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 번, 이번엔 4
다시 한 번, 이번엔
4
두고
목차
1. 해소
2. 반응
3. 1과 2의 사이
4. 위 · 촉 · 오
5. 외전 : 현덕이가 교복을 입었을 때
6. 외전 : 알파 우주민, 베타 김현덕
1. 해소
요 얼마간 주민의 새벽 연습을 돕느라 잠을 줄였던 후유증인지, 요즘엔 더 잠이 많아졌다. 한 번 잠들면 꿈도 꾸지 않고 푹 잤다.
오늘도 그랬다.
숙소 침대보다 좀 더 푹신한 매트리스에 푹 파묻힌 느낌이 좋았다. 이불도 베개도 아닌, 뜨끈뜨끈하고 딱딱한 것이 오징어처럼 달라붙어 있는 느낌도 좋았다. 커다란 오징어에게 끌어 안긴 기분이랄까.
조금 불편하기는 했다. 잠결에 돌아누우려 하면 그 오징어 같은 게 자꾸 몸을 뒤집어 판판한 가슴팍에 얼굴을 묻게 했다.
“으음…….”
현덕은 쥘 것을 찾아 손을 더듬었다. 베개, 푹신한 베개를 꽉 쥐어야 하는데. 그래서 베개를 찾으려고 움직이는 건데. 이 딱딱한 오징어가 자꾸 방해했다.
현덕은 어쩔 수 없이 손에 잡히는 대로 얇은 천 조각을 손에 꽉 쥐고 거기에 얼굴을 파묻었다. 셔츠를 움켜쥐고 그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은 것이다.
오징어도 만족스러운지 낮게 숨을 내쉬었다. 그 숨이 머리카락을 간지럽혔다.
두근, 두근.
귓가에 오징어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오징어 주제에 심장 소리가 참 듣기 좋았다. 현덕은 좀 더 듣고 싶어 오징어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볐다.
머리 위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오징어 주제에 사람을 보고 웃다니.’
이상한 오징어였다.
문득 어머니가 해주시는 오징어 볶음이 생각났다. 매콤하니 맛있는 오징어 볶음. 야채와 오징어를 입안 가득 넣고 잘근잘근 씹으면 맛있는데.
현덕은 입을 아- 벌려 단단한 가슴팍을 꽉 깨물었다. 볼록 나온 돌기 같은 게 입안에 들어왔다. 얇은 천에 덮여 있어서 무슨 맛인지, 맛이 안 났다.
‘엄마가 오징어 껍질을 안 벗겼어.’
현덕은 그걸 잘근잘근 씹으며, 슬퍼했다.
“현덕아, 아파. 그렇게 깨물면.”
오징어가 엄살을 부렸다.
아프다니? 엄마가 해준 오징어 볶음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오징어 물회였나 보다. 아직 살아 있다니. 회를 덜 친 모양이다.
‘미안, 미안.’
현덕은 오징어에게 사과했다. 후시딘이 없으니, 대신 호- 입김도 불어줬다.
오징어가 고맙다며 현덕의 정수리에 뺨을 비볐다. 간질간질하고 기분이 좋아서, 현덕은 헤헤- 웃었다.
입가에서 침이 샜다. 쓰읍- 잠결에 손으로 닦으려는데, 이놈의 오징어가 또 말썽이었다. 오징어가 침 닦는 걸 방해하고는 손목을 붙잡아 제 허리에 감았다. 오징어의 허리는 가슴팍만큼 단단하고 따뜻했다.
오징어를 두 팔로 꽉 끌어 안자, 오징어도 한쪽 팔로 현덕의 허리를 휘감았다. 나머지 팔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자룡 형이 잘라 가서 마른오징어 다리로 만들어버린 걸까. 살아 있는 오징어를 마른오징어로 만들다니, 역시 인간은 잔인해.’
현덕은 끄덕끄덕 고개를 흔들며 생각했다. 그런데 이 오징어. 그냥 오징어가 아니라 대왕오징어였다. 사람처럼 튼실했다.
한국에서 대왕오징어가 잡히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지구 온난화가 심각해져서,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살던 대왕오징어가 동해까지 밀려 올라온 것 같았다. 어머니는 갑오징어가 맛있다고 했는데. 그럼 이제 갑오징어는 영영 못 먹고 대왕오징어를 먹어야 하는 걸까.
하아. 현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대왕오징어의 다리가 현덕의 다리 사이로 쑥 들어왔다. 오징어 다리 두 개와 현덕의 다리 두 개가 얽혔다.
두 몸이 찰싹 들러붙었다. 오징어의 빨판 때문일까. 아무튼 뜨끈한 오징어에게 안기니, 기분은 좋았다.
이대로 더 깊이 잠들고 싶은데. 오징어가 현덕의 숙면을 방해했다. 손이 슬금슬금, 현덕의 몸을 타고 올라 왔다. 현덕의 몸을 여기저기 주무르더니, 등뼈를 야릇하게 쓸어 올렸다. 셔츠를 입고 있는데도 등이 간질간질했다.
졸린데, 잠을 못 자게 하다니.
“흐으, 싫어어.”
현덕은 잠결에 투정을 부렸다. 머리를 오징어의 가슴팍에 마구 문질렀다. 오징어가 미안하다는 듯 현덕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착해, 착해.’
착한 오징어였다. 현덕은 저를 잡아끄는 잠의 세계로 끌려들어 가며 으히히, 웃었다.
그러자 오징어가 현덕의 턱을 잡았다. 강아지를 쓰다듬듯 현덕의 턱 아래를 문지르더니 턱을 들어 올렸다. 현덕은 그 손길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메마른 입술 위로 비슷하게 메마른 오징어의 입술이 닿았다. 쪽, 쪽. 오징어의 입술이 자꾸 현덕의 입술을 빨았다. 빨판으로 먹물을 빨아 먹으려는 듯 집요했다.
‘나는 먹물이 없는데…….’
현덕은 자신의 상태를 말해주려 입을 벌렸다.
“나느 머무이-읍.”
오징어는 현덕의 입술이 열리자 기다렸다는 듯 안으로 파고들었다.
오징어의 혀가 현덕의 입안으로 쑥 들어왔다. 뜨겁고 말랑말랑한 혀가 현덕의 이에 살짝 닿았다. 현덕은 지레 놀라 입을 좀 더 크게 벌렸다. 이미 한 팔을 어떤 인간에게 빼앗긴 불쌍한 오징어인데. 혀까지 깨물 순 없었다.
그런데 이놈의 오징어는 현덕의 이러한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한 손으로 현덕의 허리를 꽉 껴안아 옴짝달싹 못 하게 하고는, 현덕의 입술 천장을 혓바닥으로 쓸었다. 까끌한 느낌에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우음…….”
현덕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오징어의 다리가 현덕의 다리 사이를 더 깊게 파고들었다. 현덕은 이상한 느낌을 견디지 못하고 다리를 배배 꼬았다. 오징어의 다리에 제 몸을 비비는 꼴이 되었으나 알지 못했다.
“입 조금만 더 벌리자, 응? 착하지.”
오징어가 현덕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며 속삭였다. 도무지 거역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현덕은 그 말을 따라 입을 좀 더 벌렸다.
“혀 내밀어야지.”
오징어가 자꾸 뭔가를 시켰다.
‘나쁜 오징어 같으니라고.’
현덕은 불만스러워하면서도 혀를 내밀었다. 오징어가 급하게 현덕과 입을 맞추고 혀를 빨았다. 제 입안에 넣고는 사탕을 핥듯 이리저리 굴렸다.
숨이 막혔다. 숨을 쉬려, 혀를 빼내려 하였지만 오징어가 놓아 주질 않았다. 오징어는 혀에도 빨판이 있는 것 같았다. 돌아가려는 현덕의 혀를 따라가 기어이 현덕의 입 속을 헤집었다. 도망치는 혀에 끝까지 얽혀들었다.
현덕의 입가로 타액이 샜다. 오징어는 그것마저 아깝다는 듯 자꾸 핥아 먹었다.
‘더러운 오징어 자식.’
현덕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잠깐만. 오징어? 무슨 오징어?’
거짓말처럼 잠에서 깨어났다.
“……!”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을 뜨니, 바로 앞에 너무 잘생긴 오징어가 있었다.
“읍? 읍! 읍!”
현덕은 기겁하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맞붙었던 입술이 뚝 떨어져 나갔다. 쯧, 주민이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어…… 어……?”
주민을 밀어내긴 했지만. 현덕은 막 잠을 깨 어벙한 상태였다. 눈만 껌벅이며 주민을 보았다.
현덕과 주민은 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침대가 커서 둘이 눕기 충분했다. 그런데도 둘은 침대 구석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아주 좁은 침대에 누운 듯이.
두 다리가 얽혀 있었다. 주민은 한 손은 접어 머리를 괴고, 다른 한 손으로는 현덕의 허리를 잡고 있었다. 현덕은 주민의 품에 폭 안겨 주민의 가슴팍 부분의 셔츠를 꽉 쥐고 있었다. 주민의 셔츠 왼쪽이 동그랗게 젖어 있었다.
‘아마도 내 침이겠지…….’
현덕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잘 잤어?”
머리 위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주민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다정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만치 부드러웠다.
“내, 내가……. 아니, 우리가 왜…… 여기에…….”
현덕은 심히 당황하여 말을 버벅거렸다.
“하나도 기억 안 나?”
“아니, 안 나는 게 아니라.”
“어제 술 냄새는 안 났었는데.”
주민이 현덕의 정수리에 코를 묻고는 한껏 숨을 들이켰다. 현덕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 잠깐. 잠깐만.”
아침부터 너무 위험한 자극이었다. 안 그래도 다리 사이에 열기가 모이고 있었다. 그건 주민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다리에 닿은 주민의 것 역시 딱딱하고 뜨끈했다.
현덕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허리에 감은 주민의 손을 밀어내고, 엉덩이 걸음으로 뒤로 물러섰다.
“잠깐, 나에게 생각할 시간을 줘요. 생각을 해야 해.”
잠들어 있던 머리를 부팅할 시간이 필요했다.
현덕은 주민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작전 타임이든 얼음 땡이든, 뭐든. 일단 주민이 좀 일시 정지 상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주민은 어깨를 으쓱였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래봤자 답은 바뀌지 않겠지만.’
아예 손으로 머리를 괴고, 옆으로 누워 현덕을 바라보았다.
현덕은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생각을 정리했다. 슬프게도, 어젯밤 일이 기억이 안 난다든가 하는 드라마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생생해도 너무 생생했다. 특히나 저를 침대로 쓰러트리고 올라타 입술을 들이밀던 우주민의 모습이. 주민의 밑에 깔려 그가 주는 성적인 자극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던 자신 또한.
‘내가 이렇게……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푹 자는 타입이었나?’
밤새 우주민과 한 침대에서 잔 것도 모자라 저 음탕한 오징어, 아니, 음탕한 우주민의 수작질을 당하면서도 쿨쿨 잤다니. 방금 일어난 일인데도 믿기지 않았다.
현덕은 잠을 깊게 자는 편이었으나 남과 함께 자지는 못했다. 철이 들었을 때부터 혼자 자 버릇해서 그런지, 다른 누구와 한 침대를 공유하는 건 영 어색하고 낯설었다. 누가 건드리면 자다가도 깼다. 수련회나 이번 트라이 온 합숙에서처럼 여러 사람이 한 방에서 자는 건 괜찮았다. 하지만 남과 한 침대, 한 이불을 덮고 자는 건 안 괜찮았다.
가끔 술 취한 맹덕이 방을 착각해 현덕의 방으로 기어 들어왔는데, 그때마다 현덕은 바로 잠을 깼다. 현덕은 자신을 죽부인처럼 껴안고 자는 맹덕을 밀어내고, 맹덕의 방으로 가 잠을 청하며 항상 생각했다.
‘난 그냥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못 자는 성격인 걸까? 아니면 그냥 형 술 냄새 때문에 잠을 깨는 걸까.’
딱히 다른 사람들과 몸을 부대끼며 자본 적이 없어서 궁금증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군대에 가서야 사내들만 드글드글한 내무반의 꾸릿한 냄새에 괴로워하며 알게 되었다.
‘난 그냥, 옆에 누가 있으면 못 자는 거구나.’
그러니 지금의 이 상황은 매우 낮선 상황이었다. 주민에게 희롱당하면서도 잠을 깨지 못하다니.
“뭘 그렇게 고민해?”
주민은 몸을 일으키며 현덕의 목덜미에 쪽, 입을 맞췄다.
“으악!”
현덕은 기겁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다급하게 외쳤다.
“나 미자라니까!”
쯧, 주민이 혀를 찼다.
“다 기억하네. 그치?”
어쩐지 아쉬워하는 말투였다.
‘막 잠 깨서 멍한 틈에 얼렁뚱땅 진도를 나가려 한 거겠지.’
원래도 인성이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닌 줄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영 나쁜 남자였다.
현덕은 침대 위에 아빠 다리를 하고 바르게 앉아, 주민의 두 손을 꽉 잡았다. 이 나쁜 손이 또 제멋대로 움직이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주민은 침대 헤드에 기대앉은 채 현덕이 하는 대로 가만 놔뒀다. 막 자고 일어난 사람같지 않게 얼굴에서 빛이 났다.
‘머리카락이 뻗치기도 하고, 얼굴에 침 자국도 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주민의 얼굴엔 그런 게 전혀 없었다. 화장품 CF에 나오는 연예인 같았다. 그에 비하면 현덕은 진정성 있는 모습이었다. 입술이 타액으로 번들번들하고, 머리카락은 이리저리 삐쳐 있었다. 두 눈은 주민 덕분에 잠이 다 달아나 말똥말똥한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현덕이 다행스러워하는 것이 주민에게는 아쉬웠다. 눈을 뜨면서도 졸려 어쩔 줄 몰라 하는 현덕이를 보고 싶었는데.
현덕이 입고 있는 셔츠가 늘어져 한쪽 어깨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현덕은 아직 그것까지는 모르는 듯했다. 주민은 현덕의 하얀 목과 툭 도드라진 쇄골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저기에 얼굴을 파묻고 목을 깨물어보고 싶었다. 분명, 맛있을 텐데. 주민의 눈이 집요하게 현덕의 목을 바라보았다. 현덕은 주민의 시선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형, 상대방의 동의가 없는 스킨십이나 성관계는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어요. 설사 부부 사이라 하더라도 그래요.”
현덕은 주민에게 상식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우리 부부인 거야? 그럼 허니문은 언제인데?”
물론 불가능했다.
“…….”
저번에 ‘tri’와 ‘try’를 구분 못 할 때부터 알아보긴 했지만. 그리 똑똑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형, 나중에 합숙 끝나고 집에 가면 인터넷 검색 좀 해봐요. 요즘엔 세상이 좋아져서 웬만한 헌법, 민법, 그리고 재판 판례 같은 건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찾아볼 수 있거든요. 우리나라에서 결혼은, 분명 남자와 여자 사이에 가능하다고 명시하진 않았어요. 하지만 결혼이 남녀 사이의 관계라는 게 암묵적으로 동의하였고, 당연하기 때문에-”
“키스해도 돼?”
주민이 훅 다가왔다.
주민은 대한민국 법체계에서 결혼이란 무엇인가 주절주절 이야기하는 현덕의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윽?”
현덕이 돌처럼 굳었다. 쪽쪽, 현덕의 입술을 빨던 주민이 피식 웃었다.
“신음이 영 섹시하질 않네.”
“누차 말하지만, 이 몸은 아직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알아, 그래서 키스만 하잖아. 키스만. 응?”
주민이 현덕의 허리에 양팔을 감고, 현덕을 밀어 넘어뜨렸다.
“자, 잠깐만. 아침부터 이러는 건 반칙이에요!”
현덕은 어떻게든 주민을 바른길로 인도하려 애썼지만, 영 쉽지 않은 일이었다. 주민은 예쁜 입술로 현덕의 얼굴을 마구 찍었다. 눈, 코, 이마, 뺨. 가리지 않고 쪽쪽 입을 맞췄다.
새털같이 가볍고 간지러운 느낌에 현덕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주민은 그걸 허락이라고 생각했는지, 다시 현덕의 입술로 달려들었다. 한 손으로 현덕의 뒷덜미를 간지럽히며 현덕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댔다.
그러기를 한참. 현덕이 숨이 막혀 주민의 어깨를 주먹으로 팡팡 치고야, 주민은 겨우 떨어져 나갔다. 그러면서도 뭐가 그리 아쉬운지 현덕의 입술을 제 엄지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그 손길마저 야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정말 잡아먹혀 버릴 지도 몰랐다. 현덕은 경계의 눈빛으로 주민을 쳐다보았다.
“알았어, 알았어.”
주민은 항복하듯 두 손을 번쩍 들고는 몸을 일으켰다. 다리 사이가 불룩했다.
‘어…… 음. 맹덕 형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현덕은 무심코 고개를 숙여 제 다리 사이를 봤다. 한 번도 이 방면에서 모자람을 느낀 적이 없었다. 친구들과 목욕탕에 가도, 수련회나 수학여행을 가서 목욕을 할 때도 괜찮았는데. 어쩐지 지금은 심히 부끄러웠다. 현덕은 슬그머니 이불을 둘둘 말아 껴안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얼굴에 열이 올라 그러고 있는 거였는데. 주민은 다르게 생각한 듯했다.
“김현덕.”
낮은 목소리로 현덕을 부르며 주민이 현덕의 뒷덜미에 입을 맞췄다.
이제 두 번뿐이지만. 주민의 입술이 뒷덜미에 닿을 때마다 몸이 예민하게 떨렸다. 다리 사이에 피가 몰렸다. 그게 부끄럽고 싫어 고개를 저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마.”
주민은 그런 현덕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속삭였다.
“미자라서 아직 안 된다는 것까지는 봐줄게. 기다려줄 수 있어. 그런데 남자끼리라 안 된다느니, 실수였느니, 분위기에 휩쓸렸느니 하는 말은 안 봐줄 거니까. 그런 생각 할 계획이면 때려치우는 게 좋을 거야.”
현덕의 하얀 목을 바라보는 주민의 눈이 번뜩였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그걸 못 본 현덕은 주민의 말을 듣고야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
‘아. 그걸 고민해야 되는구나.’
주민의 말대로였다. ‘우린 둘 다 남자잖아! 이건 사회관습과 통념에 어긋나는 나쁜 짓이야. 우린 이루어질 수 없어!’라고 고민해야 하건만. 현덕은 정작 그 쪽으로는 전혀 편견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러고 보니 미국에선 동성결혼이 합법화되었는데. 내가 서른 살 때였나, 서른한 살 때였나. 아니…… 이십 대 후반이었나?’
생각은 첫 번째 삶으로 흘러들었다.
고시촌에 처박혀 살며 외부 사회와 거의 단절된 삶을 살긴 했지만, 이 소식만큼은 빠르게 전해 들었다. 고시촌 전체가 과연 남이 나라의 동성결혼 합법이 우리나라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궁금해하며 술렁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우리나라도 합법화되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실제로 현덕이 서른세 살이 될 때까지, 대한민국에서 동성 결혼이 합법화되지 않기도 했고.
‘전혀 남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네. 내가 남자를 좋아하다니. 남자랑 뽀뽀를 하다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래서 잠시 멍-해 있었건만. 주민은 그 잠깐도 못 참고 현덕의 손을 잡았다.
“현덕아, 고개 들어. 형 봐야지? 응?”
달래는 듯한, 혹은 명령하는 듯한 부름이었다. 현덕은 고개를 들어 주민을 보았다.
주민의 눈은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까맸다. 그 눈엔 현덕만 담겨 있었다. 현덕은 저를 집요하게 노려보는, 그런 주제에 달콤하게 웃고 있는 주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주민은 곤충을 잡아먹는 꽃 같았다. 달콤한 향과 화려한 색으로 벌과 나비를 유혹해서는, 단번에 집어삼켜 버린다는 식물. 현덕은 그 예쁜 꽃에 취해 꽃잎에 내려앉은 벌이었다.
그런데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주민이 저를 보며 웃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이 이미 그의 향기에 취할 대로 취해버렸기 때문인걸까.
주민의 까만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잠에 취한 자신을 붙들고 이런저런 짓을 했던 주제에, 잠이 깨 눈을 마주하니 무언가를 두려워하며 떨고 있었다.
현덕은 그런 주민을 차마 못 본 척할 수 없었다. 아니, 그런 주민을 보며 쿵쾅쿵쾅 뛰어대는 심장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사회적 관습이나 통념을 애초 염두에 두지 않을 만큼 이 어리고 불안한 우주민을 마음에 담아버렸으니까.
현덕은 손으로 주민의 뺨을 쓸었다.
“만나자마자 내 멱살 잡고 소리 지르던 우주민 씨는 어디 가시고, 이런 우주민이 나타난 거예요?”
주민의 뺨을 꼬집었다. 아프게는 말고, 살짝.
“응? 입이 있으면 대답을 해보시지.”
“글쎄.”
주민은 꼬집히는 게 좋은지 눈꼬리를 접어가며 웃었다.
“그렇게 떼어 버리려고 해도, 계속 나한테 다가왔잖아.”
“내가 손날로 목 친 거 기억 안 나요?”
“내가 머리로 네 명치 박은 건 기억하니, 현덕아?”
“내가 형 발로 깐 건?”
현덕이 묻자 주민이 미간을 찌푸렸다.
“……꽤 아팠지.”
“꽤 정도가 아니었을 텐데?”
“…….”
주민은 묵비권을 행사했다.
“난 언제든 다시 그렇게 깔 수 있거든요. 우리, 어제까지만 해도 그런 사이였는데, 나한테 갑자기 이렇게 들이대면 어떡해요.”
현덕은 웃으며 주민의 뺨을 놔주었다.
‘그러니까 내가 나잇값 못 하고 설레잖아. 자꾸.’
차마 덧붙이지 못한 말을 꿀꺽 삼키며 손을 내렸다. 아니, 내리려고 했다. 그런데 주민이 놔주지 않았다.
“어쩌겠어, 현덕아. 그렇게 밀어냈는데도 네가 다가왔는걸.”
주민이 현덕의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속삭이듯 말했다.
“길들였으면 책임져야지.”
까만 두 눈은 여전히 현덕을 바라보고 있었다.
***
다행히도 현덕이 일어났던 시간은 새벽녘이었다. 오징어 우주민이 치댄 덕분에 일찍 잠을 깰 수 있었으니 고마워해야 하는 걸까. 현덕은 잠시 고민했다.
일찍 일어난 것과는 별개로, 방을 나서는 건 시간이 꽤 걸렸다. 주민이 자꾸 매달리며 현덕을 붙들었다.
“5분만 더, 10분만 더. 응?”
애니메이션에나 나올 법한 울먹울먹한 고양이 눈을 해가지고는 현덕을 올려다보는 것도 모자라 허리를 꽉 끌어안고 놓아주질 않았다. 한참 실랑이를 하고서야 겨우 주민을 떨굴 수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며 혹시 몰라 옷매무시를 반듯이 했다. 구겨진 옷을 터는데 자꾸 입술이 화끈했다.
‘망할 오징어!’
현덕은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오징어를 탓하며 얼른 숙소로 돌아왔다.
잠든 다른 연습생들 몰래 화장실로 들어가 찬물로 세수하고 꾸물꾸물 침대로 기어들어 갔다.
매일 누워 잠들었던 침대건만. 새삼 싸늘하고 썰렁하게 느껴졌다. 고작 하룻밤 같이 잤을 뿐인데, 제 몸을 꽉 끌어안던 우주민의 온기가 그리웠다.
현덕은 머릿속에서 주민에 대한 생각을 털어내기 위해 베개에 얼굴을 마구 부비고는 눈을 꽉 감았다. 당연하게도 잠은 오지 않았다.
한참을 자는 척을 하고 있자니, 같은 방을 쓰는 연습생들이 한 명 두 명 일어나 현덕을 깨웠다.
“언제 들어왔어? 우리 들어올 때만 해도 없었는데.”
“그만 자고 일어나. 밥 먹어야지!”
“으응…….”
현덕은 막 잠에서 깬 척 연기하며 꾸물꾸물, 몸을 일으켰다. 연기는 더없이 어색했으나 다행히 다들 눈치채지 못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현덕이, 설마 다른 곳에서 밤을 새고 들어왔으랴. 아무도 현덕을 의심하지 않았다.
