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1과 2의 사이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평범한 어느 날이었다.
“현덕아, 일어나! 학교 가야지!”
“네에…… 네에…….”
현덕은 잠이 덕지덕지 묻은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리며 잠에서 깼다. 시계를 보니 벌써 7시였다.
‘오늘도 아침 공부는 물 건너갔구나.’
현덕은 오늘도 놓쳐버린 아침 공부 시간을 아쉬워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요즘엔 아침 일찍 일어나 공부하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매일매일, 늦게까지 기획사에서 연습을 하고 돌아오니, 씻고 잠드는 게 용할 따름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전쟁이었다. 알람을 대여섯 개씩 맞춰 놓고 자도 소용없었다. 눈을 뜨면 핸드폰을 꼭 끌어안고 있는 채였다. 어머니가 흔들어 깨워야 겨우겨우 눈을 떴다.
이상하게도 어머니는 그런 현덕의 모습을 꽤 좋아했다.
“맹덕이가 고등학교 졸업한 이후로는 나도 졸업인가 싶었는데, 오랜만이네. 아니, 우리 현덕이는 처음이지. 내가 너한테 학교 가야 하니 늦잠 자지 말라고 말하는 날이 오다니, 이게 웬일이니.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인 거 같아, 현덕아.”
어머니는 현덕의 엉덩이를 팡팡 두드리거나 이불을 돌돌 말고 자고 있는 현덕을 데굴데굴 굴려 이불을 빼앗기도 했다.
오늘은 데굴데굴 구르는 날이었다. 현덕은 이불을 빼앗기고 추위에 떨며 잠을 깼다.
“으으.”
아직 십 대인데 삭신이 쑤셨다. 현덕은 겨우겨우 눈을 비비고 일어나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씻고 나와서는 어머니와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이후 교복을 갈아입고 학교 갈 준비를 하는데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학교 가는 중이니?]
“아뇨, 준비하는 중이요. 이제 가려고요.”
현덕은 현관문 앞에 주저앉아 신발을 신으며 말했다. 핸드폰은 턱과 어깨 사이에 낀 채였다.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
[아, 누가 물어봐달라고 해서. 그…… 프로그램에서 1번, 2번, 3번 노래 선택하는 거 있잖니. 너는 거기서 몇 번을 하고 싶으니?]
아버지의 질문에 현덕은 고개를 갸웃했다.
‘몇 번? ……아!’
하지만 이내 말뜻을 알아차렸다.
“그 데뷔 후보곡이요?”
[그래, 그거.]
“저는 당연히-”
별생각 없이 대답하려던 현덕은 중간에 말을 멈췄다.
[당연히? 몇 번?]
“음……. 아버지, 이거 누가 물어봐달라고 한 거예요?”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여기 네 팬도 있는 거 같더구나. 널 많이 응원하고 있대. 그 투표도 웬만하면 네가 하고 싶은 곡으로 투표하고 싶다고, 물어봐 달라고 그러더구나.]
아버지의 목소리는 약간 들떠 있었다. 현덕이 아무리 학교에서 백 점을 받아오고, 전교 10등 안에 들어도 무덤덤하셨건만. 요즘엔 매일같이 싱글벙글하였다. 굳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목소리에 들뜬 기색이 가득했으니까.
현덕은 그런 아버지가 신기했다.
‘나보고는 들뜨지 말라고 그랬으면서 아버지가 더 들뜨셨네?’
요즘 구름 위를 걷듯 둥실둥실 떠다니는 건 현덕이 아니라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이번 주부터는 금요일 밤에 집으로 올라오겠다고 선언했다. 함께 트라이 온 2부를 시청하기 위해서였다. 이전까진 바쁘다며 간혹 주말에도 집에 올라오지 못했으면서 그 바쁜 일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를 일이었다.
지금만 해도 마찬가지였다. 일평생 청탁의 청 자만 들어도 십 리 밖으로 도망가셨던 양반이, 일하는 동료가 아들의 팬이라고 하자 입이 헤벌쭉해져서는 바로 현덕에게 연락하다니.
“그럼 비밀이에요.”
[뭐? 왜?]
“부정 투표가 될 수도 있으니까!”
[이거 한 번 알려주는 게?]
아버지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나왔다.
“투표의 4대 원칙 모르세요?”
현덕은 웃으며 아버지에게 물었다.
[음……. 이건 국회의원 선거가 아니잖니.]
“그거만큼 중요해요. 출연자들 인생이 결정되는 문제니까.”
[그래도, 알려주면 안 될까? 그래 봤자 나랑 그 사람이랑 두 표인데.]
“안 돼요!”
현덕은 단호하게 거절하자 아버지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알았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가 대번 무뚝뚝해졌다.
“아버지, 설마 화나신 건 아니죠?”
[화나긴. 무슨.]
하지만 목소리는 ‘나 화났어.’라고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현덕은 웃으며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치듯 메고 일어섰다. 전화를 끊지 않은 채로 어머니에게 인사하고 집을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교복 위에 입은 집업 후드를 머리에 뒤집어쓰는 걸 잊지 않았다.
현덕은 버스가 올 때까지 계속 아버지와 통화했다. 삐진 아버지의 화를 풀어드리기 위해 노력했으나, 아버지는 이 상황을 기회 삼아 현덕이 몇 번 데뷔 후보곡을 원하는지 알아내고자 했다.
평생 판사로 사신 분을 말로 이기는 건 쉽지 않았다. 슬쩍 말을 돌리다가 현덕이 무심결에 말을 하도록 유도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하지만 현덕은 맹덕과 함께 자란 몸이었다. 맹덕과 투덕투덕 말싸움을 하며 자라왔던 경험치는 헛으로 쌓은 게 아니었다.
현덕은 하하, 웃으며 아버지의 덫을 쏙쏙 잘 피해 나갔다. 결국 더 삐진 아버지가 전화를 끊으며 통화가 종료되었다. 때맞춰 현덕이 타는 버스도 정류장 앞에 섰다.
현덕은 학교 가는 내내 아버지와 통화한 내용을 떠올리며 킥킥 웃었다. 그 바람에 핸드폰을 들여다보지 않고 학교에 도착했다.
아버지와 통화하다 늦장을 부려서 평소보다 늦은 도착이었다. 겨우 지각을 면하고 자리에 앉으니 임시 반장이 핸드폰을 수거했다.
현덕은 핸드폰을 제출하며 오늘 미처 검색해보지 못한 인터넷 게시글들을떠올렸다. 안 그래도 어젯밤, 기획사에서 집으로 올 때도 거의 인터넷 글을 보지 못했는데. 지난 밤, 또 무슨 글들이 잔뜩 올라왔을까. 생각만 해도 손이 근질근질했다.
‘이런 게 스마트폰 중독이구나.’
현덕은 제 빈 손을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여어, 왜 그래?”
민철이 등을 툭 치며 옆에 와 앉았다.
“아니, 그냥.”
현덕이 실없이 웃으니 민철이 눈을 껌뻑이며 손가락으로 뺨을 긁었다. 그건 민철이 곤란해할 때 하는 버릇이었다.
‘어라?’
현덕이 의아해 고개를 갸웃하니,
“너-”
민철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때, 때마침 수업 종이 울렸다.
“이따 얘기하자. 암튼, 힘내라.”
“어? 뭘 힘내? 공부?”
“아, 몰라.”
민철은 아무튼 이따 보자며 후다닥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뭐야, 왜 저래?”
현덕은 가방에서 교과서를 꺼내며 투덜댔다.
민철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같은 반이었다. 아직 키가 작아 앞자리에 앉았다. 현덕은 맨 뒷자리에 앉았기에 학기 초부터 물리적인 거리가 멀어졌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중학교 때부터 이어온 우정에 흠집을 낼 수 없었다.
현덕과 민철은 올해도 같이 점심밥을 먹고, 체육 시간에 짝을 지어 스트레칭을 하며 어울렸다. 수업 사이 쉬는 시간에는 서로 복습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민철의 행동이 영 이상했다.
민철은 수업이 끝나고 10분 쉬는 시간마다 현덕의 자리로 왔다. 예전 같으면 같이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거나 영어 단어 외운 걸 체크하러 왔겠지만, 요즘엔 현덕이 거의 공부에 손도 못 대고 있어 그럴 수 없었다.
그런데도 오늘따라 민철은 복습의 황금 시간이라 할 수 있는 그 귀한 10분을 저버리고, 현덕에게 말을 걸었다. 공부와 전혀 상관없는 시답잖은 대화가 이어졌다. 별생각 없이 민철과 쉬는 시간에 떠들고 놀던 현덕은 3교시 쉬는 시간이 되어서야 이상함을 느꼈다.
“너 왜 이래.”
“내가 뭘?”
“복습 안 해? 왜 자꾸 와?”
“얌마. 친구가 오는 데 그렇게밖에 말 못 하냐?”
“딴 애들이면 몰라도 넌 아니거든. 완전 이상해. 왜 그래? 뭔 일 있어?”
현덕은 의자에 앉은 채로 서 있는 민철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이맘때 이 자식한테 뭔 일이 있었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별다를 게 없었다.
“뭔데, 왜 그러는 건데?”
현덕은 눈에 힘을 주고 현철을 쳐다보았다.
“너, 정말 괜찮아?”
그런데 민철은 오히려 현덕이 걱정된다는 듯 물었다.
“나? 왜?”
“센 척하지 말고.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 짜샤.”
“뭘? 뭐? 학교랑 기획사랑 왔다 갔다 하는 거? 사람들이 몰리는 거? 괜찮아, 이젠 좀 익숙해졌어.”
현덕이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긁적이며 대답했다.
‘내가 그렇게 힘들어 보였나?’
아버지에 이어 민철이까지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다니. 어쩐지 고맙고 미안했다.
“너, 인마. 그렇게 괜찮은 척하면……. 하, 아니다. 됐다.”
“뭐? 왜 말을 하다말아?”
“넌 아예 말도 안 하면서 무슨.”
“내가? 내가 무슨 말을 안 해?”
왠지 대화가 자꾸 헛도는 느낌이 들었다. 현덕은 찜찜한 기분이 들어 눈살을 찌푸렸다.
“너 자꾸 그럴래?”
민철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그렇게 쉬는 시간이 끝났다. 10분은 너무 짧았다.
“아무튼, 힘내라고. 다 괜한 말 하는 거니까 괜히 우울해하지 말고. 알았지?”
민철은 여전히 영문 모를 말을 남기고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우울? 왜?”
현덕은 4교시 수업 교과서를 꺼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수업이 끝나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 짧은 기억은 굶주림에 묻혔다.
종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현덕은 민철과 함께 식당으로 맹렬히 걸어갔다. 뛰면 벌점이니 경보를 하듯 빠르게 걸을 수밖에 없었다.
점심밥을 물 마시듯 먹고 나니 이성이 돌아왔다.
“아, 맞다. 아까 뭔 소리 한 건지 물어봐야지.”
현덕의 뇌는 잠시 잊고 있었던 물음표를 끄집어냈다. 현덕은 화장실을 간 민철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으나 화장실에서 찬물로 세수하고 온 민철에게 아까의 일을 물어볼 수 없었다. 배고픔만큼이나 무서운 본능이 현덕을 집어삼켰다. 춘곤증이었다.
배부르고, 창가에 앉아 햇볕에 등이 따뜻하니 잠이 솔솔 몰려들었다. 현덕은 얼마 지나지 않아 책상에 엎어졌다. 민철이 돌아왔을 때는 이미 잠든 뒤였다. 아주 푹 잠들어서 대통령이 아니라 대통령 할아버지가 오더라도 안 깰 것 같았다.
민철은 엎어져 자는 현덕을 보고는 끌끌, 혀를 찼다.
“정말 괜찮은 건지, 괜찮은 척 하는 건지.”
