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반칙이 아닌 이유
첫 촬영이 끝나고 이틀 뒤.
트라이 온 출연자들은 서울 외곽에 위치한 호텔 앞에 모였다. 케이블 채널과 같은 계열사에서 세운 곳으로, 앞으로 두 달여간 합숙을 하며 촬영할 장소였다.
촬영지는 스키장과 호텔이 붙어 있었다. 올해 10월 정식 오픈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때쯤이면 프로그램이 종영된 이후였다. 프로그램을 통해 호텔을 홍보하겠다는 노림수였다.
트라이 온 촬영을 위해 오픈 일자를 미룬 것일 뿐. 호텔과 스키장은 완공 상태였다. 특히나 스키장은 시범 운영을 위해 하얀 눈을 뿌려대고 있었다. 호텔의 정문 앞에 모인 연습생들은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촬영하고 남은 시간에 스키나 보드를 탈 수 있을까? 자유 시간에.”
하얀 눈을 본 자룡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움직이는 리프트를 애절한 눈으로 바라보며 두 손을 모아 기도까지 했다.
‘제발 탈 수 있다고 말해주세요.’
지금 이 순간 자룡의 신은 프로그램의 메인 PD였다.
“아마 일부러라도 그런 시간을 만들어 주지 않을까요? 여길 홍보하려면 저희가 노는 모습을 찍어 내보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잖아요.”
자룡의 옆에 서 있던 현덕은 별 감흥 없이 대답했다.
“그렇겠지? 으아, 나 보드 배워보고 싶었거든!”
집, 회사 연습실만 오가는 생활을 하다 보니 스키장을 와 볼 기회가 없었다. 이번 기회에 보드를 타 보고 싶다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형은 맨날 축구, 농구만 해서 공으로 하는 구기 종목만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 아니었네요?”
“운동은 다 좋아! 회사에서 할 수 있는 게 축구 농구니까 그거만 한 거지.”
자룡은 회사에서 연습하다가 곧잘 다른 연습생들과 조인하여 공놀이를 했다. 회사 후문 쪽 공터엔 미니 축구 골대와 농구 골대가 세워져 있었는데, 자룡은 연습실에 없으면 대개 거기 가 있었다.
현덕은 함께 공놀이하자는 자룡에게 잡혀 종종 회사 후문으로 끌려갔다. 하지만 공을 잡은 적은 거의 없었다. 연습생들의 공놀이는 대개 아이스크림 사기, 컵라면 사기 등 사행성을 띠기 마련인지라. 운동에 재능 없는 현덕은 만년 벤치 선수였다.
현덕은 편안하게 앉아 연습생들의 공놀이를 구경하는 자신의 포지션을 즐겼다. 만년 벤치 신세인 연습생들이 두셋은 더 있었기에, 그들과 함께 구경하며 통성명을 하고 친해질 수도 있었다.
자룡과 대화를 나누며 현덕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촬영 카메라 십수 대가 연습생들을 찍고 있었다.
이제부터 촬영은 ‘컷’이라거나 ‘잠깐’, ‘다시’라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 쭉 이어지는 방식이었다. 연습생 중 상당수는 어색해하며 쉽게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팔다리를 뻣뻣하게 놀리며 로봇 연기를 선보이는 연습생도 있었다.
그들과 달리 자룡은 자연스러웠다. 평소처럼 행동할 수 있었다. 그런 자룡의 옆에 있으니 현덕도 별다른 긴장 없이 평소처럼 자룡을 대할 수 있었다.
‘이게 자드래곤의 위엄이구나.’
현덕은 내심 감탄하며, 지금 당장이라도 스키장으로 들려가고 싶어 하는 자룡의 재킷을 꽉 잡았다.
“진정해요, 형.”
“아, 진짜. 빨리 가서 보드 타고 싶어.”
자룡의 마음은 이미, 눈발을 헤치며 보드를 타고 있었다. 자룡과 달리 순백의 스키장을 바라보는 현덕의 눈은 무덤덤했다.
현덕은 신발 아래에 뭐가 달리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스케이트, 스키는 물론 롤러스케이트까지. 현덕은 발밑이 불안정해지는 모든 신발과 모든 운동과 친하지 않았다.
맹덕을 따라 스케이트장에 갔다가 두 시간 내내 엉덩방아만 오백 번 넘게 찧은 이후, 현덕의 인생에서 스케이트란 존재하지 않게 됐다.
“현덕아, 넌 안 좋냐? 봐봐,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눈 위에서 스키를 탈 수 있을지도 몰라. 혹시 스키나 보드 탈 줄 몰라? 내가 가르쳐줄까?”
“형도 아직 탈 줄 모르잖아요.”
“난 하루 이틀만 날 잡고 계속 구르면 그다음부터는 잘 탈 자신 있어.”
“우와, 한 달 타시면 국가대표도 될 수 있겠네요. 우리나라는 훌륭한 래퍼를 얻은 대신 훌륭한 보드 국가대표를 한 명 잃은 거네요.”
현덕이 영혼 없이 감탄하니,
“훗, 그렇지.”
자룡은 오만한 척 웃어 보였다.
“이게 바로 우주민식 스마일이지.”
자룡의 부연 설명에 현덕은 빵 터져버렸다.
“형!”
등 뒤에서 미성이 들리며, 누군가 현덕을 와락 껴안았다.
“어, 준비야. 안녕.”
현덕은 자신의 등에 매달린 준비에게 인사를 건넸다.
“JD 님. 헬로우! 씨발점은 감동이었어여.”
준비는 현덕에게 업힌 모양새로 자룡에게 고개를 까닥였다.
“네가 그 준비구나. 장준비 연습생. 뭘 좀 아네. 안 그래도 현덕이가 칭찬 많이 하더라.”
자룡은 스스럼없이 손을 뻗어 준비의 포슬포슬한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었다.
“오렌지 기숙사에 있는 동안 현덕이 좀 잘 부탁한다. 얘가 연습생 생활 한지는 몇 년 됐는데, 그래도 이쪽 세계를 잘 몰라. 네가 좀 잘 챙겨줘.”
“그럼여. 오렌지 기숙사에선 나랑 현덕이 형이 젤 친하거든여.”
준비는 뭐가 그리 좋은지 히히 웃었다.
“자룡 형. 부탁해야 할 내용과 상대가 거꾸로인 거 같은데요? 나한테 준비를 부탁하는 게 맞는 거 아닌가요?”
“아닌데. 나 제대로 부탁한 거 맞는데?”
“저 현덕 형 완전 좋아여, 맡겨만 두세여.”
“그래? 장준비 연습생, 그거참 마음에 드는 소리네.”
“저도 JD 님이 조금 마음에 들려고 할 거 같아여.”
“말 편하게 해. 형이라고 불러. 현덕이 동생이면 내 동생이기도 하니까.”
“응. 자드 형. 알았어여.”
현덕은 미간을 찌푸리고 둘을 봤다.
오늘에야 처음 통성명을 한 것 같은데. 둘은 십 년 만에 만난 소꿉친구처럼 죽이 잘 맞았다.
크흠, 옆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돌아 보니 넓은 어깨가 보였다. 주민이었다. 여전히 반짝반짝 했다.
“잘 쉬었어요?”
현덕은 그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주민은 현덕이 해석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좋은 건지 싫은 건지, 반가운 건지 귀찮아하는 건지 헷갈렸다.
“어떠-”
주민이 무언가 말하려 입을 뗄 때였다.
“현덕 군?”
누군가가 주민에게서 현덕의 시선을 빼앗아 갔다.
“아, 안녕하세요.”
현덕이 주민에게서 등을 돌리고 다른 사람에게 손을 흔들었다. 졸지에 주민과 맞닥뜨리게 된 준비는 주민에게 메롱- 혀를 내밀었다.
피터는 쥐색 롱코트를 입고 있었다. 손에 끼고 있던 가죽 장갑을 벗으며 여유롭게 걸어오는 모습은 런웨이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피터가 현덕에게 손을 내밀었다. 현덕은 피터와 악수를 하며 웃었다. 그 모습을 보는 주민의 얼굴은 이보다 더 기분 나빠 보일 수 없을 정도로 구겨졌다.
현덕의 등 뒤엔 준비가 붙어 있고, 현덕의 손은 피터에게 잡혀 있다. 현덕의 옆에 서 있을 뿐인 주민에겐 매우 마음에 안 드는 광경이었다.
‘어디서 고드름 깨지는 소리가?’
현덕은 으드득 소리를 쫓아 고개를 들었다. 그 잘생긴 얼굴을 아까운 줄 모르고 구기고 있는 주민이 보였다.
주민의 표정은 누가 보더라도 빈정 상한 표정이었다.
‘뭐 하는 거야.’
현덕은 피터와 악수하던 손을 풀고 대뜸 주민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댔다. 현덕의 손가락이 주민의 이마에 닿았다. 주민은 움찔, 했지만 뒤로 물러서지는 않았다.
“형, 저혈압이라 아침엔 기분이 안 좋겠지만 그래도 아침부터 슬픈 얼굴을 하고 있으면 안 되지요.”
현덕은 스스로에게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나 의외로 순발력이 뛰어난가 봐.’
그 잠깐 새 저혈압을 생각해 내다니. 현덕은 자기 자신이 무척 기특했다.
“슬픈? 누가? 우주민이? 우주민이 슬플 줄도 알……읍!”
자룡이 초를 치려 했다. 현덕은 얼른 반대쪽 손을 들어 자룡의 입을 막아버렸다.
‘아까 카메라 앞에서 자연스러운 게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거 취소.’
긴장을 안 하는 줄 알았더니, 아예 촬영 중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것이었다.
“주민 형, 많이 피곤해요? 아직도 많이 졸려요?”
현덕은 하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주민에게 말을 걸었다. 교과서를 소리 내어 읽듯 딱딱한 목소리였다.
“어떻게 알았어?”
주민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약간 충격을 받은 듯했다. 덕분에 미간의 주름이 풀렸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태도였다.
“읍읍!”
자룡은 현덕의 손에 입이 막힌 채로 계속 뭔가를 말하고 있었고,
“내가 저혈압인 줄 어떻게 알았냐고.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하는 것도.”
주민은 지금 상황에 조금도 도움이 안 되는 고백을 하고 있었다.
‘진짜 저혈압이었어? 그 성격에 어떻게 혈압이 낮을 수 있지?’
현덕은 의외의 진실에 놀랐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다.
‘이 두 형들 뭐 하고 있는 거야. 그동안 회사에서 연습한 거랑 오 팀장님이 신신당부한 거, 다 까먹었어!’
주변엔 촬영 카메라의 렌즈가 번쩍이고 있었다. 도움이 안 되는 두 형은 제멋대로 굴고 있었다. 준비는 현덕의 등 뒤에 매달린 채 끅끅대며 웃고 있었다.
현덕은 한 손으로 자룡의 입을 막고, 다른 한 손은 주민의 미간을 찍은 채 오도 가도 못 하는 상황이 되었다.
문득,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배운 이육사 시인의 ‘광야’라는 시가 생각났다. 드넓은 광야에 홀로 두 팔을 벌리고 서서, 오지도 않을 초인을 기다리고 서 있는 이 기분이란.
“같은 기획사 형들이랑 많이 친한가 보네.”
기대도 안한 도움의 손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타났다. 피터가 현덕의 양어깨를 붙잡아 당겼다. 서글서글하게 웃고 있는 것과 달리 힘이 꽤 셌다.
“윽!”
현덕은 맥없이 피터 쪽으로 끌려갔다.
“푸하!”
자룡은 현덕에게서 풀려나 입술의 자유를 얻었다.
“…….”
미간의 자유를 얻은 주민은 다급히 현덕의 손목을 잡아채려 했으나 반 박자 늦었다.
“이제는 우리랑 친해야지.”
피터가 현덕에게 어깨동무하며 찡긋, 윙크했다.
“맞아, 맞아. 레드랑 블루는 훠이훠이- 이제 안녕이라고여. 이젠 우리가 한 팀이니까.”
준비가 잽싸게 주민과 현덕 사이로 끼어들었다.
현덕을 가운데 두고 준비와 피터가 양옆에 선 모양새가 되었다.
현덕을 빼앗긴 자룡과 주민은 허전함에 입매가 굳었다. 둘 사이 빈자리에는 시베리아 한파가 몰아쳤다.
“무슨 소리야, 얼른 레드로 올라올 생각을 해야지. 셋 다 얼른얼른 올라오라고. 나 심심해.”
자룡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준비가 ‘당연하죠, 기다려라!’라고 선전포고를 하자 ‘오냐, 여기에서 기다리마. 이 세상 모든 보물을 다 여기에 놔뒀으니.’라고 받아쳤다.
“평가 B 클래스란 말이지.”
주민은 현덕의 손을 놓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다 주먹을 움켜쥐었다. 얼굴엔 그동안 찾아볼 수 없었던 의욕이라는 게 비쳤다.
“읏차!”
현덕은 자신이 어릴 때 맹덕이 해주었던 것처럼 팔에 힘을 주어 들어올렸다. 준비는 현덕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준비는 키에 비해 꽤나 가벼웠다.
‘회사가 벌써부터 체중 관리를 시키는 걸까?’
그러고 보니 입고 있는 옷이 너무 펄럭였다. 그 사이로 보이는 몸이 너무 얇았다. 현덕은 찌푸려지는 표정을 펴기 위해 얼굴에 힘을 줬다.
“현덕 군은 참 착한 것 같습니다.”
머리 위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키가 작은 편은 아닌데 주민 형이나 피터 씨랑 서 있으면, 왠지 키가 작은 거 같다는 기분이 들어.’
주민 한 명이었을 때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피터까지 더해지니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경험이 잦아졌다. 굳이 자주 경험하고 싶은 상황이 아니건만.
‘키가 더 컸으면 좋겠다.’
현덕은 최근 들어 새롭게 생긴 소망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김맹덕 상병이 말하던 대롭니다.”
피터는 현덕의 시선을 끌 만한 소재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현덕은 고개를 번쩍 들어 피터를 바라보았다.
“맹덕이 형이 저보고 착하대요?”
피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현덕의 어깨를 좀 더 잡아당겼다. 현덕은 자룡, 주민과 좀 더 멀어졌다.
피터는 현덕에게 어깨동무를 한 채로 고개를 숙여 현덕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래서 제가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더없이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현덕이 귀가 간지러운 느낌이 들어 고개를 흔들었다.
그 때. 굳게 닫혀 있던 호텔의 정문이 활짝 열리며 방유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연습생들이 모인 곳까지 길게 깔린 레드 카펫을 밟고 나온 그녀는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연습생들은 환호했다.
“겨우 제대했는데 또 남자들하고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군대를 두 번 온 느낌이 듭니다.”
피터는 연습생들이 함성을 지를 때마다 군대 생활이 생각난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방유진은 앞으로 두 달간의 합숙 생활이 어떻게 이루어질 건지 설명했다. 이후 연습생들은 제작진의 안내를 받아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숙소는 층별로 나뉘었다. 넓고 전망 좋은 8층이 레드 기숙사였다. 좁고 2층 침대가 여럿 놓인 도미토리식 방으로 이루어진 3, 4층이 블루 기숙사였다.
1층의 로비는 무대로 꾸며져 있었다. 식당도 1층에 있었다. 회의실이나 레크리에이션 공간일 1층의 큰 홀들은 대형 연습실이 되었다. 2층의 1, 2인실 방은 소형 연습실로 사용하기 위해 침대 등 가구를 빼고 악기와 마이크 장비 등을 설치해 놓았다.
연습생들은 각자 배정된 방에 짐을 풀고 옷을 갈아입었다. 활동이 편한 운동복을 입고 그 위에 평가 무대 후 받았던 티를 입었다.
현덕이 배정받은 방은 4인실로, 2층 침대가 두 개 놓여 있었다. 룸메이트는 준비와 피터, 그리고 또 다른 연습생이었다.
촬영은 철저하게 기숙사별로 이루어졌다. 연습시간, 식사시간, 하다못해 휴식시간까지 기숙사 별로 움직였다. 식사시간, 혹은 이동 시간에 오가며 다른 기숙사 연습생을 마주칠 순 있었지만 그뿐. 다른 기숙사 연습생과 오래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취침시간에는 다른 층 기숙사로 오가는 걸 막기 위해 복도마다 촬영 스태프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2월까지의 촬영은 연습생의 생활을 시청자에게 그대로 보여주는 컨셉이었다.
연습생들은 매일같이 트레이닝을 받았다. 그리고 제작진들이 정해준 방법으로 서로 그룹을 만들어 주간 평가 무대를 준비했다. 이주에 한 번씩, 모든 기숙사 연습생들이 1층 로비에 모여 평가 무대를 선보였다. 그리고 무대 평가에 따라 입고 있는 티셔츠 색깔이 바뀌었다.
아이돌 연습생의 생활을 잘 모를 시청자들에게는 새롭고 재미있는 상황일지 모르나 연습생들에게는 익숙한 상황이었다. 그래서인지 며칠 지나지 않아 연습생들이 긴장을 풀었다. 사방에 붙어 있는 카메라와 촬영 스태프의 시선에 익숙해지는 건 금방이었다.
연습생들은 기숙사 내에서 친해진 친구들과 몰려다녔다. 별일 아닌 일에도 데굴데굴 구르며 웃었다. 연습 중 몰래 1층 식당 옆 매점에 찾아가 간식을 사 먹기도 했다. 대범하게 트레이닝 시간에 농땡이를 치는 연습생도 나타났다.
카메라들은 그런 연습생들을 지적하거나 경고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그들의 모습을 렌즈에 담았다.
