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권-1. 도원결의 (25/36)

다시 한 번, 이번엔 5

다시 한 번, 이번엔

5

두고

목차

1. 도원결의

2. 무대 아래에서

3. 무대 위

4. Twin

5. 한 걸음

6. 외전 : 적벽거리 잔혹사

1. 도원결의

피터는 자신이 한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었다. 첫날, 모두에게 말한 스케줄대로 팀을 굴렸다.

모범생은 모범생을 알아본다고, 현덕은 한 번 정한 스케줄을 칼같이 지키는 피터에게 만족하며 피터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쉴 때는 푹 쉬었고, 연습할 때는 연습했다.

피터는 연습 시간 중간중간에 쉬는 시간을 배치했다. 그리고 쉬는 시간에는 철저히 쉬도록 했다.

오전 연습 중 소혁이 머리를 감싸 쥐고 쓰러졌다. 두통이 심해서 어지럽고 헛구역질이 난다고 했다. 제작진은 급히 소혁을 병원으로 이송했다. 정말로 고통스러워 보였기에 촉팀 연습생들은 모두 그의 무사 귀환을 빌었다. 그와 친하든 친하지 않든, 그에게 좋은 감정이 있든 악감정이 있든, 아픈 사람을 두고 나쁜 마음을 먹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소혁은 병원을 다녀온 후 처방받은 약을 먹고 촬영장의 보건실로 갔다. 오늘 하루 동안 연습하지 못할 거라고 했다. 촬영 스태프에게서 소혁의 상태를 전달받은 촉팀 연습생들은 동요했다. 피터는 연습생들을 달래며 연습을 이어나갔다.

한 번, 팀 분위기에 금이 가니 촉팀 연습생들은 별것 아닌 일에도 흔들렸다. 자신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몰아치는 오팀과 벌써부터 미친듯한 실력을 보여주는 위팀. 그런 상대팀들이 비해 자신들은 한참 부족해 보였다. 연습량마저.

촉팀 연습생들은 자신들이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죄책감에 휩싸였다. 그건 죄책감을 가장한 불안과 초조였다. 연습생들은 피터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밖에 못하는 거야.’

‘우릴 쪼아서 밤을 새서라도 연습하게 해야지.’

‘리더가 너무 우유부단하고 게을러. 이러다가 우리 팀이 꼴등을 하면 어떡하지? 우리 중에 세 명이 탈락된다면, 내가 포함될 지도 몰라.’

‘자기야 인기가 많으니까, 설령 우리 팀이 꼴찌를 해도 이번엔 떨어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해서 저러는 거겠지?’

연습생들은 쉬는 시간마다 옹기종기 모여 불안에 떨었다.

“거기, 쉬라고 했을 텐데요. 당장 바닥에 대자로 누워서 눈 감고 숨만 쉬십시오. 말하지 마세요, 힘 빠지니까.”

피터는 그런 연습생들을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그들의 불만을 풀어주는 대신, 힘들다고 하지 않는데도 억지로 눕혀서 십 분간 쉬게 했다. 차라리 그 십 분간 더 연습하겠다는 연습생들의 반항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쉬는 시간에 한해서는 절대 굽히지 않는 폭군이었다.

촉팀 연습생들은 한 시간에 한 번씩, 다른 팀이 열성적으로 연습하는 소리를 들으며, 숨만 쉬고 있어야 했다. 다들 촉팀만 너무 여유롭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점심 식사를 한 후 오후 연습 때 여지없이 부서졌다.

오전 연습을 마친 세 팀은 전투적으로 점심 식사를 끝낸 후 오후 연습에 돌입했다. 당연히 오전의 열정은 멀어지고, 춘곤증이 그 빈 자리를 노렸다.

배가 빵빵한 상태에서 안무 연습을 하다 배가 아프다고 드러눕는 연습생들도 있었다. 노래 연습을 하다 꾸벅꾸벅 조는 연습생도 속출했다. 졸음을 견디지 못하고 벽에 기대, 기둥을 껴안고 잠시 잠드는 연습생들도 여럿이었다.

다들 지칠 법했다. 위팀의 리더 유호나 오팀의 리더 자룡은 그런 연습생들을 너그럽게 봐주었다. 안 봐주고 싶다고 안 봐줄 수 있는 배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픽픽 쓰러져 잠드는 상황이 속출했으니까.

하지만 촉팀의 피터는 아니었다.

“스케줄대로 합니다. 우리가 스케줄 짤 때, 언제 낮잠 시간을 계획했나요? 그런 적 없었지 않습니까? No plan, no sleep.”

촉팀의 오후는 오전과 똑같았다. 피터는 스케줄에 딱딱 맞춰 연습생들을 몰아쳤다.

피터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한 채로 연습생들을 일으켜 세웠다. 졸면 깨웠다. 또 졸면 또 깨웠다. 수건을 찬물에 적셔다가 뒷목에 대주기까지 했다.

꾸준히, 같은 속도로.

그것이 촉팀의 리더, 피터의 방법이었다.

한 시간을 연습하면 십 분을 쉬었다. 연습생들은 오전과 달리, 조금 더 쉬고 싶다고 애원했지만 피터는 오전과 마찬가지로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연습 중간중간, 휴식 시간을 가졌기 때문에 연습생들은 쓰러질 정도로 힘들진 않았다. 그러니 꾀병을 부릴 수도 없었다.

오후에 이어 밤 연습까지. 촉팀은 피터의 지도 편달 아래 정해진 스케줄을 모두 소화해냈다. 촉팀 연습생들은 하루 종일 꾸준히 같은 집중력을 유지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경험했다.

밤 10시가 되어 피터가 연습 종료를 선언하자, 연습생들은 만세를 부르짖었다.

“독재자!”

“고문 리더!”

“혹시 군대에서 교관 같은 거 했어요? 빨간 모자 같은 거 쓰구요.”

“웃는 게 더 무서워…….”

“그동안 본성을 숨기고 있었던 거야. 분명해.”

연습생들은 두려움에 떨며 숙소로 도망갔다. 감히 피터의 그림자도 밟지 않으려 했다.

피터는 제게서 멀어지는 촉팀 연습생들을 보며, 말없이 안경을 위로 올렸다. 오늘, 눈이 뻑뻑하다며 렌즈 말고 안경을 쓰고 온 터였다.

안경알이 형광등 빛을 반사해 번뜩였다. 입가에는 사악한 미소가 어렸다.

“으으. 겁나 사악해 보여여. 드디어 각성한 건가 봐여. 디아블로 같아여.”

준비가 진절머리를 내며 현덕의 뒤로 숨었다.

“형, 제가 저런 대마왕이랑 같은 방을 써여. 밤마다 일찍 자라고 억지로 막 재우고 그래서 놀지도 못 해여. 자고 일어나 연습하고 자고 일어나 연습하고. 이게 뭐예여, 형 방에도 못 놀러 가고여.”

준비는 이제야 현덕에게 매달려 투덜댔다.

연습 중에는 이렇게 이야기 나눌 틈도 없었다. 현덕과 준비는 각자 팀 연습생을 두셋씩 맡아 안무를 가르쳐줘야 했다. 잠깐 짬이 나 대화라도 나눌라치면 피터가 다가와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 그래서인지 준비의 불만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현덕은 준비와 피터 사이에서 누구의 편도 들지 못했다. 연습이 끝나고야, 자신에게 매달리는 준비를 다독여줄 수 있었다.

현덕은 준비와 함께 피터를 기다렸다가 함께 숙소로 올라갔다. 피터는 내일 스케줄을 다시 한번 점검하고는 심히 만족했다.

“완벽해. 내일도 오늘처럼 오차 없이 진행할 수 있을 거 같아.”

도망간 촉팀의 다른 연습생들이 들었다면 비명을 내질렀을 만큼 무서운 소리였다.

“좀 더 쪼여야 하는 거 아니에여? 내일이 우리 이번 주 합숙 마지막 날인데.”

준비는 피터를 대마왕이라고 부르면서도, 연습에 관해서는 진지했다. 오늘 스케줄도 현덕과 함께 무난히 소화했던지라, 좀 더 강도를 올리자고 제안했다.

“아니, 이 정도가 적당해. 다른 팀원들이 못 버틸 거야.”

피터는 고개를 내저었다.

촉팀에는 중소 기획사 소속 연습생들이 몇 명 있었다. 그동안 제대로 된 트레이닝 한 번 못 받으며 시간을 흘려보냈다고 울며 인터뷰했던 게 방송을 타서, 시청자들의 마음을 아리게 만들었던 연습생들이었다.

그들은 트라이 온 1부 촬영을 하며 체계적인 트레이닝을 받고 빠르게 성장했다. 그러나 그건 이전 상태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인 수준이었다. 그들은 제대로 트레이닝 받고 온 연습생들에 비해 여전히 부족했다.

체력과 지구력은 단기간에 성장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열정도 체력이 뒤따를 때 꽃 피을 수 있는 것. 그들에겐 지금의 스케줄도 벅찼다. 당사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그런 거 같아요. 이 정도만 유지할 수 있어도, 결과가 나쁘진 않을 거 같아요.”

“하긴. 오전에는 힘이 남아돈다고 징징대더니, 오후에는 아주 죽으려고 하던데여.”

현덕과 준비는 피터의 말에 수긍했다. 아쉬워도 어쩔 수 없었다. 트라이 온 2부는 철저히 팀전이니까.

팀 안에서 개인적으로 튀면 시청자 표를 많이 받아 상위권에 오를 수 있다. 그러면 설사 팀이 꼴등을 한다 해도 탈락을 면할 수 있다. 현덕과 피터, 준비 정도면 그런 드라마를 노려볼만 했다. 어느 정도 인지도를 가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셋 중 누구도 개인플레이를 하려하지 않았다. 인지도 있는 상위권 연습생의 여유라고 삐딱하게 볼 수도 있겠으나, 세 사람의 생각은 그보다 단순했다.

한 팀으로 묶인 이상, 팀원들과 함께 발맞추어 멋진 무대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팀 전체가 탈락하지 않기를 바랐다.

세 사람은 함께 숙소로 올라갔다. 피터와 준비가 함께 쓰는 방에 먼저 도착했다. 현덕이 그들을 배웅하려 하니 준비가 현덕에게 달려들었다.

“현덕이 형 방에 가서 조금만 더 얘기하다 자면 안 되여? 같은 팀이면 모해여, 계속 연습만 하면서 놀지도 못하고.”

“어딜? 내일 또 연습하려면 일찍 자야 해.”

피터가 준비를 잡아채 번쩍 들어 올렸다.

“아우, 왜에! 오늘은 하나도 안 피곤하다니까여? 진짜루! 진짜!”

준비는 허공에 들려 팔다리를 마구 휘저었다. 짧은 산책 후 난 아직도 달리고 싶다고 포효하는 새끼 비글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래, 그래. 안 피곤하니까 얼른 자자. 힘을 아껴야지. 자, 현덕이한테 잘 자라고 인사하고.”

피터는 애완견의 지랄맞음에 익숙해진 주인이었다. 발버둥 치는 준비를 능숙하게 옆구리에 끼고는 현덕에게 손을 흔들었다.

“현덕 형, 나 좀 데려가여!”

준비가 애절하게 외치며 두 손을 뻗었다.

“피터 형 말 듣자. 우리 리더잖아.”

현덕은 웃음을 터뜨리며 준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헉, 배신자!”

“다 널 위해서야. 어른 말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니까?”

현덕이 자신을 편들어주자 피터는 더욱 자신만만해졌다. 준비가 울먹울먹한 표정을 지으며 현덕을 올려다보았다. ‘정말로 날 버릴 거야?’

현덕은 차마 그렇다고 말하지 못하고 손만 흔들었다. 그렇게 피터와 준비를 배웅하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등 뒤에서 준비의 서러운 비명이 들리는 것 같아서 뒷덜미가 간질간질했다.

‘피곤하네…….’

피터와 준비, 둘과 함께 있을 때는 힘든 줄 몰랐건만. 혼자 남으니 온몸이 축- 처졌다. 새삼 하루치의 피곤이 양쪽 어깨를 짓눌렀다. 현덕은 네발로 기는 건지 두 발로 걷는 건지 긴가민가한 상태로 걸었다. 막 방문 앞에 다다랐을 때였다.

“여, 김현덕이.”

피곤 따위 한 방에 날려버리는 상쾌한 비타민이 현덕을 반겼다. 벽에 기대서 있던 자룡이 현덕을 발견하고는 씩 웃어 보였다.

“자룡 형!”

현덕은 반가운 마음에 얼른 자룡에게 달려갔다. 막 씻고 왔는지, 녹색 머리가 젖어서 착 가라앉아 있었다. 입고 있는 옷도 트레이닝복이 아니라 추리닝 바지와 흰색 반팔 티셔츠였다. 맨발로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손에는 커다란 검은 봉지를 들고 있었다.

“형, 연습은요?”

“어제오늘 너무 무리했나 봐. 팀 연습생들이 너무 힘들어해서 오늘은 좀 일찍 끝냈어. 대신 내일 밤새우기로 하고.”

자룡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지쳐서 겨우 여기까지 걸어온 현덕과 다르게 자룡은 생생해 보였다. 지금 당장 연습실에 내려가 꼬박 여덟 시간 동안 춤을 추라고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였다. 참으로 괴물 같은 체력, 더 괴물 같은 열정이었다.

“그럼 형도 쉬지, 여긴 어쩐 일이에요.”

“어쩐 일이긴, 너 얼굴 보러 왔지. 이야기도 좀 하고.”

남아도는 힘을 주체 못하고 놀러 온 것이었다. 현덕은 종이를 찢고 나온 듯한 이 열혈 청춘 스포츠물 소년 만화의 남주인공 같은 자룡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형은 진짜 아이돌이 되어야 해요. 근데 아이돌 말고 뭘 해도 성공할 사람이에요.”

“너야말로. 내가 너한테 항상 하고 싶은 말이거든?”

자룡이 쑥스러워하며 현덕의 목에 팔을 둘렀다. 헤드락을 걸듯 가볍게 힘을 주고 팔을 흔들었다. 아구구, 아구구. 현덕은 엄살을 부리며,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전까지 힘들어 죽을 것 같았던 기분이 싹 사라졌다. 꼭 자룡에게 전염된 기분이었다.

현덕은 자룡을 제 침대에 앉혀두고 씻으러 들어갔다. 빨리 샤워를 하고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밖으로 나오니, 자룡이 봉지에서 주섬주섬 과자와 음료수를 꺼냈다.

“한 잔 할까?”

이온 음료를 들고 살랑살랑 흔들어 보이며 씩- 웃었다. 현덕은 방금 양치한 것도 까먹고 얼른 자룡에게 달려갔다.

야식, 특히나 짭짤한 과자와 단 음료수는 몸매와 얼굴의 부기를 관리해야 하는 아이돌 연습생에게는 독이었다. 하지만 하루 종일 춤추고 노래해야 하는 연습생에게 최고의 에너지 회복 영양 공급원이기도 했다.

이제 숙소에 촬영 카메라도 없으니, 들킬 염려도 없다. 왜 얼굴이 부었냐고 스태프들이 묻는다면 연습이 너무 힘들어서 푸석해졌다고 하면 될 일이었다.

자룡과 현덕은 주저 없이 과자 봉지를 뜯었다. 바닥에 과자를 잔뜩 벌려 놓고 캔 음료로 건배를 하며, 둘만의 과자 파티를 벌였다.

“싸가지는 언제 오냐?”

자룡은 빈 침대를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언제 맹수가 출몰하냐고 사육사에게 물어보듯 조심스러웠다.

“한참 있다가요. 그 팀 리더 형이 단단히 마음먹었나 봐요.”

현덕은 기꺼이 자룡에게 맞춰주었다. 남들이 들을까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거기 리더, 꽤 센 거 같던데. 아주 딱 걸렸네. 이번엔 지 마음대로 못 하겠지.”

“그런 거 같아요.”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자룡은 고소해 죽겠다며 너무 좋아했다. 대파 머리에서 양파머리로 진화한 한 살 위 형, 자룡은 주민에게 미운 정이 많이 들어 있었다. 주민이 누군가에게 붙잡혀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에 하루의 시름을 잊었다.

주민이 늦게 돌아온다니, 자룡은 마음 놓고 본격적으로 판을 벌였다. 현덕은 적극 협력했다. 고작 이틀 떨어져 있었는데도 서로에게 할 말이 너무 많았다.

“아우, 원소혁. 진짜,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데.”

자룡은 룸메이트인 소혁에게 원한이 깊었다. 어젯밤 내내, 별것 아닌 일로 싸웠다며 투덜댔다.

“……그런데, 아프다고 오늘 연습 빠졌다며. 뭐야? 무슨 일이야?”

그러면서도 소혁을 걱정하며 안부를 물었다. 그 부리부리한 눈을 껌뻑이며 물으니 대답을 안 할 수 없었다. 아이돌이 아니라 형사나 변호사를 해도 될 것 같았다.

“그 성질머리에 머리가 안 아픈 게 더 이상하겠다. ……근데, 많이 아프대?”

자룡은 소혁이 아픈 걸 고소해 하면서도 걱정했다.

한동안 소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어 악플에 대해서도, 갑자기 툭 튀어나온 변호사단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룡과는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편했다.

자룡은 텅 빈 자신의 숙소 방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현덕도 자룡과 함께 있는 게 즐거워서 굳이 돌아가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금방 자정이 되었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자룡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맹수가 출몰했다.

주민이 파김치가 되어 돌아왔다. 내내 유호에게 시달리면서도 제 성질머리를 드러내지 못해 심기가 매우 불편한 상태였다. 오늘도 현덕이 자신의 침대에서 잠자고 있을지 모를 거라는 덧없는 희망을 품고, 바삐 걸어 숙소로 돌아왔건만.

지금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될 삐죽삐죽한 녹색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당연하게도 주민은 몹시 화가 났다.

“뭐야.”

“뭐긴, 니 형이다.”

자룡이 현덕의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아 심드렁하게 말했다.

주민의 눈썹이 꿈틀댔다.

“어……. 오늘도 고생 많았어요.”

현덕이 둘 사이에 끼어들어 보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주민은 성큼, 안으로 들어오더니 자룡을 발로 떠밀었다.

“양파머리, 이제 그만 가지?”

“왜 이래? 난 너 보러 온 거 아니다? 현덕이 보러 온 거지.”