그리고는 제 자리로 돌아가 수학 문제집을 풀었다.
오후 수업을 마친 뒤, 핸드폰을 돌려받았다. 현덕은 학원을 가야 한다는 민철과 헤어져 다시 버스 정류장에 섰다. 버스를 기다리며 핸드폰 전원을 켜자마자 바로 인터넷 창을 열었다. 손가락은 너무 당연하게 트라이 온을 검색했다.
검색 된 글들의 분위기가 어제와 달랐다. 핸드폰의 작은 액정 속 인터넷 바다는 치열한 전쟁터가 되어 있었다.
“……어?”
현덕은 자신의 욕으로 도배된 트라이 온 커뮤니티 게시판을 봤다.
게시판은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었다. 트라이 온 시청자들이 현덕을 응원하는 팬과 현덕을 싫어하는 쪽으로 갈려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삼국지 시대를 방불케 했다. 그야말로 혼란, 파괴, 망언의 도가니였다.
고작 하룻밤 사이에 인터넷 세상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현덕은 TE엔터테인먼트로 한 번에 가는 버스를 연달아 놓쳤다. 아예 버스 타기를 포기하고 정류장 벤치 끝에 앉았다.
지나는 사람들 중 누구도 현덕을 알아보지 못했다. 까만 집업 후드를 뒤집어쓰고 벤치에 웅크리고 앉아 핸드폰을 보는 고등학생이 트라이 온의 그 김현덕이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현덕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인터넷 속 글들을 읽어내려갔다.
언제,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인터넷에서 트라이 온과 관련된 커뮤니티 게시판은 온통 싸움판이었다.
이번 주 방송은 합격한 30명의 연습생 위주로만 편집된 방송이었다. 그건 불합격한 연습생 70명을 지지하던 시청자들에게 상실감과 허탈감을 느끼게 하기 충분했다.
텅 빈 마음에 들어찬 건 분노였다. 분노란 건 언제나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법. 시청자들은 트라이 온 메인 PD를, 다음으로는 각자 지지하던 연습생들의 힘없는 기획사를 욕했다.
그러던 중 분노가 한 곳으로 집중됐다. 방송 속에서 환히 웃고 있는 한 연습생에게로.
1, 2화 때까지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연습생과 마찬가지로 분량 없던 연습생이었다. 있는지조차 몰랐던 연습생이 3, 4화에 엄청난 분량을 독식했다. 그들이 보기에 그건 불합리한 것이었다.
그 연습생은 우주민처럼 독특하지도 않고 박자룡처럼 뛰어나지도 않았다. 장준비처럼 ‘최연소’ 연습생도 아니었고, 피터 윤처럼 ‘해외파’나 ‘아이비리그 출신’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연습생은 그처럼 주목받아 마땅한 사람들 틈에 끼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빛을 보았다. 그도 모자라 우주민의 춤 연습을 돕겠다며 인위적인 선행까지 해가며 다른 연습생들이 주목받을 기회를 빼앗았다.
그 연습생을 향한 누군가의 비난은 단지 한 방울의 물이었다. 탈락자가 대거 발생한 오렌지, 옐로, 블루 기숙사 연습생들을 지지했던 시청자들의 분노는 이미 넘칠락말락한 물잔의 물이었다. 한 방울의 물이 떨어졌을 뿐인데, 물잔의 물은 기다렸다는 듯 흘러넘쳤다.
언제나 밝게 웃는 현덕의 순한 모습이 그들의 분노가 정당하다고 면벌부를 주는 듯했다. 적어도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자룡은 여러 번 데뷔 기회를 놓쳤다는 사연이 안쓰러웠다. 주민은 부모님 대의 사연이 구구절절했다. 준비는 저 어린 것이 형들 틈에 치여 고생하는 게 불쌍했다. 피터 윤은 군필이라는 까방권으로 남자 시청자들의 든든한 지지가 있었다. 하다못해 완용도 그 이름 때문에 사는 내내 얼마나 힘들었겠냐는 동정의 여지가 있었다.
그에 비하면 현덕의 인생은 무난했다. 무난해도 너무 무난했다. 어디 한구석 불쌍한 점이 없었다.
구김 없이 행복하게 살아왔으면서 트라이 온에서까지 손쉽게 승승장구하다니. 그들의 분노는 그렇게 추진력을 얻었다.
물론 모두가 김현덕 연습생에게서 완전히 돌아선 것은 아니었다. 3화 때부터 시작해 꾸준히 쌓아 온 현덕의 팬덤의 규모는 절대 작지 않았다. 거기에 테두리로 엮인 자룡과 주민의 팬덤, 오렌지 삼총사로 엮인 준비와 피터의 팬덤이 현덕에게 호의적이었다.
합격한 30명의 연습생들을 지지하는 시청자들도 적극적으로 나서진 않았지만, 대부분 현덕에게 우호적이었다.
이번 논쟁은 탈락한 연습생을 지지하는 시청자들과 합격한 연습생을 지지하는 시청자들이 김현덕을 제물로 삼아 벌이는 전쟁이었다.
*
- ㅅㅂ김현덕이 설리번이냐? 니네 애새끼는 어디가 모자라서 설리번 선생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데?
└ 또또 이렇게 물타기한다 누가 떨어진 연습생들이 모자르대?
└ 애초부터 서바이벌 경쟁이잖아. 자력 생존해야되는데 왜 기숙사도 갈렸는데 같은 기획사 연생들끼리 뭉치냐고 혼자 출연한 기획사 연습생은 서러워서 살겠나
└└ 그러니까 니 애새끼는 뭐가 부족해서 혼자서 아무것도 못하는데? 딴 기획사 연습생이 도와줘야지만 합격할 수 있는데 못 도와줘서 탈락 먹었다는 거 아냐. 겁나 모자르네^^ 그래서 떨어진 거야.
└ 대형 기획사라서 제작진한테 뒷공작해서 분량 따내려고 일부러 새벽연습이니 뭐니 한 거 아냐? 솔직히 그렇게의심안할수있겠냐고
└└ 네 열폭 잘 들었고요zzzzzzzzz
└└ 이제는 뒷공작이란 소리까지 나오나?ㅋㅋㅋㅋㅋ
└└ 아주 미쳤구나. 와……이제는 프로그램이 조작된 거라고 주장하냐? 억울하면 그것이 알고십다에 제보하던가 애초부터 기획사나 소속사가 아니라 기숙사로 나눈 이유가 뭔데? 기숙사 별로 협력해서 헤처나가란 뜻 아냐? 니네 해리포터 모르냐? 그리핀도르가 슬리데린이랑 협력해서 퀴디치하는 거 봤냐고
└ 왜? 그래서 해리포터가 불의잔에서 디고리 버리고 도망쳤다고 하지? 기숙사 나뉜게 무슨 한일전이냐?
└ 기숙사는 그냥 트래이닝 받기 쉽게 같은 수준 애들끼리 묶어 놓은 거구요 연생들 다 평가무대에서 각자 평가받았는데 무슨소리쉰?
└└ 기숙사별로 지내고 그 안에서 팀을 짜는데 당연히 그 안에서 서로 돕고 해야하는 거아닌가 그린기획사도 그랬잖아
└└└ 그래서 그린기획사 대부분이 떨어졌지ㅋ
└└└└ 그만해 진실을 말해주면 쟤네 울라
└ 대학 공부를 해리포터로 배웠나 갑자기 무슨 해리포터타령이야 기숙사하면 그거밖에 생각 안나냐 경쟁하는 프로에 나와서 남이 지 안 도와줘서 떨어졌다고 하냐 부끄러운 줄 알아라
└ 그말이 아니잖아 지금 우린 공정성에 대해서 공론을 모으는거야
└└ 공론조아하시네 맨처음 시작한 거부터가 김현덕이 누구 안 도와줘서 오렌지에서 탈락한거라고 빼애액- 아니었냐? 이제와서 말 바꾸냐?
└└ 밀리니까 말바꾸는 거보소 입삐뚤어져도 말은 바로하랬다 아 남이 안도와주면 실력발휘 못하는 연습생 좋아하는 거 보니눈이삐셨구나
└ 경쟁하는 프로에 나와서 남이 지 안 도와줘서 떨어졌다고 하냐 부끄러운 줄 알아라222222
- 도아주고 말고는 본인 맘아닌가ㅎㅎ
└ 그게 문제가 아니라 대형 기획사에서 지들끼리 뭉쳐서 방송분독점했다는게문제라고!!!!!!!!!!!
└└ 피터는 갠연생이구요…… 준비는 니들이 말하는…… 그 연약한 소형출신이구여 ……근대 같이 뭉쳐서 서로 잘 도왔구여……니들 말…… 논리라곤 1도 없다는 생각 안드냐?
└└ 합격한 30명중에 절반이상이 중소나 갠연생이던데 님눈깔리쉰?
└└└ 걔네도 솔직히 눈치 보고 중간에낀거지 시작은 김현덕 연습생이 했다고
└└└└ 끼긴 뭘껴, 준비가. 이제. 중딩인데 애를, 완전히, 이상한, 사람으로. 만드네?
└└└└ 자기 희생해서 남 도와준 애들한테 그렇게 밖에 말 못하냐 너초딩때바른생활안배웠어?
- 분위기가 너무 과열된 것 같아요. 결국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면 누군가는 떨어지고 누군가는 붇는데 그 과정에서 단지 실력만이 아니라 계략이나 운 등의 요소가 관여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ㅠㅠ
└ 돌려까심?
└ 계략 조아하시네 실력업어서 떨어진거야 까놓고말해 우주민은 현덕이가 가르쳐주면 받아먹기라도했지 니애는 가르쳐줘도못받아먹었어
└└ 누가 그래 해보지도 않고?
└└└ 본심 나오넼ㅋㅋㅋㅋㅋㅋㅋ
*
이 정도는 약과였다. 현덕은 다른 게시글을 살펴보다가 핸드폰을 떨어트릴 뻔했다.
그저 너 말이 맞네, 내 말이 맞네 아옹다옹하던 다툼은 점점 수위가 심해졌다. 욕설은 기본이었다. 욕설 사이에 의미 없는 기호를 집어넣어 금지어로 걸리는 걸 피했다.
현덕이 처음 듣는 루머까지 떠돌았다.
‘외고에 합격했는데 여친을 임신시켜 그걸 무마하다 입학하기도 전에 퇴학당했다더라.’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라는 건 기획사에서 뿌린 보도 자료일 뿐이고 사실 그 동네에서 알아주는 양아치 개새끼더라. 그 형도 만만찮은 건달이라 집에서 맨날 싸워 아파트에서 민원이 들끓는다더라.’
‘아니, 공부 잘하는 건 맞는데 돈으로 처바른 거라더라. 돈 많고 공부 잘하는 몇 명 모여서 자기들끼리만 놀고 공부 못하는 애들 돌아가며 왕따를 시켰다더라. 트라이 온도 뒷돈 주고 나온 거라더라.’
일부 시청자들은 아예 현덕을 욕하는 것도 모자라 현덕의 가족까지 끌고 들어와 욕했다.
아버지는 순식간에 악덕 판사가 되었다. 어머니는 개천에서 용 난 판사를 돈으로 사서 결혼한 졸부 딸이 되었다. 맹덕은 전직 깡패, 조폭에 군대에서는 관심 사병이 되어 자살 시도를 여러 번 한 사람이 되었다.
현덕을 옹호하고 루머를 바로잡는 글도 꾸준히 올라오긴 했다. 비난 글과 옹호 글의 비중은 굳이 따지자면 반반이었다.
하지만 칭찬하고 응원하는 글보다는 욕하고 비난하는 글이 좀 더 치명적이었다.
현덕은 언제부터인가는 자연스럽게 숨 쉬는 법을 잊어버렸다. 살기 위해 의식적으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어야 했다.