제작진은 이틀에 한 번씩 미션을 주었다. 대게는 매점 이용권, 혹은 매점에서 쓸 용돈, 식당을 가장 먼저 이용할 수 있는 식권 등이 보상이었다. 연습생들은 그 작은 보상에도 열광하며, 1층 로비에 모였다. 기숙사별로 닭싸움을 하거나 팔씨름 대회를 열거나 막춤 토너먼트를 개최했다.
첫 평가 날, 룸메이트였던 연습생은 C 평가를 받아 기숙사를 옮겼다. 현덕과 준비, 피터는 B 평가를 유지했다. 두 번째 평가에서도 셋은 B 였다.
평가 때마다 연습생들의 평가 등락이 컸다. 때문에 무난하게 평가 B를 유지하는 세 사람이 돋보였다. 선생님들과 다른 연습생들이 셋을 묶어 오렌지 삼총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준비는 그 별명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우리 회사는 연습생이 별로 없거든여. 그래서 항상 혼자 연습하는 기분 들고 그래서 외로웠는데, 형들이랑 계속 같이 있어서 좋아여.”
반드시 다음 평가에선 A를 받겠다고 열의를 불태우던 준비는 온데간데없었다. 평가 B를 유지하면 적어도 두 달 후에 탈락은 면할 수 있기에 긴장이 느슨해진 면도 없잖아 있었다.
가끔 제작진은 연습생들을 한 명씩 따로 불러 인터뷰를 했다. 현덕도 서너 번 불려가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 질문은 기숙사 생활에 대해 물어보는 소소한 것들이었다.
기숙사 생활에 가장 잘 적응한 연습생이 누구인 거 같으냐는 질문에 현덕은 망설임 없이 피터를 뽑았다. 나중에 같은 내용의 인터뷰를 한 준비에게 물어보니 준비도 피터를 꼽았다고 했다.
피터는 오렌지 기숙사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자랑했다. 피터의 장기는 주로 영어 발음과 관련된 개그와 우스꽝스러운 표정이었다.
피터는 표정을 굉장히 잘 활용했다. 중국의 변검술사처럼 휙휙, 얼굴을 바꾸는 건 예사였다. 괴상한 표정을 지으며 잘생긴 얼굴을 웃기게 만들곤 했다.
트레이닝에 지치고, 2주에 한 번씩 진행되는 평가 무대에 스트레스를 받는 연습생들은 피터 덕분에 긴장을 풀고 웃었다. 그는 오렌지 기숙사 연습생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매주 선발되는 기숙사장 투표에서 계속 몰표를 받았다.
쉬는 시간에 피터는 기숙사장에게 주는 별모양 스티커를 이마에 붙이고 다니며 연습생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그리고는 모두의 웃음을 뒤로한 채 현덕의 옆에 와서 앉았다.
“어으, 역시 인기인은 피곤해.”
피터는 꽤나 자연스럽게 민간인 말투를 구사했다.
“고생이시지 말입니다.”
현덕은 예전 피터의 말투를 따라 하며, 엉덩이 걸음으로 움직여 피터의 등 뒤로 갔다. 그리고는 피터의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연습생들 사이에서 오징어 춤을 추며 뼈가 없는 것 같이 굴었던 피터의 어깨는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왜 이렇게 굳어 있어요. 스트레스 많이 받는 사람처럼.”
“으으. 살살, 살살.”
피터는 현덕의 손이 어깨에 닿기만 해도 신음 소리를 내며 엄살을 부렸다.
현덕은 기꺼이 손에 더 힘을 주어 피터의 어깨를 꽉꽉 주물렀다.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무리는 무슨. 내가 좋아서 하는 건데. 무엇보다 우리 기숙사는 너무 삭막해. 나 말고는 유머러스한 인간이 없으니까, 분위기 썰렁해지면 내가 나설 수밖에 없잖아?”
“전 형 개그 별로 안 웃기던데요.”
“진짜?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현덕아, 나 상처받았어.”
피터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현덕은 주먹을 쥐어 피터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무리하지 말라고 하는 말이에요. 형이 무슨 강철 체력도 아니고, 트레이닝 받아서 다 힘들어 널브러져 있는데, 혼자서 그렇게 또 남들 웃기겠다고 뛰어다니고 그럼 어떡해요. 우리들이야 형 보면서 웃기만 하니까 별 상관없는데, 형은 아니잖아요.”
처음 피터를 봤을 때는 그의 신분이 돋보였다.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을 다니는 엘리트 유학생이 미국인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비보잉을 배웠다는 건 반전의 재미를 주었다. 그 정도면 충분히 멋진 이미지였다.
그런데 피터의 반전은 계속됐다. 피터는 재간꾼이자 푼수이자 장난꾸러기였다.
‘의외의 매력을 어필하려는 걸까.’
피터의 전략이 무엇일지 고민했지만 명확하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렇게 스트레스 받으면서까지? 본래의 이미지를 유지하는 것보다 이게 더 승산이 있는 걸까?’
현덕은 잔뜩 굳은 피터의 어깨를 보았다. 어쩐지 계속 마음이 쓰였다.
“피터 형?”
“우리 현덕이-”
피터가 과장된 목소리로 현덕을 부르며 현덕의 손을 잡아 당겼다.
“나랑 찐하게 포옹이나 한번 해볼까?”
“싫어요!”
현덕은 즉각 거절했지만,
“거절은 거절한다!”
피터는 덥석 현덕을 끌어안았다.
“오오!”
“장준비는 어따 버리고 둘이서 이렇게 끈적끈적해?”
“사겨라! 사겨라!”
건너편에 뭉쳐 있던 같은 기획사 연습생들이 둘의 모습을 보고는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이 또한 피터의 장난 중 하나로 여긴 듯했다.
피터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마치 선거에 당선된 대통령처럼 손을 흔들더니, 현덕의 귀가 얼얼해질 정도로 소리쳤다.
“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주세요!”
그리고는 현덕의 허리를 더듬어 현덕이 차고 있던 마이크의 전원을 껐다. 자신의 마이크 전원도 껐다.
“여기에서 나한테 그런 말 하는 사람은 현덕아, 너 한 명뿐인 거 알아?”
피터가 현덕의 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다른 연습생들은 피터 형이랑 개그 코드가 맞나 보죠. 형, 근데 일단 좀 놔줘요, 놓고 얘기해요. 불편해요.”
현덕은 자신을 껴안은 피터를 밀어내려 했다. 두 손으로 피터의 팔을 풀어내려 했지만, 피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정말 착하다니까.”
피터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서늘했다.
“피터 형?”
“그런데 너만 그런 거야. 다른 사람들은 용기가 없거든. 만들어진 분위기를 깰 용기가.”
피터가 현덕의 어깨에 이마를 댄 채 말했다. 그의 얼굴에 표정이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 그가 지었던 우스꽝스러운 표정 따윈 보이지 않았다.
“무리가 몰려 있다 보면 필연적으로 어색해지는 때가 생겨. 그럴 때면 서로 눈치를 보게 돼. 지금 나서면 방송에서 돋보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우스꽝스러워지고 나댄다고 손가락질받을 수도 있지. 그래서 다들 눈치를 보는 거야. 누가 좀 알아서 나대줬으면 바라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렇게 나서는 사람을 고깝게 보기도 하지.”
“…….”
“그럴 때 누군가 나서는 거야. 아주 우스꽝스럽고 말도 안 되는 개그를 치면서 말이야. 그러면 다들 안도를 해. 아, 여기 광대는 저 사람이구나. 멋있어 보이지는 않으니까, 설령 방송을 타더라도 개그 캐릭터로 소비되겠구나. 저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캡처로 돌면서 희화화되겠구나.”
“그게 형이라는 건가요?”
“그렇지.”
“형은-”
“그럼 그 광대를 보면서 해야 하는 가장 올바른 태도는 뭘까? 난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착하게 웃을 줄만 아는 순수한 사람이에요, 하는 거지. 무슨 개그를 듣고 보든 무조건 웃고 보는 거야. 웃기지 않아도 마구 웃는 척하는 거지. 운 좋으면 방송에 그 모습이 나갈 수도 있잖아?”
피터가 고개를 들었다. 현덕과 이마가 닿을 정도로 가깝게 얼굴을 대고는 말했다.
“그러니까 웃어, 현덕아.”
눈웃음을 덧씌우지 않은 눈이 현덕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피터의 눈동자는 짙은 고동색이었다. 현덕은 그 눈이 참 예쁘고, 또 슬퍼보인다고 생각했다.
“내가 웃기려고 할 때마다 이렇게 진지하게 쳐다보지 말고 웃어.”
이렇게 싸늘한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색이었다.
“형이 그렇게 말하면, 전 더더욱 웃을 수 없죠.”
“착하다던데, 왜 말을 안 들을까?”
현덕의 말에 피터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였다.
“거기, 오디오가 꺼진 거 같은데. 무슨 일 있나?”
연습실 문이 열리며 촬영 스태프 한 명이 뛰어 들어왔다. 건너편 연습생들이 환호를 지르며 현덕과 피터 쪽을 손가락질했다. ‘쟤들 좀 보래요!’
“이딴 프로그램엔 왜 나왔어. 그러니까 형이 걱정하잖아.”
피터가 속삭였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촬영 스태프에게 손을 흔들었다.
“여기요! 제가 아까 엄청 크게 소리를 질렀더니, 마이크가 놀라서 꺼졌나 봅니다!”
“그게 말이야, 방구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뭐 이상한 말 하고 싶어서 끈 거 아냐?”
“어? 어떻게 아셨지?”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촬영 스태프와 대화하는 피터의 목소리엔 웃음기가 가득했다. 아직 현덕의 귓가에 맴도는 그의 속삭임과 온도 차이가 너무 컸다.
현덕은 촬영 스태프가 자신의 마이크 전원을 다시 켜주는 동안, 멍하니 피터를 바라보았다. 피터는 연습생들에게 손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어 날리며 웃고 있었다.
‘어떤 형이 걱정한다는 걸까.’
그 형이 맹덕을 말하는 걸까, 피터 자신을 말하는 걸까. 아니, 둘 모두를 말하는 걸까.
***
안타깝게도, 혹은 다행스럽게도. 피터의 은밀한 고백은 현덕의 머릿속에서 오래 머물지 못했다. 주민과 관련된 소식이 현덕을 쥐고 흔들었기 때문이었다.
저녁 식사 후 숙소로 올라가려 할 때였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연습생들이 너무 많아 운동할 겸 비상계단을 오르는데 누군가 현덕을 불렀다.
“저기, 거기 연습생. TE엔터 쪽 연습생 맞지요?”
파란 티를 입고 있는 연습생이었다. 현덕은 연습생의 이름표를 확인했다.
“사……의준 연습생?”
“안녕하세요. 사의준이라고 합니다.”
현덕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으나 의준은 현덕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현덕은 내려가 의준과 같은 계단에 섰다.
“안녕하세요. 저는 TE엔터테인먼트 김현덕입니다.”
현덕도 예의 바르게 꾸벅, 인사했다.
“네, 알고 있어요. 김현덕 연습생. 항상 평가 무대 잘 보고 있어요. 무척 잘하시더라고요.”
“아, 감사합니다. 저도 잘 보고 있습니다.”
예의 바른 두 소년은 서로에게 칭찬과 덕담을 건네며 번갈아 꾸벅꾸벅 인사했다. 촬영 스태프 중 누군가가 보았다면, 비상계단에 카메라가 없는 걸 한탄했을 법한 모습이었다.
의준은 자세한 내용을 기반으로 현덕을 칭찬했다. 오랫동안 현덕을 관찰한 사람처럼 현덕의 춤, 노래, 연습 태도 등을 칭찬하고 본받고 싶다고 말했다.
현덕은 그의 칭찬을 듣고 같은 수준의 칭찬을 돌려줘야 했다. 매번 순발력 시험의 순간이었다. 현덕은 블루 기숙사의 평가 무대를 주의 깊게 보지 않았다. 아니, 주의 깊게 볼 수 없었다. 주민의 무대에 신경을 집중하느라 블루 기숙사의 다른 연습생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의준의 이름과 얼굴이 낯설었다. 허나 자신을 칭찬해 주는 연습생에게 ‘난 널 잘 모르겠는데?’라고 말할 순 없었다.
현덕은 ‘열심히 하시는 거 잘 봤어요, 다음 평가 때는 평가 좋으실 거 같아요, 웃는 인상이 좋으시네요.’ 등 원론적인 칭찬을 다양한 어휘로 바꾸어 말했다. 그리고 이참에 의준을 유심히 보았다.
의준은 현덕보다 약간 키가 작았다. 앞머리가 길어 눈을 거의 가려 인상이 흐려 보였다. 웃고 있는 입매가 가늘었다. 웃으면 한쪽 볼에만 보조개가 패었다.
느리다 싶을 정도의 속도로 말하는데 발음은 정확했다.
‘랩 포지션 연습생인가?’
자룡도 평소에 발음에 신경 쓰며 말하려 노력했다. 보컬도 마찬가지지만 특히나 랩은 발음이 생명이라고, 항상 강조했다. 그래서 현덕은 발음이 정확한 연습생을 보면 으레 랩 포지션 연습생이라고 생각했다.
랩퍼와 보컬의 끝없는 폭풍 칭찬의 도돌이표를 마무리 지은 건, 그걸 시작한 의준이었다.
“저기, 제가 갑자기 말을 건 건 다름이 아니라…….”
의준이 본론을 꺼내 들었다.
“저희 블루 기숙사 우주민 연습생 때문인데요.”
“주민 형이요?”
“네. 같은 회사 연습생이시고 친하신 거 같아서……. 그런데 모르시는 거 같아서 알려드려야 할 거 같아서요.”
“무슨 일이 있나요?”
“어…… 그게…….”
의준이 뜸을 들이며 말하기를 주저했다.
“부탁드려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민 형이랑 관련된 일이면 저한테 말해주세요.”
현덕이 꾸벅 고개를 숙이자 의준은 그러지 말라고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그제서야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저기, 그게. 우주민 연습생이 우리 기숙사에서 왕따랄까……. 따돌림 당하고 있거든요.”
“네? 주민 형이 기숙사 전체를 왕따 시키고 있다고요?”
‘아무리 같이 연습하는 연습생들이 마음에 안 들어도 그렇지. 기숙사 연습생 전체를 왕따 시키고 있다고?’
안 그래도 주민에게 내내 신경이 쓰이던 차였다.
두 번의 평가가 끝났다. 주민은 내내 F 평가를 받아 블루 기숙사에 머물러 있었다.
블루 기숙사는 인원이 30명에서 40명 사이를 오가는지라, 여러 팀으로 나누어 평가 무대에 올랐다. 주민은 일곱 명에서 열 명 정도의 팀 내에서 항상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보컬 파트 분배를 봐도 주민은 항상 꼴찌였다. 단독 파트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춤은 더 말할 게 없었다. 안무 소화력은 제로에 수렴했다. 그나마 끝자리에 서서 추기에 다른 연습생들에게 피해를 덜 주는 거라는 소리를 들었다.
현덕은 주민의 춤사위를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졌다. 어떻게 하면 나날이 더 못 추게 될 수 있는지. 연습을 하긴 하는 건지. 트레이닝을 받기는 하는 건지. 멱살이라도 틀어잡고 목을 짤짤 흔들면서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최악을 갱신해나가는 평가 무대의 원인이 이것이었다니. 주민이 기숙사의 다른 연습생들을 왕따 시키고 있어서 그런 거였다니.
현덕은 이를 꽉 깨물었다. 당장에라도 3층으로 달려가 주민을 찾아내 멍석말이를 하리라.
“아니, 저기……. 김현덕 연습생, 그게 아니라요. 우주민 연습생이 당하고 있어요.”
주민을 가만 놔두지 않겠다는 기세가 의준에게까지 느껴진 듯했다. 의준은 펄쩍 뛰며 현덕을 말렸다.
“블루 기숙사 연습생들이 우주민 연습생을 따돌리고 있었어요, 내내.”
“……네?”
현덕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주민 형이 기숙사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고요?”
“네에, 합숙 초부터 계속 그랬어요.”
“주민 형이, 그러니까 우주민 연습생이요? 저보다 이만큼 키가 크고,”
현덕이 제 머리 위로 높게 손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엄청 잘생겼는데, 말을 착하게 하지는 않고. 노래 엄청 잘 부르는데 춤 진짜 못 추는, 그 우주민 연습생 말씀하시는 거 맞나요? 비슷한 이름의 다른 연습생이 아니라요?”
“네에, 네. 그…… 독보적으로 춤 못 추는 우주민 연습생이요.”
“대체 누가, 아니 어떻게 그 우주민을? 정말인가요? 블루 기숙사분들이 정말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랙이 걸렸을 때 컴퓨터의 심정이 이럴 것 같았다. 외부에서 정보가 쏟아지는데, 그 정보를 하나도 처리할 수 없었다.
‘누가, 누굴 따돌려? 누가 왕따를 당하고 있어? 주민 형이? 그 우주민이?’
맹덕이 갑자기 판사가 되고 싶다면서 사법시험을 준비하겠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현실성 없는 말이었다.
’혹시 몰래 카메라인가?‘
현덕은 얼른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멘트벽과 계단뿐인 공간 어디에도 카메라가 보이지 않았다. 현덕은 돌아서서 소화기 뒤쪽까지 들여다보았다. 먼지만 쌓여 있을 뿐, 역시나 카메라는 보이지 않았다.
“저기요, 몰래 카메라거나 그런 거 아닌데……. 진짜로 저…… 이전부터 계속 알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진짜예요.”
의준이 현덕을 말렸다.
“혹시 주민 형이랑 짜고 저 놀리려고 그러시는 건 아니죠?”
현덕은 몰래 카메라에 이어 새로운 가설을 꺼내 들었다. 말을 하면서도 이건 아니겠지, 싶었는데. 역시나 의준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현덕이 영 믿으려 들지 않자 의준은 차근차근 그동안 블루 기숙사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해주었다.
