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결심 (7/36)

7. 결심

다음 날,

현덕은 TE엔터테인먼트에 발을 들이자마자 신인개발팀으로 소환되었다.

‘또 여기네.’

현덕은 신인개발팀 소회의실에 들어와 앉았다.

초등학교,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모범생 김현덕에게 익숙하지 않은 장소를 고르라면 그건 학교의 학생부 상담실일 것이다. 선생님의 심부름을 가는 게 아닌 이상, 현덕은 거기 갈 일이 딱히 없었다. 학교에서 선생님께 혼나거나 벌점 받을 만한 일은 전혀 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어째 TE엔터테인먼트 연습생이 되고는 툭하면 신인개발팀 소회의실로 끌려왔다. 대개는 혼나거나 혼난다거나, 또 혼나기 위해서였다.

‘이러다가 반성문도 쓰게 되는 거 아냐?’

태어나서 한 번도 반성문이란 걸 써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조금 기대되기도 했다.

‘반성문이라니. 그것도 논술처럼 분량과 양식이 정해져 있는 거겠지?’

설레어 하는 현덕과 달리, 현덕을 소회의실로 데리고 온 오 팀장의 표정은 무시무시했다.

‘내가 뭘 또 잘못했지?’

현덕은 대개 학생부 상담실에 끌려가는 학생들과 비슷한 생각을 하며 눈을 굴렸다.

오 팀장은 현덕을 앉혀 놓고는 줄곧 아무 말이 없었다. 학생부 부장 선생님 같은 굳은 얼굴과 매서운 눈빛으로 현덕을 바라보기만 했다.

당연히 현덕은 안절부절해야 하지만, 이 눈치 없는 연습생은 명상의 시간을 즐기는 도인처럼 태평했다.

“허, 참.”

보다 못한 오 팀장이 혀를 찼다.

“현덕 씨.”

“네.”

이제 시작인가 싶어 혼날 준비를 했건만.

“아이돌 선발 프로젝트 TV 프로그램에 우리 회사 대표로 나가보지 않겠어?”

“네? TV에 나가라고요?”

“그래, 요 얼마간 연습생들 사이에 소문이 좀 돌았던 걸로 아는데, 전혀 못 들어 봤어?”

오 팀장이 혀를 차며 물었다.

“네.”

현덕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그럼 설명이 좀 길어질 수도 있겠네.”

오 팀장은 예상치 못했다는 듯 난감해했다. 현덕은 어깨만 으쓱이고 말았다.

현덕은 기본적으로 다른 연습생들과 그리 친하지 않았다. 오며가며 인사도 하고 식당에서 마주치면 같이 밥을 먹기도 했지만 딱 그 정도였다. 말을 트고 편히 이야기할 정도로 친한 건 자룡뿐이었다.

자룡은 오래전부터 TE엔터테인먼트에서 연습생 생활을 해왔다. 게다가 성격까지 좋아 회사 직원들과 두루 친했다. 덕분에 이런저런 소식이나 소문을 쉽게 접했다. 그중 중요한 내용만 현덕에게 알려주었다.

하지만 요 얼마간은 자룡이 데뷔조 선발에 집중하였기 때문에 자룡이나 현덕이나 회사에 떠도는 소문에 집중하지 못했다. 때문에 다른 연습생들에게 도는 소문이 현덕에게까지 닿지 않았다.

“잠깐만.”

오 팀장이 소회의실 밖으로 나가더니,

“어이, 김 대리. 우리 그- 공문 어디 갔지? 어? 어, 그거 말이야. 아까 내가 치운다고 여기다 놨던 거 같은데.”

부산스럽게 무언가를 찾았다.

이윽고 종이 몇 장을 들고 돌아와 현덕에게 내밀었다.

“아예 모른다니, 차라리 이걸 한 번 읽어보는 게 나을 것 같네.”

“네.”

현덕은 종이 뭉치를 받아들었다.

서류는 어느 케이블 채널에서 새로운 프로그램에 TE엔터테인먼트 연습생을 내보내달라고 요청하는 공문이었다.

형식은 정중한 요청이었지만 사실상 강요나 마찬가지였다.

만일 출연진을 내놓지 않으면? 차후 TE엔터테인먼트 소속 아티스트들은 해당 케이블 채널의 어떤 프로그램에든 출연하기 힘들어지리라. 이쪽 업계에 대해 잘 모르는 현덕이 읽어도 그 속뜻이 읽혔다.

런칭 예정인 프로그램의 타이틀은 ‘국민 아이돌 프로젝트☆트리니티(가제)’였다. 전국의 연예기획사에서 아이돌을 꿈꾸며 땀을 흘리는 연습생들에게 꿈의 무대를 만들어준다는 게 기획 의도였다.

현덕은 뒷장을 넘겨보았다. 프로그램 촬영 일정과 내용이 적혀 있었다. 촬영 시작일은 약 한 달 뒤였다. 촬영 기간은 꽤 길었다. 거의 9개월에 달했다.

프로그램 제작진은 출연한 아이돌 연습생에게 일정 기간, 최고의 트레이닝을 받도록 해주겠다고 했다. 현덕이 소속된 TE엔터테인먼트 정도의 대형 기획사에 소속된 연습생에게는 그리 큰 메리트가 아니었지만. 중소 기획사 연습생이나 개인 연습생에게는 꽤 흥미로울 듯 했다.

프로그램은 데뷔를 위한 서바이벌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석 달 정도의 트레이닝 기간 가진 후 각 촬영 에피소드마다 정해진 미션을 수행하는데, 그 과정이 우선 방영되고. 후반부엔 매번 시청자 투표를 통해 참가자들의 순위가 결정된다. 하위 순위 출연자는 탈락하게 된다.

최종 생존한 9인은 11개월 기한부 프로젝트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한다.

프로젝트 아이돌 그룹 활동은 해당 케이블사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될 거라고 쓰여 있었다. 예정된 혜택이 한 장 분량으로 쭉- 적혀 있었다.

‘왜 11개월이지? 12개월을 채우면 퇴직금을 줘야 하니까 11개월로 불공정 계약을 맺으려는 건가? 그런데 아이돌 그룹 계약을 할 때도 퇴직금을 받을 수 있는 건가?’

현덕은 저도 모르게 11개월이란 단어에 집착했다. 요즘 TV로 비정규직 불법 고용에 대한 뉴스를 접하다 보니 아무래도 신경쓰였다.

“다 봤어?”

“아, 네. 여기요.”

현덕은 서류를 반납했다.

“이걸 저보고 나가라는 건가요?”

“그래그래, 좋은 기회인 거 같아서 말이야. 이 제안 받았을 때 가장 먼저 생각이 든 게 현덕 씨였거든. 어때?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오 팀장은 매우 적극적이었다.

“글쎄요.”

현덕의 태도는 미적지근했다.

“솔직히 말하면, 별로 하고 싶지 않아요.”

“뭐? 정말로? 이게 얼마나 좋은 기회인데!”

오 팀장은 로또에 당첨되고도 당첨금을 찾아가지 않는 사람을 보듯 현덕을 보았다.

“나가고 싶지 않아요.”

현덕은 다시 한번 의견을 밝혔다.

오 팀장에겐 미안하지만 아이돌로 데뷔하고 싶다는 욕심도, 바람도 없었다. 아이돌 연습생 생활 자체는 꽤 재미있었다.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여러 가지를 배우고 익힐 수 있으니까. 특별한 방과 후 활동같은 느낌이었다.

주간 평가나 월말 평가도 고단하지 않았다. 자룡이 말하기로, A급 연습생들 중에는 평가를 받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아 힘들어하는 연습생들도 많다고 했다. 위염약을 달고 살거나, 평가 날 전에는 잠을 못 자고 밤새 토하는 연습생들도 있었다.

데뷔 욕심이 없는 현덕에겐 학교에서 수업 때 가끔 보는 쪽지 시험 수준으로 느껴졌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급도 아니었다.

현덕이 생각하는 자신의 장래는 아이돌이 되어 무대 위에 서는 게 아니었다. 연습생 생활을 통해 갈고 닦은 춤과 노래를 훗날- 대학생이 되고 판사가 되어 노래방에서 발휘하는 것이었다.

노래 잘하고 춤 좀 추는 신입생, 혹은 신입 판사.

그 정도면 충분했다.

이전 삶에서는 공부만 한 공부벌레, 놀지도 못하고 놀 줄도 모르는 범생이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러니 이번 생에서는 이 정도의 특색을 갖춰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아버지는 기타 칠 줄 모르는 판사가 되었다며 후회하셨으니까, 나는 기타 치며 노래 부를 줄 아는 판사가 되어 보자.’

현덕의 목표는 이 정도였다.

‘티비에 출연하라니? 말도 안 돼.’