자룡은 아예 현덕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는 친분을 과시하듯 으스댔다. 그 모습을 본 주민의 눈이 싸늘해졌다. 덩달아 방 분위기도 싸하게 가라앉았다.

“어, 어어. 형. 씻어야죠. 일단 씻고 나오세요. 응?”

현덕은 벌떡 일어서 주민을 껴안았다.

현덕이 자룡의 팔을 밀치고 제게 오자 주민의 눈가가 풀어졌다.

“현덕아-.”

하지만 그 행복은 잠깐이었다. 주민이 두 팔로 현덕을 껴안으려 하자 현덕은 얼른 주민의 뒤로 돌아가 등을 떠밀었다.

“자, 씻어요. 씻고 자야죠?”

현덕은 주민의 등을 떠밀었다.

“어?”

주민이 맥없이 밀리다,

“야, 김현덕.”

이를 갈며 현덕을 불렀다.

“아, 안 들린다. 안 들려.”

현덕은 못 들은 척하며 주민을 욕실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몸을 반쯤 욕실 안으로 집어넣어, 자룡이 못 보는 틈에 주민의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

날 서 있던 주민의 눈이 순간, 댕그래졌다.

꽤나 앳되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새삼 우주민이 스무 살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요즘 주민이 작정하고 치근덕대니 그 페이스에 휘둘려 어쩔 줄 몰라 했지만. 그래도 현덕의 안에는 서른세 살 김현덕이 들어가 있었다. 때때로 어리게 구는 주민을 보노라면 마음이 한없이 너그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싸가지 없고 변태 같은 우주민도, 이렇게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는 우주민도, 모두 다 현덕이 좋아하는 우주민이었다.

“깨끗이 씻고 나와요. 알았죠?”

현덕은 주민에게 상냥하게 당부하고는 욕실 문을 닫았다. 부디 주민이 이성을 잃지 않고, 밖에 자룡이 있다는 걸 기억하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현덕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욕실 문을 붙잡고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다행히 주민은 욕실 문을 부수고 나오지는 않았다.

안쪽에서 물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고야 현덕은 안도하며 자룡에게 돌아왔다.

“저 싸가지는 오랜만에 봐도 싸가지 없네. 넌 쟤랑 어떻게 같이 자냐. 나보다 네가 더 고생인 거 아냐?”

자룡이 새우깡을 씹으며 투덜댔다.

“아니에요. 말만 저렇게 하지 착해요, 착해.”

현덕은 자룡에게 음료수 캔을 건네주며 웃어 보였다.

문 하나를 두고, 자룡이 있는데 주민에게 먼저 뽀뽀했다. 여차하면 자룡과 싸움이라도 한판 뜰 기세인 주민을 달래려는 임기응변이긴 했지만. 아무튼 뽀뽀는 뽀뽀였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새삼 얼굴에 열이 올랐다.

현덕은 차가운 음료 캔으로 볼을 문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부끄러워서 차마 자룡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착하긴 개뿔.”

자룡은 다행히 아무것도 눈치 못 채고, 음료수를 꿀꺽꿀꺽 마셨다.

주민은 현덕의 말대로 깨끗이 씻고 나왔다. 자룡을 발견했을 때만큼 화가 나 있지는 않았지만, 계속 돌아가라고 자룡을 갈궜다.

“그래? 그렇게 싫다 이거지? 그럼 어쩔 수 없지. 나 오늘, 여기서 같이 잘래.”

욱한 자룡은 아예 여기서 자고 가겠다고 선언했다.

“뭐?”

주민은 못 들을 걸 들은 사람처럼 반응했다.

“오늘 나도 여기서 잔다고.”

자룡이 또박또박, 다시 말해주었다.

“…….”

주민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지금 당장 자룡은 즉사했으리라.

하지만 다행히 하늘은 주민에게 그런 초능력까지 내려주진 않았다. 신은 아직 인간을 멸종시키고 싶지 않은 듯 했다.

주민의 태도를 본 자룡은 더욱 자신의 의지를 굳혔다. 아예 자신의 방으로 가서 이불과 베개를 들고 왔다. 그사이 현덕은 어떻게든 주민을 진정시켜보려 애썼으나 의미 없는 노력이었다. 자룡이 자신의 베개를 현덕의 침대에 놓으려고 하자, 주민은 자룡의 멱살을 잡으려 했다.

“안 돼, 절대 안 돼. 당장 거기서 내려와.”

“왜 니가 된다 만다, 야. 정작 현덕이는 가만히 있는데.”

자룡이 현덕의 침대 위에 올라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치 현덕아, 나랑 같이 자도 되지?”

자룡이 현덕에게 물었다.

“전 상관없는-”

현덕은 무심코 대답하려다가, 옆에서 쏟아지는 무시무시한 기운에 눌려 입을 닫았다. 주민이 이글이글 불타는 눈빛으로 현덕을 쏘아보고 있었다.

“어……. 안, 되나?”

“당연히 안 되지.”

주민이 삐딱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왜 안 되는데?”

자룡이 바득바득 항의했다.

“너 자꾸 까먹는 거 같은데, 내가 형이다. 응?”

“양파가 어떻게 인간의 형이 될 수 있다는 거지?”

“야, 자꾸 양파, 양파 하지 마! 저번에 1부에서 니가 그렇게 말하는 거 방송 타서, 내가 얼마나 곤란해졌는지 알아? 너 때문에 인터넷에서는 다 나보고 양파라 그러잖아! 어니언! 어니언 드래곤! 자드가 어드가 돼버렸다고!”

자룡이 포효했다.

“아! 그거, 저도 많이 봤어요.”

현덕은 눈을 반짝이며 자룡의 말에 반응했다.

“자니언과 주민 소년 관찰 일기!”

“으아악! 하지 마, 하지 마!”

자룡이 침대 위에서 뒹굴며 괴로워했다. 괴로워하는 자룡과 달리 현덕의 표정이 밝았다.

“뭐야, 그게.”

주민은 미간을 찌푸리고 현덕을 바라봤다. 자룡이 괴로워하는 걸 보고는 뭔지 알아는 두자고 생각하는 듯 했다.

“음…….”

현덕은 어떻게 설명해줘야 그 예쁜 팬아트를 잘 설명해줄 수 있을까 고심했다. 촬영이 시작되기 전 핸드폰 등 전자기기를 모두 제작진에게 제출했기 때문에, 팬아트를 보여줄 수 없는 게 안타까웠다.

현덕은 트라이 온 2부가 시작되기 전까지 자신뿐 아니라 자룡이나 주민에 대한 글을 많이 검색해보았다.

자룡과 주민, 둘을 검색하면 항상 ‘트라이 온, 김현덕’을 검색할 때보다 새 글이 많았다. 볼 것도 풍성했다.

주민이 자룡을 ‘양파머리’라고 부르고, 자룡이 주민을 ‘싸가지’라 부르는 게 몇 번 방송을 타더니, 꽤 인기를 얻었다. 그 장면은 클립으로 잘리고, 움짤로 만들어져 인터넷에 퍼졌다.

유튜브에서는 주민과 자룡이 함께 있는 것처럼 편집된 동영상이 트라이 온 관련 동영상들 중 최상위권 조회 수를 기록했다.

반응이 좋자 트라이온 제작진들은 즉각 반응했다. 미방영 촬영분을 인터넷에 풀며, 두 사람이 함께 나온 영상을 브로맨스 느낌이 나게 편집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동영상은 언제나 화제성이 높았다.

팬들은 방송을 보고 즐기는데 그치지 않고, 팬아트를 만들어 올렸다. 현덕은 트라이 온 관련 인터넷 게시물을 검색하다가 그런 작품들을 많이 보았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팬아트는 방금 말했던 ‘자니언을 키우며 관찰 일기를 쓰는 소년 주민 시리즈’였다. 관찰 일기 형식의 팬아트는 현덕 뿐 아니라 다른 팬들도 좋아해 인기가 많았다.

아기자기한 귀여운 그림체로 그린 팬아트인데, 거기서 자룡은 물컵에 담긴 양파로 나왔다. 주민은 그런 자룡에게 물 조리개로 물을 주고, 관찰일기를 쓰는 어린 소년의 모습이었다.

팬아트가 인기가 많아져, 양파 자룡은 ‘자룡+어니언’의 합성어인 ‘자니언’으로 불렸다. 원래의 예명인 자드래곤의 위상을 위협할 정도였다.

현덕의 설명을 들은 주민은 떨떠름했다.

“파란색 반바지 입은 주민 형 소년 버전 그림인데, 엄청 귀여워요.”

“뭐? 귀…… 여워?”

주민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주민이 생각하기에 이 세상에서 귀여워도 되는 건 김현덕뿐이었다. 그 밖에 다른 걸 귀엽다 생각해 본 적 없었고, 다른 놈의 귀여움 따위를 견뎌낼 인내심도 없었다. 자기 자신을 귀엽게 표현한 건? 끔찍, 그 자체였다.

주민은 자룡에게 성큼 다가가 베개를 빼앗으려 했다. 베개를 매우 패대기쳐 밟아버려야 그나마 메슥거리는 속이 진정될 것만 같았다.

“뭐야, 왜 이래. 저리 안 가?”

자룡은 주민에게 베개를 빼앗기지 않으려, 꽉 껴안았다. 베개 위에 턱을 대고는 주민을 노려보았다.

말다툼은 베개를 지키고 빼앗기 위한 몸의 대화로 번졌다. 주민 대 자룡, 자룡 대 주민. 배틀은 꽤나 치열했다.

현덕은 두 형이 투닥투닥 싸우며 괜히 힘을 빼는 동안 이 난관을 어찌 해결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대안을 마련할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은 현덕뿐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침대는 두 개뿐이다. 그런데 성질 더러운 우주민은 현덕과 자룡이 한 침대에서 자는 걸 싫어한다. 벌써 새벽 한 시가 넘었는데, 저렇게 다투는 걸 가만히 놔뒀다간 아예 날이 샐 때까지 싸울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적절한 해결책은?

현덕은 더없이 합리적으로 생각해 결론을 도출했다.

“그럼 자룡 형이랑 주민 형이 같은 침대에서 자는 건 어때요?”

“뭐? 싫어! 내가 왜 저 싸가지랑 같이 자?”

“김현덕, 제정신이야?”

주민과 자룡의 반응은 격렬했다. 아주 칠색 팔색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합리적이라 생각했던 대안은 누구의 동의도 얻지 못했다.

“그럼 어쩌죠?”

“내가 바닥에서 자면 잤지, 저 싸가지랑은 절대 같이 못 자!”

자룡은 격렬하게 자신의 뜻을 전달했다.

“저 양파머리가 너랑 같은 침대에서 자는 건, 절대 안 돼.”

우주민은 이를 갈며 살기를 뿜어댔다.

결국, 자룡이 두 침대 사이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눕는 걸로 결론이 났다.

“형, 차라리 제가 바닥에 잘게요. 형이 제 침대에서 자요. 형은 손님이잖아요.”

현덕이 말렸으나 자룡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자룡은 주민과 한 침대를 쓰는 건 상상하기조차 싫은 듯 했다. 현덕이 바닥에서 자는 건 더더욱 싫고. 그렇다고 베개와 이불까지 들고 왔는데 숙소로 돌아가기도 뭐했다. 쓸쓸히 물러서는 저를 보며 의기양양하게 웃어댈 주민을 생각하면, 설사 이불 없이 맨바닥에 눕더라도 반드시 오늘은 이 방에서 자야 했다.

현덕은 여러 번, 자룡에게 자신이 밑에서 자겠다고 말했으나 자룡은 요지부동이었다. 어쩔 수 없이 현덕은 침대에 누워 자룡 쪽으로 몸을 돌렸다.

“형, 안 불편해요?”

“불편하긴. 옛날에 연습실에서 밤새 연습하고, 이불 없이 가방 베고 잤던 적도 많아.”

자룡이 밝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현덕은 그런 자룡의 손에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래도, 자다가 추우면 위로 올라와요.”

현덕은 벽 쪽으로 바짝 붙어 반 이상 남은 침대를 탕탕 두드렸다.

“그래, 현덕아. 역시 너밖에 없-”

“안 되지. 그건 절대.”

주민이 자룡의 말을 싹둑 잘라 먹었다.

“걱정 마라. 내가 아무리 추워도 니 침대로는 안 올라갈 테니까.”

“난 잠귀가 밝아서, 내 곁에 다가오기만 해도 깨서 가만 안 둘 테니까. 그런 생각은 애초에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아씨, 안 한다니까! 안 한다고! 절대 너랑 같이는 안 자!”

자룡과 주민은 잠드는 순간까지 투덕거렸다.

현덕은 두 형의 말싸움 소리를 들으며 웃었다. 어쩐지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는 게 아니라 주민, 자룡과 여행을 온 것 같았다.

‘이렇게 셋이서 함께 있는 게 얼마만이지?’

함께 있는데도 그리움이 몰려들었다.

준비나 피터, 유호나 한승, 정모 등 여러 사람을 만나고 가까워졌지만, 그래도 현덕은 주민과 자룡이 제일 좋았다. 이 둘과 함께 있으면 시끌벅적하고 편했다.

셋이서 함께라면 두려울 게 없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나 이렇게 셋이서 치고받고 다투면서도 함께 헤쳐 나갔으니까.

‘이런 것도 좋네.’

현덕은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 없는 자룡과 주민의 말싸움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들었다.

현덕이 잠든 걸 먼저 알아차린 건 주민이었다. 자룡에게 매섭게 굴던 주민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뭐라 말하려는 자룡에게 조용히 하라며 눈치를 줬다.

“쉿.”

“왜- 아…….”

자룡도 현덕이 잠든 걸 보고는 얼른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무튼, 앞으로는 꼬박꼬박 형이라고 불러라.”

마지막까지 형으로서의 위엄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주민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시끌시끌했었던 게 거짓말처럼, 방 안은 금세 조용해졌다. 색색- 현덕의 고른 숨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자룡과 주민은 그 소리를 듣다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까무룩 잠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현덕은 설핏, 잠에서 깼다.

살짝 눈을 뜨니 아직 방 안이 어둑했다. 그리고 누군가 현덕을 뒤에서 끌어안고 있었다. 그 사람의 숨이 현덕의 머리 위에서 흩어졌다.

‘자룡 형? 자다가 올라온 건가?’

현덕은 잠에 취해, 더듬더듬, 손을 내렸다. 제 허리를 감고 있는 팔을 만져보았다. 단단하고 굵은 팔의 감촉이 더없이 익숙했다.

‘자룡 형이 아닌 거 같은데…….’

현덕은 뒤치락거리다 몸을 돌려 저를 껴안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방이 어둑하여 잘 보이지 않았다. 현덕은 손을 들어 얼굴을 만져보았다. 조각상처럼 뚜렷한 콧날과 입술이 손바닥에 닿았다.

주민이었다.

‘밑에 자룡 형도 있는데 이러면 어떡해…….’

잠결이라 그런지 화가 나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멍-했다.

‘안 돼, 들키면 안 돼.’

그 상태에서도 주민과 붙어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은 들었다. 현덕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주민은 잠든 와중에도 현덕을 놓지 않았다.

“저 화장실만 갔다 올게요, 잠시만요.”

현덕은 그런 주민을 다독였다.

잠든 주민은 꽤 얌전하여서 현덕의 말을 잘 들었다. 팔이 느슨해지자 현덕은 꼼지락꼼지락, 주민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주민은 현덕이 사라지자 허전한지 팔을 휘저었다. 현덕은 이불을 둘둘 말아 팔에 끼워 주었다. 주민은 그것이 현덕인 줄 알고 꽉 끌어안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났다.

예전에 언뜻 듣기로 불면증이 심하다고 했는데, 지금 모습만 보자면 불면증 같지 않았다. 숙면증이라면 모를까. 불면증의 ‘ㅂ’ 자도 없었다.

어제도 오늘도, 주민은 현덕의 옆에서 잘 잤다. 그게 자신 때문이라는 걸 현덕은 몰랐다.

어둠에 익숙해지니 주민이 좀 더 선명하게 보였다. 곤히 잠든 주민의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현덕은 한동안 멍하니, 침대에 앉아 주민의 자는 얼굴을 구경했다.

항상 주름이 잡혀 있던 미간이 평평했다. 꼭 감긴 눈의 속눈썹은 참 길었고, 콧날은 오뚝했다. 숨을 내뱉는 입술은 도톰하니 예뻤다.

얼굴은 갸름하나 선이 굵었다. 뺨에 젖살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닌데, 어딘지 모르게 앳되어 보였다. 주민의 30대 모습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싸가지 없는 표정과 재수 없는 말투를 걷어내면, 스무 살 청년만이 남았다.

만져보고 싶지만 참았다. 괜히 손댔다가 잠이라도 깨면 감당하기 힘들 것 같으니까.

아쉬움을 뒤로하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자룡을 밟지 않으려 조심조심 살금살금 걸었다. 현덕은 그렇게 비어 있는 주민의 침대로 갔다.

‘나랑 우주민이 한 침대에서 자고 있는 걸 자룡 형이 아침에 보면 놀라겠지. 그냥 내가 여기 와서 자는 게 좋을 거 같아.’

현덕은 잠결에 배시시 웃으며, 주민의 베개에 얼굴을 부볐다.

주민의 베개를 베고, 주민이 덥던 이불을 덮고 있으니 주민에게 안긴 기분이 들었다. 포근하니 좋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좋은 아이디어야. 하마터면 나 때문에 우주민이랑 자룡 형이 전쟁을 일으킬 뻔했잖아. 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 국가가 무너지고 지구가 무너지고 온 은하계가 무너질 텐데, 내가 이쪽으로 와서 자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 그럼 난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되는 건가…….’

그렇게 현덕은 다시 잠들었다. 바로 곯아떨어졌다.

잠시 뒤.

“아, 화장실.”

자룡이 용수철 튕기듯 벌떡 일어났다.

좀비처럼 비척비척 걸어 화장실을 다녀와서는 다시 바닥에 깔린 이불에 누우려다 멈칫. 부리부리한 눈을 껌벅이며 현덕의 침대를 바라보았다. 어두워서 착시 현상이 일어난 걸까? 현덕의 등이 만주 벌판처럼 넓어 보였다.

‘뭐지?’

자룡은 반대편 침대를 바라보았다.

주민의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은 또 등이 작아 보였다. 말랑하고 선이 가늘어 보인달까. 안고 자면 뜨끈뜨끈하니 기분이 좋을 거 같았다.