합숙 초반부터 박제순, 이지용 연습생이 따돌림을 주도했다. 현덕은 그 두 사람의 이름이 익숙했다. 세트장에서의 첫 촬영 때 이완용 연습생의 양옆에 서 있던 연습생들이었다.
‘그때의 원한으로?’
현덕은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의준은 현덕의 표정을 보고는 더욱 의기소침해져서, 겨우겨우 말을 이어 나갔다.
주민이 워낙 화제성이 있는 연습생이라 블루 기숙사 내에선 그를 시기, 질투하는 연습생들이 많았다. 주민과 친해지려는 연습생들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초반에 다 떨어져 나갔다.
처음에는 제순과 지용을 중심으로 블루 기숙사 연습생 절반 정도가 주민을 투명 인간 취급했다. 주민에게 말을 걸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며 웃고 떠들어댔다.
그런데 주민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오히려 성가시게 굴던 연습생들이 다가오지 않자 개운해했다. 그게 블루 기숙사 연습생들을 더 자극했다.
첫 번째 무대 평가를 준비하기 위해 팀을 나눌 때, 제순과 지용은 일부러 주민과 같은 팀이 됐다. 제순은 팀의 리더가 되어 곡의 파트 분배를 제멋대로 정했다. 주민에게 일방적으로 랩 파트를 맡겼다. 춤을 못 춘다는 이유로 단독 안무 파트는 주지도 않았다.
‘그래서 첫 번째 평가 때 랩을 했구나. 왜 랩을 하는가 했더니.’
현덕은 주민의 첫 번째 평가 무대를 떠올렸다. 내내 다른 연습생들 뒤에서 백업처럼 춤을 추고 있었다. 랩을 할 때야 한 번 중앙에 나와서 얼굴을 비쳤다.
주민은 랩을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자룡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첫 평가에서 랩을 하는 주민을 보고 현덕은 당황했다. 레드 기숙사 쪽을 보니, 자룡도 당황한 표정이었다. 자룡은 손짓과 눈짓으로 현덕 말했다.
‘쟤 왜 저래? 미친 거야?’
MC와 선생님들도 비슷한 생각인 듯했다. 무대가 끝난 후 MC인 방유진은 주민에게 마이크를 넘겨주며 왜 랩 파트를 맡았냐고 물었다.
주민은 앞을 똑바로 보고 웃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한번 해보고 싶어서요. 제가 랩은 전혀 못 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아주 상큼하게 말해서, 현덕은 잠시 자신이 어디에 앉아 있는지 의심해야 했다.
‘지금 내가 트라이 온 촬영장이 아니라 다른 곳에 와 있는 건가?’
지금 촬영하고 있는 프로그램이 서바이벌 아이돌 선발 프로그램이 아니라, 무작위로 번호를 눌러 나오는 노래를 무조건 불러야 하는 예능 프로그램 ‘도전! 노래방 선곡!’이라고 착각할 뻔했다.
“아, 그렇군요. 무척 도전 정신이 있는 연습생이었어요, 우주민 연습생. 그런데 왜 댄스에는 그 도전 정신이 보이지 않는 걸까요. 궁금하네요.”
유진의 멘트를 듣고야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랩 연습할 시간에 춤 연습을 더 했어야지!’
현덕은 가슴이 답답해져서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옆에 앉아 있던 준비가 체한 거냐고 물어보았다.
주민의 랩에 대한 선생님들의 평가는 좋았다. 래퍼 선생님은 랩에 재능이 있는 것 같다고 코멘트했다. 다음 주부터 랩 트레이닝 수업을 들으라고 권하기도 했다.
하지만 춤을 여전히, 아니 더 못했기 때문에 평가는 F였다.
의준은 그날의 평가가 블루 기숙사의 모든 연습생을 돌아서게 만든 계기라고 말했다. 주민을 따돌리고 괴롭힌다는 것을 꺼리는 연습생들도 있었다. 그들은 첫 평가 무대를 준비할 때, 자신의 팀에서 전혀 케어를 받지 못하는 주민을 조금씩 도와주며 안무를 가르쳐주었다. 그런데 주민이 랩으로 좋은 평가를 받는 걸 보고 위기감을 느꼈다.
주민이 춤에서마저 좋은 평가를 받으면? 단번에 A 평가를 받을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프로그램 촬영 전부터 납치 소동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주민이었다. 거기에 F 평가에서 단번에 A 평가로 수직 상승한 연습생이라는 타이틀까지 더해진다면?
게임 끝이었다. 시청자들에게 바로 눈도장 찍혀 바로 순조로운 데뷔 길을 걸으리라.
연습생들은 자신들이 주민을 떠받치는 들러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중소 기획사 연습생들의 두려움은 더욱 컸다. 그들은 누구나 한번쯤은 자신이 대형 기획사 연습생들에게 밀려 통편집 당하거나 병풍 노릇이나 하게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그 악몽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우주민이라는 이름으로.
따돌림을 당하면서도 아무 대응도 하지 않는 주민의 모습이 연습생들을 더 부추겼다.
주민은 제작진에게 자신이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다. 자신을 따돌리는 주범인 제순과 지용에게 맞서지도 않았다. 불이익을 당해도, 마치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듯 서 있을 뿐이었다. 특유의 그 싸가지 없어 보이는 미소를 띠며.
“그건 비겁한 변명입니다.”
현덕은 의준의 설명을 끊어내며 말했다.
“피해자가 가만히 있었다고, 그게 자신을 피해 입혀도 된다는 허락이라고 봤다는 건가요? 그게 사람이 할 짓입니까. 인간으로 태어나서 의무 교육을 받은 주제에, 그렇게밖에 생각을 못 한다고요? 그렇게 멋대로 가짜 면벌부를 만들어 놓고, 떼로 몰려서 사람 한 명을 따돌리고 괴롭힌다고요?”
우주민이 세상을 왕따 시키고 저 혼자 잘났다고 싸가지 없게 굴고 있다면, 차라리 그건 이해할 수 있었다. 현덕이 아는 우주민은 독야청청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스물여덟 살 현덕이 봤던 서른 살의 우주민, TV로만 봤던 우주민이 그랬다. 열일곱 살 현덕이 만나고, 열여덟 살 현덕이 내내 겪은 열아홉, 스무 살의 우주민도 그랬다.
그랬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혼자 당하고 있는 우주민이라니?
“왜? 주민 형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의준이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말 거는데 대꾸를 안 해서? 노래를 잘 부르고 랩까지 잘해 옆에서? 춤을 너무 못 추니 만만해 보여서? 누가 먼저 나서서 쟤를 따돌리자고 말하니까 그걸 거절하지 못해서? 남들이 다 하니까 그냥? 어차피 주변에 도와달라고 말도 안 하고 묵묵히 견디고 있으니까 괜찮을 거 같아서?
어떤 이유든 하찮았다. 무리 지어 한 사람을 따돌리고 괴롭힐 이유가 될 수 없었다.
현덕은 마치 의준이 주민을 따돌리는 주동자라도 되듯 바라보았다. 의준은 고개를 숙여 현덕의 눈을 피하며, 발끝으로 톡톡 시멘트 바닥을 두드렸다.
“경쟁이 과열돼서 그런 거겠지요. 블루 기숙사는…… 계속 F 평가받는 연습생들이 꽤 있어요. 저도 그중 하나고요. 그러다 보니, 같은 F 평가를 받으면서도 아무렇지 않아 보이고 계속 화제도 되는 우주민 연습생을 질투하고, 찍어 누르려는 거지요.”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연습생을 따돌림이라는 폭력적인 방식을 써서라도 짓밟을 수 있다는 우월감. 그건 암세포처럼 연습생들의 심장을 좀먹었다.
의준은 그런 분위기가 싫어서, 고민하다가 현덕에게 말하는 거라고 했다. 블루 기숙사 연습생들의 마음을 이해해 달라는 게 아니라, 지금 블루 기숙사가 그런 분위기라고 설명하는 것뿐이었다고.
의준의 설명을 들을수록 뱃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분노라 해도 좋을 법한 감정이었다. 그런데 이 감정이 주민을 따돌린 블루 기숙사 연습생들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주민을 향한 것인지. 현덕은 그 방향을 알 수가 없었다.
“왜 저한테 이런 걸 말씀해주시는 건가요?”
“그게……. 진작 말해야 되겠다고 생각은 했는데, 기회가 없어서요. 오렌지 기숙사는 분위기가 좋은지 다들 계속 뭉쳐 다니셔서…….”
“이제라도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런데 제 질문은 그게 아닙니다. 제 질문은 사의준 연습생이 왜 하필 저한테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건지 궁금하다는 것이었습니다. PD님이나 작가님한테 가야 하는 게 먼저 아닌가요? 왜 저한테 말해주시는 건가요.”
“그건-”
의준이 말을 흘렸다.
박제순, 이지용 연습생은 연습생 생활이 긴 연습생들 사이에서는 꽤나 유명한 연습생들이었다. 제일 유명한 건 패거리의 리더 격인 이완용 연습생이었다.
이완용 패거리는 다섯 명이었는데, 각자가 자신들이 거쳐 온 회사들에서 꽤나 말썽을 부리고 사건을 일으켰던 연습생들이었다.
소문이 마냥 부풀려진 것은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그들은 따돌림의 정석을 몸소 보여주었다.
주민을 따돌리는 건 매우 음습하게 이루어졌다. 카메라가 있는 촬영 상황을 의식하여 욕설이나 폭력은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대놓고 티 내며 따돌리지도 않았다. 그 안에 들어가 있어야 그 따돌리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주민이 촬영 분량을 뽑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병풍으로 만들었다. 노력하지 않아 안무를 외우지 못하는 연습생으로 만들었다. 댄스 선생님이 내준 과제를 다르게 알려줘 선생님께 혼나고 웃음거리가 되게 만들었다.
유치한 장난이 겹치면 한 사람 정도는 쉽게 바보로 만들 수 있다. 세 사람이 한 사람을 얼간이 취급하면, 그 사람은 자신의 행동과 의사와는 상관없이 모두에게 얼간이가 되어버린다. 어떤 행동을 하든 웃음거리가 되어 위축되고 만다. 제순과 지용은 주민을 그런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물론 우주민 연습생이 위축되거나 그런 건 아닌 거 같아요. 아직.”
의준은 감탄하듯 말했다. 따돌림을 당하면서도 꼿꼿이 버티는 주민을 대단하게 보는 듯 했다. 현덕은 그마저도 고깝게 보였다.
주민이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물적 증거가 없다 보니, 제작진에게 찾아가 주민이 왕따 당한다고 제보할 수 없었다. 블루 기숙사를 전담으로 촬영하는 촬영 스태프들이 정말로 눈치채지 못했을까? 온종일 붙어 있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그럼에도 제작진 측에서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그저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놔두고 카메라로 찍을 뿐이었다. 그래서 제작진에게는 말할 수 없었노라고, 의준이 말했다.
“그리고요.”
의준이 손끝을 꼬물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그때 세트장에서 첫 촬영 때요. 쉬는 시간에 김현덕 연습생이 그랬잖아요. 우리 있는 쪽에 와서 인사하면서 우주민 연습생 잘 부탁한다고…….”
“네, 제가 그랬죠.”
분명히 그랬다.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아니꼬운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주민을 무시하고, 주민의 주변에 앉은 연습생들에게 인사를 했다.
“거기 있었어요?”
“건너, 건너에요. 그래서 김현덕 연습생한테 말해주는 거예요.”
머리카락에 가려진 눈이 어쩌는지 알 수 없었으나 의준의 입은 웃고 있었다.
“저희 형 잘 부탁한다고, 그때 그렇게 말했잖아요.”
“…….”
그때 부탁한 건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뻣뻣하고 싸가지 없는 주민을 다른 연습생들이 멀리할까 봐, 그게 걱정이 되었을 뿐이었건만.
그런데 그때 그렇게라도 인사하고 부탁해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니. 현덕은 아연했다.
“고맙습니다.”
목소리에 힘이 안 들어갔다.
“감사 인사부터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용기를 내서, 일부러 다른 연습생들 눈 피해서 말씀해주신 건데. 정말 고맙습니다.”
“아, 아니요. 절대 아니에요. 진작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미안해요. 늦어서. 그럼 저는 이만.”
의준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현덕은 그런 의준을 붙잡았다.
“그리고 무리한 부탁일 수 있겠지만. 혹시 앞으로도 무슨 일이 있으면, 꼭 좀 이렇게 말씀해주세요. 보셨다시피 주민 형이 이런 일 있어도 말을 잘 안 하거든요. 부디, 부탁드립니다.”
현덕은 깊이 허리를 숙였다.
“이, 이, 이러지 마세요……. 당연히, 꼭, 말씀드릴게요……. 지, 진짜로요.”
의준은 두 팔을 크게 내저으며 현덕을 말렸다. 앞으로는 꼭꼭, 늦지 않게 알려주겠다고 했다.
현덕은 고맙다고 말하며 주민의 소재를 물었다.
“혹시 주민 형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시나요?”
의준은 아마 호텔 뒤 미로 정원에 있을 거라고 말했다.
‘수십 명한테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 밤에 혼자 외진 곳에 가 있다고?’
현덕은 참지 못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부글부글 끓는 속이 당장에라도 빵, 터질 것만 같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거야. 우주민!’
호텔 뒤쪽엔 키 작은 나무와 덤불로 벽을 세워 만든 미로 정원이 있다. 꽤 로맨틱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러나 남자만 백 명이 머무는 지금은 전혀 쓸모가 없는 곳이었다. 일부러 거기로 산책 가는 연습생은 거의 없었다.
운동하려면 호텔 내에 헬스장을 이용하면 된다. 날도 추운데, 남자들끼리 정원에 나가서 뭘 할 수 있을까. 나중에 깜짝 미션으로 담력 시험이나 귀신 놀이를 하게 되면 그때나 가게 되지 않겠느냐고, 연습생들끼리 농담 삼아 말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장소에 혼자 산책을 하러 나갔다니.
“죄송합니다, 먼저 내려갈게요. 주민 형에 대해 말씀해주신 건 정말 고마워요. 고맙습니다.”
현덕은 곧바로 돌아서, 올라왔던 계단을 내려갔다. 조용한 비상계단에 요란한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히, 힘내세요.”
의준이 뒤늦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지만 이미 멀어진 현덕에게 닿을 길은 요원해 보였다.
1층의 비상계단 문이 열렸다 닫히는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기다렸다는 듯, 위층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난간 위로 불쑥, 사람 머리통이 나타났다. 까만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의준과 같은 파란색 티를 입고 있는 연습생이었다.
“고생했어.”
머리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의준은 숨을 푹 내쉬며 대꾸했다.
“고생은 무슨.”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난간에 몸을 기대고 스르륵 주저앉았다. 긴장이 풀린 듯 지쳐 보였다.
의준은 난간을 두 손으로 꼭 움켜쥐고는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수북하게 내려와 눈을 가리던 머리카락이 걷히며 날카로운 두 눈이 드러났다. 하지만 이내 힘없는 웃음에 말려 실눈이 되었다.
“근데 의준아, 쟤한테 말해서 뭐가 해결되겠어?”
“조성환. 기숙사 분위기 더는 못 버티겠다고. 짜증 나니까 어떻게든 해결하라고 그랬잖아.”
“그래, 해결. 해결을 원했지. 근데 쟤한테 말해서 뭐 해?”
성환이 난간에 턱을 괴며 물었다. 짙은 눈썹이 꿈틀, 들썩였다.
“내 생각에는…… 김현덕 연습생을 움직이는 게 제일 괜찮은 방법이야. 무슨 수를 써서든 우주민 연습생을 도와줘서…… F보다는 더 좋은 평가를 받게 만들지 않을까.”
“일단 우주민만 블루 기숙사에서 벗어나면 된다?”
“박제순, 이지용은 죽어도 블루 기숙사 못 벗어날 거야. 그러니 우주민을 위로 올려야지.”
“되도록 마지막 평가 전에?”
“세 번째 평가 때 D나 C 정도라도 받아서 갔으면 좋겠네. 그게 우리 계획을 위해서도 좋아. 괜히 우주민과 같이 놓이면 아쉬워지는 건 우리니까.”
TE엔터테인먼트 연습생들은 촬영 전부터 최종 합격 후보자로 뽑혔다. 때문에 그들을 면밀히 관찰했다. 초반에는 화제의 인물인 박자룡과 우주민을 살폈다.
그런데 둘의 시선이 자꾸 한 곳으로 보였다. 그곳에는 순해 보이는 인상의 연습생이 있었다. 같은 회사 출신인 김현덕이었다.
이후로도 셋이 함께 있는 걸 볼 때면 늘 현덕이 중앙에 서 있었다. 자룡도, 주민도 현덕에게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의준이 보기엔, 단지 나이 어린 동생을 아끼고 돌보는 정도가 아니었다.
의준은 그게 의아했다. TE엔터테인먼트 연습생들이 주요한 우승 후보로 손꼽히고 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박자룡과 우주민, 이 둘을 말하는 것이었다.
JD라는 예명으로 활동하여 약간의 인지도가 있는 박자룡. 촬영 전에 갑자기 납치 사건에 휘말린 데다가 잘생긴 외모 버프를 받아 우승 후보로 손꼽히게 된 우주민.
의준은 그 납치 사건이 TE엔터테인먼트의 자작극이라고 의심하고 있었다. 우주민은 그 정도 사건으로 여론의 관심을 끌면, 그 화제성을 유지해 나갈 수 있을 만한 연습생이었다. 그래서 TE엔터테인먼트가 마음먹고 제대로 바이럴 마케팅을 한 게 아닐까 싶었다.