현덕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게다가 촬영이 너무 길어.’

서류에 적힌 기간은 9개월이었다.

물론 최후까지 살아남을 때 예상되는 촬영 기간이었다. 초반에 일찍 떨어진다면 삼사 개월 정도겠지만. 그마저도 충분히 길었다.

‘안 그래도 이제 슬슬 수능 준비를 해야 하니까, 연습생 생활을 정리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고3이 되기 전까지, 라고 단서를 달고 시작하긴 했지만. 하지만 정말로 그때까지 연습생 생활을 할 생각은 없었다. 공부에 전념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학교 가기 전에 공부를 하고, 학교에서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을 아껴 공부하긴 했지만. 방과 후 시간을 대부분 TE엔터테인먼트에서 보내다 보니 공부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적어도 고등학교 2학년 2학기가 되기 전에는 연습생 생활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공부를 해야 하지 않을까. 현덕은 막연하게 계획하고 있었다. 이 생각은 어제 자룡의 일을 겪은 후 더 뚜렷해졌다. 거기에 ‘박자룡’이라는 이유가 더해졌다.

현덕은 어젯밤에 누워 잠들기 전 생각했다. 만약 자룡이 이번에 TE엔터테인먼트에서 나간다고 하면 함께 그만두자.

만일 다른 기획사로 들어간다고 하면, 그런데 혼자 가는 게 좀 그렇다고 머뭇거리면 함께 기획사를 옮기자. 적어도 고등학교 2학년 2학기가 시작되기 전까진 새로운 기획사에서 자룡과 함께 하자.

서류에 적힌 기간은 현덕이 마지노선으로 생각한 시기에 걸쳐 있었다.

‘어쩌면 잘된 걸지도 몰라.’

만일 오 팀장이 이 자리에서 이 프로그램에 나가길 강요한다면 그걸 빌미 삼아 연습생 생활을 그만두겠다고 하면 된다. 연습생 생활을 그만두는 변명을 따로 만들지 않아도 될 테니 오히려 그편이 더 나았다.

‘그런데 이걸 왜 나한테 권하는 거지?’

아이돌 연습생에게 TV에 나가 얼굴을 알리는 건 좋은 기회다. 굳이 현덕이 아니더라도 이번에 데뷔조에 선발되지 못한 다른 연습생들이 충분히 탐낼 만한 자리였다.

‘이런 걸 왜 나한테?’

현덕은 오 팀장이 왜 다른 연습생들은 다 놔두고 자신에게 출현을 권하는 건지 궁금했다.

‘물어봐도 될까?’

현덕은 슬쩍, 오 팀장의 눈치를 봤다. 오 팀장은 한숨을 푹- 내쉬고 있었다. 현덕이 거절하리라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현덕 씨. 내가 왜 이걸 현덕 씨에게 권하는지 모르겠지?”

오 팀장은 마치 현덕의 마음속을 들여다본 듯했다. 현덕이 궁금해하는 걸 콕 집어 물었다.

“네.”

현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전에 한 번 물어는 볼게. 현덕 씨, 이번에 데뷔조 선발 때 현덕 씨는 아예 후보군에 들지도 못했잖아. 그거 섭섭하지 않았어?”

“아니요, 딱히.”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오 팀장이 냉수를 한 번에 비웠다.

“어우, 시원하다. 어- 현덕 씨 처음에 우리 회사 들어왔을 때 우리 회사에서 데뷔조 선발 중이었지. 아마 핑크키위 스캔들만 없었어도 그 데뷔조가 그대로 데뷔했을 거야.”

설마 했는데 진짜 데뷔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니. 현덕은 아연해졌다.

“그때 현덕 씨가 데뷔할 수도 있었어. 그때 틴에이저 스페이스 오페라 컨셉에 맞는 이미지를 가진 십대 위주로 데뷔조 구성할 예정이었는데 이미지 맞는 연습생이 부족했거든. 그래서 캐스팅 매니저들 총출동해서 전국의 고등학교 돌아다니면서 이미지 맞는 학생 캐스팅하려고 고생했는데, 현덕 씨가 딱 발굴된 거였고.”

현덕은 막 TE엔터테인먼트에 들어왔을 때 당했던 고초를 떠올려 보았다.

‘그 번개머리가 나한테 맞는 이미지였다니.’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 이후로도 성실하게 트레이닝 수업 듣고, 강사들 평가도 우수하고, 월말 평가 점수도 괜찮고 해서 우리 신인개발팀 쪽에서 현덕 씨한테 기대가 컸어. 아마 그 기대가 쭉 유지됐으면 이번에 현덕 씨가 데뷔조 들어가는 데 큰 무리가 없었을 거야.”

성실하다는 칭찬은 현덕의 삶에서 익숙한 것이었다. 현덕은 아침밥 먹었냐는 인사를 들은 것처럼 당연하게 오 팀장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번에 왜 데뷔조 컨셉 사진조차 못 찍은 줄 알아?”

오 팀장이 물었다. 왠지 ‘네, 알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하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우주민과 싸워서 인성 평가에 빵점 맞아서 그런 거라고 하진 않을 테고. 그냥 연습생 생활 지켜보니 성실하긴 한데 재능은 안 보여서 그런 거라고 하려나?’

현덕은 오 팀장의 기대에 부응하는 대답을 해보았다. 그래야 오 팀장의 연설 흐름이 끊기지 않을 것 같았다.

“아뇨, 모르겠습니다.”

“현덕 씨한테는 열정이 안 보여.”

“……열정이요?”

예상치 못한 답이었다.

“그래, 열정! 열정 말이야. 데뷔하고야 말겠다고, 악에 받쳐 노력하는 모습을 전혀 볼 수가 없어.”

오 팀장의 목소리가 작은 소회의실에 쩌렁하게 울렸다.

“으으.”

귀가 아팠다. 현덕은 잠시 두 손으로 귀를 가렸다. 그런 현덕의 모습이 소극적으로 보였는지 오 팀장이 쯧쯧, 혀를 찼다.

“현덕 씨, 자룡이랑 친하니까 잘 알고 있지? 자룡이가 얼마나 노력하는지.”

“네.”

다른 연습생이라면 몰라도 자룡이라면 잘 알았다.

“데뷔하고 싶은 열정에 차서 연습생 생활하는지 말이야. 이번에 데뷔조 선발 기간 내내, 자룡이 그 녀석, 아예 학교도 안 나가고 회사에서 살았어. 연습한다고, 집에도 안 들어가고.”

오 팀장은 자룡의 열정이 마치 자신의 것인 듯 침을 튀기며 자랑했다. 그런 오 팀장을 보는 현덕의 마음은 한없이 차가워졌다.

‘그리고 결국 데뷔조에 못 들었지요.’

현덕은 혀끝에 감도는 말을 꿀꺽 삼켰다.

“그런 열정이 현덕 씨한테서는 전혀 보이질 않았어. 뭐, 학교생활을 성실히 하는 건 좋아. 다른 연습생들처럼 오전 수업만 듣고 연습하러 오라거나 그런 걸 강요하는 건 아냐.”

하지만 슬프게도 강요하려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이번 수학여행 건은 그래. 데뷔조 선발 앞두고 있는데, 삼박 사일 가는 수학여행을 다녀오다니? 남들은 휴학하고, 출석 대체 처리를 잘 해주는 문화예술고로 전학하면서 연습생 생활을 하는 마당에. 현덕 씨 그런 모습은 연습생 생활에 별로 열정이 없어 보이는 증거로밖에 안 보여.”

“…….”

“물론 현덕 씨는 성실하고 꾸준하지. 그건 큰 장점이야. 하지만 언제나 꾸준한 거로는 안 돼. 현덕 씨, 공부 열심히 하지? 성적도 좋고. 그런데 시험 기간 아닐 때랑 시험기간일 때랑 똑같이 공부해? 아니잖아. 시험기간엔 밤새워서 공부하기도 하고, 평소 공부할 때랑 다르게 더 절박하게 공부하잖아. 시험이 코앞에 닥쳤으니까. 그럼 데뷔조 선발 때도 마찬가지여야 하지 않을까? 데뷔조에 들어 데뷔해야 하는 게 연습생의 가장 큰 목표인데, 어떻게 평소랑 다를 바 없이 지낼 수 있어?”

오 팀장은 현덕이 초심을 잃고 느슨해졌다고 말하고 싶은 듯했다.

하지만 현덕은 전혀 초심을 잃지 않았다. 현덕에게는 데뷔하길 원하며 절실해지는 게 초심을 잃는 것이었다. 현덕은 따발총처럼 쏟아지는 오 팀장의 말을 적당히 걸러 들으며 가만히 있었다. 오 팀장의 말을 곱게 받아들이기엔 어제 받은 충격이 너무 컸다.

