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시발점과 소금쟁이 춤과 평범에 관하여
열여덟 살이 되는 1월을 맞이하며 ‘소년 프로젝트 : 트라이 온’ 촬영이 시작되었다.
촬영 전날, 현덕과 자룡, 주민은 일찍 회사로 소환되어 연습실에서 마지막 점검 시간을 가졌다. 일단 TF팀 직원들 앞에서 그간 준비한 평가곡을 선보였다. 셋이서 함께 하는 곡을 먼저 한 후 개인의 평가곡을 순서대로 보였다.
현덕과 주민은 개인 곡으로 보컬곡을 준비했다. 자룡은 자신이 직접 쓴 랩을 준비했다고 하는데, 아직 다 쓰지 못했다고 보여주지 않았다. 오 팀장은 벌써부터 서로 견제에 들어간 거냐고 자룡을 타박했다. 자룡은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개인 평가곡을 보여주지 않았다.
최종 점검 후엔 스타일링 점검이 이어졌다. 프로그램 제작진 측에서 메이크업 팀을 구성해 놓았다고 했지만, 오 팀장은 적어도 첫 촬영 때는 회사 측에서 준비한 대로 하고 가라고 했다.
현덕은 혹시 또 번개머리와 에나멜 재질의 나팔 바지를 입게 될까 불안에 떨었지만. 이번엔 다행히도 헤어와 의상 모두 상식 수준이었다. 헤어는 따로 염색하지 않고 현상 유지. 의상은 깔끔한 세미 정장 스타일이었다.
주민은 가발을 벗고 가발과 비슷한 색으로 탈색을 했다. 탈색 중 머리를 쥐어뜯지 못해 괴로워하는 주민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현덕과 자룡은 괜히 주민의 근처를 얼쩡거리며 주민의 고통을 실컷 구경했다.
자룡은 머리를 좀 더 짧게 자르고, 검게 자란 부분을 다시 녹색으로 염색했다. 자룡은 탈색과 염색에 익숙해 주민만큼 괴로워 하지 앟았다. 주민은 그 점을 분하게 여겼다.
“진화했냐. 대파머리에서 양파머리로?”
주민이 이죽댔다. 현덕은 주민의 말에 무심코 동의해버렸다.
문득 생각이 났다. 초등학교 때 여름 방학 때 관찰일기를 쓰기 위해 키웠던 양파를. 물컵 위에 올려놓은 양파의 머리에 파릇파릇 돋던 그 녹색 새싹들.
“읍!”
웃음이 터져 나올까 봐 두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소용없었다.
“뭐야? 너 내가 너보다 한 살 많은 건 아냐? ……현덕아? 너 지금 웃었니?”
여포에게 배신당한 동탁도 이 정도로 억울해할 것 같지는 않았다.
“아……뇨, 읍!”
현덕은 격렬하게 부인했다. 하지만 자룡의 얼굴 위로 새싹 돋은 양파가 겹쳐져 다시 웃음이 나왔다.
“김현덕, 너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이 자식아.”
부리부리한 자룡의 눈이 슬픔에 젖었다. 그 위에 살랑대는 녹색 머리는 유독 파릇파릇해 보였다.
“사람 눈은 다 똑같아, 양파머리. 물론 머리가 야채인 너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너! 아까 오 팀장님 말씀 못 들었냐? 자룡 형님이라고 깍듯이 말해라.”
“양파가 인간에게 형 소리를 듣기 원하다니, 올해 들은 말 중 제일 황당하네.”
“야, 올해 아직 며칠 안 지났거든?”
“날짜도 셀 줄 알다니, 기특하네. TV 프로에 제보해줄까? 날짜 셀 줄 아는 양파가 있다고?”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진짜 양파 취급하네. 야, 우주민이. 내가 너보다 형이다?”
세 살 많은 양파머리 형과 두 살 많은 싸가지 형이 투닥투닥 말싸움을 했다. 현덕은 그들의 싸움을 구경하며 오랜만에 실컷 웃었다.
전날의 일정은 그 정도였다. 오 팀장은 세 명을 일찍 귀가시켰다. 화장 잘 먹도록 일찍 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촬영은 아침 열 시부터 시작이었다. 셋은 오전 6시에 TE엔터테인먼트에 집합하여 준비된 의상을 입고 메이크업을 받았다. 오 팀장은 하루, 세 명의 로드 매니저를 자처하며 차 운전을 받았다.
차안에서 세 사람의 모습은 제각각이었다. 자룡은 여유롭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주민은 이어폰을 꽂고 눈을 감은 채였다. 현덕은 오 팀장의 옆자리에 앉아 오 팀장의 말동무를 했다.
오 팀장은 세 사람 몫만큼 긴장했다. 차선을 잘못 들어 방송국 주변을 헤매기도 했고, 계속 발을 달달 떨었다. 담배를 피우려다 옆에 앉은 현덕을 보고는 불은 붙이지 않고 필터만 잘근잘근 씹었다.
방송국에 도착하니 촬영 스태프가 마중 나와 있었다.
오 팀장은 대기 중에 쓰라면서 쇼핑백을 건네받았다. 현덕은 인사 없이 바로 제작진을 따라 나서는 자룡과 주민을 붙잡았다.
“팀장님, 저희 잘 하고 올게요.”
현덕은 두 형을 붙잡고 오 팀장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아……. 현덕 씨.”
오 팀장은 꼭 자식을 결혼식장에 들여보내는 아버지처럼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오 팀장을 위로하려는 현덕을 막아선 건 주민이었다. 주민은 현덕의 뒷목 옷깃을 잡고 질질 끌었다.
“우왁!”
현덕이 놀라 비틀거리자 자룡이 얼른 허리를 잡아주었다. 현덕의 허리를 감싸는 자룡의 손을 본 주민의 미간이 심하게 찌푸려졌다.
“어차피 우리 촬영하는 거 카메라 감독님 쪽에 서서 볼 거잖아요. 괜히 현덕이 더 긴장하게 그러지 말고 여기까지 하시죠.”
자룡이 손을 훠이훠이 휘저으며 오 팀장을 밀어냈다.
“박자룡, 이 정 없는 놈아!”
“네에, 네에, 정 많은 오 팀장님, 안녕.”
자룡은 현덕을 번쩍 들고 빠르게 걸었다.
“신경 쓰지 마. 원래 저런 사람 아닌데 꼭 이럴 때만 저러더라. 나 처음 핑크키위 백댄서 하러 올라갈 때도 저랬어. 놔두면 알아서 멀쩡해져.”
“정이 많으신 분인가 봐요, 오 팀장님. 그렇게 안 봤는데.”
“뭐, 정이 있어봤자 초코파이만 하겠냐. 놔둬, 놔둬.”
현덕은 자룡의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룡에게 무임승차한 채로 편히 가는 건 좋았지만, 바로 뒤에서 쫓아오는 주민과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건 조금 민망했다. 주민은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얼굴을 찌푸린 채 뒤따라 오고 있었다.
‘잘생겼네.’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미모였다. 걸을 때마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금빛이 나는 갈색 머리카락이 잘 어울렸다.
‘방송국 안이고, 곧 사방에 카메라가 있는 촬영 장소로 가는 건데, 저래도 되는 건가?’
얼굴 좀 펴라고 말해줄까, 고민도 됐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를 못 들었네.’
납치 소동이 있고 난 뒤, 주민은 툭하면 현덕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면서도 막상 현덕이 주민의 시선을 알아채고 고개를 돌리면 괜히 다른 곳을 쳐다보는 척하며 딴청을 피웠다.
언론에 납치 관련 기사가 떠 주민이 프로그램의 유력 우승 후보가 된 뒤에, 현덕은 꽤 여러 번 주민에게 물어보았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냐고.
그럴 때마다 주민은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현덕을 내려다보았다. 현덕이 해석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현덕이 얼른 고마워하라고 찌르면 주민은 두 발짝 뒤로 물러섰다. 꼭 경계심 많은 들고양이 같았다.
‘나한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기는 한데, 쪽팔려서 그런 걸까?’
어느덧 세 사람은 대기실에 다다랐다. 현덕은 문에 붙은 기획사 이름을 훑어보았다. 기획사 여덟 곳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TE엔터테인먼트의 이름도 있었다.
제작진은 셋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메이크업이 필요한지 물었다. 절차상 묻는 것 같았다.
자룡이 괜찮다고 대답하자, 대기실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안내를 받아 촬영 세트장으로 오라고 말했다. 연습생들이 기획사 별로 입장하여 평가곡을 선보이는 방식으로 촬영이 진행되고 있었다. 자룡이 자신들의 순서를 물어보았다. 꽤 뒷번호였다.
대기실은 이미 와 있는 다른 기획사 연습생들로 북적북적했다. 다들 무대 의상을 입고 메이크업을 한 상태였다.
현덕과 자룡, 주민이 들어서자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이어 작게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자룡과 주민을 알아보는 듯했다.
자룡은 그런 분위기에 긴장했는지 얼굴이 살짝 굳었다.
주민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걸어가 한쪽 구석의 빈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긴 장의자였다. 현덕과 자룡은 주민의 옆에 쪼르륵 앉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쪽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이런 게 호가호위 상황인 걸까?’
현덕은 자신이 별로 존재감이 없는 출연자라고 생각했다. 양쪽에 유력 우승 후보들이 앉아 있어, 자연히 시선이 자신에게로 와 꽂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셋이 가만히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대기실은 다시 시끄러워졌다.
“웃기지?”
자룡이 나직한 목소리로 현덕에게 말을 걸었다.
“뭐가요, 형?”
“여기 사람들. 이런 분위기.”
현덕은 대기실을 둘러보았다. 대부분은 현덕과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모두 잘생기고 끼가 넘쳐 보였다.
“멋진데요.”
“멋지긴, 개뿔. 괜히 눈치나 보고 뒷담화나 까고. 쪽팔리게 뭔 짓들인지 몰라. 차라리, 니가 젤 멋져.”
“형보다 제가 더 멋있어 보여요?”
“야, 당연히 난 빼고 말하는 거지.”
자룡과 농담 섞인 잡담을 늘어놓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10시 30분이 지나고 있었다.
“촬영이 10시에 시작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앞으로 그런 말 믿지 마. 12시에 하면 다행인 거야.”
자룡은 오 팀장이 준 쇼핑백을 뒤적거리더니 목베개를 꺼냈다. 목베개를 하고 머리가 망가지지 않게 벽에 기대더니 본격적으로 졸 준비를 했다.
“어제 긴장해서 잠을 못 잤거든. 나 좀 잘게.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 우리 순서 올 때까지 내가 안 일어나면 좀 깨워줘.”
“자룡 형, 잠이 와요?”
“어떤 순간에서도 잘 수 있는 게 아이돌 연습생의 중요한 재능이야.”
그 말을 끝으로 자룡은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이내 고른 숨을 내쉬며 정말로 잠들었다.
“진짜 자요?”
현덕은 조심스럽게 자룡의 감긴 눈앞에 손을 흔들어 보았다. 자룡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현덕은 고작 몇 초 만에 잠든 자룡의 재능에 감탄하며, 오 팀장이 준 쇼핑백을 펼쳐 보았다. 목베개 두 개와 커다란 보온병, 초콜릿 등이 들어 있었다.
현덕은 쇼핑백을 내려놓고, 벽에 살짝 등을 기댔다. 젤을 발라 모양을 낸 자룡, 주민과 달리 현덕의 머리카락은 깔끔하게 정리한 게 다였다. 덕분에 자룡보다는 편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현덕은 귓가에 와 닿는 자룡의 숨소리를 들으며 대기실을 둘러보았다. 자룡처럼 눈을 감고 있는 연습생들도 있었고, 소리를 내 목을 풀거나 춤 동작을 반복하며 몸을 푸는 연습생들도 있었다. 대다수는 의자나 바닥에 앉아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열기와 긴장, 설렘이 가득했다.
잠시 뒤, 촬영 스태프가 들어왔다. 그는 자신을 막내 작가라고 설명하고는 촬영이 시작되었다고 안내했다.
현덕이 있는 대기실은 제3대기실이었다. 제1대기실부터 촬영하러 들어가고 있다고 했다. 현덕은 촬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설명해주는 막내작가의 말을 듣다가 눈을 대굴, 굴려 주민을 보았다. 주민은 현덕을 보고 있었다.
‘이 정도로 빤히 쳐다보면서 어떻게 모르는 척하라는 건지.’
주민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주민의 고개는 현덕이 없는 쪽으로 돌아갔다. 시선을 피하는 게 너무 티 났다.
보다 못한 현덕은 주민의 손등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흠칫, 주민의 어깨가 들썩였다.
“……뭐야.”
주민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돌려 현덕을 바라봤다. 목소리가 약간 잠겨 있었다.
“나한테 할 말 있지 않아요?”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네.”
“왜요? 아직도 내 호의가 부족해 보이고, 다른 대가를 바라는 거 같아 보여요?”
“…….”
“주민 형, 왜 나한테 고맙다고 안 해요?”
현덕은 자신이 멍석을 깔아주자, 생각했다.
‘자꾸 날 쳐다보는 걸 보니 분명,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긴 한 거야.’
그렇다면 고맙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주리라. 현덕은 주민과 둘만 있을 기회를 노렸다. 자룡은 잠들었고 주변은 시끌시끌한 지금이 최적이었다.
트라이 온 촬영이 시작되면 현덕과 주민은 사이좋은 동료 연습생이 되어야 한다. 특히나 주민은 납치당할 뻔한 자신을 구해주기까지 한 동생 연습생인 현덕에게 살뜰하게 굴어야 한다. 그게 오 팀장의 지령이었다.
24시간 내내 카메라에 찍히는 상황에서 우정을 연기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니 차라리 진짜 친해져서 친밀해지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묵은 감정을 털어내고 서로에게 마음을 열 필요가 있었다.
아니, 어떤 이유를 차치하고서라도 현덕은 주민에게 꼭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런데 주민이 영 협조를 해주지 않았다.
“내가 왜 김현덕 연습생한테 고맙다고 말해야 되는 거지?”
주민이 싸늘하게 대꾸했다.
있던 정도 뚝 떨어뜨리게 만드는 온도였다.
묵직한 저음은 그리 큰 소리가 아니었음에도 주변 사람들에게 들린 듯했다. 주변에 앉아있던 다른 기획사 연습생들 몇몇이 현덕과 주민을 힐끔, 바라보았다.
현덕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갑자기 피곤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아……. 하던 지랄도 멍석 펴 놓으면 안 한다는 속담이 이런 경우를 말하는 거구나.’
주민의 말에 상처를 받거나 놀라지는 않았다. 그 정도 단계는 이미 옛날에 지났다.
오히려 주민이 넙죽, ‘지금까지 쑥스러워서 말을 못 했는데 고마웠어. 정말 고마워.’라고 말했다면 오늘이 세상 멸망의 날인가 고민했을 것이다.
‘평소에도 절대 말 안 하는 사람이 자리를 마련해준다고 할 리가 있나. 더 안 하겠다고 뻗대겠지.’
현덕은 섣부른 자신을 탓했다.
‘난 정말 인간관계에 서툴구나.’
막막했다.
‘함께 역경을 이겨냈으니 친해진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아닌가 보네.’
주민은 긴 다리를 꼬고 여유롭게 앉아 있었다. 탈색한 갈색 계열 머리카락을 떨리는 손으로 쓸어 넘겼다.
‘잠깐. 떨어?’
현덕은 주민의 손을 바라보았다.
분명, 눈에 띌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왜 떠는 거지?’
이해할 수 없는 떨림이었다.
주민은 오 팀장과 차를 타고 방송국으로 오는 내내 태연했다. 방송국에 도착하고 나서도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대기실에 들어섰을 때엔 자룡마저 사람들의 시선에 긴장하였건만, 주민은 아무렇지 않았다.
그런 주민이 떨고 있었다.
새삼 촬영을 앞두고 무서워져서? 긴장이 되어서?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설마 나 때문인가. 손을 떨 정도로 고맙다는 말이 하기 싫어서? 거부감이 들어서?’
현덕은 저도 모르게 주민의 손가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주민은 현덕이 자신의 손을 보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는 제 두 손을 엇갈려 팔짱을 꼈다.
“그렇게 싫어요?”
현덕이 물었다.
당연히 ‘뭐가?’라고 물어볼 줄 알았는데.
“나야말로, 김현덕 연습생이 왜 그렇게 고맙다는 말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네.”
주민은 다른 걸 물었다.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사이가 되고 싶거든요. 그쪽이랑.”
현덕은 솔직하게 말했다.
“……그런 사이가 뭔데?”
주민의 얼굴이 한층 더 심각하게 구겨졌다. 꽉 다문 잇새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현덕의 말이 마음에 안 든 눈치였다.
‘어라?’
현덕은 고개를 갸웃, 했다.
‘나랑 고맙다는 말하는 사이가 되고 싶지 않은 건가? 나랑 친해지기 싫어?’
현덕은 주민의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쩐지 억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런 마음을 드러내기 전에 다시 주민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빨리 날 정리하고 털어내고 싶은가 보지? 그런데 어쩌지? 난 절대 김현덕 연습생한테 고맙다고 말할 생각, 없는데.”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심사가 비비 꼬인 목소리.
주민의 말을 들은 현덕은 더욱 큰 혼란에 빠졌다.
‘저게 무슨 소리야? 고맙다는 말에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의미가 숨어 있는 건가?’
현덕은 고민에 빠졌다. 주민은 그런 현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동그란 정수리가 보였다. 지금 저 조그만 머리통 안에는 어떤 생각이 담겨 있을까 짐작해 보자니,
‘날 빨리 털어내고 싶겠지.’
울컥- 짜증이 났다.
주민은 월말 평가나 주말 평가 때, 혹은 회사의 복도에서 우연히 스칠 때, 그리고 연습실을 함께 쓸 때마다 현덕을 봤다. 딱히 일부러 찾아본 건 아니었다. 자꾸만 눈에 띄니 안 볼 수가 없었다. 그뿐이었다.
현덕은 종종 자룡과 장난을 치며 큰 소리로 웃었다. 하지만 대개는 사람들 속에서 순하게 웃고 있었다.
주민이 보기에 현덕은 착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매정한 사람이었다.