그가 본 우주민은 천생 연예인이었다. 일단 외모가 먹어 줬다. 보컬도 훌륭했다. 댄스는 제 눈을 의심할 정도로 엉망이었지만, 적당히 못 하는 게 아니라 극악하게 끔찍한 정도였기에 그마저도 재능이라 할 만했다.
그렇기에 TE엔터테인먼트가 주력으로 미는 게 박자룡과 우주민, 특히나 우주민이라고 보았다. 김현덕에게는 그리 관심을 가지지 않았건만.
보면 볼수록 중심은 김현덕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건 관찰을 바탕으로 세운 가능성 큰 가설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가설은 확신이 되었다.
모두가 우주민, 혹은 박자룡을 견제의 대상으로 보고 있지만, 의준은 김현덕이 궁금했다.
한 달 내내 B 평가를 유지하고 있는 착하고 성실한 연습생. 노래도 잘 부르고 춤도 곧잘 추지만, 무언가 한 방이라고 할 만한 끼가 보일 듯 말 듯 한 연습생.
그게 김현덕이 두 번의 무대에서 받은 평가였다. 선생님들은 부디 트라이 온 출연을 통해 그 부족한 2%를 찾았으면 좋겠다고 평했다.
다른 연습생들은 그 평가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누구도 현덕을 경계하지 않았다. 의준은 남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긴 그 평가가 신경 쓰였다.
“박자룡이야 JD로 활동할 때부터 실력 좋은 건 알았어. 여기서도 줄곧 레드 기숙사에 있으니까, 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이 돼. 우주민은 우리가 같은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확인했고. 둘에 대한 데이터는 충분한데 김현덕은 아니야. 잘 파악이 안 돼.”
의준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딘지 의기소침해진 모습이었다. 성환은 손을 뻗어 그런 의준의 머리를 슥삭슥삭 문질렀다.
“파악할 게 없는 거 아니야? 사의준, 네가 하도 뭐라고 해서 나도 주의 깊게 보고는 있는데. 뭐 없는 거 같은데? 성실한 거? 출연자 중 최연소라는 그 초딩 꼬마랑 군대 제대한 지 얼마 안 되는 유학생 멀대랑 셋이서 삼총사라고 묶여서 함께 다니는 것 정도? 난 오히려 그 피터인지 뭔지 하는 멀대가 더 요주의 인물 같던데.”
“피터 윤도 봐 둬야지. 그런데 2부 올라가기 전에, 김현덕을 한번 체크 해 두고 싶어. ……분명 김현덕은 그럴 필요가 있어.”
현덕은 이미 가버렸지만, 의준은 그의 흔적을 쫓듯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성환은 의준의 머리카락을 한 손 가득 쥐어 산삼을 캐듯 잡아당겼다.
의준이 다시 위를 올려다보자 성환은 의준의 머리카락을 놓아주며 말했다.
“알았어. 니 말대로 한번 지켜보자고. 화제의 TE엔터테인먼트 연습생들을.”
***
저녁 식사 후 현덕의 스케줄은 평이했다. 헬스장에 가서 러닝머신을 뛰거나 호텔 앞마당을 산책한다. 씻고, 숙소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고 피터나 준비와 함께 연습실로 간다. 다음 평가 무대를 열심히 준비한다.
매일 그러했다. 때문에 피터와 준비는 딱히 말로 약속을 하지 않아도 저녁 식사 후에 숙소 침대에 뒹굴며 현덕이 오기를 기다렸다. 오늘도 아마 그러고 있을 것이다. 의준을 만나지 않았다면 현덕은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으리라.
합숙 촬영은 철저히 기숙사별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현덕은 레드 기숙사에 있는 자룡이나 블루 기숙사에 있는 주민과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보지도 못했다.
평가 무대를 하는 날이면 호텔 1층의 로비에 모두 모이기에 얼굴을 볼 수 있었지만. 그때도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 정도였다. 같은 기숙사 연습생들과 뭉쳐 앉아 촬영 카메라를 보며 박수를 치고 리액션을 해야 했기에 곁에 갈 수 없었다.
그런 생활에 불만은 없었다. 아니, 아무 생각이 없었다.
‘괜찮았던 걸까?’
현덕은 호텔 로비를 가로질러 뛰며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주황색 셔츠를 입은 연습생들이 현덕을 알아보고 아는 척을 했다. 현덕은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어딜 가고 있다고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정말 괜찮았던 걸까?’
가끔 복도에서, 1층 로비에서 스쳤던 자룡과 주민의 모습은 어땠던가. 건강해 보였던가. 어딘가 고민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자룡은 자룡대로, 주민은 주민대로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현덕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지나쳤다.
‘봐봐, 역시 잘들 하고 있잖아. 나도 열심히 해야지.’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했다.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 현덕의 세계는 단순했다. 고시원의 작은 방, 도서관의 책상 속. 그것이 현덕의 세계였다. 가족도, 친구도 다 잠시 미뤄두었다.
현덕이 시험에 떨어지면 가족과 친구들은 위로를 해주었다. 현덕이 다시 도전하겠다고 하면 가족과 친구들은 힘내라고, 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현덕은 정작 절망했을 때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드러내지 않았다. 홀로 삭이고 홀로 죽을 결심을 하며 버텼다. 그게 현덕이 사는 삶의 공식이었다.
취업. 연애. 결혼. 육아. 복잡한 세상사를 헤쳐 나가던 친구들은 간혹 현덕이 사는 고시원으로 찾아왔다. 산신령을 찾듯 속세 변두리에 있는 신령한 현덕을 찾아오는 것이었다.
현덕이는 아무도 찾지 않는 산속의 맑은 옹달샘이었다. 임금님은 당나귀 귀를 외쳐도 메아리치지 않는 숲이었다.
현덕이가 사이다를 마시면 친구들은 소주병을 깠다. 그들이 말하는 삶은 복잡했다. 그렇게 살기를 잠시 미뤄두고 살고 있는 현덕은 그저 조용히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신림동 고시촌까지 현덕을 찾아온다는 건 그 속이 꽤 깊게 곯았다는 의미일 테니까.
속을 게워내고 나면 그들은 항상 현덕에게 미안해했다. 공부에 집중해야 하는 너를 내가 괴롭혔다고, 그런데 생각나는 게 여기였다고. 그들은 술에 취해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이래야 덜 미안해질 거 같다며 기를 쓰고 자신들이 음식값, 술값을 계산했다.
비틀거리며 지하철을 타러 가는 친구들의 뒷모습을 보며 현덕은 매번 말했다.
‘아니, 내가 미안해.’
그들이 현덕에게 아무리 말을 쏟아내도, 현덕은 그 말의 홍수를 조용히 흘려보낼 뿐. 그들을 쉬이 위로해주지 못했다. 그들의 말에 맞장구쳐주지도 못했다.
고시촌에 틀어박힌 현덕과 사회생활을 하는 그들 사이에는 뚜렷한 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들의 고단한 삶의 고백 앞에서 현덕은 쉬이 말문을 열지 못했다. 함부로 고생한다고 말할 수 없었고, 가볍게 왜 그렇게 사냐고 타박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현덕이 그저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했지만. 현덕은 그들이 내뱉는 말에 드러나는, 자글자글하게 주름진 삶을 붙잡아 줄 수 없어 미안했다.
그럴 때면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난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이렇게 마냥 시험공부를 하는 게 정말 괜찮은 걸까. 나만 동떨어진 채 하염없이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는 건 아닐까.
쟤들은 벌써 저렇게 훌쩍 커버렸는데, 나 혼자만 학생으로 남아 계속 여기 머물러 있는 거 아닐까. 언제까지 나는 여기 서서 내 친구들의 등을 바라보며 배웅만 해야 되는 걸까.
두려움을 이겨 내기 위해 현덕이 할 수 있는 건 다시 독서실로 가 책을 펴드는 것이었다. 가족들과의 관계를 뒤로하고, 친구들의 시름을 흘려보내고. 평정심을 가지고 지금 해야 하는 공부를 했다. 그러면 다시 고시원의 작은 방, 도서관의 책상 속, 그것만이 현덕의 세계가 됐다.
그 삶은 현덕이 선택한 삶이었다.
이제 와서 그렇게 살았던 십삼 년을 후회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다시 한번 생을 살게 되었으니 그때는 다르게 살아보자고 생각했을 뿐이다.
주변 사람들과 부딪치고 비비며 삶의 주름을 만들고 싶었다. 가족, 친구들과 함께 사는 행복을 나중으로 미루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또 눈앞에 닥친 연습에 빠져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을 돌아보지 못했다.
세상은 복잡하고, 다른 사람과 연결된 선은 많다. 그런데 또 하나의 선밖에 보지 못했다.
정말로 촬영이 기숙사별로 이루어져서 자룡과 주민을 만나기 힘들었던 걸까. 제작진이 다른 기숙사 연습생과 어울리지 말라고 해서 그 공지를 법처럼 따르고자 만나지 않았을까. 같은 기숙사 연습생들이 다른 기숙사 연습생을 만나려고만 하면 배신자라고, 스파이라고 놀리는 게 무서워서 그랬을까.
아니, 아니었다.
얼마든지 둘과 만날 수 있었다.
조금만 노력하고, 조금만 더 관심을 가졌다면 만날 수 있었다. 식사 후 자유시간이든, 트레이닝과 연습 중간중간에 있는 휴식시간이든, 만날 시간은 충분했다.
실제 자룡이 두어 번, 현덕을 찾아왔다. 현덕은 그런 자룡에게 기숙사 규칙을 지켜서 타 기숙사 연습생을 찾아오면 안 된다고 구박했다. 자룡은 알았다며 멋쩍게 웃고는 돌아섰다.
자룡은 그 규칙을 까먹어서 찾아왔던 걸까?
그러면 주민은?
오랫동안 같은 회사에서 연습생 생활을 한 자신에게 아직도 ‘김현덕 연습생’이라고 딱딱하게 부르며, 닿는 걸 어색해하는 그 사람은?
혼자 알아서 잘 적응하고 있으리라 생각해도 되는 거였을까.
아니었다. 결단코 아니었다.
현덕은 후회를 곱씹으며 호텔 후문을 나섰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도와달라는 말을 할 순 있었을까?
‘아니, 아니.’
현덕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어쩌면 엉망이었던 평가 무대가 신호였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주민은 그에게 SOS 신호를 보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관심 있게 지켜보질 못했다.
죄책감이 심장을 짓눌렀다.
정원 군데군데 서 있는 가로등 중 하나, 그 아래 서 있는 주민을 봤을 때. 그 감정은 절정에 달했다.
주민을 발견한 현덕은 걸음을 멈췄다. 뛰어오느라 거칠어진 숨을 다듬을 틈도 없이, 한 달 만에 주민을 자세히 보았다.
한겨울이었다. 추위에 시들고 잠든 나뭇가지. 바삭바삭 마른 잎사귀들. 그 삭막한 풍경 위에 주민이 홀로 서 있었다.
주민의 얼굴은 수척했다. 눈 밑엔 시커먼 다크 서클도 두텁게 내려앉아 있었다. 척 보기에도 잠을 제대로 못 잔 사람의 모습이었다. 많이 피곤해 보였고 또 많이 예민해 보였다. 그런 얼굴을 하고는 빈 허공을 보고 있었다. 롱 패딩을 입고도 추운지 어깨와 목을 잔뜩 움츠렸다.
그런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런데 주민 형, 하고 소리 내어 그를 부를 수 없었다. 현덕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대신, 멀찍이 떨어져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잘난 줄 알고 제멋대로 사는 사람.
입도 험하고 성격도 더러운 사람.
하지만 현덕이 도와달라고 했을 때 기꺼이 도와준 사람. 위험에 처했을 때 현덕에게 도와달라고 소리쳤던 사람.
누군가에게 얻어맞을 위기에 처한 현덕을 구해주고 끌어 안아주었던 사람. 현덕에겐 손이 헤프다고 뭐라 하더니, 지는 입도 손도 참 안 헤픈 사람.
그리고 참 서툰 사람.
그런 사람이 저기 서 있었다.
‘너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현덕은 물어보았다. 소리를 내지 않았기에 주민은 알아듣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내가 지금, 너에게 다가가도 될까?’
뒤늦게 두려움이 밀려 왔다.
‘나는 이렇게나 서툰데. 이런 나로 괜찮을까?’
본디 우주민의 삶에 김현덕이라는 사람은 없었다.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 보았던 주민은, 현덕을 알지 못하는 주민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견뎠을까.
‘누군가가 나처럼 뛰어 와줬을까. 아니, 나보다 복잡하고 능숙한 사람이 일찌감치 도와줬을까?’
제발 그랬기를 바라고 싶은데, 지금 현덕의 눈앞에 서 있는 주민은 혼자였다.
차라리 주민이 다른 누구와 있었다면, 현덕은 진심으로 안심했을 것이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돌아섰을 것이다. 자신보다 먼저 주민이 힘든 상황에 처한 걸 알고, 따뜻한 온기를 나눠준 사람이 있다는 것에 진심으로 감사했을 것이다.
그건 자신이 유일무이한 열쇠가 아니라, 여러 스페어 키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의 안도감과 닮았다.
내가 책임지지 않아도 돼. 내가 좀 늦어도 괜찮아. 내가 잘 몰라도 괜찮아. 어차피 다른 사람이 있을 테니까. 그 사람이 나보다 빠르고 능숙하게 모든 걸 해 줄 테니까.
비겁하다 욕을 먹어도 상관없었다. 자신이 오기까지 홀로인 주민을 보는 것보단 차라리 그게 나았다.
‘나는 이렇게나 단순한데. 이렇게나 서툰데. 이렇게나 한참 뒤에야 뛰어오고야 마는데. 왜 나밖에 없는 걸까.’
스물여덟 살 때 주민을 처음 봤다. 강하면서도 부드럽고,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주민을 봤다. 부러웠고 본받고 싶었다. 주민처럼 되고 싶었다.
이후, 교통사고를 당하고 어찌 된 영문인지 많이 어려졌다. 그리고 서른 살의 주민처럼 강하지도 않고 부드럽지도 않은 어린 주민을 만났다.
만남은 늘 요란스러웠다. 평화로울 때가 없었다. 그에게 목도 졸려보았고 그의 가랑이를 까보기도 했다. 그에게 명치를 얻어맞기도 하고, 그의 목젖을 두 동강 내려는 시도도 해보았다.
그렇게 몸을 부딪치며 알게 된 주민은 많이 거칠고 많이 서툰 사람이었다.
‘나는 능숙하지 않은데. 우주민, 너는 나보다 더 서툴러.’
그러니 네 옆에 누군가 있었으면 좋겠어. 이런 내가 네게 다가갈 엄두도 못내게.
현덕은 눈앞의 주민이 아니라, 스물여섯 살 혹은 서른다섯 살의 주민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나랑 만나지 않았던 당신 이런 시간을 어떻게 홀로 보내, 내가 스물여덟 살에 봤던 그 우주민이 되었던 겁니까.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혼자 겪으면서 그렇게 강해졌던 건가요? 나에게 감동을 줄 만큼? 도대체 나랑 만나기 전 너는 어떻게 살았던 겁니까.
혹시, 나는…… 미래의 당신을 다시 만나기 위해 지금의 어린 너를 그냥 지켜만 봐야 하는 걸까?
‘그럴 순 없을 것 같은데…….’
스물여덟 살에 봤던, 서른 살의 주민을 잃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주민을 가만 놔둘 순 없었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할 줄 모르고 도와달라는 말 한마디 할 줄 모르는, 이런 너를 어떻게 놓칠 수 있을까.’
눈가가 뜨거워졌다. 견딜 수 없이 화끈거렸다.
“윽.”
현덕은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았다.
울면 안 돼. 네가 무슨 자격으로 울어? 또 늦었으면서. 결국 늦었으면서. 이렇게나 서툰 모습으로 또 뒤늦게 뛰어왔을 뿐이면서. 타박하는 목소리가 머릿속에 웅웅 울렸다.
“김현덕 연습생?”
그 울림을 뚫고, 선명한 음색이 현덕을 불렀다.
“뭐야, 여긴 무슨 볼일이신가?”
주민이 현덕에게 말을 걸었다.
주변은 어두침침했다. 등 아래 선 주민만 환하게 빛났다. 온 세상에 오직 둘만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작은 미로 속에서, 현덕은 주민을 봤다.
주민이 웃고 있었다. 그건 평소 남의 속을 긁으려고 하는 재수 없는 웃음이 아니었다.
뭐가 그리 반갑고 좋은지, 눈꼬리를 곱게 휘며 진짜로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웃음은 단번에 사라졌다.
“무슨 일이야, 김현덕.”
주민이 성큼 현덕에게 다가왔다.
“가까이 오지 마요.”
현덕이 뒤로 물러서자 주민이 멈칫, 걸음을 멈췄다. 둘 사이는 서너 걸음 정도 틈이 남았다.
“설마, 지금 나한테 짜증 내는 건 아니겠지? 아니어야 할 거야, 김현덕 연습생.”
주민이 인상을 팍 썼다.
“아니, 화내고 있는 거거든요.”
현덕도 지지 않았다.
“화? 화를 낸다고? 왜?”
하, 주민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숨을 내뱉었다.
“지금 제정신이야? 뭐, 이상한 거라도 먹은 건-”
“왜 말 안 했어요!”
“뭐? 뭘?”
“블루 기숙사에서 힘들다면서요. 따돌림 당하고 있다면서요.”
“…….”
주민이 모르는 외국어를 들은 사람같은 표정을 지었다.
“……뭐?”
눈살을 찌푸리며 고민하더니, 겨우 현덕의 말을 해독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따돌림? 누가? 내가?”
“그래, 니가! 한 달 내내 왕따 당하고 있었다면서, 왜 말 안 했는데!”
“내가 왕따라고?”
“모르는 척하지 말고! 어려운 일 있으면 같이 의논하기로 했잖아요. 그런데 왜 말 안 했냐고…….”