‘그래서 그렇게 열정적인 자룡이 형한테, 그쪽들은 어떻게 했는데?’

반발심이 들었다. 청춘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듯 ‘네에, 제가 열정이 부족하네요. 열정이 부족한 저는, 더 이상 TE엔터테인먼트 연습생 생활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라고 받아치고 싶었다.

그래서 그 충동에 몸을 맡겨 입을 열었다.

“제가-”

“현덕 씨, 뭔가 하나에 꽂혀서 미친 듯이 몰두해본 적 있어?”

오 팀장이 현덕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그 질문이 현덕을 붙들었다.

“뭐든 해 본 적 있냐고. 우리 회사에서 춤, 노래, 이런 거 할 때를 포함해서. 학교에서든 어디에서든 그래 본 적 있어?”

“…….”

“없지?”

“…….”

“현덕 씨 아직 고등학생이잖아. 그리고 아이돌 데뷔하고 싶어서 연습생 생활하는 거잖아. 그런데 가끔 보면 마치 삼사십 년 살았던 사람처럼 굴어. 나이 든 사람처럼 구는 게 보여. 그냥 애늙은이 같다, 정도 느낌이 아니라. 정말 좀 살아본 사람처럼.”

“…….”

현덕은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할 말이 없었다. 속내를 꿰뚫린 것 같았다. 뜨끔했다.

“성실하고 꾸준한 거 좋은 거야. 현덕 씨가 우리 회사 오디션 보러 왔을 때 춤 출 줄 몰라서 박수 치고 노래 부를 줄 몰라서 애국가 부르고 그랬지만, 우린 현덕 씨 가능성과 성실성 보고 연습생 계약했어. 그리고 우리 기대 대로 성실하게 연습생 생활 잘 해줬고. 그런데 그 이상이 없어. 자룡이만큼 열정을 보이라고 그러는 게 아냐. 그 녀석은 우리 연습생들 중에서도 특출한 녀석이니까. 그런데 현덕 씨가 자룡이랑 같이 있는 거 보면, 너무 티가 나. 현덕 씨가 열정이 없다는 게.”

오 팀장은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가다듬었다. 말을 많이 해서 목이 타는 게 눈에 보였다.

현덕은 제 앞에 놓여 있던 종이컵을 오 팀장에게 밀어주었다. 오 팀장은 고맙다고 말하고는 종이컵을 단번에 비웠다.

“현덕 씨, 그렇다고 현덕 씨를 방출한다거나 그러려고 이런 말 하는 게 아냐. 여전히 우리 회사는 현덕 씨 높이 평가하고 있고 같이 힘내서 노력해서, 꼭 데뷔시켜 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어.”

톡톡, 오 팀장이 테이블에 놓인 서류를 손가락으로 두들기며 말했다.

“그래서 이걸 권하는 거야. 현덕 씨에게 좋은 기회인 거 같아서. 한번 나가서 다른 회사 연습생들과도 부딪쳐보고, 대중들 사랑도 받아보고 그래 봐. 그래도 이쪽으로 열정이 안 생기면, 그럼 그다음에 연습생 생활 계속할지 말지 다시 이야기해보자고. 열정 넘쳐도 못 버티는 게 이 바닥이니까.”

땅땅땅, 망치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오 팀장은 명쾌한 판사가 되어 열정 없는 죄인 현덕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재심 청구 따위는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

오 팀장은 고민해 보라며 현덕에게 일찍 귀가할 것을 권했다. 현덕의 보컬 트레이닝 수업을 미뤄주었다. 현덕은 알았다고 말하고 신인개발팀 사무실을 나왔다.

“김현덕 연습생.”

가방을 가지러 사물함이 있는 복도 쪽으로 가자 주민이 서 있었다. 현덕이 이쪽으로 올 걸 알고 기다린 듯했다. 주민은 오늘도 잘생겼고, 오늘도 싸가지 없게 웃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별로 말을 섞고 싶진 않았지만, 예의상 고개를 까닥였다.

현덕은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사물함을 열어 가방을 꺼냈다.

“할 거야?”

주민이 주어 없이 물었다.

“뭘요.”

현덕은 가방을 메며 주민에게 등을 돌렸다.

“그 프로그램, 나갈 거냐고.”

“하아.”

현덕은 굳이 숨기지 않고 한숨을 토해냈다.

“이 회사는 도대체 보안이란 게 있는 건지 모르겠네요. 저는 방금 그 얘기를 들었는데, 그쪽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건가요?”

“나는 김현덕 연습생이 내 이름을 알고 있을 때부터 이 회사 보안은 포기했는데. 김현덕 연습생은 아직도 이 회사에 대한 믿음이 있나 봐?”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서 웃음소리가 묻어났다.

‘도대체 뭐가 저렇게 재미있는 걸까.’

현덕은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마른세수를 했다.

피곤했다. 이미 오 팀장과의 대화로 상당한 정신력을 소모한 뒤였다. 바로 주민과 대화하는 건 너무 벅찼다.

“그러게요. 오늘부로 믿음이란 걸 버리려고요.”

“좋은 생각이네. 머리를 어깨 위에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건 아닌 모양이야.”

어디서 들어본 듯한 대꾸였다.

“누구랑은 달라서요.”

현덕은 큰 보폭으로 걸었다.

“한번 해보지? 재미있을 거 같던데.”

등 뒤에서 주민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

현덕은 이르게 집에 돌아왔다.

퇴근 시간이 겹쳐 북적북적해진 지하철을 타고 오는 내내, 현덕은 오 팀장의 말을 생각해보았다. 오 팀장이 정말 자신을 걱정한 것인지, 무슨 목적이 있어 수를 쓰는 건지 가늠이 안됐다. 다만 오 팀장의 말이 괜히 마음을 콕콕 찔렀다.

그리고 자룡이 걱정됐다. 오늘 TE엔터테인먼트에서 자룡을 만나지 못했다. 괜찮은 거냐고 문자를 보냈지만 아직 답이 없었다.

집은 텅 비어 있었다. 형은 군대에 간 지 오래였다. 아버지는 올해 대전으로 부임해 내려가셔서 평일엔 뵙기 힘들었다. 어머니는 친구분들과 모임이 있어 늦는다고 했다.

밥은 TE엔터테인먼트 식당에서 먹고 온지라, 현덕은 바로 방으로 들어가 책상에 앉았다. 막 수학 문제집을 펴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자룡 형인가?”

현덕은 얼른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였지만 여러 번 봐서 익숙한 번호였다. 자룡이 아니라 약간 실망스러웠지만, 그 실망감이 묻힐 만큼 더 반가운 사람의 연락이었다.

“형!”

현덕은 얼른 전화를 받았다.

[잘 지내고 있냐? 집에 뭔 일 있어? 왜 전화를 안 받아?]

“집에 나 혼자 있어. 집에 아무도 없어서 그랬나 봐. 나 방금 집에 왔거든.”

[아니, 장남이 군대에 끌려갔는데 그 집구석은 어떻게 걱정 한 톨 없어? 언제 연락이 올까 기다리며 한 명은 집을 지켜야지.]

집에 전화 했는데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는 게 꽤 충격인 듯했다. 맹덕은 한참 투덜댔다. 현덕은 오랜만에 듣는 맹덕의 목소리가 반가워 계속 웃었다.

[넌 잘 지내고 있지? 아직 그 연습생 하고 있냐? 언제 데뷔해?]

현덕은 어제,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을 맹덕에게 말했다. 맹덕이 전화를 금방 끊어야 될까 봐 걱정되어 간략하게 말했다.

맹덕은 심각한 목소리로 잠깐만, 하고 말하더니 잠깐 통화를 멈췄다. 너머로 누군가와 대화하는 소리가 두런두런 들렸다. 잠시 후 맹덕은 시간을 좀 더 얻었다며 자세하게 이야기해보라고 말했다. 현덕은 친구와 싸우고나서 부모님께 친구가 나쁜거라고 이르듯 오늘 오 팀장과의 대화를 말했다.

[뭐야, 그걸 그냥 듣고 있었냐? 어디서 훈계질이야. 고등학교 때 너보다 공부 못했을 게 뻔한 아저씨가.]

“그냥 듣고 있었어. 그래도 어른이 말 하시는 거니까.”

[나이 먹었다고 다 어른이 아니야. 존경할 만해야 어른인 거지. 애가 하나 죽을 뻔했는데, 그런 지경까지 만들어 놓고선 너한테 그딴 소리를 지껄여? 야, 거기 그만둬. 싹수가 노랗다, 빌어먹을 회사네. 아, 욕 나올라 그래. 핑크키위 스캔들 터질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지금이라도 그만둬버려. 아쉬운 건 그쪽이지, 니가 아냐.]

맹덕은 불같이 화를 냈다. 귀가 쨍쨍하게 울릴 정도였다.