현덕은 주간 평가나 월말 평가 때마다 자룡이 아니라 다른 연습생들과 팀을 짰다. 그들은 종종 현덕에게 민폐를 끼쳤다. 자기 욕심을 챙기려 현덕의 파트를 침범하거나 현덕에게 희생할 것을 요구했다. 그런 주제에 현덕에게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기도 했다.
그러면 현덕은 난감해 하다가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더러 요구가 과하면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대개는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상대방이 고맙다고 말하면 현덕은 순하게 웃었다. 그리고 끝이었다.
현덕은 항상 고맙다는 말을 들으면 그 이전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털어냈다. 그리고 이후의 가능성을 지워버렸다. 자신에게 고맙다고 말한 사람과 말갛게 굴었다.
현덕은 깨끗한 물이었다. 제게 끈적하게 들러붙는 모든 걸 쳐냈다. 현덕의 곁에 끈적하게 남아 있는 건 자룡이 유일했다.
다른 사람들과 자룡의 차이가 무엇일까. 그날, 현덕의 도움을 받은 이후 주민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주민에게 사람이란 두 종류뿐이었다. 유해한 사람과 더욱 유해한 사람. 현덕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러니 주민이 유해한 사람과 더욱 유해한 사람을 상대할 때 사용하는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몇 가지 방법은 실제 현덕에게 통하지 않았다.
현덕은 다쳐가면서까지 주민을 구해주었다. 입술이 찢기고 멍으로 얼룩덜룩한 얼굴로 환히 웃어주었다.
그리고 대가를 요구했다. 현덕이 바라는 건 대가는 돈도 뭣도 아니었다. 그저 고맙다고 말해달라고 했다. 그 요구에 주민은 공포를 느꼈다.
‘나를 끊어내려고 하는 거야. 도움을 줬으니까 고맙다는 말을 듣고 끝내려고.’
처음으로 만난 무해한 사람이었다. 처음으로 만난 구원자였다. 그런 현덕과 아무렇지 않은 사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가까워지고 싶다. 자룡처럼, 아니 자룡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끈적해지고 싶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현덕은 주민이 가지고 있는 것들에 빌붙기를 원하여 다가오는 유해한 사람들과는 달랐다. 주민에게서 모든 걸 빼앗아가려는 더욱 유해한 사람들과도 달랐다.
주민은 현덕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지, 무엇을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단, 현덕이 바라는 것만은 줄 수 없었다.
“난 절대로 너한테 고맙다고 말 안 해. 그러니까 포기해.”
주민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고맙다는 말을 바라는 현덕에게 쐐기를 박듯 말했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하기가 이렇게까지 싫다고? 나랑 친해지고 싶지 않은 생각이 정말 없는 건가.’
주민의 선언을 들은 현덕은 맥이 풀렸다.
고맙다는 말을 못 들은 것에 실망하는 현덕을 본 주민의 얼굴에선 핏기가 가셨다.
‘어떻게 해야 나한테 고맙다는 말을 바라지 않게 만들 수 있을까.’
블랙홀에 빠진 우주 비행사가 된 것 같았다. 답을 찾을 수 없는데, 반드시 답을 구해야 하는 문제 앞에서 주민은 무한정 헤매는 느낌이었다.
***
대기 시간은 한도 끝도 없이 이어졌다. 자다 지쳐 눈을 뜬 자룡은 어쩐지 냉랭해진 현덕과 주민을 보고는 남은 잠기운을 털어냈다.
“뭐냐.”
자룡은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고 현덕에게 말을 걸거나 주민에게 시비를 걸었다. 현덕은 아예 주민 쪽은 보지 않은 채 자룡하고만 대화를 나누려 했다. 주민은 자룡이 무슨 말을 하든 씹었다.
바로 어제만 해도 훈훈하게 치고받던 사이였건만. 자는 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답답할 따름이었다. 주민의 입에서 ‘양파머리’ 소리가 나와도 반가울 것 같았다.
그런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촬영 순서가 돌아왔다. 셋은 촬영 스태프의 안내를 받아 세트장으로 향했다.
세트장에는 프로그램 내내 연습생들을 지도하고 평가해줄 ‘선생님’들이 앉아 있다고 했다. 그들 앞에서 준비해 온 평가곡을 선보이면 그 수준을 가늠해 각자 등급을 정해준다고 했다.
“등급이라. 한우가 되는 느낌이네요.”
방송국의 꼬불꼬불하고 긴 복도를 걸으며 현덕이 중얼거렸다. 꼭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된 기분이었다. 현덕의 말을 농담이라 생각했는지 촬영 스태프는 이왕이면 꼭 A++ 등급을 받으라고 응원해주었다.
세트장은 상상 이상으로 컸다. 커다란 단상 위에는 여섯 명의 선생님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의 뒤에는 먼저 촬영을 끝낸 다른 기획사의 연습생들이 앉아 있었다. 색깔이 다른 셔츠를 입고, 같은 색깔의 셔츠를 입은 연습생들끼리 모여 앉아 있었다.
“우와, 장난 아닌데?”
자룡은 단상 위의 선생님들을 보자마자 휘파람을 불었다. 그리고는 별 관심 없어 보이는 현덕과 주민에게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인지 설명을 해주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요계에서 대선배라고 불리는 거물급 인물들이었다. 힙합, 발라드, 댄스 등 장르도 다양했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 그게 뭐가 어렵다고.’
현덕은 자룡의 설명을 들으면서 속으로 투덜거렸다. 주민은 현덕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난 이상한 사람이 아냐. 누가 진짜로 고맙다는 말 듣고 생색내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아나. 고맙다는 말 하면 내가 뭘 그런 걸 고마워하냐고 말하면서 서로 말 트고, 그러면서 친해지자고 싶은 거지.’
기분이 더 가라앉았다. 덕분에 촬영장에 들어가서도 전혀 긴장되지 않았다.
가요계의 대선배님 급이라는 선생님들과 수십 명의 타 기획사 연습생들. 그리고 수십 대의 촬영 카메라와 그 뒤에 선 수십 명의 사람들. 그 모든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데도 떨리지 않았다.
“현덕아, 너 진짜 담 세구나. 오늘에야 알았네. 긴장 안 돼? 우황청심환 먹고 왔어?”
자룡은 축 처져 있는 현덕의 모습을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그때 세트장 밖, 카메라 저편에서 큐 사인이 났다. 세 사람은 촬영 스태프의 지시를 받아 세트장 위로 올랐다. 세트장 사방에 붙은 커다란 화면에 TE엔터테인먼트의 로고가 떴다.
“드디어 보네요. 한창 화제를 모았던 기획사의 연습생들이죠. 기대가 큽니다.”
가운데 앉은 선생님이 마이크를 삐딱하게 들고 말했다. 붉은 입술과 빡빡 민 머리가 눈에 띄었다. 자룡은 그녀가 우리나라 최고의 댄서 중 한 명이라고 말했다.
현덕과 자룡, 주민은 나란히 서서 단상 위 선생님들을 향해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무대 위에는 스탠드 마이크 두 개와 의자가 준비되어 있었다. 의자에도 마이크가 놓여 있었다. 의자가 가운데 있고 스탠드 마이크 두 개가 양옆에 서 있는 구도였다. 현덕과 자룡은 스탠드 마이크를 잡고 섰다. 주민은 의자에 앉아 마이크를 들었다.
잠시 후 평가곡의 MR이 흘러나왔다. 지난 한 달간 숨 쉬듯 익숙해져 몸에 들러붙도록 연습해왔던 그 평가곡이었다. TE엔터테인먼트의 남자 아이돌 그룹 폴라리스의 데뷔 앨범 타이틀곡이었다.
다섯 명이 부른 노래를 세 명분으로 나누어 불렀다. 리드 보컬 파트는 주민이, 서브 보컬 현덕이, 랩과 하이라이트 부분은 자룡이 맡았다.
주민이 앉아서 노래를 부를 때 현덕과 자룡은 격한 안무를 선보였다. 현덕이나 자룡이 자신의 파트를 소화할 때 주민은 의자에서 일어나 비교적 간단한 안무를 췄다. 자신만의 춤 세계를 가지고 있는 주민을 배려한 동선이었다. 최대한 주민이 춤을 못 추는 게 티 나지 않도록, 주민이 고음을 부르느라 춤을 안 추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다행히도 주민은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안무를 잘 소화했다. 현덕이 대기실에서의 일을 잠시 잊고 뿌듯함과 감동에 휩싸일 정도였다.
2분 정도의 평가곡이 끝났다. 셋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마지막 포즈를 유지하다가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단상 위를 향해 90각도로 인사를 했다.
선생님들 뒤에서 셋의 무대를 지켜보고 있던 다른 기획사의 연습생들이 박수를 쳤다.
“잘 봤습니다. 연습을 많이 했나 보네요. 파트도 각자 성향에 맞게 잘 나눈 거 같고요.”
머리를 민 여성 댄서 옆에 앉아 있는 비쩍 마른 남자가 마이크를 들고 말했다. 코끝에 걸친 안경이 조명을 받아 번쩍번쩍 빛났다.
“조화가 좋았어요. 지금 당장 세 분이서 삼인조 그룹으로 데뷔해도 될 정도라고 생각되네요. 다만 이 곡만으로는 개개인의 실력을 파악할 수는 없어서 그런데, 각자 준비해 온 개인 평가곡이 있으면 보여주실래요.”
몇 달 전에, 프로그램 제작진은 단체 평가곡과 연습생들 각자 개인 평가곡을 준비해 달라고 공문을 보냈다. 그랬으면서 시치미를 뚝 떼고, 혹시 개인 평가곡을 준비해 온 게 있으면 보여 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런 게 방송이구나.’
현덕은 감탄하며 무대 끝으로 물러섰다.
세트장에 올라오기 전, 셋은 개인 평가곡을 보일 순서를 정했다. 자룡이 첫 번째였다. 주민이 두 번째, 현덕이 마지막이었다.
주민은 살짝 머뭇거리다가 세트장 밖에서 촬영 스태프가 손짓하는 걸 보고야 현덕의 옆에 섰다. 현덕도 주민이 자신의 옆에 서는 게 괜히 어색했다.
‘고맙다는 말……. 아니, 아니지. 김현덕. 집중하자. 지금 촬영 중이야.’
현덕은 눈을 크게 뜨고 무대 한가운데 선 자룡을 보았다.
“저는 자작 랩을 준비해 왔습니다.”
자룡은 주민이 쓰던 마이크를 붙잡고 다시 한번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무반주 자작 랩을 하겠다고 하자, 뒤에 앉아 있던 연습생들의 수군거림이 커졌다.
현덕은 다른 연습생들과 마찬가지로 기대 어린 시선으로 자룡을 보았다.
‘어떤 내용이려나. 내가 들어본 건 아니겠지. 새로운 랩이겠지?’
주간 평가 때 몇 번, 자룡은 자작 랩을 선보인 적이 있었다. 보컬 연습실에서 있는 현덕에게 놀러 와 자신의 자작 랩을 부르기도 했다.
자룡의 랩은 스웩이 넘치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시나 일기, 편지를 읽는 듯한 서정적인 느낌이 강했다.
연습생 생활을 하며 밤늦게 지하철을 타고 한강 다리를 건너며 밤하늘을 볼 때의 기분. 자취방에서 라면을 끓여 먹다가 걸려온 전화를 받는 이십 대 초반 청년의 고민과 게으름. 꿈을 꾸면서도 꿈을 이루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는 연습생의 어느 하루의 삶.
자룡의 랩은 대개 그런 내용이었다.
평소엔 씨발이라는 욕을 많이 말하면서도 랩을 할 때는 절대 욕을 가사에 넣지 않았다.
현덕은 그런 자룡의 랩이 좋았다. 회사 사람들도 그런 자룡의 랩 스타일을 알기에, 혼자서 따로 개인 평가곡을 준비하겠다는 자룡의 고집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수십 대의 촬영 카메라 앞에 홀로 선 자룡은 떨지 않았다. 오히려 무대에 섰다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저는 자작 랩을 준비해 왔습니다.”
자룡이 모두에게 자신의 개인 평가곡을 소개했다.
“타이틀은 씨발점입니다.”
‘씨’처럼 들리는 ‘시’였다.
“…….”
“…….”
“…….”
“…….”
“…….”
“…….”
단상 위에 앉아 있던 선생님들 모두가 당황했다. 특히나 머리를 민 댄스 선생님은 촬영 카메라 쪽을 보며 ‘이거 괜찮은 거야?’라고 입을 벙긋거렸다.
현덕도 덩달아 그녀를 따라 촬영 카메라 쪽을 바라봤다. 메인 PD인 듯한 사람이 거기 서 있었다. 까만 모자를 푹 눌러써 눈이 보이지 않았는데, 입은 웃고 있었다. 그는 손으로 동그란 원을 그렸다.
“발음이 쎄시네. 제목이 시발점이라니, 뭔 의미?”
단상의 제일 끝에 앉아 있던 다른 선생님이 수습에 나섰다.
“네, 제가 쌍시옷 발음을 좀 잘하는 편입니다.”
자룡이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형이 언제부터?’
현덕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트라이 온에 출연하는 게 저의 연습생 생활에 있어 새로운 씨발점이 되게 만들겠다는 각오를 담아 썼습니다.”
“하하, 하, 다른 발음은 정확한데 딱 그 발음만 미묘하게 쎄네.”
단상 끝에 앉아 있는 선생님이 자룡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조심하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자룡은 개의치 않았다.
자룡은 마이크를 고쳐 잡았다. 그리고 무반주 자작 랩을 선보였다.
환한 조명 아래, 자룡의 얼굴이 빛났다. 무대 양 끝을 오가며 주변 사람들의 호응까지 유도하며 여유롭게 랩을 구사했다. 속도는 빨랐지만, 대부분의 가사를 모두 알아들을 수 있었다. 라임이 살아 있었고, 발음이 정확했다.
현덕은 감탄해 마지않았다.
‘형은 실전에 강한 타입이구나.’
랩의 가사는 자룡의 말마따나 트라이 온 출연을 결심하고 준비하는 내용이었다.
온기 없는 강 위 차가운 철골로 세워진 다리 위에 서서 죽기를 각오했을 때, 동료의 손을 잡았다고. 그 손에 낚여 살게 되었노라고. 담담하게 고백하는 가사가 마음 아프게 다가왔다.
그 아픈 마음 추스를 새도 없이, 후렴구가 현덕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나의 씨발점, 지금 여기는 나의 씨발.
나는 여기 서서 당당하게 말하지.
여기는 나의 씨발점,
씨발점,
씨발점.
내 모든 걸 보여줄 준비가 나는 됐다네.
바로 여기가 나의 씨발점이라고.
씨발과 씨발점의 무한 반복이었다. 아무리 들어도 ‘씨’로 들리는 ‘시’의 방언이 터졌다.
자룡은 목이 터져라 열창했다.
“…….”
“…….”
“…….”
“…….”
“…….”
“…….”
자룡의 랩을 들으며 어깨를 들썩이고, 리듬을 타던 단상 위 선생님들이 일제히 얼어버렸다.
현덕은 저도 모르게 검은 모자를 쓴 PD 쪽을 바라보았다. 메인 PD 뒤에는 기획사의 매니저, 실장들이 모여 서 있었다. 그 무리 안에 오 팀장도 있었다.
꽤 먼 거리였지만, 현덕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실시간으로 핏기가 빠져 창백해져 가는 오 팀장의 안색을.
오 팀장이 사람들을 헤치고 메인 PD에게 달려갔다. 뭐라 뭐라 급하게 말했다. 삐딱하게 선 메인 PD는 뭐가 그리 좋은지 웃으며, 오 팀장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오 팀장이 고개를 내저으며 방방 뛰는 게 보였다.
그 와중에도 자룡의 랩은 세트장을 가득 채웠다.
자룡은 트라이 온 출연을 결정한 자신의 각오가 어떤지, 두 동생과 함께 이 무대에 선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떨리는지 담담한 목소리로 고백했다. 그리고 여지없이 이어지는 후렴구.
나의 씨발점, 지금 여기는 나의 씨발.
나는 여기 서서 당당하게 말하지.
여기는 나의 씨발점,
씨발점,
씨발점.
내 모든 걸 보여줄 준비가 나는 됐다네.
바로 여기가 나의 씨발점이라고.
자룡은 무대를 뛰어 다니며 사람들의 호응을 유도했다. 세트장 안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자룡을 미친놈 보듯 쳐다볼 뿐, 누구도 호응해 주지 않았다.
그러자 자룡은 더 크게 웃으며 무대에서 날뛰었다.
단 한 사람, 단상에 앉은 비쩍 마르고 두꺼운 안경을 쓴 남자 선생님만이 히죽히죽 웃으며 손을 들어 호응해 주었다. 자룡과 안경 선생님, 오직 둘만이 영혼의 쌍둥이처럼 서로를 알아보았다.
여기는 나의 씨발점,
씨발점,
씨발점.
‘씨발’이 세트장에 길이길이 울려 퍼지고야 자룡의 무대가 끝났다.
“감사합니다.”
자룡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표정이 무척이나 개운해 보였다. 십 년 묵은 체증이 쭉 내려간 듯했다.
자룡의 개운함과는 별개로 단상 위는 침묵에 휩싸였다.
‘형, 이제 막 나가네.’
대교 위에서 있었던 사건 이후 자룡은 이전과 달라졌다. 콕 집어 뭐가 달라졌는지 말해보라고 하면 분명하게 말할 순 없지만 분명 무언가가 바뀌었다.
자룡이 다른 기획사로 이전해 데뷔할 수 있는 기회를 뻥 차고, 현덕과 함께 트라이 온에 출연하기로 밝힌 날. 현덕은 자룡의 팔을 붙들고 왜 그런 결정을 한 거냐고 따지듯 물어보았다.
자룡은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조건 데뷔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를 그만두려고. 어차피 내가 데뷔할 운명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데뷔하게 되지 않겠어? 그러니까 이제는 마음 편히, 그 과정을 즐겨 보려고.”
환히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너와 함께, 김현덕.”
그렇게 말하는 자룡은 한 꺼풀, 허물을 벗은 것 같아 보였다.
‘그때 말했던 즐긴다는 게 이런 건가?’
만약 그런 거라면.
어쩐지 오 팀장이 불쌍했다.
침묵 끝에 마이크를 넘겨받은 건 안경 선생님이었다.