‘내가 잠이 덜 깼군.’

자룡은 비몽사몽 중에도 오른쪽 침대와 왼쪽 침대를 구분했다.

‘날 속이려 들어?’

한없이 아니꼬운 눈을 하고, 왜소해 보이는 주민의 등을 째려보았다.

“짜식, 싸가지만 없고 말지, 왜 자꾸 나를 반대하는 거야. 정작 현덕이는 괜찮다고 했는데.”

자룡은 잠결에 푹신한 침대에서 자고 싶다고 생각했다. 마침 주민도 푹 잠들어 있는 거 같으니 방해하지 못할 것 같고.

그리하여 자룡은 베개만 들고 현덕의 침대로 슬그머니 올라갔다. 푹신한 매트리스에 몸이 닿았다. 끄트머리에 살짝 누웠을 뿐인데, 굳어 있던 온몸이 쫙- 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역시 침대는 과학이야.’

자룡은 심히 만족하며 눈을 감았다. 잠드는 와중에 현덕이 돌아누워 자신을 꽉 껴안는 게 느껴졌다.

잠결에도 형을 알아보는 자세가 기특하기 그지 없었다. 저를 껴안는 품이 현덕 치고는 너무 크고 단단한 것에 대해서는 별다르게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 현덕이, 언제 이렇게 컸냐…….’

자룡은 그렇게 다시 잠들었다.

한편 주민은 자룡이 침대에 올라오기 직전, 제가 끌어안고 있던 이불을 내버렸다. 설핏 잠이 깼는데 품 안에 현덕이 없었다.

‘어디 있는 거야.’

현덕을 찾아 주변을 더듬었다. 그때 등 뒤에서 두툼한 온기가 찰싹 달라붙었다.

‘왜, 거기가 있어.’

주민은 몸을 돌려 제게 달라붙은 사람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약간 위화감이 들었다. 현덕의 허리가 딱딱하고 두꺼웠다. 덩치도 품에 다 들어가지 않을 만큼 컸고.

‘이상하네.’

주민이 눈을 떠 제가 껴안은 사람을 확인해보려 했다. 그런데 품에 안은 몸이 오들오들 떠는 게 느껴졌다. 이불 없이 잠들어서 추운 것 같았다.

파르르- 떨리는 몸이 안쓰러웠다. 주민은 제가 집어 던진 이불을 끌어다 덮어주었다.

‘김현덕이겠지.’

주민은 잠결에 아무 이유 없이 확신했다. 유호에게 시달린 지 이틀째. 몸이 너무 피곤했다. 쉬이 잠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이른 새벽.

그렇게 방 안에 세 사람의 숨소리가 퍼졌다.

***

다음 날 아침.

아직 기상 벨 소리가 울리기 전이었다. 숙소는 쥐죽은 듯 조용했다.

그 고요함을 깨트리려고 찾아온 불법 침입자들이 있었다. 카메라를 든 촬영 스태프들이었다.

2부 촬영 시작 전, 프로그램에 출연한 연습생들의 소속사들이 뭉쳤다. 그들은 대형 기획사인 TE엔터테인먼트를 중심으로 단합하여 변호사단을 구성했다. 악플에 대처하고 연습생들의 인권을 보호하겠다는 취지였다.

변호사단의 요구 중 숙소와 욕실에 카메라를 제거하라는 요구가 가장 치명적이었다. 제작진은 반발했으나 변호사단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변호사단은 자신들의 뒤에 시황 그룹이 버티고 서 있다는 걸 은근히 어필했다. 시황 그룹은 2부 촬영 시작 전, 갑자기 프로그램에 어마어마한 지원을 제안했다. 그 덕에 제작진은 방송국에 큰소리를 땅땅 치며 거드름을 필 수 있었다. 추가 예산도 넉넉히 받을 수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제작진이 시황 그룹이 뒷배를 봐주고 있다는 변호사단과 맞설 순 없는 일이었다. 제작진은 일단 한 발 물러섰다.

물론, 그렇다고 시청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컨텐츠를 아예 포기할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시청자들은 연습생들이 숙소에서 떠들며 놀고, 편하게 널브러져 있는 모습을 좋아했다. 제작진은 시청자들의 요구에 응해야 했다.

그래서 깜짝 촬영을 시도했다. 이른 아침, 숙소로 난입하여 아직 자는 연습생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로 한 것이다.

“자, 어서 일어나세요. 아침입니다!”

컨텐츠 내용상 MC인 유진이 나설 수는 없는지라 막내 PD가 나섰다. PD는 닫혀 있는 방문을 활짝 열고 방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카메라가 뒤따라 들어오며 숙소 안의 모습을 비췄다.

“깜짝 방문! 아침에 내 연습생의 모습은 어떨까요?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시지요!”

침대 두 개가 양쪽 벽에 붙어 있고, 가운데에는 이불이 깔려 있었다. 바닥에 갈린 이불엔 아무도 없었다.

“어? 카메라?”

때마침 오른쪽 침대에서 자고 있던 연습생이 일어났다. 졸린 지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고개를 좌우로 끄덕끄덕 흔들더니, 두 손으로 눈을 마구 비볐다.

이리저리 삐친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날아다녔다. 하얀 얼굴은 막 자고 일어나 그런지 더 말랑해 보였다. 촉팀의 김현덕이었다.

“김현덕 연습생, 시청자분들께 모닝 인사를 부탁드립니다.”

막내 PD가 현덕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어어…… 이거, 음…… 네에."

현덕은 마이크를 두 손으로 꼬옥 쥐었다. 잠이 덜 깨서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현덕은 집에서 부모님께 하듯이, 카메라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졸려서 목도 가누지 못해 휘청였다.

“자, 이제, 김현덕 연습생의 룸메이트가 누군지 확인해볼까요?”

막내 PD가 현덕에게서 마이크를 건네받고는 바닥에 깔린 이불을 밟고 옆의 침대로 갔다. 카메라도 그쪽을 향했다.

이불이 산처럼 두툼했다. 막내 PD는 그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확- 벗겼다.

“쨔잔!”

그리고 막내 PD는 짜잔 상태로 돌이 되어버렸다. 카메라를 든 촬영 스태프가 사례 들려 켁켁대는 소리가 배경음으로 깔렸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침대 위 상황은 더없이 평화로웠다.

왼쪽 침대에는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 누워 있었다. 주민과 자룡이었다. 둘은 마주보며 서로를 꼭 껴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 두 다리까지 서로 얽혀있었는데, 이불 사이로 드러난 모습이 참으로……. 감히 뭐라 말할 수 없는 모양새였다.

“흠야……. 으헹……. 잭슨 형…… 문워크 짱이야…….”

자룡이 주민의 가슴에 얼굴을 부비며 해죽- 웃었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 더 세게 주민을 껴안았다.

“더 자자, 조금만 더.”

주민은 그런 자룡의 녹색 머리에 얼굴을 파묻고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호텔에서 제공하는 샴푸 냄새가 딱 현덕에게서도 났던 향인지라, 주민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자룡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는 자룡을 좀 더 끌어당겼다.

막내 PD는 이 장면이 방송 심의를 통과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카메라는 일단 이 희귀하고 값진 장면을 계속 찍었다.

“어……. 아?”

현덕은 그들을 바라보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꿈인가.”

초현실적인 장면 앞에서, 현덕은 자신이 아직도 꿈속에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해버렸다.

잠시 뒤.

“으아아아악!”

“떨어져!”

호텔을 부술 듯 거대한 비명이 이중창으로 울려 퍼졌다. 목청 좋은 두 사람의 합창이었기에 스피커를 통해 울리는 모닝 벨 소리보다 효과가 좋았다.

“뭐야?”

“귀신이야?”

“아침부터 무슨 돼지 멱따는 소리가 들리고 그래?”

“뭔 미션이라도 있나? 고음 테스트?”

다른 방 연습생들이 복도로 뛰쳐나오며 무슨 일이냐고 소리쳤다.

“윽. 귀 아파.”

현덕은 소리의 진원지 바로 옆에서 귀를 틀어막은 채로 웅크렸다.

그렇게 합숙 첫 주, 사흘째 되는 날이 밝았다.

***

사흘간의 합숙 생활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 연습하는 틈틈이 인터뷰나 미니 게임, 깜짝 미션 등을 하다 보면 하루가 금세 사라졌다.

1부 촬영에 익숙해진 연습생들에게 사흘은 너무 짧았다.

“이번 주 촬영이 종료되었습니다. 수고들 하셨습니다. 자, 다음 주에 뵙죠!”

메인 PD의 말을 끝으로 촬영 카메라들이 일제히 꺼졌다.

연습생들은 쉽게 자리를 뜨지 않았다. 1부 촬영이 끝나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던 때와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촬영 스태프들은 그런 연습생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캠코더나 소형 촬영 카메라를 건네주었고 사용 방법을 알려주었다.

연습생들이 제가 쥔 기계를 만지작거리며 웅성거리자 메인 PD가 연습생들 앞으로 나섰다.

“자자, 이미 공지해서 알고 있겠지만. 혹시나 해서 다시 한번 공지합니다. 잘 들어 두세요.”

메인 PD는 모자를 깊이 눌러 쓰고는 연습생들에게 소리치듯 말했다.

“원칙적으로 2부 촬영 때는 합숙 기간 외에 다른 날, 팀끼리 만나는 걸 따로 터치하지 않습니다. 각 팀에서 알아서들 하길 바랍니다. 다만 촬영이 끝난 후에도 모여서 연습을 할 때. 그리고 뭔가 신변에 특이한 일이 생겼을 때는, 우리에게 연락을 해줬으면 합니다. 방금 나눠준 카메라 있죠, 그 카메라로 영상도 찍어주시길 바랍니다.”

메인 PD는 그 밖에 몇 가지 주의점도 언급했다. 우연하게라도 구설에 오르내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였다. 연습생들은 갑자기 쏟아지는 인기를 감당하기엔 어설펐다. 또 어렸다. 트라이 온 촬영 스태프들은 그 점을 걱정했다. 하지만 아무리 걱정해도 소용없었다. 연습생들은 메인 PD의 걱정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피터는 합숙 촬영이 끝났다는 것에 들뜬 촉팀 연습생들을 제 곁으로 모이게 했다. 그리고 이후의 연습 일정을 확인하였다.

촉팀 연습생들은 전국 방방곡곡에 살고 있었다. 제주도에서 비행기를 타고 올라온 연습생도 있었고, 강원도 깊숙이에 살다 열차를 타고 서울을 처음 올라온 연습생도 있었다. 제작진은 연습생들이 따로 만나 연습하는 걸 금지하지 않는다 했지만 촉팀은 현실적으로, 모두 모여서 연습하기 어려웠다.

“일단, 근처에 살아서 모일 수 있는 사람들끼리 뭉쳐서 연습하기로 하지요. 핸드폰이나 컴퓨터 메신저로 서로 연락 주고받으며 연습 상황을 크로스 체크하면 됩니다. 물론 리더인 제가 매일 모든 연습생에게 연락 돌려서 확인할 거고요.”

피터는 거주 지역을 기준으로 조를 짰다. 두세 명이 한 조가 되었다. 제주도에 사는 연습생은 어쩔 수 없이 혼자 연습하기로 했다.

“매일 연습한 후 그날 연습한 안무와 노래를 촬영하여 저와 안무 담당, 노래 담당 연습생에게 보내주세요. 안무와 노래를 담당한 연습생분들은 번거롭겠지만, 매일 체크 부탁드립니다.”

촉팀의 서울조는 네 명이었다. 피터와 준비, 현덕 그리고 소혁.

피터는 소혁에게 함께 연습하자고 제안했으나 소혁은 단칼에 거절했다. 피터는 알았다며 순순히 물러났다.

현덕이 괜찮겠냐고 묻자 피터는 산뜻하게 대답했다.

“원소혁 연습생이 연습을 소홀히 할 타입은 아니잖아? 굳이 강요해서 트러블 일으킬 필요는 없지.”

피터는 처음부터 소혁이 함께 연습하자는 제안을 거절하리라 생각했던 듯했다.

다른 연습생들은 소혁이 서울에 사는 다른 연습생들과 같이 연습하는지, 안 하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럴 바엔 차라리 옆 팀 우주민의 춤 솜씨를 걱정하는 게 더 건설적이었다.

결국 촉팀의 서울조는 소혁이 빠진 세 명으로 구성되었다.

소혁은 바로 자리를 떴다. 현덕과 피터, 준비는 옹기종기 모여 앉아 나흘간 어떻게 연습할지 의논했다.

“저희 담당인 오 팀장님한테 부탁하면 될 거 같은데. TE엔터테인먼트 연습실을 쓸 수 있게 해달라고 한번 물어볼까요?”

현덕이 물었다. TE엔터테인먼트는 번화가에 있었다. 근처에 지하철역과 버스정류장이 있어서 오가기도 편했다.

“그거 괜찮은 거 같은데.”

피터가 끌리는지 입맛을 다셨다.

“안 되여!”

하지만 준비가 반대했다.

“거기 자드래곤이랑 우주민 연습생도 왔다 갔다 할 거잖아여. 우리 적에게 우리 전력을 들킬 순 없어여!”

준비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오, 하긴.”

현덕은 납득했다.

“굳이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가?”

피터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차라리 저희 기획사로 가죠. 뭐, 대형 기획사인 TE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쓸 만할 걸여. 제가 우리 회사에 말해 놓을게여.”

준비가 주먹으로 제 가슴을 팡팡 내리치며 말했다.

그 모습이 믿음직스럽다기보다는 귀여워서, 피터와 현덕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준비는 그런 두 형을 보고는 발을 쾅쾅 굴렀다.

“그런 태도, 굉장히 기분 나쁘네요. 저 이제 중딩이거든여?”

준비가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서서는 두 형을 올려다보았다. 퍽 터프해보이려 애썼으나, 역시나 귀여웠다.

현덕은 웃으며 준비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준비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양 볼을 잔뜩 부풀렸다가 이내 숨을 꺼트리고는 현덕에게 덥석 안겼다.

다른 연습생이 어린애 취급했다면 결코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피터라 할지라도 피의 심판을 받았으리라. 하지만 현덕은 달랐다. 준비는 현덕이 정말 저를 아끼고 귀여워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연습할 장소를 정하니 그다음은 일사천리로 이어졌다.

합숙 연습이 끝난 다음 날.

현덕은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지하철을 타고 준비의 기획사, 우탄 엔터테인먼트로 갔다. TE엔터테인먼트보다는 규모가 작았지만, 그래도 연습실은 잘 갖추어져 있었다.

전날 밤 전화로 안내받은 대로 연습실을 찾아가니, 피터와 준비가 먼저 와 있었다. 현덕이 학교에 있는 동안에도 이곳에서 연습하고 있었는지 온통 땀범벅이었다.

그런데 막상 현덕이 도착했을 때는 연습을 하고 있지 않았다. 현덕이 왔는데도 반가이 맞이해주기는커녕 돌아보지도 않았다.

피터와 준비는 연습실 한가운데에 서서 한쪽 벽을 쏘아보고 있었다. 어쩐지 분위기가 흉흉했다.

“저 왔-”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현덕은 인사를 하다 말고, 둘이 보고 있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곳에 우탄 엔터테인먼트의 남자 연습생이 몇 명 서 있었다.

‘우리만 사용할 거라고 했는데. 아닌가?’

어젯밤, 통화할 때만 해도 준비는 제일 좋은 연습실을 독차지하게 됐다고 뻐기듯 말했다. 그 으스대는 귀여운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했다.

영문을 몰라 잠시 멈칫하던 현덕은,

“여, 꼬맹이. 너 요즘 되게 잘나가더라?”

“잘나가니까 형들이 눈에 안 뵈지?”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는 바로 무슨 상황인지 알아차렸다.

같은 기획사 소속 연습생들이 준비에게 시비를 걸고 있었다. 준비가 트라이 온에 나가 유명해진 게 눈꼴 시렸는지, 말하는 꼴이 가관이었다.

‘안 그래도 거슬리는데, 다른 기획사 연습생들까지 데리고 와서는 회사의 가장 좋은 연습실을 독차지한다니, 가만두고 볼 수 없었겠지.’

어느 곳에 가든 텃세가 있기 마련이다. 아직 어린 연습생들의 세계에서도 그런 게 존재했다. 아니, 오히려 연습생들 사이에서 더 심했다.

들어온 순서로 데뷔하지 않는다. 나보다 늦게 들어온 연습생이 먼저 데뷔할 수도 있고, 나보다 노래를 못 부르는 연습생이 데뷔조로 뽑힐 수 있다. 매일 학교에 가듯 기획사를 오가며 연습해도 언제 데뷔할 수 있는지 기약없다.

학교라면 매년 학년이 올라가고, 졸업을 한다. 하지만 연습생 생활에는 그런 게 없다. 언젠가 데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노력해야 할 뿐. 데뷔하거나 포기하지 않으면 길은 끝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연습생들 사이에선 경쟁과 텃세가 심했다. 현덕 또한 처음 TE엔터테인먼트에 들어갔을 때 경험했던 일이었다.

그와 비슷한 상황이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제 막 중학교에 올라간 준비에게.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준비는 드디어 중학생이 됐다며 자랑했다. 그러면서 밝고 활발하게 피터를 구박하고 현덕에게 덥석 안겼다. 현덕이 아는 준비는 그렇게 구김 없이 명랑한 아이였다. 그런데 우탄 엔터테인먼트 연습생들 앞에 선 준비는 현덕이 봐왔던 그 준비가 아니었다.

준비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파랬다. 꽉 주먹 쥔 손은 부르르 떨렸다. 아랫입술을 찢어질 정도로 세게 깨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자신에게 시비를 거는 같은 기획사 연습생 형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툭하면 피터에게 대들거나 투덜거리던 준비는 온데간데없었다.

문득, 준비를 처음 봤을 때가 생각났다. 현덕이 옆자리에 앉자 준비는 바로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처음 본 사이인데도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것처럼 굴었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아이가 사교성 좋게 다가오자 현덕은 없던 동생이 생긴 것처럼 반갑고 좋았다. 그래서 준비의 그 밝은 웃음에 속아 넘어갈 뻔했다. 하지만 현덕은 준비의 웃는 모습을 보고, 준비가 진짜로 웃는 게 아니라고 깨달았다.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겁에 질린 듯 떨리던 눈동자, 그리고 자신의 얼굴을 잡아당길 때 가늘게 떨던 그 손짓. 준비는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분명, 겁에 질려 있었다.