“뭐야? 입술이 이상해. 모기 물렸어? 근데, 겨울에도 모기가 있나? 난 한 번도 안 물렸는데?”
정모가 붕 뜬 머리를 손으로 꾹꾹 누르며 물어보았다.
“그러게요. 어제 잘 때까지만 해도 안 그랬는데.”
눈이 반쯤 감긴 한승도 고개를 갸웃했다. 잠이 덜 깬 반달곰 같아 보였다.
“흐음.”
가장 먼저 일어나 샤워까지 하고 나온 유호는 현덕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보자니 괜히 등골이 시렸다. 현덕은 애먼 등을 벅벅 긁었다.
“화, 화장실. 저 들어갈게요.”
현덕은 저를 수상하게 바라보는 세 사람을 피해 화장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 다음 내 차례인데! 꼴찌로 일어났으면서 새치기하면 어떡해!”
정모가 뒤따라 왔다. 현덕은 아슬아슬하게 화장실 문을 걸어 잠갔다. 쾅쾅쾅. 정모가 화장실 문을 주먹으로 두들겼다.
“안 나와? 나 급하단 말야!”
“형, 정모 형. 진정해요. 현덕 형이 더 급한가 보죠. 현덕 형이 아무 이유 없이 새치기할 사람은 아니잖아요.”
한승이 얼른 정모의 뒤에 서서는 정모를 번쩍 들었다.
“너, 이렇게 손쉽게 날 들면 내가 기분이 좀 더러워지거든?”
정모는 한승의 머리에 꿀밤을 때렸다.
“이런 어린 것들이랑 내가 그동안 같은 방을 써 왔다니.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어.”
콜록, 콜록. 유호는 잔기침을 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다음 주에 우린 또 만날 거야. 운 좋으면 또 같은 방이 되겠지.”
정모가 한승에게 들린 채로 하하 웃었다. 그 속 편한 웃음을 보며 유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모와 한승이야 현덕이나 다른 연습생들과 어울려 하하호호 즐겁게 웃고 떠들기에 바빴지만. 유호는 그 틈바구니에서 적당히 어울리면서도 머리를 굴리느라 바빴다.
트라이 온 1부 결과가 어떻게 날지, 또 ‘우주민’이란 변수가 이 프로그램에 어떤 변화를 줄 지. 그 예상 시나리오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쓰리건만. 정모는 속 편하게도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자꾸 명치가 아려왔다. 요 며칠 신경이 곤두서 있었기에 더욱 위가 쓰려 왔다. 유호는 침대에 걸터앉아 손으로 명치를 문질렀다.
“야, 야. 놔봐.”
그걸 본 정모가 한승을 밀어내고 유호에게 한달음에 다가왔다.
“왜 그래, 많이 아파? 약 가져다줄까?”
“됐어. 지금 못 먹어. 밥 먹고 먹어야 해.”
유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목소리가 아까보다 날카로웠다. 몇 발자국 떨어져 있던 한승이 움찔, 떨 정도였다.
“뭐야, 그럼 빨리 밥 먹으러 가자.”
정모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 넘기며, 유호의 한쪽 어깨에 제 팔을 쑥 집어넣고 부축하듯 들어 올렸다.
가느다란 체구의 유호는 종이처럼 나풀거리며 쑥- 들렸다. 조금 전 한승이 유호를 들어 올릴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너 화장실 급하다며?”
유호는 정모에게 짜증을 내는 대신 화장실을 턱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식당에 붙어 있는 화장실 가면 되지. 그리고 지금 화장실이 대수야? 내가 똥을 못 싸 장이 터져 죽어도, 그거보다 형 아픈 게 더 중요해.”
“너는 말을 해도…….”
유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전혀 감동 받지 않은 얼굴이었다.
“말을 해도 어쩜 그딴 식으로 말하나?”
“뭐? 왜? 뭐? 내 말이 틀렸어? 그 표정은 또 뭐야. 이 타이밍에서는 엄청 감동한 티를 내야 하거든?”
“됐다. 됐어.”
유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현덕이 나오면 잘 챙겨서 나와, 알았지?”
정모는 한승에게 현덕을 부탁하고 방을 나섰다.
현덕은 문에 기대 주저앉은 채로 밖의 떠들썩한 소리를 들었다. 그러면서 연신 손부채질을 하며 얼굴을 식히려 애를 썼다. 얼굴에 피가 몰린 게 영 가시질 않았다.
현덕은 일단 얼굴의 열을 식히고자 찬물에 세수했다. 젖은 얼굴을 들어 세면대에 붙은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입술이 발갛게 부어 있었다.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 않았다.
‘하긴, 밤새 빨리고 씹혔으니까.’
현덕은 손끝으로 조심히 입술을 쓸어 보았다. 아직도 주민의 감촉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으으!”
현덕은 몸서리치며 얼른 손을 떼고 다시 찬물로 세수를 했다. 어푸, 어푸.
똑똑-
노크 소리가 났다.
“저기요, 혀엉. 사실 저도 화장실이 좀 급한데…… 언제쯤 나올 거예요?”
애처로운 한승의 목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잠깐, 잠깐만. 금방 나갈게.”
현덕은 대답하며, 다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거울에 비친 선반 위 전자시계가 달칵.
오전 7시를 알렸다.
2월 마지막 주 금요일.
오전 7시.
트라이 온 1부 촬영에 참여한 연습생들이 퇴소하는 날이자 트라이 온 1부의 마지막 회가 방영되는 날의 아침이었다.
***
오전 10시에 호텔 문을 열기로 했다. 촬영진은 최대한 시간을 미뤄 저녁 일곱 시쯤 연습생들을 퇴소시키려 하였으나, 그때까지 잡아 놓는 건 아무래도 무리였다. 이미 퇴소하기로 한 날에서 사흘이나 지난 지금. 호텔은 성난 코뿔소 무리, 아니 연습생들의 불만으로 가득 찼다.
연습생들은 오전 아홉 시부터 굳게 닫힌 정문 앞에서 어슬렁거렸다. 현덕도 한승과 가볍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짐을 싸서 1층 로비로 내려왔다.
“현덕아!”
기다렸다는 듯 자룡이 다가와 현덕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형, 현덕 형. 밥 먹었어여?”
준비는 매점에서 산 과자를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으며 현덕에게 달려왔다.
“그렇게 뛰다 넘어지면 다친다.”
피터는 잠이 덜 깼는지 흐느적흐느적 걸으면서도 준비를 챙겼다.
현덕은 그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근데 너 입술이 왜 그래?”
물론 이 질문을 비켜날 수 없었다. 자룡은 현덕의 얼굴을 보고는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형, 밤에 몰래 떡볶이라도 먹었어여? 입술이 왜 그래여?”
준비도 현덕의 입술을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음, 많이 아픈 거 같은데. 연고라도 가져다줄까?”
피터가 물었다. 걱정하는 얼굴에 야릇한 미소가 스쳤지만,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인 현덕은 보지 못했다.
“어제 저녁에 밥 먹은 거 중에서 뭔가 저한테 안 맞는 게 있었나 봐요. 가볍게 알레르기 증상 난 거 같은데, 시간 지나면 괜찮아질 거 같아요.”
화장실에서 겨우 생각해낸 변명은 이것이었다.
“어제 반찬 중에 뭔가 색다른 게 있었나?”
자룡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오래 고민하진 못했다.
“으악, 원소혁이다.”
계단을 내려오는 소혁을 보고는 기겁하며 현덕의 뒤로 숨었다. 그런다 한들 가려질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룡은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현덕에게 매달렸다.
자룡은 현덕보다 키가 크고 어깨도 넓었다. 무엇보다 주민이 툭하면 양파 머리라고 놀리는 녹색 머리는 어디서든 눈에 띄었다. 소혁은 금세 자룡을 발견하고는 현덕과 자룡이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저 자식 또 나한테 시비 걸려고 오는 거 봐, 씨-앗.”
자룡은 이를 갈며 현덕에게서 떨어졌다.
“있다 보자. 퇴소할 때 오 팀장님이 오신다고 했으니까. 오 팀장님 만나서 보자고. 나 먼저 간다!”
자룡은 냅다 도망갔다. 곧 현덕의 앞에 도착한 소혁은 텅 빈 자룡의 빈 자리를 보고는 대놓고 혀를 찼다.
하하. 현덕은 어색하게 웃으며 소혁과 눈을 마주쳤다. 소혁은 매우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휙- 몸을 돌렸다. 다시 자룡을 찾으러 나서는 듯 했다.
“사이가 엄청 안 좋아졌네.”
현덕은 새삼 시간이 많이 지난 걸 실감했다. 처음 세트장 촬영 때만 해도 자룡은 소혁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똑같이 A 평가를 받고 같은 기숙사가 되어서는 소혁에 대한 호감을 드러냈다. 그때는 소혁이 자룡을 귀찮아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정 반대였다.
두 달이라는 시간이 두 사람의 관계를 이렇게 바꾸었다. 그리고 ‘변화’는 단지 자룡과 소혁 사이에만 존재한 게 아니었다.
‘나랑 우주민도.’
문득, 뒤쪽에서 함성과 야유가 함께 들렸다. 현덕은 뒤를 돌아보았다. 자룡과 소혁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현덕과 다른 관계가 된 사람이 거기 있었다.
주민이 촬영 스태프와 계단 위에 섰다. 로비에 모여 있던 연습생들은 주민을 보고 박수를 치거나 투덜거렸다. 주민 때문에 퇴소일이 사흘이나 늦춰졌으니 원성을 들을 만했다.
“사생아여도 재벌 아들이란 건가? 뭐야, 지가 귀족이라도 되는 줄 아나. 폼 잡기는.”
누군가 현덕의 뒤쪽에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현덕은 바로 뒤돌아 말 한 사람을 확인했다. 그 연습생은 현덕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돌리고는 다른 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현덕은 다시 고개를 돌려 주민을 바라보았다. 험담하던 연습생의 말마따나 주민은 느긋했다. 모두의 시선을,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 눈빛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당당했다.
계단을 거의 다 내려왔을 즈음, 주민은 누군가를 찾는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곧 현덕은 주민과 눈이 마주쳤다. 현덕은 슬쩍 손을 들어 흔들었다. 주민이 현덕을 보고 활짝 웃었다. 그 모습을 보자니 새삼 얼굴이 화끈해졌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현덕은 제 뺨을 손으로 문지르며 마음을 다잡았다.
‘떨지 마. 아무렇지 않게 굴자.’
주민은 뒤따라 내려온 촬영 스태프와 몇 마디를 나눈 뒤, 연습생들을 헤치고 걸었다. 헤매지 않고 곧바로 현덕에게로 걸어 왔다.
“뭐야, 왜 이리 온대여? 시선 몰리게.”
준비가 현덕의 옆에 서서 틱틱댔다.
“형 친구잖아. 좀 봐줘.”
현덕이 대신 용서를 빌었다.
“잘 잤어, 현덕아?”
그새 성큼 다가온 주민이 현덕의 손을 꽉 잡고 흔들었다.
“어, 네. 형.”
현덕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주민의 얼굴을 가까이 맞대는 게 영 어색하고 부끄러워서 그랬다. 주민은 수줍은 마음은 몰라주고, 자꾸만 다가왔다.
“잠깐, 좀 떨어져 봐요.”
훠이훠이. 현덕은 주민의 손에서 제 손을 빼내고는 논에서 참새를 쫓듯 손짓했다. 주민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이거, 무슨 의미야?”
목소리가 금세 차가워졌다. 현덕은 부끄러움을 견디느라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준비가 그런 둘의 모습을 제3자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파란 눈이 데굴데굴 굴러 현덕의 입술을 보고, 오늘따라 더더욱 싸가지 없어 보이는 주민을 보았다.
“아씨, 뭐야.”
준비는 먼가를 깨달았다.
“거기 우주민 연습생 형. 형이에여? 우리 현덕이 형 입술 저렇게 만든 게?”
풉- 옆에서 몸을 마시고 있던 피터가 그 물을 고대로 뿜었다.
“……어?”
현덕은 삐그덕, 삐그덕 고개를 돌려 준비를 보았다.
“그, 그,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준비야.”
현덕은 현덕답지 않게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그게 패착의 한 수였다. 준비는 그런 현덕을 보며 확신했다.
“아닌 척하지 마여. 척하면 척인데. 내가.”
준비가 짝다리를 짚고 삐딱하게 서서는 저보다 한참 큰 주민을 올려다보았다. 자연히 목소리가 뚱해졌다.
“우주민 연습생 형, 형이 우리 현덕 형 때린 거죠?”
“형들 이야기하는 데 함부로 끼어드는 거 아니다, 초딩.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주민은 얼굴을 찌푸리며 저와 현덕 사이에 끼어든 준비를 내려다보았다. 안 그래도 현덕이 준비를 껴안는 모습을 봐서 심기가 상해 있던 차였다.
“아니고서야, 현덕 형이 그쪽을 저렇게 피할 리가 없잖아여. 같은 기획사 출신인데 새삼 부끄러워서 피하는 게 아니면 뭐겠어여. 한 대 맞고 또 맞을까 봐 물러서는 거지.”
준비는 초딩다운 패기로 주민과 맞섰다. 쉽게 쫄지 않았다.
“아아. 설득력 있어.”
피터가 옆에서 추임새를 넣으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위적인 티가 너무 났지만, 준비는 자신을 편들어주는 거로 받아들이고는 더욱 대담하게 우주민과 맞섰다.
“그쪽 맞져? 그쪽이 우리 현덕이 형 때린 거져?”
준비가 주민을 째려보며 말했다.
‘어쩌려나.’
전지적 관람객 시점에서, 피터는 주민이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렇단 말이지.”
주민은 씨익- 웃으며, 손으로 제 입가를 문질렀다.
“아, 왜 저래.”
준비는 팍 인상을 찡그렸다.
“걔가 그래? 부끄러워서 피하는 거라고?”
주민은 그런 준비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말했다.
“아씨, 치워요. 치워.”
준비는 주민의 손을 쳐내며 두 손으로 제 이마를 가렸다. 학교에 가면 친구들 중에 제일 키가 크건만. 주민 앞에 서면 그 큰 키가 조막만 하게 쪼그라들었다.
“그리고 제 말뜻은 그게 아니었거든여? 그게 아니라 또 맞을까 봐 저러는 거라고여. 지금 현덕이 형 저 입술을 보고도 조금도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아여? 어떻게 우리 형 입술을 저렇게 만들어 놓을 수 있어여?”
준비가 톡 쏘았지만, 주민은 픽 웃으며 돌아섰다. 준비를 더 상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초등학생은 초등학생이었다. 발랑 까진 척하지만, 아이돌로 데뷔하겠다는 목표로 열심히 연습만 했던 터라 이런 쪽으로는 지식이 부족한.
주민이 온 정신을 쏟아야 하는 존재는 따로 있었다. 아까부터 자신과 영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한 발 뒤로 물러서기까지 한 김현덕.
“그렇다는데?”
“…….”
“어떻게 생각해?”
“…….”
현덕은 주민을 무시하고, 호텔 문만 쳐다보았다. 곁에 피터와 준비만 있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현덕아, 지금 형 무시하는 거야?”
옆에서 치근덕대는 우주민이 얄미워 미쳐버릴 것 같았지만, 참아야 했다.
“에구. 준비야, 우리는 저쪽으로 가 있자.”
보다 못한 피터가 준비를 잡아끌었다.
“왜여. 형? 형! 현덕 형이랑 저 형을 놔두고 우리끼리 가면 어케여. 현덕 형도 데리고 가야지!”
준비가 안 끌려가려고 발버둥쳤지만, 체격 차이를 이겨내지 못했다. 준비는 피터에게 목덜미를 잡힌 채 질질 끌려갔다. 둘이 사라지고 나서야 현덕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아우, 주민 형. 우주민. 내가 진짜.”
“내가 진짜, 뭐?”
주민은 현덕의 손을 잡아 내렸다. 평소보다 붉은 얼굴과 부풀어 오른 입술을 확인하고는 빙긋 웃었다.
[연습생 여러분-]
때마침 로비에 설치된 스피커가 쨍-하게 울렸다.
모두의 시선이 로비에 설치된 무대로 향했다. 주민과 현덕 역시 대화를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현덕은 주민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런 능구렁이일 줄은 몰랐는데.’
주민은 오직 현덕에게만 제어가 풀린 망아지처럼 굴었다. 현덕은 그게 좋으면서도 감당하기 벅찼다.
그런 현덕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민이 슬쩍 현덕의 손가락 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끼워 잡았다. 현덕은 잠시 멈칫하다가 곧 주민의 손을 꽉 맞잡았다.
[그동안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오늘, 트라이 온 1부 촬영이 끝나고 퇴소가 진행됩니다. 지금 밖에는 기자들과-]
주민과 함께 계단을 내려온 촬영 스태프가 무대에 올라 마이크를 들고 트라이온 1부 촬영의 종료를 알렸다.
한 무리 촬영 스태프들이 몰려와 핸드폰과 전자 기기들을 돌려주었다. 현덕은 핸드폰을 건네받았으나 켜지는 않았다. 고작 두 달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네모나고 차가운 감촉이 새삼 낯설었다.
무대에 올라간 촬영 스태프는 참가해주어 고맙다는 말을 한 뒤, 정확히 열 시에 문이 열릴 거라고 말했다. 그게 전부였다.
원래대로라면 이러저러한 퇴소식이 진행될 예정이었다. 그마저도 촬영하려 했고.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원활한 퇴소식이 진행되기 어려울 거라는 걸 깨닫고 취소한 듯했다. MC인 유진 역시 다른 촬영 스케줄 때문에 자리에 없었다.
이제 연습생들에겐 촬영이고 뭐고,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모두들 드디어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떠 박수를 치고 환호했다.
모든 연습생이 벽에 걸린 커다란 시계를 바라보았다.
딱 10초 남았을 때.
연습생들이 목이 터져라 카운트다운을 했다.
십, 구, 팔, 칠-
삼.
이.
일.
열 시.
두 달 동안 연습생들을 호텔에 가둬두었던 호텔 문이 활짝 열렸다. 연습생들은 함성을 지르며 뛰쳐나갔다.
현덕 또한 자신을 잡아끄는 주민의 손을 붙잡고, 연습생 무리에 끼어 달렸다.
그리고.
거대한 함성과 열기가 현덕을, 연습생들을 반겼다.
***
1월 첫 주. 연습생들은 기획사 차량이나 부모님 차를 타고 하나둘 호텔로 모였다. 그때만 해도 호텔 주변은 황량했다. 산을 깎아 만든 큰 스키장 하나가 자룡의 마음을 설레게 했을 뿐이었다.
촬영을 하다 힘들어 호텔 밖으로 도망가도 갈 데가 없어 다시 호텔로 돌아올 수밖에 없을 거라고, 연습생들끼리 농담 삼아 말하곤 했다.
그렇게 한적하고 썰렁하던 곳이었건만.
“꺄아아악!”
“우와아아악! 형님!”
호텔 주변에 가늘고 높은 목소리와 굵고 우렁찬 목소리가 가득했다. 사방에서 쏟아져 제멋대로 섞였다. 분명 눈이 다 녹았을 텐데, 온 세상이 새하얬다. 눈이 부실 정도로.
“우주민! 김현덕! 박자룡! 우리 테두리들!”
“준비야! 누나 왔다!”
“오렌지 삼총사! 찢어지지 말고 데뷔하자!”
“완용아! 이번엔 나라를 빛내자! 데뷔해서 외화 벌어와!”
“원소혁! 데뷔하자아아아아!”
“유호 오빠! 여기 좀 봐줘요!”
“한승아! 누나가 밥 사줄게!”
“손정모! 형들이 밀어줄게! 데뷔 가즈아!”
“성환아! 너 데뷔 못 하면 방송국 폭파시켜버릴게!”
“의준아아아악!”
사방에서 들리는 함성에 귀가 먹먹하게 울렸다. 번쩍이는 플래시에 눈이 따끔했다.
“잠깐 눈 감고 있어.”
옆에 선 주민이 손으로 현덕의 두 눈을 가려주었다. 현덕은 손 그늘 아래에서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그제야 세상이 선명하게 보였다.
호텔 주변에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그들이 연습생들에게 다가오는 걸 막기 위해 펜스를 치고, 안전 요원들이 몸으로 사람들을 막고 있었다. 감히 셀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 현덕의 얼굴보다 큰 렌즈를 단 카메라를 든 사람들도 수십, 아니 수백 명이었다.
연습생들은 모두 돌이 되어버렸다. 백여 명의 연습생들이 호텔 문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서서는 눈만 끔뻑끔뻑하며 주변을 바라보았다.
“꿈을…… 꾸는 건가?”
현덕은 제 뺨을 꼬집어보았다. 별로 아프지 않았다.
“꿈인가 보네.”
그럼 그렇지. 현덕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그런 현덕의 뒤통수를 손으로 꾹- 눌렀다.
“윽!”
현덕의 목이 앞으로 푹 꺾였다.
“씨앗, 무슨 혼잣말을 하고 있어?”
함성 속에서도 자룡의 목소리는 선명했다.
“형!”
현덕은 반가운 마음에 얼른 자룡의 손을 잡아끌어 당겼다.
자룡은 꽤 멀쩡해 보였다. 놀란 듯했으나 현덕만큼 꿈인지 생시인지 감을 못 잡는 상황은 아니었다.
“현덕아, 내가 볼따구 꼬집어줄까?”
“자룡 형은 꿈에서도 현실처럼 리얼하네요.”
“꿈같은 소리 하고 있네, 씨앗. 정신 차려, 김현덕.”
자룡이 현덕의 어깨를 퍽퍽 내리쳤다.
“우주민, 얘 좀 어떻게 해봐.”
자룡이 현덕 옆에 있는 주민에게 말을 걸었다. 현덕은 그 목소리를 쫓아 주민을 올려다보았다. 주민은 자룡만큼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아니 오히려 짜증나 보였다.
“생각보다 많이 몰렸네.”
“생각보다? 주민 형, 지금 이 상황을 예상했던 거?”
현덕이 물어보자 주민이 피식, 웃었다.
“귀엽네.”
주민은 조금 전 자룡이 때린 등 부분을 큰 손으로 쓱쓱 쓸어내리며 현덕의 귓가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키스하고 싶다.”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헉!”
현덕은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주민의 숨이 닿은 귀를 손으로 덮어버렸다.
“미쳤어요?”
있는 힘껏 눈에 힘을 빡 주고 주민을 쏘아보았다. 주민은 왜 그러냐며 태연히 현덕에게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이 너무 능글맞아서, 현덕은 할 말을 잃었다.
스물여덟 살 때, TV에서 봤던 서른 살 우주민은 이러지 않았다. 더없이 담백하고 깔끔했다. 잘 벼린 칼같이 서늘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스무 살 우주민은 너무 느끼했다.
‘스무 살이 이렇게 기름질 수 있다니. 저러다 서른다섯 살이 되면 얼마나 더 느끼해질까?’
현덕은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뭐야, 둘이서만 무슨 얘기 해. 나한테도 좀 말해봐.”
자룡이 현덕의 두 어깨를 덥석 쥐고는 제 쪽으로 끌어왔다.
“양파머리, 안 놔?”
주민이 인상을 팍 쓰며 현덕이 한 손을 제 쪽으로 확 잡아당겼다.
꺄아아아악! 그러자 어느 쪽에선가 높은 톤의 비명이 쏟아져 나왔다. 현덕과 자룡, 주민은 동시에 그쪽을 바라보았다.
- TE 두리 전원 데뷔 기원
- TE. 두리들 내새끼 데뷔해
- 현덕이 카페 사장하자!
- (주민♥자룡) + 현덕
등등의 슬로건을 든 사람들이 셋을 바라보며 열렬히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들 중 몇몇은 얼굴이 익숙한 듯 낯설고,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현덕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을 자세히 보았다.
“아!”
현덕은 제 어깨를 쥔 자룡의 손을 찰싹찰싹 내리쳤다.
“자룡 형, 형 팬카페 분들이에요!”
“어? 어디?”