안경 선생님이 칭찬을 쏟아냈다. 자룡의 얼굴은 금세 발갛게 달아올랐다. 안경 선생님은 다 좋은데 시옷 발음을 쌍시옷처럼 내는 버릇만 고치라고 당부했다.
칭찬을 받고 금의환향한 자룡이 현덕의 옆에 섰다.
“나 잘했지?”
현덕은 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저기에 서 있는 오 팀장님 한 번만 쳐다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자룡과 편히 대화를 나누는 현덕을 쳐다보다 스태프의 신호를 받고 무대의 중앙에 섰다.
“잠깐만요, 우주민 연습생.”
주민이 스탠딩 마이크를 잡자, 단상 위 선생님들이 주민을 막았다.
문득, 불안한 느낌이 등줄기를 타고 내렸다. 현덕과 자룡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형…….”
“설마 아니겠지?”
자룡도 현덕과 비슷한 생각을 한 듯했다.
둘의 불안함이 정답이라는 걸 알려주듯 단상 위에서 사형 선고가 떨어졌다.
“우주민 연습생 보컬은 충분히 봤어요. 잘 부르시더라고요. 우리는 노래는 그만 듣고, 춤 실력을 보고 싶은데요.”
머리를 민 댄스 선생님이 말했다.
‘안 돼!’
‘절대 안 돼!’
현덕과 자룡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안 돼!”
세트장 밖에서도 비명과 같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현덕은 오 팀장일 거라고 확신했다.
세트장 소음이 섞였음에도 촬영 카메라는 멈추지 않았다.
언제나 카메라 앞에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라던 오 팀장의 당부 따위는 기억 저편으로 멀리멀리 날아갔다. 현덕과 자룡은 뭉크의 절규를 꼭 닮은 표정을 지으며 주민을 간절히 쳐다보았다.
주민은 두 쌍의 레이저 눈빛을 견디지 못하고 둘을 돌아보았다. 현덕과 자룡은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안 돼, 하지 마!’
‘그건 아냐, 절대 아냐. 못 한다고 그래!’
둘은 지구 멸망의 날을 앞둔 사람마냥 절실했다. 주민은 그런 둘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더니 이내, 표정을 고쳤다.
주민이 상큼하게 웃으며,
“이렇게 열렬히 응원을 해주니, 꼭 해야겠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버렸다.
“할 수 있겠어요? 혹시 준비가 안 된 거면, 그냥 안 본 채로 평가를 할게요.”
“따로 준비하진 않았지만 하겠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주민은 춤을 추지 않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제 발로 뻥 차버렸다.
단상 너머에 앉아 있던 연습생들 쪽에서 탄성이 들렸다. 여유롭게 갑작스러운 미션을 받아들이는 주민을 향한 감탄이었다.
“그래요? 저기요, 음악 좀 주세요. 아무거나.”
선생님의 주문을 기다렸다는 듯 음악이 들렸다. 현덕은 처음 들어보는 팝송이었다.
주민이 눈을 감고 음악의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거기까지의 몸짓만 본다면, 춤꾼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예고된 재앙은 여지없이 도래했다. 어느 정도 음악의 리듬을 익힌 주민이 본격적으로 팔다리를 움직였다.
삐걱, 삐걱, 삐삐걱.
두 다리가 제각각 관절을 도가니탕 끓여먹고 딱딱한 뼈만 남은 것처럼 꺾었다, 두 팔은 공작새의 날개가 펼쳐지듯 뻗어 허우적댔다.
“…….”
“…….”
“…….”
“…….”
“…….”
“…….”
세트장은 자룡 때와는 다른 의미로 고요해졌다.
현덕은 슬쩍, 세트장 밖의 오 팀장을 바라보았다. 오 팀장은 당장 쓰러져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상태였다.
삐걱, 삐걱, 삐삐걱.
외로운 주민의 춤사위는 계속됐다. 누구도 감히 주민을 제지하지 못했다.
노래의 끝자락,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주민이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무릎으로 무대 위를 기며 연못 위의 소금쟁이같이 움직였다. 주민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현덕은 차마 더는 볼 수 없었다. 눈을 꼭 감고 그도 모자라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왜 부끄러움은 나의 몫인 걸까.’
양 뺨이 화끈거렸다. 얼굴이 빵- 터져 버릴 것도 같았다.
그렇게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3분 17초가 끝났다.
노래가 끊기자 주민은 태연한 얼굴로 일어서 엉클어진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방금까지 바지로 무대 바닥을 걸레질해주던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와 대조적으로 단상 위는 초토화였다. 댄스 선생님은 의자째 넘어졌는데 뇌진탕이 의심될 정도로 큰 소리가 났다. 다른 선생님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눈을 비비고 안경을 닦느라 바빴다.
그런 소란 속에서도 주민은 태연했다. 잘생긴 얼굴은 그 혼란 속에서도 찬란히 빛났다.
댄스 선생님이 다시 일어나자, 다른 선생님들이 서둘러 마이크를 넘겼다. 하지만 댄스 선생님은 제 코앞으로 들이밀어 진 마이크를 잡지 않았다.
결국 주민은 별다른 평가를 받지 못하고 무대 끝으로 물러나야 했다.
그때까지도 현덕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귀로는 노래가 끝났다는 걸 알았지만, 정말 끝난 건지 믿을 수 없어 눈을 감은 채였다.
“현덕아. 얼른. 너 차례야.”
자룡이 어깨를 잡고 흔들자 눈을 떴다. 현덕은 자룡에게 떠밀리듯 무대의 중앙에 섰다.
“이번엔 김현덕 연습생이네요. 아까 전체 평가곡에서는 서브 보컬 파트를 맡았죠.”
“네, 김현덕입니다.”
약간 얼떨떨한 상태에서 고개를 푹 숙였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자룡의 무대에 이은 주민의 무대까지. 연달아 폭탄을 맞은 선생님들과 프로그램 출연자들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무대에 오른 TE엔터테인먼트 연습생을 바라보았다.
현덕은 환한 조명 아래 서서 앞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랜 촬영에 지쳐 대부분 늘어져 있었다. TE엔터테인먼트의 단체 평가곡을 보면서 조는 연습생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모두 두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서 현덕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트장 밖엔 수십 대의 촬영 카메라 너머로 사람들의 눈이 숨어 있었다. 잠깐 새 많이 초췌해진 오 팀장은 현덕에게 두 손을 모아 싹싹 빌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건 처음이었다. 마이크를 잡은 손이 파르르, 떨렸다.
‘두렵고 무서워서, 떨리는 걸까?’
뱃속까지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아냐, 난 지금 무서운 게 아니야.’
지금과 비슷한 기분을 더러 느낀 적이 있었다. 수능을 보러 갔을 때 처음 사법고시 시험을 보러 갔을 때. 그때마다 현덕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최선을 다하자. 지금을 즐기자.’
현덕은 마이크를 잡은 손에 꽉, 힘을 주었다. 제 손안의 떨림을 기꺼이 즐기며, 앞을 바라보았다.
개인 평가곡으로 준비한 MR이 흘러나왔다.
벚꽃 바람.
몇 년째, 봄이면 갑자기 툭 음원 차트에 나타나 역주행을 하며 1위를 차지하는 곡이었다.
기교보다는 맑고 투명한 목소리로 승부 보는 노래였다. 타이틀은 아니었지만 봄이라는 계절에 맞물리는 서정성 때문에 오랫동안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중간중간 꽤 높은 고음 지대가 있었지만, 모두 수월하게 넘어갔다. 연습을 하며 천 번을 넘게 부른 곡이었다. 노랫가락이 자신의 숨처럼 느껴졌다.
현덕의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순수하게 당황했다.
‘뭐야, 쟤는 왜 평범하게 잘해. 왜 안 이상한 거야?’
자룡에 이어 주민. 그리고 현덕. 사람들은 현덕 또한 보통의 범주에서 벗어난 무엇을 보여주리라 예상했다. 놀랄 준비도 단단해 해뒀다.
하지만 현덕은 평범했다. 실력이 평범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현덕의 실력은 앞서 평가를 받은 출연자들과 비교하면 상위권이었다. 하지만 앞의 두 명과 차별화되는 평범함이 그 실력을 덮어버렸다.
“저기요, 진짜 셋이 같은 기획사 맞아요? 김현덕 연습생, 다른 회사 연습생인데 여기 위장 잠입한 거 아니죠?”
댄스 선생님이 이렇게 물어볼 정도였다.
평가 결과, 자룡은 A, 현덕은 B, 주민은 F 판정을 받았다.
자룡은 춤과 랩이 나무랄 데가 없었다고 했다.
현덕은 노래가 뛰어나고 춤도 어느 정도 추지만 뭔가 조금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B반에서 그걸 채우면 A로 오를 수 있을 거라고 조언을 들었다.
주민은 만장일치로 F 평가였다. 노래는 A 수준이었지만 춤 때문에 F였다.
이후 셋은 세트장 뒤에서 각 평가 등급에 따라 티셔츠를 받았다. 자룡은 빨간색, 현덕은 주황색, 주민은 파랑색이었다.
현덕과 주민, 자룡은 티셔츠 색에 따라 연습생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현덕은 주황색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 빈자리에 앉았다. 의자에 앉자, 다리가 뻐근하게 아팠다. 현덕은 무릎을 문지르며 뒤이어 들어올 다른 기획사의 연습생들을 기다렸다. 후반부에 평가를 받아 앞에 다른 연습생들의 평가를 보지 못했으니, 남은 다른 기획사의 연습생들만이라도 꼼꼼히 봐둘 생각이었다.
“형, 형.”
옆자리에 앉은 소년이 현덕을 불렀다.
소년은 현덕과 같은 주황색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셔츠가 꽤 커서 어깨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현덕이 그 셔츠 자락 끄트머리를 엉덩이로 깔아뭉개고 있었다.
“아, 미안합니다.”
현덕이 얼른 일어섰다. 소년은 자신의 셔츠를 빼내며 방긋 웃었다.
“아녜여. 근데 형이라고 불러도 되져?”
소년은 일어서면 현덕의 어깨에나 닿을까 싶을 정도로 어렸다. 이제 중학생이나 되었을까 싶었다.
눈은 고양이 눈처럼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 있는데 볼이 통통하니, 기묘한 인상을 주었다. 귀여우면서도 성격이 있어 보였다.
‘엄청난 동안일 수도 있어.’
자신보다 어린 게 확실해 보였지만, 그래도 현덕은 신중했다.
“반가워요, 난 TE엔터테인먼트 김현덕이라고 하는데. 이제 열여덟 살 되었고요.”
“아, 형. 말 놓으세여. 전 우탄 엔터 장준비인데 열세 살이에여.”
“열세 살이면, 초등학생?”
현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제 곧 졸업할 거거든여? 곧 중학교 올라갈 건데.”
준비가 볼멘소리로 대꾸했다. 양 볼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초등학생이 참가했단 말이야? 괜찮은 건가? 나도 미성년자이긴 하지만, 초등학생은 너무 어리잖아. 한창 공부하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학교에 가야 할 초등학생을 합숙까지 하면서 촬영하는 프로그램에 합류시키다니.’
현덕이 프로그램 제작진들의 비윤리적인 행태에 분개했다.
“형, 말 놔요. 나도 놔도 되죠? 걍 편하게 준비라고 불러여.”
준비는 현덕이 어버버 하는 새 말을 트고는, 소곤소곤, 말을 걸었다.
“형, 나 형 노래 듣는 데 진짜 좋아서. 형이 나랑 똑같은 B 등급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여. 근데 진짜로 B 받고 내 옆자리 앉아서 완전 좋았어여.”
다음 기획사 연습생들이 계속 세트장 위로 올라오고 있었지만, 준비는 신경도 안 썼다. 현덕이 준비의 말을 들으면서도 눈으로 무대 위를 쳐다보자,
“형, 나 봐여.”
조그만 두 손으로 현덕의 양 뺨을 잡고는 자신을 보도록 잡아당겼다. 현덕은 얼결에 준비와 얼굴을 마주했다.
“……!”
현덕은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준비의 눈은 파란색이었다. 렌즈를 낀 건가 했는데 아니었다. 검은 머리에 살구색 피부, 생김새까지. 모두 한국인 그 자체인데 두 눈은 가을 하늘처럼 새파랬다.
현덕은 준비가 기분 나쁘지 않도록 준비의 손을 붙잡고 아래로 내렸다. 대놓고 준비의 눈을 빤히 쳐다보지도 않았다.
준비는 그 푸른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그런 현덕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이내 배시시 웃었다. 눈꼬리가 접히며 예쁜 곡선을 그려냈다. 그 눈웃음이 주민과 조금 비슷했다.
“형, 진짜 좋다.”
준비가 현덕의 귀에 바짝 얼굴을 가져다 대고 속삭였다.
“내가?”
“응. 완전 좋아.”
“초면인데 좋게 봐줘서 고맙네.”
“아주 초면은 아닌데. 나 형이랑 같은 대기실 썼어여. 형 맞은편에 앉아 있었는데, 기억 안 나죠?”
“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대기실에 있을 땐 주민과 ‘고맙다’는 말 한마디 때문에 신경전을 벌이느라 주변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혹시 자신과 주민이 대화 나누는 걸 준비가 듣지 않았을까 걱정됐다. 초등학생을 앞에 두고 열여덟, 스무 살 둘이서 싸우기엔 너무 유치한 내용이지 않았던가. ‘고마워 해!’, ‘싫어, 고맙다는 말 절대 안 할 거야.’라니.
‘좀 부끄럽다.’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어어? 그, 그래. 준비야. 그런데 지금 촬영 중이니까,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촬영에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현덕은 손부채를 부치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저기 소리 엔터잖아요. 저기 완전 구리대여. 제대로 훈련도 못 받았을 텐데 봐서 뭐 해. 안 봐도 돼여. 그리고 어차피 우리 앉아 있는 건 거의 안 찍힐 걸여?”
준비는 현덕이 자신에게서 멀어지자, 현덕의 팔을 양팔로 붙잡고 매달렸다. 기우뚱, 현덕의 몸이 다시 준비에게로 기울었다.
형만 있고 동생이 없는 현덕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남자애가 살갑게 매달리다니.
‘나를 보는 맹덕 형의 마음이 이런 걸까?’
갑자기 동생이 생긴 느낌은 묘했다. 부담스럽진 않았다. 사람을 잘 따르는 고양이를 만난 것 같달까.
평소라면 내외하며 천천히 친해지자고 벽을 쳤겠지만, 여러 상황이 현덕을 무르게 만들었다.
방금 무대를 마치고 내려온 현덕은 흥분한 상태였다. 거기에 호의를 쏟아부어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 안 하는 주민에게 화도 났었고. 그런 상태에서 자신을 잘 따르는 초등학생을 만나니 마음이 말랑해졌다.
파마를 했는지 푸들처럼 고슬고슬해 보이는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보고 싶었다. 혹시나 준비가 싫어할까봐 현덕은 주저했다. 준비는 그런 현덕을 보고는 눈을 꼭 감고 제 머리를 현덕에게 들이밀었다. 마음껏 쓰다듬어도 된다는 태도였다.
오늘 처음 만난 열세 살, 장준비는 이렇게나 순하고 착했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절대 해주지 않겠다고 버티는 열아홉 살 우주민에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였다.
‘어떻게 이렇게 착할 수 있지?’
현덕이 용기를 내어 막 준비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할 때였다.
등 뒤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머리 위에 드리운 그림자를 눈치 채기도 전에, 그림자의 주인이 현덕의 손을 잡아챘다.
현덕은 준비의 머리털 하나 건드리지 못한 채 사나운 손길에 붙잡혔다.
“윽.”
손목이 아플 정도로 꽉 잡혔다. 현덕은 작게 신음을 내뱉었다.
“형?”
눈을 감고 현덕의 손길을 기다리던 준비가 퍼뜩 눈을 떴다.
“손이 헤프네, 현덕아?”
현덕의 머리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헤픈 손의 주인은 고개를 뒤로 젖혀 사나운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주민이었다.
‘왜 여기에 와 있는 거지?’
현덕은 얼떨떨했다.
F 평가를 받은 사람들과 함께 있어야 할 주민이 바로 등 뒤에 서 있다.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환하게 웃고 있는 채로. 어찌 당황하지 않을 수 있으랴.
현덕은 다시 고개를 내려 준비를 바라보았다. 준비는 한쪽 입술만 삐딱하게 끌어 올린 채 웃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F반 형아? 여기는 비 받은 사람들만 앉아 있는 곳인데요. 아직 촬영 중인 거 안 보여요?”
아직 변성기도 지나지 않은 미성의 목소리인데, 묘하게 날카로웠다.
“그러고 보니 촬영 중인데, 여긴 왜 온 겁니까?”
현덕의 말투 역시 퉁명스러웠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를 못 들은 앙금이 이렇게 오래갔다.
현덕은 붙잡힌 손을 빼내려 했다. 주민은 놔주는 대신 생수병을 쥐어주었다.
“너 목마를까 봐 내가 챙겨왔지. 현덕아.”
달콤하다는 생각이 들만치 상냥한 목소리였다.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언제부터 날 현덕이라고 불렀다고?’
얼떨떨한 기분은 금세 그 달콤함에 먹혀버렸다.
설탕을 한 국자 퍼먹은 기분이 들었다. 붙잡힌 손이 간질간질했다.
현덕이 앉아있는 의자 아래에도 생수병이 놓여 있었다. 현덕의 의자뿐만 아니었다. 다른 연습생들이 의자 밑에도 생수병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촬영 중 목 마르면 마시라는 배려인 듯 했다. 아니면 생수 PPL이거나.
상표가 잘 보이도록 놓여 있는 걸 보니 후자일 확률이 높아 보였다. 그걸 주민도 모를 리 없을 텐데, 주민은 굳이 그 생수병을 들고 현덕에게 왔다. 왜? 현덕이 목이 마를까 봐.
연습생들은 A, B, C, D, F 순으로 나뉘어 앉아 있었다. B 평가를 받아 주황색 티를 입은 연습생들과 F 평가를 받은 파란색 티를 입은 연습생들 사이에는 노란 티, 초록 티를 입은 연습생들이 있었다. 고로 주황과 파랑 사이는 꽤 멀었다. 한창 촬영 중에 굳이 찾아와 생수병을 쥐여줄 정도의 거리는 아니었다. 절대로.
‘이거 뭔가…….’
현덕은 눈을 데굴, 굴렸다.