낯선 장소, 모르는 사람들뿐인 세트장에서 혼자 어떻게 버텨야 할지. 옆에 앉은 형에게 거절당하진 않을까 무서워하고 있었다.

‘충분히 귀엽고 사랑스러운데. 왜 그런 걱정을 할까. 아직 어려서 무서운 걸까.’

막연하게나마 그렇게만 생각했었건만.

그게 아니었다. 밝고 명랑한 준비를 그렇게 만든 이유가 따로 있었다.

“눈깔 병신. 존나 혼혈이면 단가. 지가 특별한 줄 알지.”

“야, 니 요즘 초통령이라며? 시발, 뽀로로가 친구 하자고 안 그러냐? 티비 좀 나왔다고 뜬 줄 알고 깝치는데, 정신 차려라. 그래 봤자 넌 아무것도 아냐.”

우탄 엔터테인먼트 연습생들이 손가락으로 준비의 이마를 밀었다.

“뭣들 하는 겁니까. 그만하십시오. 자꾸 이러시면 회사 측에 정식으로 이야기할 겁니다.”

피터는 아까부터 계속 좋은 말로 연습생들을 달래며 내보내려 하고 있었다.

“이건 또 뭐야. 다른 회사 연생은 끼어들지 마라. 엉?”

“아, 짜증 나. 찐따들끼리 뭉쳐서 지랄이네.”

우탄 엔터테인먼트 연습생들은 준비를 감싸는 피터에게까지 시비를 걸었다. 연습생 중 한 명이 피터의 어깨를 잡고 옆으로 밀쳤다.

피터가 휘청이며 옆으로 밀려났다.

“피터 형!”

트라이 온을 찍는 내내 피터를 제대로 형 취급도 해주지 않고 구박하던 준비건만. 저 대신 피터가 폭력에 노출되자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뭐, 뭐 하는 거야! 피터 형은 건드리지 마.”

준비는 피터 앞을 막아서며, 제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연습생들에게 대들기까지 했다. 준비의 어깨가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형? 너 지금 쟤보고 형이라고 했냐?”

“시발, 이게 장난하나. 같은 회사에서 몇 년이나 지 도와주던 우리한테는 곧 죽어도 뭐뭐 연습생이라고 부르더니, 딴 기획사 놈한테는 형이라고?”

“너 우리가 물로 보이냐?”

연습생 중 한 명이 벌컥 화를 내며 손을 번쩍 들었다.

“윽!”

준비는 잔뜩 어깨를 움츠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피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현덕은 제 안의 무언가가 끊기는 걸 느꼈다.

문 옆에 철제 의자가 놓여 있었다. 크기도 크거니와 무게가 상당히 나갈 것 같았다. 당장 눈에 보이는 건 그것뿐이었다.

현덕은 의자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던졌다.

“아악!”

연습실 가득, 비명이 울렸다.

“……어?”

당연히 얻어맞을 거라 생각하고 있던 준비는 그 비명을 듣고 눈을 떴다.

준비 앞에 서서 씩씩대던 연습생이 엉덩방아를 찧은 채 주저앉아 있었다. 커다란 철제 의자가 바로 그의 앞, 쩍 벌린 다리 사이에 쓰러져 있었다.

연습생은 철제 의자에 맞지 않았다. 그저 지레 놀라 뒤로 넘어진 것이었다.

“준비 손끝 하나라도 건드리기만 해 봐.”

준비의 등 뒤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무척 익숙한 목소리인데, 뭔가 달랐다.

준비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현덕 형?”

문 앞에 현덕이 서 있었다.

평소 순하게 웃기만 하던 얼굴이 무표정했다. 눈꼬리가 살짝 처져 억울한 강아지 눈 같아 보였던 눈매가 싸늘했다.

어제 봤는데도 오늘 또 보고 싶을 정도로 좋아하는 현덕이건만. 지금의 현덕은 준비가 알고 있는 그 김현덕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 같아 보였다.

현덕이 뚜벅뚜벅 걸어 준비 앞에 섰다. 준비를 제 등 뒤에 감추고는 한 손을 등 뒤로 내밀어 준비의 손을 잡았다. 준비의 손은 차가웠다. 그게 현덕을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니네, 절대로 가만 안 둔다.”

현덕은 이를 갈며 제 앞의 연습생들을 바라보았다.

“와우.”

엉덩방아를 찧은 채 주저앉아 있던 피터는 그런 현덕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씨발, 너 뭐야. 이 새꺄.”

다른 연습생 중 한 명이 현덕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았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말을 까고 욕을 하다니. 학교에서 그러라고 가르치든?”

“이 새끼 뭐라는 거야, 진짜. 좆만 한 게. 어?”

“네 좆이 나만 하다고?”

현덕은 연습생의 다리 사이를 내려다보고는 픽, 웃었다.

“과대망상이 심하네. 그래, 그러니까 자기보다 한참 어린 동생을 그렇게 괴롭혔겠지.”

“야, 이 씨발 새끼야. 어디서 자꾸 말대꾸야.”

현덕의 멱살을 움켜쥔 연습생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욕부터 하면 기분이 좋니?”

현덕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연습생들은 욕설을 내뱉으며 당장이라도 한 대 치려는 듯 위협적인 행동을 보였다. 현덕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준비가 괴롭힘 당하고 있는 현장을 목격했다. 준비를 괴롭히는 사람들은 고등학생, 혹은 20대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격지심을 어쩌지 못하고, 자신들보다 한참이나 어린 준비를 괴롭혔다. 준비는 괴롭힘 당하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런 괴롭힘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는 걸 의미했다. 그게 현덕을 화나게 만들었다.

자신들과 같은 꿈을 꾸는, 열심히 노력하는 어린애가 무서워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보며 낄낄대고 좋아하다니.

절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으으…… 으……!”

의자에 맞을 뻔한 연습생이 신음 소리를 내며 꿈틀거렸다.

현덕을 보며 씩씩대던 연습생들이 바닥에 쓰러진 연습생을 돌아보았다. 현덕 또한 그 연습생을 바라보았다. 약간의 동정, 연민. 하지만 그에 비교되지 않을 만큼의 분노. 여러 감정이 섞여 까만색이 되었다. 그 까만색이 현덕의 눈동자가 되었다.

현덕은 까만 눈으로 연습생들을 둘러보았다. 현덕과 눈이 마주치자 움찔, 물러서는 연습생도 있었고, 어디서 눈을 똑바로 뜨느냐고 고함을 지르는 연습생도 있었다.

“이러고도 괜찮을 줄 알아? 우리가 씨발, 방송국이든 너희 회사든 다 찔러버릴 거야!”

그들은 현덕이 누구인지 알았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기에 가장 위협적인 협박을 생각해냈다. 뇌의 연산 속도는 칭찬해줄 만했으나 안타깝게도 현덕은 그런 협박이 통할 사람이 아니었다.

“어. 난 괜찮을 거 같은데.”

현덕은 차분히 답했다.

“나 말고 너희들 스스로를 걱정해야 될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니?”

현덕은 멱살이 잡힌 채로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맹덕 형’에게 음성 파일을 하나 전송했다. 현덕에게 눈을 부라리는 우탄 엔터테인먼트 연습생들에게 그 화면을 보여주었다.

“뭐야, 그게, 설마…….”

“그 설마란다. 방금 너희가 준비한테 지껄인 말들, 내가 문밖에서 내내 다 녹음했거든. 딱 내가 의자 던지기 전까지.”

“뭐?”

“못 알아듣겠어?”

현덕이 핸드폰으로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너희들이 준비 막 대하는 데까지만 내가 녹음했다고. 너희가 그동안 계속 준비 괴롭혀 왔다는 걸 증명할 증거로. 그리고 그걸 방금 내가 제일 믿는 형에게 전송했고.”

“뭐, 이 새꺄? 시발, 이거 완전 꾼 아냐. 너 이런 거 시발, 시청자들이 다 알아?”

“이거 티비에서는 존나 순진한 척하더니.”

“그거 안 내놔?”

우탄 엔터테인먼트 연습생들이 현덕을 빙 둘러쌌다. 어떻게 해서든 핸드폰을 뺏으려 하는 것이었다.

“형, 받아요.”

현덕은 굳이 몸싸움하는 대신, 핸드폰을 피터에게 집어 던졌다.

“어? 어어?”

바닥에 철퍼덕 앉아 있던 피터가 얼결에 현덕의 핸드폰을 두 손으로 받았다.

“나이스 캐치.”

현덕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현덕 형아?”

“현덕아?”

준비와 피터는 그 태평스러운 모습에 심히 당황하였다.

“저거 굳이 뺏으려고 하지 말고. 소용없으니까.”

현덕은 자신을 둘러싼 연습생들에게 말했다.

“조금 전에 내가 다른 사람에게 녹음 파일 보내는 거 봤잖아. 저 핸드폰 빼앗아서 파일 지워도 소용없어. 아, 물론 지금 파일 보낸 사람은 내 친형이라서 믿을 만한 사람이야. 내가 보냈다고 그걸 듣고 바로 유출하거나 할 사람은 아니니까, 그 점은 안심하고. 혹시 다른 질문이 있는 사람?”

굳이 질문 기회까지 주었건만. 연습생들의 얼굴은 현덕의 말을 알아들은 얼굴이 아니었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이거 미친 새끼 아냐?”

연습생들은 현덕을 미친놈 취급했다.

“야야, 너희 좀 비켜 봐.”

의자에 맞을 뻔 했던 연습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현덕의 멱살을 움켜쥔 연습생을 밀치고는 현덕의 앞에 섰다. 대뜸 손부터 쳐들었다.

“야, 이 씹새꺄. 우리가 만만히 보이냐?”

당장에라도 때릴 기세였다. 콧김을 훅훅 내뿜었다.

“…….”

현덕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연습생은 현덕보다 키가 작았고 지금의 현덕보다는 나이가 많아 보였다. 그 앳된 얼굴보다는 허공에서 까딱거리는 손이 더 신경 쓰였다.

“손이 아주 자연스럽게 올라가네. 평소에도 이렇게 준비를 때렸어?”

“그게 뭔 상관인데.”

“상관이 있지. 내가 준비 형이니까.”

말하고 나니 기시감이 들었다.

어릴 때, 동네 형들에게 맞은 적이 있었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니, 맹덕이 그걸 보곤 뛰쳐나가 동네 형들을 혼내줬다. 워낙 어릴 때라 맹덕이 어떻게 동네 형들을 혼내줬는지 잘 기억나진 않았지만.

그 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다시는 동네에서 삥 뜯기거나 시비가 걸리지 않았다. 중학교, 고등학교에 입학하면 등 뒤에서 ‘쟤가 그 김맹덕 동생이래. 건들지 마라. 절대 건들면 안 돼.’ 이런 소리가 들리곤 했다.

어떻게 한 건지는 알 수 없으나, 맹덕은 밖에서 얻어맞고 온 현덕의 복수를 해주는 정도에서 끝내지 않았다. 다시는 현덕이 누구에게 맞고 다니지 않도록 확실히 조치를 취해주었다.

‘형도 이랬을까?’

그때 맹덕의 마음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현대 사회는 법치 사회다. 개인의 복수와 사적인 처벌을 금지한다. 갈등이 있다면 법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준비가 오들오들 떨고 있는 걸 보는 순간, 눈이 돌아갔다. 청소년 보호법을 운운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머릿속에 든 생각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제대로 밟아서 다시는 준비를 건드리지 못하게 해야 된다.

그러기 위해 현덕은 기꺼이 우주민의 싸가지 없음에 빙의했다. 수년간 옆에서 지켜보았으니 주민의 태도를 흉내 내는 건 껌이었다. 맹덕의 무대포 정신도 본받았다.

‘여기서 한 대 맞으면 나야 좋지. 정말로 저쪽에서 고소를 한다 해도 쌍방폭행으로 가면 되니까.’

폭행이 있을 시 선제공격을 누가 했느냐에 따라 피해자와 가해자가 갈린다. 문제는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공격할 경우 그 기준이 또 모호해진다는 것이다. 피해자는 최소한의 방어만 해야 한다. 차라리 공격을 포기하고 얻어맞기만 하라는 말이 나온 이유가 이 조항 때문이다.

방어와 과잉 대응의 사이에서 객관적인 기준을 잡는 건 모호하다. 이 때문에 법은 최소한을 추구하고 최대한을 경계하게 된다. 그래서 막상 폭행 사건의 판결이 나는 걸 보면, 당한 처지로서는 답답하고 기가 막힐 노릇인 경우가 많다. 현덕 또한 온갖 판례를 공부하며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가슴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현덕은 그 같은 더러운 경우의 예시를 생각하며, 자신이 그 사례 중 하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를 상황에 처했다는 것에 조소했다. 현실은 때론 이렇게나 어이없을 때가 많다.

‘맞으면 꽤나 아프겠네.’

당장이라도 제 뺨을 후려칠 듯한 손을 올려다보며, 이렇게 태평한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였다.

“거기까지 하는 게 좋을 거야.”

내내 존재감 없이 찌그러져 있던 피터가 여기를 봐달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현덕만큼이나 흉흉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듯 여유로워 보였다.

이 긴장감이라고 조금도 없는 두 형에게 보호를 받게 된 준비는 애가 타다 못해 열이 받을 지경이었다.

“그만해여. 난 아무렇지도 않다니까여.”

“니가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는 우리가 판단해.”

피터는 준비를 억지로 끌어당겨 등 뒤에 숨겼다. 준비가 팔을 놓으라고 흔들었지만 피터는 놓아주지 않았다. 평소 장난을 칠 때면 준비의 주먹 한 방에 바닥을 떼구르르 구르던 피터였다. 준비는 그동안 피터가 자신을 봐줬다는 걸 실감했다.

“준비야, 형들 괜찮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현덕 또한 준비에게 그리 말했다.

당장 얻어맞을지 모를 상황에서 그렇게 말하는 건 전혀 믿음직해 보이지 않아야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덜덜 떨고만 있던 굳은 몸이 눈 녹듯 풀렸다.

준비는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현덕을 바라보았다. 현덕은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다.

“사실 아까부터 계속 말하고 싶었는데 말이야. 지금 상황, 여기에 다 찍히고 있거든.”

피터가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아래에는 트라이 온 제작진에게서 받은 캠코더가 놓여 있었다. 바닥에 놓여 있었는데, 렌즈가 현덕과 연습생들을 향해 있었다.

그걸 본 연습생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현덕이 핸드폰으로 녹음했다는 말보다 영상으로 찍고 있다는 말이 더 와 닿은 듯했다.

“이 새끼들이 진짜, 아주 짜고 덤비네?”

“재수 없는 새끼들.”

“양아치들아, 시발, 너네 좋다는 그 프로그램 시청자들은 너희가 이렇게 야비한 거 아냐?”

연습생들이 욕설을 내뱉으며 피터를 노려보았다. 피터는 캠코더와 핸드폰을 한 손에 쥐고 일어섰다. 구겨진 바지를 다른 손으로 탈탈 터는 여유로움까지 보여주었다.

“그러게. 어릴 때 부모님이 말 안 해주든? TV에 나오는 거 다 믿지 말고 반만 믿으라고.”

피터가 말을 보탰다.

분위기가 더욱 흉흉해졌다. 연습생들이 현덕의 어깨를 툭툭 치고 지나가며 피터에게로 다가갔다. 피터의 손에 들린 캠코더와 핸드폰도 빼앗으려 했다.

“피터 형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건드려 봐. 그 즉시 너희들, 바로 이 업계에서 매장해버릴 테니까.”

연습생들이 피터를 둘러싸자, 이번엔 현덕이 말했다. 말투가 너무 담담해서 연습실 안에 있는 누구도 그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뭐?”

“뭐라는 거야.”

“이 씹새끼가.”

연습생들은 한 박자 늦게 돌아섰다.

“계속 그렇게 욕해 봐. 나는 계속 정신적 피해를 받는 중이니까.”

현덕은 손가락으로 제 관자놀이를 톡톡 쳤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지금 그거 뺏어봤자 소용없어. 이미 내가 녹음한 건 다른 사람한테 보냈으니까. 지금 핸드폰 부숴도 증거는 사라지지 않아. 캠코더 영상 빼앗아서 지우겠다고? 난 바로 트라이 온 제작진하고 변호사단에 알려서 너희가 무슨 짓을 했는지 다 밝힐 거야.”

“씨발, 나한테 의자 던진 건 너거든?”

“그래. 그리고 내가 말했지. 내가 의자 던지기 전까지만 녹음했다고. 피터 형, 피터 형은 내가 의자 던진 거 찍었어요?”

“아니. 캠코더가 바닥에 놓여 있어서 각도가 낮아 안 찍혔을 거야.”

피터가 낼름 대답했다. 그러자 우탄 엔터테인먼트 연습생들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너희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우리 셋 다 죽여서 입막음할 수 있겠니?”

현덕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를 입에 담았다. 아무리 연습생들이 거칠다고는 하나 그래 봤자 고등학생이고 20대였다. 기획사와 집, 학교, 아르바이트 장소를 오가며 연예인이 될 준비를 했을 터. 그들은 아직 어렸고, 의외로 세상물정 모르고 순진했다.

그들은 오히려 흉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는 현덕을 보며 기겁했다.

“뭐래는 거야, 이 새끼.”

“영화를 존나 많이 봤나. 씨발, 입 안 닥쳐?”

“이 새끼 미친 거 아냐?”

연습생들은 험한 욕설을 내뱉으면서도 주춤거렸다. 누구도 현덕에게 다가가 멱살을 잡지 못했다.

요란하게 욕설이나 내뱉으며 강한 척하는 어린아이들은 현덕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게 아니면, 우리 중 누구라도 건드리는 순간, 너희는 끝나는 거야. 트라이 온 인기 연습생들이 연습을 하러 U모 기획사에 왔다가 거기서 연습생들에게 협박을 받았다? 맞아서 다쳤다? 이거 꽤 재미있는 기삿거리 아닐까?”

현덕은 한풀 기세가 꺾인 연습생들에게 말했다.

“너희 신상 안 털릴 자신 있니? 그리고 그렇게 일이 커졌을 때 감당할 자신도 있니? 그런 거면 한번 건드려 봐. 데뷔는커녕, 이 사회에서 매장되게 해줄 테니까.”