자룡이 눈을 어스름하게 뜨며 그쪽을 바라보았다. 현덕이 바라볼 때만 해도 태연했으면서, 자룡이 자신들을 뚫어져라 바라보자 괴성을 지르며 돌아서 얼굴을 숨겼다.
“저 태도를 보니 내 팬카페 분들 맞는 거 같다.”
그 기묘한 관계는 시간이 지나도 여전한 듯 했다. 그들이 들고 있는 슬로건은 영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왜 저보고 카페 사장이 되라고 하는 걸까요? 혹시 트라이 온 방송된 거에서, 제가 좀 안 좋게 나왔던 걸까요?”
“야, 카페 사장은 아무나 하는 줄 알아? 돈 많이 벌어서 건물주 된 다음에 취미로 카페 차려서 띵가띵가 놀라는 거겠지. 로또 되라고 말하는 거랑 비슷한 뜻일 거야.”
자룡이 긍정적으로 해석해주었다.
‘아무렴, 자룡이 형 팬카페 분들이 날 싫어하지는 않겠지.’
현덕은 자룡의 팬들을 믿었다. 함께 우주민을 구한 사이이지 않은가. 강퇴 당하긴 했지만 한때 팬클럽에 몸 담기도 했고 현덕은 자룡의 팬클럽에 깊은 동료애를 느끼고 있었다.
안전 요원들이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하게 모인 사람들 틈을 비집고 좁은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팬들은 안전 요원의 손짓에 따라 뒤로 물러서 길을 터주었다.
그 틈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연습생들에게로 다가왔다. 연습생들의 가족, 그리고 기획사 사람들이었다.
엄마, 아빠! 형! 누나! 연습생들에게서 울음 섞인 부름이 터져 나왔다. 연습생들은 방금까지만 해도 자신들을 환영하고 응원하는 인파를 보고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하지만 가족들을 본 순간, 돌처럼 굳어버린 몸이 흐물흐물하게 풀렸다. 울음을 터뜨리는 연습생들도 많았다.
“아버지? 정말 아버지? 엄마! 씨발! 엄마!”
자룡이 자신의 부모님을 발견하고는 튀어 나갔다. 한눈에 봐도 자룡의 부모님이라는 걸 알 수 있을 법한 중년의 부부가 자룡을 덥석 껴안았다.
어머니의 눈이 부리부리하게 컸다. 자룡의 울먹울먹한 눈망울의 출처가 어딘지 알 수 있었다.
연습생 생활을 하느라 이른 나이에 상경하여, 부모님을 일 년에 몇 번 보지도 못했던 자룡이었다. 모처럼 부모님을 만나고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껴안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 뒷모습을 보노라니, 어쩐지 눈가가 시큰해졌다. 현덕은 눈을 깜박이며 주민에게 말을 걸었다.
“형, 형은…….”
채 말을 끝맺지 못했다. 불과 며칠 전, 주민이 자신의 가족사를 고백한 게 떠올랐다.
“괜찮아.”
그 주민이 손으로 저 너머를 가리켰다.
까만 양복을 입은 장정 여럿이 호위한 검은 세단이 느리게 움직이며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홍해처럼 쩍 갈라졌다.
예전, 주민이 납치당할 뻔했을 때가 생각이 났다.
“형!”
현덕은 주민의 팔을 두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서 그때와 같은 상황이 벌어질 경우, 자신을 도와 주민을 지켜주고 증언해줄 증인들을 찾았다.
현덕은 아예 주민을 자신의 등 뒤로 숨기려 했다. 주민은 저를 챙기는 현덕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웃음을 참지 못했다.
“괜찮아.”
주민은 현덕의 손을 꽉 잡으며 안심시켰다.
때맞추어 세단이 대여섯 발자국 앞에 멈춰 섰다. 차를 호위하던 검은 정장의 사내들이 차문을 열고는 주위에 둥그렇게 몰려섰다. 그 주변으로 기자들이 몰려들어 눈이 따가울 정도로 셔터를 눌러댔다.
곧 차 문이 열리고, 까만 지팡이가 나타났다.
딱.
지팡이가 땅을 내리쳤다. 그 지팡이를 잡은 손은 자글자글 주름이 가득했다.
손의 주인은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었다. 금테 안경을 쓴 얼굴은 손만큼이나 주름이 많았다. 안경 속 안광이 무서울 정도로 강렬했다.
엷은 색 한복을 입은 몸은 말랐으나 세월을 이겨낸 강단이 보였다. 허리는 꼿꼿했다. 키는 그리 크지 않았고, 지팡이를 짚고 서 있어 구부정해 보였다.
그럼에도 연약하거나 왜소해 보이지 않았다. 작은 거인이란 말은 이 사람에게 쓰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단단해 보였다.
‘시멘트 왕회장.’
현덕은 세상 사람들이 그 노인에게 붙인 별명을 떠올렸다.
대한민국 건설업계, 아니, 경제계의 신화. 무지렁이 농군의 아들로 태어나 맨손으로 대그룹 시황을 일군 입지전적인 인물.
아들이 장성하자 일선에서 물러났으나 아들이 이른 나이에 교통사고로 죽자 다시 시황그룹의 총수가 되었다. 몇 년 전 고희를 맞이했다는 노인은 여전히 정정했다.
그는 시황의 주인. 철의 노인이라 불리는 제갈영정이었다.
현덕이 알 정도로 유명 인물이었다. 그가 얼굴을 드러내자 주변의 사람들이 바로 그를 알아보고 술렁였다. 기자들이 맹렬하게 사진을 찍고 마이크를 들이댔다. 하지만 노인은 그들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현덕은 그 오만한 태도가 낯설지 않았다. 세월에도 무뎌지지 않은 매섭고 싸늘한 눈빛. 오만할 정도로 꼿꼿한 태도. 지금 현덕의 옆에서 현덕을 보며 웃고 있는 주민과 똑 닮아 있었다.
‘아니, 주민 형이 저 할아버지를 닮은 거겠지.’
이래서 피는 못 속인다고 하는구나, 실감했다.
노인이 주민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았다. 주민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주민도 똑같이 움직이지 않았다.
“…….”
“…….”
노인과 주민은 서로를 쳐다보고서도 인사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노인은 그렇다 치더라도, 주민까지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기자들이 눈을 빛내며 둘을 바라보았다. 카메라 셔터가 쉴 새 없이 눌렸다.
보다 못한 현덕은 주민의 등을 살짝 밀었다.
“형, 가봐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야지.”
주민이 작게 혀를 찼다. 별로 내키지 않는 듯했다. 그 마음이 어떨지, 현덕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형.”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마음을 담아 주민의 셔츠를 꽉 쥐었다. 주민이 현덕을 보며 웃었다.
“다녀올게.”
“조심히 가요.”
“…….”
주민은 순순히 저를 보내는 현덕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현덕은 심통 난 주민의 얼굴을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왜요, 주민 형.”
“헤어지는데, 안 아쉬워?”
“또 만날 거잖아요. 곧.”
현덕은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함께 합격해서 트라이 온 2부를 촬영하든, 아니면 둘 다 떨어지거나 한 명만 붙든.”
‘내가 떨어지면 떨어져도 우주민은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거야.’
주민은 홀리포스라는 아이돌로 데뷔해 성공한다. 한 차례 어려움을 겪지만 이겨내고, 세계적으로 유망한 배우가 된다.
현덕은 주민의 빛나는 미래를 알고 있었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보기까지 했다. 그렇기에 주민의 탈락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우린 곧 다시 만날 텐데. 왜 아쉬워요?”
자신이 떨어진다고 해도, 자신과 주민은 같은 기획사 소속 연습생이니까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다. TV로나 주민의 인터뷰를 바라보던 이전과는 다르다. 열여덟 살의 김현덕은 스무살의 우주민과 스물여덟 살의 김현덕이 상상하지 못할 사이가 됐다.
그렇기에 담담히 그를 배웅할 수 있었다.
“형은 죽으러 가는 거 아니고 그냥, 할아버지를 보러 가는 거잖아요. 이 많은 사람 앞에서 당당히.”
현덕은 밝게 웃으며 주민을 배웅했다. 주민은 제게 웃어주는 현덕을 가만히 보다 픽, 웃었다.
“그래, 그렇지.”
심통 난 표정은 어디론가 가버렸다. 대신 까만 두 눈이 꿀을 녹여 만든 것처럼 달달해졌다.
“다음에 만나면, 나한테 상 줘야 돼. 김현덕.”
그 달달한 눈빛만큼이나 상냥한 목소리가 뜬금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상? 내가 형한테요?”
“그래. 꼭 줘야 돼.”
주민은 현덕의 손목을 꽉 움켜잡았다. 현덕의 손목에 벌겋게 손자국이 남았다. 주민의 손은 끝내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현덕의 손목을 쓸었다. 현덕이 으으, 소리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상은 무슨. 형이 할아버지 만나러 가는 건데, 내가 왜 형한테 상을 줘요?”
“너 때문에 만나는 거니까.”
“나 때문에?”
“그래, 너 때문에.”
주민은 현덕의 손을 놓아주고 주먹 쥐었다. 손바닥에 남은 현덕의 온기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리고는 몸을 돌려 노인에게 걸어갔다. 노인만큼이나 꼿꼿하고 오만한 모습이었다. 누가봐도 주민은 노인의 핏줄이었다.
주민이 노인 앞에 서자 주변 기자들이 주민에게 마이크를 들이댔다. 검은 정장을 입은 장정들이 몸으로 벽을 만들어 기자들을 막았다.
“할아버지, 안녕하셨어요.”
주민은 기자들에게 들으라는 듯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어차피 기자들에게 보이기 위해 만든 자리였다. 주민은 기꺼이 무대에 오른 광대가 되었다.
“다녀왔습니다.”
주민이 깊이 허리 숙였다. 기자들은 모르겠으나, 이건 주민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노인에게 허리를 굽힌 것이었다.
어머니가 죽은 후 아버지는 주민을 본가로 데리고 갔다. 본가에는 노인과 배다른 누나가 있었다. 배다른 누나는 처음부터 주민을 배척했다. 노인은 주민은 환영하지도 구박하지도 않았다. 그저 탐색하듯 지켜볼 뿐이었다.
얼마 안 있어 아버지가 죽고, 본가엔 주민과 배다른 누나, 그리고 노인만이 남았다. 그곳은 냉혹한 전쟁터였다. 배다른 누나에게 짓밟히지 않기 위해 발버둥쳐야 했다.
노인은 그런 주민을 돌보지도 내치지도 않았다. 하지만 주민이 도망치려고 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붙잡아 왔다. 노인은 주민을 방임하는 게 아니었다. 정말로 제 피를, 그리고 제 아들의 집착을 이었는지 관찰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너도 ‘제갈’의 피를 타고 났다면 어서, 이 가문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너만의 광기를 드러내라고. 주름진 얼굴에 박힌 뱀의 냉혈한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노인에게 주민은 그가 가진 시황그룹의 일부분이었다. 자신의 재산이었다. 아버지와는 다른 방법의 집착이었다.
주민은 대놓고 절 경계하고 증오하는 배다른 누나보다 뱀의 눈을 가진 노인이 더 끔찍했다. 언제나 잔뜩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처럼 굴며 노인을 멀리했다. 그랬던 주민이 스스로 허리를 굽히고 제발로 돌아왔다.
‘드디어.’
노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어렸다.
주민이 벌린 판은 조잡스럽고 번잡스러웠다. 허나 주민이 제멋대로 자신을 이 하찮은 무대의 공동주연으로 올린 것은 마음에 들었다.
노인은 주민의 한바탕 놀음에 어울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래, 고생했구나. 고생했어.”
노인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그는 혈관에 피 대신 석유가 흐른다는 소리를 한평생 들어온 사람이었다. 그는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어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아들의 빈소에서도 허리를 굽히지 않았다. 그런 그가 세간으로부터 숨겨왔던 손자의 앞에서 눈물을 보인 것이다.
노인은 허리를 수그리고, 손자의 어깨를 마른 손으로 쓸어내렸다.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네 모습이 장하고 기특하구나. 그래서 내 마중 나왔다. 두 달 만에 보는 내 귀한 손자, 얼굴이 보고파서. 그새 얼굴이 반쪽이 되었구나. 얼마나 고생이 심했누.”
목소리는 더없이 따뜻했다. 손자 걱정에 잠 못 이룬 할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주변에 몰린 기자들은 잠시 카메라 셔터 누르는 걸 까먹었다. 그 정도로 얼이 빠져 노인을 쳐다보았다.
“저도 할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제게 어머니의 꿈을 대신 이루라고, 항상 말씀해주시며 응원해주셨죠. 할아버지가 응원해주셔서 제가 용기를 내 이 프로그램에 참가할 생각을 했던 거잖아요.”
주민만이 당황하지 않고 노인의 말을 받아쳤다. 원래부터 노인이 자신을 그렇게 챙겨주었던 것처럼. 노인의 그런 손주 사랑을 오랫동안 당연하게 받아 익숙한 것처럼.
주민의 말은 고스란히, 기자들이 들고 있는 녹음기로 빨려 들어갔다. 오늘 안에 그 목소리는 문자가 되고 문장이 되어 온 세상에 뿌려지리라.
귓가에 엷은 허밍이 들렸다. 익숙한 환청이었다. 어릴 때 항상 들었던 어머니의 목소리. 그 힘없는 목소리는 자꾸만 주민을 탓했다. 물러나라고, 원래 계획대로 도망치라고. 하지만 주민은 그 아련한 허밍 소리에 흔들리지 않았다.
‘도망치지 않아.’
주먹 쥔 손엔 아직도 현덕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널 가지기 위해서라면 난 정말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어.’
그토록 도망치고자 애썼던 지옥의 입구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갈 수도 있었다.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 수년 간 그를 괴롭혔던 환청이 단번에 사라졌다.
“자세한 이야기는 집에 가서 하자꾸나.”
노인의 쉰 목소리가 그 빈자리를 채웠다.
“네, 할아버지.”
주민은 살갑게 웃으며 노인을 부축했다.
두 사람은 정답게 차에 올라탔다. 지옥문으로 들어가는 첫걸음이었다.
선팅된 차 문이 닫히자마자 주민과 노인의 얼굴이 무표정해졌다. 일말의 웃음도 온기도 모두 사라졌다.
“그래, 그동안 그리 배짱을 튕기더니 갑자기 무슨 생각으로 내게 연락을 한 게냐. 그 각오가 별것이 아니라면 오늘날 여기까지 불러낸 걸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게다.”
노인이 앞을 보며 나직이 말했다. 눈가에 맺혔던 눈물 따위는 금방 증발해버렸다.
주민은 노인을 보지 않았다. 백미러에 비친 현덕을 보았다. 현덕은 이쪽을 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주민의 입가에 엷은 웃음이 어렸다. 노인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차가 움직이자 현덕은 금방 백미러 밖으로 사라졌다. 현덕이 없는 세상 속에서 주민은 백 년 동안 비가 오지 않은 사막처럼 메말랐다.
“엔터 사업 쪽으로 발 뻗는 게 마지막 목표셨지요.”
주민이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시황이라는 제국을 일군 노인이 유일하게 손에 넣지 못한 세계. 아들을 통해 그마저도 움켜쥐려 했지만 끝내 실패하고 말았던 분야.
“그렇지.”
노인은 제 결핍을 숨기지 않았다.
그 결핍은 아들의 죽음 이후 수렁같은 탐욕이 되어 그의 심장에 영원히 메울 수 없는 구멍을 만들었다. 설사 연예계를 손에 거머쥐어도 그 구멍을 메울 수 있을까. 노인은 장담하지 못했다.
주민은 그 수렁에 발을 내디뎠다.
“제가 그쪽을 할아버지의 제국에 더해드리려 합니다. 팔순 생신 선물로.”
주민이 다리를 꼬고,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한껏 여유롭게 앉아 백미러를 통해 노인을 보았다. 입가엔 어떤 미소도 없었다.
“네가?”
노인은 주민의 말에 코웃음부터 쳤다. 가당치 않다는 듯 깔보는 말투였으나, 주민은 보았다. 노인의 얼굴에 순간 스친 갈망을.
“네. 할아버지의 손자인 제가 하려고 합니다.”
주민은 현덕의 손목을 움켜잡았던 그 손으로 제 무릎을 톡톡 두드렸다.
“집안에서 도망치지 못해 안달이었던 녀석이, 갑자기 왜 이렇게 나오는 게냐. 미친 게냐?”
“네. 미쳤습니다.”
“…….”
주름진 이마에 골이 패었다.
노인이 주민을 쳐다보았다. 때맞추어 주민도 고개를 돌려 노인과 눈을 마주쳤다. 주민은 조용히 웃어 보였다.
주민은 자신했다. 지금의 제 눈은 무언가를 향한 열망으로 번들거리고 있을 거라고. 마치 과거에, 어머니를 알게 된 아버지가 그랬듯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노인은 그런 자신을 알아볼 수 있으리라.
“제가 반드시 가져야 할 걸 찾았거든요.”
***
자룡과 주민을 배웅한 현덕은 연습생들 가족들이 줄줄이 들어오는 길을 바라보았다. 가족들을 만나 얼싸안고 울음을 터뜨리는 연습생들을 보노라니 가족 생각이 났다.
‘우리 부모님도 오셨으려나? 형은 군대에 있으니까 못 올 테고.’
현덕은 길게 목을 빼고 가족을 찾았다.
“현덕아.”
뒤에서 누군가가 그런 현덕을 불렀다.
“아, 피터 형.”
피터가 어느새 곁에 와 있었다. 한 손에는 까만 캐리어를, 다른 손에는 재킷을 들고 있었다.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온 사람 같이 가벼워 보였다.
‘선글라스만 하나 쓰고 있으면 딱일 것 같네.’
현덕은 새삼 그의 여유로움에 감탄했다.
“형 가족은요?”
“내 가족은 아무도 안 올 거야.”
피터는 오늘 아침 식사가 맛있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어…….”
현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피터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두 분 다 아직 살아 계시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경우에 어긋나는 질문 한 거 아니야.”
“다행이네요.”
현덕은 피터의 말을 듣고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아직? 아직이라니?’
현덕은 뒤늦게 이상한 뉘앙스를 알아차렸다. 하지만 물어볼 타이밍을 놓쳤다.
“네 가족은?”
“음, 어머니는 오시지 않았을까 싶은데. 아버지랑 형은 잘 모르겠어요. 아버지는 지방에 내려가 계시고, 형은 아직 군대에 있으니까 오기 힘들지 않을까 싶어요.”
“아쉽네, 오랜만에 김맹덕 상병 얼굴이나 좀 볼 수 있을까 싶었는데.”
현덕은 자신보다 더 맹덕을 보고 싶어 하는 피터를 보며, 약간의 호승심을 느꼈다.
“저도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강한 어조로 대꾸했다.
피터가 맹덕의 군대 선임이라면 자신은 맹덕의 친동생이다. 오랫동안 못 봐서 아쉽고 섭섭한 마음은 매한가지겠지만. 그래도 피터보다는 자신이 더 아쉽고 섭섭해야 한다. 그런 오기가 들었다.
‘그러고 보면 맹덕 형이랑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어 본 적이 없구나.’
현덕은 새삼 두 달이란 기간 동안 맹덕과 전화 한 통화 하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
과거에 군대에 갔을 때에도, 고시촌에 틀어박혀 사법 고시를 준비할 때에도, 맹덕과는 자주 전화 통화를 했다. 군대에 있을 때는 맹덕이 부모님을 모시고 자주 면회를 왔다. 고시촌에서 살 때는 맹덕이 밥이나 먹자며 현덕의 점심 식사 시간에 맞춰 찾아오곤 했고.
이번에 맹덕이 군대에 간 후에도,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통화를 하곤 했다. 그런데 지난 두 달 동안은 아무 연락도 주고받지 못했다.
‘잘 지내고 있겠지?’
현덕은 맹덕을 생각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피터는 그런 현덕을 보며 웃음 지었다.
“김맹덕 상병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하나뿐인 형이니까요.”
“그래, 형제 사이에 우애가 있어서 보기 좋네.”
“아니, 뭐 그런 이야기 들을 것까지는 아니구요. 그냥, 다른 집이랑 똑같죠, 뭐.”
현덕은 조금 부끄러워졌다. 맹덕과의 친분을 드러내는 피터에게 욱했던 게 민망했다.
‘내가 지금 나이가 몇인데. 형이랑 제일 친한 게 나라고 떼를 쓰는 것도 아니고.’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와 그에 맞춰 살다 보니, 정신 연령도 고등학생 때로 돌아가는 듯했다. 때때로 고등학생만도 못하게 유치해지기도 하고.
어른스러운 피터 앞에 서니 자신의 어설픔과 미숙함이 더 크게 보였다. 이럴 땐 자신만큼, 어쩔 땐 자신보다 훨씬 더 막무가내인 주민이 그리워졌다.
흠흠. 현덕은 마른기침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피터에게 물었다.
“형은요? 그러고 보니 형은 가족들 얘기를 잘 안 하던데, 형제가 있어요? 오늘, 가족들은 정말 아무도 안 와요?”
“아버지는 해외 지사에 나가 계시고, 어머니는 좀 편찮으셔서 외갓집에 가 계셔서 못 오실 거야. 아니, 사실 내가 여기 출연하고 있는지도 모르실 거야.”
“가족들 몰래 나온 거예요?”
“응. 그래서 호텔에 방도 잡아 놨어. 다음 촬영 전까지는 호텔에서 느긋하게 쉴 거야.”
피터 재킷을 든 손으로 현덕의 뒤쪽을 가리켰다.
“저기 뒤에, 부모님 오시는 거 같은데. 맞지? 저번에 김맹덕 상병이 사진 보여줘서 알 것 같은데. 긴가민가하긴 하지만.”
현덕은 피터의 손을 쫓아 뒤를 돌아보았다. 사람들 틈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보였다.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현덕을 찾는 듯했다.
“맞아요. 형,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저희 부모님이 맞아요.”
현덕은 오랜만에 보는 부모님을 발견하고는 두 손을 높이 들어 흔들었다.
“아버지, 어머니!”
현덕이 크게 소리치자 두 분이 현덕을 알아보고는 허둥지둥 현덕에게 다가왔다.
“형, 저희 부모님들께 인사 드리……어?”
방금 전까지 옆에 서 있던 피터가 보이지 않았다.
“피터 형?”
현덕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피터는 저 멀찍이 물러나 있었다. 저를 부르는 현덕에게 손을 흔들었다.
“빠르네.”
현덕은 얼떨떨한 상태로, 피터에게 손을 흔들었다.
피터는 씩 웃어 보이고는 몸을 완전히 돌리고, 사람들 틈 속으로 사라졌다.
“현덕아.”
“김현덕!”
지척에 다가온 부모님이 현덕을 부르며 달려왔다.
그 순간, 현덕은 주민이나 피터, 자룡 등 그간 함께 합숙을 했던 모든 사람을 잊었다.
부모님 앞에 서니, 아까 피터 앞에서 느꼈던 부끄러움이 무색하게도 나잇값 못 하는 어린아이가 되어버렸다. 주변에서 가족들을 보고 엉엉 우는 다른 연습생들과 다를 바 없었다.
“보고 싶었어요.”
현덕은 어머니를 덥석 끌어안았다. 목이 메어 쉰 목소리가 나왔다.
“고생했다.”
아버지가 현덕의 어깨를 두드렸다.
“네 형이 날짜 맞춰서 휴가받아 나왔었는데, 갑자기 삼 일이나 늦춰져서 기다리다가 도로 들어갔단다. 제대 전 마지막 휴가라던데. 곧 나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으래.”
어머니가 맹덕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아니, 그 프로그램은 뭔 깡으로 이렇게 지들 멋대로 애들을 더 잡아 놔, 더 잡아 놓긴? 그리고 넌, 뭐가 아쉬워서 가만히 붙잡혀 있어? 싫다고 말하고 뛰쳐 나왔어야지! 아무튼 말야. 맹한 놈. 깡이 없어. 그냥 좋은 게 좋은 거지 싶어서 가만히 있었지? 엉?’
맹덕의 잔소리가 귀에 선했다.
현덕은 어머니를 끌어안은 채로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비로소. 합숙이 끝났다는 게 실감났다.