‘나한테 미안하고 고마워서 그런 건가?’
문득 TV에 나왔던 초코파이 CF가 생각났다.
부끄러움 많은 소년이 자기가 괴롭혀 울린 소녀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할 용기가 없어 아무 말도 못하고, 쑥스러운 표정으로 초코파이를 내민다. 소녀는 그 초코파이를 받아 들고 환히 웃는다. 그렇게 소년 소녀는 화해한다. 둘이 바라보는 하늘엔 두둥실 보름달 같은 초코파이가 떠오른다.
참 정다운 CF였다.
‘이 생수에도 그런 의미가 담겨 있는 건가?’
현덕이 보지 못한 생수 CF에도 미안함과 고마움이 표현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저 멀리서 보기엔 내가 목말라 보였나 보네. 일부러 생수를 가져다주면서 화해를 청할 정도로.’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목이 말랐다.
현덕은 생수병에 담긴 화해의 의미를 받아들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단단히 뭉쳐 있었던 마음은 금세 풀렸다. 생수 한 병의 마법이었다.
CF 속 소녀가 초코파이를 맛있게 먹었던 것처럼 자신도 생수를 달게 마시리라. 현덕은 그렇게 생각하며 생수병을 쥔 손을 흔들었다.
“……?”
생수를 마시려면 뚜껑을 따야 하고, 뚜껑을 따려면 손이 필요하다. 그런데 주민이 손을 놔주지 않았다. 대신 준비를 노려보듯 쳐다보고 있었다. 준비 또한 주민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한 채였다. 졸지에 현덕은 뜨겁게 눈싸움 하는 둘 사이에 끼어버렸다.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 고민하던 현덕은 촬영 카메라 쪽에서 누군가 손을 흔드는 걸 보았다. 아까 대기실에서 봤던 작가였다. 스케치북을 들고 흔들고 있었다.
스케치북에는 ‘제자리로!!!’라고 크게 적혀 있었다.
‘아, 촬영 중이었지.’
현덕은 붙잡히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 주민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흠칫, 주민이 놀라는 게 느껴졌다.
“아직 촬영 중이에요. 여기에서 이러고 있으면 안 돼요.”
현덕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고개를 들어 주민을 올려다본 채였다. 주민은 잠시 머뭇거리다 현덕의 손을 놓아 주었다. 현덕과 자신이 입은 티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쯧, 혀를 차고는 돌아섰다.
“주민 형!”
현덕이 조그맣게 주민을 불렀다. 주민은 바로 멈춰서 뒤를 돌아보았다.
“이거 고마워요. 목말랐었는데, 잘 마실게요.”
현덕은 생수병을 흔들며 주민에게 웃어 보였다.
주민은 아무 대답 없이 돌아섰다.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걸어 파란 티셔츠를 입은 연습생들 틈으로 들어갔다.
현덕은 제 손목을 살폈다. 빨갛게 손자국이 나 있었다. 조금 욱신거리기도 했다. 그런데 화가 나지 않았다.
‘이 정도 가지고 마음이 풀리면 안 되는데.’
아까 전, 서둘러 돌아서던 주민의 얼굴이 다시 생각났다. 순간이었지만, 주민의 얼굴이 붉어졌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부끄러워한 건 아니겠지?’
현덕은 생수병을 따 물을 마시다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뭐가 설마여?”
준비가 불쑥, 물었다.
“어?”
“뭐가 설마예여?”
“아아. 방금 나한테 생수병을 준 사람은 우주민이라고, 같은 기획사 소속이거든.”
“알아여. 아까 대기실에서도 같이 있는 거 봤고, 저기 평가 무대에도 같이 서는 거 봤어여.”
“아, 그렇지. 그럼 알겠네. 약간 말다툼이 있었거든.”
물이 반 정도 남은 생수병을 흔들며 현덕이 말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형인데, 고맙다고 말할 줄 몰라서 이걸 들고 온 거야. 이거 주고 부끄러워서 얼른 가버린 건가 싶어서.”
“부끄러워서요?”
준비의 표정이 묘해졌다.
“저 F반 형이 현덕이 형한테 엄청 집착하나 봐요?”
“집착?”
준비의 말에 현덕은 고개를 갸웃, 흔들었다.
‘이 생수가 고맙다는 뜻이 아니라 집착의 뜻이 있는 건가. CF 내용이 어땠기에 물 상표가 집착이란 단어랑 연결이 되는 거지?’
손에 든 생수 상표의 CF를 본 기억이 없는 터라. 현덕은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이걸 내게 준 건 죽어도 고맙다는 말을 안 하겠다는 뜻인 건가? 고맙다는 말에 그렇게까지 집착을 하겠다고?’
만약 그런 거라면. 물을 줘서 고맙다고 말한 자신이 얼마나 멍청하게 보였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기분이 가라앉았다.
현덕은 생수병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충북 어느 지역의 맑은 샘물로 만들었다는 생수 로고 어디에도 집착의 의미가 보이진 않았다.
‘초코파이에는 ‘정’이란 글씨가 크게 쓰여 있던데. 이건 없는데?’
그런 현덕이 답답하다는 듯 준비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뇨, 형. 왜 생수를 봐요. 뒤를 돌아보라고요.”
준비의 손가락이 척- 현덕의 어깨너머를 가리켰다. 현덕은 그 손가락을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 파란색 셔츠를 입은 연습생들이 앉아 있었다. 똑같은 파란색 티셔츠를 입고 있어도 주민은 그중에서 제일 튀었다.
“잘생겼네.”
현덕은 새삼 감탄했다.
“아씨, 그런 게 아닌데!”
준비가 답답해했다.
“뭐가?”
현덕은 의아했다.
준비의 손가락을 따라 주민을 봤지만, 주민은 평가 무대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뺨이 약간 상기되어 있긴 했다.
‘무대가 그렇게 흥미로운가?’
현덕이 고개를 갸웃, 했다. 준비는 그런 현덕이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까지 저 형이 현덕 형 엄청 뚫어져라 보고 있었거든여? 진짜예여. 막 나 노려보기도 하고 그랬어여.”
“주민 형이 널 노려봤다고?”
현덕은 준비를 쳐다보았다. 준비는 양 볼에 공기를 잔뜩 불어 넣고, 뺨을 빵빵하게 만든 채였다. 정말 억울해 보였다.
“잘못 본 게 아닐까?”
현덕이 조심스럽게 물어보았지만 준비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다시 현덕의 어깨너머를 손가락질했다.
“어, 또! 또 그런다. 뒤 좀 봐여!”
준비의 말을 따라 다시 뒤를 돌아보았지만, 주민은 여전히 평가 무대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준비야.”
현덕은 준비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포슬포슬하게 파마한 머리카락은 현덕이 예상했던 것만큼이나 부드러웠다.
“분명 성격 나쁜 형이긴 한데, 처음 보는 사람 노려보고 그럴 정도까지 성격 더러운 사람은 아니야.”
현덕은 준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준비는 현덕에게 얌전히 머리를 내맡기면서도 현덕의 뒤를 힐끔, 보며 잔뜩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진짜인데여, 형.”
“그래, 그래. 뭐, 눈이 좀 뾰족해서 남을 째려보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 그런 걸 거야.”
에혀. 준비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그 파란 눈을 크게 뜨고 현덕을 올려다보았다.
“뭐, 저래 봤자 F반이니까. 아까 춤추는 거 보니까 평가 올리려면 고생깨나 할 거 같네여. 전 형이랑 같은 B반이니까. 제가 훨 더 유리하겠죠?”
“뭐가 유리하다는 거니?”
“형이랑 친해지는 거여. 형, 저 F반 형보다 저랑 더 친하게 지네여. 네?”
준비가 사르르, 눈웃음을 지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기분 좋아지게 만드는 웃음이었다.
‘아…….’
그 모습을 보자니 기시감이 들었다.
‘역시 닮았어. 웃는 모습이.’
뭔가 주민을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웃는 모습을 다시 보자 확신이 들었다. 생김새도 완전히 다르고 나이 차이도 크지만. 어째서인지 둘의 웃는 분위기가 비슷했다.
현덕은 준비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치웠다. 준비는 대신 손을 잡아 달라며 두 손을 내밀었다. 현덕은 준비의 작은 손을 꼭 잡아주며 앞을 보았다.
어느새 기획사 소속 연습생들의 평가 무대가 끝났다. 이후엔 기획사에 소속되지 않은 개인 연습생들이 한 명씩 나와 평가를 받는다고 했다.
다음 평가 무대를 기다리며 현덕은 쓰게 웃었다.
주민이 웃는 것만 볼 때는 몰랐다. 그저, 웃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만들다니 참 대단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주민과 비슷하게 웃는 준비를 보니, 알 수 있었다.
상대방의 속을 긁으려 환하게 웃는 주민. 보는 사람이 기분 좋아질 정도로 밝게 웃는 준비.
‘억지로 웃고 있는 거였구나.’
모두가 가짜 웃음이었다.
***
개인 연습생은 열 명 남짓이었다. 실력이 뛰어난 연습생도 있었고, 아직 연습이 더 필요해 보이는 연습생도 있었다. 그중 눈에 띄는 연습생은 두 명이었다.
한 명은 원소혁. 이십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주민과 자룡 때문에 눈이 높아져 있는 현덕이 보기에도 꽤나 잘생긴 사람이었다. 정석적인 미남이었는데, 홑꺼풀 눈이 특히 매력적이었다. 그가 나오자 옆에서 현덕의 손을 꼭 잡고 있던 준비가 탄성을 내질렀다.
“진짜로 나왔구나. 나온다, 나온다 하더니.”
“아는 사람이야?”
“알다마다여. 현덕 형은 몰라여? 저 형, 엄청 유명한데. 3대 기획사 중에 키키 있잖아여. 키키 엔터. 거기 연습생이었어여. 작년에 데뷔했던 스톰 데뷔조로 리얼리티도 나오고 그랬는데, 마지막에 거기서 떨어지고 키키도 나왔다고 하더라고여.”
어린데도 불구하고 준비는 자룡만큼 연습생들에 대해 잘 알았다.
“키키 나와서 3대 기획사 중 하나에 또 들어갔다는 소문 들었는데, 아니었나 봐여. 여길 진짜로 나오는구나.”
저 형은 무조건 A일 거예요. 준비는 입술을 쭉 내밀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A 평가를 받지 못한 게 꽤나 억울했던 것 같았다.
현덕은 슬쩍, 준비의 어깨너머로 A 평가를 받은 연습생들이 앉아 있는 쪽을 보았다. A 평가를 받은 연습생은 아직 여섯 명뿐이었다. 그 중 한 명인 자룡은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평가 무대를 보고 있었다.
자룡이 현덕의 시선을 눈치채고는 현덕과 눈을 마주쳤다.
‘저거 봐봐. 씨……앗, 장난 아니야.’
자룡이 소리 내지 않고 입모양을 크게 만들어 말했다. 손으로는 계속 평가 무대를 보라고 가리켰다. 현덕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룡의 말대로 평가 무대에 집중했다.
소혁이 준비한 평가 무대는 그가 데뷔조로 속해 있었다는 스톰의 타이틀곡이었다. 남성미를 드러내는 격한 안무와 빠른 랩 위주의 곡이었다. 현덕도 들어본 적이 있는 곡이었다.
지난 겨울, 가요계를 씹어 먹었다는 평가를 받는 곡이었다. 오랫동안 가요 차트 1위를 차지했다. 그래서인지 TE엔터테인먼트의 월간 평가에서 저 곡으로 무대를 선 팀이 두엇 있었다.
네댓 명이 파트를 분배했는데, 하나같이 안무를 소화하기 바빴다. 춤을 따라가느라 바빠 랩 가사를 절반 이상 흘려 보내 낮은 점수를 받았다. 예외는 없었다. 동료 연습생들의 무대를 보며 현덕은 안타까워했고, 자룡은 눈살을 찌푸렸다.
“미친 거 아냐? 월평에서 저런 걸 왜 해. 아주 꼴등 하려고 작정했네.”
실력을 보여야 하는 평가 무대에선 절대 하면 안 되는 곡이라고, 자룡이 말했다. 소혁은 그 곡을 가지고 혼자 평가 무대에 섰다.
전주가 들리자 현덕은 자룡을 보았다. 자룡은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때의 월간 평가 때와 같은 생각을 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생각을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전주가 끝나고 소혁이 입을 열었을 때 현덕은 무대에 완전히 빨려들었다. 소혁은 단번에 무대를 장악했다. 격한 안무를 물 흐르듯 추며 빠른 랩을 쏟아냈다. 춤과 랩, 보컬. 모든 걸 완벽하게 소화했다.
그의 무대가 끝나자 단상에 앉아 있던 선생님들은 일제히 박수를 쳤다. 그 뒤에서 지켜보던 연습생들도 박수를 쳤다. 기립박수를 치는 연습생도 있었다.
‘저렇게 잘하는데, 어떻게 데뷔조에 못 들 수 있지?’
현덕 역시 무대를 홀린 듯 바라보다 박수를 치려고 손을 들었다. 준비에게 손이 잡혀 있지 않았다면 한참 동안 물개 박수를 쳤을 것이다.
“박수 치지 마여, 저 형은 우리 적인데. 라이벌!”
준비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준비 또한 무대에서 눈을 떼지 못했었다. 소혁이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삑사리 없이 고음을 소화했을 때는 비명을 지르기까지 했다.
곡이 끝나고 정신이 들자 남의 무대에 흥분한 자신에게 화가 난 듯했다. 준비는 분해 어쩔 줄 몰라 했다. 현덕은 준비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네가 저 나이가 되면 저 사람보다 백배는 더 잘 할 거야.”
“그러려면 십 년이나 있어야 된다는 거잖아여. 그건 싫어. 지금 여기서, 저 사람보다 더 잘해야 되는 거라고여. 아니면 탈락인데!”
준비는 소혁을 보며 투지를 불살랐다. 옆에서 보자니 절로 ‘젊다는 건 좋은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뜨거웠다.
단상 위 선생님들은 소혁에게 대박 난 스톰에 합류하지 못한 심정이 어떤지 집요하게 물어 봤다. PD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담담하게 대답하던 소혁의 목소리가 어느 순간부터 떨리기 시작했다. 소혁은 끝내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세트장 사방에 걸려 있는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 그런 소혁의 모습이 클로즈업됐다.
소혁은 스톰에서 하차한 후 기획사를 나오고 한동안 방황했다. 그러다가 ‘트라이 온’ 시즌 2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용기를 내어 프로그램에 참가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소혁의 말에 세트장 연습생들은 일제히 숙연해졌다. 대부분 소혁과 같은 경험을 해본 적 있을 터였다.
현덕은 자룡을 보았다. 자룡은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부리부리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라 있었다. 누가 옆에서 톡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을 쏟아낼 기세였다.
대본대로 질문을 던졌던 단상 위 선생님들의 얼굴도 어두워졌다.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던 남자 선생은 안경을 벗고. 눈물을 닦느라 제대로 말하지도 못했다.
소혁은 단상 위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로 A 평가를 받았다. 이전 연습생들 중 아무도 받아보지 못한 최상의 평가였다.
그는 빨간색 셔츠를 입고, 연습생들이 모여 앉아 있는 곳으로 왔다. 자신처럼 A 평가를 받은 연습생들이 모여 앉아 있는 곳으로 가려면, 현덕이 앉아 있는 B 지대를 지나야 했다.
소혁은 현덕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얼굴을 본 현덕은 깜짝 놀랐다. 조금 전까지 어깨를 떨며 울고 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 빈자리에는 싸늘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감동이 싸그리 사라졌다.
“뭐야, 가라였네여.”
준비 또한 소혁의 얼굴을 본 듯했다. 쳇, 준비가 혀를 찼다.
“가라?”
“가짜여. 짝퉁. 대형 기획사 출신 아니랄까 봐 연기도 제대로 배웠나 보네. 동정표 엄청 얻겠어여. 저도 작년에 외할머니 돌아가신 거 말하고 울걸. 우리 할머니는 내가 얼른 데뷔하길 기다리셨는데.”
준비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외할머니에 관한 그리움 때문인지, 원소혁처럼 동정표를 받을 수 있을 만한 포인트를 놓친 아쉬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현덕은 그저 준비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초등학생인 준비도 알아챈 것을 자룡은 못 알아챈 듯했다. 자룡은 자신의 옆자리를 소혁에게 권하더니, 제 의자 밑에 있던 물병을 꺼내 뚜껑까지 따서 소혁에게 내밀고 있었다.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자룡의 얼굴이 훤하게 보였다.
소혁은 방자의 수발을 받는 이몽룡처럼 물을 받아 마셨다.
‘자룡 형은 사람은 참 착하고 가끔 신기가 있나 싶을 정도로 비밀을 잘 맞히는데, 그럴 때 빼곤 항상 너무 허술해.’
현덕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라도 소혁을 조심하라고 귀띔이라도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눈에 띄는 또 다른 개인 연습생은 해외 유학파 출신이었다.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 중 하나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이름은 피터 윤이었다. 한국 이름은 나중에 밝히겠다고 쑥스러워했다.
그는 머리가 빡빡이에 가까울 정도로 짧았다. 제대한 지 며칠 안 됐다고 했다. 미국 영주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포기하고 입대해 며칠 전 제대했다고 했다.
“요즘 군대는 그래도 말년쯤에는 머리 좀 기르게 해주지 않나요?”
단상 위 선생님 중 한 명이 묻자,
“FM대로 하고 싶었습니다. 트집 잡힐 일 없이, 정말 제대로 군대 생활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머리를 쓸어 넘기며 웃었다. 웃을 때 눈꼬리가 접히며 눈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워낙 성실히 군 생활을 했는지 말뚝 박으라는 권유를 많이 받았다고 했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지만 않았더라도 제대를 조금 늦추고 동계훈련을 마저 받고 나왔을 거라고. 군대를 다녀온 남자들이라면 제 귀를 의심할 만한 끔찍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저 형은 프로그램 내내 까방권 획득이겠네. 남자 표 다 저쪽으로 몰리겠어여.”
준비의 말에 현덕은 고개를 끄덕였다.
형을 군대에 보낸 현덕 역시 그에게 마음이 갔다. 자신에게도 투표권이 있다면, 기꺼이 그에게 한 표 던질 것 같았다.