“…….”

“…….”

“…….”

연습생들은 더 이상 현덕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그래서 현덕은 기꺼이, 자신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한 발자국, 현덕이 그들을 향해 움직였다. 연습생들은 짜기라도 한 것처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현덕은 그들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설 때 두 걸음 다가갔다. 기어이 연습생들과 다시 가까워져서는 맨 앞에 서 있는 연습생을 바라보았다. 준비를 건드리다가 현덕이 던진 의자에 맞을 뻔한 연습생이었다.

그 연습생의 표정은 꽤 볼만했다. 무슨 전염병이라도 보듯 현덕을 바라보았다.

“준비를 괴롭히면서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니? 저렇게 끼 많은 아이가 데뷔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서 인기 많아졌을 때 그동안 너희가 저지른 일들이 하나도 안 까발려질 거란 자신 있었어?”

현덕은 그 연습생에게 물어보았다.

“…….”

연습생은 대답하지 못했다.

“멍청한 거니, 단순한 거니. 아마 둘 다인 거 같긴 하지만.”

현덕은 빙긋, 웃었다. 눈은 그대로인데 입만 빙긋 웃었다.

“시발. 난 잘못 없어. 그리고 난 피해자라고. 니가 의자를 던져서, 어? 나 다칠 뻔 했어! 나도 그 정신적 충격? 그게 엄청날 거라고!”

연습생은 현덕이 주는 압박감을 견디다 못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현덕은 ‘오오, 그렇지.’ 감탄사를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웃었다.

“그래, TV 나가서 그 얼굴 드러내고 그렇게 인터뷰 해보렴. 나는 곧바로 너희가 준비를 어떻게 괴롭혀 왔는지, 그리고 오늘, 우탄 엔터에 찾아온 나를 어떤 험한 욕설로 위협하고 괴롭혔는지 공개 기자회견 자리를 마련해서 터트릴 테니까. 그럼 세상 사람들은 누구의 말을 들어줄까?”

꽤 간단한 질문이었다. 답은 연습실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알았다.

“비, 비겁한 새끼.”

연습생이 이를 뿌드득 갈며 내뱉은 말은 그게 고작이었다. 분하긴 꽤나 분한지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동생을 자신보다 재능이 많은 게 눈꼴신다고 따돌리고 괴롭힌 게 더 비겁한 짓 아닌가? 먼저 시작한 건 너희 쪽일 텐데?”

현덕은 연습생들을 모두 둘러보았다. 그들은 현덕과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동안 준비 괴롭히면서 재밌고 즐거웠지? 우월감도 느꼈을 거야.”

말을 하는데 입안이 씁쓸해졌다. 연습생들 앞에서 웅크리고 있던 준비의 모습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렸다.

준비는 현덕과 피터 앞에서는 언제나 밝고 명랑했다. 누구 앞에 데려다 놔도 기죽을 일이 없을 것 같았다. 현덕은 그런 준비를 정말로 아꼈다. 나이 차 많이 나는 동생이 생긴 것 같아서 틈만 나면 옆에 끼고 돌았다.

하는 짓이 하나하나 얼마나 예쁘고 똑 부러지는지. 이 아이가 자라서 스무 살이 되고 서른 살이 되었을 때 어떤 모습일지 기대됐다. 막연한 상상 속에서 준비는 언제나 활짝 웃고 있었고,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런 아이가 기죽고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

생각만으로 다시 뱃속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욱- 치솟았다.

“나는 그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뿐이야. 어디 한번, 당해 봐. 방송국, 인터넷, 그리고 여기 우탄 엔터까지. 내 기획사를 통해서 여기 우탄 엔터 높은 분한테 연락을 취해서 오늘 있었던 일을 다 말할 거야. 과연 여기 사장님은 너희들과 준비 중 누굴 더 중하게 여길까?”

준비는 트라이 온 출연 이후 인기가 급상승했다. 특히나 초등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아 초통령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초등학생들이 준비가 입은 옷을 사달라고 한다며 신(新교) 등골브레이커적 현장이 TV에 나오기도 했다. 미용실마다 준비의 파마머리를 하고 싶다며 엄마 손을 잡고 온 초등학생들로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다는 기사도 떴다.

우주민의 화제성이 이름대로 우주를 뚫을 듯 높아서 가려졌을 뿐이지. 준비의 인기 역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정도로 높았다. 그걸 알기에 우탄 엔터테인먼트 연습생들은 부러운 마음과 질투하는 마음을 넘어 열등감을 가졌던 것이었다.

이제는 그 열등감이 두려움으로 바뀌어야 할 때였다.

“어때, 진짜로 한번 해볼까?”

현덕이 물어보았다.

“…….”

“…….”

“…….”

연습생들 중 누구도 그렇다, 아니다 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였다.

“저기, 연습 중 죄송합니다. 나중에 기사 좀 뿌리게 잠깐, 연습하는 모습 사진 좀 찍을까 하는데-”

타이밍 좋게도 우탄 엔터테인먼트 직원이 문을 열고 연습실 안으로 들어왔다.

“어? 뭐야, 너희가 왜 여기에 있어?”

직원이 자기 회사 연습생들을 보며, 인상을 팍 찡그렸다.

“니들, 뭐야. 혹시 준비 건드리려고 여기까지 쳐들어온 건 아니겠지?”

직원의 말에 우탄 엔터테인먼트 연습생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준비 앞에서 그렇게나 센 척하던 연습생들이 자신을 데뷔시켜줄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성인 어른 앞에서는 철저히 약자가 되었다.

“아, 아니에요.”

“정말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그냥 잘못 들어온 거예요.”

“맞아요. 지금 나가려고 했어요.”

연습생들은 한 명 두 명, 앞다퉈 변명을 늘어놓았다. 누가 들어도 수상쩍은 변명인지라, 직원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그들이 준비를 따돌리다 못해 괴롭히고 있다는 건 회사 내에 알음알음 알려져 있었다. 예전이야 그냥 모른 척하고 말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누가 뭐래도 준비는 요즘 우탄 엔터테인먼트에서 가장 핫한 아이템 중 하나였다.

‘안 그래도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고 경고를 해둬야겠다 싶었는데, 이 참에 한마디 해둘까?’

직원은 이참에 연습생들의 군기를 잡아볼까 고민했지만, 다음 기회를 기약했다.

지금 연습실에는 우탄 엔터테인먼트 연습생들만 와 있는 게 아니었다. 회사 내 연습생들 간의 불화를 보여 봤자 좋을 게 없었다. 괜히 이상한 소문이 났다가는 회사 이미지만 안 좋아질 터.

‘물 들어온다고 노를 젓지는 못할망정 노를 부러트려서야 쓰나.’

직원은 현덕과 피터를 힐끔 쳐다보았다. 둘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망할, 설마 벌써 무슨 망나니짓이라도 벌인 건 아니겠지?’

직원은 접대용 미소를 지으며 현덕에게 물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었나요? 우리 회사 연습생들이 뭔가, 피해를 줬다거나……. 응?”

질문하면서도 끊임없이 현덕의 표정과 태도를 살폈다.

“피해라, 피해 말씀이신가요.”

현덕은 말을 길게 늘이며, 옆에 몰려 서 있는 우탄 엔터테인먼트 연습생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눈빛으로 간절하게 ‘제발, 제발.’ 사정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 훤히 보였다. 현덕이 협박했던 대로 우탄 엔터테인먼트 직원에게 모든 걸 까발릴지도 모른다고 걱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풀 죽은 모습을 보자니 안타까웠다.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더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현덕은 슬쩍 눈을 돌려 준비를 바라보았다. 준비도 현덕을 보고 있었기에 둘은 금방 눈이 마주쳤다.

준비가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현덕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피해는 없었습니다. 잘못 들어왔다고 해서 인사만 하고, 서로 헤어지려던 차였어요. 저쪽에서 다른 연습실로 간다고 했거든요.”

현덕은 준비가 바라고 직원이 원하는 대답을 해줬다.

“아, 역시!”

직원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옆에 몰려 있던 연습생들도 대놓고 안도했다. 정말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현덕이 그렇게 말했다는 게 중요했다.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으니까.

“아우, 정말 미안하게 됐어요. 우리 회사 복도가 좀 복잡해서, 매일 출퇴근 도장 찍는 녀석들도 자꾸 헷갈리거든요. 연습을 방해해서 정말 미안해요. 얘들은 내가 데리고 나갈 테니까, 마저 연습들 해요.”

직원은 연습생들을 양 떼 몰듯 문 쪽으로 밀었다. 연습생들은 주저하면서도 순순히 걸어갔다.

“아, 아무튼. 이따가 사진 좀 몇 방 찍읍시다. 부탁해요.”

직원은 우탄 엔터테인먼트 연습생들을 데리고 나갔다. 문이 닫히자 연습실 안은 조용해졌다. 세 사람의 숨소리만 들렸다.

“음, 질문이 있는데.”

피터가 현덕에게 다가와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준비는 여전히 피터의 뒤에 숨어 현덕을 올려다봤다.

“준비야, 괜찮아? 많이 놀랐지.”

현덕은 그런 준비에게 팔을 벌렸다.

“현덕 형!”

준비는 그제야 현덕에게 달려가 덥석 안겼다. 몇 달 전, 트라이 온 첫 촬영 때 만났을 때만 해도 아직 한참 어려 보였는데. 그 몇 달 새 키가 훌쩍 컸다. 안아 들기 버거울 정도였다. 그래도 현덕에게는 아직 어린 동생이었다.

현덕은 휘청거리면서도 준비를 놓지 않고 꼭 끌어안았다. 그 바람에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질문, 뭐요?”

“정말로 녹음했어?”

“아니요.”

현덕은 고개를 저었다.

“헐?”

준비가 눈을 댕그랗게 뜨고 현덕을 올려다봤다.

“역시.”

피터는 픽, 웃었다.

“형, 진짜로 녹음 안 했어여? 그럼 아까 그건여?”

“이거?”

현덕은 준비를 안은 채로 핸드폰을 열었다. 그새 맹덕에게 답장이 와 있었다.

[갑자기너노래부르는건왜보내?

내 감상은 겁나 잘 부르네, 누구 동생인지

왜 누가 너보고 노래 못 부른다니/

어떤 새낀지 말만 해.]

현덕에게 매달려 있던 준비가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허얼?”

준비가 입을 쩍 벌렸다.

“파리 들어가겠다.”

현덕은 준비의 턱을 붙잡아 살살 밀어 올렸다.

“그러는 피터 형은요. 정말로 촬영했어요?”

“나? 아니.”

피터도 바로 고개를 저으며 손에 든 캠코더를 보여주었다. 촬영 중이면 빨간 불이 켜져 있어야 하는데,

“뭐야, 이 형들. 완전 사기꾼이잖아.”

준비는 어이없어 하며 피터와 현덕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피터와 현덕은 서로를 보며 푸스스, 웃었다.

딱히 의논하진 않았지만 죽이 척척 맞았다. 훌륭한 팀플레이였다.

“이런 건 좋은 거짓말이라 괜찮아.”

피터가 준비의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으으, 하지 마여.”

준비는 진절머리를 내며 그런 피터의 손을 짝짝, 쳐냈다.

현덕은 준비를 바닥에 내려주며 말했다.

“혹시라도 저 사람들이 널 또 괴롭히거나, 너한테 함부로 말하면, 참지 말고 우리한테 이야기해.”

“…….”

준비는 푸른 눈을 크게 떴다. 미처 흘리지 못한 눈물이 아직 눈동자를 덮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요?”

“또 혼내줄게. 다시는 너 못 괴롭히게.”

현덕은 준비의 손을 꼭 잡았다.

언젠가 동네 형들에게 맞고 집에 돌아왔던 자신에게 맹덕이 해주었던 것처럼. 부디 그때 자신이 느꼈던 그 감정을 준비도 느낄 수 있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너 괴롭히면, 나랑 피터 형이 저 사람들 절대로 가만 놔두지 않을 거야. 너 당한 거 열 배, 백배로 갚아줄 거야. 그렇지요, 형?”

현덕이 피터에게 바톤을 넘겼다. 피터는 바로 받아서 자기 식대로 준비에게 애정을 표현했다.

“당연하지. 내가 미국에서 뭘 배워왔을 거 같아? 미국 범죄 드라마를 싹 섭렵하면서, 완전 범죄 살인을 저지르는 방법을 연구했지. 준비야, 한마디만 해. 이 형이 바로 저 자식들을- 윽.”

준비가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피터의 발을 꾹 밟았다.

“철 좀 들어여, 형.”

흥, 준비는 콧김을 내뿜으며 얼른 현덕의 뒤로 숨었다.

“이 자식, 널 위해 살인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나의 각오를 뭐로 보는 거냐!”

피터는 마치 사람을 잡아먹으려는 호랑이처럼 두 팔을 들어 올리고 준비를 향해 달려들었다. 배신감과 서운함에 파묻힌 피터는 기어이 준비를 잡아서 그 말랑말랑한 뺨을 쭉쭉 잡아당겨야 기분이 풀릴 것 같았다.

준비는 붙잡힐 생각은 요만큼도 없기에 열심히 도망갔다. 피터와 준비는 현덕을 가운데 두고 빙빙 돌기 시작했다.

“어어- 잠깐, 잠깐만요.” 현덕이 어지럽다고 잠깐 타임을 소리쳐도, 멈추지 않았다.

***

피터와 준비는 현덕의 주변을 백 바퀴쯤 돌고야 멈췄다. 준비는 본래의 발랄한 모습을 되찾자 현덕과 피터는 안도했다.

“아이고, 나이는 못 속이나 보네. 더는 못 뛰겠다.”

피터는 준비를 붙잡는 걸 포기하고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여전히 씽씽 날아다니던 준비는 미처 멈추지 못하고 한 바퀴를 더 돌다 피터의 발에 걸려 넘어졌다.

“으악!”

“준비야!”

현덕이 손을 뻗어 준비를 잡았다.

준비를 잡기는 했으나 그 무게와 회전력을 버티지 못했다.

“어어-.”

피터와 준비가 현덕 주변을 빙글빙글 돈 덕에 가만히 서 있어도 어질어질하던 차였다. 현덕은 준비를 껴안은 채로 피터의 배에 머리를 박았다.

“윽!”

피터가 배를 움켜잡고 바닥을 뒹굴었다.

때마침 우탄 엔터테인먼트 직원이 카메라를 들고 연습실로 찾아왔다.

“어…….”

직원은 반짝반짝해진 연습실 바닥과 그 위를 데굴데굴 구르는 세 사람을 보며 멈칫, 했다.

“혹시 이번 미션 안무 컨셉이 바닥 닦기 춤입니까?”

직원은 애써 긍정적으로 보고자 노력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연예계에서 밥벌이 하고 사는 업계 사람다운 태도였다.

“바닥 닦기 춤이라니여, 완전, 우주민 연습생 전용 춤인데, 그건.”

준비가 박장대소하며 계속 바닥을 뒹굴었다.

현덕은 저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등과 팔로 바닥을 문지르며 바닥을 닦는 건지 춤을 추는 건지 모를 춤을 추는 주민이 절로 상상되었다. 둠칫, 둠칫, 두둠칫. 그 찰진 리듬과 박자감이라니.

‘음, 우주민. 미안.’

마음속으로나마 주민에게 사과했으나 그래도 씰룩이는 입가를 누를 순 없었다.

피터는 얻어맞은 배가 아파서, 현덕과 준비는 웃느라. 셋 중 누구도 직원의 오해를 풀어줄 수 없었다. 덕분에 직원은 정말로 이번 미션의 안무가 이 바닥 닦기 춤이라고 믿게 되었다.

모처럼 회사의 연습생이 한창 인기를 얻고 있건만, 하필이면 이런 괴상한 안무가 걸리다니.

“이런.”

직원은 대놓고 낙담했다.

준비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직원의 모습을 보고는 더욱 좋아했다. 그래서 현덕은 차마, 오해라고 말해줄 수 없었다. 대신 직원의 사진 촬영 요청에는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우탄 엔터테인먼트 쪽에서 사진을 찍어가는 건 기사화하려는 목적일 터. 준비에게 도움이 될 테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세 연습생은 우탄 엔터테인먼트 직원의 지시에 따라 안무와 춤을 연습하는 척 포즈를 취했다. 한참 사진을 찍고 난 후에야 연습을 시작할 수 있었다.

연습은 막차 시간이 아슬아슬할 때 즈음 끝났다. 연습이 끝난 후 피터는 연습실을 나서며 촉팀 단톡방에 오늘 연습 영상을 올렸다. 다른 연습생들이 올린 영상을 확인하고, 아직 영상을 안 올린 연습생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원소혁 연습생이 연락을 씹네.”

피터는 가방을 들어 한쪽 어깨에 걸쳐 메며 소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 번, 네 번.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지금은 받을 수 없다는 안내만 나왔다.

피터는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썩은 달걀을 보는 요리사 같은 표정을 지었다. 현덕과 준비는 그런 피터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피터는 계속 핸드폰으로 소혁에게 전화를 걸고, 준비와 현덕은 그런 피터를 구경하며, 셋은 우탄 엔터테인먼트 건물을 나섰다. 버스는 막차 시간까지 시간이 넉넉했지만 지하철은 아슬아슬했다.

“둘 다 내일도 학교 가지? 피곤하겠다, 얼른들 집에 가서 쉬어. 오늘 고생 많았어.”

피터는 현덕과 준비를 얼른 보내려 했다. 현덕과 준비는 눈만 데구르르 굴리며 서로를 바라봤다. 피터가 소혁에게 연락하느라 정신이 없는 동안 현덕과 준비는 이미 마음이 통한 상태였다.

‘이대로 헤어지긴 아쉬운데.’

좀 더 함께 있고 싶었다.

현덕은 이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신기했다.

트라이 온 촬영 때문에 일주일에 하루 이틀 정도는 학교를 조퇴하거나 결석한다. 그러니 다른 날에는 절대 지각하지 않고 등교해서 성실히 공부해야 한다. 그게 당연한 일상이었건만. 내일 학교에 지각하거나 결석을 해도 좋으니 좀 더 셋이서 함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룡, 주민과 함께 있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자룡과 주민이야 같은 기획사 소속이니 매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준비와 피터는 아니었다.

‘트라이 온 방송이 끝나면, 아니, 프로그램이 끝나기 전에 내가 떨어지면……. 그래도 이렇게 만나서 함께할 수 있을까?’