현덕은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주민은 그런 현덕을 빤히 바라보더니 픽, 웃었다.
“아, 맞아. 나 따돌림. 그래, 그거 당하고 있었던 거 같아. 아니, 당하고 있었어.”
드디어 주민이 실토했다. 그런데 실토하는 사람의 얼굴이 뭔가 이상했다.
주민은 웃고 있었다. 진짜 좋아 죽겠다는 듯, 실실 쪼개고 있었다. 입꼬리가 귀밑까지 닿을 것 같았다. 입 찢어지게 웃는다는 말이 뭔지 그 잘생긴 얼굴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서 날 걱정해주는 거야?”
주민이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웃어? 웃음이 나와?”
현덕은 끝내 폭발하고야 말았다.
“왕따 당하니까 좋냐? 좋아? 이 마조히스트야!”
“좋진 않지. 내가 왕따를 당했다면서?”
주민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래! 주민 형, 우주민 너!”
‘하고 다닐 게 없어 왕따나 당하고 다니냐?’란 말이 목 끝까지 치솟았다. 하마터면 내뱉을 뻔했다.
사람이 싫으면 그냥 저 혼자 싫어하고 말면 된다. 지구에 사는 인간의 인구가 60억이 넘는다는데, 어떻게 60억 모두가 서로 좋아하며 살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자기가 싫어한다고 다른 사람들을 선동해서 사람을 괴롭히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건 엄연히 범죄다. 따돌림 피해자는 그저 가해자의 범죄에 휘말린, 말 그대로 피해자일 뿐이다.
아는데.
화가 났다.
분했다.
왜 따돌림을 당하면서 가만히 있었던 건지.
왜 따돌림을 당하면서 나한테 말을 안 해준 건지.
왜 따돌림을 당한 건지.
왜.
왜.
왜!
네가 나한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데. 내가 죽고 싶었을 때 너 때문에 얼마나 큰 위안을 받았는데.
날 살려준 네가 왜 여기에서 따돌림이나 당하고 있는 건지.
납치를 당할 뻔했을 때 나한테 살려달라고 했으면서. 그때는 손 내밀었으면서 왜 지금은 그러지 않은 건지.
화를 내고 싶었다.
그래서 달려왔건만, 빌어먹을 우주민은 따돌림당한 스트레스로 정신이 나갔는지 뭐 좋다고 웃어대고 있었다. 그걸 보는 게 분해서 눈물이 났다. 그런데 이 눈물을 저 우주민한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으……씨.”
현덕은 옷소매로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우주민이 그 팔을 붙잡았다.
“왜 날 걱정해주는 건데?”
귓가에 빌어먹을 우주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웃음 반 소리 반이었다. 어쩐지 달콤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남은 지 때문에 울고 있는데, 정작 본인은 좋다고 웃고 있었다.
“그럼 축하해줄까? 어? 그랬으면 좋겠어요?”
현덕은 고개를 들고 큰 소리로 말했다.
눈앞에 주민이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웃지 말라고!”
보다 못한 현덕은 두 손을 벌려 주민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키 차이 때문에 주민이 목과 등을 수그려야 했다. 꽤 불편한 자세였지만, 주민은 찍소리도 하지 않고 얌전히 현덕에게 안겼다.
머리카락 위로 뚝, 뚝, 현덕의 눈물이 떨어졌다.
‘혼자 내내 고생했을 거면서. 마음고생 몸 고생하면서, 아무한테도 말 못 하고 혼자 끙끙 앓았을 거면서.’
연습실 한구석에 홀로 앉아 있는 주민. 안무도 안 가르쳐주고 자신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연습생들 사이에 서 있는 주민. 수십 명의 싸늘한 시선 속에서 홀로 쪼그라들어 작아지는 주민.
머릿속에 가득 찬 건 오로지 그런 주민뿐이었다.
현덕은 주민의 머리통을 끌어안은 채로 끅, 끅, 울음을 삼켰다.
그 소리가 너무도 서럽게 들렸다. 현덕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계속 웃고 있던 주민은 약간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물론 느끼자마자 바로 뿌리 뽑아버렸다.
“날 걱정했어?”
주민은 현덕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물어보았다.
“당연한 거 자꾸 묻지 말라고!”
현덕은 주먹으로 주민의 등을 퍽, 한 대 치며 대꾸했다.
주민의 어깨가 떨렸다. 현덕은 그가 울음이 복받쳐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다.
“원래 지금 시간이면 찌끄레기들과 연습할 시간 아닌가? 그 연습 빼먹고 여기 온 건가?”
굳이 묻지 않아도 ‘찌끄레기’가 준비와 피터를 말하는 거란 걸 알았다.
“그래! 왔다!”
“내가 걱정돼서?”
“그렇다니까.”
“거기 같이 있던 찌끄레기들보다 내가 중요해서?”
“그 사람들은 주민 형, 너처럼 손 많이 안 가거든? 알아서 잘 살아. 혼자 따돌림 같은 거나 당하고 말이야.”
“맞아.”
주민이 킥킥댔다. 현덕은 그런 주민의 등을 퍽퍽 내리쳤다.
“뭘 잘했다고 웃어. 울어도 시원찮을 판에!”
“응, 나 울고 싶어.”
주민의 목소리는 더없이 밝았다. 현덕이 들어본 주민의 목소리 중 최고로 밝았다. 전혀 울고 싶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래서 현덕은 더 안타까웠다.
“왜 진작 말 안 했어요.”
“그러게. 그럴걸.”
주민의 손이 현덕의 허리를 휘감았다.
“더 걱정해줘. 난 네 말대로 그 찌끄레기들이랑 다르게 혼자서 아무것도 못 해. 그러니까 네가 이렇게 와줘야 해. 계속, 계속.”
솜사탕을 만지듯 조심스럽던 손길은 이내, 우악스럽게 변했다. 놓치면 사라질 것을 붙잡듯, 현덕을 꽉 끌어안았다.
“숨 막혀!”
현덕이 주민의 팔을 밀었지만, 주민은 현덕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현덕은 한참 동안 주민에게 붙잡혀 있었다.
김정이 잔잔해지고야 현덕은 약간의 민망한 마음이 담긴 목소리로 이곳에 혼자 있던 주민을 구박했다.
“그런데 왕따 당하는 사람이 이런 데 위험하게 왜 혼자 있어요. 그러다가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어떡하려고.”
주민이 씩 웃으며 고개로 옆을 가리켰다.
현덕이 영문을 몰라 하자 손을 들어 수북한 나뭇잎을 젖혔다. 새끼손톱만 한 렌즈가 번쩍였다.
“여기도 깔려있거든. 무엇보다 너처럼 이런 것도 모르고, 날 치러 왔다면 상대해주면 되는 거고. 이 앞에서.”
“…….”
렌즈를 보고 잠시 고민하던 현덕은 이내 렌즈 앞에 섰다.
“저, 제 부분은 편집 부탁드려도 될까요?”
현덕은 공손하게 부탁했다. 그걸 본 주민이 피식, 웃었다.
현덕이 뜨악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주민은 방금 현덕이 꾸벅 인사한 렌즈를 잡아 당겼다. 렌즈만 딸려 나왔다. 카메라는 보이지 않았다. 그걸 본 현덕의 얼굴이 대번 뚱해졌다.
“내일 미션이 이거인 거 같던데. 제작진이 해놓은 거야.”
주민은 자신이 설치한 것이 아니라고 항변했으나,
“매를 버시네요.”
현덕의 분노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현덕은 주먹을 쥐고 흔들었다.
그 솜 주먹의 위력이야 아까 충분히 맛보았지만. 주민은 무서워하는 척하며 물러섰다가 이내, 다시 현덕을 껴안았다. 놓으라고 버둥대는 현덕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눈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겨주었다.
고맙다는 말 대신, 한참 울어 퉁퉁 부은 현덕의 눈을 손으로 덮어주었다.
“시원하다. 좋아.”
현덕은 얌전히 주민의 손길을 받았다. 안 그래도 눈이 화끈거려 아프던 차였다.
주민은 숨소리마저 죽이고 현덕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손아래 현덕이 무방비 상태로 놓여 있었다.
울컥 치솟는 감정을 견디지 못하고 현덕의 두 눈을 덮은 자신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현덕이 볼 수 없는 감정이 그 얼굴에 스쳐 지나갔다.
‘큰일 났네, 김현덕. 나한테 붙잡혀서.’
***
주민은 기분이 좋았다. 여전히 안색은 거칠고 눈 밑의 다크 서클은 두꺼웠지만 입이 웃고 있었다. 물론 그 웃음은 보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미소는 아니었다.
블루 기숙사 연습생들은 그런 주민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불안해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주민은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주민의 기분이 좋은 것과는 별개로, 오늘도 주민은 댄스 트레이닝 시간에 혼자 혼났다. 여느 때와 다름 없는 패턴이었다.
연습생들은 다음 평가 발표 무대를 준비하기 위해 기숙사 안에서도 여러 팀으로 나뉘었다. 댄스 선생님은 각 팀이 준비한 안무를 보고 다른 기숙사와 달리 좀 더 천천히, 세부적으로 지도해주었다.
주민이 포함된 팀이 준비해온 것을 보고는 여지없이 주민을 지적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동작도 오케이를 받지 못했다.
댄스 선생님은 숨 쉬듯 자연스럽게 주민을 혼냈다. 다른 연습생들은 무거운 분위기에 휩쓸려 고개를 푹 숙였다. 팀의 리더인 제순은 잔뜩 풀죽은 모습을 한 채로 다 제 잘못이라고 말했다. 댄스 선생님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주민이 그 말에 수긍했다.
“맞습니다, 리더가 제대로 안 가르쳐줘서 제대로 연습을 못 했습니다.”
사실이었으나 댄스 선생님이 듣기엔 비겁한 변명이었다.
“너 그게 지금 니가 취해야 할 올바른 태도라고 생각하니? 실력이 없으면 겸손하기라도 해야지!”
댄스 선생님은 더욱 큰 소리로 화를 내며 연습실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리더인 제순은 울음을 참는 듯 어깨를 떨었다. 주민은 그가 웃음을 참기 위해 제 손등을 꼬집고 있는 걸 보았다. 딱히 억울하거나 화가 나지 않았다. 원래 인간이란 자기 이득을 위해선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을.
댄스와 보컬, 혹은 랩 트레이닝 수업을 마친 후엔 식사 시간이었다. 식사 후엔 기숙사 내 각 팀 별로 나뉘어 연습했다.
식사 후 단짝인 지용과 제순이 함께 연습실로 향했다. 주민은 그들의 뒤를 따라붙었다. 둘은 곧 주민의 존재를 눈치챘다. 걸음을 빨리하여 주민과 거리를 벌리려 했으나 주민은 그들을 놓치지 않았다.
평소 주민은 손만 닿아도 끔찍하단 표정을 지으며 씻으러 갔다. 블루 기숙사 연습생들 사이에선 주민이 결벽증이 있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그런 주민이 둘 사이에 불쑥 끼어들어 어깨동무를 했다. 주민이 둘보다 키가 큰 터라 둘은 꼼짝없이 주민의 팔에 갇혔다.
“뭐야.”
“이거 안 놔!”
둘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하지만 주민이 턱으로 복도 구석에 붙어 있는 카메라를 가리키자 금세 얌전해졌다.
“우주민 연습생, 깜짝 놀랐잖아.”
“뭐야, 평소에 안 하던 행동을 하고 그래.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둘은 금방 태도를 바꿨다.
“왜 그래? 우리는 줄곧 같은 팀이었잖아. 억지로 같은 팀 하면서 날 괴롭힐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이렇게 내외해? 왜, 내가 화를 내면서 너흴 패기라도 할까 봐?”
주민이 활짝 웃으며 물었다.
제순과 지용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농담을 진담처럼 하면 우린 어떡하냐며 말하면서 어떻게든 주민에게서 벗어나려 애썼다.
“으윽!”
“아, 아프다고.”
주민은 둘의 어깨를 부술 듯 세게 움켜쥐었다.
둘은 어떻게든 장난치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썼지만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왜들 그래? 화장실이 급한 것처럼. 진짜 화장실 급해? 같이 갈까?”
주민은 둘을 질질 끌고 화장실로 갔다.
“아, 아냐. 안 급해!”
“화장실이 아니라고!”
굳이 눈앞의 화장실을 두고, 스태프용이라고 쓰여 있는 구석진 화장실로 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제순과 지용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둘은 주민이 이렇게 갑자기, 대놓고 자신들을 공격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에야 주민과 자룡 콤비에게 화장실에서 당했던 일이 선명했던 터라 소혁에게 지시를 받은 것보다 소극적으로 주민을 따돌렸다. 하지만 주민이 당하고만 있자 둘은 소혁이 선을 넘지 말라고 경고한 것을 잊고 더 과감해졌다.
기숙사 연습생들이 자신들에게 동조하고 사방에 촬영 카메라가 있는 이상 주민도 함부로 나설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이렇게 대놓고 다가올 줄이야.
“나대지 말라고 미리 경고 했는데. 뭐, 그래서 김현덕 연습생 안 건드린 건 칭찬해. 그런데 날 건드리다니. 남한테 맞는 걸 좋아하나 봐?”
주민은 마치 노래를 부르듯 흥얼거리며 말했다.
‘뭔 개소리를 하는 거야, 미친 새끼!’
‘또라이 새끼.’
둘은 속으로 주민을 욕했다.
다행히도 주민은 스태프용 화장실까지 가지는 않았다. 대신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복도 구석에 둘을 몰아 넣었다. 두 사람의 얼굴 위로 주민의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주민은 예고도 없이 둘의 무릎을 발로 깠다.
“억!”
“윽!”
제순과 지용은 제각기 자신들이 좋아하는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었다.
“어디 더 크게 소리 질러 봐. 소란이 커지면 누가 손해일까?”
주민이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난 너희들이 수를 쓴 대로 계속 평가 무대를 죽 쒀서 이대로 쭉 F 평가를 받다가 떨어지겠지. 뭐, 그건 너희도 마찬가지일 거 같긴 한데. 떨어질 때 떨어지더라도 이미지는 좋게 가야 되지 않을까? 다른 연습생을 따돌리는 데 앞장섰다고, 굳이 전국에 방영되는 프로그램에서 주목 받을 필요는 없을 텐데?”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누가 누굴 따돌렸다고?”
“그래.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 우리가 언제 너를 왕따 시키기라도 했냐?”
둘은 주민의 말에 즉각 반박했지만,
“자신 있으면 어디 제작진 앞에 가서도 그렇게 당당히 말해 봐.”
주민은 대놓고 그들을 비웃었다.
제작진이 지금 블루 기숙사의 상황을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가만히 있다는 건, 분명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언제, 어디서든 무언가가 빵 터지기를.
주민과 이들이 말싸움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주먹질을 하며 치고받는다면? 제작진은 심의 경고를 받을 각오를 하고서라도 그 장면을 방송으로 내보낼 것이다.
그러면 누가 손해일까. 제작진의 카메라는 누구를 선하게 편집해주고 누구를 악하게 만들까. 답은 뻔했다. 프로그램 촬영 전부터 데뷔 후보로 손꼽히는 주민에 비하면 제순과 지용은 인지도가 한없이 낮았다.
‘넌 애초부터 춤을 못 췄잖아.’
‘굳이 우리가 안 건드렸어도 넌 블루 기숙사 못 벗어났어.’
둘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을 꿀꺽 삼켰다.
소혁은 우주민을 건들지 말라고 했다. 카메라에 잡힐 정도로 티를 내지도 말고, 그저 그가 평가 무대에서 두드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붙잡고 늘어지라고. 어차피 주민의 춤 실력은 구제 불능이니까, 화제성을 얻지 못하도록 하면 탈락은 따논 당상이었다. 프로그램 제작진이 아무리 주민을 살리고 싶은들, 주민이 두드러지지 않는다면 탈락시킬 수 밖에 없으리라.
“너흰 조미료 역할만 하는 거야.”
소혁이 말했다.
그런데 그 조미료들이 주체적으로 행동하여 과하게 몸을 털어버렸다. 조미료 폭탄을 맞은 주민은 머리가 텅 빈 조미료들을 구석에 몰아넣고 마저 탈탈 털어버렸다.
“나는 당한 만큼은 꼭 돌려줘야 직성이 풀리거든.”
주민이 손의 관절을 풀며 말했다. 손가락에서 뼛소리가 날 때마다 제순과 지용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건 사람의 본성이다. 그보다 더한 쓰레기는 강자가 강자인지 모르고 그 앞에서 강한 척을 하는 것이다. 조금만 강하게 밀고 나가도 이렇게 꼬리를 말 것을.
언제나 그랬다. 약하면 당한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더 당한다.
사람은 너무나 약하고 악해서,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짓밟으려고 한다. 그동안 주민이 만나왔던 모든 사람이 그러했다.
단 한 사람만을 제외하고.
그 단 한 사람 때문에 그나마 이 정도로 유하게 행동하는 것이었다. 이름도 잘 기억 안 나는 이 둘 덕분에 어젯밤 주민은 현덕을 손에 쥘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번은 특별히 봐주려고.”
오늘 주민은 기분이 너무 좋았다. 자신과 현덕 사이에 오작교 역할을 한 이 못생긴 까치와 까마귀들을 너그러이 봐줄 만큼.
제순과 지용은 주민이 어깨에 손을 가져다 대자 움찔, 움츠러들었다.
“긴장 풀어, 안 때릴 테니까.”
주민이 피식 웃으며 둘의 어깨를 손으로 툭툭 쳤다.
가벼운 터치였으나 아까 주민의 손에 어깨가 부서질 뻔했던 둘은 어깨를 망치로 내리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무튼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뭐, 뭘?”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주민은 제 할 말만 내뱉고는 산뜻하게 돌아섰다.