오한에 걸린 듯 자꾸 몸이 떨렸다.
‘보지 말자, 그만 보자.’
‘보면 안 돼.’
‘나를 욕하고 있는 게 아니야. 제멋대로 상상 속의 김현덕이란 샌드백 인형을 만들어서 자신의 속상함을 풀고 있을 뿐이야.’
현덕은 계속 스스로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다고, 괜찮다고. 하지만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여기까지만 보고 핸드폰 끄자.’
‘하나만 더 읽고 그만 보자.’
심장에 수천 개의 유리 조각이 박혀 피가 철철 흐르건만. 그 심장에 스스로 유리 조각을 또 박고 박았다.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현덕은 인터넷 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손이 자꾸 자신을 욕하는 글을 클릭하고 또 클릭했다. 자신을 욕하는 댓글을 볼 때마다 흠칫, 놀라면서도 자꾸 다음 댓글을 봤다.
결국 핸드폰 배터리가 0%가 되어서야 헤어 나올 수 있었다.
현덕은 배터리가 없다는 경고창을 지우고 오 팀장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연습 못 갈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하루만 쉴게요.
문자를 보내고 나니 핸드폰 전원이 꺼졌다.
현덕은 뜨끈뜨끈한 핸드폰을 두 손으로 쥐고, 그 손을 이마에 가져다 댔다.
후우.
긴 한숨이 나왔다.
“호기심이 사람 죽인다. 지금은 대부분 좋은 글 올라와서 그럭저럭 볼만 할 건데, 이 분위기가 어느 순간 바뀔지 몰라. 한순간에 욕으로 도배되고 악플 달리고, 이상한 글 막 올라오고 그럴지도 모른다고. 그런 거 보면, 정말 감당하기 힘들 거야. 그러니까 지금부터 미리 안 보는 연습 해둬. 난 분명히 경고했다.”
오 팀장의 경고가 떠올랐다.
오 팀장은 절대 댓글 같은 걸 찾아 읽지 말라고 당부했다. 현덕은 오 팀장의 경고를 들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오 팀장은 이것이 사약이니 마시지 말라 했고, 현덕은 알았다고 말하면서 그 사약 그릇을 버리지 못했다. 그러다 결국 그 사약에 얼굴을 처박아 버렸다. 스스로 독이 든 성배를 취한 꼴이었다.
누구를 원망하랴 싶다가도 서글픈 분노가 욱- 치솟았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화가 났다.
‘내가 뭘 잘못했지?’
의심이 들었다.
‘내가…… 뭘 잘못한 건가?’
죄책감이 몰려왔다.
“아냐, 아니야. 그렇지 않아.”
현덕은 고개를 내저었다.
현덕은 제게 몰아닥치는 감정의 파도를 두 손으로 마구 헤쳤다.
‘난 잘못하지 않았어.’
핸드폰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누군가가 보기엔 내가 잘못한 거로 보일 수도 있어. 실제로 내 행동 때문에 누군가가 피해를 봤을 수도 있어.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잘못한 건 아니야. 나는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한 거였어.’
다시 한번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래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이렇게 많은 비난과 모욕을 받을 걸 알더라도 주민을 도울 것이다. 도와주겠다는 자룡과 준비, 피터의 손을 잡고 함께.
이전의 삶에서도 항상 그랬다.
대학교에 다니며 고시 준비를 할 때, 현덕은 선배들의 부당한 태도에 맞섰다. 그때도 이랬다.
처음엔 모두가 현덕에게 손가락질했다. 교수님들마저 대대로 내려오던 과의 전통과 분위기를 망치려 한다며, 현덕을 물 흐리는 미꾸라지 취급했다.
고시촌에 들어가 시험공부를 할 때도 그랬다.
일 년, 이 년, 삼 년.
공부 기간이 길어질수록 현덕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혀를 차고 현덕의 인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훈수를 두었다. 정작 현덕을 잘 알고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은 계속 현덕을 응원해주었는데.
그럼에도 언제나 현덕은 버텼다.
현덕을 무너뜨린 건 현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이나 비난이 아니었다. 언제나 현덕 자신이었다.
자기 자신에게 확신이 없고 너무 지쳤을 때, 그 비난에 휩쓸렸다.
그리고 그런 현덕을 구해준 건 주민이었다.
TV로 봤던 주민이 현덕을 지탱해주었다.
‘이번에는 내가 손을 내밀었어. 내 선택이었고, 난 후회 안 해.’
현덕은 고개를 들었다.
‘난 잘못하지 않았어.’
현덕을 집어삼키지 못한 죄책감은 계속 넘실넘실, 현덕을 넘보았다. 그럼에도 네가 잘못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너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은 어쩌느냐고. 어떻게 네가 100% 잘했다고 볼 수 있느냐고. 저렇게 많은 사람이 너를 비난하는 걸 보면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네가 잘못한 게 있을 텐데. 네가 잘못한 게 맞을 텐데.
타인으로부터 강요받은 죄책감은 새까만 진창이었다. 한 발만 내딛어도 다리부터 잡아끌어 단번에 현덕을 집어삼킬 것이었다.
현덕은 그 진창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내가 잘못한 걸 수도 있겠지. 내가 백 퍼센트 완벽하게 잘한 게 아닐 수도 있을 거야. 아니, 그럴 거야. 나로 인해 피해를 받은 사람이 있을 거고. 하지만 그래도 난 후회 안 해. 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한 거야.’
정말 잘못한 게 있다면 그건 좀 더 나중에 알아서 반성하면 된다. 스스로 생각하고 반성하여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자고 다짐하면 된다.
정말로 비난받을 만한 일을 했다면 용서를 구하고 반성해야겠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지금 무너져서는 안 된다.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뭐라고 비난하든 그건 나랑 상관없어.’
현덕은 벤치에서 일어났다. 다리와 허리가 뻐근하니 아파왔다.
현덕은 길게 기지개를 켜며 하늘을 보았다. 하늘은 빌어먹게 푸르렀다.
핸드폰이 꺼져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아직 날이 훤한 것만 눈에 들어왔다.
문득 주민이 보고 싶었다.
옆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얼굴에 예의 그 싸가지 없는 미소를 지으며, 뭘 그딴 거 가지고 궁상을 떠냐고 빈정거릴까. 아니면 말없이 다가와 안아주고 떨리는 입술에 입을 맞춰줄까.
“우주민, 잘 살고 있냐. 나쁜 놈.”
현덕은 손등으로 눈가를 세게 문지르며 스무 살의 우주민, 지금의 우주민을 떠올렸다.
스물여덟 살 김현덕이 TV로 봤던 단정하고 우아한 서른 살의 우주민은 어느새 저 멀리로 밀려나 버렸다. 그래도 괜찮았다. 지금 보고 싶은 건 싸가지 없고 야하고 제멋대로인, 지금의 우주민이니까.
하지만 지금 주민은 현덕의 옆에 없었다.
“어딨냐고. 이럴 때 내 옆에 있어 줘야지. 나쁜 자식.”
현덕은 발끝에 닿는 돌을 주민이라 생각하고 뻥- 찼다.
돌은 멀리 날아갔다.
현덕은 그 돌을 쫓아 걸었다. 기획사로 가는 길도 아니었고 집으로 가는 길도 아니었다.
생판 모르는 곳으로 가는 건 아니었다. 어디로 가도 현덕이 나고 자란 동네 안이었다. 어디로 가면 뭐가 있는지 손바닥을 보듯 훤했다.
현덕은 발끝에 닿는 돌멩이를 툭툭 쳐서 한쪽 길로 몰았다. 돌멩이가 현덕을 잡아끄는 게 아니라 현덕이 돌멩이를 끌고 길을 걷는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멋대로 굴러가는 돌을 잃어버렸지만, 현덕은 멈추지 않았다.
한참 걸으니 한강이 보였다. 맹덕과 곧잘 걷던 한강 둔치 산책로가 이어졌다. 저녁때면 운동 나온 사람들이 꽤 많은데. 아직 낮이어서 그런지 한적했다.
현덕은 근처 편의점에서 500mL 물을 한 병 사서 손에 들고는 강가 벤치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는 하염없이 한강을 바라보았다.
이게 현덕이 버티는 방식이었다.
아무리 마음을 굳게 먹는다 해도 곧바로 괜찮아지지는 않았다. 충격이 쉬이 가시지 않아 아직도 손과 어깨가 떨렸다.
조금만 딴생각을 해도 눈가가 시큰하게 아려왔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현덕은 그때마다 큰 숨을 들이켰다.
‘한 삼 일……은 가려나. 트라이 온 촬영 전에는 괜찮아져야 할 텐데.’
현덕은 자신의 상태를 가늠해보았다.
놀라고 상처 입은 마음은 천천히 괜찮아질 것이다.
그전까지 힘들겠지만,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자꾸 인터넷에 들어가 자신을 욕하는 글들을 또 보려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버티면 언젠가는 괜찮아질 것이다.
현덕은 자신이 지금 서른세 살까지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했다. 보통의 열여덟 살 소년이라면 결코 버티지 못했으리라.
자신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비난받는 건 사람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든다. 한 명에게 날 선소리를 듣기만 해도 가슴이 벌렁거리건만. 입에 칼을 물고 욕설을 내뱉는 사람들에게 공격받는 건, 결코 아무렇지 않게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현덕은 상처 입은 마음을 흘려보내는 법을 알았다.
‘내가 당해서 다행이야. 자룡 형이었으면 또 혼자서 많이 울었겠지. 준비는 너무 어리고. 피터 형은 한국이 싫어졌다고 아예 외국으로 이민 가버리면 어떡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인데. 그리고 우주민은…….’
피식, 웃음이 났다.
“그 더러운 성격이 더 더러워졌겠지.”
이상하게도 주민이 인터넷 악플에 상처 입은 모습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오히려 악플 단 사람들을 고소하겠다고 날뛰지나 않을까.’
그렇게 또 우주민을 생각했을 때였다.
뚜벅, 뚜벅.
발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들렸는데 금세 가까워졌다. 점점 더 가까워졌다. 현덕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빠르게 걷더니 가까워져서는 아예 뛰기 시작했다.
‘누가 날 알아본 걸까?’
현덕은 얼른 후드를 잡아당겨 얼굴을 숨겼다.
집업은 맹덕의 것이었다. 품이 낙낙한 집업을 걸치고 후드를 꾹 눌러쓰면 웬만해서는 아무도 현덕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요 며칠 편히 다녔건만.
‘설마, 아니겠지.’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누군가 등 뒤에서 현덕을 끌어안았다. 현덕은 한 팔에 고스란히 갇혔다.
“누구……!”
깜짝 놀라 앞으로 튀어나가려던 현덕의 몸은 이내 멈춰 섰다.
현덕을 껴안은 사람이 현덕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더운 숨이 어깨에 닿았다. 곧바로 현덕의 피를 빠는 듯 숨을 들이켰다.
“김현덕. 너 진짜.”
듣기 좋은 저음이 귓가에 울렸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아, 씨.”
가장 보고 싶었던 사람이 가장 들키고 싶지 않았던 순간에 나타났다. 이상하게도 그게 좋아서, 싫어서, 부끄러워서, 화가 나서. 아니, 안심이 돼서.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뭐야, 뭐 하는 거야.”
현덕은 얼른 두 손으로 눈을 비볐다.
“쪽팔리게 뭐 하는 거야. 이거 놔.”
잠자코 있었던 건 잠시뿐이었다. 현덕은 욱하는 마음에 몸을 흔들었다. 자신을 단단히 껴안은 품에서 달아나려 발버둥을 쳤다.
“놔, 이거 놔! 안 놔? 이거 놓으라고!”
하지만 그는 놔주지 않았다.
“놔! 이제 온 주제에!”