피터는 통기타를 메고 노래를 불렀다. 보컬은 합격점이었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잘 부르는 건 아니었지만 못 부르는 것도 아니었다.
단상 위에서 혹시 춤을 출 수 있느냐고 묻자 피터는 말없이 웃으며 기타를 벗었다. 지켜보던 현덕은 덜컥, 마음이 내려앉았다. 조금 전 주민의 사태를 겪었기 때문인지 이상하게 무서워졌다.
현덕만 그런 기분이 드는 건 아닌 듯했다. 단상 위 선생님들 중 한 명이 급히, 그에게 말했다. 혹시 춤을 못 춘다면 그냥 솔직하게 못 춘다고 말하라고. 굳이 무리하게 출 필요는 없다고.
피터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잠시 후 주민에게 줬던 팝송이 흘러나왔다.
두근두근.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뛰었다. 현덕의 눈엔 아직도 주민의 춤이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잘 추면 나한테 말해줘.”
현덕은 피터가 춤을 추기 전 눈을 감았다.
“왜여, 형? 눈 아파여?”
준비가 순진하게 물어보았다. 현덕은 그런 준비가 부러웠다.
음악이 몇 소절 지나지도 않았는데, 준비가 현덕을 흔들었다.
“형, 대박. 짱이에여.”
현덕을 속이기 위한 반어법으로 들리지는 않았다. 준비의 목소리를 듣고야 현덕은 눈을 떴다. 그때 피터는 브레이크 댄스를 추고 있었다.
“우와!”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피터는 고난도 비보잉 동작을 연속적으로 선보였다. 몸이 뼈와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음악이 끊기자 피터는 헉헉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일어섰다.
“아니, 유학 가서 경제학을 공부한다면서 어디서 그런 걸 배웠어요?”
“마들스쿨 때부터 학교에서 친구들과 좀 췄습니다. 대학 와서도 그 친구들이랑 꾸준히 연락하고 지냈습니다.”
단상 위 선생님들과 피터의 대화는 훈훈했다. 이어진 평가도 그러했다.
피터는 B를 받았다. 현덕을 비롯한 몇몇 연습생들은 고개를 저었다.
‘저렇게 잘 추는데도 B라고?’
다들 비슷하게 생각한 듯했다. 단상 위 선생님들은 노래를 좀 더 보완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슬아슬하게 A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실망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은은한 미소를 띤 채 주황색 셔츠를 받아들었다.
연습생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온 피터는 주황색 셔츠 무리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누군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더니 현덕을 쳐다보았다. 현덕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피터는 마주 인사하고는 현덕의 뒷자리에 앉았다.
이후 두 명의 개인 연습생들이 각각 C와 F를 받았다. 그렇게 연습생 100명의 평가 무대가 끝났다.
연습생들은 물론 단상 위 선생님들, 촬영 스태프들까지 오랜 촬영 강행군에 지친 지 오래였다. 제작진은 삼십 분간 쉬는 시간을 가지겠다고 소리쳤다. 그러자마자 연습생들 사이에서 왁자지껄한 잡담이 터져 나왔다.
“형, 화장실 안 갈래여?”
“그래, 그래.”
현덕은 자신을 잡아끄는 준비에게 이끌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랫동안 앉아 있어 다리가 뻐근하던 차였다.
소혁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던 자룡은 현덕이 일어서는 걸 보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디 가냐고 소리쳐 물어보더니 현덕에게 빠르게 걸어 왔다. 주민 또한 자신에게 들러붙은 F조의 다른 연습생들을 털어내며 현덕에게 걸어왔다.
준비는 자룡과 주민에게 현덕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빨리 화장실에 가자고 현덕의 팔을 잡고 매달렸다.
“현덕? 거기, 김현덕 학생 맞습니까?”
그런 와중에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피터 윤이었다.
현덕은 칭얼대는 준비를 토닥이며, 돌아서서 티셔츠에 크게 적힌 자신의 이름을 펴 보였다.
“안녕하세요. 네, 제가 김현덕입니다.”
“네, 김맹덕 상병 동생 현덕 군 맞지 않습니까.”
“네?”
지금 여기. 이 장소에서 들을 수 있으리라 생각도 못 한 이름이 피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현덕의 눈이 뎅그래졌다.
“우리 형을 아세요?”
“네. 같은 내무반에 있었습니다. 김맹덕 상병이 제 한참 후임이었지 말입니다.”
피터가 싱그럽게 웃으며 말했다. 트라이 온 촬영 현장에서 형의 군대 선임을 만나게 된 현덕은 당황했다.
부드러운 인상의 피터가 거짓말을 한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맹덕의 이름을 어떻게 알고, 면대면 보이스 피싱을 하는 거라는 의심을 할 건덕지가 없었다. 다만 맹덕에게서 아무 말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어안이 벙벙했다.
‘형이랑 같이 군대 생활을 한 사람이 나랑 같이 여기를 나오게 됐는데, 형이 아무 말도 안 해 줬다고?’
배신감이 들락 말락 했다.
“형이 저한테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아, 저 삼 일 전에 제대했는데. 김맹덕 상병이 이렇게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피터가 얼른 주머니에 손을 넣어 쪽지를 꺼냈다. 부스럭거리며 쪽지를 폈다. 그러는 새 자룡과 주민은 현덕의 양옆에 도착했다.
“현덕아, 아는 사이야?”
자룡이 물었다.
주민은 현덕이 무슨 대답을 하든지 놓치지 않으려는 듯 현덕의 입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여전히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표정이 안 좋았다.
현덕은 아는 사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는 사이라고 해야 할지, 답을 찾지 못했다.
“그러게요.”
그저 난처하게 웃어 보였다.
흠흠, 피터가 헛기침을 하며 현덕의 시선을 끌었다. 현덕이 다시 자신을 바라보자 쪽지의 내용을 읽었다.
“축구 이겨서 휴가받아 나가면 이야기해주려고 했는데, 축구에서 져서 휴가를 못 나갔잖냐. 그래서 미리 말 못 했다. 그러게 형한테 개기면 자다가도 떡이 안 나오는 법이다.”
맹덕다운 내용이었다.
‘그건 비겁한 변명인데, 형.’
현덕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바로 어제도 통화했다. 그 전에도 며칠에 한 번씩 연락을 받았다. 말하려면 언제든 말할 수 있었을 터였다.
“맹꽁이 형, 완전 꽁해 있었네.”
현덕은 맹덕의 어릴 적 변명을 주문 외우듯 중얼거렸다. 자룡은 현덕의 뚱한 표정을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맹덕은 축구 대회에서 이기면 삼박 사일 휴가를 받을 수 있다면서, 당연히 이기고 갈 테니 기다리고 있으라고 자신만만했다. 그러더니 예선전에서 5:0으로 참패했다. 우울해하는 형이 재미있어서 전화가 올 때마다 놀렸더니, 단단히 삐진 듯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동생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에 아는 사람이 나가는데 소개도 안 해주냐.’
형에 대한 원망이 솟구쳤지만, 그건 차후에 풀 일이었다. 눈앞의 피터에겐 아무런 원한도 없으니. 현덕은 다시 피터에게 고개를 꾸벅였다.
“안녕하세요, 맹하고 꽁한 김맹덕 형 동생 김현덕이에요.”
“인사는 한 번만. 두 번 인사하는 건 죽은 사람한테 하는 겁니다.”
피터는 얼른 손을 뻗어 현덕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현덕은 양 뺨에 닿는 감촉에 놀랐다. 기타를 쳐서 그럴까. 아니면 제대한 지 며칠 안 되어서일까. 피터의 손은 꽤 거칠었다. 군데군데 굳은살도 박여 있었다.
“김맹덕 상병한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그래서 정말 김맹덕 상병의 말대로인지 궁금했는데.”
클래식 기타의 음을 사람의 목소리로 바꾸면 이렇지 않을까 생각되는 목소리였다. 부드러우면서도 목소리에 심이 박혀 절로 귀를 기울이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듣던 대로지 말입니다.”
피터가 현덕과 얼굴을 마주하며 웃었다. 웃는 얼굴은 하회탈 같았다. 눈가에 주름이 접히며 눈웃음을 쳤다. 더없이 매력적인 웃음이었지만, 정작 그 웃음을 마주한 현덕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졌다.
‘이 사람도.’
현덕은 눈을 깜박였다.
‘억지로 웃고 있네.’
***
“야, 박자룡!”
어디선가 세트장이 흔들릴 정도로 큰 고함이 울렸다. 프로그램의 모든 제작진과 출연자들에게 ‘박자룡’ 이름 석 자를 각인시킬 만한 사자후였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오 팀장이었다.
“대형 기획사는 매니저도 성량이 쩌나 봐.”
누군가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타사 연습생에게 성량을 인정받은 오 팀장은 세트장 구석에 숨어 있던 자룡을 향해 달려들었다. 자룡은 춤으로 단련된 날렵한 몸짓으로 오 팀장을 피해 달아났다. 둘은 연쇄 살인마와 형사처럼 쫓기고 쫓는 추격전을 펼쳤다.
“내가 너 이 자식, 반드시 족쳐버린다!”
오 팀장은 눈에 불을 켜고 자룡을 잡으려 들었다.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고도 달음박질이 일품이었다.
“아, 씨-앗. 아, 왜요! 나 쫓아오지 마요!”
자룡은 기겁하며 도망 다녔다.
“쫓아오지 마? 개인 평가 무대를 그딴 식으로 해놓고 그런 말이 나와? 너 이리 안 와? 씨발점? 씨이발점? 야, 이 자식아! 너 제정신이야!”
“씨발점이 아니라 시발점이라고요. 왜 남의 랩 제목을 이상하게 불러요.”
자룡은 ‘시’를 아주 정확하게 발음했다. 그것이 오 팀장의 화를 더 돋웠다.
준비와 화장실을 다녀온 현덕은 둘을 보며 누구를 응원해야 할까 고민했다. 그러다 촬영 카메라 쪽을 보았는데, 촬영 카메라에 불이 켜져 있었다. 메인 PD가 오 팀장과 자룡을 찍으며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오 팀장님, 우리한테는 그렇게 조심하라고 해놓고.’
현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 팀장과 자룡에게 지금 촬영 카메라가 둘을 찍고 있다는 걸 알리진 않았다. 악편집감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먼저 지친 건 당연히 오 팀장이었다. 자룡은 세트장 주변을 몇 바퀴씩 돌면서도 생생했다. 오 팀장이 바닥에 쓰러져 헉헉대자 자룡은 오 팀장 주변에서 빙빙 돌며 오 팀장을 놀렸다. 그 모습을 훈훈하게 바라보던 현덕의 귀에 주변 연습생들의 대화가 들렸다.
“저거 JD지? TE엔터.”
칵테일파티 효과였다. 백 명의 연습생들이 세트장 여기저기에 흩어져 떠들고 있는데 유독 ‘JD’라는 단어가 귀에 꽂혔다.
“아, 뭐야. 대형이면 다야? 저거 분량 만들려고 일부러 저러는 거 아냐?”
“누군 좋겠네, 회사에서 존나 밀어 줘서.”
그리 듣기 좋은 내용은 아니었다. 현덕은 자룡을 욕하는 연습생들을 보았다. C 평가를 받은 노랑 티와 F 평가를 받은 파랑 티가 섞여 있었다.
그들은 별 시답잖은 루머까지 만들어내며 낄낄댔다. 자룡이 여자 연습생들에게 엄청 껄떡댔다든가, 자기 팬카페에 연락해서 부정 투표 준비를 하고 있다든가. 대개는 그런 내용들이었다. 자룡의 팬카페에서 강퇴 당한 현덕이 듣기에는 얼토당토않은 말들이었다.
“형, 무시, 무시해여. 열폭 쩔어서 저래여.”
현덕의 옆에 찰떡같이 달라붙어 있던 준비가 말했다. 준비의 목소리가 들렸는지 자룡을 욕하던 연습생들이 일제히 현덕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자룡을 욕하던 연습생들은 다섯 명이었다. 모두 같은 회사 소속인 듯했다. 현덕은 셔츠에 붙어 있는 스티커 명찰로 회사명과 이름을 확인하였다. 특히나 주도적으로 다른 연습생들을 부추겨 자룡을 욕한 연습생을 유심히 보았다. 키가 작고 다부진 체격의 연습생이었다. 이름은 이완용이었다.
‘이름값 하네.’
현덕은 눈살을 찌푸렸다.
혹시나 해서 주변의 촬영 카메라를 확인하였으나 모두 꺼져 있었다. 켜져 있는 건 오 팀장과 자룡을 찍는 한 대뿐이었다.
“야야, 가자, 가자.”
완용은 다른 연습생들의 어깨를 툭툭 치며 자리를 옮기려 하였다.
“거기, 이완용 연습생. 잠깐만요.”
현덕은 제게 등을 보이는 완용을 불렀다.
“뭐야.”
완용이 기다렸다는 듯 몸을 인상을 팍 쓰고 현덕을 쳐다보았다.
현덕은 차분히 눈을 마주쳤다.
“듣다 보니 없는 말을 함부로 지어내는 거 같아서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만.”
“형? 현덕 형?”
준비가 깜짝 놀라며 현덕의 팔을 잡아끌었다.
“형, 왜 그래요. 그냥 놔둬여. 놔둬.”
“야, 초딩, 넌 꺼지고. 거기. 왜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 시비야?”
완용이 어깨와 가슴을 과도하게 펴고 이를 드러냈다. 꼭 털을 부풀린 수탉 같아 보였다.
“뭐야, 저건. 왜 갑자기 우리한테 시비야?”
“봐봐, TE잖아. 지 형 얘기 좀 했다고 부르르 떠는가 보지.”
“지랄하네. 우리가 존나 만만해 보이나, 어디서 까불어? 회사 빽믿고 저러는 건가?”
완용의 뒤에 선 다른 연습생들은 대놓고 현덕을 비웃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준비가 슬쩍 현덕의 손을 놓았다. 분란에 끼어들지 않겠다는 듯 주춤주춤 물러섰다. 현덕은 그런 준비를 제 등 뒤로 숨겼다.
‘어디든 이런 사람들이 있구나.’
입안이 씁쓸해졌다.
꿈을 이루겠다고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나온 걸 텐데. 그 빛나는 기회를 잡으려고 나왔으면서 스스로를 더럽히고 하찮게 만드는 걸까.
대학에서도, 군대에서도, 고시촌에서도. 어디에나 있었다. 남을 비웃고 깔아뭉개면 자신이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럽다고 피하면 그들이 토해낸 더러움은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되었다.
백 명이나 되는 출연진들 모두 선하고 착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자룡은 여러 번 현덕에게 말했다. 프로그램 촬영에 들어가면 연습생들 간 견제도 심하고 기 싸움도 심할 거라고.
오 팀장도 그 점을 걱정했다. 현덕을 따로 불러 몇 번 면담을 했다. 혹시 프로그램에서 타사 연습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거나 따돌림을 당하면 바로 말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현덕은 두 사람의 걱정을 한 몸에 받으며 자신이 기가 약한 사람인가 고민해보았다. 요즘 짬밥 좀 먹었다고 자주 전화하는 맹덕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기 센 게 별거냐? 무조건 선빵 쳐. 형이 옛날에 가르쳐준 거 있지?”
“형은 날 소년원에서 만나고 싶은 거야?”
“사식은 넣어 드릴게. 그럼 된 거 아냐?”
“네, 군인 아저씨. 휴가 나오지 말고 거기서 축구 연습이나 열심히 하세요.”
물론 그리 영양가가 있진 않았다.
‘형 말대로 드잡이까지 가진 않더라도 경고는 해놔야지. 그래야 조금이라도 덜 하겠지.’
완용을 바라보는 현덕의 눈은 차분했다.
‘내가 못 들었다면 몰라도 이미 들었는걸.’
자룡에게 얼룩이 묻도록 놔둘 수 없었다.
이 프로그램의 전작, ‘트윈 트윙클’에선 항우희 사건이 일어났었다. 그런 일이 또 벌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예방을 해놓아야 했다.
현덕은 대교 위에서 위태롭게 서 있던 자룡의 모습을 잊지 못했다. 자룡이 ‘트윈 트윙클’에서 항우희 같은 상황에 처할 수 있을 만한 요소를 가만 두고 볼 수 없었다.
‘자룡 형은 마음이 너무 여려.’
오 팀장과 자룡은 현덕이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주눅 들까 봐 걱정했지만, 현덕은 오히려 자룡과 주민을 걱정했다.
자룡은 겉으로는 활발하고 강해 보이지만 마음이 너무 여리다. 주민은 인성이 없다. 둘 다 합숙까지 하면서 촬영하는 리얼리티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들이었다. 그들을 커버해줄 수 있는 건 무난하고 평범한 자신이라고, 현덕은 생각했다.
“없는 말 지어내서 남을 욕하는 게, 가만히 있는 모습은 아닐 텐데요?”
“씨발.”
현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씨발’이 날아들었다.
똑같은 씨발인데 자룡의 입에서 나오는 씨발과는 전혀 달랐다. 자룡이 그동안 씨발을 얼마나 건전한 방향으로 사용했는지 새삼 실감이 났다.
“그러니까 남이 하는 말을 왜 옆에서 멋대로 엿듣고 지랄하냐고. 야, 너 내가 만만해 보이냐?”
완용은 턱짓으로 멀리 떨어진 자룡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아니면, 저거랑 같은 회사라고 편드는 거? 씨발, 존나 우정 돋네. 드라마 찍냐?”
아예 눈을 가늘게 뜨고 현덕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쯧, 혀를 찼다.
“너 아직 고딩이지. 민증은 나왔냐? 어디서 형님들 얘기하시는데 껴들어?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 들어 봤냐? 어?”
완용이 현덕에게 윽박질렀다. 근처의 제작진을 의식한 듯 큰 소리를 내진 않았지만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등 뒤에 매달려 있던 준비가 더 뒤로 물러서는 게 느껴졌다.
현덕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혀끝에서 맴도는 말은 많았다. 허위사실 유포, 명예훼손, 벌금, 대개는 그런 단어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건 그런 말이 아니었다. 이미 주민에게서 여러 번 학습하지 않았던가. 이런 상황에서 법은 너무 멀었다.
“그쪽이 먼저 깠으니, 나는 정당방위입니다.”
“뭐?”
“씹새끼들아, 하지 말라면 하지 말라고.”
