 온 게 아닐까여?”

준비는 그게 꽤나 신기해 보였는지 현덕의 팔에 매달려 감탄했다.

“그만큼 너랑 우리를 좋아해 주시는 거야. 혹시라도 다칠까 봐.”

“좋아하면 명중력이 낮아지는 건가여?”

“그 반대지. 절대로 안 맞추려고 명중력이 올라가는 거지.”

현덕은 준비의 포슬포슬한 파마머리를 쓰다듬으며 답했다. 준비와 현덕을 좋아하는 팬들은 핸드폰을 최대한 줌 인 하여 둘의 모습을 찍었다.

한차례 짧은 인사 타임이 끝난 뒤, 관객들은 스태프들의 안내를 받아 퇴장했다. 연습생들은 마지막 한 명이 나갈 때까지 무대 위에 서서 끝까지 관객들을 배웅했다.

객석이 텅 비자 객석이 너무 크게 보였다. 삼백이 아니라 삼천 명이 다시 와도 채우지 못할 듯 보였다. 연습생들은 심장 한쪽이 행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스태프들은 그런 연습생들의 감정을 헤아려줄 여유가 없었다. 연습생들을 그대로 무대 위에 세워둔 채 객석을 정리했다. 플라스틱 의자들을 착착 열 개, 백 개씩 겹쳐 쌓고는 구석으로 밀어냈다. 그러고는 연습생들에게 무대 아래로 내려오도록 했다.

연습생들은 자연히 팀별로 모였다. 한 팀이 된 지 2주 정도 되었을 뿐이지만, 관계는 더없이 끈끈했다. 트라이 온 1부에서 기숙사 생활을 했을 때보다 더 가까워 보였다.

굳이 스태프들이 말을 하지 않아도 리더가 제일 앞에 서고, 다른 연습생들이 둘씩 줄지어 그 뒤에 섰다. 연습생들이 정렬하고 그 주변으로 카메라와 조명들이 몰려들어 자리를 잡고 나니, 유진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녀는 오늘 내내 진행을 보느라 목이 상한 것 같았다. 뒤쫓아 올라온 매니저가 보온병에 든 액체를 컵에 따라주니, 그걸 호호 불어 마셨다. 그러는 새 막내 PD가 무대 위로 올라가 유진에게 두 번 접힌 종이를 전달했다.

둘은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연습생들은 모두 목을 길게 빼고 그 둘을 올려다보았다.

유진은 꼼꼼하게도 마이크를 끄고 종이로 입을 가렸다. 연습생들은 둘이서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훔쳐 들을 수 없었다. 그저 오늘 무대의 결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거라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막내 PD와 매니저가 무대 아래로 내려가자 유진이 마이크를 켰다.

“여러분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세 팀 모두 무대 위에서 빛났습니다. 여러분이 최선을 다해 만든 무대를, 시청자분들께서 꼭 기억해주실 겁니다.”

유진이 매끄럽게 시작을 열었다.

그녀는 트라이 온 1부에서 그들을 지도해주었던 트레이닝 선생님들의 총평을 읊어주었다. 귀중한 조언이었으나 연습생들의 귀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면 이번 현장 투표의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드디어 연습생들이 기다리던 순위 발표가 시작되었다.

이번 주 금요일, 오늘의 무대가 방송된다. 그 방송 시간 동안 시청자들의 투표를 통해 팀과 연습생들의 최종 순위와 탈락자 세 명이 결정될 것이다.

그에 앞서 오늘은 삼백여 명 관객들의 투표가 진행되었다. 직접 현장의 무대를 보고,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되는 연습생에게 한 표를 던진 결과였다. 관객들은 입장하며 투표용지를 받았고, 세트장을 퇴장하며 입구에 놓인 커다란 함에 투표용지를 넣었다.

“총 이백구십 장의 투표용지가 회수되었습니다. 열 표는 기권이라고 봐야겠지요?”

유진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연습생들은 그 열 표가 아쉬워 한숨을 내쉬었다.

유진은 뜸 들이지 않고 바로 순위를 발표했다. 뜸 들이는 건 나중에 편집과정에서 PD가 할 터였다. 중간에 광고도 들어가고.

3표 이상 받은 연습생은 채 열 명이 되지 않았다. 1위는 108표를 받았다. 관객의 세 명 중 한 명이 1위 연습생을 뽑은 것이다.

연습생들은 웅성대며 1위를 했을 것 같은 연습생을 둘러보았다.

“자드래곤이겠지.”

“우주민 연습생 아냐? 이번엔 춤 좀 추던데.”

“아까 객석에 원소혁 이름 들고 있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어. 못해도 서른 명은 되는 거 같던데.”

“관객 중에 초등학생은 없어서 장준비는 아니겠네.”

꼽히는 사람은 자룡과 주민, 소혁 정도였다. 그 세 연습생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굳은 얼굴로 유진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오늘 현장 투표에서 1위를 한 연습생은 탈락 면제권을 받게 됩니다. 그 주인공, 그러니까 오늘 무대로 108표를 받은 연습생은-”

유진이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폈다. 막내 PD가 건네준 종이였다. 모든 연습생의 눈이 그 종이로 향했다. 유진은 종이에 적혀 있는 1등 연습생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오팀의 우주민 연습생입니다!”