귀는 아팠지만 이상하게 속이 뚫리는 느낌이었다.

‘역시 형은 내 편이야.’

천군만마를 얻은 듯 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내색하지 않고 말로만 맹덕을 말렸다.

“아니, 뭐 그렇게 화낼 것까지는 없지 않을까?”

[뭐래, 화내야 하는 거 맞거든? 너 설마 거기서 맨날 이딴 소리 듣고 다니는 거냐? 엉? 너무 학대당하다 보면 익숙해져서 자기가 학대당하는지도 모른다던데, 너 그런 거냐? 야, 집에서도 부모님이나 내가 너한테 큰 소리로 화낸 적 없었는데, 어딜 나가서 그딴 취급을 당하고 다녀!]

“아니, 형. 그런 건 아냐. 나 안 혼나고 다녀.”

현덕은 금세 쭈글쭈글해져 맹덕의 집중포화를 피하고자 애썼다. 일단 화제를 전환하자 싶어, 말머리를 돌려보았다.

“형, 나 어떻게 하면 좋을까?”

[뭘?]

“그 거 출연하는 거.”

[뭐야? 나갈 거야?]

“나갈 생각은 없는데, 그냥. 오 팀장님이 나름 날 생각해서 말해준 거고. 그 말이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분은 수용할 만한 의미가 있는 거 같아서-”

[됐어, 집어치워. 뭔 소리야. 개소리는 개소리야, 왈왈. 개소리가 무슨 앞의 왈은 의미가 있고 뒤의 왈은 의미가 없냐. 그냥 다 의미 없는 거야. 그냥 씹어.]

맹덕이 이 가는 소리가 현덕에게까지 들렸다.

[너 판사 될 거랬잖아. 꿈 바뀜? 아이돌 할 거야?]

“아니, 난 여전히 판사가 되고 싶지.”

[그럼 이제 슬슬 수능 준비해야지. 이참에 그냥 관둬버려. 너 거기 다닌다고 할 때 찬성한 건 친구 좀 사귀고, 공부 말고 다른 경험 해보라고 해서 그런 거였지. 그딴 잡소리나 듣고 다니는 줄 알았으면 형은 너 오디션 안 데려갔을 거다.]

“그 생각도 안 한 건 아닌데.”

[왜? 수능은 고3때부터 준비하게? 그럼 미리 사시 공부나 해놔. 어차피 대학 가면 할 거라면서?]

맹덕의 말에 현덕이 눈을 껌벅였다.

‘이 형이 무슨 소리래?’

현덕은 맹덕의 제안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뭔 소리야. 사시 공부는 대학교 가서 해야지.”

[엉? 왜? 고등학교 때 미리 좀 해놓으면 안 돼? 어차피 집에 아버지 보시는 책들도 있겠다. 걍 몇 권 읽어나 보면 되잖아.]

“나는 아직 고등학생이잖아.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공부해야지. 수능 보고 대학 긴 후에 사시를 준비하고. 형, 삶에는 순서가 있는 거잖아.”

[사는 게 뭐 계단 올라가는 거냐? 순서는 무슨?]

“중학생 때는 중학교 공부 하고, 고등학생 때는 고등학교 공부 하고. 그러라고 학교에서 순서대로 가르쳐주는 거잖아.”

[아, 진짜. 빌어먹을, 아버지가 애를 다 버려놨어.]

귓가에 맹덕의 한숨 소리가 짙게 들렸다.

[내 동생아, 인생이 그런 게 아니에요.]

맹덕의 말투가 구수해졌다.

현덕은 킥킥 웃으며 의자에 등을 기대고 편히 늘어졌다. 그렇게 경건한 자세로 ‘맹덕 가라사대’를 들었다.

[형이 군대 오고 알게 된 건데, 세상엔 별별 사람들이 다 있고 사는 게 정해진 순서가 없더라. 넌 고등학교 졸업하면 대학 가는 게 당연한 거 같지? 근데 군대 와 보니까 안 그래.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일하다 군대 온 사람도 많고, 중학교만 졸업한 사람도 있어. 대학원 공부까지 하고 늦게 군대 온 놈도 있고, 외국에서 공부하다가 영주권 있는 데도 애국심 때문에 뒤늦게 군대 입대한 사람도 있고. 이분 곧 제대하는데 겁나 잘 생겼다. 아, 암튼. 진짜 별별 사람들이 다 있어. 옆 부대에는 조폭 생활하다가 몸에 문신 안 새겨서 면제 못 받아 군대 온 새끼도 있다더라. 사람 사는 게 어떻게 순서가 있겠냐. 그냥 대충 이런 순서로 살면 좋을 거다, 가이드라인만 정해진 거지. 꼭 고등학교 때 뭐 해야 하고, 대학교 가서 뭐 해야 하고, 그런 거 없어. 진짜야.]

제대를 앞둔 병장부터 지난주 새로 들어왔다는 이등병에 이르기까지. 맹덕은 그들과 십 년 넘게 친하게 지낸 것처럼 그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맹덕의 목소리엔 그 사람들 한 명 한 명에 대한 애정이 묻어났다.

‘난 어땠지?’

현덕은 자신의 군대 생활을 떠올려 보았다.

군대에 가서도 현덕은 오직 사법시험 생각뿐이었다. 휴가를 받아 사시 1차를 치러 나오기도 했다. 맹덕처럼 함께 훈련을 받고 밥을 먹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에게 관심을 가질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선임 중에는 현덕을 아니꼽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처음 이등병으로 들어갔을 때, 현덕의 대학교를 물어보고는 대뜸 머리를 주먹으로 갈긴 사람도 있었다. 공부만 한 약골이라 제대로 뛰지 못한다며, 조교의 눈을 피해 등을 주먹으로 내리치거나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 괴롭힘은 오래가지 않았다. 옆 부대에서 현덕보다 심하게 괴롭힘을 당하던 이등병 한 명이 화장실에서 신발 끈으로 목을 매 자살하려다가 실패해 병원으로 실려 갔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전 부대에 소원 수리 형식의 괴롭힘 고발 신고, 일명 마음의 편지가 생겼다. 선임들은 주춤주춤 다가와 사실대로 쓰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현덕은 백지를 냈다. 그들이 부탁 때문은 아니었다.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것이었다. 어쨌건 그 이후로 대놓고 현덕을 괴롭히는 사람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 현덕이 상병, 병장이 되고서는 그런 쪽으론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그 정도만 기억이 날 뿐이었다. 자신을 괴롭히던 선임들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때리지 않는 착한 병장님이 좋다고 따라다니던 이등병들 얼굴이 어떻게 생겼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뭉뚱그려 군대 생활로 퉁 쳤을 뿐이었다. 현덕에겐 그 흔한 군대 축구의 추억조차 없었다. 가슴 한구석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형, 나-”

[어, 왜? 아, 잠깐! 잠깐만, 현덕아. ……아, 왜 그러십니까. 중요한 전화 맞습니다. 동생 진로 상담해주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 진짜, 5분만 더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맹덕의 부탁에도 뒤에 들리는 목소리는 단호했다.

[현덕아, 다음에 통화하자. 이제 끊어야 할 거 같아.]

“응. 형. 난 괜찮으니까 걱정 말고 형 몸조심 해. 다치면 안 돼. 아파도 안 돼.”

[얌마, 난 걱정 말고 너나 잘 해. 끊는다!]

전화는 매정하게 끊겼다. 현덕은 후끈하게 달아오른 핸드폰을 쥔 채 멍하니 주변을 돌아보았다. 어쩐지 집이 너무 조용하게 느껴졌다.

‘옛날엔, 그 전엔 어땠지?’

형이 군대 갔을 때 얼마나 전화를 하고 편지가 오갔는지 도통 기억이 안 났다. 막연히, 맹덕과 이렇게 길게 통화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는 생각만 들었다.

맹덕은 가끔씩 현덕에게 전화했다. 하지만 통화는 길지 않았다. 현덕은 언제나 안부만 묻고는 공부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맹덕은 넌 형이 걱정도 안 되냐고 볼멘소리로 투덜대곤 했다. 그 정도뿐이었던 것 같았다.

‘난 도대체, 어떻게 살았던 걸까?’

그냥 맹덕이 보고 싶었다.

맹덕과 함께 지내는 일상이 그리워졌다. 학교 갔다 집에 오면 맹덕이 널브러져 있는 그런 일상이.

현덕은 핸드폰을 쥔 채로 방을 나왔다. 책상 위에 펼쳐진 수학 문제집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어- 공부 좀 그만 하고, 형이랑 놀자.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니까?’

거실은 텅 비어 있었다. 대자로 누워 이렇게 말하며 현덕의 공부를 방해해야 할 맹덕이 없었다.

비로소 맹덕의 빈자리가 느껴졌다.