‘피터 형이랑 준비는 당연히 끝까지 떨어지지 않고 데뷔하겠지만. 나는 아닐 텐데. 떨어지고 나면 이렇게 함께 할 수 있을까?’

초반에야 문자나 카톡 등으로 연락을 주고받겠지만. 준비와 피터가 데뷔를 하고 나면 바빠져서 연락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애초부터 명제를 다시 살펴봐야 하는 건지도 몰랐다. 아이돌과 평범한 고등학생이 계속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

중학교 때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도 고등학교가 갈리자 연락이 뜸해졌다.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들도 그런데, 하물며 데뷔한 아이돌과 프로그램에서 탈락해 일반인으로 돌아간 고등학생은 오죽할까.

그렇기에 지금, 이렇게 셋이서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소중했다.

현덕은 열심히 지하철 막차를 놓칠 방법을 생각해보았다. 물고 늘어질 건 연락이 안 되는 원소혁 연습생뿐이었다.

“원소혁 연습생한테 전화나 한 번 더 해 봐요, 통화되는 거만 보고 갈게요.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되는 걸까요.”

“맞아여, 걱정이 돼서 못 가겠잖아여.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어떡해여.”

옆에 서 있던 준비가 얼른 맞장구 쳤다.

“준비야, 너 원소혁 연습생 싫다고 하지 않았어? 왜 갑자기 걱정이야? 현덕이 너도. 언제부터 그렇게 원소혁 연습생을 챙겼어?”

피터가 의아해 했다.

“왜여? 같은 팀인데, 싫은 건 싫은 거고, 걱정은 걱정이져. 빨리 전화나 한 번 더 해 봐여.”

“계속 전화를 안 받는데 언제 받을 줄 알고 그걸 기다린다는 거야. 얼른 들어가라니까? 나도 버스 타러 가면서 계속 전화해볼 테니까. 연락되면 단톡방에 알려줄게.”

피터는 현덕과 준비의 마음을 몰라주고, 자꾸 둘을 지하철역 쪽으로 내몰았다. 미성년자 둘을 데리고 다니니 절로 보호자로서의 책임감이 훌쩍 자란 듯했다. 문제는 이 미성년자 둘이 지금 형 말을 들을 생각이 요만큼도 없다는 것이었다.

“아. 몰라여. 아무튼, 형 진짜 한국인 아니져? 왤케 한국말을 못 알아먹어. 그쳐, 현덕 형? 형도 지금 헤어지는 거 싫자나여?”

“응.”

현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마지막이라며, 다시 한번 소혁에게 전화를 걸려던 피터가 ‘어어?’ 하고 풍선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둘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당황한 건지, 소혁에게 전화를 걸려 했던 걸 까먹어 버렸다.

“아, 몰라 몰라. 눈치 없는 형은 버리고, 우리끼리 놀아여. 가여, 형.”

준비는 현덕의 손을 잡고는 건너편의 편의점으로 씩씩하게 걸어갔다. 현덕은 거절하지 않고 준비를 뒤따랐다.

피터는 자리에 우뚝 선 채로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현덕과 준비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얼떨떨해 보이던 얼굴에 웃음이 감돌았다.

“아하.”

피터는 가볍게 감탄했다.

현덕과 준비는 먹을 걸 사러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피터는 허둥지둥 그 뒤를 따랐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소혁에게 연락을 해보려던 생각은 잊은 지 오래였다.

“얘들아, 물건만 고르고 사지는 마. 사는 건 내가 살 테니까.”

큰 소리로 말하는 피터의 얼굴에도 슬쩍, 웃음이 어렸다.

잠시 후, 현덕과 준비는 한 아름 과자와 음료를 안고 편의점을 나섰다. 피터가 긴 영수증을 받아들 동안 편의점 앞의 플라스틱 테이블에 과자와 음료를 늘어놓았다.

세 사람은 테이블에 빙 둘러앉았다. 우선 현덕과 준비는 집에 전화했다. 늦게 들어갈 것 같다고 포부를 밝혔다.

준비의 어머니는 지금 데리러 갈 테니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 준비는 괜찮다고 투덜댔지만 어머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준비네 집이 멀어서 데리러 올 때까지 시간이 꽤 걸린다는 것이었다.

피터는 현덕과 준비가 각자의 집에 전화를 하는 걸 구경했다. 그에게는 전화를 걸 사람이 없었다.

“오오, 엄마는 내가 완전 앤 줄 안다니까요.”

준비가 투덜대며 테이블 위에 산처럼 쌓인 과자 꾸러미 속에서 캔 음료를 세 개 꺼냈다.

‘준비야, 너 애 맞아.’

‘이러니 걱정하시지.’

현덕과 피터는 목구멍을 간질이는 말을 애써 꿀꺽 삼켰다.

“전 요즘에 이것만 마셔여. 형들도 한 번 마셔 봐여.”

준비는 현덕과 피터의 앞에 캔 음료를 내려놓고는 바로 자신의 것을 땄다.

푸쉭-.

캔을 따는 소리가 상쾌했다.

캔 음료는 복숭아향이 첨가된 이온 음료였다. 예전에 유명했던 음료가 새로 리뉴얼되어 출시된 것이었다.

“우리 건배해여!”

준비가 캔을 높이 들어 올렸다. 현덕과 피터는 어린 게 무슨 건배냐고 말하는 대신 자신의 몫인 캔 음료를 높이 들었다. 둘 다 준비에게는 너무 물렀다.

“쨘!”

준비가 입으로 소리 내며 현덕과 피터의 캔에 자신의 캔을 부딪쳤다.

“우리 꼭 다 함께 끝까지 살아남아서, 아무도 떨어지지 말고 같이 데뷔해여. 약속!”

준비가 소원을 빌고는 음료를 원샷했다.

“그래, 꼭 그래야지. 계속 이렇게 셋이서 함께 있을 수 있다면야.”

피터가 픽, 웃으며 화답했다.

“열심히 준비하고 있으니까 꼭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마지막까지 힘내자.”

현덕은 자신은 곧 떨어질 것 같다는 불길한 말은 꾹 삼켰다.

캔에서 흘러나온 복숭아 향이 주변을 감돌았다. 세 사람은 꼭 복숭아나무 아래에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절로 어깨가 늘어지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준비는 복숭아 향이 나는 음료를 정말 좋아하는지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세 캔을 비웠다. 현덕은 천천히 마시라며 준비의 등과 허리를 쓸어내렸다. 피터는 신기해하며 얼마나 더 마실 수 있느냐 묻고 네 번째 캔을 내밀었다가 현덕에게 한소리 들었다.

세 사람은 음료수를 마시고 과자를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별할 것이 없는 대화였다. 굳이 막차를 놓치고 편의점 앞에 모여 앉아서 할 만큼 중요한 내용은 없었다. 셋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의미 있고 즐거웠다.

하지만 막상 새벽 1시가 되어가니, 준비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현덕은 준비가 앉아 있는 의자를 자신 쪽으로 돌렸다. 준비가 자신의 다리를 베고 눕도록 하고 재킷을 벗어 덮어주었다. 피터도 옆에 걸쳐 놓았던 재킷을 한 겹 더 보탰다.

밤바람이 쌀쌀하건만. 두 형의 옷으로 둘둘 둘러싸인 준비는 추운 줄 모르고 도롱도롱 곤하게 잠들었다.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애벌레였다. 현덕은 준비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현덕과 피터는 준비의 부모님이 도착하기 전까지 좀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역시나 별 내용은 없었다.

문득, 피터가 새우깡을 집어 먹으며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악플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지?”

숱하게 들었던 질문이었다. 가족부터 시작해 친구들, 트라이 온에서 알게 된 동료 연습생들까지.

“네, 뭐. 그렇죠.”

현덕은 복숭아향 음료를 꿀꺽 마시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악플을 견디지 못해 연습도 땡땡이치고 한강으로 걸어갔던 그날과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주변의 도움과 주민의 위로. 그것들이 현덕을 지탱해주었기에 가능한 변화였다.

“저만 당했던 건 아니고 다른 연습생들도 함께 고생하고 있었던 거고. 또 다행히 제작진 측에서 빠르게 대응해줘서 괜찮았어요.”

현덕은 하도 말해서 입에 붙은 답을 꺼냈다.

대부분의 사람은 현덕의 대답을 듣고는 노골적으로 안심했다. 대단하다고, 그 단단한 멘탈이 부럽다고 하며 현덕이 전혀 상처받지 않았을 거라 단정지었다. 현덕은 악플에 상처받지 않은 사람처럼 대했다. 그건 이제 막 아물기 시작한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라는 걸, 아무도 몰랐다.

악의 없는 선의, 혹은 악의가 조금 섞인 칭찬. 현덕은 그런 것들 앞에서 기꺼이 웃어 보였다.

“괜찮았을 리가 없잖아.”

피터는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어…….”

현덕은 조금 당황하였다.

이렇게 되물은 사람은 이제까지 없었다.

누구보다 가까운 연습생인 자룡과 주민은 현덕을 너무 잘 알았다. 그 둘은 애초에 ‘괜찮아?’라고 묻지 않았다. 걱정하고 있다는 걸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자룡은 시간이 날 때마다 현덕을 찾아왔다. 딱히 할 말이 없어도, 별일이 없어도 멀뚱멀뚱하니 현덕의 옆에 있어 주었다. 때때로 2배속 댄스를 춰보자며 현덕을 잡아끌기도 했다. 그게 자룡의 위로 방식이었다.

주민은 재벌 3세다운 돈 지랄을 보여주었다. 시황그룹의 변호사팀을 보내고, 시황그룹 IT 계열사를 투입해 악플러들을 색출했다. 현덕이 ‘괜찮아?’라는 질문을 받게 만든 원인을 아예 뿌리 뽑아버리려고 했다.

피터는 묘하게도, 경계선에 걸쳐 있었다. 현덕에게 ‘괜찮아?’라고 물어보는 사람들보다는 가깝지만, 자룡이나 주민만큼 현덕을 배려해 주는 것도 아닌.

그래서일까. 현덕은 ‘괜찮아?’라고 물어보는 사람들에게도, 주민과 자룡에게도 하지 못한 말을 툭- 내뱉을 수 있었다.

“사실 안 괜찮았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괜찮아지더라고요.”

“회복력이 대단하네.”

“아니요, 하나도 대단하지 않아요. 주변의 도움이 커서 그럴 수 있었던 거였죠.”

“그래도, 버틴 건 너잖아.”

“그런가요?”

현덕은 뒷목을 긁적이다가 무심코 말했다.

“그래서 계속 생각이 나더라구요. 트윈 트윙클 때 항우영 선배님과 윤우희 선배님이.”

“…….”

피터의 얼굴에서 웃음이 가셨다.

“트윈 트윙클?”

되묻는 목소리가 치가웠다. 현덕은 뒤척이는 준비를 돌보느라 그걸 알아채지 못했다. 피터가 어떤 표정으로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지 전혀 모른 채 준비의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 넘겼다.

“네. 이거 트라이 온 전에 했던 건데. 혹시 형도 보셨나요?”

“……아니.”

“아, 형은 그때 군대에 있었나? 아니, 외국에 있었던 때인가?”

현덕이 기억이 더듬어 보았다. 생방송을 본 게 아니라, 트윈 트윙클의 방영 시점이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내가 외국에 있을 때였어.”

피터가 쓰게 웃었다.

어쩐 일인지, 보지 않은 사람이 현덕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이상할 법도 하건만. 현덕은 그 점은 의심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못 봤겠네요.”

현덕은 그제야 피터를 보았다.

‘어라?’

우탄 엔터테인먼트 연습생들과 트러블이 있을 때도 싱글싱글 웃고 있던 사람이 태어나 한 번도 웃어본 적 없다는 듯 굴었다. 무표정한 얼굴에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새벽 한 시가 넘는 까만 밤에 잘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놀랍게도 그 분위기가 피터와 잘 어울렸다.

‘웃지 않는 피터 형 얼굴은 이렇구나.’

몇 달 동안 알고 지냈건만,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피터는 지독히 외롭고, 또 피곤해 보였다.

새삼 피터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그 이후로도, 그리고 오늘도 피터는 한결같이 웃고 있었다. 어쩜 그렇게 그림을 그린 듯 똑같이 웃을 수 있는지 의아했던 건 잠깐이었다.

그 웃음에 익숙해져서 잠시 잊고 있었다.

‘형도 준비처럼…….’

처음 피터의 웃는 얼굴을 보며 생각했던 것을.

“왜 트윈 트윙클이 생각났어?”

피터가 물었다.

쓸쓸한 목소리가 빈 허공에서 흩어졌다. 버석버석한 소리가 들리는 착각이 들만치 메말라 있었다.

현덕은 손을 내밀어 빈 캔을 만지작거리는 피터의 손을 잡았다. 새벽 한 시의 만용일지도 모르고, 제게 민낯을 보이는 피터를 향한 무조건적인 반응일지도 몰랐다. 피터는 움찔, 했지만 피하지 않았다.

피터의 손은 마르고 가늘었다. 한겨울의 나뭇가지를 손에 쥐는 듯 추웠다.

“트라이 온 출연 고민할 때, 트윈 트윙클을 다시 보기로 쭉 봤어요.”

피터는 한 손에 턱을 괴고 현덕의 이야기를 들었다.

“생방송 때는 그런 프로그램 있는지도 몰랐거든요. 저 웃기는 녀석이죠?”

현덕은 트윈 트윙클을 안 봤다고 하니 놀라던 자룡을 떠올리며 웃었다.

이전의 삶에서 현덕은 연예계나 연예인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딱히 즐겨보는 드라마도 없었다. 그랬던 현덕이 아이돌 연습생이 되었다. 트라이 온에 출연도 하고 있다.

중학교 교문 앞에서 길거리 캐스팅을 당했을 때도, 아이돌 연습생이란 걸 한번 해보자 마음먹었을 때도, 자신의 삶이 이렇게 바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방과 후에 특별 활동을 하는 느낌으로 시작했을 뿐인데.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다른 삶을 살게 되기 전, 가봤던 길과 가보지 않은 길이 갈라지는 길목에 섰을 때 윤우희 사건에 큰 영향을 받았다.

‘비슷한 경험을 했어. 강도는 훨씬 약했지만.’

현덕은 잠깐이지만 악플에 시달렸던 때를 떠올렸다. 인터넷에서 자신을 욕하는 글이 올라오고, 말도 안 되는 루머가 댓글로 달리는 걸 실시간으로 목격했던 그날.

무섭고 너무 힘든데도, 게시글과 댓글을 보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구렁텅이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거라는 걸 알면서도 악플을 보고 또 봤다.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을 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게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알았지만 심장이 쿵쾅쿵쾅 뛰어서, 이성적인 목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사람의 시선이 무서워서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몸을 웅크렸다.

기획사 연습도 땡땡이를 치고 한참 걸었다. 걷고 또 걸으며,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썼다. 스스로를 달래려 하였지만 쉽지 않았다.

친한 친구들에게 연락해 하소연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부모님께는 더더욱 말할 수 없었다. 오롯이 혼자 견디고 버텨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참고 버티면 괜찮아지겠지. 그저 내가 견뎌내야 하는 거겠지. 이 또한 지나가겠지. 그렇게 생각할 때, 거짓말처럼 주민이 나타났다. 부모님께서 손을 내밀었고, 기획사가 일찍 움직였다.

현덕은 분명 트라이 온에 참가하기로 결정했을 때 오 팀장에게 말했다. 만일 트윈 트윙클에서 윤우희 사건 같은 게 자신에게 일어난다면, 항우영이나 윤우희 때처럼 자신을 버리지 말라고. 오 팀장은 그러겠다고 했다. 오 팀장은 약속을 지켰다.

현덕의 집에 모인 변호사들이 활동을 시작하며, 변호사들은 현덕에게 정신과 상담을 권했다. 현덕은 자신의 상태가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해 거절했지만. 가끔은 ‘그냥 치료를 받을 걸 그랬나.’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도 인터넷 글을 보다 자신의 이름이 보이면, 그 내용을 확인하기 전에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마음에 생긴 상처가 쉽게 나을 리 없지. 천천히 나아지겠지.’라고 생각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넘기곤 했지만, 정말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나마 이 정도라도 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주변의 관심과 도움 덕분이었다. 현덕은 일이 생겼을 때, 그걸 혼자 참고 견뎌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러지 말라며 현덕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그들은 든든한 지지대가 되어 휘청거리는 현덕을 지탱해주었다.

날 걱정해주고 날 사랑해주고, 인터넷에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더러운 소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 있다.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내 주변 사람들은 날 믿고 있다.

그것이 현덕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마음이 안정되자 인터넷의 글들도 다시 보였다.

처음에 봤을 때는 온통 자신에 대한 욕과 비난만 가득해 보였다. 댓글이 우르르 달려 있는 걸 죽- 읽으면 나쁜 댓글만 눈에 들어왔다. 좋은 댓글 백 개보다 악플 하나가 더 눈에 들어왔다.

현덕을 응원하고, 믿어주는 게시글과 댓글도 잔뜩 있었는데. 그게 처음엔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야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트라이 온을 본 모든 사람이 현덕의 태도를 비난하고, 얼토당토않은 루머를 진짜처럼 믿는 건 아니었다. 현덕의 팬클럽을 중심으로 루머에 강경 대응하겠다는 입장문이 발표되었다. 오렌지 삼총사와 테두리를 지지하는 팬들도 힘이 닿는 대로 현덕을 응원하는 글을 써주고, 어이없는 루머를 만드는 댓글과 투덕투덕 싸워주었다.

분명 인터넷에는 현덕을 비난하는 글들로 도배되었다. 하지만 그만큼 현덕을 응원하고 지지해주는 글들도 많았다. 그걸 깨닫고야 현덕은 까맣게 그을린 마음을 닦을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난 정말 운이 좋은 거구나.’

현덕은 자신이 얼마나 행운아인지 잘 알았다.

판사인 아버지, 연습생으로 소속된 회사는 대형 기획사, 애인은 재벌 3세. 그리고 현덕을 걱정해주고 믿어주는 가족과 친구들, 동료 연습생들.

현덕은 보통의 연습생이라면 하나도 가지지 못할 것들을 차고 넘치도록 가지고 있었다. 그것들이 강철의 방패와 갑옷이 되어 현덕을 지켜주었다.

자연히 트윈 트윙클에 출연했던 항우영과 윤우희가 떠올랐다.