“김현덕, 누구 죽는 꼴 보고 싶어?”
으르렁대는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닿았다. 주민은 한 손으로 현덕의 팔과 허리를 모두 휘감아 안고는, 다른 한 손으로 현덕의 집업 목 부분을 잡아 뜯듯 당겼다.
하얀 목과 어깨가 드러났다. 주민은 드러난 어깨를 깨물었다.
“윽!”
현덕은 급소를 물린 사람처럼 몸을 파드득 떨었다.
아팠다. 그래서 더 서러웠다.
“흑……. 나쁜, 새끼.”
현덕은 고개를 푹 숙이며 울음을 터뜨렸다.
주민이 위로하듯 현덕의 목을 움켜쥐었다. 현덕은 그 손에 기댔다. 뚝뚝, 눈물이 떨어졌다.
마른 어깨에 잇자국이 났다. 주민은 제가 낸 자국을 혀로 핥았다. 축축하고 뭉글한 느낌에 현덕이 다시 몸을 떨었다. 주민은 그 떨림마저 집어삼키려는 듯 현덕을 움켜쥔 팔에 힘을 주었다.
마른 입술이 목을 타고 올랐다. 현덕의 귓가에 주민의 숨이 닿았다. 그 순간.
현덕은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 여기가 밖이고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 따위는 잊었다. 아니, 애초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머릿속에는 오직 우주민 뿐이었으니까.
주민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주민이 입을 맞춰왔다. 눈물에 젖은 현덕의 입술은 촉촉했고, 현덕에게 달려온 주민의 입술은 메말랐다.
현덕이 입을 열자 주민이 바로 밀고 들어왔다. 마른 입술 속에는 뜨거운 불덩이가 숨어 있었다. 현덕을 단번에 불태우기 충분한 열기였다.
주민의 혀가 질척하게 현덕의 안을 핥았다. 현덕의 혀를 얽고 빨아 당겼다.
주민은 현덕을 집어삼킬 듯 거칠었다. 현덕의 몸이 자꾸 뒤로, 아래로 밀렸다. 그런데도 주민은 자꾸 현덕에게 다가가서 현덕을 씹어 삼킬 것처럼 굴었다.
숨 쉴 틈조차 주지 않았다. 현덕은 고개를 젖히려 했지만 주민이 놔주지 않았다.
“으……. 잠……읍…….”
잠시의 틈도 없었다.
다시 현덕이 몸을 뒤로 돌리려 했지만 주민이 팔을 풀지 않았다. 살짝이라도 팔을 풀면 현덕이 영영 사라져버릴 것처럼. 주민은 현덕을 조금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목을 움켜잡았던 손이 현덕의 턱을 잡아 한껏 뒤로 돌렸다. 현덕의 목이 꺾이고, 그 위로 주민의 얼굴이 엇갈렸다.
주민은 위에서 아래로 현덕을 파고들었다. 일방적인 강탈이었다. 현덕이 버거워하며 몸을 비틀고, 손을 뻗어 주민의 팔을 잡아당겼지만 소용없었다.
주민은 정신없이 현덕의 입술을 빨았다. 현덕이 거의 기절 직전이 되어 늘어져서야 겨우 놓아주었다.
입술을 떼자 현덕이 급히 숨을 쉬었다가 내쉬었다. 그 숨마저도 달아서 자꾸 허기가 돌았다. 견디지 못해 입술을 쪽쪽 맞추니, 현덕이 힘 풀린 두 손을 들어 주민의 얼굴을 밀었다.
“여, 여기 밖이야.”
현덕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제야 이성이 돌아왔다.
“이거 놔봐, 놓고, 잠깐만.”
현덕은 버둥거리며 주민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주민은 현덕이 제정신을 차린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현덕을 놔주지 않았다. 대신 현덕이 눌러쓴 후드를 꾹 잡아 누르며 얼굴을 가리고, 채 가려지지 않은 입술에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하지 마!”
“괜찮아, 주변에 아무도 없어.”
“아무도 없긴.”
“나 못 믿어?”
주민이 웃으며 물었다.
현덕은 주민을 올려다보았다. 주민의 얼굴이 너무 자신만만해서 현실감이 없어졌다.
눈물도 어느새 그쳤다.
“진짜?”
“응. 주변 정리 다 했어. 다 내쫓았어.”
“……이게 재벌의 갑질인가?”
현덕이 어이없어하며 중얼거렸다.
“로맨스라고 해두자. 드라마 안 봤어? 애인을 위해 주변을 싹 비우는 건 기본이잖아.”
“형도 드라마를 봐요?”
“어릴 때 많이 봤지. 할 수 있는 게 그거밖에 없었거든.”
주민의 입가가 싸늘하게 얼었다. 현덕은 정말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려 주변을 둘러보느라 보지 못했다.
주민은 현덕의 시선이 제게서 떨어지는 것마저 아쉽다는 듯 현덕의 목을 움켜잡고 자신만 보게 만들었다.
“목 아파.”
“응.”
“주민 형, 아프다니까요?”
“그래.”
주민이 웃으며 현덕을 내려다 봤다. 이마, 눈썹, 눈, 코, 입, 턱. 어디 하나 주민의 눈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주민은 현덕의 목을 움켜잡았던 손으로 현덕의 얼굴을 타고 올랐다. 얼굴을 적신 눈물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닦아준다기보다는 그 눈물마저 제 손에 가두는 느낌이었다. 현덕은 주민에게 제 눈물마저 고스란히 내주었다.
주민과 현덕은 한 덩어리가 되어 온기를 나누었다.
주민은 현덕을 등 뒤에서 꼭 껴안은 채로 놔주려 하지 않았다. 현덕은 몇 번이나 부탁하여 겨우 몸을 돌릴 수 있었다. 그래 봤자 다시 주민의 품에 안겼지만. 목이 아픈 건 덜할 수 있었다.
현덕은 주민을 보았다.
며칠 만에 보는 주민은 어딘가 달라보였다. 평소보다 단정하면서도 헝클어져 있었다.
무슨 사교 모임에라도 있다 온 건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히 세팅되어 있었다. 주름 하나도 허투루 잡히지 않은 정장에 넥타이. 롱코트.
그런데 단정히 빗어 뒤로 넘긴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다. 넥타이도 길게 잡아 뺀 듯 허술하고, 하얀 와이셔츠도 단추가 두어 개 풀려 있었다.
“왜 이래요, 이거.”
현덕이 주민의 넥타이를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너 때문이지.”
주민이 현덕의 정수리에 얼굴을 묻으며 숨을 내쉬었다. 숨에 떨림이 묻어났다.
“전화도 안 받고, 다른 사람들은 너 어딨는지 모르겠다고 하고. 그러니 내가 안 미치고 배기겠어?”
머리 위에서 주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꼭 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주민의 숨에 젖어 들었다.
눈물이 멎은 눈가가 다시 시큰해졌다.
분명 현덕이 스트레스를 버티는 법은 혼자서 한강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 그것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치 더 좋은 방법을 찾았다. 바로 주민과 함께 있는 것이었다.
가만히 품에 안겨 있으니, 몸의 떨림이 멎었다. 눈과 귀에 쟁쟁 울리던 온갖 비난과 욕설이 봄눈처럼 녹아내렸다.
‘나는 정말로 우주민을 좋아하는구나.’
현덕은 두 손으로 주민을 마주 껴안았다. 주민의 몸이 움찔, 하는 게 느껴졌다.
웃음이 났다.
마음이 너무 아프고 슬프고 외로운데, 주민이 곁에 없는 게 서러웠고. 홀로 버티려 했는데, 막상 주민이 나타나니 안도했다.
이쯤 되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민 형. 우주민. 나는 정말로 너를 좋아하나 봐.’
***
한참 뒤 주민은 현덕을 다시 벤치에 내려놓았다. 손길에 아쉬움이 그득 묻어났다. 현덕은 저를 내려놓고 뒤로 물러서는 주민의 팔을 잡았다.
“자, 이제 설명 타임.”
얼굴에 눈물 자국이 있긴 했지만 현덕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해져 있었다. 아직 물기에 젖어 반짝이는 검은 눈을 들어 주민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주민은 현덕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정장이 더럽혀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현덕과 눈높이를 맞췄다.
“설명은 내가 들어야 할 거 같은데.”
“내가 여기에 있는 줄 어떻게 알았어요?”
“…….”
“핸드폰으로 위치를 추적했다고 하기엔,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건 맹덕 형 폰이고. 또 꺼져 있는데.”
“…….”
“주민 형?”
“오 팀장이 나한테 연락했어. 너랑 통화가 안 된다고. 문자 하나 달랑 보내 놓고 끝이었다고. 김현덕이 이럴 애가 아닌데.”
주민은 일방적으로 묵비권을 행사하다 슬쩍, 말머리를 돌렸다. 그 얕은수가 눈에 훤히 보였지만 현덕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어디 한번 이야기해보라는 태도로 팔짱을 끼고 주민의 말을 들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내가 다시 들어가 봐야 해서.”
“언제 또 보는데요? 트라이 온 촬영할 때나 보나?”
비꼰 말이었건만.
“그래야 할 거 같아.”
주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헐.”
현덕이 뻑뻑한 눈을 크게 뜨고 주민을 보았다. 주민은 현덕의 손을 손난로처럼 만지작거렸다.
“내 연락처는 알아요?”
“오 팀장한테 받아뒀어. 핸드폰 바꿨다며. 잘했어.”
“근데 왜 연락 안 했어요?”
“목소리 들으면 보고 싶어질 테니까.”
“…….”
이번엔 현덕이 말문이 막힐 차례였다.
“지금 봐도 이렇게 보고 싶은데.”
주민이 고개를 숙여 현덕의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그 상태로 눈만 들어 현덕을 올려다보았다.
“왜, 내가 연락 안 하니까 속상했어?”
“말도 안 되는 소리!”
현덕은 얼른 손을 빼냈다. 주민이 큭큭, 소리내 웃었다. 현덕은 얼굴에 피가 몰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건 왜 물어본 거야!’
불과 일 분 전의 자신을 마구 패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다시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일 분 삼십 초 전으로.
하지만 주민은 현덕을 과거든 미래든 어디로든 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무 생각 하지 말고 아무 걱정 하지 말고, 집에 가서 푹 쉬어.”
주민이 말했다.
“형-”
현덕은 묻고 싶었다. 지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아느냐고, 알아서 그런 말을 하는 거냐고.
“왜?”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물을 수 없었다. 주민은 바빠 보였다. 팔에 찬 시계를 보고 시간을 확인하길 여러 번. 주변에 새까맣게 차려입은 남자들이 나타났다. 예전에 주민을 납치하려 했던 사람들과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데려다줄게. 가자.”
주민이 현덕을 잡아끌었다. 현덕은 순순히 따라나섰다.
한강 공원에서 위로 올라가는 입구에 새까만 차가 여러 대 서 있었다. 자동차 브랜드에 별로 관심이 없는 현덕이 보기에도 꽤 값비싸 보였다. 차 내부는 더 고급스러웠다.
주민이 제일 앞의 차를 타니 뒤따른 사람들이 뒤의 두 대에 나눠 탔다. 차 안에는 당연하게도 운전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주민은 차 안에선 현덕에게 찝쩍거리지 않았다. 운전기사의 눈치를 보고는 잔뜩 긴장해 한쪽으로 웅크려 있는 현덕을 보고는 즐겁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
현덕이 자신의 집이 어디라고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운전사는 능숙하게 차를 몰았다.
현덕의 집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차가 멈추자 주민은 현덕 쪽으로 다가가 문을 열어주었다.
현덕은 약간 얼떨떨한 기분으로 차에서 내렸다. 주민은 자신을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집으로 들어가려는 현덕의 손을 잡아챘다. 현덕의 손을 한 번 꽉 잡고는 놔주었다.