아, 하는 탄식.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라는 감탄사. 그리고 박수가 쏟아졌다.

모두 부러워하며 주민을 돌아보았다. 오팀 끝에 서 있던 주민은 유진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딱히 기뻐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막상 마이크를 받고 카메라의 단독 샷을 받게 되자, 주민은 정말 감격한 사람처럼 굴었다. 어쩐지 눈가가 촉촉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다른 연습생들, 정말 멋진 무대를 보여준 다른 연습생들 말고 제가 1위를 하다니…….”

위팀 연습생들은 돌변한 주민의 모습이 기겁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주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위팀 연습생들과 시청자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그러던 중 자룡과 눈이 마주쳤다.

자룡이 우웩, 토하는 포즈를 취하며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룡은 주민이 되로 받으면 말로 준다는 걸 경험했으면서도 매번, 이렇게 덧없이 됫박을 휘둘렀다. 현덕이라면 웃으며 넘어갔겠지만 주민은 현덕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자룡 형에게 감사하고 싶습니다. 지금도 저렇게 절 응원해주고 있네요.”

주민이 싱긋 웃으며 자룡을 가리켰다. ‘자룡 형’에 매우 강력한 악센트가 들어갔다.

자룡은 한참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카메라가 모조리 주민을 향하고 있는 김에 장난을 친 것이었다. 그런 자신을 본 현덕과 준비가 함박웃음을 짓자 더 신이 나 오바하기도 했고.

주민이 ‘자룡 형’을 불렀을 때, 자룡은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려 하트 모양을 만들고 있었다. 물론 평범하게 하트를 날리는 자세는 아니었다. ‘네 정수리를 이렇게 쪼개버릴라. 얼른 내숭을 벗어 던지지 못해?’라는 표정이 곁들여진 것이었는데.

자룡은 그 모습 그대로 카메라에 찍혔다.

“헉!”

얼른 두 손을 내리고 표정을 갈무리했지만, 이미 찍힌 뒤였다. 당황하는 모습마저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다.

“진짜 고마워요, 자룡 형. 비록 지금은 서로 다른 팀이지만.”

주민이 자룡을 향해 상쾌하게 웃어 보이며 손 키스를 날렸다.

“우웩.”

자룡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허리를 접었다. 이번엔 시늉이 아니었다. 옆에 있던 조성환이 자룡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었다.

“그러게 저 또라이는 건들지 말라니까.”

성환은 ‘또라이’라는 단어를 한없이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서, 성환아. 마, 말조심. 그리고 리더님은…… 힘내세요.”

사의준이 성환을 타박하고는 반대편에 서서 함께 자룡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너 일부러 그런 거지!”

헛구역질을 멈춘 자룡은 주민에게 달려가려 했다.

성환과 의준은 그런 자룡을 막으며 기꺼이 사랑의 장애물 역할을 맡아 주었다. 주민과 자룡의 커플링이 더욱 공고해지는 순간이었다.

덕분에 연습생들은 탈락 면제권을 얻지 못했다는 서운함을 일찍 털어낼 수 있었다. 무대 위에 선 유진도 목이 아픈 것도 잠시 잊고 소리 내 밝게 웃었다.

그렇게 촬영이 마무리되고 두 번째 합숙 촬영이 끝났다.

***

이어지는 수, 목, 금요일은 별다를 게 없었다. 지난주에 비하면 심심하기까지 한 일상이 이어졌다.

현덕은 학교와 TE엔터테인먼트를 오가며 공부를 하고 춤과 노래를 연습했다. 자룡과 머리를 맞대고 다음 미션이 무엇일지 상의했다.

평범하다면 평범한 일상 속에서 현덕은 종종, 화요일에 경험했던 무대를 떠올렸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무대 위에서 데뷔 후보곡 ‘촉! 촉! 촉!’을 춤추고 노래 불렀던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 부분만 예리한 칼로 잘라낸 듯한 기분이었다.

다만 무대가 끝난 직후 느꼈던 그 엄청난 감정들은 아직도 생생했다. 그 감정들은 일상이라는 얇은 책갈피 속에 숨어 있는 노란 은행잎이었다. 예기치 않게 나타나 현덕을 놀래키고 또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다.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공부를 하다가도 그때의 기분이 떠올랐다. 칠판에 그득한 선생님의 필기를 공책과 프린트에 옮겨 적는데, 멀리서 환호성이 들렸다.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면 아무도 없었다.

몸이 0.5cm쯤 허공에 붕 떠 있는 것 같았다.

현덕은 혹시나 자신이 거만해지거나 싸가지 없어진 게 아닌가 걱정했다. 그래서 복도에서 선생님을 보면 더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학교 친구들의 사인 부탁도 조심스럽게 거절하고, 학교에서는 되도록 트라이 온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했다.