눈물겨운 가족 상봉을 마친 후 부모님이 차를 세워 놓는 곳까지 가려 했으나 그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현덕을, TE엔터테인먼트 연습생들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옴쭉달싹 할 수가 없었다.
현덕은 자룡이나 오 팀장을 찾으려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였다.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자룡의 큰 키와 뚜렷한 녹색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각자 자신이 응원하는 연습생들의 이름을 부르고 환호했다. 그 열기에 눈과 귀가 먹먹했다.
현덕과 부모님은 안전 요원들의 호위를 받아 움직여야 했다. 현덕은 스치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깜짝 놀라 그쪽을 쳐다봤다. 그러면 현덕의 이름을 부른 사람들도 왜 자신들을 쳐다보냐며 더 깜짝 놀랐다.
현덕은 자신을 응원해주러 온 사람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고개를 꾸벅였다. 그러면 힘내라고, 응원하겠다고, 꼭 데뷔할 수 있을 거라고, 애정이 담긴 응원의 메시지가 더 크게 돌아왔다.
백 명,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을 알고 있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자신을 응원하는 게 이상했다. 전혀 현실 같지 않았다.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런 현덕에게 현실감을 주는 건 안전 요원들이었다.
“뭐 하는 겁니까, 빨리 지나가세요!”
안전 요원들은 몰려드는 사람들을 몸으로 막으며 현덕을 밀쳤다.
“우리 애한테 뭐 하는 짓이야!”
“하지 말아요. 밀치지마! 현덕이 밀지마!”
현덕이 휘청일 때마다 몰려든 사람들은 안전 요원들에게 화를 냈다.
겨우겨우 주차장으로 가 차에 올라타고, 현덕과 부모님은 서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현덕만큼이나 부모님도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했다.
“어머, 우리 현덕이가 정말 유명해졌나 봐! 응원해주시는 분들이 저렇게나 많아.”
그나마 트윈 트윙클을 즐겨 봤던 어머니는 일찍 상황에 익숙해졌으나,
“내 아들이 조용필 같은 가수가 된다고?”
아버지는 현덕보다 더 현실감이 없었다.
“아니요, 아버지. 제가 뭔 짓을 해도 조용필처럼은 못 돼요.”
현덕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아버지의 허황된 자식 사랑을 바로 잡았다.
어머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니, 열두 시가 조금 넘었다.
현덕은 우선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부모님과 함께 식사를 했다. 오랜만에 집밥을 먹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식사를 하던 중 현덕은 아버지가 내내 자신의 연습생 활동과 트라이 온 출연 소식을 몰랐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 어머니, 말씀 안 하셨어요?”
현덕은 김치찌개를 한술 뜨다 말고 어머니를 쳐다봤다.
“어머, 얘. 맹덕이랑 똑같은 말을 하니.”
“맹덕 형도 얘기를 안 한 거예요?”
“나나 맹덕이는 당연히 네가 아버지한테 말씀드릴 줄 알고 있었지.”
“어……. 나는, 형이나 어머니가 말씀하실 줄 알았는데.”
현덕과 어머니의 대화를 듣는 아버지의 안색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결국 모두가 내게 말하는 걸 서로에게 미뤘다는 말이구나.”
아버지가 상황을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목소리가 울적했다.
“아니, 여보. 그게 아니라-”
“아버지, 저는 진짜 말하려고 했는데.”
현덕과 어머니는 다급히 아버지에게 변명했다. 말하려고 할 때마다 꼭 무슨 일이 생겼다. 계속 바쁘시고 집에 잘 올라오지도 않으셔서 말할 기회가 없었다, 등등. 아버지가 듣기엔 모두가 다 비겁한 변명이었다.
“현덕아, 나중에 나랑 잠시, 이야기 좀 하자꾸나.”
아버지는 현덕의 숟가락 위에 현덕이 좋아하는 반찬을 얹어주며 말했다.
“네, 아버지.”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렇게 모처럼 집에서 먹는 점심식사를 마치고, 현덕은 거실로 갔다. 아버지는 설거지를 하고, 어머니는 현덕과 함께 거실로 나와 사과를 깎아주었다.
현덕은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TV를 켰다.
TV 다시보기로 ‘트라이 온’ 재방송을 찾아 1화를 켰다.
“보려고?”
어머니가 물었다.
“네. 처음부터 보게요.”
오늘 밤, 트라이 온 1부의 마지막 편이 방송되고 2부 진출자가 가려진다. 마지막 화를 보기 전에 이전 편을 보고 싶었다.
‘어떻게 나왔을까?’
어떤 내용이 방송되었고, 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이 어땠기에 그 많은 사람이 합숙 퇴소에 맞춰 촬영지로 몰려왔던 걸까. 몹시 궁금했다.
정말 TV에 자신이 나오는 건지, 그게 실감나지 않았다.
“음……. 3회부터 보는 걸 추천하고 싶은데.”
어머니는 사과를 포크로 찍어 건네며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왜요?”
현덕은 어머니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 흔들었다.
“아니, 뭐. 그냥…… 그게 네 마음이 편하지 않을까 싶어서. 어차피 너도 다 아는 내용이잖니.”
“그래도 보고 싶은걸요. 어떤 내용이 방송됐는지 너무 궁금해요.”
“그래?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
어머니는 현덕의 등을 쓸어주며,
“그래도 뒤로 갈수록 너 많이 나오니까, 미리부터 실망하면 안 돼. 알았지?”
의미 모를 위로의 말을 건넸다.
오늘도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땀을 흘려 노력하는 백 명의 소년이 여기 있습니다.
꿈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여러분께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과연 누구의 땀이 당신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요.
여기는 ‘트라이 온’
꿈을 가진 소년들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두 달 동안 숱하게 들었던 방유진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며, 촬영에 참여한 연습생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트라이 온 1화가 시작됐다.
현덕은 사과를 씹는 것도 잊은 채 TV에 집중했다. 1화는 세트장에서 촬영했던 기획사별 평가 무대 촬영분이었다. 현덕이 보지 못했던 연습생들의 무대. 현덕과 자룡, 주민의 무대. 그리고 개인 연습생들의 무대가 두 시간에 빼곡히 담겨 있었다.
현장에서 봤을 때도 멋있고 감동적이었던 무대들이 온갖 효과음과 CG, 자막으로 포장되어 나타났다. 불과 두 달 전 모습이건만. 현덕이 알고 있는 연습생들은 어딘가 어설프고 앳되어 보였다.
준비는 B를 받고 왜 A가 아니냐며 짜증을 냈다. 그 모습은 유치원생 복장 CG가 입혀져 귀엽게 포장되었다.
현덕은 준비가 이 장면을 보고 어떻게 반응할지 짐작이 가 웃음이 났다.
이어 TE엔터테인먼트 연습생들의 무대가 이어졌다. 현덕은 바짝 긴장해 리모컨을 움켜쥐었다.
“아이고.”
이미 본방사수했던 어머니는 곡소리를 내며, 그저 사과를 깎는 데만 집중했다.
현덕과 자룡, 주민이 함께 했던 무대는 짧게 편집되었다. 자룡의 랩 ‘시발점’과 주민의 포스트모던적인 춤사위가 길게 이어졌다. 두 사람의 개인 무대는 하나도 편집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방송되었다.
자룡이 강한 악센트로 ‘시발’을 외칠 때마다 화면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미사일, 핵폭탄, 화산이 터지는 CG 장면이 화려하게 합성되었다.
주민이 두 다리를 바들바들 떨며 바닥을 쓰는 춤사위를 펼칠 때는 지진이라도 난 듯 화면이 마구 흔들렸다. 연습생들의 경악하는 표정도 보여주었다.
그리고.
다음 기획사의 무대로 넘어갔다.
“어?”
현덕은 어머니를 바라봤다.
“그러게…… 엄마가 삼 화부터 보자고 했잖니.”
어머니는 현덕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1화에서 현덕의 등장 시간은 딱 2초.
그것도 셋이서 함께 했던 평가곡에서 스치듯이 잠깐 나온 게 전부였다.
통편집.
현덕은 말 그대로 통편집을 당했다.
***
통편집이 가져다주는 정신적 충격은 상당했다. 현덕이 입을 벌리고 멍하니 TV를 바라보았다. 보다 못한 어머니가 입에 사과를 물려주었다. 현덕은 우울하게 사과를 씹으며 1화를 마저 보았다.
원소혁과 피터의 무대가 이어졌다. 자룡과 주민만큼의 분량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1절의 절반 이상을 보여주었다. 두 달 전이긴 하지만 풋풋하면서도 멋진 무대였다.
‘내 무대가 그렇게 임팩트 없었던 걸까? 실수도 안 했는데. 정말 열심히 했는데. 통편집 당할 정도로 못했던 걸까.’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하긴 자룡 형이랑 우주민 사이에 꼈는데, 당연하지!’
내가 못한 게 아니라 내 양옆에 있었던 사람들이 너무 잘한 거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박자룡과 우주민 아닌가. 개성으로 똘똘 뭉친 그 사람들 틈에 있으니 당연히 평범해 보일 수밖에.
화살은 가만있던 주민과 자룡에게로 향했다.
‘설사 내가 아니라 피터 형이나 준비였어도……는 무슨.’
슬프고 부끄럽고 쪽팔려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자신이 통편집 당할 만큼 부족했다는 것을.
‘두 시간 안에 백 명을 소개해야 하는데, 당연히 못ㅎ면 짤리는 거겠지.’
그러고보면 사법고시와 비슷했다. 모두가 최선을 다해도 모두가 합격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더러운 상대평가의 세계잖아. 어쩔 수 없지.’
현덕은 사과를 와그작와그작 씹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 와중에도 사과는 달고 맛있었다.
‘뒤로 갈수록 많이 나온다고 했으니까!’
현덕은 심기일전하여 2회를 시청했다. 그리고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안방으로 도망가려는 어머니를 붙잡고 물었다.
“엄마, 뒤로 갈수록 많이 나온다면서요.”
현덕은 중학교 1학년 이후 처음으로 어머니를 ‘엄마’라고 불렀다. 그만큼 억울하고 슬펐다.
울먹이는 눈으로 어머니를 올려다보니, 어머니가 차마 뿌리치지 못했다. 맹덕이 봤다면 큰 아들, 작은 아들을 차별한다고 투덜대겠지만.
어머니가 특히 작은 아들에게 약해지는만큼,2회 방송 역시현덕의 비중은 처참했다.
‘내가 트라이 온 말고 다른 방송에 출연했던 거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합숙 내내 삼사일에 한 번 씩 인터뷰했고, 하루 종일 카메라에 둘러싸여 살았다. 트루먼 쇼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무섭기도 했으나 어느새 그런 상황이 익숙해졌다.
마음의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두 달을 보냈다. 이런저런 일도 많이 있었다. 그런데 TV 방송분에는 그러한 과정이 조금도 나오지 않았다.
2화에서 현덕의 분량은 0초에 가까웠다. 단체 샷에서 구석 어딘가에 얼굴이 살짝 스치는 게 전부였다. 오렌지 기숙사의 연습생들이 단체 연습을 할 때, 단체로 식사를 할 때, 잠깐잠깐 얼굴을 비칠 뿐이었다.
“현덕아 다음 편, 다음 편부터 많이 나올 거라니까.”
1, 2화에서 이미 통편집의 슬픔을 맛본 현덕은 어머니의 위로를 한 귀로 듣고 흘렸다.
현덕은 우울하게 3회를 켰다.
3화는 두 번째 평가를 준비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어머니의 말대로 3화는 1, 2화보다는 나았다. 여기저기서 슬쩍 슬쩍 현덕이 보였다. 물론 단독 샷은 없었다. 준비, 피터와 셋이서 함께 있는 모습 뿐이었다. 3화에서 현덕은 준비와 피터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오렌지 기숙사의 분위기 메이커였던 피터 옆에 있었던 덕에 바닥을 뒹굴며 웃는 현덕의 모습이 나왔다. 형, 형, 하고 따라 붙어 매달리는 준비 때문에 사이좋은 형-동생의 관계성이 드러났다. 셋이서 평가 무대를 함께 준비하며 땀 흘리는 모습이 여러 번 비쳤다.
하지만 3화를 보며 현덕은 자신의 분량이 늘어난 걸 기뻐할 수 없었다.
3화부터는 자룡과 주민의 분량도 부쩍 늘었다. 아니, 그들이 처한 상황 속의 갈등이 분명히 드러났다.
레드 기숙사는 원소혁과 박자룡의 용쟁호투 판이었다. 다음 평가 곡의 메인 파트를 누가 차지하느냐를 두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주먹다짐만 안 했을 뿐이지, 분위기가 제법 흉흉했다. 소혁과 자룡은 연습하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현덕은 당연히 자룡의 편이었다. 자룡의 입장에서 TV를 보다보니 자룡을 배려해주지 않는 소혁이 무척 얄미웠다.
두 번째 평가 무대의 곡은 랩 파트가 거의 없었다. 자룡은 자신 말고 다른 랩 포지션의 연습생에게 랩 파트를 넘겨주고는 보컬 파트 쪽으로 넘어왔다.
자신은 보컬도 소화할 수 있지만 다른 랩 포지션 연습생은 고음을 낼 수 없어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에 랩 파트는 양보한 것이었다. 제일 자신 있는 랩 파트를 양보하면서도 자룡은 아쉬워하지 않았다.
“저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노래하는 박자룡도 기대해주십시오.”
자룡은 자신 있게 말했다.
그 자신감은곧 실력으로 증명됐다.
자룡은 평가 곡의 보컬 메인 파트를 훌륭해냈다. 보컬 선생님이 왜 랩을 하냐고 포지션을 바꾸라 말할 정도였다.
소혁은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자룡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 자룡은 그런 소혁에게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한 번도 대놓고 화를 내지 않았다.
그런데 연습 도중 자룡이 슬그머니 사라지는 장면이 찍혔다.
“연습하다 말고 어디 가나요, 박자룡 연습생.”
촬영 스태프가 따라붙었다.
“힐링하러 가요, 씨-앗.”
자룡은 씩- 웃고는 후다닥 달려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자막으로 ‘박자룡을 놓쳤다.’는 자막과 함께 ‘이 방향으로 쭉 가면 오렌지 기숙사가 있을 텐데?!’라는 자막이 이어졌다.
잠시 후.
자룡이 터덜터덜 돌아왔다.
“힐링 잘 하고 왔어요?”
촬영 스태프가 묻자 자룡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럭저럭요. 백 퍼센트는 아니고 오십 퍼센트 정도? 현덕이 보러 갔는데, 까였어요. 기숙사 간에 서로 만나면 안 된다고.”
아까 소혁과 다툴 때보다는 표정이 밝았으나 기운 없어 보이는 건 여전했다. 자룡이 까였다고 말하자 화면이 ‘ㅋ’자로 도배되며 웃음소리 효과음이 들렸다.
“그래도 그렇게 몰입해서 연습하고 준비하는 모습에 저도 잔뜩 자극을 받았어요. 아자! 정신 차리고 완전 열심히 하겠습니다!”
자룡은 씩씩하게 말하고는 다시 레드 기숙사 연습실로 들어갔다.
소혁이 벽에 기대 팔짱을 낀 자세로 자룡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룡은 그런 소혁을 향해 당당히 걸어 들어갔다. 카메라는 둘을 한 화면에 잡으며 웅장한, 할리우드 판타지 블록버스터 영화의 클라이맥스에나 나올 법한 음악을 깔았다.
“미안.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어.”
자룡이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소혁은 그손을 빤히 내려보다가 흥, 코웃음 치며 고개를 돌렸다.
“알면 됐어. 연습이나 하던지, 말던지.”
소혁이 획 돌아섰다.
두어 걸음 걷고는 멀뚱히 서 있는 자룡을 돌아보았다.
이어 블루 기숙사의 영상이 이어졌다. F 평가를 받은 수많은 연습생 중 군계일학인 우주민의 모습이 처음부터 화면에 등장했다.
블루 기숙사 연습복을 입고 연습실에 있는 모습이었다. 벽에 느슨히 기대앉아 숨만 쉬고 있는데도 느와르 영화의 한 장면같아 보였다. 수십 명의 연습생 무리 속에 있어도 단연 돋보였다.
‘그래도 실물이 더 잘생겼네.’
화면이 우주민의 미모를 다 담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속상했다. 블루 기숙사의 상황을 볼수록 속상한 마음은 더 깊어졌다.
블루 기숙사 연습생들은 우주민을 견제했다. 우주민 또한 ‘내성적’이고 ‘낯을 가리는 성격’ 탓에 같은 기숙사 연습생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주민은 기숙사별 댄스 연습 시간마다 선생님에게 지적당하고 혼났다. 그때마다 얼굴을 찡그리고 힘들어하는 주민의 모습이 클로즈업 됐다.
대열을 맞춰 춤추는 연습생들 속에서 혼자 엇박자로 기괴하게 팔다리를 꺾는 주민의 모습이라니.
‘으아!’
현덕은 눈을 감았다.
차마 볼 자신이 없었다.
겨우겨우 마음을 다잡고야 다시 눈을 뜰 수 있었다.
춤을 추다 박자를 놓쳐 이마에 흐르는 땀을 흘리며 고개를 푹 숙이는 우주민. 선생님에게 매섭게 혼나고는 뒤돌아서는 우주민. 결국 대열에서 떨어져 나와 한쪽 구석에서 혼자 안무를 엉망으로 연습하는 우주민이라니.
영상 속 주민은 열심히 노력하나 절대 몸치인 몸이 따라주지 않아 괴로워하는 연습생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편집하고 포장할 수 있지?’
현덕은 감탄해 마지않았다.
주민과 치고 받고 싸우다 입술 박치기까지 하게 된 사람으로서 감탄스러울 따름이었다.
‘분명 짜증 나는데 화풀이할 데가 없어서 열 받은 모습인데.’
영상에서는 더없이 가련하고 서글픈 모습으로 포장되었다. 화면 속 저 연습생이 자신이 아는 그 우주민이라는 걸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불쌍하다는 생각을 할 뻔했다. 방송국의 편집 기술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수준이었다.
인터뷰 화면으로 장면이 전환됐다.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은 주민이 나타났다. 화면 밖에서 누군가 질문했다.
Q. 왜 다른 연습생들에게 도와달라고 하지 않나요
└ “제가 서 있는 장소는 서바이벌 현장이잖아요. 제가 못한다고 남들이 반드시 절 도와줘야 하는 건 아니죠. 다들 좋은 사람들이라 제가 도와달라고 하면 자신들 연습 시간을 쪼개서라도 알려주려 할 텐데, 미안해서 도와달라고 말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든…… 저 혼자서 극복해내야죠.”
현덕은 멍하니 눈을 껌뻑였다.
보이는 건 우주민의 얼굴이요, 들리는 건 우주민의 목소리인데. 현덕이 아는 그 우주민이 아니었다. 안쓰럽게 웃고, 남을 배려하는 우주민이라니.
현덕은 지금 자신이 보는 TV 화면이 CG나 더빙 처리가 된 게 아닐까 의심했다. 그게 아니라면, 정말 조작이 1%도 없다면, 주민은 진짜 천재가 맞았다. 노래 말고 연기.
‘아이돌 말고 배우 쪽으로 가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노래 실력이 아쉽긴 하지만.’
신은 주민에게 인성을 뺏고 연기 재능을 두 배로, 아니 백 배로 주신 듯 했다.
“현덕아, 쟤가 너랑 같은 기획사라며. 그런데 어떻게 엄마한테는 말 한마디를 안 해줬어. 같은 회사에 저렇게 멋진 형이 있다고. 응?”
어머니는 화면 속 주민에게 푹 빠져 있었다.
“맹덕 형한테는 말 많이 했어요.”
현덕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주로 욕이었지.’
차마 부모님께는 말하지 못했지만. 주민과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맹덕에게만 투덜대곤 했다. 때문에 맹덕은 주민을 이 세상 최고의 악당으로 알고 있을 것이었다.
어머니는 주민과 현덕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기에 TV에 나온 주민의 모습이 본 모습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머, 이번에 너랑 저 연습생 둘 다 붙으면, 난 누구한테 투표해야 하지?”
“당연히 저한테 해줘야죠. 전 어머니 아들이잖아요!”
“어머, 얘. 국회의원 투표를 할 때도 같은 고향 사람이라고 찍어주고 그러면 안 된다고 하잖니. 그런데 이거라고 다를까. 아들이라고 무조건 찍어줄 순 없지!”
트윈 트윙클을 시청했던 어머니는 현덕보다 훨씬 현실적이었다.
“어머, 어머, 쟤 좀 봐, 현덕아. 너 쟤랑 친한 거 같던데. 쟤 어머니는 쟤만 봐도 배부르겠다. 밥 안 먹어도 배부르겠어. 어쩜, 내 아들들도 다 잘생기긴 했지만, 쟤도 뉘 집 아들인지……. 아, 시황그룹 손자라고 했지. 아무튼, 잘생겼다. 잘생겼어.”
어머니는 우주민을 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서재에서 책을 보다 물을 마시러 나온 아버지가 그런 어머니를 보고는 얼굴을 구겼다.
“크흠, 크흠!”
헛기침을 하며 어머니의 시선을 끌려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어머니는 주민에게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
“역시 남자는 잘생기고 봐야 해!”
아버지는 타지 생활로 거칠어진 자신의 얼굴을 문지르며 쓸쓸히 서재로 돌아갔다.
‘내가 어머니를 닮았구나.’
미모에 잘 홀리는 성격. 현덕은 새삼 물보다 진한 핏줄의 힘을 깨달았다.
슬쩍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아랫입술을 문질러보았다. 아직 붓기가 빠지지 않아 손끝이 스칠 때마다 살짝 아렸다.
‘으으.’
현덕은 얼른 다시 손을 내리고 TV를 보았다. 어느새 주민의 얼굴이 사라지고, 다른 연습생들이 연습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현덕은 아쉬워서 리모컨을 만지작거렸다.
‘되감기해서 한 번 더 볼까?’
현덕은 자신의 분량을 체크하는 것 따윈 잊고 주민에게 집중했다.
“얘, 현덕아. 그러고 보니 너 입술이 왜 그렇게 팅팅 부은 거야. 거기서 뭘 잘못 먹은 거니?”
어머니는 그제야 현덕의 입술이 부은 걸 알아챘다.
“잠깐, 엄마 좀 봐. 얼굴 좀 자세히 보자. 입술만 그런 거니? 다른 데는 안 간지러워?”
“아니에요, 그냥. 어디 부딪쳐서 그런 거예요.”
현덕은 당황하여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고는 생각나는 대로 아무 말이나 막 해댔다.
“부딪쳐? 어딜 부딪쳐? 어디서 어떻게 부딪치면 입술만 그렇게 땡땡하게 붓는 건데?”
당연히 어머니는 놀라며 현덕의 얼굴을 제 쪽으로 돌리려 했다.
아들이 시커먼 남자 연습생들만 가득한 TV 촬영 현장에서 누군가와 입술 박치기를 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맞고 다니나 걱정할 뿐이었다.
“설마 누가 널 때렸니? 응? 저런 데는 기싸움도 심하고 그렇다며. 그런 거야?”
“아니요, 그런 거 아녜요.”
현덕은 얼른 뒤로 물러났다. 딴 사람이라면 몰라도 가족에게, 그것도 어머니에게 키스해서 부은 입술을 대놓고 드러내기엔 너무 민망했다.
‘아, 차라리 뭐 잘못 먹었다고 할걸.’
후회한들 이미 늦었다. 엎질러진 물을 도로 담을 수 없듯, 알레르기가 아니라고 말한 걸 취소할 수 없으니.
“누가 때려서 맞은 거 아니고, 그냥 아침에 양치 심하게 하다가 칫솔에 부딪혀서 그런 거예요.”
현덕은 TV를 보자고 화제를 전환했다.
TV에서는 현덕과 피터, 준비가 나오고 있었다. ‘오렌지 삼총사’라는 자막이 톡톡 튀며 현덕이 유독 환하게 웃는 장면이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현덕은 어머니와 실랑이를 하느라 미처 보지 못했다.
4화는 세 번째 평가 무대를 준비하는 모습이 나왔다. 이번 편에선 유독 현덕이 힘들어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왔다. 평가 무대를 준비하려 연습을 하다가 박자를 못 맞추거나, 노래를 부르다 꾸벅 졸아서 앞으로 엎어지거나. 저녁밥을 먹고 연습실에 온 현덕이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잠들자, 피터와 준비가 번쩍 들어 소파에 눕히는 장면도 나왔다.