“……또 봐요, 주민 형.”
“촬영 날 다시 만날 거야.”
주민은 되뇌듯 말했다. 현덕에게 말한다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새기는 듯 했다.
며칠 만에 만나서일까. 여전히 주민의 모습이 낯설었다. 입고 있는 옷이나 흐트러지긴 했지만 그래도 단정히 뒤로 넘긴 머리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가 가지고 있는 본연의 분위기가 이런 것일지도 몰랐다.
주민은 트라이 온 촬영 때 입는 빨갛고 노란 셔츠보다 지금의 이 모습이 더 잘 어울렸다. 날카로우면서 나른한 느낌이 선명했다. 퇴폐적이다 싶을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 자꾸 눈길을 끌었다.
“왜. 새삼 반했어?”
주민은 주말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 3세가 할 법한 대사를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았다.
“으으.”
현덕은 소름 돋은 팔을 쓸어내리고는 차 문을 쾅 닫았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 아파트로 걸어 들어갔다. 주민은 바쁘다고 했으면서, 현덕이 엘리베이터를 탈 때까지 떠나지 않았다.
***
현덕은 별생각 없이 집으로 갔다. 하늘은 아직 밝았다. 평소라면 기획사에서 자룡과 함께 연습하고 있을 터였다. 일찍 집에 온 자신을 보고 어머니가 놀랄 거라는 생각 정도나 했다.
‘하루 땡땡이치고 쉬러 왔다고 하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현관문 앞에 신발이 어지럽게 늘어져 있었다. 구두가 한 켤레, 두 켤레……. 다섯 켤레였다. 하나같이 반들반들 윤이 났다. 아버지의 낡은 구두가 아니었다.
“어머니, 저 왔어요. 손님 오셨어요?”
현덕은 구두 더미를 피해 구석에 운동화를 벗고 집으로 들어갔다.
“현덕아, 이제 오면 어떡하니. 어? 얼굴은 또 왜 그래? 울었어?”
어머니가 현덕을 반겼다. 현덕의 빨간 눈을 보고는 깜짝 놀라 물었다. 현덕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눈이 가려워서 비볐더니 실핏줄이 터졌어요.”
“아닌 거 같은데…….”
어머니가 현덕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이내 현덕의 손을 잡고 끌었다.
“일단, 얼른 와보렴. 다들 계속 널 기다리고 계셨어.”
“누가요? 손님이요?”
현덕은 어머니에게 팔이 잡혀 끌려가듯 거실로 갔다.
거실의 소파는 꽉 차 있었다. 양복을 차려입은 사람이 다섯이나 앉아 있었다. 그중 두 사람은 얼굴이 눈에 익었다.
“오 팀장님?”
“현덕 씨!”
오 팀장은 소파 제일 끝에 앉아선 연신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고 있었다. 걸어 들어오는 현덕을 발견하고는 반색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옆에 앉아 있던 비쩍 마른 남자도 함께 일어섰다. TE엔터테인먼트 법무팀에서 일하는 변호사였다. 오고 가며 몇 번 만나 얼굴은 알고 있었다.
“이쪽은 기획사에서 오셨고, 그런데 오기는 저쪽 분들이 먼저 오셨어.”
어머니가 현덕에게 소곤소곤 말했다.
현덕은 오 팀장의 반대편에 앉아 있는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셋 다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똑같은 양복을 입고 있어도 이쪽이 더 날카롭고 단정해 보였다. 법조계에서 일하는 사람들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변호사인가?’
그들은 현덕이 자신을 바라보자 고개를 까닥였다. 가장 오른쪽에 앉아 있던 사람만 자리에서 일어나 현덕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현덕은 명함을 받아 확인해보았다. 시황그룹 법무팀의 고문 변호사였다.
“안녕하십니까. 진이사라고 합니다. 편하게 진 변호사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그는 한참 어린 현덕에게도 깍듯했다.
“안녕하세요. 김현덕입니다.”
현덕도 꾸벅 고개를 숙였다.
“여긴 어떻게…….”
고개를 들며 성급히 묻자 진 변호사가 현덕에게 자리를 권했다. 현덕과 어머니는 소파의 상석에 앉았다.
“다름이 아니라 최근 벌어지고 있는 김현덕 씨에 대한-”
막 진 변호사가 말문을 열 때였다.
인터폰이 울렸다.
“어머나? 딱히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
어머니는 진 변호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다시 현관문으로 나갔다.
잠시 후. 현관 쪽에서 요란한 환영 인사가 들렸다.
“어머나, 이게 누구야? 지혜 씨! 아니, 박 변호사라고 해야 하나?”
“형수님, 안녕하셨어요?”
“물론이죠, 지혜 씨는 잘 지냈어요? 그나저나 우리 집엔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이긴요. 선배님의 명을 받잡고 출동했습니다!”
“우리 그이가?”
“네, 형수님. 완전 감동!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달려왔습니다. 평소에 저희랑 점심 식사는커녕 커피 한 잔 안 마시려 하시는 선배님께서, 일 잘 마무리되고 나면 저녁 식사나 하자고 말씀하시는데 당연히 열 일 마다하고 달려왔지요. 우리 현덕이가 엄청난 명예 훼손을 당하고 있다면서요? 선배님이 다 잡아 족치라고- 읍! 으읍?”
“어머 어머, 지혜 씨. 농담도 잘해. 우리 바깥 양반이 그런 험한 소릴 했을 리가!”
“으으, 읍! 읍읍읍!”
현덕은 현관 쪽을 돌아보았다.
맵시 좋은 까만 정장을 입고 큰 가방을 든 여성이 어머니와 함께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지혜 이모?’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이모라 부르고 따르던, 아버지의 학교 후배였다. 검사로 일하다가 퇴직하고 변호사가 되었는데 유명 로펌에 들어가 맹활약을 하고 있다고 했다.
검사 시절에는 집에도 곧잘 놀러와 함께 밥도 먹고, 여름휴가도 같이 다니고 했건만. 변호사가 된 뒤로는 만남이 뜸해졌다. 정작 그녀는 가끔 어머니와 만나서는 아버지가 거리를 두려 하는 것 같다고 투덜거리곤 했다.
아무튼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사람이었다.
“어머? 이게 웬일이야? 반가운 얼굴들이 다 여기에 있네?”
박지혜 변호사는 거실을 한 번 눈으로 쭉 훑더니 손을 흔들었다. 오 팀장과 함께 온 변호사와 시황그룹 쪽의 변호사, 그리고 박지혜 변호사는 초면이 아닌 듯했다. 양쪽에서도 박지혜 변호사를 보고는 고개를 까닥였다.
“이야, 우리 현덕이 때문에 다 모인 거야?”
박지혜 변호사가 현덕 옆에 자리를 잡고 앉더니 말했다.
“하하, 글쎄요.”
현덕은 어색하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변호사 세 팀을 둘러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현덕이 어리둥절하거나 말거나 어른들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들은 싱글싱글 웃으며 서로 인사를 나누고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더없이 논리정연하고 차분하지만,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설전이 시작되었다. 주도권을 잡기 위한 싸움이었다.
누구도 상대방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오직 반박하기 위해서만 걸러 듣고 바로 반박했다.
TE엔터테인먼트 측, 시황그룹 법무팀 측, 그리고 현덕의 아버지가 보낸 변호사 측. 다들 나서겠다는 이유는 분명했다.
당사자의 소속 기획사가 나서서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 TE엔터테인먼트의 주장이었다. 시황그룹은 풍부한 경험과 자금을 바탕으로 현덕을 케어해 주기 위해 왔다며 자신들의 파워를 내세웠다.
박지혜 변호사는 미성년자인 당사자의 보호자인 친부의 의뢰를 받은 대리인이었다. 게다가 이쪽 분야엔 도가 튼 베테랑이었다. 바로 얼마 전에도 인터넷 악플이 도를 넘어 우울증에 걸린 모 여배우의 의뢰를 받아 허위사실을 유포하던 악성 악플러들을 고소했다. 그 일이 떠들썩하게 뉴스로 보도되어, 안 그래도 이쪽에서 유명했던 이름이 더욱 널리 알려졌다.
TE엔터테인먼트나 박지혜 변호사는 그렇다 쳐도, 시황그룹 법무팀의 열의가 너무 뜨거웠다. 가장 현덕과 상관없는 사람들이기에 오 팀장과 박지혜 변호사는 끼어들지 말라고 쳐냈으나 그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오직 현덕만이 시황그룹 법무팀이 왜 저리도 절실하게 달려드는지 감히 짐작했다.
‘재벌 3세를 애인으로 두면 이런 일이 생기는구나.’
어쩐지 시황그룹 법무팀 뒤에 주민이 도끼눈을 뜨고 서 있는 듯한 환각이 보였다.
“다들 의욕이 넘치시네. 현덕아,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니?”
어머니가 현덕에게 소곤소곤 물었다.
현덕은 이 싸움이 쉽게 끝나지 않을 걸 짐작하고는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어머니와 함께 부엌으로 갔다. 과연 세 팀은 현덕이 사라진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현덕은 어머니와 함께 손님들께 드릴 주스를 따르고 과일을 깎았다. 그러면서 사정을 대강 설명했다. 어머니가 너무 크게 충격을 받으실까 봐 규모를 축소해서 말했다.
“그냥요, 제가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이 인터넷에 제 욕을 쓰나 봐요.”
어머니가 스마트폰과 별로 안 친한 게 참으로 다행이었다. 현덕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자 애썼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것만으로도 큰 충격을 받았다.
어머니에게 현덕은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었다. 학교에서든 동네에서든 언제나 칭찬만 듣고 반듯하게 자란 보물이건만. 그런 현덕이 사람들에게 이유 없이 욕을 먹고 있다니.
“어디? 나한테도 보여줘 보렴. 뭐라고들 하는데?”
어머니는 분노해서 스마트폰을 현덕에게 내밀었다.
“굳이 찾아보실 필요도 없어요. 진짜 별거 아니에요.”
“별거 아니니까 엄마가 봐도 상관없겠네. 얼른 찾아봐. 아니, 엄마가 찾을까? 인터넷 들어가서 네 이름 석 자 치면 나오는 거지?”
어머니가 핸드폰 잠금화면을 풀었다.
최근 인터넷에서 김현덕이라고 치면 따라 나오는 연관 검색어들이 제법 흉흉했다. 보면 더 충격 받으실 게 분명했다. 현덕은 과도를 내려놓고 어머니에게로 다가갔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라니까요!”
“아무것도 아닌 일에 네 아버지가 후배를 보내고, 네 기획사에서 사람이 찾아와? 저 시황그룹 사람들은 또 뭐고!”
“그냥 초반 진압하려고 온 사람들이에요. 오해하지 마시고, 찾아보지 마세요. 네?”
어머니는 이리저리 손을 흔들며 도망치고, 현덕은 그런 어머니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으려 따라 움직였다. 어머니가 필사적으로 피하자 현덕은 결국 핸드폰 빼앗는 걸 포기하고 어머니의 두 손을 꽉 붙잡았다.
“이거 안 놔?”
“핸드폰 검색 안 하신다고 하면 놓을게요.”
“할 거야.”
“그럼 못 놔드려요.”
“김현덕. 너 지금 엄마 앞에서 힘자랑하는 거야?”
“아니요, 그냥 용기 내서 말리는 기분이에요.”
훌쩍 자란 아들은 힘에서 전혀 밀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감히 당신에게 힘자랑하는 둘째 아들을 응징하기 위해 현덕의 발을 밟으려 했지만, 현덕은 그마저도 피했다.
현덕이 주민과 싸울 때마다 드러냈던 순발력과 뛰어난 회피, 강력한 공격력은 어머니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어머니, 날 낳으시고. 형님, 날 가르치셨네. 아버지께서는 길치라는 능력을 나눠주셨다.