때때로 한 학년 위 선배들이 내려와 현덕을 찾고 무리한 부탁을 했다. 사진을 찍자거나 트라이 온에 출연한 다른 연습생들의 연락처를 물어보거나 했다. 그러면 현덕은 애써 웃으며 부드러운 말투로 거절했다.

“뭐야, 좀 떴다고 잘난 척하기는.”

“지가 진짜 연예인이라도 된 줄 알어.”

“야, 난 너 절대 안 뽑을 테니까 그런 줄 알아라.”

그들은 현덕이 자신들의 부탁을 거절하면 어김없이 이런 말을 내뱉고는 서둘러 떠나갔다. 현덕은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안심했다.

‘내가 거만해진 건 아니구나. 아직까지 잘난 척을 하거나 하지는 않는 거 같아.’

현덕은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멋대로 떠드는 소리를 들으면 그들이 한 말과 정반대로 생각했다. 그러면 대개 정답이었다.

이번 주는 유독 시간이 안 지나갔다. 빨리 금요일이 되고 토요일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현덕은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다시 금요일 저녁이 되어 트라이 온 본방송을 보게 되었을 때, 현덕은 그 생각을 후회했다.

‘그냥 아직 수요일 이었으면 좋겠다.’

현덕의 집은 난장판이 되었다.

“야야야야! 무조건 찍으라고, 김현덕!”

맹덕은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려 문자 투표를 강요했다.

“아니이~ 그러니까, 우리 아들이 김현덕인데, 암, 암. 그렇다니까.”

어머니는 소파에 앉아 하하 호호 웃으며 친구들과 동네 사람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아버지는 안 그런 척하더니 슬그머니, 동료들에게 문자를 넣었다. [내 아들이 김현덕이오. 투표 한 표당 막걸리 한 병.] 아버지 인생 최초의 부정 선거였다.

야단법석인 가족들 사이에 낀 현덕은 거실에 멀거니 앉아 광고가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방송이 시작되자 가족들은 현덕의 옆에 바싹 다가가 앉았다. 모두들 현덕보다 더 긴장해 마른 침을 꼴딱꼴딱 삼켰다.

현덕은 트라이 온 본방송에서 자신의 무대를 처음 봤다.

“오올- 가죽재키잇!”

맹덕은 무대 위에 선 현덕의 의상을 보고는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그 웃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거친 느낌으로 편곡된 ‘촉! 촉! 촉!’의 간주가 흘러나오고 중앙에 선 소혁이 딱, 딱, 캐스터네츠를 부딪쳤다. 그게 시작이었다. 현덕을 비롯한 나머지 연습생들은 그 자리에서 최대한 높이 점프했다. 준비가 튀어나와 백덤블링을 하고, 피터가 윈드밀을 하며 무대를 가득 채웠다.

서브 보컬 포지션을 맡은 현덕이 그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왔다.

TV 속의 현덕은 두 눈에 힘을 빡 주고 정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한쪽 입꼬리만 삐죽 올린 표정이,

“헐, 싸가지 없어 보여.”

현덕은 저도 모르게 말했다.

순둥한 김현덕은 거기 없었다. 우주민이 빙의했다고 해도 믿을 만한 김현덕이 거기 있었다.

TV 속 현덕이 정면을 노려보며 두 눈에 힘을 빡 주었다. 카메라를 바라보며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어 보이고는 돌아섰다. “꺄아아악!” 하는 효과음이 덧입혀져 있었다. 자막으로 터프, 섹시, 이딴 말도 안 되는 단어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

“…….”

“…….”

“…….”

툭. 어머니가 먹다 만 사과 조각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러고도 도로 주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커흠, 흠, 흠.”

아버지는 물 먹다 사례 들려 연신 헛기침을 하셨고,

“어…….”

맹덕은 눈만 껌뻑였다.

가족을 혼돈과 충격에 밀어 넣은 촉팀의 ‘촉! 촉! 촉!’은 금세 끝이 났다. 이어 피터와 껴안고 펑펑 우는 현덕의 모습이 이어졌다. 하지만 가족들 중 누구도 그런 현덕의 모습을 안쓰러워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맹덕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맹한 소리 하지 말라고 한마디 할 법도 하건만,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 혹시 우리 현덕이 쌍둥이였어요?”

“아니……었던 거 같은데…….”

어머니가 말을 흐렸다.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일란성 남자 쌍둥이를 낳았던 게 아닐까. 그런데 아침 드라마나 주말 드라마에 나올 법한 여차여차한 우연과 사연으로 아이 중 하나를 잃어버린 게 아닐까. 그것도 모르고 태평하게 살아왔던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방금까지 TV에 나와 무대를 씹어 삼킬 듯 날뛰던 김현덕의 모습을 설명할 수 없었다.

“아차, 투표. 투표.”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역시나 맹덕이었다. 맹덕은 얼른 핸드폰으로 켰다.

“아, 맞다.”

“참!”

아버지와 어머니도 얼떨떨해하면서도 투표를 했다.

현덕은 자기 자신에게 투표하는 대신 슬그머니, 폰으로 인터넷 창을 열었다. 그리고 자신이 잘 들어가는 여러 커뮤니티를 들어가 보았다.