주민은 여전히 어설픈 춤 실력 때문에 기숙사 내에서 무시당하고, 같은 팀 내에서도 골칫덩이 취급당하는 모습이 자꾸 비쳤다.
중간중간 간식을 위해 미션을 수행하는 장면도 나왔는데, 야식으로 치킨을 쟁취하기 위한 백여 명 연습생들의 눈물 나는 혈투가 흥미진진하게 편집됐다.
1등을 차지한 옐로 기숙사 연습생들이 PPL로 받은 치킨을 맛있게 뜯어 먹었다. 치킨은 더없이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저거 보다가 옆집 아줌마랑 치킨 시켜 먹었어.”
“맛있었어요? 저거 방송 끝나고도 치킨이 많이 남아서 저도 좀 먹었는데, 별로 맛 없던데.”
현덕은 밍밍한 치킨 맛을 떠올리며 물었다.
‘살은 퍽퍽하고, 튀김옷이 너무 두꺼웠어.’
원래 치킨은 식어도 맛있는 법이거늘. 저 치킨은 식어서 더 맛이 없었다. 다이어트 한다며 튀김옷을 벗기고 속살만 빼먹던 준비는 치킨에 살이 너무 없다고 침울해졌었다.
“어쩐지, 순살로 시켰는데 고기는 적고 튀김옷이 너무 두껍더라.”
어머니의 감상도 그리 좋진 않았다.
현덕은 우는 시늉까지 하며 치킨이 맛있다고 외치는 옐로 기숙사 연습생들을 바라보았다.
‘이게 자본주의의 맛이구나.’
방송이 이렇게 무서웠다.
다음 날, 밤늦게까지 치킨을 맛있게 먹은 옐로 기숙사 연습생들이 땡땡 부은 얼굴을 보고 경악하는 장면까지 방송되었다.
먹으라고 치킨을 준 건 제작진인데, 연습생들의 부은 얼굴을 그대로 방송으로 내보내며 비웃는 듯한 자막을 다는 것도 제작진이었다. 현덕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한편 레드 기숙사는 자룡과 소혁의 신경전이 극에 치달았다.
오렌지 기숙사에서는 자꾸 실수하며 꾸벅꾸벅 조는 현덕의 모습이 여러 번 비쳤다. 현덕을 걱정하는 준비와 피터의 모습이 더없이 정겨웠다. 셋이 한 화면에 나올 때마다 눈코입이 달린 오렌지 세 개가 화면을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내가 저 정도였구나.’
제3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니, 생각 이상으로 비실비실해 보였다. 이리 쿵, 저리 쿵, 부닥치기 일쑤였고 연습하다 픽 쓰러져 졸기도 했다.
그럭저럭 잘 버텼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런 자신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피터와 준비를 보니, 너무 미안했다.
“으아.”
현덕은 너무 쪽팔려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현덕아, 엄마는 네가 엄청 자랑스러웠어.”
어머니는 현덕의 무릎을 툭툭 두드리며 상냥하게 위로해주었다. 현덕은 더 부끄러웠다.
옐로 기숙사는 자기 이름을 개그 소재로 삼은 완용과 호탕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정모의 판이었다. 정모의 옆에는 항상 유호가 있었다. 위가 많이 아픈지 얼굴을 찡그리고 휘청거리는 모습이 아슬아슬했다. 병약미가 돋보였다.
병약한 유호가 “형 나이가 사실-”로 시작되는 정모의 놀림에는 전광석화로 반응했다. 정모는 유호에게 발을 밟히거나 한 대 얻어맞아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엄살 부리는 모습이 코믹하게 편집되었다.
한승이 주저하며 유호에게 공손히 물을 바치는 모습도 이어졌다.
그린 기숙사는 연습생들이 하나로 똘똘 뭉쳐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발산했다. 트레이닝 선생님들도 열정만은 레드 기숙사보다 더 뜨거운 것 같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연습생들은 반드시 C 이상 평가를 받겠다며 각오를 다졌다.
블루 기숙사는 주민과 나머지, 라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설사 카메라 앵글이 주민 말고 다른 연습생을 비추어도, 끄트머리에라도 주민이 걸리면 주민이 더 돋보였다. 그야말로 신스틸러였다.
‘나만의 생각일지도 몰라.’
현덕은 우선 자신의 시력을 의심했다. 주민이 어느 구석에 찌그러져 있든 일단 화면이 비추면 여지없이 눈에 들어왔으니까.
“저 우주민 연습생만은 뭔가 후광이 비치는 거 같아. 현덕아, 저 연습생 실제로 봐도 그러니? 저렇게 잘생겼어?”
다행히도 현덕만 겪는 현상은 아니었다. 어머니가 그간 너무 궁금했다며 현덕에게 물었다.
“실물이 더 잘생겼어요.”
현덕은 기밀을 누설하는 산업 스파이처럼 어머니에게 속삭였다.
“정말?”
“네, 진짜 잘생겼어요.”
“어머나.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어머니는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현덕은 다시 한번 실감했다. 자신이 미인을 좋아하는 건 어머니의 유전자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TV에서 주민이 저녁 연습 도중 슬그머니 빠져나가 숙소로 가는 장면이 나왔다. 숙소에 달려 있는 카메라는 이른 저녁에 잠드는 주민을 고스란히 찍었다. ‘드디어 포기한 건가?’라는 자막이 흘러나왔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닌데!’
현덕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설마 이런 장면이 방송될 줄은 몰랐다.
연습실은 물론 숙소까지 카메라가 달려 있는 건 알았지만. 하필이면, 새벽 연습을 위해 저녁에 일찍 잠드는 주민의 모습이 찍히고 그게 방송되다니.
‘사람들이 우주민을 게으르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 아닌데, 그런 거 절대 아닌데.’
현덕이 억울해하든 말든 TV에서는 세 번째 평가 무대의 막이 올랐다.
MC를 맡은 방유진이 무대를 걸어 나오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비추었다. 그리고 대이변이 연출되었다.
그간 그렇게 춤 실력이 모자라서 무시당하고 구박받았던 주민이 무대 위를 날아올랐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자룡의 1/100도 안 되는 실력이었다. 하지만 우주민이었기에, 그 무대는 자룡의 무대만큼이나 빛났다. 트라이 온을 1편부터 쭉 봐온 시청자라면, 우주민의 무대에서 기묘한 카타르시스를 느꼈으리라. 춤에 한해서는 미운 오리 새끼나 다름없던 우주민이 백조가 되어 날아오른 것이니.
그는 더이상 팔다리로 땅바닥을 닦던 물방개나 소금쟁이가 아니었다. 한 마리의 학이었다.
갑자기 화면에서 작년에 엄청난 인기를 얻었던 사극의 한 장면이 나타났다. 기생이 되었으나 예인의 혼을 불태우며 전설의 학춤을 완성했던 여주인공의 춤사위 장면이었다. 치마를 휘날리며 고아하게 춤을 추는 여인의 얼굴에 주민의 얼굴이 붙었다.
주민은 그렇게 날아올라 한 마리의 훌륭한 학이 되었다. 감히 뭐라 평가할 수 없는 수준의 CG였다.
“어머, 이건 또 봐도 너무 웃기다.”
어머니는 박장대소하며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하하…… 하하하?”
현덕은 애써 웃으며, 잠시 화면을 멈췄다. 하필, 주민의 얼굴이 합성된 학이 날아오르는 장면이었다.
“윽.”
현덕은 차마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얼른 저 화면을 넘기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고도 견딜 수 없어 부엌으로 가 큰 컵에 물을 가득 부어 어머니를 드렸다. 어머니는 물을 마시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세 번째 평가 무대의 승자는 주민이었다. 그 누구도 주민의 존재감을 뛰어넘지 못했다.
‘우주민은 춤을 못 춰도 잘 춰도 존재감이 엄청나구나. 이런 게 연예인 상이라는 걸까?’
현덕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잠시 뒤 현덕의 무대가 시작되었다. 현덕은 저도 모르게 허벅지 위에 오른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보기 싫었다. 하지만 봐야 했다. 자신이 얼마나 엉망이었는지.
TV 속 현덕이 실수할 때마다 시청자 현덕은 움찔, 움찔 몸을 떨었다.
어머니는 현덕의 손등을 자신의 손으로 덮고 토닥여주었다. 괜찮다고, 고생했다고 말해주었다.
무대가 끝난 뒤 카메라는 현덕을 단독으로 비춰주었다. 하늘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짓는 현덕의 얼굴이 한가득 드러났다.
“윽.”
현덕은 더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현덕아, 괜찮아, 괜찮아.”
어머니가 현덕의 등을 쓸어주었다.
‘아뇨, 하나도 안 괜찮아요.’
현덕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내저었다.
눈을 가려도 귀는 열려 있었다. 단상 위 선생님들의 뼈아픈 평가가 다시 한번 현덕의 심장을 할퀴었다.
‘좀 더 체력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좀 더 악바리처럼 달려들어서, 좀 더 열심히 했으면 좋았을 텐데.’
뒤늦게 후회가 들었다.
분명 그 당시에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한 것 같은데. 왜 다시 돌아보면 더 열심히 하지 못했다고 후회하게 되는 걸까.
현덕은 무대에 오르는 자룡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룡이라면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것같은 후회를 하지 않겠지, 싶었다.
무대에 오른 자룡은 항상 물 만난 고기처럼 날아올랐다. 현덕이 아는 박자룡이 아니라 다른 사람 같았다.
자룡은 평가곡이 어떤 분위기, 어떤 모티브의 곡인지 철저히 분석하고, 그 곡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섹시해야 할 부분에서는 현덕이 찔끔할 정도로 유혹적이었다. 파워풀해야 할 부분에서는 무대를 부술 듯 힘이 넘쳤다.
무대를 마친 자룡은 땀범벅이었다. 땀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얼굴은 더없이 빛이 났다. 만족한 표정이었다.
한팀인 소혁은 자룡만큼 완벽한 무대를 펼쳤다. 둘은 레드 기숙사의 다른 연습생들이 백댄서로 보일만큼 독보적이었다.
그렇게 모든 평가 무대가 끝났다.
이번 편에서는 전편과 달리 등급 발표하는 걸 마지막에 모아서 보여주었다. 블루 기숙사부터 한 명 한 명 연습생들이 평가 무대가 끝난 뒤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보여주었다.
블루, 그린, 옐로, 그리고 오렌지.
현덕이 속한 팀의 등급이 발표되었다.
‘편집됐을까? 편집됐겠지? 제발.’
현덕은 애써 자신의 무대에 대한 실망감은 저만치로 밀어 놓고 두 손을 모아 쥐었다. 그리고 간절한 눈으로 TV를 바라보았다.
바로 이 시점에, 주민이 깽판을 쳤다.
‘제발, 제발.’
편집되었기를 바랐건만.
“잠시만요. 이건 뭔가 잘못된 겁니다.”
오디오는 현덕의 바람을 잔인하게 배신했다.
“거기 앉아들 있는 건 전문가라는 뜻일 텐데. 사람을 제대로 평가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주민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뭐?”
“쟤 지금 뭐래는 거니?”
“이거 몰래 카메라인가요?”
“우릴 상대로 그런 것도 해?”
“쟤네 담력 시험 하는 거 아냐? 아님, 미션 벌칙?”
단상 위 선생님들이 웅성거렸다. 무대 위에 서 있던 MC 유진의 눈동자가 지진 난 듯 흔들렸다.
그 당시에 현덕은 주민에게 정신이 팔려 주변을 살피지 못했다. 이제야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는지 알게 되었다.
“김현덕 연습생은-”
주민이 뭔가 말하려 할 때였다.
현덕이 주민에게 달려들었다.
“읍!”
입이 막힌 주민과
“형!”
화들짝 놀라는 준비.
“어이구.”
큰 손으로 두 눈을 가려버리는 피터. 그건 전쟁같은 상황이었다.
CG 화면이 나왔다. 뉘엿뉘엿 지는 석양을 향해 날아가는 학의 얼굴에 다시 한번 주민의 얼굴이 합성됐다. 어쩐지 슬픈 느낌이 들었다.
잔잔한 피아노곡이 BGM으로 깔렸다. 이삼 년 전쯤 흥행했던 신파 영화의 OST였다.
백혈병에 걸린 여주인공이 자신의 병을 숨기고 남주인공을 모질게 내친다. 그렇게 헤어지며, 여주인공은 돌아서 흐느껴 운다. 남주인공은 그걸 모른 채 자신을 좋아해주는 또 다른 여자에게로 걸어간다.
노래 가사와 현덕의 목소리와 겹쳤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형이, 인간성이 없습니다.”
그 사람 그리 나쁜 사람 아니에요. 부디 사랑해줘요~♪
“조, 조금 없습니다.”
조금 무뚝뚝할지 몰라요~♩
“그래서 가끔 이러는데 절대 나쁜 의도가 있는 건 아닙니다. 진짜입니다.”
가끔은 화를 내기도 하겠죠. 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랍니다. 부디, 사랑해주세요~♬
덕분에 현덕의 씩씩한 외침은 어쩐지 너무도 가련하게 들렸다.
“헉.”
양팔에 오도독, 소름이 올랐다. 현덕은 손바닥으로 팔을 마구 문질렀다.
“진짜입니다. 김현덕 연습생의 말이 맞습니다. 죄송합니다!”
화면에 녹색 머리가 툭 튀어나왔다. 자룡이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자룡과 현덕이 번갈아 가며 고개를 꾸벅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두더지 잡기 게임판이 합성됐다.
주민의 얼굴이 합성된 뿅망치가 차례로 자룡과 현덕의 머리를 콩콩 때렸다. 그러면 자룡과 현덕은 번갈아 가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계속 반복됐다.
이어 화면이 새까매지며 갑자기 한여름 전설의 고향 오프닝이 뜨듯 핏빛 글씨가 떴다.
우리는 그들이 지난밤 동안 한 일을 알아야 한다.
‘무슨 생각으로 영상을 편집하고 합성하는 건지 모르겠어.’
메인 PD의 취향인지 편집팀에 젊은 사람들이 많은 건지, CG 합성이 너무 과했다. 졸지에 두더지 잡기 게임의 두더지가 된 현덕은 인상을 찡그렸다.
“어? 저게 왜?”
이어지는 영상을 본 현덕은 입을 떡 벌렸다.
화면이 지직-거리더니, 사이비 종교의 모임이나 도박 현장에 잠입한 기자가 들고 다시는 취재 카메라 화면과 비슷한 때깔로 바뀌었다.
현덕에게는 익숙한 장소였다. 블루 기숙사의 연습실.
- 새벽 2시 -
자막이 뜨더니 끼익- 문이 열렸다.
주민이 휘적휘적 걸어 들어오더니 연습실 바닥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하염없이 문 쪽을 바라보았다. 출근한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같았다.
잠시 뒤, 다시 문이 열리며 현덕이 들어왔다. 먼저 와 있는 주민을 보고 씩, 웃는 모습이 전파를 탔다.
“어머, 어머! 현덕아, 현덕아! 어쩌면 좋니, 기특한 내 새끼!”
어머니가 현덕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퍽퍽 내리쳤다. 현덕은 얼얼한 어깨를 문지르면서, 얼떨떨한 표정으로 TV를 바라보았다.
‘저걸 찍었다고? 언제?’
촬영 당하고 있을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건만. 주민과 단둘이서 새벽 연습을 시작한 첫날부터 현덕과 주민은 카메라 렌즈 안에 놓여 있었다.
현덕은 덜컥, 불안해졌다.
‘혹시 내가 이상한 말을 하거나 하진 않았겠지?’
나도 모르게 촬영 카메라가 나를 찍고 있었다. 결코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 두어달 동안 카메라에 둘러싸여 깜박 잊고 있던 생리적인 두려움이 몰려왔다.
현덕의 두려움과는 별개로 TV 화면은 계속 재생되었다.
현덕과 주민이 노트북을 켜고, 주변에 노트를 늘어놓고 주민의 평가곡 춤 동작을 보는 장면. 현덕이 엎드려 노트에 춤 동작을 졸라맨으로 하나하나 그리는 장면 등이 이어졌다.
주민은 엎드린 현덕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졸린 듯 촉촉한 듯한 멜로 눈깔’이라는 자막이 떴다.
- 다음 날 -
- 그다음 날 -
자막이 연달아 뜨며, 둘이 매일같이 새벽 연습을 하던 모습이 짧게 편집되어 쌓였다.
주민은 레고 인형 같았다. 현덕은 멀뚱히 선 주민의 팔과 다리를 하나하나 움직여 춤 동작을 만들어주었다. 그래도 음악만 흘러나오면 주민은 물방개처럼 굴었다. 그나마 소금쟁이가 아니라 물방개로 진화한 것이었다. 적어도 팔과 다리가 보통 사람들과 같은 방향으로 꺾였으니까.
“으아, 좀 쉬었다 해요. 우리.”
연습하다가 지친 현덕이 바닥에 대자로 누웠다. 주민은 현덕의 머리맡에 앉아서는 한쪽 다리를 세워 얼굴을 기댔다. 당장 스포츠 음료의 브랜드 CF를 찍어도 어색하지 않을 모습이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어 묘한 분위기를 냈다. 긴 속눈썹에 땀방울이 걸려 대롱대롱 매달리다 현덕의 코로 뚝- 떨어졌다.
“윽!”
현덕은 엄살을 부리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주민이 그런 현덕을 보며 픽, 웃었다. 잠깐의 웃음이지만 카메라는, 아니, 편집팀은 놓치지 않았다. 주민의 웃는 모습을 클로즈업해서는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그래도 되는 명장면이었다. 적어도 현덕은 그렇게 생각했다.
다시 둘의 연습 장면이 나왔다. 똑같은 춤 동작을 무한 반복하는 둘의 모습이 빨리 감기로 돌아갔다. ‘똑같은 동작 X 10000000번째’라는 자막과 함께, 지쳐 쓰러진 현덕을 엄지손가락만 하게 축소한 그림이 위에서 와르르르 쏟아졌다. CG였다.
마지막 연습 날, 현덕이 비틀거렸다. 첫날보다 확실히 얼굴이 안 좋아 보였다. 다크 서클이 짙었다. 눈이 반쯤 감겨 자꾸 껌벅였다.
그러면서도 환히 웃으며 주민에게 손을 들었다. 주민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자신의 손을 맞댔다. 영 힘없는 하이파이브였다.
“주민 형, 힘내요. 형은 꼭 할 수 있을 거예요.”
졸린 듯 길게 늘어지는 현덕의 목소리가 주민의 웃음을 끄집어냈다. 둘은 손을 맞잡은 채로 서로를 보며 웃었다.
그리고 조금 전, 평가 무대 위에 선 주민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첫 번째, 두 번째 평가 무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평범하게 안무를 소화하는 주민의 모습 위로 유진의 목소리가 덧입혔다.
“이곳은 경쟁의 장입니다. 누구보다 빛나기 위해 언제나 경쟁해야 하지요. 하지만 가차 없는 경쟁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분명, 우정은 존재합니다.”
TV 화면이 휙, 바뀌어 현덕의 무대 모습을 비췄다.
실수하고는 바로 아차, 싶어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평가 무대를 마치고는 당장이라도 울 듯 울상을 지었다. 준비나 피터, 다른 연습생들이 괜찮다고 위로해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설사 자신이 손해를 본다고 해도 포기할 수 없는, 포기해선 안 되는 것이죠.”
다시 화면이 바뀌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형이, 인간성이 없습니다. 조, 조금 없습니다.”
주민을 지키려는 듯 제 등 뒤에 주민을 숨기고는 큰 소리로 외치는 현덕.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자룡과 함께 허리를 꾸벅이는 현덕.
그런 현덕의 모습이 교차 편집됐다. 그 위로 유진의 목소리가 더해졌다.
“왜냐면 이들은 같은 꿈을 꾸고,
같은 길을 함께 걸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TV 화면이 하얗게 바뀌더니, 다음 편 예고가 이어졌다. 그렇게 4화가 끝났다. 1화에서 3화까지 현덕이 나온 분량을 다 더해도 4화의 절반도 되지 못했다. 누가 뭐래도 4화의 최대 수혜자는 현덕이었다.
현덕은 두 다리에 얼굴을 파묻었다.
“으으.”
얼굴이 화끈했다. 도무지 얼굴을 들 수 없었다.
“현덕아, 엄마는 네가 너무 자랑스러워. 역시 내 아들이야.”
어머니는 현덕을 덥석 껴안고는 마구 흔들었다. 현덕은 어머니가 흔드는 대로 흔들리며 두 손을 주먹 쥐었다. 안 그러면 손이 오그라들 것 같았다. TV에 나온 자신의 모습 때문이 아니었다.
현덕이 오기를 기다리며 오도카니 앉아 문을 바라보는 우주민. 엎드린 현덕의 뒤통수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우주민. 춤 동작이 파노라마처럼 그려진 공책을 자랑스레 내미는 현덕을 보고는 소리 없이 웃는 우주민.
현덕과 함께 있는 그 모든 우주민의 모습에 눈에 박혀 지워지지 않았다.
‘우주민, 도대체 뭐야. 언제부터 저랬던 거야.’
제3자의 눈으로 보니, 정작 둘이 함께 있을 때는 몰랐던 게 보였다. 우주민이 자신을 보며 얼마나 다정하게 웃는지. 얼마나 절실하게 자신을 바라보는지.
***
시계를 되돌려, 2월의 어느 날.
대전지방법원 앞 국밥집에 대여섯 명의 손님이 우르르 들어왔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서인지 가게 안은 한산했다. 그들은 뒤늦게 점심 식사를 청하며 한쪽의 네모난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남녀 가릴 것 없이 배를 움켜잡고는 푸짐한 순대국밥을 시켰다.
제일 어려 보이는 청년이 얼른 사람들 앞에 휴지를 깔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세팅했다. 그 옆에 앉은 다른 사람이 물컵을 일렬로 세우고 찬물을 채웠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밥도 못 먹고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어.”
머리 중앙이 다 벗어지고, 머리카락은 옆만 빙 둘러 남아 있는 중년의 남자, 박 판사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김 판사, 우리가 무슨 영화를 누리자고 이렇게 사는 걸까?”
“나라의 녹을 먹는 죄라 생각하고 그러려니 하게.”
맞은편에 앉은 반듯하게 생긴 중년의 남자, 김 판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테이블 위에 밑반찬이 깔리자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수저를 들었다. 밥과 국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짭조름한 반찬으로 배를 채웠다.
가게 주인은 푸짐하게 밑반찬을 더 덜어주고는 벽에 걸어 놓은 TV를 켰다.
[이제 등급 평가를 확인해 보겠습니다.]
시원한 목소리가 가게 안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오, 트라이 온 재방송하나 보네요.”
물컵에 물을 따랐던 삼십 대 초반의 여성, 영희가 몸을 뒤로 홱 돌려 TV를 쳐다보았다. 목소리가 잔뜩 들떠 있었다.
“자네도 저걸 보나?”
박 판사가 의외라는 듯 물었다.
“요즘 제 삶의 낙이에요. 바빠서 본방 사수를 못 하는 게 한인걸요. 2부 시작할 때는 투표해야 하니까 꼭 본방 사수해야 하는데. 판사님, 다음 달부터는 딱 금요일만, 저 정시 퇴근하면 안 될까요?”
영희가 우는 소리를 내며 하소연했다. 평소 공과 사를 분명히 구분하는 걸로 유명한 직원이었기에, 좀처럼 볼 수 없는 진귀한 모습이었다.
더없이 신기한 일인지라 웬만하면 그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으나, 박 판사는 감히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요 얼마간은 집으로 갈 수나 있으면 다행인 상황이건만. 어찌 그녀의 칼퇴를 보장해줄 수 있으랴.
“우리 딸도 저거 보느라 아주 난리던데. 이제는 제 엄마까지 전염시켜서, 집에 들어가면 모녀가 나란히 TV 앞에 앉아서 저거만 보고 있더라고.”
박 판사는 괜히 말을 돌렸다.
“저게 그렇게 인기가 많은가?”
김 판사가 물었다.