아무리 주민에게 실전 연습을 했다 하나 원조를 이길 순 없었다.
“윽!”
현덕은 결국 발등을 밟히고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절로 탭댄스가 나왔다. 자연히 어머니의 두 손을 잡은 손이 느슨해졌고, 어머니는 두 손의 자유를 되찾았다.
“현덕아, 엄마한테 개기는 건 아직 백만 년은 일러. 알았지?”
어머니는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그 순간,
“방심하면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법이죠, 어머니.”
현덕은 어머니의 핸드폰을 낚아챘다.
“김현덕, 핸드폰 이리 안 내놔?”
“싫어요.”
어머니의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숨기고, 어머니를 피해 부엌을 빙빙 돌며 현덕은 새삼 깨달았다. 인터넷이 악성 악플이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걸.
“엄마, 저 진짜 괜찮아요. 별일 아니에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나면 꼭 말씀드릴게요.”
현덕은 다시 어머니의 두 손을 붙잡았다. 이번엔 어머니를 말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손을 세게 잡지도 않았다.
단번에 손을 뿌리치고 핸드폰을 빼앗으려고 벼르던 어머니는 현덕의 진지한 목소리를 듣고는 손에서 힘을 뺐다.
“정말, 정말 괜찮은 거니?”
어머니가 현덕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네. 괜찮아요.”
현덕은 어머니의 눈을 피하지 않고 대답했다. 단지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정말로 지금은 괜찮았으니까.
만약 집에 오기 전에 주민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머니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을 것이다. 엉엉 울며 자신이 얼마나 상처 받았는지 고스란히 드러내 보였을지도.
그걸 본 어머니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어머니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와 맹덕은 어떻고.
악플을 견디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자신. 그런 자신을 바라보며 더 힘들어할 가족들, 그리고 친구들.
상처입고 다칠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이대로 넘어가면 절대로 안 되겠구나.’
현덕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엄마. 저 진짜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현덕은 당당하게 말했다.
어머니에게 괴로워하고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어떤 악플을 받든 조금도 상처받지 않는다고, 당당하다고. 그러한 비난이 결코 날 흔들지도 무너뜨리지도 못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래, 네가 그런 거라면 그런 거겠지. 엄마는 널 믿어. 하지만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렴. 알았지?”
현덕이 담담하게 행동하니 어머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현덕을 놓아주었다. 그래도 걱정을 아예 거두지는 않았다.
현덕은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과일과 주스 잔이 든 쟁반을 들고 거실로 돌아갔다.
거실은 여전히 한창 토론 중이었다. 열기가 후끈했다. 뜨거운 커피 말고 얼음이 든 주스를 가져온 게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현덕이 쟁반을 한가운데 내려놓자 그제야 세 팀은 당사자인 현덕을 놔두고 자신들끼리 열을 냈다는 걸 깨달았다. 다들 뒤늦게 민망해하며 잔을 들고 과일을 씹었다.
잠시 거실이 조용해졌다. 그 틈을 타서 현덕은 부엌에서 했던 ‘어떤 생각’을 다듬었다.
지금 거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나름 해당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전문가들이었다. 지금의 현덕이 무슨 말을 하든 그들에게는 그저 철없는 고등학생의 설익은 말로 들릴 터였다. 조금이라도 설득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차분하고 신중해야 했다.
한숨 돌리고 난 뒤, 주도권 싸움은 대략 가닥이 잡혔다. 소송 건을 끌고 가는 건 해당 분야에 경험이 많은 박지혜 변호사가 나서기로 했다. 대신 액션을 취할 때마다 TE엔터테인먼트 소속 변호사와 의논하며, 시황그룹 법무팀의 자문을 받기로 했다. 말이 자문이지 검토나 다름 없었다.
“으, 위에 상전을 두 팀이나 모시고 일해야 한다니. 이건 단순히 저녁식사 한 번으로 때울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선배님은 나한테 적어도 다섯 번 이상 밥을 사주셔야 해.”
박지혜 변호사는 구시렁거리면서도 다른 두 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포지션이 정해지니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급히 연락을 받고 온 박지혜 변호사는 현덕이 당하는 사이버 테러가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하였다.
반면에 TE엔터테인먼트는 트라이 온 방송 초반부터 인터넷의 정성적이고 정량적인 데이터를 체크하고 있었던지라 상황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시황그룹 역시 TE엔터테인먼트만큼은 아니지만 인터넷 주요 커뮤니티 사이트의 동향을 알고 있었다. 정리해 그래프로 수치화까지 한 상태였다.
TE엔터테인먼트와 시황그룹은 박지혜 변호사를 위해, 또 원활한 소통을 위해 해당 사건에 대한 정보를 브리핑했다.
현덕은 남의 입에서 듣는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과 반응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들었다. 충격을 받은 건 어머니였다. 현덕은 아차 싶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저 활활 타오르는 어머니의 눈빛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노력할 따름이었다.
TE엔터테인먼트에서는 수집한 게시글과 댓글 중 일부를 프린트하여 가져왔다. 그것을 박지혜 변호사에게 넘겼다. 박지혜 변호사는 휘휘 넘겨 보았다. 대충 보는 듯했으나 눈알은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빠르게 좌우로 움직이고 있었다.
박지혜 변호사는 이전 판례를 바탕으로 현덕을 공격하는 인터넷 악성 글과 게시글을 분류했다. 고소할 수 있는 것과 아닌 것. 분류는 단순명료했다.
박지혜 변호사 앞에 종이 뭉치가 둘로 나뉘었다. 그녀는 그중 좀 더 두툼한 쪽을 현덕에게 쭉 내밀었다. 제일 위에, 어느 인터넷 게시글이 프린트되어 있었다.
내용이 눈에 익었다. 현덕이 버스 정류장에서 웅크려 앉아 찾아봤던 글 중 하나였다.
“이거, 전부 다 고발할 수 있어.”
박지혜 변호사가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인터넷에서 익명성에 기대 남긴 글은 결코 허구가 아니야. 흔적이고 증거지. 그들은 고작 이름이 쓰이지 않은 가면을 하나 뒤집어쓰고 신나게 증거를 흘리고 다녔어. 우리는 그 뒤를 쫓으며 그들이 흘린 증거를 슬슬 주워 담으면 돼. 그것들을 예쁘게 정리해서 짠- 그들에게 내밀며 이렇게 물어볼 거야. ‘이거 네가 쓴 거 맞지?’ 하고.”
그녀는 현덕의 어머니가 프린트 된 악플을 보려고 하자 손바닥을 쫙 펴서 가렸다. 현덕은 그 배려가 고마웠다.
“이 사건은 허구의 인물이 실체가 모호한 미지의 대상을 모욕한 게 아니야.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김현덕이라는 이름을 알고, 김현덕이 누구인지 알고서 김현덕을 모독한 거지. 너는,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인터넷에 멋대로 이것들을 써 갈긴 책임을 물을 수 있어.”
“네.”
“그러기 위해선 네 각오와 동의가 필요해.”
박지혜 변호사는 현덕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현덕과 눈높이를 맞추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현덕아. 선배님은 무조건 네 의사를 따르라 하셨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라고. 도우라고 그러셨거든. 넌 어떻게 하고 싶니. 인터넷에 저런 글을 쓰고 댓글을 단 사람들을 고소하고 싶어? 아니면 그냥 용서해주고 싶어?”
현덕은 눈을 깜박였다. 말간 눈에 구겨진 종이 뭉치가 담겼다가, 이내 거실에 모인 사람들의 모습이 스쳤다.
현덕은 가만히 있어도 웃는 듯 순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으면 불퉁해 보이는 맹덕과는 정반대였다. 그래서 박지혜 변호사는 항상 현덕이 걱정이었다. 이 험한 세상, 저 순둥이가 어떻게 살아갈까.
하지만 오늘, 그 생각이 착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웃음기 없는 현덕의 얼굴은 차분했다. 너무 차분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악플에 시달리는 열여덟 살 고등학생으로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아주 오래 묵은, 제 안을 파고들다 파고들다 탁- 내려 놓고 편안해진, 그런 경지에 이른 사람같아 보였다.
현덕은 박지혜 변호사에게 대답하기 전, 마지막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깊이 숨을 들이켰다 내쉴 수 있는 정도면 충분했다.
현덕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어렸다.
“이모, 아니 박 변호사님. 저는 그 사람들 모두, 고소하고 싶어요. 선처 따윈 하지 않을 거예요.”
현덕은 담담한 목소리로 제 생각을 밝혔다.
“됐어. 그거면 돼. 마음, 바뀔 예정 없지?”
“네.”
“좋아. 무엇보다 네 각오가 중요해. 나한테 어어어- 하고 끌려오는 게 아니라, 정말 네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 마음을 정하는 게 우선이지. 나와 여기 있는 사람들이 도와준다고는 해도, 분명 쉬운 일은 아닐 테니까. 오래 걸릴 거고, 꾸준히 언급될 거고, 이후에도 계속 상황을 살피고 관리해 나가야 하니까. 귀찮을 거고.”
그저 악플러 몇 명만 붙잡아 처벌하고 끝날 일이 아니었다. 길고 지루한 싸움이 될 터였다. 그 과정이 현덕의 연예인 생활에 방해가 될 수도 있었다. 당장, 현덕의 말에 난색을 표하는 TE엔터테인먼트 쪽 사람들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현덕 씨, 물론 어느 정도 처벌을 하고 이슈화하는 게 필요하긴 하겠지만, 너무 그렇게 단호하게, 음, 고소를 하겠다느니 결정하는 게……. 물론, 고소를 하긴 해야겠지만, 그 시기라든가 범위라든가, 뭐 그런 게…….”
오 팀장은 그답지 않게 말을 더듬으며 횡설수설했다. 옆에 앉아있는 TE 엔터테인먼트 소속 변호사 또한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무얼 걱정하는지, 현덕과 다른 사람들은 능히 짐작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당연히, 몽땅 잡아 들여야지! 그냥 봐주자는 말인가요? 그게 지금, 현덕이를 데리고 있는 회사가 할 말인가요!”
당연하게도 현덕의 어머니는 분노했다. 박지혜 변호사는 어머니를 끌어안아 붙잡았다. 덕분에 오 팀장의 강냉이가 털리는 상황을 겨우 막을 순 있었다.
시황그룹 법무팀은 무표정한 얼굴로 관전했으나 한두 마디씩 껴들어 TE엔터테인먼트 쪽에 힘을 보탰다. 그들 생각도 TE 엔터테인먼트 측과 비슷했다.
TE엔터테인먼트와 시황그룹의 의견이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연예인들이 악플에 대응해봤자 좋을 게 없다.’
몇몇 연예인들이 악플로 인한 정신적인 고통을 호소하며, 강경 대응을 하였으나 일부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치부될 뿐이다.
박지혜 변호사는 그 ‘일부’에 속하는 건을 맡아 온 변호사였다. 그녀는 의뢰인의 굳은 의지를 받들어 악플러들을 무찔렀다. 무참히.
선처 따윈 없었다. 박지혜 변호사의 의뢰인은 진흙탕 싸움을 불사하며 악플러들과의 전쟁을 선포했고, 박지혜 변호사는 끝까지 물고 늘어지고 밀어붙였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건에서 승소했다.
덕분에 변호사의 의뢰인은 오랫동안 시달려왔던 루머를 벗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마냥 해피 엔딩은 아니었다. 의뢰인은 루머에서 자유로워졌으나 대신 밉상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악착같은 모습에 정이 떨어 진다나. 의뢰인은 루머를 벗은 것만으로도 만족했으나, 업계 사람들이 보기엔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오 팀장은 박지혜 변호사가 현덕의 악플 고소건을 그만큼 강경하게 밀어 붙일까 걱정했다. 그리고 오 팀장의 걱정대로, 박지혜 변호사는 그 이상으로 밀고 나갈 각오가 되어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우리 선배님의 아드님을 건드리다니. 이건 아니지. 감히 잠자는 호랑이의 코털을 건드려?’