제순과 지용은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긴장을 풀지 못했다. 주민이 그림같이 돌아서 니킥을 날릴지 모른다는 허황된 상상까지 했다. 물론 주민은 굳이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았다.
주민은 그대로 왔던 길을 되돌아 걸었다. 등 뒤에 남겨둔 제순과 지용은 바로 잊었다. 주민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사람만으로 가득 찼다.
지난 한 달 내내, 주민은 짜증이 나 있었다. 현덕과 같은 기숙사가 아니라서 짜증이 났다. 어떻게든 B 이상의 평가를 받아 오렌지 기숙사로 올라가야 되는데 그게 쉽지 않아 더욱 짜증났다.
노래를 잘 부르면 춤이야 좀 못 춰도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 평가 선생님들은 유독 엄격하게 굴었다.
그런데 그런 남의 속도 모르고, 현덕은 날파리 둘을 곁에 붙이고 다녔다. 뭐가 좋은지 그 두 날파리에게 방긋방긋 웃어 주었다. 지난 한 달 내내.
그런데 어젯밤, 현덕이 홀로 주민을 찾아왔다.
생각만 해도 입꼬리가 제멋대로 들썩였다.
주민은 현덕의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블루 기숙사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던 처지임을 깨달았다.
‘영 귀찮게 안 굴어서 편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날 따돌린 거라고?’
현덕의 말을 들으니 떠오르는 얼굴은 둘이었다. 이름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둘은 언제나 자신을 보며 기분 나쁘게 히죽대곤 했다. 굳이 자신과 같은 팀이 되려고 나대고 그것도 모자라 주민과 같은 숙소를 썼다. 잠귀가 밝다 못해 예민한 주민은 그 둘의 코 고는 소리 때문에 매일 밤잠을 설쳤다. 주민의 얼굴이 초췌해지고 다크 서클이 생긴 건 그 때문이었다.
같잖아서 가만 두고 보고 있었는데, 잠까지 못 자게 코를 골아대다니. 짜증이 나서 이제 슬슬 한번 난동을 부려볼까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어떻게 난동 부릴까 고민도 할 겸 찬바람을 쐬러나갔다. 주변에 사람이 얼쩡거리는 게 싫어서 일부러 인적 드문 곳에 서 있었건만. 난데없이 현덕이 나타났다.
내내 금붕어 똥처럼 붙어 다니던 찌끄레기 둘도 어딜 갔는지, 아니 떼어버리고 왔는지 보이지 않았다. 온전히 혼자인 채로 자신을 걱정해 달려온 현덕을 보자니 손끝이 찌릿찌릿하게 저려왔다.
두 눈이 잔뜩 부은 상태로, 현덕이 말했다.
“내일 새벽 두 시에, 우리 연습실에서 만나요.”
새벽 두 시까지 아직 열 시간이나 남았다.
오늘따라 시간이 너무 천천히 흘러갔다.
***
주민을 붙잡고 펑펑 울었던 현덕은 다음 날, 붕어 눈이 되었다. 퉁퉁 부은 눈이 화끈거리고 아팠다.
오렌지 기숙사의 연습생들은 그런 현덕을 보고 모두 웃었다. 피터와 준비만이 현덕을 걱정해주었다.
“어제 저녁 연습도 빼먹고 숙소에도 늦게 들어오더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피터가 걱정스레 물었다.
“누가 형 괴롭혀? 어떤 놈이에여?”
준비는 현덕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누구든 이름을 말하면, 뛰쳐나가 복수를 해주고 오겠다며 성화였다.
현덕은 그 둘을 매달고 하루 일과를 소화했다. 하루가 반쯤 지나자 부기가 가라앉았다.
현덕은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자룡을 찾아갔다. TE엔터테인먼트에서도 알아주는 연습광이었던 자룡은 트라이 온 촬영에서도 여전했다. 쉬는 시간에도 연습실에 박혀 있었다.
이미 레드 기숙사에서 소혁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평가 1, 2위를 다투고 있는데도 자룡은 만족하지 못했다. 저녁 식사도 일찌감치 마치고는 레드 기숙사에게 주어진 연습실에서 거울을 바라보며 춤을 췄다. 연습실에는 오직 자룡뿐이었다.
똑똑-
닫힌 문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음악 없이 춤을 느리게 추며 동작의 각도와 몸의 선을 체크하고 있던 자룡이 움직임을 멈췄다.
‘누구지?’
레드 기숙사의 다른 연습생이었다면 노크 없이 그냥 들어왔을 것이다. 다른 기숙사의 연습생들은 프로그램 규칙에 따라 레드 기숙사의 연습실로 오지 않고 있고.
‘제작진? 깜짝 미션인가?’
자룡은 문밖에 선 사람이 누군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들어오라고 소리쳤다.
문이 열리고 현덕이 걸어 들어오자 자룡이 깜짝 놀랐다.
“현덕이? 김현덕? 니가 거기서 왜 들어와?”
“형? 왜 그렇게 놀라요?”
자룡의 반응에 현덕은 더 깜짝 놀랐다.
“아…….”
자룡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음…….”
현덕도 문손잡이를 두 손으로 붙잡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미안. 내가 좀 놀랐어.”
침묵을 깬 건 자룡이었다.
“아뇨, 형. 연습하는 데 방해해서 미안해요.”
현덕도 고개를 꾸벅 숙이며 사과했다.
“아니, 아니. 연습 방해했다고 놀란 게 아니야.”
자룡은 현덕의 말에 또 화들짝 놀라며 두 손을 마구 내저었다.
“네가 저번에 그랬잖아. 기숙사 규칙은 꼭 지키자고. 그래서 네가 날 찾아올 줄 몰랐거든. 그래서 놀란 거였어.”
자룡이 겸연쩍어하며 말했다. 자룡의 말에 현덕은 부끄러워졌다. 그 속내를 감추지 못해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현덕은 문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자룡의 땀과 열기로 가득 찬 연습실 안으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제 와서 자룡을 찾아와도 되는 걸까, 너무 늦은 건 아닐까.
“야야, 씨-앗. 이게 꿈은 아니겠지? 현덕이, 네가 날 찾아와주고 말이야.”
자룡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걱정을 때려 부숴 주었다.
“안 들어오고 뭐 해, 얼른 들어와.”
자룡이 손을 흔들며 현덕을 재촉했다. 그제야 현덕은 연습실 안으로 들어갔다.
“잘 지냈지? 한 건물에 지내는데 얼굴 보기가 왜 이렇게 어렵냐.”
자룡은 활짝 웃으며 현덕에게 양팔을 내밀었다. 현덕은 당연하게 자룡에게 다가가 푹 안겼다. 툭툭, 자룡의 굵게 마디진 손이 현덕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어?”
현덕은 자룡의 어깨높이가 약간 달라진 걸 느꼈다.
“형, 키 컸어요?”
현덕이 자룡을 껴안았던 팔을 풀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자룡은 잠시 아쉬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나 좀 큰 거 같지?”
안 그래도 키가 큰 게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는데, 현덕이 나타나 그리 말해주자 자룡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네, 확실히요.”
“여기 와서 키가 좀 큰 거 같아. 잘 때 무릎이 아프다거나 그러지는 않은데, 확실히 시야가 좀 높아진 느낌이랄까? 네가 좀 작아진 거 같기도 하다, 현덕아?”
자룡이 손으로 제 키와 현덕의 키를 재 보듯 움직이며 말했다.
“삼시 세끼 꼬박꼬박 먹고 제시간에 잠도 잘 자고, 그래서 그런 거 아닐까요? 군대 가서 키 크는 사람들도 있다잖아요.”
프로그램에 출연하기 전에 자룡의 주식은 컵라면이나 봉지라면이었다. 주말엔 알바 하느라 바빴고, 평일에는 밤늦게까지 연습실에 처박혀 있다가 밤늦게 자취방에 돌아가 잠들기 일쑤였다. 그렇게 불규칙한 생활을 하다 모처럼 규칙적인 생활을 하게 되니, 움츠러들어 있던 몸이 펴지는 듯했다.
자룡은 그동안 알게 모르게 키에 대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었던 터였다. 그렇다고 키가 작은 건 아니었다. 연습생 중에서도 키가 큰 편이었다. 몸의 비율도 좋았다. 하지만 더 훤칠한 주민을 볼 때마다 키가 좀 더 컸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랬건만 스무 살이 되어 뒤늦게 키가 더 자라고 있는 것 같다니.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자룡은 벽에 기대앉아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현덕은 자룡의 옆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댔다.
맞은편 벽은 거울로 되어 있었다. 연습실 벽에 나란히 앉아 있는 현덕과 자룡을 고스란히 비췄다. 땀에 흠뻑 젖어 있는 자룡과 그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현덕.
현덕은 멍하니 거울을 바라보았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둘이서만 있던 적이 많았다. 트라이 온을 촬영하기 전, TE연습생이기만 했던 시절엔 늘 그랬다.
같은 팀이 되어 주간 평가나 월말 평가를 준비하지는 않았지만, 서로의 트레이닝 시간표를 꿰고 있어 나머지 시간에 함께 연습하곤 했다. 연습하다 힘들면 이렇게 주저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엇이 힘든지, 이번 안무에서 어떤 동작이 성가신지 투덜댔다. 오 팀장님 뱃살이 더 늘어난 것 같다느니, 보컬 선생님이 감기에 걸린 것 같다느니, 어느 기획사에서 다음 달에 보이 그룹이 하나 새로 나온다느니. 소소한 대화를 나누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형, 어때요?”
“뭐가?”
“힘들거나 곤란한 일 있었죠? 아마 지금도 진행 중일 거 같은데.”
현덕은 돌려서 말하지 않았다. 한 달 만에 자룡과 둘이서 이야기할 시간을 얻었는데 날씨가 좋다느니, 기숙사 규칙이 엄하다느니, 그런 겉치레 대화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어?”
자룡의 뺨이 움찔, 떨렸다.
“형. 저번에 오렌지 기숙사로 저 찾아왔잖아요.”
“아, 그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거였어?”
자룡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애써 밝은 목소리를 만들어 말했다.
“그건 그냥, 너 적응 잘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가 본 거였지. 형이 되서 동생 챙기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어?”
“그런데 주민 형한테는 안 가봤잖아요.”
“너랑 그 자식이랑 같냐? 넌 내가 아끼는 동생이고 걘 걍 싸가지고.”
자룡은 말을 하는 내내 현덕을 보지 않았다. 현덕은 자룡이 말하는 내내 자룡을 바라보았다. 자룡의 입가가 억지로 웃는 웃음 때문에 떨렸다.
“형, 무슨 일이에요. 나한테 말해 줄 수 없어요?”
현덕은 자룡이 무릎 위에 올려져 있는 자룡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손등에 현덕의 온기가 닿자 자룡의 손이 퍼덕였다.
자룡의 손은 거칠고 울퉁불퉁했다. 춤 연습을 하다 손가락이 삐거나 부러진 적이 여러 번이라 상처가 많았다. 이 손은 자룡이 쌓아온 노력을 증명하는 징표였다.
현덕은 언제나 이 손을 좋아했다. 이 손이 쌓아 온 자룡의 열정과 노력을 존경했다. 그랬기에 자룡이 이 손을 자신에게 뻗었을 때, 자신이 알아채지 못하고 돌아서 버렸다는 게 슬펐다.
현덕이 자신의 손을 잡고 놓지 않자 자룡은 그 부리부리한 눈을 데굴, 굴렸다. 제 무릎 위에 올라와 있는 현덕의 손을 내려다보며,
“별일은 아니고……. 그냥…….”
겨우 말을 꺼냈다.
현재 A 평가를 받은 연습생은 총 8명이었다. 레드 기숙사는 두 번의 주간 평가를 거칠 동안 7명에서 8명의 정원을 유지했다. 한두 명을 제외하면 레드 기숙사의 소속 연습생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레드 기숙사에서 단연 돋보이는 건 개인 연습생인 원소혁과 TE엔터테인먼트 소속 박자룡이었다. 소혁은 보컬과 댄스, 자룡은 랩과 댄스 부분에서 우수했다. 댄스 포지션에서 둘은 막상막하였다. 댄스 선생님마저 혀를 내두르며, 아직까지 왜 데뷔를 안 했냐고 따져 물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매 주간 평가에서 팀의 메인 위치와 중요 파트를 누가 차지하느냐는 큰 관심을 받았다. 다른 연습생들도 욕심을 내지 않는 건 아니지만, 결국 끝에 가서 최종 후보로 남는 건 자룡과 소혁이었다.
자룡은 다른 연습생들을 짓밟아서라도 곡의 중요 파트를 차지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잘할 자신이 있는데 메인 자리를 거절할 만큼 자신감이 없지도 않았다.
자룡은 매번 팀의 메인 자리를 도전했다. 그건 소혁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두 사람의 기 싸움이 상당히 심했다. 자룡은 거기서 스트레스를 받았다.
현덕은 자룡의 이야기를 들으며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이전에 두 번의 평가 무대에서 누가 센터에 섰지?’
기억이 맞다면 처음 무대에선 자룡이었고 두 번째 무대에선 소혁이었다.
첫 무대 이후 소혁은 사사건건, 작은 일 하나에도 트집을 잡아가며 자룡을 들들 볶았다. 자룡은 내심 소혁을 선의의 라이벌, 마음 속의 멘토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소혁의 끼와 실력은 최고의 평가를 받은 A급 연습생들이 모여 있는 레드 기숙사 중에서도 빛났다. 하지만 소혁만 빛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레드 기숙사에는 자룡이 있었다.
소혁은 그걸 인정하지 않고 자룡을 자꾸 제 밑에 두려 했다. 자룡은 한 달 내내 그런 소혁과 끊임없이 부딪치며 촬영을 해야 했다.
오 팀장은 촬영에 들어가면 다른 기획사 연습생들의 견제가 장난이 아닐 거라고 경고했다. 지난 ‘트윈 트윙클’의 촬영에 참가했던 연습생들도 자룡이 ‘트라이 온’에 참가한다는 소식을 듣고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그래서 충분히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그래도 견디기 쉽지 않았다.
연습생 생활을 하며 데뷔조에 들기 위해 경쟁하고 견제받는 경험을 여러 번 해보았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강도 자체가 달랐다. 원소혁은 혼자서 일당백의 성능을 자랑했다.
소혁과 관계가 틀어졌음에도 하루 종일 함께 생활하며 소혁에게 들들 볶이는 건, 정말 보통 멘탈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견디다, 견디다 지쳐서 ‘지금 내가 뭐 하는 짓인가.’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현덕이 보고 싶었다.
현덕이 잘 있는지, 그 기숙사는 레드 기숙사와 다른 분위기인지, 혹여 자신과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됐다. 자신이 레드 기숙사에서 소혁과 겪는 일을 하소연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래서 찾아가 보았던 것이었다.
“아- 이렇게 말하고 나니 속이 시원해진다.”
자룡이 어깨를 쫙 펴더니 크게 기지개를 했다. 그리고는 무릎에 팔을 쌓고 그 위에 얼굴을 묻으며 우와악, 괴성을 질렀다.
“나 진짜 힘들었어, 현덕아.”
“그런 거 같아요. 형, 진짜 고생 많았어요.”
현덕은 자룡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빨리 못 알아채서 죄송해요.”
“낯간지러운 소리는 하덜 말고. 정 미안하면 빨리 레드 기숙사로 좀 올라와라. 왜 계속 거기 있는 건데.”
자룡은 오렌지 기숙사 연습생들이 들으면 세모 눈을 뜨고 달려들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평가가 움직이질 않네요.”
현덕이 조심스럽게 대답하자, 자룡이 여전히 웅크린 채로 고개를 옆으로 돌려 현덕을 바라보았다. 비로소 자룡이 현덕을 봐 준 것이었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톡 건드렸을 뿐인데 기다렸다는 듯 제 속마음을 쏟아낸 게 부끄러운 듯 했다. 자룡의 얼굴이 벌개졌다. 귀까지 빨갰다.
“내가 좀 봐줄까? 너 평가 무대 준비하는 거?”
자룡은 다른 연습생들의 눈을 피해 하루에 한두 시간씩, 현덕의 무대 안무를 봐주겠다고 했다.
자룡이 고작 B 평가를 받은 오렌지 기숙사들의 무대 안무 아이디어를 훔치기 위해 제안을 하는 건 아닐 터였다.
‘역시 같은 회사에서 연습해서 그런가? 대처 방식이 똑같네.’
현덕은 자룡의 제안을 듣고는 빙그레 웃었다.
바로 어제, 현덕은 주민에게 비슷한 제안을 했다. 계속 F 평가를 받으며 블루 기숙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주민을 염려해서였다.
그리고.
“아니요. 마음만 고맙게 받을게요.”
어제의 주민은 현덕의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오늘의 현덕은 자룡의 제안을 거절했다.
“왜! 현덕아, 씨, 앗!”
“어차피 오렌지 기숙사에 계속 있으면 통과는 하잖아요. 떨어지는 건 그린과 블루 기숙사니까요.”
“떨어지는 게 문제가 아니라 자꾸 카메라에 얼굴 들이밀어서 인지도를 만들어야지. 무대를 열심히 준비하고! 내가 도와주겠다니까?”
“형, 절 도와주면서 시간을 빼앗겨도 원소혁 연습생 이길 수 있겠어요?”
“아, 어? 글쎄, 그건…….”
현덕은 자룡을 단번에 침묵하게 만들었다.
“저는 제가 알아서 잘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대신 형, 이번에는 꼭 형이 센터 해야 돼요.”
원소혁 연습생은 형한테 쨉도 안 될 거예요, 현덕이 힘차게 말했다. 현덕의 말이 마음에 든 듯 자룡이 크게 웃었다.