“그럼, 요즘 저거 모르면 간첩이라던데? 아니, 간첩만도 못한 거라던데, 김 판사도 한번 봐봐. 나도 딸이 재방송 틀어줘서 봤는데, 볼만 하더라고.”
박 판사는 껄껄 웃으며 자신보다 세상 물정 어두운 친구를 구박했다.
“저게 한 백 명, 젊은 애들이 나와서 막 싸워서 순위 매기고 하는 거야. 잠깐 봤는데, 다 잘생기고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 부르고. 아주 그냥 다 연예인이야, 연예인. 난 1화만 봤는데, 거 참 볼만하더라고.”
“박 판사님, 아직 연예인은 아니에요. 아이돌 연습생들이죠. 아이돌로 데뷔하려고 저렇게 노력하고 있는 거예요.”
일할 때는 고드름, 하지만 트라이 온을 시청할 때는 활활 불타오르는 열혈 애청자인 영희가 톡 쏘듯 말했다.
“그래, 그래. 그 연습생인지, 그거. 자네는 누굴 응원하나? 우리 집 여인네들은 그…… 뭐냐, 머리가 시퍼런 애를 응원하던데, 조자룡인가? 뭔가?”
“박자룡이요? 조자룡 말고 박자룡!”
“그래, 그래! 그 박자룡. 아주 좋아 죽어, 죽어. 난 완전 찬밥이야.”
박 판사가 투덜거릴 동안 가게 주인이 밥과 국을 내왔다. 뚝배기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김 판사는 얼른 숟갈을 들어 국물을 떴다. 목을 타고 내리니 뜨끈한 게 살 것 같았다.
“박자룡 좋아하시는구나. 저도 그 연습생 좋기는 한데, 제 베스트는 현덕이에요. 김현덕! 아우, 몽글몽글, 모찌 같은 게 얼마나 귀여운지! 진짜, 제가 요즘 그 연습생 때문에 이 험한 야근을 버티고 살아요.”
“……?”
밥을 뚝배기에 말던 김 판사의 손이 멈칫했다.
“김현덕?”
김 판사가 묻자 그녀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름도 완전 씹덕 터지지 않나요? 현덕이라니. 부모님께서 삼국지 팬이셨나 봐요.”
“아니, 거기 나오는 애들은 이름이 왜들 그래? 우리 집이 미는 그놈은 조자룡이던데?”
“판사님, 조자룡이 아니라 박자룡이요.”
영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박 판사를 바라보았다.
“그래, 그래. 박자룡. 박씨였지. 어디 박씨려나, 잘생긴 걸 보니 우리 밀양 박씨인 거 같은데.”
박 판사는 깍두기 국물을 뚝배기에 쏟으며 중얼거렸다.
“아, 그러고 보니 김 판사, 거기 둘째 아들 이름도 현덕이 아니던가?”
“그래, 첫째가 맹덕이고 둘째가 현덕이지.”
“판사님도 삼국지를 좋아하셨나 봐요?”
수연이 고개를 갸웃, 흔들며 물었다.
“아니, 이 샌님이 공부하느라 그런 걸 좋아했을 리가 없지. 제수씨가 좋아했던 거 아냐?”
“……나도 좋아했지만, 안사람이 더 좋아하긴 했지. 애들 이름도 안사람이 짓긴 했고.”
김 판사가 머뭇거리다 실토했다.
“이름은 비슷해도, 이 집 아들은 저기 나오는 애들이랑 전혀 달라. 아주 지 아비를 빼닮아서 공부뿐이야, 조선 시대에 태어났으면 선비 노릇 하며 과거 시험 보러 다녔을 상이라고. 지 아비 닮아서 허여멀건 게 아주, 성격은 제수씨를 닮아서 똑 부러진다니까. 유치원 다닐 때부터 지 애비 따라서 판검사 하겠다고 말하고 다니는데, 그게 얼마나 귀엽던지. 내가 나이 대 맞는 딸이 있으면 무조건 사위로 삼았을 텐데.”
박 판사는 마치 자신의 아들을 자랑하듯 김 판사네 둘째 아들 자랑을 늘어놓았다.
“첫째도 야무지지. 지금 군대에 가 있는데, 제대하고 병원 일 하겠다고 그러고 있어.”
김 판사는 그 위에 첫째 자랑을 한 스푼 얹었다.
“그래, 그래. 좋겠수다. 철든 첫째에 지 아버지 존경한다고 졸졸 따르는 둘째까지. 전생에 나라를 구했구먼, 광복하고 헌법 만들 때 참여했던 조상님이 환생하신 건가, 김 판사?”
박 판사의 웃음 섞인 야유에도 김 판사는 굴하지 않고 꿋꿋했다. 김 판사가 고개를 숙이는 건 오직, 국밥을 먹기 위해 숟갈을 뜰 때뿐이었다.
“어머, 나온다. 우리 현덕이!”
“…….”
김판사가 움찔, 했다.
같이 일하는 직원 입에서 제 아들과 같은 이름이 툭툭, 정답게 튀어나오는 게 영 어색했다.
막 국밥을 한 술 뜨려던 김 판사는 영희의 환호성을 들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정면에 놓인 TV에 절로 눈이 갔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형이, 인간성이 없습니다.]
더없이 익숙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바빠서 도통 서울에 올라갈 시간이 없어 몇 주째 못 봤던, 그래서 보고 싶었던 얼굴이 떡하니 TV에 나타났다.
“……어? 저거?”
박 판사도 알아보았다.
김 판사가 숟가락을 놓쳤다. 첨벙, 숟가락이 뚝배기로 빠지며 걸쭉한 국물이 셔츠로 튀었다.
“어머, 판사님. 셔츠에 국물이! 어쩌면 좋아!”
영희가 물티슈를 내밀었다.
김 판사는 물티슈를 건네받는 둥 마는 둥 하며 멍하니 TV를 올려다보았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분명 그 얼굴이 맞았다. 아버지를 따라서 꼭 판사가 되겠다고 유치원 때부터 말하고 다녔던 둘째 아들.
그 둘째 아들이 웬 놈팡이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는, 뭐가 그리 죄송한지 허리를 꾸벅 굽히고 있었다.
김 판사는, 그러니까 현덕의 아버지는 그렇게 트라이 온 4화 재방송을 통해 현덕의 방과 후 활동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
하루 종일 TV를 보았다. 태어나서 이렇게 오랫동안 TV를 본 건 처음이었다.
현덕은 굳은 몸을 풀려 스트레칭을 하며 배를 움켜쥐었다. 꼬르륵. 배에서 음식을 내놓으라고 안달이었다.
‘맹덕 형이 그때 이런 상태였겠구나.’
명절에 케이블 채널에서 스타워즈 시리즈를 연달아 방영할 때, 맹덕은 1박 2일 동안 TV 앞에서 먹고 잤다. 현덕은 맹덕이 굶어 죽을까 봐 걱정되어 끼니때마다 TV 앞에 밥상을 놓고 밥을 떠먹여 줬었더랬다.
그때 맹덕을 보며 TV 중독이란 게 이런 거구나, 걱정했건만. 남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현덕은 어기적어기적 부엌으로 가서 밥상을 차리고 부모님과 식사를 했다.
밖을 보니 하늘이 어두침침했다. TV만 보다 하루가 훅 가 버린 것이었다.
설거지를 하고 있자니 집 전화가 울렸다.
“네 형이다. 동생 걱정됐는지 얼른 전화했네.”
어머니가 목소리 높여 현덕을 불렀다. 현덕은 얼른 고무장갑을 벗고 전화를 건네받았다.
“형?”
[얼- 오랜만에 목소리 듣는데?]
태평한 목소리였다.
[살아 있었냐? 안 죽었네?]
“형!”
현덕은 두 손으로 전화기를 움켜잡았다. 그 목소리가 그립고 반가우면서도 얄미웠다. 문득, 울컥- 화가 났다.
“왜 말 안 했어!”
[아, 야. 귀청 떨어지겠다. 아이돌 된다고 TV 출연하더니 득음을 하고 왔나, 목청이 왜 이렇게 좋아졌어?]
“딴소리 하지 말고! 김맹덕 상병!”
[야이씨, 내가 상병 뗀 지가 언젠데, 상병이래? 불길하게 그러지 마라. 나 장병 단지 천 년도 넘었거든? 제대하려면 삼천 년은 더 기다려야 하고. 그러니까 꼬박꼬박 김 병장님이라고 불러라. 짜식, 넌 아직 군대 안 와봐서 모르지? 여기서 말이야, 장병 짬밥이면-]
군대 이야기라면 합숙하는 동안 피터와 유호에게 지겹도록 들은 터였다. 또한 이미 옛날 옛적에 한 번 다녀오기도 했고, 이번 생에 한 번 더 가야 할지 모르지만.
“말 돌리지 말고!”
[아우씨, 거기 방송국에서 밥 대신 기차 화통을 삶아 줬냐? 왜 이렇게 목소리가 좋아졌어? 비실비실한 거보단 낫다만.]
“형, 왜 피터 형 얘기 안 했냐고!”
[엉?]
맹덕이 풍선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더니, 와하하 웃었다. 건너편에서 “김 병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아니, 무섭게스리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하는 소리가 두런두런 들렸다.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거야?]
맹덕이 한참 웃더니, 여전히 웃음 반 목소리 반 섞은 소리를 내며 말했다.
“난 아주 생생한데.”
현덕은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첫 촬영 때 피터가 맹덕을 안다며 다가왔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또 섭섭했는지 맹덕은 모르리라. 모르니까 이렇게 웃을 수 있는 것이었다. 현덕은 새삼 배신감에 몸서리쳤다.
[동생아, 원한은 그만 풀어라. 내가 널 위해 무얼 희생했는지 알면 네가 내게 이럴 순 없다.]
맹덕은 현덕이 정말 서운해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납작 엎드려 살살 현덕을 달랬다. 현덕은 ‘오냐, 네가 뭘 희생했는지 들어나 보자.’라는 심보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후.
“미안해, 형. 내가 의도한 건 아니었어.”
이번엔 현덕이 죄인 모드가 되었다.
병장이 돼서 정기 휴가가 나오면, 대개는 말년 휴가랍시고 전역 직전에 몰아 쓴다. 휴가가 끝난 후 부대에 복귀해서 하룻밤 자고 다음 날 전역할 수 있도록 계획을 짜서 휴가를 나가는 게 정석이건만.
맹덕은 현덕이 촬영 합숙 장소에서 퇴소하는 날을 맞춰 휴가를 나왔다. 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트라이 온 4화를 시청하고 현덕이 퇴소할 때 마중을 나간 후, 5화 방송 전에 잽싸게 군대로 복귀하려는 원대한 계획이었다.
그런데 현덕의 퇴소 일정이 늦춰지는 바람에 현덕의 얼굴도 못 보고 군대로 복귀해야 했다. 고로 말년 휴가를 다 쓰고도 맹덕의 전역일은 아직 열흘이나 남아 있는 상태였다.
현덕은 거실에 걸린 달력을 보았다. 정확히 열흘 후에 빨간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말년 휴가를 다녀와서 열흘이나 더 군대에 찌그러져 있어야 한다니. 하루가 만 년 같을 터였다.
‘내가 말년 휴가 갔다 와서 전역할 때까지, 그 하룻밤이 세상에서 제일 긴 하루였는데…….’
맹덕이 자신을 위해 무엇을 희생했는지 알고 나니, 현덕은 더없이 숙연해졌다.
“형, 미안해.”
[됐다, 사과받으려고 말한 건 아니고. 그냥, 형이 이곳에 앞으로 열흘이나 더 갇혀 있어야 한다는 걸 알아달라는 것 뿐이었다.]
맹덕의 목소리가 땅으로 푹푹 꺼졌다. 현덕은 감히 어떤 위로의 말도 건넬 수 없었다.
[열흘 뒤에 보자, 촬영하는 날 아니면 형 꼭 마중 나와야 해. 그 윤 병장님한테도 안부 좀 전해주고. 나 밖에 나가면 좀 만나자고 하고. 핸드폰 번호 좀 받아 놔.]
맹덕은 아련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현덕은 전화기를 내려놓은 후엔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서재로 갔다.
아버지는 무척 진지한 표정으로 현덕에게 자리를 권했다. 아버지의 맞은편에 현덕은 식탁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아버지는 흠흠, 마른 기침을 하고는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왔던 말을 꺼냈다.
“혹시나 내가 네게 은연중에 부담을 주지는 않았나, 많이 생각해보고 반성했단다. 나와 네 어머니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네가 느끼기에는 달랐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건 분명히 말할 수 있단다. 나는 네게, 그러니까 네 장래희망에 어떤 압박이나 강요를 하고 싶지는 않구나. 그냥, 네 형이나 네가 건강하고 튼튼하게 자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해 왔어. 네 형이야, 워낙 튼튼한 놈이고 사막 한가운데 떨어뜨려 놔도 생수 사업을 할 놈이니 그렇다 치고. 너는 어릴 때부터 운동을 안 좋아하고 체력이 약해서, 그게 걱정이었지. 네가 날 따라 판검사가 되었으면 하고, 안 바랐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네가 초등학교 때부터 판사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걸 가만히 듣고는 있었지만……. 그게, 그러니까…… 음, 원래 아이들은 주변 환경과 부모의 직업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나는 네 장래희망이 무엇이든 법에 저촉되지 않고, 적법하게 일하고 근로소득을 얻을 수 있는 직업이라면, 반대하지는 않을 거 같구나.”
아버지는 달변가는 아닐지라도 말을 할 때 막힘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말을 더듬었다. 만연체를 그리 싫어하시던 분이 러시아 문학 소설을 소리 내 읽듯 말을 늘였다.
현덕은 어느 순간부터는 초등학교 때 조회시간마다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을 듣던 게 생각났다. 물론 교장 선생님의 말씀처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지는 않았다. 그러기엔 아버지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고, 현덕의 심장을 짓누르는 죄책감이 너무 컸다.
현덕은 어머니나 맹덕이 말했을 줄 알았고, 어머니는 현덕이나 맹덕이 말했을 줄 알았고, 맹덕은 어머니와 현덕이 말했을 줄 알았다. 어쨌든 현덕과 어머니와 맹덕은 모두 아버지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다. 현덕의 아이돌 연습생 활동과 트라이 온 촬영 참가를.
가장 큰 잘못은 당사자인 현덕에게 있었다. 바빠서 그랬다고, 타이밍을 번번이 놓쳤다고 말하는 건 비겁한 변명이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아버지에게 말씀드려야 했다. 어떤 마음으로 이런 방과 후 활동에 적극적으로 임하게 되었는지 출사표를 올려야 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죄책감에 절로 고개가 숙어졌다.
“죄송해요, 아버지.”
“나한테 죄송할 건 없을 거 같구나. 내가 바쁘다고 널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게 잘못이지. 오히려 내가 미안하구나. 그리고 누차 말하지만, 내가 혹시라도 네 장래희망이 반드시 법조인이어야 한다는 부담을 가지고 있다면,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그런 건 아니에요, 아버지. 부담이나 그런 걸 느낀 적은 없었어요. 저는 정말로 판사가 되고 싶었어요. 그 장래희망은 지금도 가지고 있어요.”
현덕이 다급히 말했다.
“음…….”
아버지는 신음하다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그런데 네가 정말 연예인이 되고 싶은 건지…… 아니면, 그…… 반동으로 그러는 건지, 어느 쪽인지 걱정이 되어서, 음. 어느 쪽이든, 꼭 그 길을 가야겠니? 그 연예인이나 아이돌이란 게 내가 잘은 모르지만 성공하기 힘들고 일이 고되다던데……. 그쪽 소송 많이 담당했던 정 판사한테 물어보니까, 불공정 계약 같은 것도 많고 미성년자 보호도 불충분하고, 아직 우리나라가 관련법도 미비해서, 청소년 연습생을 보호해줄 제도가 없어서 이래저래 좋은 환경은 아니라던데…….”
아버지는 업계의 사정을 꽤나 자세히 알고 있었다. 트라이 온이 방송하고 난 뒤에야 현덕이 아이돌 연습생 생활을 했다는 걸 알았을 텐데, 마치 몇 달, 아니 몇 년을 연예계 관련 사건만 담당한 판검사같았다.
현덕은 아버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홍수에 파묻혀 익사 당할 것 같았다.
‘내가 사법고시를 친다고 했을 때도 이러셨던가?’
현덕은 과거, 혹은 미래, 어떻게 지칭해야 할지 모를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현덕은 가족에게 사법시험을 차근차근 준비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가족들은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이며 응원해주었다. 그 가족의 테두리엔 당연히 아버지도 들어가 있었다.
아버지는 공부할 때의 마음가짐을 간단히 말해주었다. 그뿐이었다. 당신께서 공부할 때와는 세월이 많이 달라졌으니, 학교에서 성실히 수업을 듣고 먼저 시험에 뛰어든 선배들의 경험 어린 조언을 잘 걸러 들어 써먹으라고 했다. 그 때엔 이런 걱정 인형 같은 모습은 보이지 않으셨다. 현덕이 연달아 시험에 떨어지고 또 떨어져도.
아버지는 이제 우리나라 연예계의 폐단과 아이돌 연습생의 어두운 실태를 조목조목 분석하고 있었다.
“네 어머니에게서 계약서를 받아서 검토해 봤다. 다행히 계약서상에 큰 문제는 없지만, 네가 출연하는 그 트……온 프로그램 출연 계약서는 어떻게 작성한 건지 궁금하구나. 네 어머니는 모르던데, 설마 계약서도 작성 안 하고 구두 계약으로 출연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아버지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아버지께서는 말씀하셨지. 계약서엔 함부로 도장을 찍는 게 아니라고. 계약서의 글씨는 마지막 온 점 하나까지 놓치지 말고 백 번 읽은 후에 마음을 정하라고.
“아, 네. 회사에 있어요, 다음번에 회사에 갈 때 가져올게요.”
하지만 현덕은 트라이 온 프로그램 촬영 계약서를 그리 꼼꼼히 읽지 않고 서명했다.
‘워낙 이런저런 일이 많았잖아. 정신이 없어서 그런 거긴 한데 들키면 더 혼날지도 몰라.’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혹시라도 지금 이 자리에서 그 계약서의 내용을 기억나는 대로 말해보라고 할까 봐 무서웠다. 제대로 말하지 못하면 그딴 머리는 어디에 써먹으려고 안 쓰고 놀려 두냐고 혼날 터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버지는 더 이상 계약서에 대해 묻지 않았다. 아무래도 TE엔터테인먼트와 작성했던 아이돌 연습생 계약서가 꽤 무난하여 마음이 놓인 듯했다.
“네가 정말로 하고 싶으면, 그러면 됐다. 해야지, 사람이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아야지. 다만 그 길이 쉬운 길이 아닌 거 같아 걱정이구나. 내가 딱히, 나한테만 말을 안 해줬다고 성이 나서 이렇게 널 붙잡고 있는 건 아니니까. 그건 오해하지 말고.”
아버지가 사족을 덧붙였다.
“아버지.”
“그래.”
“미리 말씀 못 드린 건 정말 죄송해요.”
“…….”
“그리고 실망시켜 드린 것도 죄송해요.”
“너는 날 실망시킨 적이 없단다. 단 한 번도.”
아버지는 단호히 답했다.
“다만 미안할 뿐이구나. 내가.”
아버지의 말이 현덕의 죄책감을 더욱 부채질했다. 그래서 현덕은 불쑥, 마음속에 있는 말을 꺼냈다.
“아버지. 저는 진짜, 판사가 되고 싶었어요. 아니, 지금도 되고 싶어요. 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없는 게 아니에요.”
“현덕아-”
“아버지 말씀처럼 아버지를 따라서 판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컸어요. 그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었어요. 저도 나름대로 판사가 돼서 하고 싶은 게 있었어요.”
작년 윤리 시간에 배웠던 단어가 불현듯 떠올랐다.
“자아실현이요.”
마음은 붕 떠서 이전, 고시촌에 처박혀 있던 현덕의 기억으로 날아갔다.
고시원에서 자고 일어나 독서실로 가 해가 뜨는지 지는지도 모른 채 처박혀 공부하던 시절. 점심밥 먹는 시간도 초 단위로 체크해가며 공부했던 그 시절.
결코 꿈 없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십삼 년은.
끝에 가서는 그 꿈마저 희미해졌지만. 그래도 꿈이 있었다. 아버지가 걱정하는 것처럼 목적 없이 아버지를 뒤따랐던 게 아니었다.
“그런데 뭔가…… 제 안에서 뭔가가 달라졌어요. 아니, 처음엔 조금은 달라지고 싶었어요. 그래서 시작한 거였는데, 그 마음이 무럭무럭 자라서 제 안에 가득 찼어요.”
현덕은 두 주먹을 꾹 쥐었다. 마음이 두근, 두근 떨렸다. 자신의 말마따나 무언가가 심장을 가득 채운 듯했다.
이걸 아버지에게 꺼내 보이고 싶었다. 제대로 설명하고 싶었다. 아버지, 당신 아들은 지금 이런 마음이라고.
“그걸 마무리 짓지 않으면 이번 생도, 이도 저도 아니게 되지 않을까. 아니, 그보다 열심히 살지 못하는 건 아닐까. 그런 마음이 들었어요. 도망치는 거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한번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아……. 뭐라고 말해야 하지?”
답답했다. 이 마음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제대로 설명하고 싶은데 쉽지가 않았다. 도무지 적절한 단어를, 문장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말을 하면서도 답답했다.
그런 와중에 주민이 생각났다. 오늘 아침에 만났던 스무 살 우주민이. 그리고 스물여덟 살 김현덕이 만났던 서른 살 우주민이.
시작은 우주민이었다.
지난 생에 결국 만나보지조차 못했던 그 우주민이 살아 움직이는 세계는 어떨까.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면, 그래서 우주민을 만나면 어떨까. 궁금했다.
지금의 주민은 전혀 모르겠지만, 그래도 현덕은 그런 주민이라도 만나고 싶었다. 할 수 있다면 엉뚱한 상황에 기대 엉뚱한 말을 하듯 ‘고맙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주민을 만난 뒤에는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단 하나도 예상대로 흘러간 적이 없었다. 부딪치기만 하면 으르렁거렸고, 서로 치고 받고 싸웠다.
‘이 우주민이 그 우주민이라니?’
매번 믿기지 않았다. 속은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주민은 자신을 단 한 번도 속인 적이 없는데, 멋대로 속아버리고는 섭섭해하는 게 쪽팔리기도 했다.
그렇게 주민과 알게 되었고, 이제는 주민과 남에게 함부로 말하지 못할 사이가 되었다.
모든 게 이전의 삶에서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중학교 때 그냥 스쳐 지나갔던 기회를 붙잡았을 뿐인데, 모든 게 달라졌다. 현덕은 지금, 이전 생에서 선택하지 않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이 길이 이전의 삶과 완전히 다른 궤도로 나아가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현덕은 자신이 아이돌로 데뷔하고 연예인이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으니까
지금의 김현덕은 분명, 이전의 김현덕과는 달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다른 김현덕도 아니었다.
이번 트라이 온 촬영에 참가한 건 꾸물럭, 꾸물럭, 흔들리는 자신의 형상을 단단히 굳히려는 도전이었다.
아이돌 연습생이 되었고 우주민을 만났다. 김현덕의 세계는 더없이 넓어졌다. 그 시작, 혹은 끝이 트라이 온 프로그램이었다.
쉼표일지 온점일지 모를 이 포인트를 넘어서면 비로소 선명히 보일 것 같았다. 이번 생에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아버지, 저는 판사가 되고 싶어요. 그런데 지금 하는 이것도,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욕심이고 탐욕이었다.
아이돌로서의 데뷔와 성공. 오직 그 한 가지 길만 바라보며 달리는 연습생들이 얼마나 많은가. 당장 바로 곁에 있는 자룡이나 준비만 하더라도, 언제나 현덕이 놀랄 만큼 열정적으로 살고 있다.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그들의 노력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해야 할 만한 일이었다.
화목한 가정에서 아무 걱정 없이 살았던 자신과 반대로, 감히 무어라 말할 수 없는 환경에서 버티며 살아왔던 우주민. 그 우주민이 숨을 틔우려고 나온 곳이 트라이 온 프로그램이었다. 그런 우주민의 상황과 비교한다면 현덕의 투정은 부잣집 도련님의 배부른 소리일지도 모른다.