TE엔터테인먼트 측은 이토록 열정적인 박지혜 변호사를 경계했다.
연예인은 이미지로 먹고 사는 직업이다. 언제나 대중의 시선을 살피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오 팀장은 이번 건을 강경하게 진행할 경우, 트라이 온에 출연하여 준 연예인이 된 현덕의 이미지가 나쁜 쪽으로 굳어질까 우려했다.
이렇게 법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데에는 의견을 같이 했으나, 그 규모와 방향에 대해서 박지혜 변호사와 TE엔터테인먼트 쪽의 의견 차가 컸다.
현덕은 오 팀장과 박지혜 변호사의 대립을 지켜보다가 주변이 조용해진 틈을 타 말을 꺼냈다.
“뒤늦지만, 절 위해서 이렇게 와주시고 또 도와주시려 애써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현덕은 일단 공손히 인사드렸다.
어머니는 옆에서, 예의 바른 둘째 아들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사이에 뭘 그런 소리를 해?”
박지혜 변호사는 사과를 씹으며 현덕의 옆구리를 툭 쳤고,
“우리가 놓친 게 아니라 계속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거든? 내가 현덕 씨한테 약속했잖아. 이번엔 반드시 케어를 해주겠다고.”
오 팀장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염려 마십시오. 저희가 완벽하게 케어해 드리겠습니다.”
시황그룹 법무팀은 더없이 깍듯했다.
잠시 분위기가 훈훈해지려던 차,
“제 일이니까 무엇보다 제 의견을 중시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 보호자이신 부모님의 뜻도 그러하니까요.”
현덕이 공격을 개시했다.
“…….”
“…….”
“…….”
박지혜 변호사, TE엔터테인먼트 측, 그리고 시황그룹 법무팀. 세 팀의 전문가들이 입을 꾹 다물고 현덕을 바라보았다.
현덕은 자신과 비슷한 상황을 경험했을 사람들을 떠올렸다. 트윈 트윙클에 출연했던 선배님들, 그리고 미래 어느 때의 우주민.
현덕은 트라이 온 출연을 고민할 때 재방송 트윈 트윙클을 보았다. 출연자였던 항우영 연습생과 윤우희 연습생은 화면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비극은 그 웃음을 짓밟았다.
현덕은 이전 삶에서 어떤 누구보다 아름답게 빛났던 주민을 떠올렸다. 서른 살이 되기 이전의 주민은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다. 결국 주민은 한국에서 버티지 못하고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동안 쌓았던 모든 걸 잃고 밑바닥에서 다시 시작한다.
그 고난 끝에 맛본 열매는 더없이 달콤할 것이다. 하지만 그 달콤함을 맛보기 전까지 감당해내야 하는 고통이 너무도 크다.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비난받고,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 기어코 성공해 금의환향하는 그 마음은 얼마나 참담할까.
항우영과 주민은 현덕처럼, 아니 현덕보다 더 큰 비난 여론을 맞닥뜨렸다.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고 오롯이 혼자서 버텨야 했다. 항우영은 끝내 버티지 못했고, 주민은 어떤 방법으로든 버텨서 살아남았다.
트윈 트윙클에 출연한 항우영과 윤우희. 그리고 서른 살의 우주민. 그 사이에 열여덟의 김현덕이 있다.
‘내가 뭔가 바꿀 수 있을지도 몰라.’
현덕은 감히 생각했다.
항우희와 윤우희 사건을 겪고도, 박지혜 변호사가 담당한 어느 배우의 사건을 겪고도.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끝내 주민마저 고통받아야 했다.
그 길을 막아설 수는 없을까.
‘조금, 아주 조금만 바뀌어도 좋아. 조금이라도 좋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면.’
그러면 주민은 조금 ‘덜’ 힘들 수 있지 않을까.
‘도를 넘은 비난과 모욕은 반드시 처벌받는다는 전례가 생긴다면. 그 전례가 계속 쌓여 나가면. 분명 달라질 수 있을 거야.’
법정에서 판례는 중요하다. 판례가 없는 사건은 그래도 더욱 주목받는다. 이후의 비슷한 사건들을 판결하는 데 선행했던 판례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판례가 쌓이는 것 또한 중요하다. 해석의 여지가 있어 다른 판결을 내리는 힌트가 되어주기도 하며,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판례들은 이후 판결의 나침반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현덕은 자신의 사건이 하나의 판례가 되기를 바랐다. 그럴 수만 있다면 기꺼이, 나쁜 이미지나 더 큰 비난쯤은 감당해낼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해보자. 안 하고 머뭇거리다가 후회하고 싶진 않아.’
서른세 살이었던 김현덕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열여섯 살이 되었다. 다시 한번 살게 되었다는 걸 깨닫고 결심했다. 이번엔 다르게 살아보겠다고. 지난번 삶에서 후회했던 것들을 이번에는 후회하지 않겠노라고.
그래서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돌 연습생이 되었고, 또 열여덟 살에 TV에 출연하여 유명인이 되었다. 유치원 학예회에서 불렀던 노래대로 된 것이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춤추고 노래하는 예쁜 내 모습.’
열여덟 살이 된 지금에 이르러, 현덕은 고작 자신의 삶만 바꾸었을 뿐이었다.
생각도 안 나는 로또 당첨 번호를 생각해내려 애쓰지 않았다. 세계적으로, 아니 당장 국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여 미래를 바꾸려 하지도 않았다. 집-학교-도서관만 다니며 살았기에 바깥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알더라도 바꾸려 시도조차 하지 않았겠지만.
그렇게 지금까지는 그저 자신의 삶을 조금 다르게 살아보는 것에 만족했다.
그런 오늘, 지금 이 순간.
현덕은 감히 욕심을 가졌다.
자신 말고 다른 사람의 미래를 바꾸어 보려는 시도였다. 선택이었고, 도전이었다.
“저는 지금 인터넷에서 저를 비난하고 비방하는 글들을 처벌하길 강력히 원합니다. 선처나 합의 따위는 하지 않을 겁니다.”
현덕이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밝혔다.
“만세!”
박지혜 변호사는 두 팔을 번쩍 들고 환영했다.
“맙소사, 내 이럴 줄 알았지. 현덕 씨, 가만 보면 욱하는 성질머리가 있어. 괜히 우주민, 박자룡이랑 어울려 다니는 게 아니었어. 아주 똑같아, 셋이 다. 어우, 이 무대포들.”
오 팀장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우는 소리를 냈다. 따라온 TE엔터테인먼트 소속 변호사의 안색도 창백해졌다.
“결정을 내리셨다면, 저희가 최대한 케어하겠습니다.”
시황그룹 법무팀은 금방 태도를 바꾸었다. 현덕과 박지혜 변호사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그들의 가슴팍에서 시황그룹 배지가 반짝반짝 빛났다.
“거기에 더해서, 단지 저만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건, 여기 모여 계신 분들의 도움이 꼭 필요한 일입니다만.”
현덕이 말을 이었다.
“트라이 온 방영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이후 언젠가 까지. 저뿐만이 아니라 트라이 온에 참여한 모든 연습생의 케어도 맡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여기 계신 분들께서요.”
현덕이 다시 한번 폭탄을 던졌다.
“…….”
“…….”
“…….”
거실은 다시 한번 초토화가 되었다.
인터넷에서 욕먹고 있는 건 현덕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연습생들도 1부 합격자, 탈락자 할 것 없이 고루고루 욕을 먹고 있었다. 현덕의 지분이 워낙 커서 다른 참가자들이 받는 비난이 도드라지지 않을 뿐이었다.
현덕 다음으로는 당연하게도 주민의 비중이 컸다. 그의 노래를 들었으면서도 특혜 의혹이 나돌았다. 시황그룹 왕회장의 손자로 밝혀진 뒤에는 더더욱 의혹이 커지고 있었다.
F반에서 갑자기 평가가 껑충 뛴 조성환과 사의준에 대한 욕도 많았다. 일부러 실력을 숨기고 있었던 거 아니냐, 의뭉스럽고 꺼림칙해서 응원하기 싫다, 등등.
유호는 TV에 나온 주제에 왜 그렇게 얼굴을 찡그리고 다니냐며 비난받았다. 한승은 덩칫값을 못 한다고 욕을 먹었고, 준비는 어린 게 영악하게 굴고 귀여운 맛이 없다고 까였다. 소혁은 그냥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재수 없다고 욕을 먹었다.
그나마 비난 여론이 적은 연습생은 자룡과 피터였다. 피터는 유학파 주제에 조신하게 군대를 다녀온 덕이었고, 자룡은 오랜 무명 생활의 짠한 스토리가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둘마저도 대수롭지 않은 이유로 툭하면 욕을 먹었다.
바야흐로 대 비난의 시대였다.
트라이 온에 출연한 연습생들은 심심풀이 땅콩처럼 씹혔다. 수위를 넘은 비난과 욕설도 심심치 않았다. 세종대왕께서 창제하신 한글의 한계를 시험해볼 생각인지, 창의적인 욕설이 수두룩했다.
지금 현덕의 상황에 비하면 새 발의 피지만 당하는 사람에게는 그러지 않을 터였다. 현덕은 자신만큼이나 힘들어하며,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 있을 다른 연습생들을 생각해 보았다.
‘다른 연습생들에 비하면 난 분명, 혜택받은 처지야.’
온갖 욕설과 비난을 감당해내야 하지만. 그래도 현덕의 옆에는 이처럼 그를 도우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집 거실을 가득 채울 정도였다.
현덕은 이것이 평범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러한 특혜를 자신 혼자 누리고 싶지 않았다.
‘이모는 내 말대로 해줄 거야. 이쪽에 내내 관심이 많았고, 또 아버지의 부탁을 받았으니까.’
현덕은 박지혜 변호사를 보았다. 그녀는 흥미진진하게 현덕의 말을 듣고 있었다.
‘오 팀장님도, 나 혼자 강력히 대응하겠다고 나서는 것보다는 모든 연습생을 위해 강경 대응을 하는 거라고 포장하는 걸 반기겠지.’
역시나 오 팀장의 표정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쪽인데.’
현덕은 시황그룹 법무팀이 너그럽게 받아줄 수 있는 한도가 어디까지인지 걱정됐다.
그런데 괜한 걱정이었던 듯 했다.
“그 또한 원하신다면 완벽히 케어해 드리겠습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재벌 3세를 애인으로 둔다는 건 이토록 좋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최고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세 팀 중 두 팀이 현덕의 편이었다. 현덕은 떨떠름한 척하면서 튕기는 오 팀장을 설득했다. 오 팀장은 결국 현덕에게 넘어갔다.
“저는 저만큼이나 다른 연습생들도 보호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현덕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도와줄 테니까, 얼른 허리 펴. 혹시라도 선배님 아시면 나 큰일 난다. 응?”
박지혜 변호사가 얼른 현덕을 일으켜 세웠다.
그렇게 현덕을 돕기 위해 모인 세 팀은 졸지에, 트라이 온 연습생들 전부를 케어해야 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어진 대화는 초반보다 훨씬 유했다. 현덕의 환심을 사서 주도권을 가져와야 한다는 개별 목표는 사라졌으니까. 이제는 현덕의 의뢰를 감당하기 위해 힘을 합쳐야 했다. 모두들 아군에게는 참으로 상냥하고 친절했다.
하지만 유해진 분위기와는 별개로, 주어진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세 팀은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다.
오 팀장은 아예 규모를 키워 트라이 온에 참여한 연습생들의 기획사가 모두 참여하도록 하자고 주장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모두들 동의했다.