서른셋이었던 김현덕은 이런 상황에서 무난히 사용할 수 다른 방법들을, 군대에서 많이 보고 들었다.
“뭐, 이 새꺄?”
완용이 이를 갈며 현덕에게로 다가왔다. 박치기라도 할 기세로 제 얼굴 들이밀며 현덕의 멱살을 잡으려 했다.
현덕은 기꺼이 가만히 서 있었다. 때리면 일단 몇 대 맞아줄 의향이 있었다. 출연자 백 명에 프로그램 제작진 수십 명. 목격자는 널리고 널렸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손이 쑥 나와 현덕의 허리를 감쌌다.
“어?”
하는 사이에 누군가의 품에 안겼다.
다른 한 손이 앞으로 쭉 뻗어 나가 완용의 얼굴을 덮었다. 참 예쁜 손이었다. 대리석이나 상아로 조각한 것같이 하얗고 가느다란 손. 그런데 그 손이 인형 뽑는 기계의 집게발처럼 우악스럽게 완용의 얼굴을 움켜잡았다.
“우웁!”
완용의 얼굴은 꼭 거미에게 붙잡힌 것처럼 일그러졌다.
현덕의 머리 위에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이제 보니 욕도 할 줄 아네, 김현덕 연습생?”
웃음기 섞인 목소리였다. 그런데도 꽤나 화나 있는 게 느껴졌다. 굳이 올려다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현덕은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다. 주민이 웃고 있었다.
아까부터 주민은 현덕의 근처에 있었다. 세상 무료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근처 의자에 앉아서는 현덕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완용이 현덕에게 달려들자, 현덕의 뒤에 서 있는 준비를 밀치고는 바로 현덕을 잡아당긴 것이었다.
“으아, 엉덩이 아파.”
엉덩방아 찧은 준비가 울상을 하며 엉거주춤 일어섰다. 주민은 준비에게 관심 한 톨 주지 않았다.
“야, 씨발, 이거 안 놔?”
완용이 버둥거리며 양팔을 내저었으나 그의 주먹은 주민에게 닿지 않았다.
주민이 완용의 무릎을 걷어찼다.
“억!”
완용이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었다.
“똑같은 꼴 당하고 싶지 않으면 거기 가만히 서 있는 게 좋을 거야.”
주민이 완용의 뒤에 서 있던 네 명의 연습생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연습생들은 쉬이 다가오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완용은 동료 연습생들이 주민에게 달려들지 않자, 주민에게 얼굴이 붙잡힌 채로 눈두덩을 굴렸다.
“어억!”
그러더니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과한 비명을 내질렀다. 안 그래도 주변의 다른 연습생들이 무슨 일인가 기웃거리던 차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현덕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어이, 거기 무슨 일이지?”
제작진 중 한 명이 다가왔다.
현덕은 메인 PD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쪽까지 완용의 비명이 들렸는지, 메인 PD가 이쪽으로 촬영 카메라를 돌리고 있었다.
‘안 돼!’
현덕은 얼른 주민의 손을 잡아당겼다. 촬영 카메라에 찍히기 전, 완용의 얼굴을 잡고 있던 주민의 손을 회수했다. 완용의 얼굴을 찌그러트릴 뜻 쥐고 있는 손은 순순히 현덕이 잡아끄는 대로 움직였다.
“무슨 일이냐고.”
스태프가 그들 앞에 섰다. 프로그램의 막내 작가라던 그 남자 스태프였다.
“아이고, 작가님, 쟤가요-”
완용이 제 무릎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는 턱짓으로 현덕을 가리켰다. 현덕은 완용이 무슨 말을 하든 그에 맞춰, 멋진 변명을 만들어내겠다고 생각했다. 현덕이 자신의 순발력을 테스트하려 대기하고 있던 때,
“이완용 연습생이 관절염이 도졌답니다.”
옆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현덕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두어 발자국 거리에 피터가 있었다. 의자를 거꾸로 돌려 앉아 등받이에 턱을 괴고 있었다.
“관절염?”
“아니, 그게 아니라!”
완용이 급히 말을 꺼냈지만,
“네, 아직 젊은데 안됐지 말입니다.”
완용의 변명은 역시나 피터의 목소리에 묻혀버렸다.
“저 다리로 프로그램 쭉 참여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희가 걱정해주고 있었습니다.”
피터가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현덕은 물론이거니와 주민과 준비, 완용에 이르기까지. 졸지에 관절염 환자와 그를 걱정해주는 착한 연습생 무리가 되어버린 사람들은 얼빠진 표정으로 피터를 바라보았다.
“이완용 연습생, 관절염이 있어? 심한 건가요? 촬영 들어가기 전에 병력 사항 다 적어 내라고 했는데, 이완용 연습생 관절염 있다고 적어 냈어요? 연습생 중 관절염 심한 사람 있다고는 못 들었는데. 설마 아까 평가 무대 해서 아픈 건가요? 그 정도면 프로그램 촬영하기 힘든 거 아닌가?”
막내 작가가 호들갑을 떨며 완용을 일으켜 세웠다.
“아니,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완용이 말하려 하자,
“아까 보니 정말 심한 거 같던데요?”
준비가 말을 가로채며 쪼르르, 완용의 등 뒤로 갔다. 막내 작가를 도와 완용을 일으키려는 척하면서 완용의 무릎 뒤쪽을 자신의 무릎으로 가격했다. 체구가 작은 준비만이 티 나지 않게 쓸 수 있는 필살기였다.
“억!”
완용이 다시 쓰러졌다.
“어이구? 이거 정말 심한 거 아냐?”
막내 작가가 기겁하며 주변에 다른 스태프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주변이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피터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그 소란의 핵이었다. 피터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완용을 내려다보며, 막내 작가의 말을 계속 거들었다.
덕분에 완용은 관절염 환자인 데다가 그 아픔을 짜증으로 승화시킨 사람이 되었다. 현덕과 다른 연습생들은 그런 완용을 걱정해주고 완용의 짜증까지 받아준 착한 연습생들이 되었다.
현덕은 여전히 주민에게 껴안긴 채로 그런 피터를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저기 있었지?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건가?’
피터는 현덕과 눈이 마주치자 웃어 보였다. 눈꼬리가 접혀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 그 웃음이었다.
***
완용은 이번 촬영이 끝난 후 촬영 스태프와 함께 근처 병원을 다녀오기로 했다. 관절염이 심하면 초반에 건강이 안 좋다는 이유로 하차하게 될 예정이었다.
현덕은 혹여나 병원 검사 결과가 너무 좋게 나와 관절염 변명이 안 통하면 어떡하나 걱정했다. 뒤늦게 다가와 상황 설명을 들은 자룡은 걱정하지 말라며 현덕을 안심시켰다.
“연습생들 중에 몸 멀쩡한 사람 없어. 관절염 증상까진 안 나오더라도 연골이 많아 닳았다든가, 그런 결과 나올 거야. 그러면 괜히 그 정도로 엄살 부린 거라고들 생각할 테니까.”
군대도 안 다녀온 이십 대 초반의 청년이 병원 검사에서 연골이 닳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라니. 현덕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현덕의 표정을 본 자룡이 머리를 긁적이며 급히 말을 이었다.
“연습생 생활 성실히 안 했으면 연골이 건강하긴 하겠지. 뭐, 그래도 어디든 안 좋은 부분이 있을 테니까 걱정 마.”
전혀 안심이 될 만한 말은 아니었다.
현덕은 B 평가를 받은 연습생들이 모여 있는 자리로 가기 전, F 평가를 받은 연습생들이 모여 있는 곳에 들렀다. 팔짱을 낀 채 의자에 앉아 있는 주민이 보였다. 촬영에 들어가면 착해 보이게 웃으라고 오 팀장이 신신당부했는데도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주변에 앉은 다른 연습생들이 주민과 친해지려고 노력하는 게 보였다. 이름을 물어보기도 하고 이런저런 말을 걸었으나 주민은 귀에 코르크 마개라도 낀 사람처럼 굴었다. 주변 연습생들의 표정이 점차 냉랭해졌다.
주민은 하얀 도화지 같았다. 무엇에도 관심 없다는 듯 굴었다. 그런데 현덕이 주민 앞에 서자 주민의 얼굴에 표정이 나타났다. 하얀 휴지가 먹물을 빨아들이듯, 순식간이었다.
주민이 현덕을 보며 웃었다. 입술로만 그리는 가벼운 웃음이었다. 주민의 트레이드 마크인,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복장을 긁는 그런 웃음이 아니었다.
“…….”
현덕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렇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나?’
그러고 보면 언제부터인가 주민은 현덕의 앞에서 이렇게 웃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상냥하지 않은 편이라 놓치고 있었을 뿐.
현덕을 바라보던 주민의 눈썹이 꿈틀, 했다. 주민은 현덕이 앞에 서 있으면 인내심이 없어졌다.
“졸리면 자리로 가서 졸지? 남 앞에 서서 눈 뜨고 조는 건 무슨 경우인지 모르겠네. 김현덕 연습생?”
“아하…….”
덕분에 정신이 돌아왔다.
어쩐지 민망해 손으로 목을 쓸어 내렸다. 주민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고개를 살짝 숙였다. 주민의 어깨에 눈이 닿았다.
“주민 형.”
현덕의 부름에 주민이 어깨를 뒤로 젖혔다. 대놓고 현덕에게서 물러서는 태도였다.
‘어라?’
현덕이 고개를 들어 주민을 보았다. 주민은 현덕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생각보다 격한 반응이었다.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연습생들마저 놀랄 정도였다.
“뭐야, 같은 회사 연생끼리 왜 저래?”
“안 친한가 봐?”
그들처럼 생각하는 게 당연한 거겠지만. 어째서인지 현덕은 주민이 부끄러워서 내외하고 있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주민을 처음 봤을 때 주민은 현덕을 발바닥의 무좀만도 못하게 쳐다보았다. 그때와 비교한다면 지금은 완전히 첫날밤에 부끄러움 타는 새신랑이었다.
자신보다 훨씬 덩치도 크고 성질도 더러운 사람이 자신을 무서워하는 것 같다고 느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냥 형이라고 한 번 불렀는데, 이렇게 당황하다니. 아까 계속 날 껴안고 있던 게 누군데?’
현덕은 아까 오 팀장에게 받은 생수병을 건넸다.
“아까 도와줘서 고마워요.”
“…….”
주민은 현덕이 내민 생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팔짱 낀 주민의 손끝이 부산스럽게 까닥였다. 어쩐지 초조해 보였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는 걸까. 받고 싶은데 쑥스러워 못 받는 걸까. 현덕은 부디 후자이길 바라며 주민의 팔을 잡았다.
주민이 움찔했다. 하지만 현덕의 손을 뿌리치거나 하진 않았다. 현덕은 주민의 팔을 잡아당겨 강제로 팔짱을 풀었다. 그리고 주민의 손에 생수를 쥐여 주었다.
주민의 손은 차가웠다. 생수병이 오히려 미지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거 받고 앞으로는 ‘현덕아’로 통일해요, 주민 형. 나도 주민 형이라고 할 테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네.”
“내 생각은 항상 똑같아요. 우리가 좀 친해졌으면 좋겠다.”
“고맙다는 말이 듣고 싶은 거라면-”
“언젠간 꼭 듣고 말 거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오늘은 오히려 내가 고맙다고 말해야 하는 날이니까.”
현덕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주민 형, 고마워요.”
“…….”
주민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현덕은 손가락으로 그 주름을 꾹꾹 눌러 펴주고 싶었다. 하지만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우주민 놀랠라. 오늘은 여기까지만.’
솟구치는 욕심을 꾹 눌렀다.
그간 주민과 부딪치며 얻은 교훈이었다. 빠르게 다가가면, 주민은 고슴도치처럼 온몸의 가시를 잔뜩 세워 부딪친다. 그런데 막상 그 가시에 찔린 게 아파 뒤로 도망치면 제가 훅 치고 들어온다.
오늘도 그랬다. 주민은 완용에게서 현덕을 구해주었다. 그 이후로도 계속 현덕을 껴안고 있었다. 현덕의 허리에서 팔을 풀지 않았다. 자룡이 떫은 표정으로 둘이서 왜 붙어 있냐고, 떨어지라고 해도 놓지 않았다.
그 품에서 현덕은 새삼 자신과 주민의 체격 차를 실감했다. 주민과 키 차이는 좀 나도 체격 차이는 크지 않다고 생각했건만, 큰 오산이었다. 현덕은 주민의 품에 쏙 들어갔다.
등에 닿는 주민의 몸은 꽤 딱딱했다. 주민은 평소 핏 좋게 입고 다녔지만 주로 긴 옷을 입었다. 셔츠를 입으면 재킷까지 꼭꼭 챙겨 입었다. 티를 입으면 대개 목 폴라를 입었다. 그래서 주민의 몸이 좋다는 걸 느낄 새가 없었건만. 막상 한 번 안겨보니 확 와닿았다.
‘잘생겼는데 몸도 좋네.’
신은 우주민의 성격을 얼마나 더럽게 만들고 싶었으면 주민에게 이렇게 잘생긴 외모와 잘빠진 몸매를 준 걸까.
신의 편애를 받는 것 같은 주민의 몸을 시기하지는 않았다. 푹 안겨 있어서 그런지, 주민의 품 안이 편했다. 마치 자신을 위해 준비된 맞춤형 이불을 뒤집어쓴 느낌이었다.
주민의 품은 딱딱했지만 따듯했다. 허리를 감은 팔도 단단했지만 아프지 않게 적당히 느슨했다. 그래서 현덕은 어서 그 팔을 풀고 빠져나와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품이 따듯하면서 왜 자꾸 사람을 밀어내는 걸까.’
좀 더 친해지고 싶었다. 굳이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 TV로 봤던 우주민에 대한 고마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물론 그때의 우주민은 현덕에게 언제까지나 고마운 기억으로 남아 있지만.
현덕은 이제 스무 살이 된 주민에게 꽤나 정이 들었다. 그래서 자룡만큼 가까워졌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자꾸 들었다.
‘고맙다는 말을 해달라고 한 것도 그런 의미인데.’
‘고마워.’라고 말하면 ‘천만에.’라고 대답할 생각이었다. ‘이미 나한테 말 놓고 있지만, 뭐 앞으로 말 편히 놓으세요, 주민 형.’ 이렇게. 중학교 영어 교과서에 나오는 ‘땡큐.’, ‘욜 웰컴’ 수준의 대화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서라도 관계를 풀어나가고 싶은데. 이놈의 우주민은 영 도와주질 않았다.
‘나한테 물 챙겨주거나 아까 맞을 뻔했을 때 도와주는 거 보면, 날 아주 싫어하는 거 같지는 않은데.’
벽에 막힌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자꾸만 한숨이 나왔다. 현덕이 한숨을 내쉬자 주민의 시선이 현덕을 쫓았다. 그러면서도 현덕이 쳐다보면 안 본 척 고개를 돌렸다. 본인은 안 들키려고 재빨리 움직였다 생각할지 모르나 현덕의 눈에 빤히 다 보였다.
이런 모습을 보고도 어떻게 널 포기할 수 있을까. 나만큼이나, 아니 나 이상으로 서툰 너를.
현덕은 쓰게 웃었다.
우주민은 어렵다.
이 짧은 명제가 마음에 들었다. 어려운 수학 문제에 풀릴 때까지 매달리는 건 현덕의 취미였다.
‘아까 준비가 말한 것도 이런 모습이었을지 모르겠네. 내가 걱정되어 날 봤던 거겠지.’
준비가 들었다면 ‘아니, 그게 아니고. 형만 쳐다본 게 아니고 날 노려봤다니까여?’ 하고 펄쩍 뛰었겠지만.
“안녕하세요, 주민 형이랑 같은 회사 연습생 김현덕입니다.”
현덕은 주민 근처에 앉은 연습생들에게 살갑게 인사를 했다.
안 그래도 주변에 앉은 연습생들은 주민과 현덕을 보고 있던 차였다. 연습생들은 주민에게 편하게 말을 거는 현덕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아, 혹시, 그 납치 영상에 뒤통수?”
한 연습생이 현덕의 뒤통수를 가리키며 물었다. 주민의 납치 영상이 언론에 풀리면서 현덕은 뒤통수 연생, 또는 통수남으로 불리고 있었다.
“네에.”
현덕은 순하게 웃어 보였다.
“저희 주민 형이 낮을 많이 가려요. 안 친할 땐 말도 툭툭 하구요. 나쁜 마음 먹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어색해서 그러는 거니까 부디 이해해주세요. 저희 형 잘 부탁드려요.”
본래 해야 하는 말은 꿀꺽 삼키고, 영업용 멘트를 날렸다.
‘사실 성격도 더럽고 말도 험하게 하는데, 그렇다고 너무 상처받진 말아주세요. 원래 그런 사람이려니, 생각해주시면 되는데. 그래도 따돌리거나 하진 말아주세요.’
현덕은 그렇게 F 평가를 받은 연습생들에게 두루 인사를 하고는 제 자리로 돌아왔다. 목을 빼고 현덕이 오길 기다렸던 준비가 현덕의 팔에 찰싹 매달렸다.
“형, 형. F반에 왜 그렇게 오래 있다와여?”
“응, 형이랑 같은 회사 연습생 형이랑 얘기 좀 하느라고.”
현덕은 앞으로 쏟아져 눈을 가릴락 말락 하는 준비의 파마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언제 만져도 보슬보슬한 감촉이 좋았다.
“형, 아까는 왜 괜히 벌집을 들쑤시고 그랬어여.”
준비는 주변의 다른 연습생들이 들을까봐 목소리를 낮추고 소곤거렸다.
“합숙 들어가면 계속 부딪칠 텐데, 저러다가 카메라 안 보이는 곳에서 형한테 나쁜 짓 하면 어떡하려고.”
작은 얼굴에 걱정이 그득했다.
아직 젖살이 덜 빠진 얼굴은 하얗고 부드러워 보였다. 무얼 그리 고민하는지, 두 눈을 데굴데굴 굴리느라 바빴다. 의젓하게 앉아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아직 어린아이였다. 이런 말을 하면 본인은 다 컸다며 화를 낼지도 모르지만.
현덕은 준비와 눈을 마주쳤다. 가을 하늘처럼 파란 눈 안에 현덕이 비쳤다.