이 웃음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기숙사 규칙을 어기고서 찾아온 보람이 있었다.
하지만 보람은 보람. 아쉬움은 아쉬움이었다.
‘아무래도 새벽 두 시에 주민 형을 만나는 건 나 혼자 해야겠네.’
사실, 현덕은 주민을 돕기 위해 자룡에게 도움을 요청하고자 했다. 트라이 온 촬영을 준비하며 셋이서 함께 평가곡을 정하고 무대를 고민했던 것처럼. 다시 한번 셋이서 함께 어려움을 헤쳐 나가고 싶었다.
그런데 자룡의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거대한 적을 앞둔 용사에게 다른 곳으로 가서 다른 적과 싸우자고 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셋이서도 무찌르기 힘든 우주민의 댄스를 나 혼자서 감당할 수 있을까?’
뒤늦게 두려움이 몰려왔다.
***
트라이 온의 공식 촬영은 오전 일곱 시부터 밤 아홉시까지였다. 당일 촬영이 종료된 아홉 시 이후에도 숙소나 연습실의 카메라는 밤 12시, 자정까지 돌아간다고 했다. 이러한 촬영 스케줄을 안내받은 건 기숙사 입소 당일이었다.
촬영 초기만 해도 모든 연습실이 자정까지 북적거렸다. 연습생들은 열심히 연습하는 모습을 보이고자 애썼다. 아니면 연습실이나 숙소에서 다른 연습생들과 크게 웃고 떠들었다.
하지만 그런 인위적인 모습은 오래가지 않았다.
지켜보는 스태프 한 명 없이 카메라만 돌아가는 촬영 이후의 시간. 그 침묵의 무게는 보통의 지구력과 성실함으로 버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제일 먼저 썰렁해진 건 블루 기숙사의 연습실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옐로 기숙사와 그린 기숙사의 연습실도 한산해졌다.
2월에 들어서는 밤늦게까지 연습하는 연습생들이 거의 없었다. 가끔 자룡이나 몇몇 연습생들이 자정이 넘겨서까지 연습에 매진했는데, 그 몇몇이 전부였다. 평가 무대를 앞둔 때야 밤을 새우는 연습생들이 수두룩했지만, 그건 특수한 경우였다.
자정 이후의 연습실은 완벽한 공실이었다.
현덕은 이 시간을 이용하고자 했다.
“촬영 카메라 돌아가는 시간엔 대부분 연습생들이 연습실에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차라리 주민 형은 그 시간에 숙소에 들어가서 자요. 그리고 새벽 두 시에, 촬영 카메라가 모두 꺼진 후에 연습실에 와요.”
블루 기숙사의 트레이닝 수업은 오후 7시 정도면 모두 끝났다. 그 이후엔 팀을 짠 연습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개인적으로 연습하는 시간이었다. 현덕은 주민에게 그 시간에 숙소에 들어가 자두라고 했다.
‘어차피 같은 팀 연습생들에게 무시 당하고 도움 받지도 못하는데 눈 뜨고 깨어 있을 필요가 있나요?’
지극히 타당한 이유였다.
“새벽 두 시에 블루 기숙사 연습실에서 만나요. 제가 거기로 갈게요.”
오렌지 기숙사에는 자정이 넘어서까지 연습실을 사용하는 연습생들에 몇 명 있었다. 그에 비해 블루 기숙사의 연습실은 밤 11시만 가까워도 연습실이 한산했고. 자정 이후에는 항상 불이 꺼져 있었다. 남몰래 연습하려면 블루 기숙사의 연습실이 제격이었다.
주민은 현덕의 말대로 했다. 오후 7시에 수업이 끝나자마자 숙소로 가서 침대에 누웠다. 현덕의 말마따나 숙소에 제순과 지용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연습생들도 숙소에 거의 올라오지 않았기 때문에 3층 전체가 텅텅 비어 있었다. 그 고요함 속에서 주민은 오랜만에 푹 잘 수 있었다.
밤 11시가 좀 넘어서 제순과 지용이 돌아왔다. 둘은 문 앞에 서서 죽은 듯 잠든 주민을 봤다. 대놓고 비웃고 싶었으나 숙소에 달린 카메라를 의식해 그러지는 못했다.
‘아예 평가 무대를 포기했나 보지?’
‘아까 낮에 그렇게 지랄을 하더니, 공갈이었나 보네. 존나 허풍만 떨어댄 거 아냐, 괜히 쫄려서?’
둘은 잠든 주민을 보고는 주민이 이제 두 번밖에 안 남은 평가 무대와 앞으로의 촬영을 포기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이 기쁜 소식을 누군가에게 알리기 위해 뛰쳐나갔다.
제순과 지용은 자정이 되기 전에 숙소로 돌아왔다. 둘이 씻는다고 부산을 떨자 주민이 눈을 떴다.
단번에 잠에서 깨는 게 쉽지 않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귓가에서 윙윙 울려대는 제순과 지용의 목소리가 거슬렸지만, 이전만큼 끔찍하진 않았다. 오랜만에 숙면한 덕분이었다.
주민은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 자신이 잠잔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다섯 시간. ……오래도 잤네.’
기숙사 생활을 한 이후 가장 길게 잔 것이었다.
주민은 벽을 바라보며 모로 누웠다. 씻고 나온 제순과 지용은 주민이 여전히 자고 있는 줄 알고 멋대로 떠들어댔다.
제순과 지용이 잠든 이후에도 주민은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 소등된 숙소는 캄캄했다. 시계의 초침이 째깍째깍 움직였지만 그 소리는 제순과 지용이 코골고 잠꼬대하는 소리에 먹혔다.
주민은 말똥말똥한 눈으로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어둠에 익숙해진 두 눈은 어렴풋이 시계의 시침과 분침을 분간해냈다.
새벽 한 시 반.
주민은 소리 없이 몸을 일으켰다.
숙소 바닥은 제순과 지용이 늘어놓은 옷과 물건들로 어지러웠다. 주민은 그것들을 밟지 않고 조용히 숙소를 빠져나왔다.
새까만 복도가 주민을 반겼다. 담이 약한 연습생이라면 감히 걸을 엄두도 나지 않을 만큼 을씨년스러웠다.
주민의 머릿속은 곧 만날 현덕에 대한 생각만 가득해서, 으스스하고 깜깜한 복도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복도 끝엔 의자와 책상이 놓여 있었다. 야간 순찰 당번인 촬영 스태프 한 명이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드르렁, 드르렁. 코 고는 소리가 났다.
시간은 사람을 느슨하게 만든다. 연습생들이 무뎌진 만큼 촬영 스태프들도 그러했다.
1층은 3층만큼이나 깜깜했지만 구석은 환했다.환한 빛이 문틈으로 삐져나와 길게 늘어졌다.
그 빛의 끄트머리가 주민의 발치에 닿았다. 어둠뿐인 삶에 한 줄기 빛이 다가 온 것이다.
주민은 그 빛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블루 기숙사의 연습실 문 앞에 섰다.
쿵쿵.
심장이 떨렸다.
주민은 두 손을 들어 연습실 문고리를 잡았다. 매일 드나드는 연습실이건만. 매일 잡아 돌리는 문고리건만. 모든 게 낮설게 느껴졌다.
‘이런 내 마음을 알까?’
이 문 너머에 단지 네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이런 감정을 가지게 된다는 걸.
주민은 비죽 웃었다. 답은 뻔했다.
모를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몰라야 한다. 이 문 안에 있는 사람이 알기에는 너무나 하찮고 음습한 감정이니까.
문을 열자 어둠에 잠긴 주민에게 빛이 쏟아졌다. 주민은 문 앞에 선 채로 눈을 깜박였다.
“왔어요?”
고작 하루 만인데도 그리운 목소리가 들렸다.
현덕이 연습실 한가운데 앉아 이쪽을 보고 있었다. 눈꼬리에 졸음을 그렁그렁 매달고서는 뭐가 그리 좋은지 웃고 있었다.
무방비하게도.
가엾게도.
주민은 연습실 안으로 발을 디뎠다. 걷고 걸어서 현덕의 앞에 섰다.
“안 졸려요? 난 좀 졸린 데. 나 좀 일으켜줘요.”
현덕이 주민에게 두 손을 내밀었다. 주민은 현덕의 두 손을 꽉 잡아 현덕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현덕에게 절대 하지 못할 말을 마음속으로 끌어내렸다.
***
현덕이 속한 오렌지 기숙사의 마지막 수업은 오후 여섯 시면 끝났다.
저녁 식사를 마치면 이후는 자유 시간이었다. 두 번째 평가 때까지는 그 자유 시간을 운동과 연습으로 채웠다. 밤 열한 시나 열두 시까지 준비, 피터와 함께 움직였다. 괜히 오렌지 기숙사 내에서 삼총사란 별명이 나온 게 아니었다.
하지만 두 번째 평가가 끝난 이후부터는 조금 달라졌다. 현덕은 오후 아홉 시만 되면 칼같이 연습을 멈추고 숙소로 올라갔다.
이전까지는 매일매일 밤 열한 시, 열두 시까지 연습실에 붙어 있던 몇 안 되는 성실한 연습생이었던지라, 그런 현덕의 모습은 여러 사람의 눈에 띄었다. 같은 기숙사 연습생들의 반응은 ‘너도 사람이긴 하구나,’였다. 자신들과 함께 느슨해지는 현덕을 환영했다.
오후 9시의 신데렐라가 되어버린 현덕을 아쉬워하는 건 딱 두 사람, 준비와 피터뿐이었다.
“요즘 많이 피곤한가 봐, 현덕아?”
피터는 돌려 묻는 정도였지만,
“형 요즘 뭐 해여? 왜 그렇게 일찍 자? 우리 다 재우고 밤에 뭐 하러 가는 건 아니죠? 아 왜 자꾸 연습하다 말고 가여. 그러지 마여.”
준비는 대놓고 서운한 티를 팍팍 냈다.
물론 둘 다 농담하듯 말하는 정도로 그쳤다. 요즘 현덕이 정말 피곤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밤 연습을 끝내고 숙소로 올라가 보면 현덕은 침대에 웅크려 곤히 잠들어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피곤하게 잘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침대에 현덕이 없었다. 제일 먼저 알아챈 건 피터였다. 아침잠이 많은 준비는 매일 현덕이나 피터가 깨워줘야 겨우 눈을 떴다. 피터는 새벽 다섯 시만 되면 칼같이 일어났다.
새벽 다섯 시에 눈을 뜬 피터는 텅 빈 현덕의 침대를 보았다. 하루, 이틀, 사흘. 하루하루가 차곡차곡 쌓여도 새벽 다섯 시에 보는 현덕의 침대는 항상 비어 있었다.
처음 하루 이틀이야 일찍 눈이 떠져 먼저 준비하고 나갔겠거니 생각했지만. 그게 닷새를 넘어가자, 피터는 의구심이 들었다.
여섯 시 삼십 분.
숙소에 불이 들어오자 피터는 현덕을 찾으러 나섰다. 기숙사의 다른 방을 열었지만 곤히 잠든 다른 연습생들만 보일 뿐 현덕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1층으로 내려가 오렌지 기숙사 연습실로 가 보았다. 아침 일곱 시쯤이었다.
현덕은 거기에 있었다. 혼자 연습실 벽에 기대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현덕아?”
큰 소리로 불러도 현덕은 깨지 않았다.
피터는 현덕에게로 걸어가며 천천히 연습실을 살펴보았다. 연습실은 어젯밤, 피터와 준비가 마지막으로 나서며 불을 끄고 나간 그대로였다. 누군가 연습을 하느라 어지러뜨린 흔적은 없었다.
그런데 현덕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여기가 아니라면 다른 곳에서 연습을 하고 온 거라는 건데, 그게 어딜까.’
홀로 웅크려 잠든 현덕은 셜로키언의 흥미를 돋우었다.
피터는 현덕의 앞에 무릎을 접고 앉았다.
“현덕아, 일어날 수 있겠어?”
현덕의 양어깨를 잡아 살짝 흔들어 보았다. 그래도 현덕은 정신을 못 차렸다. 피터가 흔드는 대로 종이 인형처럼 흔들렸다.
고개를 까닥이는 인형처럼 좌우로 흔들리는 현덕을 보며 피터는 작게 웃었다.
“보고 있으면, 김맹덕 상병이 왜 그리 걱정을 했는지 이해가 된단 말이지.”
피터는 현덕을 깨우는 대신 단 삼십 분 만이라도 현덕이 좀 더 편히 잘 수 있도록 도와주기로 했다.
피터는 양팔을 현덕의 목과 무릎 뒤에 넣고 현덕을 들어 올렸다. 자신보다 조금 작긴 하지만 그래도 열여덟 살이나 먹은 소년이다. 한 번에 들어 올리는 건 좀 무리가 아닐까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번쩍 들렸다.
보기에도 마르고 가느다래 보이기는 한데, 막상 들어보니 생각 이상으로 가벼웠다. 피터는 아직 군대에 갇혀 있는 맹덕을 떠올려 보았다. 맹덕은 키가 크고 다부졌다. 자신은 용가리 통뼈라고 자랑하며 맹렬히 삽질하던 모습이 아직 생생했다.
나이 차가 많이 나더라도 형제는 형제인데, 어쩜 이렇게 다를까.
‘나랑 누나도 이렇게 달랐을까.’
피터는 씁쓸히 웃고 말았다.
현덕은 자신이 들려 옮겨지는 지도 몰랐다. 아예 피터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는 색색, 고른 숨을 내쉬었다. 피터는 현덕을 조심히 안아 들고는 숙소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침대 위에 현덕을 눕혀주었다.
시계를 확인하고는 최대한 현덕이 좀 더 잘 수 있는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아침 체조 시간을 땡땡이치면 한 시간 정도는 더 자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셋이서 단체로 지각 좀 해볼까?”
피터는 이불을 돌돌 말아 애벌레 모양을 한 채로 잠든 준비에게 말했다.
“으으, 우웅…….”
잠든 준비는 이불에 고개를 폭 묻으며 잠꼬대를 했다. 피터는 그것을 긍정의 대답으로 받아들였다.
피터는 현덕의 침대 머리맡에 걸터앉아 현덕을 보았다.
현덕은 자는 모습도 순했다. 침대를 빙빙 돌다 못해 종종 침대 밑으로 떨어지기까지 하는 준비와는 영 딴판이었다. 현덕은 눕혀 놓은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두 손으로 베개를 꼭 쥐는 게 그나마 잠버릇인 듯 했다.
피터는 현덕의 얼굴에 붙은 젖은 머리카락을 떼어내 뒤로 넘겨주었다. 하얀 현덕의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잔다는 게 이런 거구나.’
피터는 새삼 감탄했다.
“준비 말대로 의심이 가네. 요즘 계속 피곤해 보이기도 하고.”
몽유병일까. 아니면 오렌지 기숙사의 다른 연습생들을 의식하여 혼자 몰래 연습하는 걸까. 머릿속에 몇 가지 가설이 떠올랐지만 어쩐지 모두 다 탐탁지 않았다.
“밤마다 뭘 하고 다니고 있나. 형 걱정되게.”
피터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려주었다. 그 손길은 더없이 다정했지만 입가엔 쓴웃음뿐이었다.
잘 자는 현덕을 보던 피터는 길게 하품을 했다. 다시 졸음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우웅……. 우잉! 푸히히-”
무슨 꿈을 꾸는 건지 준비가 잠꼬대를 하며 웃었다. 숙소엔 잠기운이 그득했다.
“나도 한숨 더 잘까?”
어차피 아침 스케줄을 땡땡이치기로 결정한 상황. 따로 할 일도 없었다.
피터는 현덕의 머리맡에 팔을 겹치고 엎드렸다. 색색- 귓가에 들리는 현덕의 숨소리를 들으며 피터도 다시 눈을 감았다. 어쩐지 오랜만에 아무 꿈도 꾸지 않고 잠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한 시간 뒤.
준비가 눈을 떴다. 창문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 때문에 눈을 안 뜰래야 안 뜰 수가 없었다.
준비는 부스스 일어났다. 머리가 폭탄 맞은 사자 갈기처럼 사방으로 날아다녔다.
“우…… 으……. 몇 시야…….”
준비는 두 손으로 눈을 비비며 앞을 보았다.
“으악!”
꽥! 비명을 질렀다.
벽시계를 보고 비명을 지른 게 아니었다. 침대 위에 옆으로 누워 자는 현덕과 그 옆에 제 얼굴을 둔 채 엎드려 자고 있는 피터를 보고 지른 비명이었다.
둘의 얼굴은 서로의 숨이 닿다 못해 섞일 정도로 가까웠다.
“미쳤어여?”
준비는 우당탕 침대 위에서 뛰어 내려와 피터의 어깨를 힘껏 잡아당겼다.
“……우어?”
피터의 목이 뒤로 팍 꺾였다. 입이 쩍 벌어지며 억, 소리가 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준비는 있는 힘껏 피터를 뒤로 밀쳤다. 피터는 그대로 뒤로 넘어가 바닥에 뒤통수를 찧었다.
“윽!”
피터가 제 뒤통수를 움켜쥐며 바닥을 굴렀다.
“흥! 꼴 좋네, 변태 형!”
“으……. 준비, 무슨 소리를……. 으……아, 머리야…….”
피터는 정신을 못 차리고 바닥을 뒹굴었다. 준비는 피터의 긴 다리에 발이 걸려 넘어지지 않으려 폴짝폴짝 뛰어 현덕의 침대 위로 뛰어 올라갔다.
매트리스가 크게 출렁이는데도 현덕은 쉬이 잠에서 깨지 못했다.
“으음…….”
의미 모를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일 뿐이었다.
“형, 일어나 봐여, 형! 형! 방금 내가 뭘 봤는지 알아여? 피터 형이 글쎄! 아, 형! 현덕 형!”