*

본방 시청) 피디야~ 벌써 재밌다~~~~

이렇게 할 수 있으면서 지난번엔 왜 그랬던 거니!

현덕아!

데뷔 가즈아!!!!!!!!!!!!!!!

┕ 김PD가 이 글을 좋아합니다.ㅋㅋㅋㅋㅋㅋ시발 나도 조아

┕ 그래 이렇게만 하라고. 미친 그 잠깐을 귀신같이 찍어냈네. 클로즈업 오졌다

┕ 내 눈을 의심함ㅋㅋㅋㅋㅋ뭐야 화장품 피피엘 새로 들어온 거야? 얘 때깔이 왤케 좋아진 거야?

┕ 너무 짧아ㅠ 피디야 슬로우 모션 모르닝??

┕ 누가 움짤 좀 쪄줘……제발

*

본방 시청) 미친 김현덕 여태 어떻게 숨겼냐?

끼가 아주. 아주그냥……. ㅋㅋ……. ㅋㅋㅋ……. 우와 나 진짜 욕나올뻔?

엄마랑 같이 보고 있었는데 엄마가 쟤 누구냐고 물어봐서 김현덕이라고

지난주에 내가 좋다고 난리쳤던 걔라고 말해주니까 감짝 놀라셔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

┕ 오빠ㅠㅠ몰라ㅠㅠㅠ 멋있으면 다 오빠야ㅠㅠㅠ현덕이 오빠ㅠㅠㅠㅠ

┕┕ 멋있으면 다 오빠야22222222

┕ 누가 움짤 좀 쪄줘…….

*

후기) 카더라긴 한데…… 투표 안한 사람들도 좀 된대

내 친구가 트온 방송하는 곳에 다니는데

트온 담당은 아냐 그래서 건너건너 들은 건데

기밀 유지한다고 완전 철통보안이긴한데

아무튼 건너건너 듣기로는 현장 보러 간 사람들 중에 투표 안하고 간

사람들도 꽤 된다더라

그리고 상위권에 개몰려서 몰표로 정작 표 받은 연습생은 몇 명 없었대

왠지 내ㅅㅔ ㄱㄱl 한 표도 못 받았을 거 같아 엉엉엉ㅠㅠㅠㅠ

얼마나 무안하고 속상해쓰까ㅠㅠ

미아내ㅠㅠㅠ내가 어떻게 해서든 갔어야 했는데ㅠㅠㅠㅠ

ㅅㅂ 고작 300명을 뽑다니 이거 실화냐? 어? 제작진 실화냐고!

┕ 거기까지 가서 투표 안 한 사람들은 머야 대체

┕ 기권표도 나름의사표명이지 머

┕┕ 이게 무슨 선거를 안 할 자유 같은 소리야

┕┕┕ 한표가 아쉬운 상황에서 찍읈람없다고안찍는게말이되냐/아놔그럴거면가지말았어야지

┕ 내새끼 한표도 못 받았을 거같아ㅠㅠㅠㅠㅠㅠㅠ

┕┕ 내새끼도ㅜㅜㅜㅜㅜㅜㅜㅜ

┕ 내 연생 춤 한 번도 실수 안하고 개잘췄는데ㅠㅠㅠ 면제권 받을 수 있을까?ㅠㅠ

┕ 그럴 거면 나보고 대신 가라고 하지ㅠㅠㅠ

┕ 움짤 좀 쪄줘……

*

본방 시청) 저게 사랑이 아니고서 가능한 건가? (피터+현덕)

무대 끝나고 더기가 멍댕하게 서있으니까 피러가 껴안아줬어

피러가 안아주니까 그제야 더기가 막 울더라?

그거 보는데 왜 내맴찌쥬ㅠㅠㅠㅠㅠ

애가 을마나 맘고생이 심했으면 저럴까 싶어서ㅠㅠㅠ

ㅆㅂ 악플러들 다 죽어버려ㅠㅠㅠ

내가 트온 제작진놈들한테 김피디 놈한테 진짜 할많하안인데

이번에 변호사들 시ㅕ서 악플러 붙잡는 건 진짜 칭찬한다

아니 그게 중요한데 지금 중요한 건 아니고

피러랑 우리 더기ㅠㅠㅠㅠㅠ이게 사랑 아니면 먼가여ㅠㅠㅠㅠ

자기가 힘든데도 더기 안아주고 피러 품 안에서야 마음 놓고 우는

더기라니ㅠㅠㅠㅠㅠㅠ

┕ 이때싶???? 미자 건드리지 마라 좀

┕ 나도 좀 설렘 솔직히……완전히 멜로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구도 아녔나?

┕ 누가 움짤 좀 쪄줘…….

┕┕ 넌 왜 자꾸 모든 글에 이런 거 써? 하지 좀 마

*

본방 시청) 김현덕? 성형 수술 했어?

본방 시청)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어 들어왔다

본방 시청) 내가 지금 뭘 본거야 촉팀 개쩔어

본방 시청) 다시 보기 언제 떠?

본방 시청) 오늘의 리빙 포인트 : 잘생긴 넘은 징 박힌 80년대 가죽점퍼를 입혀도 잘생겼다

*

본방 시청) 준비야!!!!! 준비 오빠!!!!!!