“너한테는 피해 안 가도록 할게. 정 불안하면 나 말고 다른 연습생들이랑 좀 더 친하게 지내도 되고.”
돌멩이를 던지자 파란 하늘이 흔들렸다.
“왜 그렇게 말해여?”
준비가 다급히 현덕의 옷소매를 잡았다.
“형, 나 마음에 안 들어여?”
“아니, 마음에 들어.”
어렸을 때부터 동생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맹덕이 있어 언제나 든든하고 재미있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동생을 가지고 싶었다. 그래서 툭하면, 동생 욕을 하는 민철이 부러웠다.
민철은 동생에 대해 말할 때 열 번 중 아홉 번은 욕을 했다. 현덕에게 동생을 줄 테니 제발 가져가라고도 말했다. 그러면서도 동생이 어디 가서 맞고 왔다고 하면 눈이 뒤집혀서 달려갔다. 잘 싸우지 못해 같이 맞고 돌아오지 않으면 다행이면서도.
민철은 동생이 자길 안 닮아서 멍청하다고 투덜대면서도 동생의 여름방학 숙제를 대신 해주곤 했다. 학기 말엔 동생한테 물려주겠다고 필기 노트를 정리하고, 현덕의 필기 노트를 복사해 갔다. 동생의 같잖은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 자신의 용돈을 나눠주었고, 자신이 아끼던 물건을 넘겨주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학교에 와서 친구들에게 동생을 욕하긴 했지만, 막상 친구들이 추임새를 넣어 동생을 욕하면 화를 냈다. ‘니들이 뭔데 내 동생을 욕해?’
그때는 민철의 그런 모습이 참 모순적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루 만에 친해진 준비를 보자니 이해가 됐다.
‘민철이가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완용과 사이가 험악해지자 준비는 현덕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괜한 시비에 함께 휘말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아마,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인 자신에게 특히나 친근하게 굴며 귀여운 동생 포지션을 구축하려 했던 행동과 연결되리라.
현덕은 그런 준비의 행동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잘했다고 칭찬해 주고 싶었다.
현덕은 또 앞으로 흘러내리는 준비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주었다. 어쩐지 중독이 될 것 같은 감촉이었다.
“형?”
준비는 불안해하며 현덕을 올려다보면서도, 현덕의 손길을 얌전히 받았다. 똑똑해서, 자신이 인간보다 더 잘났다고 생각하는 강아지 같았다.
‘그래도 마지막에는 도와줬지.’
완용의 무릎 뒤를 냅다 찍어버리던 준비를 떠올리며 현덕은 웃었다.
“여기 같이 촬영하는 출연자 중에는 좋은 형들도 많아. 그러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가자. 다른 형들이랑도 친하게 지내고 나랑도 친하게 지내고. 준비야, 넌 여기서 제일 막내니까, 많이 사랑받을 거야.”
열세 살. 자신은 다 컸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래도 아직은 어린 나이다. 이것저것 계산하면서 날 사랑해줄 사람, 날 아껴줄 사람을 굳이 찾지 않아도 되는데. 그냥, 당연하게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귀여움을 받아도 될 시기건만.
왜 이 아이는 처음부터 불안해하면서 자신을 지켜줄 사람을 찾아 붙들려 하는 걸까.
안쓰러우면서도,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 마냥 귀여웠다. 본인은 모르리라. 지금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머리를 쥐어짜는 게 눈에 훤히 보인다는 걸.
‘어쩌면 이 프로그램 출연으로 인연이 닿았으니까, 서른 살이나 마흔 살이 될 때까지도 연락하는 사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럼 그때, 꼭 만날 때마다 말해줘야지. 지금 네가 얼마나 귀여웠는지.’
현덕은 준비의 귀여운 흑역사를 수집 완료하였다.
그리고.
피터는 여전히 현덕의 등 뒤에 앉아 있었다.
현덕과 준비가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한다고 노력했지만, 그래도 바로 등 뒤에 앉은 둘의 대화를 피터는 거의 다 들을 수 있었다.
싸늘할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머리가 짧아 눈빛을 머리카락으로 숨길 수 없었다. 입과 턱을 가리듯 손으로 턱을 괴었지만 눈은 가릴 수 없었다.
“여기 같이 촬영하는 출연자 중에는 좋은 형들도 많아. 그러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가자. 다른 형들이랑도 친하게 지내고 나랑도 친하게 지내고. 준비야, 넌 여기서 제일 막내니까, 많이많이 사랑받을 거야.”
준비에게 따뜻이 말하는 현덕에게 오래오래, 피터의 시선이 머물렀다.
***
촬영이 재개되었다.
단상 위에 빈자리가 생겼다. 딱 가운데 자리였다. 연습생들을 평가했던 선생님들은 셋으로 나뉘어 앉았다. 메인 PD의 손짓에 따라 세트장 한가운데 문이 열리고,
또각. 또각.
한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양손에 마이크와 대본 카드를 쥐고 있었다.
‘사회자인가?’
현덕이 역할을 짐작하기 무섭게 연습생들 사이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
준비도 자리에 벌떡 일어서더니 열렬히 박수쳤다.
B 평가를 받은 연습생들 사이에서 멀뚱하니 있는 건 현덕과 피터뿐이었다. 현덕은 TV에서 봤던 인물이 바로 눈앞에서 걸어 나오는 게 신기할 뿐, 왜 좋아해야 하는지 감을 잡지 못했다. 현덕의 뒤에 앉은 피터는 웃고 있었지만 흥분한 기색은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트라이 온 연습생 여러분. 꿈을 위해 이 자리에 선 여러분을 모두 응원합니다.”
마이크에서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는 지난 시즌, 트윈 트윙클의 우승자 방유진입니다.”
모든 연습생들이 섰던 평가 무대 위에 올라선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방유진.
짧은 커트 머리는 단발이 되어 있었다. 어깨에 닿을락 말락 하는 머리카락이 윤기 있게 빛나며 흔들렸다.
트윈 트윙클에서 봤을 때는 밝은 소녀라는 느낌이 강했건만. 지금 여기, 트라이 온에 선 유진은 강철로 만든 여신상 같았다. 힐과 다리에 딱 달라붙은 블랙진이 더없이 잘 어울렸다.
“여러분들의 멘토이자 프로그램의 MC로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연습생들은 더욱 달아올랐다. 프로그램에 출연한 연습생들은 대부분 그녀처럼 되길 바랐다.
유진을 바라보는 준비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현덕은 그런 준비를 붙잡아 다시 의자에 앉혔다.
“형, 형! 방유진 선배님이에여! 대에박!”
준비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현덕의 팔에 매달렸다.
“내 목표가 방유진 선배님처럼 되는 거거든여. 이 프로그램 1등으로 우승!”
“그래, 그래.”
“어떻게 방유진 선배님이 나온 걸까여? 그런 기사 하나도 안 떴는데!”
“나도 못 봤는데. 제작진이 노린 거 아닐까? 아마 방송 시작될 때까지 우리한테도 비밀 유지하라고 하겠지.”
“당연히 그래야죠! 대박인데! 와, 미친. 이따 쉬는 시간에 가서 사인해달라고 해도 될까여? 저 입고 있는 티셔츠에다가 해달라고 하고 싶어여!”
준비는 마치 현덕이 방유진의 매니저라도 되는 양 매달렸다. 현덕은 웃으며 그런 준비의 어깨를 쓸어 주었다. 여러 번 진정하라고 말해도 준비는 통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유진은 연습생들이 진정할 때까지 잠시 말을 멈추고 기다렸다. 연습생들의 함성이 잦아질 즈음, 다시 마이크를 들었다.
유진은 프로그램의 진행 방식을 설명해주었다. 연습생들은 대충 전달 받아 알고 있었던 내용이었으니, 이 프로그램을 시청할 시청자들을 위한 것인 듯했다.
‘소년 프로젝트 : Tri/y On’의 컨셉은 연습생들이 경쟁하며 자신의 재능을 갈고닦아, 끝내 데뷔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것이었다.
촬영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었다.
1부는 1, 2월 동안 촬영하는 것이었다. 100명의 연습생은 각자 자신이 받은 평가대로 나뉘어 합숙 생활을 하게 된다. 유진은 그것을 ‘기숙사 생활’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1월에 촬영을 시작한 거구나. 연습생들이 대부분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니까, 겨울방학 기간을 이용하려고.’
기숙사의 이름은 티셔츠 색깔이었다.
A 평가를 받은 연습생은 레드 기숙사.
B 평가를 받은 연습생은 오렌지 기숙사.
C 평가를 받은 연습생은 옐로 기숙사.
D 평가를 받은 연습생은 그린 기숙사.
F 평가를 받은 연습생은 블루 기숙사.
“해리 포터 같네여. 그럼 우린 오렌지 기숙사?”
“나도 방금 같은 생각했어.”
현덕과 준비는 서로에게 속닥이며 웃었다.
촬영은 1월부터 시작되지만, 프로그램 방영은 2월 첫 주부터 시작되었다. 시즌 1 ‘트윈 트윙클’ 때 연습생들이 실력을 기를 시간을 주지 않았다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그 비판을 수용한 것이라고 했다.
‘단지 그 이유만은 아니겠지.’
현덕은 제작진들이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트윈 트윙클은 거의 생방송 급이었다. 화요일에 평가 및 순위 발표식을 촬영하고 그 촬영분을 금요일 저녁에 방송했다. 그래서인지 편집이 고르지 못했다.
초반에 제법 분량도 많고 눈에 띄었던 연습생들이 중반에 가서 우수수 떨어졌다. 화면에 잘 드러나지 않던 연습생들이 후반까지 살아남았다. 때문에 방송 후반부에 접어들수록 ‘사실 이 연습생은 이랬다.’라는 식으로 이전에 방송되지 않았던 내용을 다시 편집해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다.
‘연습생들을 충분히 촬영하고, 후반까지 살아남을 만한 연습생들이 눈에 띄면 그 연습생들 위주로 편집하려고 하는 건 아닐까. 연습생들의 관계 설정 같은 거도 좀 더 쉽겠지. 한 달 이상 촬영한 후 방영하게 된다면.’
1부는 철저히 기숙사제로 운영되었다. 기숙사별로 체계적인 트레이닝을 받고, 기획사에서 주간 평가를 받듯 2주에 한 번씩 주간 평가를 한다. 그 평가 점수로 기숙사 조정이 이루어졌다.
평가는 단상 위 여섯 선생님이 두 팀으로 나뉘어 담당했다. 선생님 한 팀이 레드(A)와 블루반(F)을, 다른 한 팀이 오렌지(B), 옐로(C), 그린(D)을 맡았다.
1부에서 연습생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건 오직 단상 위 선생님들의 평가뿐이었다.
“그리고 2월 마지막 주. 그러니까 1부의 마지막 날, 최종적으로 D와 F평가를 받아 그린과 블루 기숙사가 된 연습생들 전원이 탈락합니다.”
일순, 모든 연습생이 얼어붙었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니만큼 매번 탈락자가 발생할 거라는 걸 예상했지만, 한 번에 그렇게 대규모의 인원이 탈락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기획사에 전달된 프로그램 제작진의 안내에도 탈락 인원과 방법에 대해선 정확하게 나와 있지 않았다.
“그 인원은 총 70명이 될 예정입니다. 그러니까 1부의 마지막에서 살아남는 연습생은 총 30명이 되겠지요.”
방유진은 연습생들의 동요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검은 모자 PD가 있는 쪽의 촬영 카메라만을 쳐다보았다.
“살아남은 30명의 연습생은 2부에서 시청자님의 선택을 받아야만 살아남게 됩니다. 시청자님, 당신은 어떤 연습생을 응원하시겠습니까?”
유진이 씩 웃었다. 특유의 밝은 웃음이 카메라에 가득 잡혔다.
2부는 매주 진행되는 시청자 투표로 생존자와 탈락자가 결정되는 생방송급 서바이벌이었다. 30명의 연습생은 각 10명씩 세 팀으로 나뉘어 미션을 수행한다. 그리고 2주에 한 번씩 3명이 탈락한다.
이전 시즌인 트윈 트윙클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트윈 트윙클에서 연습생의 당락을 결정하는 건 심사위원들의 평가 점수였다. 평가 점수에 따라 연습생들의 순위가 결정되었고 하위 순위의 연습생들이 떨어졌다.
트윈 트윙클에서 시청자 투표는 연습생에게 탈락 면제권을 주는 정도로 밖에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하지만 트라이 온은 달랐다.
“최종 우승자는 9명입니다. 이들은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11개월 동안 프로젝트 아이돌 그룹으로 활동하게 될 겁니다. 어떤 지원과 혜택을 받게 될지, 기대되시죠?”
유진은 프로젝트 아이돌 그룹이 받게 될 각종 혜택을 열거했다. 긴 목록이었지만 지금으로선 전혀 귀에 와닿지 않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가제가 트리니티였고, 정식 제목도 트라이였던 거구나.’
결국 핵심은 2부였다. 삼십 명의 연습생이 세 팀으로 나뉘어 경쟁하고, 최종 9명이 살아남는 무대.
‘내가 거기까지 갈 수 있을까?’
현덕은 B 평가를 받은 오렌지 기숙사에 속했다. 이 평가를 유지만 해도 일단 2부에 나갈 자격은 얻을 수 있을 터였다.
‘자룡 형은 당연히 안정적이고. 문제는.’
D 평가를 받은 그린 기숙사 연습생들의 표정은 그래도 밝았다. 반드시 C 평가 이상을 받아 살아남겠다는 열기가 보였다. F 평가를 받은 블루 기숙사는 더없이 어두웠다. 연습생들은 대부분 울상을 짓고 있었다.
그 속에서 주민은 단연 돋보였다. 마치 F 평가를 받은 연습생들 한가운데 끼인 A 평가 연습생처럼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저렇게 담담할 때가 아닌데.’
현덕이 주민의 시름을 대신 짊어졌다.
‘이 주에 한 번씩 한다는 그 평가 무대에서 춤을 잘 추는 모습을 보여줘야 어떻게든 점수가 오를 텐데.’
기획사 평가 무대의 곡만 해도 한 달을 연습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주에 한 번씩 하는 평가에서 주민이 그 이상으로 춤을 잘 출 수 있을까? 생각만 해도 숨이 막혔다.
‘도대체 과거에는 어떻게 데뷔했던 거지? 홀리포스였나? 분명 그런 이름의 남자 아이돌이었을 텐데.’
현덕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주민의 TV 인터뷰를 보았던 날, 옆 테이블에서 주민에 대해 이야기하던 목소리들이 가물가물했다. 그나마 기억나는 건 홀리포스라는 남자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했다는 것, 중간에 재계약이 어그러져서 홀로 기획사에 남았다는 것, 미국으로 건너가 연기자로 대성했다는 것이었다. 그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 홀리포스라는 남자 아이돌 그룹이 몇 명이었지? 프로젝트 그룹이었나? 여기서 떨어져서 회사로 돌아가 지금 데뷔조를 구성한 그 그룹에서 데뷔했던 걸까. 아니면 여기 프로그램에서 최종 인원에 들어 프로젝트 그룹으로 데뷔했던 걸까. 그 프로젝트 그룹이 인기가 많아져서 스테디 그룹이 된 걸까? 아니면 그 프로젝트 그룹 끝나고 다시 새로운 그룹으로 데뷔했던 걸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억이 뒤섞였다.
‘공부 안 하고 쉬는 날, 한 번이라도 검색해볼걸. 이래서야 인생을 두 번 사는 메리트가 조금도 없잖아.’
미래를 예언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건 아니지만. 아쉬운 마음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현덕의 착잡한 마음과는 별개로 촬영은 계속 이어졌다. 유진은 단상 위 선생님들을 한 명 한 명 소개했다. 현덕은 특히 오렌지 기숙사의 선생님이 될 세 명을 유심히 보았다. 주민의 춤을 보고 기절 직전까지 갔던, 머리를 민 댄서 선생님이 오렌지 기숙사의 담당이었다.
첫날 세트장 촬영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메인 PD가 촬영이 끝났다고 소리치자 각 기획사의 매니저, 실장들이 세트장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저마다 자기 연습생들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형, 또 봐여!”
준비가 활발하게 인사하며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오 팀장이 현덕에게로 왔다. 오늘따라 유난히 피곤해 보였다.
“현덕 씨, 고생 많았어.”
“팀장님도 고생 많으셨어요.”
둘 사이에 약간의 동지애가 형성됐다. 자룡의 ‘씨’발점 덕분이었다. 둘은 서로를 한껏 위로해주고나서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 자식들은 또 어딜 간 거야?”
“어? 아까까지만 해도 다 앉아 있었는데?”
현덕은 레드 기숙사 쪽과 블루 기숙사 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녹색 머리도, 싸가지 없는 미소도 보이질 않았다.
“또 어디서 사고 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오 팀장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설마요.”
무언가 희망찬 말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현덕은 오 팀장의 분위기에 전염되어 같이 얼어 붙어버렸다. 둘을 믿기엔, 오늘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
완용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촬영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획사 실장에게 뒷 목을 붙잡혀 한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프로그램의 막내 작가가 무슨 말을 했는지, 실장은 꽤나 화가 나 있었다.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윽박질렀다.
“우리 회사가 연습생을 무릎이 뽀사질 정도로 학대하는 회사라고? 넌 뭘 어떻게 하고 다니기에 이런 소리가 나돌아!”
“젠장, 그런 거 아니라고요!”
“제대로 상황을 설명해봐!”
실장의 고함에 귀가 먹먹했다.
‘어디는 쉬는 시간에 실장급 사람이 자기네 연습생들 분량 뽑아주려고 양복 차림으로 뛰어다니던데. 어디서 뭘 하다 와서 나한테 상황을 설명하라 마라야.’
짜증이 났다. 왜 뒤늦게 걱정하는 척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이래서 중소 기획사로 오는 게 아니었는데.’
혀끝에서 맴도는 말을 내뱉을 정도로 멍청한 건 아니었기에 실실 웃으며 대충 상황을 설명하고 얼버무렸다. 오해가 생겨서 그런 거라고 말하자 실장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실장에게서 풀려난 뒤 완용은 같은 기획사 연습생들을 모아 화장실로 갔다. 함께 소변을 보며 낄낄거리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김현덕이라고 했지? 그거 맹하게 생겨서, 성격 좀 있던데?”