준비는 현덕의 몸 위에 올라타 현덕을 마구 흔들었다.
“어……. 준비? 으음, 우리 준비구나…….”
잠에 취한 현덕이 허우적대다 준비를 덥석 껴안았다.
“어? 혀, 형? 현덕 형?”
“자자, 우리 준비…… 키 커야지…….”
현덕은 준비를 꽉 껴안은 채로 다시 잠 들었다. 졸지에 준비는 현덕의 수면용 곰 인형이 되었다.
“어? 어어…….”
준비는 단번에 순한 양이 되었다.
정수리에 닿은 현덕의 얼굴에서 고운 숨소리가 들렸다. 준비를 껴안은 양팔은 헐렁했다. 준비가 빠져나오려면 얼마든지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준비는 현덕에게 안긴 그 상태로 가만히 있었다.
현덕의 품은 따뜻했다. 무슨 냄새인지 모르겠지만 좋은 냄새도 났다. 다른 연습생들이랑 부딪칠 때면 어린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는데, 현덕에게 안길 때는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준비는 현덕의 품에 가만히 안긴 채 눈만 도록도록 굴렸다. 그런 준비의 눈앞에 피터의 얼굴이 쑥 나타났다. 피터의 뺨엔 팔에 눌린 자국이 선명했다. 다리미로 꾹 누른 것처럼 새빨간 직사각형 모양이었다.
“나보고 변태라고?”
“그럼, 그러고 자고 있으면서 변태 소리 안 들을 줄 알았어여?”
준비가 소곤소곤,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피터는 엄마 개의 품에 안긴 강아지처럼 얌전한 준비를 가소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준비 또한 자신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피터에게 지지 않고 눈을 치켜떴다.
“왜 그렇게 봐? 왜여? 피터 형, 저 싫어여?”
“아니, 준비야. 좋아. 너무 좋아서 늦잠 자라고 깨우지도 못할 정도로 좋아한단다.”
“……늦잠?”
“응, 늦잠.”
피터가 우아한 손짓으로 벽시계를 가리켰다. 준비는 그의 손끝을 따라 시계를 쳐다보았다.
“으아악!”
준비는 다시 비명을 질렀다.
이번 비명은 현덕의 알람이 되어주었다.
“어…… 어? ……난 연습해.”
현덕이 마치 알람을 끄듯 제 품에 안은 준비의 보슬보슬한 머리카락을 쓱쓱 쓰다듬었다.
“준비야, 키 크자.”
잠이 덜 깬 상태에서도 현덕은 준비를 걱정했다. 하지만 준비는 현덕의 걱정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형, 현덕 형! 얼른 일어나 봐요. 지금 이렇게 잘 때가 아니예여, 아니라고! 피터 형이 우릴 다 망치려 들고 있어!”
조퇴를 할망정 학교를 결석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회사에서도, 트라이 온 프로그램 합숙 촬영을 시작하고 나서도, 주어진트래이닝 스케줄을 한 번도 빼먹지 않았다.
그토록 성실했던 준비의 연습생 생활에 아침 체조 시간 땡땡이라는 오점이 생겨버렸다. 원흉은 눈앞에서 뱅글뱅글 웃고 있는 피터였다.
“피터 형, 왜 안 깨웠어어어어어! 현덕 형, 형은 왜 안 일어나는 건데에에에!”
준비의 통곡이 텅 빈 오렌지 기숙사 숙소 층에 크게, 크게 울려 퍼졌다.
아침 체조 시간을 땡땡이친 오렌지 기숙사 삼총사의 아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합숙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아침 체조를 빼먹은 준비는 하루 종일 화나 있었다. 피터가 아무리 미안하다고 사과해도 준비는 마음이 담기지 않은 사과는 필요 없다며 피터를 용서하지 않았다.
준비는 절대 피터의 곁에 서려 하지 않았고, 셋은 세 번째 평가 무대에 함께 오를 팀이었다. 졸지에 현덕은 피터와 준비 사이에서 DMZ가 되었다.
피터를 피하기 위해 현덕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던 준비에게 야속하게도, 하루는 금세 지나갔다.
저녁 아홉 시가 다가오자 현덕은 여지없이 자리를 뜰 준비를 했다.
“어떻게 날 저 피터 형이랑 같이 놔두고 갈 수 있어여? 현덕 형?”
준비가 울망울망한 눈망울로 현덕을 올려다보았다.
“그럼 너도 오늘은 일찍 숙소로 가서 자자. 가끔은 푹 자는 것도 좋아.”
“아침에 완전 푹 잤잖아여. 피터 형 때문에!”
준비는 슬금슬금 이쪽으로 다가오려는 피터를 째려보았다.
“네네, 다 제 잘못이지요.”
피터는 두 손을 번쩍 들고는 다시 뒤로 물러섰다. 준비는 그런 피터를 경계하며 바라보다 피터가 멀리까지 물러서자 다시 현덕을 바라보았다.
“오전에 운동도 못 하고 연습도 못 하고 오전 시간이 다 날아가 버렸는데, 어떻게 저녁에 또 잘 수 있어여? 안 자, 절대 안 자. 오늘 밤새 연습할 거야!”
준비는 꼭 어린 자룡을 보는 것 같았다. 현덕은 그런 준비에게만 통하는 만능 특효약을 꺼냈다.
“준비야, 너 나이 때에는 푹 자야 돼. 잠이 부족하면 키 안 큰다?”
“형! 그런 무서운 말은 하지 마여.”
만약 피터나 다른 연습생이 이런 말을 한다면 그날로 그 연습생의 발등은 만신창이가 됐을 것이다.
현덕만이 예외였다. 현덕이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챙겨주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에, 준비는 현덕에게만 순한 양처럼 굴었다.
“너 그 눈은 렌즈 낀 거냐?”
“부모님 중 한 분이 외국인이니?”
몇몇 연습생들은 현덕과 함께 있는 준비를 보고는 준비가 자신들에게도 그렇게 굴 줄 알고 겁도 없이 다가오곤 했다. 준비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저보다 큰 연습생들을 올려다보며 똑소리 나게 대꾸했다.
“형 부모님 중 한 분은 오스트랄로 피테쿠스인가 봐여?”
“형 머리가 빨간 걸 보니 부모님 중 한 분이 외국인이신가 봐여?”
현덕이 없을 때의 준비는 주인을 잃은 어린 불독 같았다.
합숙 생활이 한 달이 넘어가는 지금에 이르러서는, 오직 피터만이 용기를 잃지 않고 준비를 놀려댔다.
“나한테도 현덕이한테 하듯 한번 안겨봐, 준비야. 응?”
어느새 현덕 옆으로 다가온 피터가 두 팔을 크게 벌리며 준비에게 말했다.
“뭐래.”
준비는 흥, 콧방귀를 뀌고는 나비처럼 팔랑팔랑 뛰어 현덕에게 안겼다.
“준비야, 형한테 그게 무슨 말이야.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피터 형이 너를 얼마나 아끼는데.”
현덕은 그런 준비를 번쩍 들어 안아주고는 어깨를 토닥토닥 두들겼다. 준비는 현덕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피터에게 메롱- 혀를 내밀었다.
“피터 형 일부러 저러는 거라구요. 내가 피터 형한테 왜 가요? 현덕 형이 있는데.”
“피터 형, 섭섭하겠다.”
“하나도 안 섭섭할 거예여. 현덕 형, 피터 형한테 속으면 안 돼여. 저 형 인성 완전 별로야.”
준비가 현덕의 귀에 대고 속닥속닥 말했다. 귓속말이어도 피터에겐 다 들렸다.
“꼬맹이,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피터가 현덕의 옆에 바짝 다가와 준비의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아, 하지 마여.”
준비가 기겁하며 피터의 손을 피했다.
“이것 봐. 현덕 형은 나 쓰다듬어 줄 때 완전 살살 쓰다듬어 주는데. 저 형은 맨날 내 머리를 대걸레처럼 만들어 놓잖아여. 아침에 맨날 내가 드라이하는 거 보면서.”
준비가 투덜댔다.
“우리 외할머니가 사람은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거든여? 피터 형은 이거만 봐도 완전 인성 별로인 거 티 나여.”
“아이고, 우리 준비가 인성 감별사네.”
현덕은 웃으며 한 손으로 준비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구슬처럼 파란 눈동자가 현덕을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난 역시 현덕 형이 좋아.”
준비는 두 팔을 현덕의 목에 두르고 대롱대롱 매달렸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너도 그리 마냥 착하고 그러진 않은 거 같거든?”
피터가 노크를 하듯 준비의 작은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대답은 여지없이 흥- 콧바람뿐이었다. 준비는 아예 피터와 얼굴을 마주하기도 싫다는 듯 현덕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현덕은 그렇게 준비를 한참 달래준 뒤에야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일찌감치 씻고, 머리를 말리지도 않은 채 침대 이불 속으로 꾸물꾸물 들어갔다.
저녁 아홉 시 반에 잠들어서 새벽 한 시 반에 일어나는 강행군을 이어간지 어언 일주일. 계획대로라면 앞으로 이삼 주 정도를 더 이렇게 생활해야 하건만. 몸은 고작 일주일 만에 비실비실해져 버렸다. 오죽하면 피터가 아침 스케줄을 째고 재워주었을까.
현덕은 피터가 고마우면서도, 빈틈을 보인 자신이 부끄러웠다.
‘정신 바짝 차리자. 조금만 더 힘내자.’
평소 일곱 시간 이상은 꼭꼭 잤던 터라 갑자기 수면 시간을 줄이는 게 쉽지 않았다. 깨어 있는 시간 내내 바쁘게 움직이니 더더욱 피곤하고 힘들었다.
오늘, 아침 늦게까지 자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견디지 못하고 점심 식사를 하던 중 식판에 얼굴을 처박고 잠들었을지도 모른다.
준비는 피터가 밉다고 하루 종일 발을 동동 굴렀지만, 현덕은 피터가 고마웠다. 물론 감히 준비 앞에서 피터에게 고맙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자자, 얼른 자자.’
늦잠을 잔 덕에 잠이 쉽게 오지는 않았지만 현덕은 억지로라도 자기 위해 애썼다. 지금 자두지 않으면 내일 또 괴로운 하루를 보내야 한다. 이마저도 못자 해롱거리면 세 번째 평가 무대를 함께 준비하는 연습생들과 새벽마다 만나는 주민에게까지 피해를 주게 된다.
평소와 달리 쉽게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지만, 어느새 잠들어 한 시 반에 깼다.
현덕은 살금살금, 까치발로 걸어 숙소를 나왔다. 준비와 피터는 현덕이 사라지는 것도 모르고, 곤히 자고 있었다.
현덕은 캄캄한 복도와 계단을 익숙하게 걸어 내려가 블루 기숙사의 연습실로 향했다.
반쯤 열린 연습실의 문에서 환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현덕은 문틈으로 쏙 몸을 밀어 넣었다.
“주민 형.”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호칭으로 주민을 불렀다.
“왔네, 현덕아.”
길게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고 있던 주민이 현덕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가벼운 트레이닝 복 차림의 주민은 졸린 기색 없이 산뜻해 보였다. 얼굴엔 엷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김현덕 연습생이 아니라 ‘현덕아.’
새벽 연습이 현덕에게 준 선물이었다.
물론 대가는 있었다. 주민이 세 번째 평가 무대 안무를 익힐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
현덕은 주민의 세 번째 평가 무대의 곡 안무 동작을 하나하나 쪼개 주민에게 가르쳐주었다.
이 동작에서 손은 어떻게 꺾어야 하는지, 다리는 왼쪽이 나가야 하는지, 오른쪽이 나가야 하는지. 고개는 어느 정도 각도로 빗겨야 하는지.
주민에게 춤을 가르쳐줬던 경험이 있었기에 그래도 수월한 편이었다. 춤과 관련해선 주민에게 어떤 기대도 하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설마 이 정도도 못 하랴.’라는 마음 자체를 먹지 않았다. 주민은 설마 이 정도도 못 하는 사람이었다.
기대를 버리면 그다음은 쉬웠다. 현덕은 처음 수영을 배우는 사람에게 물속에서 숨 쉬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처럼 주민에게 춤 동작을 알려주었다.
주민은 성실한 학생이었다. 현덕이 가르쳐주는 것을 몸에 익을 때까지 꾀부리지 않고 반복했다. 현덕이 지쳐 잠시 졸아도 주민은 그 옆에서 연습했다.
매일, 둘은 트레이닝 복이 땀에 흠뻑 젖을 때까지 춤을 췄다.
오늘도 그랬다.
벽시계가 여섯 시 반을 가리키자 현덕은 쓰러지듯 연습실 바닥에 누웠다. 가슴이 격하게 오르락내리락 움직였다.
“아……. 이제 우리 연습실로 가야 하는데, 손도 못 까딱이겠어요.”
주민은 현덕만큼이나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런 현덕을 내려다보았다.
“주민 형, 오늘까지가 딱 절반이에요. 이대로 가면 다음 주 평가 전날까지는 안무를 완벽하게 마스터할 수 있을 거예요.”
현덕은 감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과연 자룡의 도움 없이 혼자서 주민을 도울 수 있을까.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그리고 주민은 벌써 안무를 절반이나 익혔다. 단순하게 안무 동작을 외우는 정도가 아니었다. 현덕의 적확한 가르침 아래, 주민은 다른 연습생들과 비교해도 크게 튀지 않을 정도로 반듯하게 춤을 출 수 있게 되었다.
“당연하지.”
주민은 현덕의 머리맡에 앉으며 대꾸했다.
“선생님이 좋아서 그래요. 그러니까 선생님한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해도 좋아요.”
오늘의 새벽 연습 결과가 특히나 마음에 들었는지, 현덕은 평소보다 더 들떠 있었다. 주민은 벗어 두었던 얇은 재킷을 펼쳐 현덕의 얼굴 위에 씌워버렸다.
“우왁?”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삼십 분만 눈 감고 있어. 일곱 시에 깨워 줄 테니까.”
“삼십 분 자서 뭐 해요. 그럴 바에는 우리 지금까지 한 거 한 번만 더 맞춰보는 건 어때요?”
현덕은 몸을 일으키려 했다. 주민은 그런 현덕의 어깨를 꾹 눌러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는 현덕의 머리를 들어 제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현덕은 괜찮다고 몇 번이나 버둥거렸지만 주민의 힘을 이기진 못했다. 결국 주민의 다리를 벤 채 30분의 휴식을 즐기게 되었다.
현덕은 재킷을뒤집어 쓴 채로 계속 주민에게 말을 걸었다. 낮에 무슨 일은 없는지, 같은 기숙사 연습생들과는 어떻게 지내는지.
현덕의 질문은 주민이 들기엔 영양가 없는 것들이었다. 주민은 단답형으로 짧게 대답했다.
그래도 현덕은 끈질기게 물어 보았다. 현덕은 주민이 낮에는 어떻게 생활하는지 알고 싶었다.
한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현덕의 천천히 목소리가 느려지더니, 어느 순간 끊겼다. 재킷 안에서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주민은 현덕의 얼굴에서 재킷을 걷어냈다. 재킷을 펼쳐 현덕의 몸 위로 덮어주고, 잠든 현덕을 바라보았다.
괜찮다고, 안 잘 거라고 바락바락 우기더니. 채 5분도 되지 않아 곤히 잠들었다. 잠든 얼굴은 더 피곤해 보였다.
주민은 몇 번이고 망설이다가 현덕의 얼굴에 살짝, 손끝을 댔다. 솜털을 만지듯 조심스럽게 현덕의 눈가를 쓸어내렸다.
거뭇거뭇한 눈가, 짙은 다크 서클이 계속 신경 쓰였다. 그건 단순히 걱정하는 감정만은 아니었다.
자신 때문에 힘들어하는 현덕이 안쓰러웠다.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리고 그런 마음 이상으로, 그런 마음을 단번에 집어삼킬 정도로,
기뻤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 때문에 현덕이 힘겨워하고 있다. 그런데도 현덕은 계속참고 버틴다. 오직 자신 때문에.
‘다른 누구도 아닌 나 때문에.’
생각만으로도 손끝을 저렸다. 중독성 있는 쾌감이었다.
미안한데 기쁘다. 안쓰러우면서도 짜릿하다. 놔줄 수 없었다.
이율배반적이라는 걸 안다. 이런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을 현덕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볼 때마다 죄책감 비슷한 감정까지 느낀다.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에.
주민은 현덕에게 고맙다고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을 위해 이렇게까지 해주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수 없었다.
단둘만의 새벽 연습을 시작한 첫날부터. 연습실 문을 열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현덕을 봤던 그 순간부터. 주민에게 더 이상 세 번째 평가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당장 탈락해 떨어져도 상관없었다.
‘미안. 난 원래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쓰레기거든. 그런데 이런 날…… 붙잡은 건 너였잖아. 김현덕.’
재킷 밖으로 삐져나온 현덕의 손에 자신의 손을 깍지 껴 붙잡았다.
현덕의 손은 작고 가느다랬다. 힘을 꽉 주면 부러질 것만 같았다. 이 작은 손이 오늘만 해도 몇 번이나 주민을 붙잡아 주었다. 그때마다 자신의 기분이 어떠했는지 현덕은 결코 모르리라.
‘그러니까 난 절대 못 놔.’
주민은 현덕의 손과 깍지 낀 손을 들었다. 제 손에 사로잡힌 현덕의 손이 더없이 마음에 들었다.
일곱 시가 될 때까지 주민은 그렇게 현덕의 손을 꽉 잡은 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계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둘만의 새벽 연습이 또 한 번 끝났다.
그리고 일주일 뒤, 세 번째 평가 결과.
주민은 B 평가를 받았고,
현덕은 C 평가를 받았다.
대이변이었다.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