현덕은 소파에 웅크려 앉았다. 다시 공부하러 방에 들어갈 기분이 나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맹덕 형?”

현덕은 얼른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맹덕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만큼 반가운 사람이었다.

“자룡 형!”

[어- 현덕아. 안녕?]

아직 뜨끈한 핸드폰 너머로 자룡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에 기합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현덕의 걱정보다는 밝았다.

[오늘 아침에 전화할까 하다가, 너 학교일 거 같아서 지금 전화하는 거야. 트레이닝은 끝났어? 연습실?]

“아니요, 집이에요. 오늘은 일찍 귀가했어요. 형은요? 어디세요?”

[어, 나 오늘 퇴원해서 자취방에 와 있어. 계속 자다가 지금 일어나서 밥 먹고 너한테 전화하는 거. 씨발, 먹을 게 라면밖에 없어서 라면 끓여 먹었다.]

현덕은 핸드폰을 귀에 바짝 가져다 댔다. 얼굴을 볼 수 없으니 유일한 단서는 목소리뿐이었다. 귓가에 닿는 목소리를 샅샅이 분석해서라도 자룡이 지금 어떤 기분일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음……. 어제 미안하고 고마웠다.]

“자룡 형.”

[아, 나중에 생각하면 분명 흑역사 감일 거 같은데, 그래도 어젠 진짜 그런 생각뿐이었어. 너 아니었으면 내가 정말, 정말 잘못됐을지도 몰라. ……씨발, 그래서 고맙다고.]

자룡은 스스럼없이 어제 일을 이야기했다. 하하, 멋쩍은 웃음소리도 났다. 어제처럼 모든 걸 포기한 느낌은 아니었다.

“다행이에요, 형.”

현덕이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마음에 잔뜩 묶여 있던 무언가가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현덕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자룡은 현덕에게 이것저것 말을 걸려 시도하다가 그냥 웃어버리고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어제 눈 뜨니까 병원이더라. 너가 있을 줄 알고 옆을 봤더니 오 팀장님이 있어서 식겁했어. 씨발, 너랑 같이 왔던 그 자식 때문에 열 받았던 건 생각 안 나고 다시 죽고 싶어지더라. 눈 떠서 제일 먼저 봐야 하는 게 오 팀장 얼굴이라니? 아, 진짜 싫어.]

전화기 너머 자룡이 어떤 모습일지 눈에 선했다. 소름 돋은 팔을 벅벅 긁고 있겠지.

“형 깨어날 때까지 제가 옆에 있으려고 했는데 오 팀장님이 자기가 있겠다고 그랬어요.”

[어어, 얘기 들었어. 너랑 나랑 친한 줄은 알았는데 그 정도로 친한 줄 몰랐다고 그러더라.]

자룡이 푸하- 웃더니, 멋쩍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걍 투정 부린 거야. 씨발, 너 탓하는 거 아니니까 기죽거나 그러진 마라. 알았지? 뭐, 나도 처음만 싫었던 거고. 오 팀장님이랑 어제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많이 했어. 우리 같은 연습생 중에서 오 팀장님 좋아하는 사람, 솔직히 없잖아? 나도 진짜 싫어하거든. 그래도 그거랑 별개로 어젠 좀 고맙더라. 나 걱정해서 밤에 병원 대기실에서 쪽잠 자고, 아침에 퇴원 수속 밟아주고 그러고 회사 가던데. 얼굴 봤어? 완전 구렸지?]

“몰라요, 관심 없어요.”

현덕이 볼멘소리로 대꾸했다. 오 팀장이 어제와 똑같은 옷을 입었든, 어제 입었던 옷을 뒤집고 입고 왔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오 팀장님 싫어졌어?]

“원래 좋아하지도 않았어요.”

[오 팀장님 알면 겁나 서운해하겠는데? 너 꽤 마음에 들어 하고 있던데.]

“제 알 바 아니에요.”

[알 바 아니긴. 씨발, 치사하고 더럽긴 한데. 데뷔하려면 신인개발팀이랑 친한 게 좋아.]

“형은-”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어요?’ 현덕은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뱉어내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

현덕은 입을 꾹 다물었다.

[아, 김현덕. 현덕아-]

“네, 형.”

[넌 대답은 참 잘한다?]

“하지 말까요?”

[화났어? 목소리가 어째 안 좋다? 야, 내가 김현덕 화내는 것도 들어보고, 연습생 생활 오래 하고 볼 일이다.]

자룡은 또 혼자서 한바탕 웃더니 오 팀장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현덕에게 말해주었다.

[어제 오 팀장님이 미안하다고 그러더라고-]

이번 데뷔조에서 랩 포지션은 2명이었다. 랩 포지션 후보는 세 명이었다.

한 명은 당연히 자룡이었다. 나머지 두 명은 현덕도 익히 아는 연습생들이었다. 한 명은 자룡보다 연습생 경력이 길었다. 다른 한 명은 현덕보다 몇 달 더 일찍 들어온 연습생이었다.

실력은 자룡이 월등히 좋았다. 그래서 데뷔조 컨셉 사진을 찍으며 이미지를 맞춰 볼 때도 자룡은 항상 선발되었다.

하지만 결국 데뷔조에 선발된 것은 다른 연습생 두 명이었다. 매니저들 간의 연습생 푸시 때문이었다.

자룡을 캐스팅한 매니저는 핑크키위 스캔들 사건을 책임지고 문책 받았다. 그는 바로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기획사로 가버렸다. 덕분에 자룡은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다.

[참 웃기지. 그렇다더라고. 열정 있고 실력 있고 열심히도 했고, 이미지도 얼추 컨셉이랑 어울릴 것 같고 그랬는데도 데뷔조에 못 들었어. 날 캐스팅한 매니저가 딴 회사 가버렸다는 이유로. 간발의 차로 데뷔조에 못 들어간 거라고 그러더라고.]

“그게 말이 돼요? 오 팀장님은 아까 나한테, 자룡 형만큼 열정을 가지라고, 그랬어요. 그렇게 말했으면서 어떻게 자룡 형한테!”

[그런데 나는, 오 팀장님 그 말 듣고 무슨 생각 들었는지 알아? 아까 현덕이랑 같이 온 그 개싸가지 말이 뻥이였구나, 다행이다. 그 생각부터 들었어. 웃기지 않아?]

“아니요. 전혀 웃기지 않아요.”

현덕은 웃지 않았다.

[그리고 좀…… 마음이 편해지더라. 내가 실력이 모자라서 떨어진 게 아니구나. 내가 열심히 안 해서 떨어진 게 아니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어.]

자룡이 말했다.

[넌 아직 일 년 좀 넘었나? 그 정도지. 그래서 별생각이 안 들겠지만, 나는 말이야. 연습생 생활이 좀 길었잖아? 연습생 생활 짬이 좀 차니까, 매일 이런 생각이 들었어. 노력이라는 게 눈에 보여서 사람의 머리 위에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핸드폰 배터리 양 남은 거 표시되듯이 연습생들 머리 위에 얼마나 노력했는지, 얼마나 연습했는지 차곡차곡 쌓여서 드러났으면 좋겠다고. 그러면 알 수 있을 거 아냐. 누구는 얼마나 열심히 연습하고 있는지, 누구는 연습 대충 하면서 아이돌 연습생이랍시고 가오나 잡고 다니는지. 그러면 나도 알 수 있을 거 아냐. 내가 얼마나 연습했는지, 내가 얼마나 부족했는지.]

연습생 생활은 매일매일 평가당하는 게 일상인 생활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평가로는 내가 데뷔할 정도가 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다.

회사의 관계자들은 매일같이 열심히 하라고 한다. 같은 기획사 내 다른 연습생들이, 그리고 다른 기획사의 연습생들이 너보다 더 잘한다고, 너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데뷔 기회는 노력 정도에 따라오지 않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데뷔 기회를 잡지 못하면 그 노력은 가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운이 좋아서, 혹은 운이 나빠서 모든 게 결정된다. 누구는 연습생 생활 10년 만에 데뷔하고 누구는 연습생 생활을 거치지도 않고 데뷔한다.

누군가는 말한다. 그 운마저 실력인 거라고, 재능인 거라고, 혹은 노력의 대가인 거라고. 하지만 이 곳은 노력하면 데뷔한다는 공식이 통하는 세계가 아니다.

그렇다고 노력을 안 할 순 없다. 얼마큼 달려야 하는지, 도착해야 하는 지점이 어디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달리고 달려야 한다..

일 년, 이 년이 될지. 십 년, 십삼 년이 될지. 아니 영영 데뷔 기회가 없어 헛되게 시간을 보낼지 알지 못한 채로.

그 막막함은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었다.

현덕은 자룡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어쩌면 그 과정은 자신이 사법시험을 준비했을 때보다 더 힘겹고 고통스러운 과정이 아니었을까, 하고.