멋있으면 오빠라고 누가 그랬냐 나 말리지마 오늘부터 준비는 내 오빠다!!! 준비 오빠!!!111111

┕ 백덤블링하면서 훌렁 셔츠 까지면서 하얀 배 드러나는데 주글뻔ㅠㅠ이런 누나라서 미안해ㅠㅠㅠㅠㅠㅠ

┕ 내가 살다 몇 달 전까지 초딩이던 애를 오빠라고 부르는 날이 오다니

┕┕ 횐님……. 멋있음……에 나이가……어디있겠읍니까……^^ 좋아하는 마음……그거면……충분하죠…….

┕ 진짜 레알 정말로 장래가 기대된다. 이번에 데뷔하든 못하든 진짜 준비는 무조건 성공할거야 무조건 무조건이야 내가 그렇게 만들거야ㅠㅠㅠㅠ

┕ 움짤 좀 쪄줘…….

*

본방 시청) 소혁아 내 불쌍한 아이야……이제야 데뷔를 하겠구나……

내 아픈 손가락……

이제야 빛을 발하는구나……

일단 면죄권부터 받자…….

┕ 네 무슨 죄를ㅈ ㅣㅅ고 오셨나여

┕┕ 내마음에불지른죄?

┕┕┕ 삑- 무죄입니다 면죄권을 받으실 수 없으시겠씁니다.

┕┕┕ 그러지 말고 하나만 줘봐여 그 탈락면죄권 저의 소혁이가 먼저 맛 봐야겠습니다.

┕┕┕ ㅋㅋㅋㅋㅋㅋㅋㅋ머하냐 너희ㅋㅋㅋㅋㅋ

┕ 얘 이번엔 하차 안 한다냐? 항상 데뷔한다는 소식만 들리면 죄다 하차한다고 그래서 원

┕┕ (이미지) 분위기 **내지 말고 ㄲㅓ Jㅓ

┕ 움짤 좀 쪄줘……

*

초 단위로 글이 올라오고 있었다. 현덕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글 읽기를 포기했다.

그 잠깐 새 눈이 뻑뻑해졌다. 핸드폰을 손에 든 채 눈을 부비니, 맹덕이 왜 투표 안 하고 딴 짓하냐고 현덕을 구박했다. 아예 현덕의 핸드폰을 빼앗아가 제 손으로 현덕에게 투표를 했다.

그러는 새 오팀의 무대가 시작되었다.

일찍 투표를 끝낸 부모님은 TV 속에 빨려 들어갈 듯 시청하고 계셨다. 특히나 어머니의 집중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꼭 맞잡은 두 손을 가슴팍에 두고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현덕은 어머니의 시선을 쫓아 TV를 보았다.

주민이 후렴구를 부르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바삐 친구들에게 문자를 보내며 투표하라고 강요하던 맹덕이 고개를 들었다.

“뭐야, 누구?”

맹덕이 TV를 돌아보더니,

“아, 우시영 아들. 어쩐지. 노래 겁나 잘하네.”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가 어머니께 등짝을 얻어맞았다.

“어딜! 우시영 아드님이 노래하는데, 시끄럽게!”

맹덕을 때리는 순간에도 어머니의 두 눈은 주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어쩌면 어머니는 조금 전, 자신이 아니라 주민을 찍었을지도 모른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뭐, 어때.’

딱히 섭섭하진 않았다.

현덕은 옆에서 뭐라 뭐라 말하며 매달리는 맹덕을 쭉- 옆으로 밀어내고 TV에 집중했다. 세 팀의 데뷔곡 후보 무대와 연습생들의 인터뷰. 이어지는 평가의 시간까지. 며칠 전 겪은 일들이건만. TV로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저 현장에 속해 있을 때는 보지 못했던 것도 새삼 보였다. 자룡과 주민. 누구보다 두 사람의 모습에 가장 먼저 눈에 와 박혔다.

번번이 데뷔 기회를 놓치고 절망했던 자룡이 저렇게나 빛나고 있었다. 좀 더 노력해야 한다고, 내 노력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자책했던 자룡의 말은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 노력이 부족한 사람이 어떻게 무대 위에서 저만큼 빛날 수 있단 말인가.

주민도 이전과 달랐다. 현덕이 처음 주민의 노래를 들었던 건 TE엔터테인먼트의 주간 평가에서였다. 그때 주민은 홀로 스탠딩 마이크 앞에서 노래 불렀다.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또한 자신의 옆에 누구든 가까이 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 가시를 뾰족하게 세운 고슴도치 같았다.

그랬던 주민이 어정쩡하게 춤을 추며, 팀의 다른 연습생들과 어울렸다. 처음 노래하는 주민을 봤을 때만 해도 이런 모습은 상상도 못 했건만. 어느새 주민은 변해 있었다.

‘남들이 보기에 나는 얼마만큼 달라져 있을까.’

할 수만 있다면 평생 사법고시 준비만 했던 자신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지금의 김현덕을 보여주며 묻고 싶었다. 행복해 보이냐고. 얼마나 달라진 것처럼 보이느냐고.