윤우희는 TV 출연 중 불우하게도 교통사고로 죽었다. 갑작스러운 사고였고 예기치 않은 비극이었다. 그녀는 꽃다운 나이에 그 빛나는 재능을 세상에 다 펼쳐 보이지도 못하고 죽었다. 그 요절은 애도 받아야 마땅한 것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는 대신 소비했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온갖 루머로 더럽혀졌다. 왕따였다느니, 죽어도 싼 사람이었다느니, 사실은 사고가 아니라 살해당한 거였다느니, 자살이라느니.

그녀의 친구는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가해자가 됐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핫한 가십이라서, 누가 말해줘서- 아무렇지 않게 항우영이 윤우희를 죽게 만든 거라고들 말했다. 글을 쓰고 댓글을 달았다. 그래서 윤우희를 죽인 사람은 교통사고를 일으킨 운전자가 아니라 그녀와 함께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항우영이 되었다.

죽은 윤우희와 살아 있는 항우영은 전혀 보호를 받지 못했다. 맨몸으로 세상 사람들 앞에 서서 갈가리 찢겨야 했다.

‘만약 그때 항우영이 나처럼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의 주변을 다시 보게 되었다.

트라이 온 방송 이후, 연습생들은 악플에 시달리거나 사생에게 무방비하게 노출되었다. 연습생들 대부분은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TV에 보이는 것으로 비난을 받고, 어디선가 시작된 루머로 고통 받고 있었다. 예전에 윤우희와 항우영처럼.

그런 현실을 깨닫고도 못 본 척, 모르는 척, 홀로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을 순 없었다. 그래서 현덕은 보호받는 주제에, 무리한 부탁이요 요구라는 걸 알면서도 자신뿐 아니라 다른 연습생들도 자신만큼 보호받을 수 있도록 만들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현덕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겨우 고등학생. 그것도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출연 중인 한낱 연습생에 불과한 현덕이 무얼 할 수 있을까. 현덕은 그저 부탁할 뿐이었다.

현덕을 좋아하는 주민의 재력. 현덕의 아버지를 존경하는 박지혜 변호사의 활약. 현덕이 소속된 TE엔터테인먼트의 인맥. 그런 것들이 현덕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움직였다.

현덕은 무력함을 느꼈다.

그때, 손가락 사이로 가느다란 실 한 올이 감겼다. 너무 가느다래서 알지 못하고 흘려버릴 뻔한 실마리. 현덕, 자신의 미래에 대한 작은 실마리였다.

현덕은 이러한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트라이 온 연습생들을 위한 변호사단이 출범할 때도, 그 공을 자신에게 돌리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그저 다른 연습생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연습생들 중 하나이길 원했다.

누군가에게 굳이 뽐내며 말해 대단하다는 칭찬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 너 잘났다는 핀잔을 듣고 싶지도 않았다. 나댄다고 욕을 먹고 싶지도 않았다. 모든 게 다 네 덕이라는 공치사를 받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자룡에게조차 말하지 않았건만. 그 무겁게 닫아 놓았던 마음의 빗장이 오늘, 피터의 앞에서는 쉽게 열렸다.

그건 아마도, 피터라면 아무렇지 않게 들어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리라.

과연 피터는 현덕의 생각대로였다, 현덕을 칭찬하지도, 핀잔을 주지도 않았다. 욕을 하지도 않았다. 대단하다며 공치사하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히 말하며 고개를 RM덕일 뿐이었다.

“그랬구나.”

피터는 현덕의 손에 깍지를 꼈다.

지금까지는 현덕이 피터의 손을 잡고 있었다. 피터는 현덕을 뿌리치지는 않았지만 현덕의 손을 마주 잡아주지도 않았다. 그랬던 피터가 이제는 현덕의 손을 꼭 붙잡았다.

“나는 왜 너처럼 생각하지 못했을까.”

피터가 물었다. 아니, 혼잣말일지도 몰랐다.

“당연하죠, 형은 나만큼 악플이 안 달렸잖아요.”

“그래서 그런 걸까? 똑같은 상황에 처해본 적이 없어서?”

“원래 인간은 자신이 경험해 본 것만 알 수 있는 법이니까요.”

“글쎄. 내가 너였어도 난, 너처럼 그러지 못했을 거 같은데.”

피터는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현덕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말랑하고 따뜻한 느낌, 온기가 피터에게 어떤 의미일지 현덕은 알지 못했다.

‘그래, 모르겠지. 이 맹하고 순한 것.’

피터의 얼굴에 웃음이 돌아왔다.

“고마워, 현덕아.”

“고맙다고요?”

“그래, 무척.”

피터는 순순히 답했다.

피터의 등 뒤에서 편의점 불빛이 비쳤다. 때문에 역광이 드리워서 피터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현덕은 피터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뭘까.’

뭔가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게 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숨이 가빠졌다. 피터에게 붙잡힌 손이 뜨거웠다. 피터의 마른 손가락이 한겨울의 나뭇가지가 아니라 뜨겁게 달아오른 인두처럼 느껴졌다. 그의 손이 닿은 자리마다 화상을 입은 것처럼 화끈해졌다.

현덕은 제 이상한 상태를 피터에게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피터와의 접촉을 줄이려고 손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피터는 놔주지 않았다.

그때, 편의점 앞에 승용차가 한 대 멈춰 섰다. 운전석에서 중년의 여성이 내렸다. 한눈에 봐도 준비의 어머니인 걸 알 수 있었다. 여인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현덕과 피터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아, 여기요! 저희 맞아요.”

현덕은 피터에게 잡혀 있던 손을 빼내 번쩍 손을 들었다. 피터는 어쩔 수 없이 현덕의 손을 놓아주어야 했다.

둘 사이에 잠깐 흘렀던 기묘한 분위기는 준비의 어머니 덕분에 와장창 깨졌다. 피터는 아쉬움 가득한 한숨을, 현덕은 어째서인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준비의 어머니는 현덕의 허벅지를 베고 잠든 준비를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아들이 항상 큰 폐를 끼치고 있다며, 현덕과 피터에게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는 현덕의 도움을 받아 준비를 등에 업었다.

준비의 어머니는 키가 크고 호리호리했다. 준비를 업고도 한 번 휘청이지도 않았다.

“이쪽이 김현덕 연습생 맞죠?”

“아, 네. 안녕하세요.”

현덕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다시 인사를 했다.

“TV에 나오는 거랑 완전 똑같네. 아니, 실물로 보니까 더 예쁘네요. 우리 준비가 맨날 그쪽 이야기만 해요. 그래서 한번 꼭 실물로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보네요.”

준비 어머니는 현덕을 매우 반가워했다.

“피터 윤 연습생도. 반가워요. 준비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준비 어머니는 이 정도 인사로 피터에 대한 예의는 지켰다고 생각했는지, 아예 현덕 쪽으로 몸을 틀었다. 홀대 아닌 홀대를 받은 피터는 하하, 웃었다.

“우리 준비가 외동으로 커서 외로움도 많이 타고, 맨날 형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노래를 불렀거든요. 그런데 진짜 형이 생긴 거 같다고, 엄청 좋아해요. 사실 트라이 온도, 준비는 나가기 싫어했는데 기획사 측에서 준비한테 좋은 기회라고 해서……. 저랑 남편은 이쪽에는 전혀 문외한이라. 그냥 좋다고 하고, 나중에 준비도 자기가 나가겠다고 그래서 하라고는 했는데……. 벌써 티비에 나오고 그러면 어쩌나, 많이 걱정했거든요.”

“아, 그렇군요.”

현덕이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봤을 때 굉장히 의욕적이었는데. 사실 나오기 싫었던 거구나.’

항상 최종 선발에 들어 꼭 데뷔하겠다고 노래를 부르기에, 다른 연습생이라면 몰라도 준비는 트라이 온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거라고 생각했건만. 그게 아니었다.

‘혹시 다른 연습생들이 준비를 떠밀었다거나, 그런 걸까.’

오늘 낮에 보았던 우탄 엔터테인먼트의 다른 연습생들이 생각났다. 트라이 온 방송 전에 각 기획사에서 A급 연습생은 숨기고 그 아래 연습생들을 억지로 내보내는 분위기였다는 것도 떠올랐다.

우탄 엔터테인먼트의 다른 연습생들이 준비를 희생양으로 내보낸 걸까. 만약 그런 거라면 그들은 자신들이 준비를 구박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리라. 그들이 나가기 싫어했던 트라이 온은 대박이 났고, 준비는 초통령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인기를 얻고 있으니까.

준비 어머니는 등에서 주르륵 흘러내리는 준비를 추켜올리며 말을 이었다.

“아직 어린데 합숙 촬영이라고 해서 걱정되고 그랬는데, 1부 끝나고 나오는데 얼굴이 너무 밝지 뭐예요. 집에 와서도 내내 김현덕 연습생 이야기만 하고. 진짜 그쪽이 자기 형이었으면 좋겠다고, 지금 우리 준비가 다니는 저 기획사랑 계약 취소하고 김현덕 연습생 있는 기획사로 가고 싶다고 그러고. 아무튼, 우리 준비가 그쪽을 정말로 많이 좋아해요.”

“저도 준비를 아주 많이 좋아해요.”

현덕은 웃으며 차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준비를 뒷좌석에 눕히는 걸 도왔다. 피터 역시 잽싸게 다가가 도왔으나 준비 어머니의 눈길 한 조각 받지 못했다.

“아우, 말만으로도 고마워요.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 준비 좀 잘 부탁해요. 보면 알겠지만 겉이나 속이나 영락없이 애라. 하지만 나쁜 애는 아니거든요. 속이 여리고 착해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착하기도 하고, 아직 어린데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 부르고. 제가 배울 점이 정말 많은 거 같아요.”

“어머나, 그쪽이 보기엔 우리 준비가 그래요? 하긴 우리 준비가 어릴 때부터 알아줬다니까요.”

준비 어머니는 핸드폰을 꺼내 준비의 백일 때 사진부터 다섯 살 때 외할머니 앞에서 재롱부리는 영상까지 주려했다. 현덕은 붙잡혀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벌써 새벽 두 시가 다 되가네. 현덕아, 너 내일도 학교 가야 하지?”

피터가 적절히 끼어들었다.

“어머, 나 좀 봐. 미안해요.”

그제야 준비 어머니는 아들 자랑을 포기하고 물러섰다. 대신 피터와 현덕에게 집 근처까지 차로 데려다주겠다며 타라고 권했다.

피터와 현덕은 손을 내저었다. 준비는 현덕과 서울 정반대에 살았다. 피터 또한 가는 방향이 다르다며 정중히 사양했다.

아쉬워하는 준비 어머니를 떠나보낸 뒤 피터가 현덕에게 찡긋, 윙크를 했다.

“저 차를 탔으면 도착할 때까지 내내 준비의 성장 스토리를 들어야 했을 거야. 안 타길 잘했지?”

“한번 들어보고는 싶은데, 다음을 기약할래요.”

“준비가 유명해지면 나중에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방영할 테니까, 그때 봐도 늦지 않을 거야.”

현덕과 피터는 서로 마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일어선 김에 둘은 과자 봉지와 빈 캔을 모아 버리고 자리를 정리했다. 피터는 택시를 잡아 현덕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만 원짜리 몇 장을 꺼내 운전석에 드렸다. 현덕이 한사코 거절했으나 피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거스름돈 잘 받아서 내일 올 때 음료수나 사와. 알았지?”

그렇게 말하며 어른스럽게 웃었다.

현덕은 내일 반드시 제일 비싼 음료수를 사가리라 다짐했다.

“잘 가, 현덕아. 오늘…… 고마웠어.”

“고맙긴요. 제가 더 고마웠어요. 형, 내일 또 봐요.”

“그래.”

피터는 현덕을 배웅하며, 오랫동안 같은 자리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셋이서 함께한 하루가 끝났다.

***

택시를 타고 오는 중 현덕은 꾸벅꾸벅 졸았다. 처음엔 현덕을 알아보고 이것저것 말을 걸던 택시 기사는 현덕이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졸자 입을 닫아걸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운전해주었다.

집 앞에 도착한 현덕은 비몽사몽 상태로 거스름돈을 받고 감사 인사를 한 뒤 내렸다. 택시가 돌아 나가는 걸 본 뒤 집에 들어가려 돌아서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 현덕을 불렀다.

“김현덕.”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듣는 순간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잠이 싹 달아났다.

아파트로 들어가는 입구 앞엔 작은 놀이터가 있었다. 놀이터에는 어른이 타기엔 너무 낮은 그네가 있었는데, 키 큰 남자가 거기 앉아 있었다.

끼익.

그네가 버겁다며 비명을 질렀다. 그런데도 남자는 긴 다리를 까딱이며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신 현덕을 향해 손을 까딱였다. 때마침 달을 가렸던 구름이 옆으로 빗겨나고, 환한 달빛이 그를 비췄다.

“주민 형?”

“응, 현덕아.”

그는 다시 현덕에게 손짓했다. 현덕은 주문에 걸린 듯 그를 향해 걸어갔다. 느릿한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놀이터의 폭신한 바닥을 밟을 땐 경보 수준이 되었다.

어떻게 항상, 가장 보고 싶을 때 제게 와주는 걸까. 주민은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당연하면서도 갑작스러웠다.

“이번엔 또 어떻게 왔어요?”

현덕이 주민에게 손을 내밀었다. 주민은 그 손을 확- 잡아당겼다.

“어어?”

현덕의 몸이 기우뚱, 앞으로 기울었다. 발에 밟히는 모래 때문에 균형을 잡기 힘들었다.

주민은 현덕을 냉큼 껴안았다.

끼익.

두 사람의 무게가 실리자 그네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네에 매달린 두 사람은 그네의 고충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에게 충실할 뿐이었다.

주민이 현덕의 어깨와 허리에 팔을 두르고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현덕의 목에 코를 박고 가득 숨을 들이쉬었다. 하아. 더운 숨이 현덕의 어깨에서 부서졌다.

“이제 살 것 같네.”

겨우 숨이 트인 사람처럼 말했다. 주민에게 붙잡혀 당황했던 현덕은 이내 몸에 힘을 풀고 주민에게 기댔다. 끼익. 그네가 또 소리를 질렀다.

왜 여기에 있냐. 설마 날 기다린 거냐. 몇 시에 왔냐. 여태 기다린 거냐, 등등.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어떤 말도 주민의 한숨을 닮은 숨소리에 비하면 가벼웠다.

현덕은 주민의 어깨를 마주 껴안고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주민은 그 손길에 취한 사람처럼 깊이, 더 깊이 현덕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

“…….”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껴안았다. 주민은 현덕의 목에 얼굴을 묻고는 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현덕은 그런 주민을 밀어내지 않았다.

현덕이 어정쩡한 자세로 안겨 있어 불편해하자, 주민은 아예 현덕을 제 허벅지에 앉히고 두 팔로 허리를 붙잡았다.

“이 자세도 이상한데.”

“이상하면 이상한 대로 있어.”

주민은 꿀 떨어질 듯 달콤하게 웃으며 가차없이 말했다.

현덕은 그런 주민의 얼굴을 보며 다시금 항우영과 윤우희를 떠올렸다. 그 둘. 그리고 자신과 주민. 전혀 닮은 점이 없는 조합이었다. 하지만 현덕은 그 둘을 생각할 때면 언제나 주민이 연상되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자신에 대한 비난을 보고 들었을 때, 현덕은 차라리 자신이 이런 일을 당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연습생이었으면 어땠을까.

자룡이었다면?

데뷔조에 들지 못하고 다리 위에 허망하게 서 있던 자룡의 옛날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 트라이 온에서 날아다니고 있는, 저토록 반짝반짝 빛나는 자룡을 보노라면 그때의 모습이 꿈인 듯했다.

그간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마냥 찬사받고 칭찬만 받아야 할 사람이건만. 말도 안 되는 꼬투리가 잡히고 그게 루머가 되어 눈덩이처럼 불어나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다면.

얼마나 상처 입고 혼자 괴로워할까.

자룡을 처음 만났던 것도 TE엔터테인먼트 복도 구석에서 홀로 울고 있는 자룡을 발견해서였다. 또 그렇게 혼자 숨어 울겠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시큰거렸다.

만약 준비가 당했으면 어떨까.

제 다리를 베고 새근새근 잠든 준비의 얼굴이 생각났다. 그렇게 어린 애가 악플을 받는다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죄를 짓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요즘 슬슬, 어린 게 너무 나댄다며 말도 안 되는 게시글이 올라오곤 했다. 그걸 볼 때마다 현덕은 댓글을 달 수 있는 게시글이면 꼭꼭 이런 글 함부로 쓰지 말라고 댓글을 달곤 했다. 꼬박꼬박 신고도 했다.

그리고 우주민.

현덕은 주민을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안 되지만 주민은 특히나 더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울컥, 울음을 닮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현덕은 그걸 꾹 내리눌렀다. 주민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왔어요.”

대신 아무 말이나 생각나는 대로 내뱉었다. 결국, 혀끝에 맴돌던 값어치 없는 말들 중 하나가 튀어나왔다.

주민은 피식 웃으며 턱으로 놀이터 저편의 주차장을 가리켰다. 밤중에도 유독 까맣게 빛나는, 꽤 비싸 보이는 차가 한 대 서 있었다. 운전석에 사람이 타고 있지는 않았다.

“직접? 운전할 줄 알아요?”

“응. 나이가 차자마자 바로.”

빌어먹을 집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탈주극이라도 찍고 싶어서, 운전면허를 땄다. 물론 현실은 영화나 드라마와는 달랐다. 어딜 어떻게 도망가든 시황그룹 왕회장의 손바닥 안이었으니까.

그런 재미없는 이야기는 다 잘라내고, 주민은 간단히 대답했다. 현덕은 주민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주민이 운전면허 시험을 어떻게 준비했을지 잘 상상이 가질 않았다.

‘우주민도 학원에 가서 배웠을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이거였다. ‘이 성질머리로?’

학원 선생이 보조석에 앉아 가르쳐주다 더는 못 하겠다며 뛰쳐나가진 않았을까. 잔소리 같은 가르침에 열 받은 주민이 확- 차를 들이받진 않았을까. 온갖 생각이 들었다. 그 덕에 현덕의 얼굴에서 웃음이 피어났다.