양손에 달콤한 과실 두 개를 움켜쥐고는, 아무것도 내놓으려 하지 않고 있는 격이었다.
현덕은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화끈한 열기가 얼굴을 덮었다.
‘내가 이렇게 욕심이 많은 줄 몰랐어.’
십삼 년 고시를 준비해서 결국 합격했던 법조인의 길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다시 그 고시생의 길을 걷는 한이 있어도.
더불어 지금의 이 달콤한 삶을 계속 이어가고 싶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기획사로 가 연습실 문을 열면 자룡과 주민이 몸을 풀고 있다. 둘은 현덕을 돌아보며 언제나 반겨준다.
‘이제야 오냐? 어서 와.’
그런 일상이 소중했다.
준비, 피터와 무대를 준비하며 땀을 흘리고 서로를 챙겨주는 하루하루. 몰래 한승, 정모와 함께 매점에 가서 군것질하다가 유호에게 걸려 잔소리를 들으며 양치질을 해야 하는 합숙 생활이 더없이 즐거웠다.
그리고 우주민.
스무 살의 우주민이 열여덟 살의 김현덕과 함께했다.
주민은 현덕이 좋다고 했다. 자꾸 입을 맞추고, 키스하게 해달라고 졸랐다. 난감해하는 현덕의 얼굴을 보며 좋아 죽으려고 했다.
키스하고 싶다고, 귓가에 속삭이던 나직한 저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등이 저릿해졌다.
이제 고작 하루도 헤어져 있지 않았건만, 주민이 보고 싶었다. 가족과 사이가 안 좋다고 했는데, 마중 온 할아버지랑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걱정됐다. TV에 나오는 주민의 모습만 봐도 입가에 웃음이 번지고 얼굴이 뜨거워졌다.
어떻게 잘라낼 수 있을까. 이미 맛보았는데.
어떻게 순순히 포기할 수 있을까. 이렇게 좋은데. 이전의 삶에선 포기하고 살아야 했던, 아니,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삶을 감히 포기할 자신이 없었다.
‘아니, 못 해. 떨어지기 싫어. 붙고 싶어. 계속, 계속 이 사람들이랑 함께하고 싶어.’
현덕은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인정했다.
곧 TV에서 방송될 트라이 온 5회를 보고 싶었다. 그 방송에서 합격을 받고 싶었다. 그래서 다음 주부터 촬영에 들어가는 트라이 온 2부에도 계속 참가하고 싶었다.
그럴수록 판사의 꿈에서 한 걸음씩 멀어진다는 걸 알면서도, 이쪽 세계를 향해서 한 발자국씩 빨려들고 있었다.
현덕은 오랫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버지는 일어서서 현덕에게 다가갔다. 잔뜩 움츠러든 현덕의 어깨를 양손으로 덮었다. 움찔, 현덕이 몸을 떨었다.
“현덕아.”
“……네.”
“원래 네 나이에는 하고 싶은 게 많은 법이야.”
“…….”
“어제는 과학자가 되고 싶다가 오늘은 대통령이 되고 싶고, 내일은 노벨상 수상자가 되고 싶을 거다. 꿈이 많다는 건 좋은 거지, 나쁜 게 아니야. 그러니까 이러지 말고, 당당하게 고개를 들렴.”
아버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현덕의 목을 지탱해주었다. 현덕은 그 힘으로 다시 고개를 들고 아버지를 바라봤다.
“이 조그만 머리에,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은 건지. 신중하고 진지한 건 나쁜 게 아니지만, 너무 생각에 깊이 파고들다 파묻히는 건 좋지 않단다.”
“아버지, 저는…….”
“나는 네 변명을 듣고 싶었던 게 아니란다. 그저 네 생각이 듣고 싶었던 게지. 네 형을 봐라, 그 생각 없는 놈은 어제는 이랬다가 오늘은 저랬다가, 툭하면 바뀌지 않니. 군대가서도 하던 공부 때려치우고 다른 걸 공부하겠다고 뻗대는 놈인데. 그 나이에도 그러는데, 네 나이엔 오죽할까.”
아버지는 현덕의 어깨를 두 손으로 툭툭 내리쳤다. 진흙을 두드려 단단한 벽돌을 만들듯이.
“네가 진지한 마음인 건 알겠다. 그거면 됐다. 혹시나 공부하다가 지쳐서 엇나간 게 아닐까 싶었어.”
담임선생님에게, 주변 친구들에게 여러 번 들었던 말이다. 주변 사람들의 생각은 거기서 거기였다.
‘공부하다가 지쳐서 그러는 거야?’
얌전한 모범생이 갑자기 아이돌 연습생이 되었다며 TV에 출연한다고 하니,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는 듯 했다.
“네가 지금 가보고 싶다는 그 업계는 복마전 같은 곳이라, 내가 쓸데없는 걱정을 했단다. 그런데 네 말을 들으니, 그래도 좀 안심이 되는구나.”
“아니요, 아니에요.”
“현덕아. 정말로, 정말로 하고 싶어서 해보는 거지?”
아버지가 물었다.
“…….”
현덕은 아버지와 눈을 마주쳤다. 아버지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현덕도 따라서 고개를 흔들었다.
“네, 정말이에요.”
“그래, 그거면 됐다. 이제 나도 알게 되었으니, 응원해주마. 후회 없이 마음껏 해보렴.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하고.”
아버지는 그리 말하고는 닫혀있던 서재 문을 활짝 열었다.
“어머나!”
문 앞에는 어머니가 서 있었다. 갑자기 문이 열리자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이야기는 다 끝났어요? 그럼 다들 얼른 나와 줬으면 좋겠는데. 곧 트라이 온이 시작될 거 같거든요.”
어머니가 손으로 TV를 가리키며 말했다.
기다렸다는 듯 익숙한 목소리가 서재 안으로까지 흘러들어왔다. 트라이 온 MC인 유진 목소리였다.
TV에선 오늘 몇 번이나 본 트라이 온 오프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트라이 온 본방송의 시작이었다.
***
현덕과 아버지, 어머니는 거실에 모여 앉았다. 어머니가 어제 재래시장에 갔다가 뻥튀기 트럭을 만나 사 왔다며 동글납작한 뻥튀기를 한 봉지 풀어 놓았다.
세 가족은 보름달 같은 뻥튀기를 하나씩 입에 물고 TV를 보았다.
MC인 유진의 내레이션이 들렸다. 처음 들을 땐 무척 낯간지러운 대사라고 생각했는데, 5화 만에 익숙해졌다. 꽤나 무덤덤하게 들을 수 있었다. 어쩌면 뻥튀기 덕분일지도 몰랐다.
현덕은 두 번째 뻥튀기를 입에 물었다.
쩌적-
딱 한 입 깨물었을 뿐인데 뻥튀기가 두 쪽으로 갈라졌다.
“헐.”
현덕은 두 손에 뻥튀기를 한 조각씩 들었다. 어쩐지 불안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분명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배웠다. 고대 중국 은나라에서는 거북이 등껍질에 상형 문자를 쓰고 불에 구워 점을 쳤다고. 갈라지는 금을 보고 신의 뜻을 해석했다고.
갑자기 뻥튀기가 거북이 등껍질처럼 느껴졌다.
‘설마 탈락한다는 계시인 걸까?’
입안이 텁텁해졌다. 현덕은 우울히 뻥튀기를 내려놓았다.
“왜 먹다 말어? 맹덕이랑 둘이 앉은 자리에서 열 봉지도 해치우면서. 형 없다고 안 먹는 거야?”
“아니요, 그냥, 입안이 텁텁해져서요.”
“당연히 텁텁하지. 물 먹으면서 먹어. 생전 뻥튀기 안 먹어본 애처럼 왜 그러니. 거기서 너 뻥튀기도 안 주던?”
어머니가 얼른 물을 따라 주며 물었다. 현덕은 물잔을 시원하게 비우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확실히 합숙할 때는 뻥튀기를 먹지 못했다. 매점에서 팔지도 않았고.
“아니, 거기는 애 뻥튀기도 안 주고 뭐 했다니. 이게 얼마나 한다고. 현덕아, 많이 먹어. 많이.”
어머니는 현덕의 앞쪽으로 뻥튀기 봉지를 끌어다 주며 현덕의 등을 쓸어주었다.
“…….”
뻥튀기 봉지 안에 가득 든 뻥튀기를 보자니, 민망스러워졌다.
‘뻥튀기를 갑골점이라고 생각하다니. 이건 민간신앙 카테고리에도 못 들어가지 않을까?’
차라리 들고 있던 물컵의 손잡이가 떨어져 물컵이 깨졌다면 모를까. 뻥튀기가 두 쪽으로 갈라진 걸 불길한 징조로 삼기엔 뻥튀기는 너무 맛있는 음식이었다.
현덕은 양손에 든 뻥튀기를 와구와구 씹어 먹고는 세 번째 뻥튀기를 꺼냈다.
때맞추어 TV에서는 MC인 방유진이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나타났다.
“어머나, 유진이구나!”
어머니는 친딸을 대하듯 환호했다.
“현덕아, 유진이 실제로 봤니? 실제로 봐도 저렇게 말도 잘하고, 예쁘고 똑 부러지니? 엄마는 트윈 트윙클 때부터 우리 유진이 팬이었는데, 아이고, 어쩜 저렇게 예쁠까. 유진이 부모님은 밥 안 먹어도 배부를 거 같아, TV에 나오는 딸만 봐도.”
“네, 완전 멋있어요. 보고 있으면 빛이 뿜뿜 나요.”
현덕은 간간이 봤던 방유진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이 나타날 때마다 그 근처에 있던 연습생들은 모두 얼음이 되었다. 그럴 때면 항상 연예인과 연예인 지망생, 그러니까 아이돌 연습생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다는 게 실감 났다.
TV 속 유진은 트라이 온의 규칙을 똑 부러진 목소리로 설명해줬다. 이어 마지막 평가 무대를 준비하는 연습생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현덕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연습생들의 모습이 TV에 비치니 손가락이 저렸다. 새삼 긴장됐다.
마지막 평가 무대를 앞두고 곡을 정하고 안무를 짜는 연습생들의 모습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 안에는 현덕도 있었다. 짧게 스쳐 지나갔지만, 노란색 티셔츠를 입고는 잔뜩 풀 죽어 앉아 있는 모습이 비쳤다.
‘진짜 본방송이구나. 지난주 모습이야.’
실감하니 팔에 닭살이 돋았다. 재방송을 볼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좋아하는 뻥튀기가 눈앞에 쌓여 있는데, 뺏어 먹는 맹덕도 없는데, 어째 손이 가질 않았다.
현덕은 눈을 깜박이지도 못하고 TV를 봤다.
트라이 온 1부는 아이돌 연습생들이 실제 어떻게 연습생 생활을 하는지 보여준다는 컨셉으로 촬영이 진행되었다. 5화는 이전에 2화, 3화, 4화가 그랬듯 컨셉에 맞춰 편집되었다.
TV 화면 속 연습생들은 이전보다 더 진지했고, 또 절실했다. 합격 안정권인 레드 기숙사의 연습생들도 마찬가지였다. 평가곡을 정할 때부터 서로 자신이 자신 있는 포지션이 돋보일 수 있는 노래를 추천하고, 좋은 파트를 차지하려고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
경쟁의 막바지. 연습생들은 같은 기숙사 내에서도 편히 있지 못했다. 바로 지난주까지 서로 도우며 우정 어린 모습을 보이던 연습생들조차 서로를 견제하는 예민한 상태를 드러냈다.
다채로운 CG와 재미난 효과음으로 귀엽게 포장하긴 했지만, 5화는 이전 회차에 없던 절박함이 기본으로 깔려 있었다. 함께 으쌰으쌰하며 화기애애하던 그린 기숙사에서 균열이 도드라졌다. 연습생들은 서로 대화도 거의 하지 않고 연습만 했다. 춤을 추다 살짝만 부딪쳐도 짜증을 냈다.
‘저런 걸 그대로 다 방송해도 되는 건가?’
실수로 제 어깨를 친 다른 연습생을 확 밀치고 연습실 밖으로 뛰어나가는 어느 연습생의 모습이 비췄다. 현덕에겐 낮선 연습생이었다. 첫 주부터 쭉 그린 기숙사였다고 했다. 연습생은 결국 화장실로 달려가 토했다. 눈과 코끝이 빨개진 채로 화장실을 나와서는 다시 연습실로 돌아가지 못하고, 복도 구석에 쭈그려서는 한참을 울었다.
연습생과 같은 팀인 다른 연습생들이 우르르 와서 그 연습생을 달래 연습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 연습생은 그 후로도 춤을 추면서 계속 울었다.
현덕은 두 달 동안 같은 곳에 머물고 있었으나 방송을 보고서야 알게 된 그 연습생의 이름을 작게 중얼거려 보았다. 이어 유진의 내레이션이 들렸다.
“이런 험악한 경쟁의 순간에서도 여전히 우정을 잃지 않는 연습생들이 있습니다.”
듣자니 어째서인지 불안해졌다.
‘설마?’
현덕은 기겁하며 몸을 뒤로 젖혔다.
“하지 마, 제발. 안 돼, 진짜 그건 아냐.”
마음속 말이 멋대로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현덕아?”
“왜 그러니.”
부모님이 깜짝 놀라 현덕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곧, TV에 나오는 현덕의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다.
TV에서 현덕이 나타났다. 주민도 있었다. 자룡도, 준비도, 피터도.
다른 연습생들이 모두 잠든 새벽. 다섯 명의 연습생들은 환하게 불 켜진 연습실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 현덕이 있었다. 현덕의 눈엔 그게 양궁 과녁 가운데의 검은 점 같아 보였다. 핵심이자 원흉. 이 모임의 구심점.
‘결성 드림팀!’이란 자막이 팡파르 효과음과 함께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이들의 모습은 조금 전까지 방송됐던 장면들과는 대조적이었다. 중요한 평가 무대를 앞두고 있으면서 다른 연습생을 돕기 위해 기꺼이 자신들의 잠자는 시간을 할애하는 우정이라니.
방금까지 화면에선 마지막 무대를 앞두고 잔뜩 날카로워진 연습생들의 모습이 잔뜩 나왔다. 이 때문에 다섯 명의 모습이 상대적으로 순수해 보였다. 청춘의 한 페이지, 그 자체였다.
‘어그로를 끌고 있어, 대놓고 어그로를 끌고 있는 거잖아.’
현덕은 이 편집 기준이 믿기질 않았다. 제작진은 연습생들을 두 편으로 가르고, 95:5로 싸우라고 내몰고 있었다.
‘뭐 하는 짓이야!’
맨날 모자를 쓰고 다니던 메인 PD가 옆에 있었다면 멱살을 붙잡고 짤짤 흔들었을 것이다. 그럴 수 없기에, 현덕은 혼이 나간 얼굴로 TV를 바라보았다.
그저 ‘저렇게 다섯 명이 모여 한 명의 부족한 춤 솜씨 레벨 업을 도와주었다.’라고만 비치고 지나가도 과한 것을. 이 다섯은 그 새벽에도 자꾸 방송 거리를 만들었다.
“기 좀 놓지? 현덕이가 싫어하잖아.”
“그쪽이야말로. 현덕이가 깰지도 모르는데, 입 좀 닫지 그래?”
주민과 피터가 은근히 말싸움을 하는데, 현덕은 그 사이에서 몸을 동그랗게 웅크리곤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현덕이 어깨 위엔 주민과 피터의 재킷 두 개가 겹겹이 덮여 있었다.
자룡과 준비는 안무 동작을 의논하면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팽팽하게 대립했다.
“꼬맹이, 제법인데?”
“좌-드님도 제법이에여? 아직 한물가진 않았네여?”
서로를 바라보며 디스를 하는 건지 인정을 하는 건지 모를 대화를 나누며 씩, 웃어 보였다.
주민이 지나가며 그런 자룡의 머리 위로 생수통을 휙 던졌다.
“윽. 야, 우주민! 너 형한테 자꾸 이럴래?”
자룡이 ‘씨-앗!’을 외쳤다. 동시에 화면에 CG가 깔렸다. 무려 애니메이션이었다. 화면 하단에 밭이 생기더니, 손가락만 한 자룡이 나타나 씨앗을 뿌렸다.
“양파머리, 머리에 물이나 뿌려. 쑥쑥 자라게.”
주민이 픽 웃으며 대꾸했다. 꺄악-하는 효과음이 뒤따랐다.
자룡의 CG 옆에 주민이 뿅- 나타났다. 주민이 손에 들고 있는 물뿌리개로 밭에 물을 주자 양파가 쑥쑥 자랐다. ‘참고로 둘은 두 살 차이. 자룡이가 형~♡’ 이따위 자막이 덤으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현덕은 그 어이없는 CG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한 시간 내내, 마지막 평가 무대를 준비하며 땀 흘리는 연습생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현덕이 보기에 새벽 연습을 하던 다섯 명의 비중이 가장 컸다. 그나마 그중에서는 현덕이 가장 덜 나왔다. 하지만 그리 좋은 건 아니었다.
현덕이 그간 주민의 새벽 연습을 돕는 중 간간이, 아니 가끔, 꾸벅꾸벅 졸았던 모습이 한 번에 묶어 나왔다.
아빠를 만날 때면 인사해 (꾸벅)
엄마를 만나서도 인사해 (꾸벅)
만나면 반갑다고 인사해 (꾸벅)
헤어질 때 또 만나요 인사해 (꾸벅)
만나면 인사해요 인사해 꾸~우벅
인사해 인사해 인사해 꾸! 벅!
유명한 동요를 굳이 노력을 들여 개사한 동요가 흘러나왔다. 그것도 모자라서 현덕이 잠이 깨 부스스 눈을 뜨고는 민망해하며 배시시 웃을 때마다 ‘꺄아’나 ‘아하’같은 소리가 BGM으로 깔렸다. 아이가 방긋 웃을 때 나는 소리였다.
‘근데 왜 나한테는 자꾸 저런 효과음을 붙이는 거야!’
듣는 현덕은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어머, 우리 아들. 얼마나 피곤하면 저러고 졸았을까.”
“차라리 눈을 좀 붙이지 그랬니.”
부모님은 안타까워하면서도 귀여워 죽겠다는 듯 감상을 말했다.
‘내가 몇 살인데, 왜 저래.’
현덕은 이를 갈며 누군지 모를 편집자를 원망했다.
항마력을 시험하는 시간이 겨우 지나갔다. 진실로 1초가 1억 년 같았다. 화면이 바뀌자 현덕은 참았던 숨을 훅- 내뱉었다. 땅이 꺼질 만큼 깊은 한숨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런 현덕을 보고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빙그레 웃었다. 현덕은 자신이 서른셋, 혹은 열여덟, 어느 쪽이든 충분히 나이 먹을 만큼 먹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부모님이 보기엔 어린애였다. TV에 나오는 현덕도, 두 달 만에 옆구리에 낀 현덕도, 귀엽기만 했다.
마지막 평가 무대가 시작됐다. 무대 위에 선 유진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카메라 앵글이 유진의 시선을 뒤쫓았다.
평가곡 컨셉에 맞춰 의상을 입고 분장한 백여 명의 연습생들이 앉아 있었다. 그 속에 현덕이 있었다. 슥- 지나쳤지만 그래도 어머니와 아버지는 용케 알아보고 ‘저기에 현덕이가 있네.’라고 콕 집었다.
“이제 마지막 무대가 시작됩니다. 두 달간 달려왔던 그 모든 노력의 결실이, 오늘 빛을 발하겠지요. 오늘 여기에 모인 연습생은 모두 백 명. 이 중에서 오직 서른 명만이 다음 무대, 트라이 온 2부에 설 자격을 얻게 됩니다.”
유진이 연습생들에게 말했다. 연습생들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내용임에도 생전 처음 듣는 사람들처럼 경청했다. 그들의 눈에 어린 절박함은 카메라를 통해 TV 밖으로까지 전달됐다.
유진이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당신의 소년이 준비한 무대가 시작됩니다. 지켜봐 주세요.”
마지막 평가 무대는 스피드하게 진행됐다. 통편집 당하는 팀은 없었다. 모든 팀의 평가 무대를 고르게, 그리고 짧게 보여주었다.
현덕은 유호와 정모, 한승과 함께 무대에 선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실수 없이 무대를 잘 끝마쳤다는 걸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새삼 가슴이 조여왔다. 현덕은 저도 모르게 두 손을 깍지 껴 움켜쥐었다.
‘이 무대 이후에 울었지. 그리고 우주민이랑…….’
생각만으로도 얼굴에 피가 몰릴 것 같았다. 현덕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어 주민과 준비, 피터의 무대가 이어졌다. 연습생들의 합숙소 퇴소를 사흘이나 늦춘 문제의 그 장면이 고스란히 방영됐다. 단 1초도 잘리지 않고.
흔한 BGM 하나 깔리지 않았다. 현덕과 연습생들이 주민의 고백을 들었던 그 순간이 TV를 통해 고스란히 재현되었다.
“현덕아, 저거 정말이야? 정말? 우시영 아들이라고? 우시영? 그 우시영?”
어머니는 추석 때 감나무를 흔들듯 현덕의 팔을 마구 흔들었다. 현덕은 맥없이 흔들렸다.
“네, 네네- 네네네.”
덕분에 대답하는 목소리가 트로트 노래처럼 구성지게 오락가락했다.
어머니는 우시영의 팬이라고 했다. 아니, 그 시대에 공장에서 근무하며 일하던 여공 중 우시영의 팬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었겠느냐마는. 우시영의 앨범이 나왔을 때 월급이 나오자마자 그걸 사러 가게로 달려갔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하셨다.
“정말 세월이 많이 흘렀구나. 그 우시영 아들이 저렇게 자랐다니……. 그때 갑자기 없어져서 어느 공장에서 일한다는 소문도 들리고, 누가 재봉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우시영 봤다는 말도 나오고 그랬는데, 아무도 안 믿었거든. 그런데 제갈그룹 부회장이랑 그런 사이였다니…….”
아련하게 추억에 젖으셨다가,
“미친 새끼. 감히 우시영을 건드려? 앞으로 시황그룹에서 나온 건 무조건 다 불매야!”
불같이 화를 냈다.
“현덕아, 컴퓨터로 조사 좀 해서 엄마한테 적어줘. 시황그룹이 만드는 물건이랑 회사 브랜드 같은 거. 앞으로 그건 다 거르고 안 살 거야. 불매!”
어머니는 금세 눈가가 촉촉해져서는 주민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저 어린 것이 무슨 마음으로 여기에 나왔을까……. 아이고, 이번에 붙기만 하렴. 아줌마가 다음부터는 무조건 너한테 투표해줄게.”
바로 옆에 한 표가 간절한 둘째 아들이 앉아 있다는 건 까맣게 잊으신 듯 했다.
“우리나라에서 중혼은 불법인데, 제갈그룹 회장씩이나 되는 공인이 그런 짓을 하다니.”
아버지는 조용히 분노하셨다.
‘우주민도 지금 TV를 보고 있으려나? 시황그룹 회장이라는 그 할아버지랑 같이?’
현덕은 주민을 생각했다.
‘괜찮을까? 잘 지내고 있겠지?’
걱정이 들었다. 보고 싶었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현덕은 긴 숨에 그리움을 흘려보냈다.
마지막 무대는 레드 기숙사의 무대였다. 자룡은 메인 파트를 차지하지 못했지만 원소혁 못지않게 존재감을 뽐냈다.
그렇게 모든 평가 무대가 끝났다.
조용한 회의실로 장면이 바뀌었다. 심사위원 선생님들이 원탁 테이블에 빙- 둘러앉았다.
“제발.”
어머니가 두 손을 모아 쥐며 간절히 말했다.
“음.”
아버지도 입술을 굳게 닫고는 TV를 뚫을 듯 노려보았다.
유진은 한 뭉치의 카드를 손에 쥐고 있었다. 연습생들의 사진 카드였다. 마지막 평가 무대 때 소속됐던 기숙사의 색깔로 테두리가 칠해져 있었다.
유진이 한 장씩 카드를 던질 때마다 선생님들은 그에 대해 가벼운 품평을 늘어놓았다. 부정적인 평가도 있었고 긍정적인 평가도 있었다. 최종 등급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현덕의 카드가 테이블에 놓였다.