사법고시는 공부해야 하는 내용이 많다. 하지만 그 범위가 무한대인 것은 아니다. 합격문은 바늘구멍 크기지만, 그 문을 통과하는 기준은 정해져 있다. 단순하다. 시험 성적에 따른 상대평가. 시험 성적이 남들보다 좋으면 합격이고, 남들보다 시험을 못 보면 불합격이다.

시험은 누구나 같은 날, 같은 문제를 푸는 방식이다. 잘 찍고, 전날 우연히 본 내용이 문제로 나왔다는 등의 행운이 존재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저 시험에 톡톡 친 조미료 수준일 뿐이다.

아이돌 연습생의 경쟁에 비하면 현덕이 경험했던 사법시험은 차라리 공정하고 객관적이었다.

‘얼마나 더 해야 되는 거지?’

이번 데뷔조 선발에서 떨어진 후 자룡은 순수하게 절망했다. 더 노력할 자신이 없을 정도로 노력했는데 떨어졌다. 내 노력이 얼마나 부족했기에 떨어진 걸까, 얼마나 더 노력해야 하는 걸까. 답을 알 수 없는 의문이 절망으로 바뀌는 건 한순간이었다.

자룡은 더 노력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죽으려고 했다. 그랬기에 네가 실력이 부족해서 떨어진 게 아니라고, 불합리하고 편파적인 이유로 떨어진 거라고는 말이 차라리 위로가 되었다.

[오 팀장님이 미안하다고 그러더라고. 내가 진짜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거 알고, 실력 있는 것도 안다고.]

자룡은 TE엔터테인먼트에서 랩 포지션에 놓인 연습생들 중 탑이었다. 하지만 자룡과 함께 데뷔조 후보였던 다른 두 연습생도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자룡만큼 뛰어나진 않지만 데뷔조에 선발될 정도의 실력은 가지고 있었다.

어떨 때는 실력만이 절대적 기준이 되어 데뷔조의 마지노선을 끊어내면서. 또 어떨 때는 실력이 단지 예선전의 통과선이 되어버린다. 이번 데뷔조 선발에서 실력은 예선이었다. 결선의 기준은 각 매니저들의 푸시였다.

“그건 불합리해요.”

[그렇지. 씨발, 근데 이게 현실이야.]

자룡이 말을 이었다.

[TE엔터테인먼트보다 좀 작은 기획사가 있는데, 거기서 내년 초에 힙합 컨셉의 보이 그룹을 데뷔시킬 예정인가 봐. 세 명은 확정됐고, 두 명 자리가 남았는데. 오 팀장님이 거기에 날 추천해줄 수 있다고, 거기로 가보겠냐고 권하더라고. 데뷔조 선발 기회를 주는 게 아니라 그냥, 거기 데뷔조에 넣어주겠다고.]

죽기를 결심했다가 살아나니, 그동안 너무도 가지고 싶었던 기회가 찾아왔다.

“그 회사로 갈 거예요?”

현덕의 물음에 자룡은 잠시 침묵했다.

‘왜? 안 갈 수도 있는 건가?’

현덕은 당황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회사를 옮기겠다고 말할 줄 알았건만. 자룡은 놀랍게도 망설이고 있었다.

“형?”

[글쎄,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겠어. 오 팀장님한테는 며칠 생각해 본다고 했고. 씨발, 아마 다른 애들도 나랑 비슷한 고민 하고 있을 거야.]

“다른 연습생들도요?”

[어. 아마 나 말고도 이번에 데뷔조 후보에 들었다가 떨어진 연습생들, 대부분 회사를 나갈 거야. 일단 데뷔조가 정해지면 그 후로 몇 년간은 회사에서 보이 그룹을 안 만들 테니까. 회사 차원에서 나한테 오 팀장님이 말해준 거처럼 다른 회사 데뷔조 기회 소개해주기도 하고. 그런 제의 받지 못한 연습생들은 알아서 다른 기획사 제의받아서 옮기기도 하고. 그러는 게 보통이야. 그래서 한동안 회사가 어수선할 거고.]

이전에 자신이 처음 TE엔터테인먼트 연습생으로 들어왔을 때도 그런 분위기였다고, 자룡이 말했다.

“형 회사 옮기는 거면, 저도 같이 옮길래요. 데뷔조 안 들어가도 돼요. 그냥, 형이랑 같이 연습생 생활할 수 있으면 저는 그걸로 충분해요. 저도 데리고 가줘요.”

현덕은 어젯밤부터 계속 고민했던 말을 꺼냈다. 정말 깊이 생각하고 결정한 내용이건만. 자룡은 어린아이가 난 커서 엄마랑 결혼할래, 라고 말하는 걸 들은 사람처럼 굴었다.

[말만으로도 고맙다. 김현덕.]

“말만이 아닌데요.”

[글쎄, 넌 아직 어리고, 오 팀장님이 너 꽤 욕심내는 거 같던데, 게다가 너 캐스팅한 캐스팅 매니저님, 오 팀장님 직속이라고. 그러니까 넌 안 옮기는 게 나을 거야. TE엔터테인먼트만 한 곳 찾기 힘들어. 탑 3 기획사 갈 거 아니면 말이야. 내가 다른 회사로 옮기는 거 고민하는 것도 그래서야.]

자룡의 목소리는 더없이 진지했다.

[니가 계속 TE엔터테인먼트 다닐 거라고 그랬으면 이런 말까진 안 할 텐데…… 나 때문이든 아니면 다른 이유로든 현덕아, 너도 TE엔터테인먼트에 불만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근데, 여기만 한 회사 그리 많지 않아. 물론 탑 3 가면 좋지. 근데 거긴 이미 거느린 연습생만 백 명이 넘어. 거기서 튀어서 데뷔하는 건 진짜 불가능에 가까워. 매니저 라인 타는 경쟁은 더 심하고. 여기 비할 바가 아니라고들 하더라.]

자룡은 한숨 돌리고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여기보다 작은 회사 잘못 가면 제대로 트레이닝도 못 받고, 진짜 잘못되면 스폰이라든가 그런 쪽으로 빠질 수 있어. 연습생인데도 스폰 제의하고 그러는 기획사들 많거든. 연습생들 사이에서 정보 공유하면서, 그런 회사는 블랙이라고 부르고 서로 가지 말라고 하는데. 그런 회사가 진짜 많아.]

핸드폰을 통해 쏟아져 내리는 라임이 살아 넘치는 자룡의 목소리를 들으며, 현덕은 새삼 자룡이 훌륭한 랩퍼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이렇게 빠르게 말하고 많이 말하는데, 그 내용을 다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특히나 발음이 정말 좋았다.

[내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나 내일부터 회사 나갈 거니까 다른 얘기는 만나서 더 하자. 그보다 아까 내가 그냥 넘어갔는데. 오늘 오 팀장님이 너한테 뭐라고 했다고? 나를 닮으라고 그랬다고? 씨발, 그런 병신 같은 말을 너한테 했다고?]

자룡의 목소리가 격해졌다. 자신과 관련된 내용은 그리도, 차분하게 말했으면서.

현덕은 당황했으나 천천히, 오 팀장이 했던 말을 들려주었다. 조금 전 맹덕에게 브리핑해봤던 터라 자룡에게 말할 때는 좀 더 깔끔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이돌 트리니티? 그 프로그램에 결국 우리 연습생 내보내기로 했다고? 그걸 너보고 나가라고 했다고? 씨발, 오 팀장 이 인간이 미쳤나. 거기에 널 왜 내보내? 나한테는 너 되게 중요하게 보고 있다고 그러더니 씨발, 다 뻥이었어? 미친 새끼!]

자룡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현덕은 몰랐지만, ‘아이돌 트리니티’는 웬만한 기획사의 아이돌 연습생들에게 몇 달 전부터 알음알음 소문이 돌았던 프로그램이었다. 자룡을 비롯한 TE엔터테인먼트 연습생들도 대부분 알고 있었다.

[데뷔조 선발에 정신이 팔리기도 했고, 무엇보다 오 팀장이 설마 널 내보내겠다고 할 줄 몰라서, 너한테는 말을 안 했던 건데. 아니, 못 한 거지. 미안해, 현덕아.]

소문이 돌기 시작한 건 이번 데뷔조 선발이 시작될 즈음이었다. 모 케이블 채널에서 남자 아이돌 연습생들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각 기획사에 연습생들 차출을 요청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재작년에 여자 아이돌 연습생을 대상으로 프로젝트 아이돌 그룹 선발 프로그램, ‘소녀 프로젝트 : 트윈 트윙클(Twin Twinkle)’이 제작됐다. ‘아이돌 트리니티(가제)’는 그 후속작이었다.