트라이 온 방송이 끝난 뒤, 현덕은 침대에 누워 눈을 꾹 감았다. 내일을 위해 잠을 자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현덕은 결국 다시 핸드폰을 켜 팬들이 올리는 글을 읽었다. 그러다가 새벽이 다 되어서야 뜨끈뜨끈한 핸드폰을 쥔 채로 제가 잠드는 줄도 모르고 스르륵 잠들었다.

***

방송 다음 날.

세 번째 촬영이 시작되었다. 연습생들은 서울 외곽의 호텔이 아니라, 도심의 케이블사 방송국으로 모였다. 처음, 트라이 온 1부를 찍은 그 세트장이었다.

촬영 전, 모든 연습생은 기밀 유지 각서를 썼다. 이미 트라이 온 1부 촬영 전에 작성했건만, 다시 한번 각서의 내용을 상기시키려는 것이었다.

현덕은 일찌감치 서류에 사인을 하고 세트장으로 올라가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세트장은 각 팀의 연습생들이 모여 앉을 수 있도록 의자가 놓여 있었다. 각 의자에는 연습생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현덕은 피터의 옆자리였다.

조금 시간이 지나니 연습생들이 우르르 몰려 올라왔다. 준비는 슬쩍 자신의 자리를 확인하고는 울상을 지었다. 현덕과 제일 멀리 떨어진 자리였다. 그 모습마저도 카메라에 고스란히 찍혔다.

‘여기 제작진들은 성격이 나빠.’

현덕은 카메라를 등지고 준비를 달랬다. 현덕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었다.

준비는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갔다. 의자에 적힌 이름을 무시하고 현덕의 옆자리에 앉은 것이다.

“음……. 준비야, 곧 피터 형 올 텐데. 그 전에 원래 자리로 가야 하지 않을까?”

“피터 형보고 제 자리에 앉으라고 하면 되져.”

“피터 형이 섭섭해할지도 모르잖아.”

“그 형은 그래도 되여.”

준비는 입을 삐죽이며 현덕에게 매달렸다. 현덕은 헛웃음을 지으며 준비를 끌어안았다. 어째서인지 현덕은 준비에게 마음이 약했다.

‘난 나중에, 혹시라도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절대로 되면 안 되겠어.’

준비를 만나고서야 처음으로 자신에게 없는 재능을 깨달았다. 멀리해야 할 직업군도 알게 되었다. 준비는 현덕의 마음을 모른 채, 그저 현덕의 옆자리에 앉은 게 좋아 싱글벙글했다.

그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없던 화도 가라앉았다. 현덕은 포슬한 준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빙긋, 웃고야 말았다. 하지만 준비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제일 늦게 세트장 위로 올라온 피터가 제 자리를 차지한 준비를 발견한 것이다.

피터는 준비에게 공격할 기회 따위는 주지 않았다. 현덕에게 찰싹 붙어 있는 준비를 보자마자 두 팔로 준비를 번쩍 들었다. 원래 준비의 자리 옆에 앉아 있는 연습생에게 던지듯 건네주었다. 종잇장처럼 몸이 가벼운 준비는 여기에서 저기로 훌쩍, 넘어갔다.

“뭐야, 이런 게 어딨어! 내려줘여.”

“절대 내려주지 마세요. 꼭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준비의 요구와 피터의 당부는 전혀 달랐다. 얼결에 준비를 건네받은 연습생은 당황했다. 일단 리더인 피터의 말을 따라 준비를 붙들었지만, 그 덕에 준비의 원망 어린 눈초리를 감당해야 했다.

준비의 섭섭함과 어느 연습생의 고난도 피터를 막진 못했다. 피터는 당당하게 현덕의 옆자리에 앉았다.

“……형, 꼭 그렇게까지?”

현덕은 어린 준비를 마냥 안쓰럽게만 보았다.

때문에 준비와 관련된 일이면 항상 물러졌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현덕은 피터의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준비의 편을 들었다.

“글쎄, 다른 건 몰라도 이제 이건 양보 못 하지.”

평소라면 웃고 넘어갔을 피터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 자리가 그렇게 중요한 자리인가요?”

현덕은 고개를 갸웃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현덕과 피터가 앉아 있는 곳은 세트장의 정중앙이 아니었다. 왼쪽 끝부분이었다. 가운데는 위팀이, 반대편 오른쪽에 오팀이 앉아 있었다.

중앙 자리라면 모를까, 왼쪽 끝인 현덕과 피터의 자리는 별로 중요한 자리가 아니었다. 적어도 현덕이 보기엔 그랬다.

“어. 아주 중요해. 네 옆이잖아.”

그래서 피터가 이렇게 수작질을 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러는 중에도 시간은 흘렀다.

스물아홉 명의 연습생들이 모두 세트장에 올라왔지만 촬영은 바로 시작되지 않았다. 대기시간이 길어지자 연습생들은 슬그머니 몸에 단 마이크 전원을 끄고 수다를 떨었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촬영이 삼 개월이 넘어가니 연습생들은 슬슬, 촬영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현덕과 피터도 기꺼이 그 분위기에 합류했다.