“걘 아무것도 아니었잖아? 오히려 주변에 다른 놈들이 붙어 있어서 그 난리 났던 거지. 걔만 하나 놓고 보면 한주먹거리도 안 될 텐데.”
“아오, 짜증나. 허여멀겋게 생긴 거 죽빵 한 대 날려줬어야 했는데.”
“야야, 나대지 마. 설마 앞으로 기회가 없겠냐? 너도 그렇고 완용이도 그렇고 다음번에는 이딴 노랑 티 벗고 주황이든 빨강이든 입을 거 아냐. 그때 씨발, 조져버려.”
“지금 기숙사 나뉘었다고 존나 맘 놓고 나대고 있을 텐데. 다음 평가까지 기다릴 필요 있어? 합숙하다 대충 틈 봐서 카메라 없는 곳으로 끌고 가서 존나 패면 되지.”
“그건 그러네. 설마 화장실까지 카메라가 붙어 있진 않을 거 아냐. 칸 하나에다가 몰아넣고 밟자.”
“나 꼭 걔는 조지고 싶어. 눈깔을 확 파버릴라. 허여멀건 게 꼭 나 학교 다닐 때, 존나 재수 없던 범생이랑 똑같이 생겨서 얼굴만 봐도 짜증 나. 씹.”
완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머지 네 명은 완용의 비위를 맞추고자 크게 떠들어댔다.
화장실에 들어온 다른 연습생들은 그들을 보고는 도로 화장실을 나갔다. 졸지에 화장실을 전세 낸 그들의 기세는 하늘을 뚫을 듯 높아졌다.
준비는 초등학생이라 같잖아서 탈락. 자룡은 이번 일과 상관이 없어서 빼고. 주민은 눈이 미친놈 눈깔이어서 잘못 건드리면 확 돌아버릴까 봐 배제. 뒤에서 말을 거들었던 피터는 해외물 먹은 놈이라 괜히 건드렸다가 고소니 소송이니 덤벼들까 봐 아웃.
결국 만만한 건 현덕이었다.
다섯 명은 비실비실한 오줌발을 갈기며 현덕을 어떻게 조질지 떠들어댔다.
현덕을 여덟 번쯤 패고 굴리고 튀겨버렸을 때였다.
덜컥.
화장실 제일 안쪽 칸에서 걸쇠 풀리는 소리가 났다. 화장실 청소 도구가 들어 있는 곳이겠거니 싶어 닫혀 있어도 아무 신경도 안 썼던 칸이었다.
문이 열리고 길쭉한 다리가 드러났다. 밝은 애쉬브라운 머리카락이 환풍기 바람에 흩날렸다. 더러운 화장실도 화보를 찍기 위한 세트장으로 만들어버리는 외모였다.
“아, 씹.”
돌아봤던 완용의 얼굴이 구겨졌다.
미친놈 눈깔이어서 잘못 건드리면 확 돌아버릴까 싶어 배제했던 놈이었다.
“좋아 보이네. 아예 얼굴을 터뜨려버렸어야 시끄럽게 떠들지 못했을 텐데, 내가 그쪽 아이큐를 너무 과대평가했어. 그 정도면 알아먹을 거라고 생각했으니. 그치?”
주민이 화사하게 웃으며, 완용의 옆에 섰다. 그리고는 지퍼를 내리는 대신 밖으로 나온 완용의 것을 보았다. 피식, 주민은 대놓고 비웃음을 흘렸다.
“너랑 상관없으니까 괜히 시비 털지 말고 갈 길 가라.”
완용이 이를 뿌드득 갈며 말했다.
그의 거미손에 얼굴을 쥐어 뜯겼던 기억이 아직 생생했다.
괜히 미친놈 눈깔이라고 말했던 게 아니었다. 그때의 주민은 정말로 미친놈 눈깔을 하고 있었다. 정말 얼굴을 쥐어 뜯길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꼈다.
미친놈은 건드는 게 아니다.
완용은 ‘이놈은 미친놈이다. 미친놈이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되뇌며 무시했다. 아니, 무시하려 했다. 그런데 주민이 미친놈답게 건드려선 안 될 걸 건드렸다.
“인체는 참 신비로운 거야. 이렇게 작은데도 할 일을 다 하는 걸 보면 말이야.”
완용의 눈이 돌아갔다. 다른 건 몰라도 남자의 자존심이자 상징인, 다리 사이 물건을 모욕당하다니. 가만 있을 수 없었다. 단둘이라면 모를까, 다른 연습생들이 보는 앞에서는 더더욱.
“뭐야, 이 새꺄?”
완용은 급히 바지를 추켜올리며 주민에게 주먹을 날렸다.
주먹은 주민의 손바닥 안으로 쏘옥- 들어왔다. 주민은 대번 얼굴을 찌푸렸다.
“개새끼도 싸고 나면 주변 흙은 덮는다는데, 설마 아이큐가 개보다 못한 건가?”
주민이 완용의 팔을 움켜쥐어 완용이 소변보던 소변기에 그대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물을 내렸다.
“으아아악! 뭐 하는 거야, 이 자식아! 이거 안 놔! 야, 이 새꺄!”
완용이 기겁하며 몸부림쳤지만 주민을 물리칠 수 없었다. 주민은 제 손끝에 물 한 방울이라도 닿을까, 조심하며 완용의 손을 더 변기 쪽으로 들이밀었다.
네 연습생들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야! 뭣들 하는 거야! 보고만 있을 거야아악!”
완용의 고함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바지를 추슬렀다. 완용에게서 주민을 떼어내려 주춤주춤 다가갈 때였다.
“잠깐!”
화장실 입구에서 쾌활한 목소리가 들렸다.
“양파머리, 늦었잖아.”
“야, 이 정도면 아주 빠른 거거든? 씨-앗.”
화장실에서 씨앗을 찾는 남자의 머리색은 녹색이었다.
“JD?”
몰려 있던 네 연습생 중 한 명이 자룡을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오, 날 잘 아나 봐? 나는 거기, 전혀 모르는데.”
자룡은 친구를 만난 듯 그 연습생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한창 하던 작업을 마무리했다.
커다란 나무판을 가져와 화장실 문 앞을 가렸다. 얼룩말 무늬처럼 노란색과 검은색이 칠해진 커다란 삼각대도 끌고 와 앞에 놓았다. 삼각대에는 발간 글씨로 ‘공사 중’이라고 쓰여 있었다. 공사장에서나 볼 법한 표지판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화장실 공사 중이라고 생각할 법한 위장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아, 이것도 하라고 그랬지?”
자룡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빼 들었다. 주민에게 확인을 받는 듯한 자세였다. 물론 주민은 본 척도 하지 않았다. 자룡은 약간의 뻘쭘함을 어깨를 으쓱이는 거로 흩어버리고는, 핸드폰을 켰다.
쿵, 쾅, 쿵쾅, 쾅쾅.
자룡의 핸드폰에서 공사장에서나 들을 법한 소음이 흘러나왔다.
“다 됐다.”
자룡은 손을 탁탁 털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화장실 안을 돌아보았다.
“누굴 어떻게 하겠다고?”
우드득, 손에서 뼈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손 관절을 충분히 푼 자룡이 펄쩍 뛰었다. 화장실 문 위쪽 난간을 붙잡고는 두 다리를 뻗어 몸을 날렸다. 네명의 연습생 머리통에 자룡의 신발이 닿았다. 주민은 완용의 명치를 주먹으로 갈겼다.
“억!”
완용이 쓰러지며 소변기에 얼굴을 묻었다.
“너희 같은 쓰레기들은 내가 잘 알아.”
주민은 완용의 머리를 한 움큼 움켜잡아 들어 올렸다. 변기 물에 젖은 완용의 얼굴에 독기가 서렸다.
“그래, 그런 얼굴. 그런 얼굴 하면 사람들이 다 너를 무서워할 거 같지. 더러워서 피하는 건지도 모르고, 자기가 이긴 줄 알면서 만만해 보이는 사람을 막 건드려. 사실, 정말 만만한 게 아닌데.”
주민이 발끝으로 완용의 무릎을 툭툭 쳤다. 아까 한 번 깠던 부위였다.
“어때? 네가 남한테 하려던 것처럼 똑같이 당해보는 기분이?”
화장실 칸 안에서 완용과 연습생 네명이 하던 말들을 단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들었다. 합숙 생활을 하며 현덕을 어떻게 건드릴지, 몇 주 안에 자진 하차하도록 만들지.
‘감히 건드릴 생각을 해?’
누군 옆에 다가가는 것만도 버거워서 주저하고 있는데.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계속 보고 싶어서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못 하고 있는데.
주민의 눈이 번뜩였다. 완용이 꺼렸던 미친놈 눈깔이었다.
“이거 놔, 이 새꺄! 너, 사람들 오면 가만 놔둘 거 같아? 너 내가 경찰에 신고할 거야.”
완용은 기겁하며 발버둥을 쳤다. 주민에게 붙잡힌 팔을 마구 흔들었지만, 소용없었다.
“걱정 마. 경찰에 기어가지도 못하게 확실히 관절을 빼 줄 테니까. 관절염은 관절이 있어야 걸리지. 관절염 따윈 걱정 안 해도 될 몸으로 만들어 줄게.”
주민은 활짝 웃으며 완용의 팔을 비틀어 꺾었다.
“으아아악!”
“워이, 워이- 그 정도까진 안 된다.”
자룡이 주민을 말렸다. 주민은 역시나 들은 척도 안 했다. 자룡은 달려드는 연습생들을 휙휙 피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주민이, 진정하라고. 너 때문에 괜히 현덕이까지 경찰서 끌려갈라.”
주민을 말리는 주문은 단 한 단어였다.
주민은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듯 긴 숨을 내쉬었다. 주민에게 붙잡혀 있던 완용은 실시간으로, 미친놈이 정상인인 척하는 광경을 지켜봤다.
겁에 질린 완용을 내려다보며 주민이 화사하게 웃어보였다.
“얼굴은 건드리지 않을게.”
***
복도 구석의 화장실에선 공사가 한창이었다. 급한 볼일 때문에 화장실까지 종종걸음으로 오던 사람들은 남자 화장실 문 앞에 놓인 ‘공사 중’이라는 팻말에 돌아섰다.
화장실 안에서 들리는 쿵쾅거리는 소리 때문에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방송국에서 오래 근무한 직원들조차 미리 공고도 하지 않고 갑자기 화장실 공사를 하는 회사를 탓하며 돌아설 뿐이었다. ‘이놈의 회사, 하는 일마다 제멋대로라니까. 도무지 일하는 사람들 힘든 건 생각도 안 해주고 말이야.’
한참 뒤, 공사 소리가 그쳤다. 공사 중이라던 화장실에서 훤칠한 두 청년이 걸어 나왔다. 옷차림은 5대2로 싸우고 나온 사람마냥 엉망이었지만 얼굴만은 깨끗했다. 개운한 표정이 일품이었다.
“어이.”
자룡이 그냥 가려는 주민을 불렀다.
“이거 치우고 가야 되거든?”
“혼자서 잘 들고 왔으니, 치우는 것도 혼자서 잘 할 수 있을 텐데?”
“한창 힘쓰고 나왔잖냐. 같이 좀 치워주라. 싫으면 뭐, 우리 착한 현덕이한테 전화해서 도와달라고 하지, 뭐.”
자룡이 전화하려는 시늉을 하자 주민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쉬는 시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잘 몰랐던 자룡에게 말을 걸고 끌어들인 게 주민이었다.
분리수거 하는 걸 도와줬는데 뒷정리를 나몰라라 하면 쓰나.
“순순히 도와달라고 말할 때 도와줘라.”
자룡이 툭툭, 나무판을 두들겼다. 주민은 이를 갈며 나무판 반대쪽에 섰다.
둘은 나무판과 공사 중 팻말을 번쩍 들고 복도를 걸었다.
“설마 진짜 공사장에서 들고 온 건 아니겠지?”
“그 짧은 새에 어디 공사장을 다녀오냐. 소품실에서 슬쩍 했지. 예전에 여기서 단기 알바 뛴 적 있었거든. 그때 좀 알아뒀지.”
둘은 미로 같은 방송국 복도를 걷고 걸었다. 중간에 두 사람의 핸드폰으로 번갈아 전화가 걸려 왔다. 발신자의 이름은 똑같았다. ‘오 팀장.’
“오늘 일은 현덕이한테 비밀로 하자.”
“방금 전화하려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닐 텐데?”
“그건 그냥 시늉이었고. 굳이 현덕이가 알 필요는 없잖아?”
“…….”
주민은 대답할 필요를 못 느꼈다. 당연한 말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는 자룡이 귀찮을 따름이었다. 대놓고 귀찮다고 티를 내는 주민을 보며 자룡이 헛웃음을 지었다.
“현덕이가 너 귀엽다고 그럴 때 뭔 소린가 했는데-”
“닥쳐.”
“어허, 내가 한 살 형이라니까?”
“나잇값을 못 하면서 대우를 바라면 안 되지 않을까. 박자룡 연습생?”
“나 널 납치 현장에서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다? 생명의 은인한테 그렇게 막말해도 되는 거야?”
자룡의 말에 주민이 비웃음을 흘렸다.
“나이로 안 되니까 멋대로 남의 일에 끼어든 거로 생색을 내는 건가. 그거까지 안 통하면 또 뭘 들고나올지 궁금하네.”
“라스트 팡은 언제나 현덕이지.”
“…….”
“오케이? 납득? 인정?”
으득, 이 가는 소리가 대답으로 들렸다.
***
훤칠한 두 청년이 공사를 마치고 화장실을 떠난 뒤. 그들만큼이나 잘생긴 청년이 화장실로 걸어 들어왔다.
화장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트라이 온 출연자 다섯 명은 바닥에 뒤엉켜 있었다. 패싸움이라도 한 건지 서로 엉켜 있었는데, 얼굴은 멀쩡했다.
“으으…….”
“씨바알.”
기절을 한 건 아닌지 몸을 떨며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청년은 완용의 앞에 섰다.
“씹, 뭐야.”
잔뜩 구겨진 상태에서도 완용은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너흴 도와줄 사람.”
“뭐? 너도 내가 만만해 보이냐, 개새끼야?”
완용이 퉷, 침을 내뱉었다. 침이 신발에 철썩 들러붙었다.
“난 대형 새끼들 안 믿거든? 씨발, 회사만 크면 다야?”
“왜 그래, 너도 한때는 대형에 있었잖아. 바로 데뷔시켜준다는 말 듣고 회사를 배신하고 나간 건 너였고.”
“꺼지라고, 씨발아.”
“이완용 연습생. 나는 그쪽이 다시 대형 기획사에 갈 수 있을지 모를 기회를 제공해주려고 하는 건데.”
그는 침 묻은 신발을 완용의 바지에 문질러 닦으며 말했다. 그 발을 밀쳐내려던 완용은 그의 말에 멈칫했다.
“뭐? 너 방금 뭐라고 했어.”
“날 좀 도와달라고.”
“……뭘 원하는데?”
“이제야 말이 통하네.”
신발이 깨끗해지자 청년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완용은 자신의 위에 엎어진 다른 연습생을 밀치고 몸을 일으켰다.
“씨발.”
자신과 다르게 멀끔한 모습을 보자니 절로 욕이 나왔다. 완용의 욕에도 그는 화내지 않았다. 딱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해결해야 할 일이 있는데, 내가 등급이 좀 높아서 말이야. 등급이 낮은 너희가 필요해. 물론 너희의 더티한 스타일 말고 내 식대로 가고. 이렇게 당해봤으니, 너희 방식이 안 통할 거라는 건 학습했겠지만.”
“야, 원소혁.”
완용은 청년의 이름을 불렀다.
‘재수 없는 새끼.’
소혁은 연습생들 사이에서 꽤나 유명했다. 완용이 제일 재수 없어 하는 타입이었다.
초등학교 때 길거리 캐스팅으로 3대 기획사 중 하나에 입성했다. 체계적인 트레이닝을 받으며, 대단한 선배들의 콘서트에 얼굴을 들이밀며 인지도를 쌓았다. 유명 케이블 방송 리얼리티에 잠깐 얼굴을 비쳤을 뿐인데, 바로 팬클럽이 결성됐다.
일이 년 전부터는 그를 중심으로 블록버스터급 남자 아이돌 그룹이 만들어질 거라는 소문이 들렸다. 중소기획사에선 남자 아이돌 그룹을 기획할 때 소혁의 그룹과 시기가 겹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데 막상 대형 남자 아이돌 그룹이 데뷔할 때, 데뷔조였던 소혁은 없었다. 제작 과정에서 소혁이 아니라 다른 연습생이 센터가 되었다. 자신이 중심이 아니라는 걸 견디지 못한 소혁이 데뷔를 포기하고 아예 기획사를 나와버렸다.
다른 연습생들에게 간절한 데뷔의 기회가 그에게는 그저 여러 선택지 중 하나일 뿐이었다. 이 프로그램 출연 또한 마찬가지리라.
완용처럼 중소 기획사에서도 2군에 속하는 연습생들에게 이 프로그램 출연은 구원의 동아줄이었다. 이 프로그램이 아니면 데뷔가 불가능에 가까운 연습생들도 태반이었다. 소혁은 그들의 절실함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였다.
무슨 이유에서 여기에 나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돋보일 장소를 찾아 나온 한낱 유희일 뿐이리라.
소혁에 대한 열등감과 분노가 뒤섞여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몸만 멀쩡했다면 주민에게 그러했듯 소혁에게도 주먹부터 내지르고 봤으리라. 하지만 완용은 그러지 못했다. 몸도 몸이지만, 소혁이 내민 제안이 너무 달콤했다.
“뭘 어쩌라고.”
완용은 일단 고개를 수그렸다. 이를 드러내는 건 원하는 걸 얻은 뒤에 해도 늦지 않을 터였다.
소혁은 세면대 앞으로 가 벽에 붙은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살짝 흘러내린 앞머리를 뒤로 넘기며 거울에 비치는 완용을 보았다. 고개를 숙이곤 있지만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모르지 않았다.
‘그게 너와 나의 차이인 거야.’
소혁은 거만함이라는 대리석을 깎아 만든 다비드 조각상이었다. 속내야 어떻든 겉으로라도 자신에게 수그리고 들어오는 완용에게 사르르 웃어 보였다.
“일단 괴롭힐 타깃을 좀 바꿔줘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