현덕이 말없이 킥킥거리자 주민이 부푼 뺨을 이로 깨물었다. 말랑하고 달달해 보여서, 언젠가 꼭 한 번 깨물어 보고 싶었는데. 이참에 한 번 시도해봤다.

생각처럼 달진 않았다. 약간 짭조름했다. 그래서 더 식욕이 돌았다. 성욕은 식욕을 닮은 것이라는 누군가의 헛소리가 생각났다. 마냥 근거 없는 헛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주민의 머릿속에서 현덕은 이 조그만 놀이터 여기저기에서 엎어지고 쓰러져 울었다. 그네에 매달려 앞뒤로 움직이며 주민에게 치받쳤고, 나무로 만든 시소에 엎드려 허리만 든 채로 울었다. 미끄럼틀에 누워 주민을 올려다보며 몸부림치기도 했다. 부끄럽다고 도망치다가 스프링에 달린 목마에 매달려 몸이 반 접힌 채로 흔들리기도 했다.

현덕은 매일 밤 자신이 주민의 머릿속에서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리라.

참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복을 받기 전에는 지독히 피곤하리로다. 주민은 현덕을 끌어안은 채로 끊길 듯 말 듯 한 인내심과 밀당하며, 지독한 피로감을 느꼈다. 문제는 그 피로가 짜증나긴 커녕 행복하다는 데 있었다.

변태도 이런 변태가 없었다. 참느라 지치고 피곤한 게 행복이라니. 하지만 제 품에 얌전히 안겨 있는 현덕을 보노라면, 주민은 제가 그런 변태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주민이 긴 숨을 내쉬며 현덕의 얼굴에 제 머리를 부볐다. 늑대나 호랑이 같은 맹수가 제 사육사에게 애교를 부리는 것 같았다.

현덕은 두 손으로 주민의 양 뺨을 붙잡았다. 고개를 들게 해서 눈을 마주쳤다. 피곤해 보이는 주민의 얼굴이 현덕 위에 드리웠다.

밤하늘은 까맸다. 현덕을 내려다보는 주민의 두 눈은 그 밤하늘보다 더 까맸다. 그 까만 눈동자에 현덕이 비쳤다. 오직 현덕만 비쳤다.

“형.”

“응.”

“우주민.”

“응.”

현덕은 앞으로 우수수 흘러내리는 주민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얼굴이 가까워지니 두 사람의 숨이 섞였다. 두 사람의 숨은 이네 한 호흡이 되었다. 함께 숨을 내쉬고 다시 들이쉬었다. 당장이라도 입을 맞춰도 될 정도로 서로가 가까웠다.

새벽 두 시의 감성은 현덕에게서 부끄러움을 앗아갔다.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너를 만나기 위해서, 다시 한번 삶을 산 게 아닐까.’

주민을 TV로만 단 한 번 봤을 뿐인 삶이 아무 의미가 없어서. 그래서 신이 시간을 되돌려서, 다시 한번 기회를 주었을지도 모른다. 우주민 만나라고.

그렇게 생각하니 더는 견딜 수 없었다. 현덕은 저를 바라보는 주민에게 먼저 입을 맞췄다.

새의 부리를 쪼듯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살짝 입술을 맞댔다가 떨어졌다. 그러자 주민이 다급히 쫓아와 다시 입술을 부딪쳤다. 성급히 아랫입술을 빨고 깨물더니, 현덕이 깨물린 입술이 아파 입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현덕의 입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흐읏, 주, 민형- 읍.”

몇 번째일지 모를 입맞춤이건만. 그럼에도 매번 다급하고, 절실했다.

주민은 내내 공기가 없는 우주에 버려져 있다가 겨우 지구로 돌아온 듯 현덕의 숨을 빼앗았다. 입안의 말랑한 살을 혀로 까슬하게 쓸었다. 현덕이 놀라 파드득, 몸을 떨면 괜찮다는 듯 허리를 쓸어내렸다. 그 손길이 야릇하게 등의 움푹 파인 선을 쓸어내리며 허리 끝의 아슬아슬한 선까지 닿았다.

현덕은 키스가 깊어지자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저 주민이 주는 자극에 취해 휩쓸렸다. 처음엔 주민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몸을 지탱하려 애썼지만, 주민이 현덕의 혀를 제 입안으로 빨아들여 제 혀로 비비자 온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잠깐, 어쩌면 영원이라 불릴 수 있을 만큼 오랜 시간 뒤에야. 주민은 겨우 현덕을 놓아주었다. 주민은 늘어지는 현덕을 꽉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몸이 한 치의 틈 없이 맞붙었다.

현덕은 주민과 이마를 맞대고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흐읏…….”

울음을 닮은 숨이 자꾸 새어 나왔다. 그 숨이 주민의 얼굴에 부딪쳤다. 주민은 현덕의 아랫입술을 혀로 핥으며 다시 치밀어 오르는 욕구를 애써 참았다.

조용한 놀이터에 두 사람의 숨소리만 가득 찼다.

후희를 즐기듯, 혹은 다시 한번 입 맞출 기회를 노리듯. 주민은 현덕의 얼굴 여기저기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현덕은 그 입맞춤을 받으며, 더러 깊어지려는 시도는 있는 힘을 다해 밀어내며. 아쉬운 듯 눈을 번뜩이는 주민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현덕이 먼저 입을 맞추기 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던 한 조각의 생각이 현덕을 사로잡았다.

분명 현덕은 서른세 살까지 살았다. 그리고 다시 열여섯 살로 되돌아왔고 이제는 두 번째 열여덟 살의 시절을 보내고 있다.

부모님에게든 형인 맹덕에게든, 아니면 친한 친구들이든 자룡이나 주민에게든. 자신이 두 번째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 누구든 한 명이라도 믿어줄까?

현덕은 자신이 없었다. 그들을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음속으로는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왜 나는 다시 한번, 또 열여섯, 열일곱, 그리고 열여덟 살이 되었을까. 그리고 열아홉 스물, 다시 서른셋이 되어야 하는 걸까.

주민과 스스럼없이 입을 맞추는 사이가 되어서야 현덕은 그 답을 찾았다.

우주민.

현덕의 삶에 주민이 들어왔다. 그저 TV 인터뷰를 한 번 본 정도에서 같은 기획사 출신 연습생이 되고 서로 좋아하게 됐다는 정도가 아니라.

김현덕이란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지, 어떤 삶을 살지 고민하고 결정하는 데 ‘우주민’이라는 사람이 절대적 변수가 되었다. 우주민은 김현덕의 삶의 필요조건이자 충분조건이 되었다.

‘정말로, 정말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앞으로 네가 살 이 세상을 내가 조금이라도 더 좋은 곳으로 바꾸고 싶어. 나는 널 위해, 이 세상을 바꾸고 싶은 거야.’

현덕은 과거가 되어버린 트윈 트윙클의 항우영과 윤우희를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 미래가 된, 서른 살에 TV에 나와 어떤 인터뷰를 할 우주민을 떠올렸다.

그 사이에 서 있는 자신이 조금이라도 현실을 바꿀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내가 다시 스물여덟 살이 되어서 어느 날, 아무 가게나 들어가 밥을 먹으면서 TV를 봤을 때. 또 네가 나왔으면 좋겠어.’

수트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 봐도 명품이라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멋진 수트를 입고. 그 멋진 수트가 너무도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으면서,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게. 우아하고 기품 있게. 부드럽게 웃으며 말하기를.

하지만 그 내용이 조금, 아주 조금 바뀌기를.

이전의 삶에서 현덕이 들었던 것만큼 고단한 삶을 살지는 않았기를. 아이돌 활동 후 그룹 해체 과정을 겪을 때 어떤 잘못을 했든 오해를 받은 것이든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을 만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조금이라도 덜 상처 받기를. 그래서 똑같은 인터뷰를 하더라도 마음속에 남은 상처가 조금이라도 덜 깊기를.

현덕은 간절히 바랐다.

어쩌면 피터가 했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겪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모를 수도 있다. 현덕은 이번에야 직접 겪어 봤기에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으며 홀로 견딘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외롭고 두려운 일인지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상처는 나았지만 흉터는 사라지지 않는다. 마음에 남은 흉터는 언제든 후유증을 남긴다. 현덕이 가끔 인터넷 글과 댓글을 보며 저도 모르게 깜짝깜짝 놀랐던 것처럼, 먼 훗날의 주민도 남모를 후유증에 시달릴지도 모른다.

언젠가 주민이 세간의 비난을 받는 날이 올 때, 주민의 곁에서 함께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지만. 설사 그러지 못하더라도 누군가는 주민을 도와주기를.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이 주민을 응원하고 지지해 주기를.

현덕은 간절히 바라며 트라이 온에 출연하는 연습생들을 도왔다.

연습생들이 근거 없는 루머나 과도한 비난에 시달리며 악플이나 사생에 괴로워하는 게 안타까웠다. 돕고 싶었다.

모든 행위는 결국 미래의 어느 날, 외롭게 서 있을 주민에게로 향했다.

‘세상 사람들의 비난에 시달렸던 서른 살 이전의 어느 시기의 네가, 내가 보고 들었던 항우영과 윤우희처럼 괴로워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영원할 수 있을까. 이렇게 좋아서 못 살고 죽는 열여덟, 스무 살이지만. 십 년 뒤, 이십 년 뒤에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서른세 살까지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현덕은 그걸 알았다.

주민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 식지는 않으리라. 새벽 두 시까지 자신을 기다리며 그네에 앉아 있던 주민 또한 자신 말고 다른 사람을 좋아하진 않으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시간이 흐르면 바뀔지도 모른다. 헤어져 친구만도 못한 사이가 된다 해도, 어느 날, TV에 나오는 주민의 모습을 보며 행복하게 웃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현덕은 감히 생각했다.

내가 우주민을 만나 우주민을 좋아하고, 우주민과 입을 맞추고, 우주민을 위해 조금이나마 세상을 바꿨다고. 우주민은 천 개의 가시에 상처 입을 뻔하였지만, 내 덕분에 구백구십구 개의 가시만 그에게 닿았노라고.

그렇게라도 우주민에게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그러니까 트라이 온 연습생들을 도우려는 자신의 마음과 행동은 남들에게 알려져서는 안 된다. 남들의 칭찬을 받을 만큼, 핀잔을 받을 만큼, 나댄다는 또 다른 비난을 받을 만큼, 대단하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이타적인 것이 아니니까.

현덕은 저를 이토록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든 우주민을 올려다보았다. 현덕의 우주가 그 까만 눈 안에 있었다.

***

현덕은 새벽 네 시가 다 되어서야 집의 현관을 밟았다. 주민과는 고작 한 시간 정도 함께 있을 수 있었다. 졸리고 피곤했지만 그 시간을 포기할 수 없었다. 주민 또한 비슷한 생각인 듯했다. 현덕이 피곤해하는 게 눈에 비쳤지만, 그래도 얼른 집으로 들어가란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현덕은 주민과 이야기를 나누다 저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았다. 새벽바람은 쌀쌀했지만, 주민의 품이 따뜻했기에 잠이 솔솔 왔다. 주민은 그제야 현덕을 집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현덕은 비몽사몽,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주민을 배웅했다. 주민의 차가 떠나는 걸 보지도 못하고 비척비척 집으로 들어갔다.

주민은 현덕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진 뒤에도 오랫동안 떠나지 않았다. 자신이 몰고 온 차에 기대 현덕이 탄 엘리베이터가 어디쯤 올라갔을지 가늠했다. 어느 층에 불이 켜지는 걸 보고, 거기서 현덕의 흔적을 찾았다.

지독한 외로움이 몰려들었다.

지금처럼 현덕을 떠나보내고 나면, 견딜 수 없이 외로워졌다. 주민은 허전한 품을 견디지 못하고 재킷을 여몄다. 현덕을 안았던 품에 한 움큼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게 사라지는 게 아쉬워서, 현덕의 얼굴이 닿았을 재킷에 입을 맞췄다.

청승맞고 처량해 보인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평생 빛 한 점 들지 않는 동굴 속에서 살던 사람이 이십 년 만에 처음 태양을 보게 되었다면 어떨까. 잠깐 본 태양 빛에 눈이 멀어버릴지도 모른다.

평생 눈이 멀어 온 세상을 못 보게 된다 해도, 처음 본 태양과 입맞춤했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주민이 그랬다. 현덕을 만나는 순간순간이 처음 태양을 올려다보는 순간 같았다.

태어나서 처음 가져보는 감정이 주민의 안에서 날뛰었다. 스스럼없이 자신에게 달려오고, 눈을 마주치는 현덕을 보노라면 구토감과 비슷한 행복을 느꼈다.

할 수만 있다면 가슴을 찢고 심장을 쥐어뜯어서 현덕의 손 위에 올려주고 싶다. 내가 이렇게나 널 좋아한다고. 살아서 펄떡대는 심장을 쥐여 줘서라도 말하고 싶었다. 사랑한다, 좋아한다는 말은 이 감정을 표현하기에는 너무 가벼웠다.

현덕을 보면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목소리를 들으면 참을 수 없이 끌어안고 싶었다. 영원히 놓칠 수 없다는 듯 끌어안으면 목이 탔다. 촉촉한 현덕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나면, 그래도 부족했다.

셔츠를 드러내 맨몸을 더듬고 싶었다. 더 가까이, 한 치의 틈 없이 맞붙어 있고 싶었다. 이 세상 누구도 모르는 곳에 현덕을 가두고, 오직 현덕과 단 둘이 있고 싶었다. 그렇게 그를 원했다.

탐욕은 한도 끝도 없이 주민을 부추겼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현덕에게 닿는 우주민이라는 인간이 이렇게 음습하고 더러운 인간이라는 걸 숨겨야 하니까.

이렇게 미쳐버린 인간이라는 걸 들켜서는 안 된다. 남들처럼 행동해야 한다. 적당히 다가가고, 기다려야 한다. 그저 얼굴을 맞대고, 가끔 이렇게 껴안고 입을 맞추는 것을 유일한 위안으로 삼으며 참아야 한다.

현덕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평생 이 정도 가식을 온 몸에 둘러야 한다. 각오는 되었으나 탐욕은 주제를 모르고 고개를 치켜든다.

사뿐히 돌아서는 현덕의 뒷목을 잡아채고 싶다. 그 하얗고 긴 목에 이를 박고 씹어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자국을 내고 싶다. 싫다고 우는 현덕을 넘어트리고, 옷 따위는 찢어버리고. 그 하얀 등에 입을 맞출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현덕은 분명 싫다고 버둥거릴 것이다. 하지만 주민을 할퀴거나 끝까지 반항하진 못할 것이다. 현덕은 자신과 만난 게 이상할 정도로 선하고 순한 인간이니까. 싫다고 우는 현덕을 살살 달래며, 괜찮다고 속삭여주면서 온몸을 남김없이 핥아 먹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리라.

끝내는 속살을 가르고 안으로 파고들어 한 치의 틈 없이 맞붙고 싶다. 그렇게 남김없이 가지고 싶었다.

고작 입맞춤. 고작 포옹으로는 부족했다. 어떻게 손에 넣었는데. 누군가 채가기 전에 남김없이 가져야 했다. 김현덕은 하나도 남김없이 우주민의 것이어야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제 품에 안기는 현덕을 상상했다. 단순한 정욕이기도 했고, 그보다 더 음침하고 질척한 집착이기도 했다.

주민의 상상 속에서 현덕은 언제나 울었다. 눈이 녹아내릴 듯 울며, 안 된다고 주민을 밀쳤다. 마치, 아버지를 밀어내던 어머니처럼.

주민이 아는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현덕이 제게 스스로 다가와 안기고, 자신을 받아들여 주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애초부터 주민의 머릿속에는 그런 개념이 없었다. 관계는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집어삼키는 것이었다.

주민의 상상 속에서 현덕은 언제나 울면서 안 된다고 말했다. 주민은 그런 현덕을 말로만 달래며, 절대 멈추지 않았다. 때론 달래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더는 싫다고, 무섭다고. 도망치려는 현덕을 억지로 붙잡고 제 욕망을 채웠다.

그따위 망상에 힘입어 자위를 하고 나면 걷잡을 수 없는 죄책감이 몰려들었다.

상상 속에서 싫다고 울던 현덕의 그 목소리는 이내, 높고 째지는 비명을 바뀌었다. 언제나 아버지를 거부하던 어머니의 그 비명소리였다.

세상 사람들은 비운의 천재 가수 우시영을 기억할 때, 통기타 선율에 맞춰 노래 부르던 허스키한 목소리를 기억한다. 하지만 주민에게 남아 있는 어머니, 우시영의 소리는 오직 비명뿐이었다.

메마른 비명, 눈물 섞인 비명, 어린 주민을 목 조르고 원망하던 비명. 아버지를 보고 절망하여 울부짖던 비명. 그 비명이 주민을 옭아맸다. 자신 때문에 현덕이 어머니처럼 될지 모른다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아냐, 그렇지 않아. 난 절대로 그러지 않을 거예요.’

주민은 몸서리치며 어머니에게 외쳤다.

‘난 아버지처럼은 되지 않을 거야.’

현덕을 어머니처럼 불행하게 만들지 않으리라. 그러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아버지와 다르게, 자신은 분명 애쓰고 있었다.

아버지처럼 중간에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죽는 그 날까지, 현덕의 곁에 머물며 지켜낼 생각이었다. 현덕을. 자신으로부터.

그러니까 아직까지 자신의 곁에 남은 어머니의 비명은, 현덕을 손에 쥔 주민을 비난하는 것 같은 어머니의 이 비명은 옳지 않았다.

차라리 날카로운 것으로 귀를 쑤셔 고막을 찢어버리면 더는 들리지 않을까 싶어 송곳을 손에 들고 고민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물론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현덕의 목소리와 웃음소리를 들으려면 망가진 귀라도 필요하니까.

고막을 찢어버릴까 생각을 할망정, 현덕을 놓아줄 마음은 들지 않았다.

절대 놓칠 수 없었다.

주민은 현덕의 흔적을 쫓아,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현덕이 살고 있을 층의 복도에 켜졌던 불이 꺼졌다. 주민의 품도 싸늘해졌다. 잠깐 손에 넣었던 현덕의 온기는 또다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주민은 잠깐, 행복을 맛보고는 다시 허기진 지옥에 떨어졌다.

다시 현덕을 만날 때를 기다려야 했다. 아슬아슬한 마지노선까지 현덕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노려야 했다.

주민은 돌아서 차에 탔다.

등진 먼 하늘에서 흰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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