둘은 뒤쪽에서 자신들을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쏘아보는 준비를 애써 모른 척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화요일 날 무대에 올랐던 이야기, 수요일부터 오늘까지 어떻게 지냈는지 안부를 묻는 대화, 정도였다.

별 이야기를 하지 않는데도 자꾸 웃음이 났다. 피터와 대화를 나누는 게 즐겁고 재미있었다. 현덕은 웃음이 나오면 나오는 대로 웃었다.

“……고마워.”

피터가 툭, 말했다.

“네?”

현덕은 눈을 껌벅이자 피터는 현덕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요 근래 피터는 복권에라도 당첨된 사람처럼 기쁨이 넘쳤다. 별거 아닌 일에도 기뻐했다. 그 모습이 보기 좋긴 했지만 슬슬 걱정도 되었다.

“형은 요즘 툭하면 저한테 고맙다고 하네요. 정작 고마운 건 저인데요. 형이 우리 팀의 리더라서 정말 다행이에요. 계속해서 우리 팀 리더를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현덕은 그렇게 말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려면 일단 이번 결과가 좋아야 하니까. 우리 팀이 꼭 1위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글쎄. 난 2위를 노렸는데.”

“네?”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우주민 연습생은 못 이길 테니까. 우승은 분명 오팀에서 가져갈 거야. 우주민이 하드캐리하는 거지.”

피터는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펼쳐진 현상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말했다.

트라이 온 2부는 팀전이기도 하고 개인전이기도 하다. 각 팀의 각 연습생들이 받은 표를 합산해 팀의 순위를 정한다. 그렇기에 연습생 한 명 한 명의 인지도가 중요한 변수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규칙의 묘미가 통하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

다 우주민 탓이었다.

지금 트라이 온은 누가 뭐래도 우주민의 원탑쇼였다. 촬영 이전부터 납치 소동극. 촬영 중에는 기가 막힌 춤 실력과 어머니를 향한 고백. 주민은 계속 화제성을 이어가고 있었다.

노출이 많이 되니 인기는 급상승했다. 지금 주민의 인기는 웬만한 다른 연습생들을 씹어 먹을 정도였다. 대형 기획사 출신인 소혁과 오랜 연습생 생활로 다져진 멘탈과 실력을 가진 자룡이 뒤쫓고 있지만, 주민의 화제성을 뛰어넘는 건 솔직히 무리였다.

그러니 우주민의 오팀이 1등을 하는 건 따논 당상이었다. 결국 이번 미션은 2, 3위 싸움이었다. 부동의 1위조 아래 2, 3등의 아웅 다툼.

피터가 보기에 촉팀은 소혁 외에 별다른 패가 없었다. 연습생들은 다들 고만고만했다. 그나마 오렌지 삼총사가 인지도 있지만 다른 팀에도 그만한 연습생들은 차고 넘쳤다.

“이번 미션에서 내 목표는 2등이었어. 아무도 떨어지지 않게.”

피터는 말하다 말고 픽- 웃었다.

“사실 끝까지 가다 보면 결국 아무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되지. 결국 우리 중 대부분은 떨어질 테니까.”

피터는 촉팀 연습생들을 돌아보았다. 2주간 큰 말썽 없이 잘 따라와 준 고마운 연습생들이었다. 피터는 그들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알았다. 지난 2주간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도 알았다.

함께 연습하고, 떨어져 있을 때도 꾸준히 연락을 취하며 무대를 만들었다. 피터는 팀의 리더가 되어 그 모든 과정을 직접 이끌었다. 이방인이 아니라 그들 중 일부가 된 것이다. 출연자 중 한 명이면서도 제삼자인 척 물러서 있던 지난날과는 달랐다.

그럴 수 있었던 건 모두 현덕의 공이었다. 정작 현덕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피터를 보고 있지만.

“그런데, 나중에 가서 우리가 다 떨어지더라도 너는 꼭 붙었으면 좋겠어. 끝까지.”

”피터 형,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다들 함께-”

“그래, 다들 함께 올라가면 좋겠지.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건 불가능하잖아? 그러니까 너라도, 계속해서 살아남아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어.”

현덕이 듣기에 거북한 말이었다. 이런 말을 다른 사람도 아닌 피터가 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럼, 형은요? 형은 끝까지 살아남고 싶지 않은 거예요?”

“난 이제 만족해.”

피터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난 여기 나온 목표를 거의 다 이뤘거든. 원래 목표에서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그는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하고 행복해 보였다.

“형, 저기-.”

현덕은 그에게 뭐라 말하려 할 때였다.

“자자, 촬영 들어갑니다. 마이크 꺼 놓으신 분들, 다 켜주시고요. 앞에 카메라를 봐주세요.”

메인 PD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연습생들은 허둥지둥 마이크를 켰다. 현덕과 피터는 그 분위기에 휩쓸려 서로의 시선을 놓치고 촬영에 끌려들어 갔다.