리더는 여전히 박지혜 변호사였다. 시황그룹은 고문과 자금 지원을 맡기로 했다. TE엔터테인먼트는 다른 기획사들과 함께 기획사 연합을 꾸리고 의견을 모으는 역할을 담당하기로 했다.
논의는 막힘없이 진행되었다. 간혹 말이 막히거나 서로 대립하게 되면 현덕이 쏙 끼어들어 중재했다. 현덕은 이야기가 다시 진행될 수 있도록 단서를 주거나, 서로 대립하는 상황이 풀리도록 서로의 말을 상대방에게 옮겨주었다.
고작 열여덟 살 소년이 어려운 법률 용어가 난무하는 대화에 무리 없이 참여하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냈다. 충분히 놀랄 만한 일이건만. 현덕이 워낙 절묘하게 치고 빠지는 터라 다들 깨닫지 못했다. 어머니만 흐뭇하게 자신의 잘난 아들을 지켜볼 뿐이었다.
해가 서쪽으로 뉘엿뉘엿 질 때까지 현덕이네 집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밤이 되어서야 다들 자리에서 일어섰다. 현덕은 어머니와 함께 손님들을 배웅했다.
***
며칠 뒤, 트라이 온 2부 촬영이 재개된 날.
모든 인터넷 포털 메인 화면은 온통 ‘트라이 온’에 대한 기사뿐이었다. 수많은 기사의 파도 속에서 발버둥 치며 살아남은 몇몇 기사가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 트라이 온 연습생을 보호하기 위한 기획사 연합 탄생
- 시황그룹, 연예계 진출의 신호탄인가. 악플러 대응에 힘을 보태…….
- 트온 출연자 김현덕에 대한 과도한 인신공격, 소송으로 이어져…….
- 의사 표현의 자유인가, 인격모독죄인가, 댓글 수위에 대하여 논의…….
- 트온 PD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촬영 전부터 준비된 변호사팀…….”
- 선처는 없다, 도를 넘은 악플에 강경 대응 나서는 트라이 온…….
현덕은 핸드폰으로 뉴스 기사를 읽으며 트라이 온 촬영장으로 향했다. 물론 중간에 맹덕에게 핸드폰을 빼앗겼다.
“가족 이별의 순간에 핸드폰이 웬 말이냐. 엉? 이 형님은 무지하게 슬프구나, 아우야.”
현덕은 까맣게 탄 맹덕의 얼굴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맹덕이 방심한 틈을 타 맹덕의 짧은 머리카락을 한 움큼 손에 쥐어 보았다. 밤송이를 만진 듯 까슬까슬했다.
한참 나이 차가 많이 나는 형이라 언제나 어른 같게만 느껴졌건만. 이제야 군대를 다녀온 이십 대 청년이 되어 버렸다. 파릇파릇하게 젊은 맹덕이 새롭고 또-
“귀엽네.”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 대가는 몸으로 치러야 했다.
“동작 그만. 지금, 이게 무슨 짓? 귀엽다고라? 이게, 형님이 봐주니까 아주!”
맹덕이 핸드폰은 휙- 집어던지고는 현덕에게 달려들었다.
“으아아아아- 하, 항복!”
“이제 시작이야?”
맹덕은 현덕의 옆구리를 마구 간지럽히고는 헤드락을 걸었다. 군대에 말뚝 박으라는 매일같이 받는다는 맹덕의 물오른 체력에 현덕은 맥없이 당해야 했다.
“항복, 하앙복- 가족 이별의…… 눈물겨운 순간에, 이러면 안 되지. 형, 나 항복.”
현덕은 맹덕의 탄탄한 배를 주먹으로 두들기며 백기를 들었다. 운전하던 어머니와 보조석에 앉은 아버지는 하하, 허허 웃을 뿐 둘 중 누구의 편도 들어주지 않았다.
현덕이네 가족은 어머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서울 외곽의 호텔 앞에 섰다. 아직 정식 개장도 하지 않은 호텔 앞이 떠들썩했다.
1부 촬영을 위해 합숙하러 들어갈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플래시를 터트리는 수십 명의 기자, 응원 메시지를 들고 흔들며 소리치는 팬들. 그리고 그 틈바구니에서 현덕만큼이나 어리둥절하고 긴장한 연습생들. 화려하고 떠들썩했다.
현덕은 차에서 내리기 전 가족과 인사를 나누었다.
“이번엔 몇 달씩 들어가 있는 거 아니고, 그냥 매주 삼 일씩만 들어가 찍고 나오는 거지?”
맹덕이 제 머리를 손으로 문지르며 물었다. 말년 휴가 전부터 길렀다고는 하나 아직도 머리카락이 많이 짧았다.
“응, 그렇다고 했어.”
“그래, 그럼 사흘 뒤에 보자. 윤 병장님께 안부 인사 좀 전해주고.”
“응, 형.”
“긴장하지 말고 잘 다녀와.”
“네, 어머니.”
“무리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말고. 실례되는 짓은 애초부터 하는 게 아니란다. 알았지?”
“네, 아버지. 명심하겠습니다.”
현덕은 저를 걱정해주는 가족들을 차에 두고 내렸다. 조심조심, 정체를 들키지 않고 사람들 틈 사이를 지나가려 했으나.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현덕 연습생!”
“잠깐만, 잠깐이면 돼.”
“현덕아아아악!”
“오빠아!”
기자들과 팬들은 단번에 현덕을 알아보았다. 현덕은 호텔로 전력 질주하였다.
“죄, 죄송합니다아아!”
현덕이 도망치려하자 팬들이 기자들을 막아주고 길을 터주었다. 덕분에 큰 몸싸움 없이 호텔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무대 장치가 그대로 남아 있는 1층 로비가 나타났다. 벌써 도착한 연습생들 몇몇이 서로 뭉쳐 이야기를 나누거나 몸을 풀고 있었다.
현덕은 뛰어오느라 가빠진 숨을 다스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연습생들은 그런 현덕을 곁눈질로 쳐다보며 수군댔다. 그러고 보니 현덕이 막 도착했을 때, 잠깐이지만 경적이 흐르기도 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현덕은 저와 친한 연습생을 한 명도 찾지 못했다.
‘왜 다들, 이렇게 늦게 오는 거야.’
분위기 탓에 괜히 머쓱해진 현덕은 신발 끝으로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그 마법의 주문에 응답하듯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잘 지냈어?”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현덕은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피터 형!”
피터였다. 헤어졌을 때와 같은 차림이었다.
“안녕, 현덕아.”
피터가 캐리어를 놓고 손을 흔들었다.
고작 일주일 조금 넘게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오랫동안 헤어졌다 다시 만난 것처럼 마냥 반가웠다. 현덕은 활짝 웃음 지었다.
“잘 지내셨어요? 참, 저희 형 제대했어요. 꼭 피터 형한테 안부 전해달라고 했어요.”
“어, 음, 어- 어- 어-”
피터는 계속 대답하려 했으나 현덕이 계속 질문을 하여 답할 수 없었다. 결국 피터는 현덕이 제풀에 지칠 때까지 한 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아, 죄송해요. 너무 제 얘기만 했죠, 형. 너무 반가워서요.”
현덕이 뒤늦게 민망해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니, 미안해하지 마. 오히려 내가 고마워해야 할 거 같으니까.”
피터가 한 걸음 현덕에게 다가왔다.
“고맙다니, 뭐가요?”
현덕은 고개를 갸웃하며 피터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피터의 얼굴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피터는 웃고 있었다. 언제나 웃고 있는 사람이었으나 오늘은 뭔가 달랐다. 평소보다 자연스러웠고, 또-
‘진짜로 웃고 있어.’
꾸며낸 웃음이 아니었다. 사람을 탐색하는 듯한 눈도 아니었다. 그저 소탈하게, 편하게 웃고 있었다.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묘한 편안함이 느껴졌다. 북풍의 심술 때문에 꽁꽁 싸매고 있다가 햇살의 입김에 녹아 코트를 벗어버린 이솝 우화의 어느 남자 같달까. 가뿐하고 또 개운해 보였다.
“고마워, 현덕아. 정말로 고마워.”
피터는 자꾸 현덕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현덕은 피터가 왜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피터에게 이렇게나 고맙다는 인사를 받을 만한 일을 한 기억이 없었다.
피터가 손을 뻗어 현덕의 한 손을 잡았다. 혹시라도 놓칠세라 꽉 움켜잡았다. 현덕은 그런 피터를 뿌리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어쩐지 왼쪽 가슴이 뻐근해졌다.
왜 이러는 거냐고 물어봐야 하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피터의 웃는 얼굴이 자꾸 눈에 밟혔다.
현덕은 오래지 않아 그 이유를 깨달았다.
‘닮았어. 이렇게 웃을 줄 몰랐던 것도, 또 이렇게 웃게 된 것도.’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그렇게 또 현덕의 머릿속을 독차지한 사람이 현덕을 뒤에서 끌어안아 번쩍 들었다.
“아무튼, 눈을 떼면 꼭 이렇다니까.”
귓가에 저음이 묵직하게 울렸다. 듣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쿵쾅 뛰었다.
커다란 손이 단번에 피터의 손을 쳐내고는 피터에게 잡혀 있던 현덕의 손에 깍지를 꼈다. 그리고는 바로 뒤를 돌아 뚜벅뚜벅, 걸었다. 발걸음이 무척 빨랐다.
“어, 저기- 잠깐만!”
등 뒤에서 피터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직진 밖에 못 하는 로봇처럼 걸어갈 뿐이었다.
“맙소사, 얘기 중인데 뭐 하는 거예요.”
현덕은 붙잡힌 손을 들어 저를 껴안은 남자의 뺨에 가져다 댔다. 깍지를 끼고 현덕의 손을 움켜쥔 커다란 손은 순순히 따라왔다.
손바닥에 닿는 메마른 감촉. 손등에 닿은 뜨거운 온기.
내내 그리워했던 것이었다.
‘망할 우주민.’
만나면 한 소리 해주려고 했는데, 허리를 붙잡은 팔이 너무 단단했고, 그 손에서 자신이 그간 느꼈던 것 만큼의 그리움이 느껴졌다. 손바닥에 닿은 메마른 기분이 너무 쓸쓸해서 현덕은 제대로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보고 싶었어.”
이 말 한마디에, 그간 보지 못했던 서러움이 눈 녹듯 사라졌다.
“일단 이거 내려놓고 말하죠?”
현덕은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싫은데?”
주민은 단칼에 거절하며 아예 두 손으로 현덕의 허리를 껴안았다. 허리를 동강 내려는 힘이 두 배가 됐다.
“으악!”
현덕은 전혀 애교스럽지 못한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렸다. 주민은 그런 현덕을 안고 로비를 빙글빙글 돌았다. 그 뒤를 피터가 쫓았다. 어느새 도착한 자룡과 준비도 뒤따랐다.
누군가 반대쪽으로 돌면 붙잡을 수 있다고 조언했지만 피터와 준비, 자룡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야야, 애 죽는다. 만나자마자 가슴이랑 배를 구분하려고? 현덕이는 개미가 아냐, 얼른 내려 놔!”
자룡은 더욱 선명해진 녹색 머리를 쓸어 넘기며 주민을 뒤쫓았다.
“형, 현덕 형. 보고 싶었어여. 근데 만나도 보질 못하네여. 형, 현덕이 형.”
준비가 울상을 지으며 졸졸 따라다녔다.
“내가 먼저 발견했거든? 하던 말 좀 마무리 짓게 딱 일 분만 빌려달라니까?”
피터는 금세 뒤처져 저만치 멀어졌다.
그들 모두의 입가엔 웃음이 가득했다. 다시 경쟁의 시작이지만, 그래도 그 시작은 함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