출연한다면 기본적으로 몇 달, 길게는 1년 이상 프로그램에 묶이게 된다. 그동안 자신이 소속된 기획사에서 아이돌 그룹 데뷔를 준비한다면 그 데뷔조에 포함될 수 없다.

프로그램에서 악마의 편집을 당해 나쁜 이미지를 입게 된다면? 프로그램 출현 이후에 데뷔를 장담할 수 없게 된다. 최악의 경우 그 이미지를 씻지 못해 연습생 생활조차 못 하게 될 수도 있다. 실제 재작년에 런칭했던 ‘트윈 트윙클’에 출연했던 여자 아이돌 연습생 중 여러 명이 피해를 입었다.

다행히 좋은 이미지를 유지하고 대중에게 많이 노출된다면 더할 나위 없으나 그걸 기대하고 출연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프로그램에 나가는 연습생 중 그런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건 소수뿐일 테니까.

긍정적인 면이 없는 건 아니었다. 프로그램을 준비 중인 케이블 채널은 꽤나 인기 있는 채널이었다. 재작년 ‘트윈 트윙클’의 화제성은 최고였다.

연습생에게는 자신의 존재를 어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래서 중소 기획사의 연습생들은 꽤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한다고 했다.

하지만 TE엔터테인먼트 정도의 기획사에 소속된 연습생은 달랐다. 굳이 방송 출현을 하여 인지도를 올릴 필요가 없었다.

방송을 통해 자신을 알린다는 건 역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소비한다는 뜻도 된다. 아직 데뷔하지도 않았는데 신선한 이미지를 소비해버린다면? 정작 프로그램 종료 후 데뷔했을 때 대중은 그를 식상해 할지도 모른다.

여러 이유로 대형 기획사와 연습생들은 출연을 피하며 몸을 사렸다.

특히나 TE엔터테인먼트 연습생들은 더 두려워했다. 데뷔조 데뷔 시기와 프로그램 방영 시기가 겹쳤기 때문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이번 프로그램에 나가게 될 연습생은 곧 데뷔할 데뷔조의 희생양이었다.

프로그램에 연습생을 안 보낸다면 TE엔터테인먼트 소속 연예인들은 그 케이블 채널의 다른 프로그램에 출연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곧 데뷔할 새로운 아이돌 그룹에게 그런 상황은 결코 이로운 상황은 아닐 터,

그러니 데뷔조에 들지 못할 것 같은 연습생들을 골라, 프로그램에 출연시키려 하지 않을까. 연습생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자룡을 비롯한 A급 실력을 갖춘 연습생들은 설마 날 보내랴, 생각하고 말았다. 그래서 자룡은 현덕 또한 안정권이라 생각해 굳이 말하지 않은 것이었다.

중간 평가 점수가 중하위권인 연습생들은 신인개발팀 직원들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회사 후문으로 귀가하고, 연습실에 콕 박혀 나오지 않았다. 데뷔조 컨셉 사진을 찍거나 주간 평가와 월간 평가를 받을 때는 어쩔 수 없지만, 그 외의 시간에 회사 직원들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러고 보니…….’

현덕은 그동안 유독 연습생들의 분위기가 조신했던 걸 떠올렸다. 단지 데뷔조 경쟁 때문인 줄 알았건만.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다.

최근에는 다른 소문이 더해졌다. 프로그램 제작진이 출연진을 구하는 데 난항을 겪고 있다는 것이었다. TE엔터테인먼트 내에서 출연 제의를 받았다는 연습생이 없기도 했고. 그래서 연습생들은 이번엔 TE엔터테인먼트가 참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재작년에 그런 일을 겪었는데, 그랬으면서 또 연습생을 차출하면 호구 짓 하는 거지. 회사가 개호구가 아니고서야 씨발, 설마 그러겠냐고. 생각이란 게 있고 자존심이란 게 있으면 적어도 이번엔 연습생 내보내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씨발. 딴 연습생도 아니고 너한테 나가라고 했다고?]

자룡이 이를 갈았다.

현덕은 자룡의 설명을 가만히 들으며, ‘트윈 트윙클’이라는 프로그램에 대해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학교에서 민철이나 다른 친구들이 이야기하는 걸 들은 적이 있던 것도 같았다.

‘민철이가 뭐 투표해야 한다고 매일 핸드폰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거 같은데.’

투표할 때마다 100원을 내야 한다고 했다. 매주 투표하게 해주는 대신, 민철은 EBS문제집을 두 권 사줬었다.

현덕은 자룡에게 물어보았다.

“형, 제가 그 프로그램을 안 봐서요. 그 프로그램 출연한 연습생들한테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어요? 형 얘기 들으니까, 꼭 무슨 일 있었던 것처럼 들려서요.”

[넌 연습생이면서 그 프로그램도 안 보고 뭐 했냐? 언제 시간 되면 한번 봐봐. 우리 집 본가에 케이블 채널 다시 보기에 무료로 풀려 있던데, 너도 그걸로 보면 될 거야.]

“아아, 네. 꼭 볼게요.”

[뭐, 반드시 보라는 건 아니고. 씨발, 넌 왤케 순해 빠졌냐. 그러니까 오 팀장이 너한테 그딴 데 나가라고 한 거 아냐. 씨발. 아, 씨발. 아무튼. 그 프로그램이 악의적인 편집으로 유명했어.]

자룡의 입에서 ‘씨발’ 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어지간히 싫어하는구나.’

현덕은 ‘씨발’의 강도로 자룡이 기분을 파악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아무것도 아닌 상황 찍어놓고 이상하게 편집해서, 출연하는 연습생이 성격 겁나 나빠 보이게 만들고 그래. 거기 출연한 연습생들 중에 초중반에 탈락한 연습생들은 실력 없는데 욕심만 많고 성격 더러운 거로 이미지 나빠져서 연습생 생활 접은 사람들 좀 있었어. 거기 경쟁도 겁나 심하고 기획사 간 세력 싸움도 장난 아니었다고 그러더라. 우리 회사야 그나마 힘 좀 쓰는 곳이라 괜찮은데. 중소기획사 애들은 그냥 병풍 취급당하고, 그러니까 열 받아서 대형 기획사 애들이랑 사이 갈라져서 무대 뒤에서 욕하고 싸우고. 기 싸움 장난 아니었대.]

자룡은 프로그램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해 말했다. 긍정적인 면이 없진 않겠지만, 아무래도 연습생 입장에서는 부정적인 면이 더 도드라지게 보이는 듯했다.

[우리 회사에서 제일 실력 좋고 성격 끝내줬던 연습생 누나도 초반에 거기 가서 엄청 고생하고 그랬는데. 그 누나 힘들어하는 걸 내가 다 봤는데. 그런 곳에 널 보낸다고 했다니. 씨발, 오 팀장, 미친 거지.]

현덕은 자룡의 말을 들으며 눈을 굴렸다.

‘옛날 대학교 고시반을 생각하면 비슷할까. 완전히 같지는 않겠지만, 거기랑 비슷한 분위기였겠지. 결국 경쟁하는 곳이니까.’

학교에선 고시 준비를 하는 학생들을 위해 고시반을 운영했다.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고시반은 고인 물로 유명했다. 합격하지 못해 첩첩이 쌓인 선배들은 그 안에서 또 파벌이 갈려 저들끼리 싸웠다. 후배가 신입으로 들어오면 그 후배를 잠정적 라이벌로 여겼다. 못 괴롭혀 안달이었다.

선배들에게 노하우와 정보를 얻고 공부하겠다며 고시반에 들어온 신입 중 열에 여덟은 견디다 못해 달아나곤 했다. 그 괴롭힘을 견딘 두어 명의 신입들은 몇 년 지나지 않아 그 자신들이 시험에 찌든 선배가 되어 새로운 신입을 갈궜다.

모든 학교의 고시반이 다 그렇진 않겠지만, 현덕이 다녔던 학교의 사법시험 고시반은 유독 그랬다.

공부하는 사람이 마음먹고 편협해지면 얼마나 쪼잔해질 수 있는지 경험할 수 있는 현장이었다. 바늘구멍보다 좁은 합격의 문 앞에서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악마가 되곤 했다.

그때의 기억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시간은 상처를 낫게 해주지도 않으면서, 상처를 세월로 덮어 괜찮아진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곤 한다.

[무엇보다 예전에 우리 회사 연습생 중 그 탑급이었던 누나가 정말 장난 아니게 당했거든. 진짜 그때만 생각하면. 씨발, 오 팀장, 또 우리 중에…… 그것도 널 거기로 내보내려고 하다니. 진짜, 씨발이다.]

자룡의 상처는 아직 세월에 덮히지 않은 듯했다.

아직 상처가 세월에 덮이지 않은 자룡은 랩을 하듯 말을 쏟아냈다.