“성실하고 꾸준해. 중간에 삐끗하긴 했지만 청춘 영화 찍느라 그랬던 거고. 근데 제 앞가림도 못 하면서 남부터 챙기다니, 오지랖이 너무 넓어. 우린 아이돌 그룹 멤버를 뽑는 거지, 봉사대상 수상자를 뽑는 게 아니잖아?”
“춤도 그럭저럭, 노래도 그럭저럭. 비주얼은 청순한 타입. 성격은 남을 잘 챙기는 거 같고. 아이돌 그룹에 이런 애가 한 명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나?”
“제너럴하게 잘하는데 스페셜한 게 없어. 아직 드러나지 않은 건지, 아니면 없는 건지. 그게 아리송해.”
“난 얘 노래가 좋아. 목소리가 맑아서 좋아. 아직 깨끗하고 나쁜 버릇도 없어서, 잘만 다듬으면 포텐 터질 거 같던데?”
“무조건 반대. 뭔가 반짝반짝한 게 없어. 우주민이랑 정반대야. 걘 끔찍한 단점이 있지만 그에 대비되는 끝내주는 목소리가 있잖아. 연예인은 그래야 돼. 끔찍한 단점과 황홀한 장점이 같이 있어야 된다고. 그게 끼고, 존재감이야. 그런데 얘는 그런 게 없어.”
“나는 보류. 판단할 건덕지를 안 보여줬어요.”
평가만으로는 합격인지 불합격인지 알 수 없었다.
바로 다음이 자룡의 카드였다. 기숙사 순이 아니라 뒤죽박죽 섞인 듯했다. 선생님들 전원은 자룡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주었다.
“이 정도 되는 애가 여길 왜 나온 거야? 얜 일종의 치트키야. 반칙패로 탈락시키는 게 아닌 이상 얘는 절대 떨어지면 안 돼.”
한 선생님의 평가에 모든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뒤 주민의 카드가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하아.”
“음음.”
“얘는 진짜 어쩌면 좋니.”
탄식이 터져 나왔다.
자신감과 노래는 좋다는 평과 이 정도로 춤을 못 추는데 아이돌을 할 수 있겠냐는 우려. 그래도 그나마 나아지지 않았냐는 긍정. 평가가 엇갈렸다. 선생님들은 주민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것 같았다.
이마저도 100명 연습생 모두의 평가가 나오지는 않았다. 빠른 속도로 편집한다 해도 방송 시간에 한계가 있었으니, 평가가 나온 연습생은 많아봤자 삼십 명 정도였다.
‘그럼 평가를 받은 사람들은 다 합격인 걸까? 아니야, 그런 걸로 판단할 수는 없어. 모를 일이잖아.’
화면이 바뀔 때마다 생각이 오락가락했다. ‘합격일까?’ ‘불합격이면 어떡하지?’ 번지점프 줄에 매달려 천국과 지옥을 오락가락하는 느낌이었다.
현덕은 자신이 과하게 흥분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온몸이 심장이 된 것처럼 쿵쾅쿵쾅 몸이 떨렸다.
“자, 그럼. 모든 평가가 마무리됐지요?”
테이블 위에 수북이 쌓인 연습생들의 사진 카드. 유진의 말에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선생님들.
그 장면이 천천히 흐려지며, 유진의 차분한 목소리가 내레이션으로 흘러나왔다.
“꿈을 향해 달리는 소년들. 그들을 가장 빛나는 별로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 트라이 온 1부가 끝났습니다. 연습생들은 땀과 눈물을 흘리며 여기에 섰습니다.”
화면에는 호텔에 가서 첫날 찍었던 단체 사진이 나타났다. 연습생들은 기숙사별로 색깔 티셔츠를 입고 어색하게 서 있었다.
“이들 중 단 서른 명만이 넥스트 스테이지로 나아갈 기회를 잡을 수 있습니다. 과연 누가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요. 지금, 공개합니다.”
유진의 내레이션이 끝나고 화면이 파스텔 톤의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다섯 가지 색깔이 무지개처럼 흐르는 화면이 떴다.
현덕은 물론 어머니와 아버지도 모두 숨을 멈췄다.
연습생들의 이름 카드가 이름순으로 떴다. 그 활짝 웃는 사진 밑에 합격인지 불합격인지가 떴다.
강 씨부터 시작이었다. 금방 김 씨가 돌아왔다. 이름 석 자 중 두 번째가 ㅅ으로 시작하는 어느 연습생이 불합격을 받았다.
‘떨어지면 어떡하지?’
어머니에게, 학교의 담임선생님에게 장담했다. 트라이 온 촬영이 마침표라고. 후회 없이 마무리 짓고 싶다고. 그렇게 말한 게 불과 몇 달 전이건만. 자신 있게 내민 수표는 부도 수표가 되었다.
‘떨어지기 싫어. 합격하고 싶어.’
좀 더, 좀 더 해보고 싶었다. 네 번째 평가 무대가 끝난 후 현덕은 바닥에 엎드려 울었다. 그때의 감정이 다시 손끝을 적셨다.
드디어, 현덕의 차례였다.
현덕의 사진이 화면에 떴다. 트라이 온 촬영 들어가기 전, TE엔터테인먼트에서 찍은 프로필 사진이었다.
입꼬리를 위로 올려 살짝 웃는 현덕의 사진 아래에,
합격
두 글자가 떴다.
“만세! 만만세!”
아버지가 괴성을 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아……버지?”
현덕은 잠시 합격의 기쁨을 잊고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축구 한일전에서 선제골을 넣었을 때도, 현덕이 사법고시 합격하고 집에 전화했을 때에도, 아버지는 언제나 차분했다. 그런 아버지가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기세로 기뻐했다.
‘오늘, 처음 보는 아버지의 모습이 많네.’
현덕은 고개를 돌려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두 손으로 입을 막고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눈가에 물기가 맺혀 있었다.
‘아, 나 진짜 합격했구나.’
아버지 때문에 잃어버렸던 현실감을 되돌아왔다.
“으! 됐어!”
현덕은 이를 꽉 깨물고, 두 주먹을 꼭 쥐었다.
사법고시에 합격했을 때보다 더 감격스러웠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도 믿기지 않지만, 정말 그랬다.
‘다른 형들은?’
현덕은 얼른 눈을 크게 뜨고 다시 TV를 보았다. 어느새 민씨 성을 가진 연습생이 불합격했다.
다음은 박자룡이었다.
“합격이지!”
현덕은 사진 밑에 합격, 불합격이 뜨기도 전에 외쳤다. 자신의 합격은 장담하지 못했으면서 자룡의 합격은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현덕이 믿음처럼 자룡은 합격이었다. 이어 우주민, 피터 윤, 장준비 모두 합격이었다. 그 외에도 얼굴과 이름이 익숙한 여러 연습생이 합격했다.
“다시 한번 합격한 연습생들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유진의 내레이션과 함께 합격한 연습생들이 열 명씩 한 화면에 떴다. 현덕은 첫 화면에 있었다.
합격.
분명히 합격이었다.
“김현덕은 합격이야!”
아버지는 여전히 벌떡 일어선 채로, 판결을 선고하듯 단단한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얼른 자리에 앉아요. 정신 사납게 뭐 하는 거예요. 당연히 합격이죠, 설마 우리 현덕이가 떨어지기라도 할까 봐요?”
어머니는 애써 차분한 척 하면서 아버지를 구박했다.
다시 유진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왔다.
“시청자 여러분. 소년 프로젝트, 트라이 온에 많은 사랑을 보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희 트라이 온 제작진은 연습생들의 데뷔를 향한 절실한 열정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또한 연습생들을 응원해주시는 시청자 여러분의 관심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때문에 좀 더 공정성을 기하고, 연습생들에게는 그간의 여정에서 쌓아온 피로를 풀고 남은 여정을 준비하기 위한 시간을 좀 더 주려고 합니다. 그래서 다음 주는 합격자 서른 명에 대한 특별 미공개 영상을 방영할 예정입니다.”
긴 내레이션이 어쩐지 변명같이 들렸다.
‘윤우희 선배님 일 때문이 아닐까. 그 외에도 트윈 트윙클 방송 중에 계속 공정성 논란이 일었다고 했으니까……. 이번엔 그런 걸 막으려고 노력한 거겠지.’
이해를 돕기 위해서인지 유진의 내레이션이 자막으로도 떴다.
“트라이 온 2부는 백 퍼센트, 시청자 여러분의 투표로 연습생들의 탈락이 결정됩니다. 연습생들은 세 팀으로 나뉘어 2주 동안 미션과 평가 무대를 선보이고, 이들의 무대는 시청자 투표를 통해 평가받습니다. 최고의 평가를 받은 팀에게는 보상이 있고, 가장 낮은 평가를 받은 팀에서는 투표수에 따라 세 명의 연습생이 탈락하게 됩니다.”
TV 화면에는 초등학생 1학년 수학 교과서에 나오는 것처럼 그림이 떴다.
“2주 뒤 트라이 온 2부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다음 주에 탈락자 세 명이 결정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막 합격의 기쁨을 맛본 이들이 처음으로 맞닥뜨려야 하는 과제는 무엇일까요? 지금, 시청자 여러분들의 선택이 필요합니다.”
갑자기 TV 화면이 밝아지며 한 무리의 안무 팀이 나타났다. 서로의 어깨가 닿을 만큼 가까이 모여서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첫 번째 데뷔곡 후보입니다. 제목은 촉! 촉! 촉!”
유진의 안내가 끝나자 안무 팀이 일제히 고개를 쳐들었다. 동시에 오른손을 들었다.
오른 손에는 작은 캐스터네츠가 매달려 있었다.
묵직한 반주가 흘러나오고,
촉!
촉!
촉!
안무가들은 박자에 맞춰 오른손을 접었다 폈다. 캐스터네츠 소리가 났다.
묵직한 반주는 놀라울 정도로 귀여운 음색으로 이어졌다. 덩치 큰 안무가들은 마치 요가라도 하듯 유연하게 몸을 움직이며, 앙증맞은 안무를 선보였다.
모두가 한 몸처럼 움직이는 칼 군무 속에, 절도 있게 들리는 촉! 촉! 촉! 캐스터네츠 소리. 일명 ‘딱딱이 안무’가 포인트였다.
키스 아닌 뽀뽀, 간지러운 스킨십 같은 느낌의 곡이었다. 첫사랑에 빠진 소년이 설레고 부끄러운 마음을 표현하는 가사는 상큼했다. 곡 중반의 하이라이트 부분은 좋아한다고 말한 뒤 뒤돌아서서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을 표현했다.
두 번째 데뷔곡 후보의 제목은 ‘We are, I was…….’였다.
“나는 우리가 헤어질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 함께했던 우리의 과거 내내 나는 오늘을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첫음절 가사는 이렇게 시작했다.
이별의 슬픔을 독백하는 곡이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음에 맞춰 잔잔하게 깔리는 랩이 곡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안무는 첫 번째 곡보다 훨씬 어려웠다. 팬터마임, 혹은 현대 무용을 보는 것 같았다. 절도 있게 꺾이면서도 물 흐르듯 이어지는 춤은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세 번째 데뷔곡은 ‘OH MY!’였다.
쾅! 쾅! 쾅! 심장 소리를 닮은 빠른 비트가 시작부터 달려들었다. 헤비메탈 풍의 음색이었다.
연달아 두 곡의 안무를 선보인 안무팀은 지친 기색도 없이 세 번째 곡의 안무를 췄다. 강렬한 음색만큼 안무가 격했다. 파워풀하고 거칠었다.
“아무것도 날 막지 못해, 다 부숴버리겠어. 날 따라와. 모든 건 내가 결정해!”
보컬 파트의 높은 음색에 맞춰 안무가들이 높이 점프하고, 몸을 뒤집었다.
현덕은 데뷔곡 후보라는 세 노래와 안무를 단 1초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눈을 깜박이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잘 보셨나요? 이 세 노래 중 하나가 트라이 온을 통해 데뷔하는 아이돌 그룹의 데뷔곡이 됩니다. 바로 트라이 온 2부 첫 평가 무대에서 우승하는 팀의 노래가 말입니다.”
이어 첫 미션 우승팀이 누릴 보상이 소개됐다. 우승한 곡으로 케이블 방송국의 음악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된다고 했다.
트라이 온 2부는 결국 인지도 싸움이었다. 좀 더 대중에게 많이 드러나고, 대중의 투표를 많이 받는 연습생이 탈락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첫 미션에서 우승하여 공식 무대에 서는 건 큰 도움이 될 터였다.
“트라이 온 2부는 모든 것이 시청자 투표로 결정됩니다. 그 말은 곧, 트라이 온 2부의 데뷔조 구성 또한 시청자 여러분의 선택으로 이루어진다는 의미겠지요?”
TV 화면에 투표 방법과 조금 전 보여주었던 세 데뷔곡 타이틀이 떴다.
“시청자 여러분, 당신이 응원하는 소년에게 어떤 데뷔곡이 어울릴지 선택해 투표해주세요. 여러분의 투표에 따라 연습생들의 미션 데뷔곡과 데뷔조 구성이 결정됩니다. 기한은 다음 주 방송이 끝날 때까지입니다.”
잠시 숨을 고른 유진이 좀 더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일주일, 시간은 충분하겠지요? 아직 마음을 못 정하셨다면 다음 주 방송을 기다려주세요. 후회 없는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방송이 끝났다. 그제야 현덕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온몸이 뻐근했다. 잔뜩 힘을 주고 두 시간 내내 같은 자세로 앉아 있어서 그런 듯했다.
현덕은 뻐근한 어깨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방송이 끝남과 동시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핸드폰은 불이 났다. 전화 통화를 하기에 늦은 시간이었지만 부모님은 싱글벙글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그래, 봤다고? 잘했어. 이런 건 꼭 본방송을 봐야지. 그래, 맞아. 우리 현덕이가 합격했어. 당연한 거라 우리 집은 그냥 조용했지. 그래, 맞아. 응원해주는 거 내가 항상 알고 있지. 다음부터는 투표도 해줘야 하는 거 알지?”
어머니의 목소리가 소프라노처럼 높아졌다.
“음, 우리 둘째가 맞네. 그래, 내 아들 맞아. 그래, 맞다니까. 몇 번을 물어보는 거야. 내 아들이라고.”
아버지 또한 TV에 나오는 현덕이가 아버지의 둘째 아들 현덕이라는 걸 확인해주느라 바빴다.
아버지, 어머니의 입가엔 웃음이 가득했다. 멍하니 부모님을 지켜보던 현덕은 문득, 자신의 손이 비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주변을 둘러보며 자신의 핸드폰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아!”
합숙소에서 나올 때 핸드폰을 돌려받아서는 전원을 켜지도 않은 채 가방 속에 쑤셔 넣었던 게 생각났다. 두 달 동안 핸드폰 없이 살아서 그런지, 핸드폰을 너무 쉽게 잊고 있었다.
현덕은 후다닥 방으로 달려갔다.
“현덕아? 왜 그러니?”
“형들한테 연락해보려고요. 잠시만요!”
문 옆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가방을 열어 핸드폰을 찾았다. 현덕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핸드폰을 켰다.
전원을 켜가 무섭게 수백 통의 부재중 통화와 문자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파바박. 정말 ‘파바박’이라는 표현이 맞았다. 핸드폰이 과부하 걸려 터지지 않을지 걱정될 정도였다.
두 달간 방송을 본 주변 사람들이 연락을 해왔다. 초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을 뿐, 이름도 잘 기억 안 나는 친구들까지 연락을 했다. TE엔터테인먼트와 오 팀장의 핸드폰 번호도 찍혀 있었다. 문자와 카톡도 여러 통이 와 있었다.
연락은 실시간으로 계속되었다. 방금 본방송을 본 사람들의 합격 축하 연락이 파도처럼 날아들었다.
현덕은 전화가 오기 전, 먼저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가기도 전에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현덕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흥분에 휩싸인 목소리가 귀를 얼얼하게 만들었다.
[현덕이구나, 방금 방송 봤어? 봤지? 씨-앗!]
자룡이었다.
“네, 형. 저기-”
[내가 말했잖아, 우리 다 안 떨어질 거라고!]
“으악,”
현덕은 얼른 핸드폰을 귀에서 멀리 떨어뜨렸다. 자룡의 목소리가 핸드폰을 뚫고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이것저것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막상 통화를 하니 말문이 막혔다. 현덕은 자룡의 기쁨에 휩쓸려, 그저 계속 웃었다.
[내가 해낸다고 했지.]
“형은 당연히 합격일 줄 알았어요.”
[너랑 그 싸가지도 마찬가지야, 씨앗. 솔직히 싸가지는 될 줄 알았는데, 그래도 약간 불안하긴 했어. 춤이 워낙 독보적이어서 말야.]
“저는요?”
[넌 당연히 합격이지. 무조건! 무조건! 존나 기분 좋아!]
당연히 합격할 줄 알았다면서, 자룡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전화 너머에서 자룡의 가족 목소리가 들렸다. 현덕의 집과 비슷한 분위기인 듯했다.
“풍악을 울려라!”
“소 한 마리 잡자! 다 오라 그래, 내가 쏜다아아!”
자룡만큼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현덕은 자룡과 삼십 분 정도 통화를 했다. 통화의 내용 대부분이 웃음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니 목이 아팠다. 너무 웃었는지 입가가 부르르 떨리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현덕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괜히 전화번호 목록을 오르락내리락하며, 핸드폰에 입력되지 않은 번호를 찾아 헤맸다. 그러다 맥이 빠져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현덕의 핸드폰에는 지금 현덕이 가장 전화해보고 싶은 사람의 번호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름하고 나이 말고 아는 게 있었나?’
벌써 알고 지낸 지 2년, 아니 3년이 다 되어가는데 전화번호를 몰랐다. 그 외에도 아는 게 거의 없었다.
그런 집안 사정이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입을 맞추고, 밤새 함께 있었다. 그 다음 날 아침엔 어땠던가. 주민은 아무렇지 않게 또 그런 걸 하고 싶다고 귀에 속삭였다.
“으악!”
현덕은 핸드폰을 집어 던지듯 내려놓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주민을 생각하기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머리를 마구 흔들었지만, 그런다고 주민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자꾸만 생각이 났다.
주민의 목소리, 입술에 와 닿았던 그 마른 감촉, 입술이 열리고 서로의 숨이 섞일 때의 그 달짝지근한 질척임. 그딴 것들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주민은 현덕의 숨을 모두 빼앗아버릴 듯 달려들었었다. 집요하게 따라붙고, 숨이 막힌다고 주먹으로 퍽퍽 때려도 쉽게 밀려나지 않았다.
그렇게 계속, 계속…….
“아, 씨!”
현덕은 슬그머니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제 몸을 느끼고는 기겁했다. 애써, 애써 다른 쪽으로 생각을 돌리려 필사적으로 애를 썼다.
‘자룡이 형이, 그러니까 자룡이 형이, 자룡 형이…….’
조금 전 자룡과의 전화 통화를 떠올리며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엄청 보고 싶네.”
속마음이 툭, 튀어나왔다. 무심코.
“으아아악!”
현덕은 주먹으로 침대를 팡팡 내리치며, 좌우로 데굴데굴 굴렀다.
“현덕이가 부끄러운가 봐요.”
“나와서 그러지, 가족끼리 뭐 부끄럽다고 방 안에서 저러는 건지. 원, 녀석도.”
부모님은 현덕의 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도 그러려니 했다. 덕분에 현덕은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마음껏 이불을 뻥뻥 찼다. 한참 이불에 발길질하던 현덕은 체력이 바닥나자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축 늘어졌다.
“으으…….”
베개에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이렇게 몸을 마구 괴롭혀도 마음은 주민을 지우지 않았다.
자꾸 주민이 생각났다. 궁금했다. 지금 뭘 하고 있을지, 왜 핸드폰 번호를 안 물어보고 헤어졌는지, 회사에 가면 만날 수 있는 건지, 지금 TV를 보고 좋아하고 있을지. 생각은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졌다.
‘우주민은 날 이만큼 생각하고 있을까?’
우주민이 귓가에 속삭이던 목소리를 떠올리기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날 밤, 입을 맞췄던 것만 생각하면 심장이 폭발할 것 같았다.
우주민을 생각만 해도 손끝이 저렸다. 그 감각이 금방 온몸으로 퍼졌다.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이런 기분을 우주민이 김현덕에게 주었다.
김현덕을 이렇게 만든 우주민은 지금, 김현덕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고,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억울해지기도 했다. 그 찝찝함의 불똥은 다른 쪽으로 튀었다.
‘이 자식, 엄청 익숙한 거 같았어.’
주민은 스킨십을 잘 알지 못하는 현덕이 느끼기에도 매우 익숙해 보였다. 모든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고, 현덕은 어- 하는 사이에 주민의 페이스에 말려들었다.
‘난 처음이었는데. 뭐야, 스무 살밖에 안 된 자식이, 왜 그렇게 잘한 거야?’
현덕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서른셋, 그리고 다시 열여섯이 되어 이제는 열여덟.
서른다섯 해를 살아온 현덕은 며칠 전 주민과 했던 게 처음이었다. 어찌어찌 살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중고등학교 때는 한창 공부할 때니 다른 건 생각하지 말라는 선생님과 부모님 말씀을 듣고 열심히 공부만 했다. 대학교에 가서는 사법고시를 준비하느라 바빴다. 캠퍼스 커플이나 연애에 아주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영 인연이 닿지 않았다. 과 동기이자 대화가 잘 통했던 수연과 친했으나 수연 쪽에서 현덕이 공부에 방해된다고 뿌리쳤다.
몇 번, 소개팅을 한 적은 있었다. 만들어진 자리는 부담스럽고 어색하여 거절했지만. 가끔 소개팅에서 만난 사람과 연애를 하며 행복해 죽는 친구들을 보면 슬며시 마음이 동했다.
그런데 애써 현덕이 용기를 내면, 어째서인지 번번이 소개팅이 무산됐다.
‘으, 우리 과 애들 무서워서 어디 너한테 소개팅해줄 수 있겠냐?’
‘우리 학교 애들 너무 극성이야, 너 타대로 유출하면 사살이란다.’
친구들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며 도망갔다. 그런 말을 하는 친구치고 다음번에 또 소개팅을 권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현덕은 일찌감치 연애와 담을 쌓을 수 있었다.
‘아, 역시 난 공부만이 살 길이구나.’
10분 더 공부하면 배우자 얼굴이 바뀐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급훈이었다. 현덕은 그 급훈을 자신의 인생에 적용해 보았다. ‘그나마 사법시험이라도 합격해야지 배우자가 생길 수 있다.’ 그러한 마음으로 집과 도서관을 오가며, 또 고시촌에 들어가 사법고시를 준비했다.
연애를 못 해봤으니 이성과의 스킨십 경험도 제로였다. 이성과 할 법한 스킨십을 동성과 하게 될 거라는 건 생각조차 해본 적 없고.
군대에서 비누를 주워 달라는 농담을 들을 때도 그저 농담으로 흘려 넘겼다. 동성결혼이 합법화되었다는 해외토픽을 들어도 그저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그런 걸 주민이랑 했다. 그것만으로도 믿기지 않고 민망하건만. 그 모든 게 처음이라 낯설고 서툰 자신과 달리, 주민은 너무도 익숙하고 능숙했다. 현덕은 그게 신경 쓰였다.
‘엄청 바람둥이에 카사노바였던 건가? 하긴 그 얼굴에 사귀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긴 하지만…….’
삼십 년 이상을 살아온 자신은 서툴고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고작 스무 살짜리가 아주 능숙하게 리드하다니.
현덕은 주민의 핸드폰 번호가 저장되지 않은 핸드폰을 노려보았다. 그런다고 주민에게 연락이 오지도 않았고, 주민에게 연락할 수도 없었만.
“짜증 나네.”
현덕은 괜히 핸드폰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기쁨이 그리움이 되고, 그리움이 짜증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 모든 건 옆에 우주민이 없기 때문이었다. 결국 다 우주민 탓이었다. 무조건 우주민 탓이었다.
“보고 싶다고.”
현덕은 소심하게 핸드폰에게 고백했다. 에휴. 한숨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