그렇다고 직전에 나눈 대화를 깡그리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현덕은 피터의 말을 곱씹었다. 후련한 듯하면서도 어딘지 그늘진 피터의 표정이 도무지 눈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연습생들의 앞에 MC 유진이 나타났다. 연습생들은 뜨거운 박수로 그녀를 맞이했다. 유진은 이 자리에서 순위를 발표하고 탈락자를 선정하겠다고 말했다.

연습생들은 바짝 긴장했다.유진은 평소처럼 뜸을 들이지 않았다. 속전속결. 빠르게 순위를 발표했다.

1위는 피터의 예상대로 오팀이었다. 압도적인 표 차였다. 2, 3등을 한 팀의 표를 합쳐도 1위보다 작았다. 현장 투표 1위였던 우주민이 가진 탈락 면제권은 소멸되었다.

이후 2, 3위 팀을 발표하는 대신, 각 연습생들의 순위를 발표했다. 역시나 우주민이 1등이었다. 뿐만 아니라 오팀 연습생들은 모두 상위권이었다. 제일 낮은 순위가 15위였다.

위팀에서는 자룡의 순위가 제일 높았다. 2위였다.

촉팀의 현덕은 11위, 준비는 8위, 피터는 17위였다. 소혁은 16위였다. 설사 팀이 3등을 한다고 해도, 탈락하지는 않을 안정권이었다.

20위 밖 하위권에는 위팀과 촉팀의 연습생들이 고루 섞였다. 하위권에 속한 연습생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제 어느 팀이 2위이고 3위인지가 중요해졌다. 3위를 한 팀에서 순위가 낮은 3명의 연습생이 탈락한다.

“제발!”

현덕은 두 손을 꼭 움켜쥐며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현덕을 돌아봐 주지 않았다.

팀 순위가 발표되는 순간,

“우와아아아악!”

위팀은 함성을 지르며 서로 얼싸안았다.

위팀이 2위, 촉팀이 3위였다. 매우 근소한 차이였다.

자룡은 바닥에 엎드려 오열했다.

자룡은 매우 성실한 리더였다. 성실함은 그만큼의 부담을 등에 지웠다. 조별 순위 1위가 발표된 순간부터 자룡의 표정은 어두웠다. 자신의 개별 순위가 발표돼도 얼굴색은 달라지지 않았다. 조별 순위 2, 3등을 발표할 때는 깍지 낀 두 손이 눈에 띌 정도로 떨렸다.

자신의 팀이 2위라는 발표를 듣고 나서야, 자신의 팀에서 누구도 탈락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자룡은 마음을 놓았다.

위팀 연습생들은 자룡의 주변으로 몰려 함께 눈물지었다. 다들 불타는 열정을 가진 자룡에게 휩쓸려 험난한 2주를 보냈다. 때론 자룡의 스파르타식 일정에 괴로워하였으나, 오늘의 결과를 보고는 모두 자룡에게 고마워했다.

반면 촉팀은 순식간에 초상집 분위기가 되었다.

“아…….”

누군가 내뱉은 한탄이 모두의 마음을 대변했다. 그걸 시작으로 하위권 연습생 3명이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현덕이 달라붙어 춤을 가르쳐주었던 연습생도 탈락이었다.

주민만큼은 아니지만 춤에 영 재능이 없는 연습생이었다. 현덕은 주민을 가르쳐주듯 안무 동작을 하나하나 쪼개 가르쳐주었다. 연습생이 완전히 익힐 때까지 계속 가르쳐주고 또 가르쳐주었다.

연습생은 미안해하며 항상 현덕의 눈치를 봤다. 현덕은 그런 연습생에게 단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다. 현덕이 보기에 연습생은 주민에 비하면 춤의 천재였다. 뭐, 어느 연습생이든 주민과 비교하면 천재가 아니겠냐마는.

연습생은 지방에 살아 합숙 연습 이후에는 혼자 떨어져 나머지 연습을 해야 했다. 연습생은 자신이 연습한 영상을 촉팀 단톡방에도 올리고, 또 현덕에게도 개인적으로 전송했다.

현덕은 준비, 피터와의 연습이 끝난 후 밤늦게라도, 혹은 너무 졸려 확인하지 못하고 잠들면 아침에 일어나서라도 꼭 그 연습생에게 연락을 했다. 그리고 연습생이 어려워하는 동작을 다시 체크해주었다. 인터넷 강의를 찍듯 안무 동작을 핸드폰 동영상으로 찍어 보내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름 정이 들었건만. 딱 무대를 한 번 함께 해보고는 영영 이별하게 되었다.

현덕은 그 연습생을 바라보며 먹먹한 감정을 느꼈다. 연습생 또한 현덕이 꽤나 각별했는지, 현덕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그러더니 끝내 현덕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트렸다.

“고마웠어. 정말 고마워. 덕분에 처음으로, 무대 위에서 자신 있게 춤을 출 수 있었어.”

“…….”

현덕은 아무 말 없이 연습생을 꽉 안아주었다. 심장을 칼로 베어내는 듯 아팠다.

그렇게 트라이 온 2부의 첫 무대가 끝났다.

위팀은 10명.

오팀은 10명.

촉팀은 6명이 생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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