[우리 회사에 핑크키위 데뷔하기 전에 데뷔조에 항우영이란 누나가 있었어. 노래 진짜 잘 부르고 춤도 엄청 잘 췄거든. 연습생 되기 전에 비보잉 했었는데 그쪽에서는 이름만 말하면 다들 알 정도로 유명했고. 데뷔조 들기 전부터 인터넷에 팬클럽도 있고 그랬어. 당연히 핑크키위로 데뷔할 거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까 ‘트윈 트윙클’에 출연하게 됐거든.]

데뷔 예정인 핑크키위를 알리기 위한 홍보성 출연이었다고 했다. 그 앞에 데뷔했던 3인조 여성 아이돌 그룹이 생각만큼 뜨지 못해서, 당연히 회사는 핑크키위의 사전 마케팅에 공을 들였다. ‘트윈 트윙클’ 출연도 그 일환이었다.

‘트윈 트윙클’은 당시에 4개월 정도 촬영하고 4명을 선발하기로 했다.

최종 선발된 4인의 후속 활동은 프로젝트 기획 앨범을 내고, 국내 투어 콘서트를 하는 정도였다. 해당 케이블 채널에서 차후 방영할 드라마에 조주연으로 출연시켜 주겠다는 암묵적인 약속이 더해졌다.

회사는 끼 있고, 외모도 매력적인 항우영이 프로그램에서 좋은 이미지를 끌어오리라 예상했다. 프로그램 제작진으로부터도 좋은 대우도 약속받았으니, 걱정할 게 없었다.

항우영은 춤도, 노래도 수준급이었다. 중간에 탈락해도 실력을 의심받을 리 없었다. 설사 최종 4인에 선발된다 해도 그 후속 활동이 핑크키위 활동에 지장을 줄 수준은 아니었다.

TE엔터테인먼트의 항우영은 가벼운 마음으로 출연을 결정했다.

“다 씹어 먹고 와!”

우리가 키운 최고의 다크호스가 다른 기획사 연습생들을 짓밟고 당당히 돌아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실제 항우영은 1화부터 화제 몰이를 했다. 실시간 검색어에서 항우영이란 이름 석 자가 내려가질 않았다.

슈퍼 루키의 등장이란 타이틀로 뉴스 기사가 쏟아졌다. 회사에서 푸시한 바가 컸지만, 항우영은 프로그램과 회사의 푸시를 감당할 만한 능력자였다.

‘트윈 트윙클’은 50명의 여자 연습생들을 빨강 팀과 노랑 팀, 두 팀으로 나누어 미션을 수행하게 했다. 미션 결과에 따라 2주에 한 번씩 탈락자가 결정됐다. 시청자들의 문자 투표에 따라 탈락 패스권이 주어졌다.

항우영은 빨강 팀의 리더가 되었다. 활달한 성격으로 다른 기획사의 연습생들과 금세 친해져, 빨강 팀을 잘 이끌었다. 태어나길 아이돌 그룹 리더로 태어난 거 같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항우영의 빨강 팀은 세 번 중 두 번은 승리했다. 탈락자는 노랑 팀에서 많이 발생했다. 프로그램을 보는 시청자라면 누구나 항우영이 최종 4인 안에 들리라 예상했다.

프로그램이 중반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케이블 채널과 TE엔터테인먼트 간에 물밑 접촉이 이루어졌다. 케이블 채널에서 방영 예정인 수목 미니 드라마의 여주인공으로 항우영이 낙점되었다. 그 드라마의 OST도 항우영이 직접 작사, 작곡하여 부르기로 했다.

회사에서는 항우영을 솔로로 데뷔시키는 게 이득일지, 계획대로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시켜야 할지 행복한 고민을 하느라 바빴다.

항우영에겐 꽃길만 펼쳐진 것 같았다. 그런데 그 꽃길이 하룻밤 만에 짓밟혔다.

몇 주 만에 빨강 팀에서 탈락자가 뽑혔다. 항우영과 절친했던 윤우희란 연습생이었다. 둘은 서로 다른 기획사였으나 둘은 프로그램에서 만나 금방 친해졌다. 프로그램 제작진은 둘의 우정을 밀착 촬영하여 방송했다.

윤우희가 탈락하는 날, 눈물을 참느라 얼굴이 새빨개진 항우영의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촬영이 끝난 뒤, 무대 뒤에서 서로의 손을 꽉 붙잡고 펑펑 우는 모습이 방영되었다.

여기까진 좋았다. 다음 날 저녁, 윤우희가 교통사고로 죽기 전까지.

대학생이었던 윤우희는 탈락한 후 학교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취한 채로 집으로 돌아가던 중 뺑소니를 당했다. 밤늦게 사건이 일어났고, CCTV가 없는 한적한 골목에서 일어난 일인지라 범인은 금방 잡히지 않았다.

프로그램의 시청자들과 참가자들은 애도를 표했다. 항우영은 윤우희의 빈소에 찾아가 오열하다 정신을 잃었다. 프로그램은 윤우희의 사망을 애도하며 한 주 방영을 쉬기까지 했다.

그런 상황에서 인터넷에 한 장의 사진이 떴다. 항우영이 도로변에서 윤우희의 머리를 붙잡고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윤우희의 머리는 정전기가 일어난 건지, 막 자고 일어난 건지 부스스했다.

평범한 사진이었다. 항우영과 윤우희가 장난을 치고 있고, 그걸 본 팬이 도로 건너편에서 찍은 것 같은 사진.

초반에 그 사진 밑에 달린 댓글들은 울음 바다였다. 모두들 윤우희 죽음에 충격받은 항우영의 멘탈을 걱정했다.

프로그램 제작진 차원에서 정신과 치료를 권해야 하는 거아니냐는 의견도 달렸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전혀 다른 온도를 가진 댓글이 달렸다.

항우영이 윤우희 괴롭히는 거 아냐? 딱 봐도 머리채 잡고 흔들고 있잖아. 윤우희가 프로그램 출연한 뒤로 밤마다 술 먹고 괴로운 티 많이 내서 팬들이 항상 노심초사했는데 결국 이렇게 됐네. 누군 따돌림 당하다 우울증을 견디지 못해 술 먹고 사고 나고, 누구는 그 소식마저 제 인기 올리는데 써먹고, 피해자 코스프레 쩌네. 윤우희만 불쌍하게 됐어ㅉㅉ

평소라면 허위사실 유포죄로 신고를 당해 삭제됐을 댓글이었다. 하지만 윤우희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그 댓글에 매료됐다. 누군가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진실이 대중들의 지지를 받는 데는 고작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그간 프로그램에서 함께였던 항우영과 윤우희의 모든 모습이 이전과 다르게 해석됐다. 너무 친해서 격 없이 장난치던 모습은 왕따를 괴롭히는 장면이 되었다. 윤우희가 탈락할지 모른다는 압박감에 괴로워하는 모습은 왕따 피해자의 고통을 토로하는 모습이 되었다.

윤우희의 죽음 이후 방송에서는 항우영이 다른 연습생들을 다독이며 연습에 매진하는 모습이 나왔다. 시청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 그녀가 한 사람을 죽음에 몰아가고도 조금의 죄의식도 못 느끼는 사이코패스라고 생각했다.

악의적인 해석과 편집이 인터넷을 뒤덮었다. 항우영은 빨강 팀 연습생들을 겁박하여 윤우희를 따돌린 왕따 가해자가 되었다. 윤우희는 어느 순간부터 우울증이 심한 알코올중독자가 되었고, ‘자살자’가 되었다.

항우영은 윤우희를 자살하게 만든 살인자였다.

항우영의 하차를 요구하는 항의가 빗발쳤다. TE엔터테인먼트엔 항우영을 향한 테러가 이어졌다. 죽은 동물시체나 피, 커터 칼이 담긴 택배가 회사로 배달됐다.

매일 회사 앞에서 항의 시위가 이어졌다. 심심하면 유리창이 깨졌다. 회사 입구엔 새빨간 글씨로 ‘살인마를 키우는 기획사’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뺑소니 가해자는 곧 잡혔다. 경찰은 TE엔터테인먼트의 요청과 과열된 대중의 도 넘은 비난을 의식하고, 공식적인 기자 회견을 가졌다. 윤우희가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한 거라고 밝혔다. 자신이 아니라 사고에 의한 사망이었다.

프로그램도 적극적으로 항우영과 윤우희의 루머가 사실이 아님을 어필했다. 하지만 두 귀를 닫은 대중은 항우영에게 손가락질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결국 항우영은 10명의 참가자들이 남았을 때 하차했다. 프로그램 말미에 하차를 선언하며, 항우영은 울음을 터트렸다. 떠도는 루머가 결코 사실이 아니라고, 소중한 친구를 잃은 슬픔을 견디는 것만도 벅찬 자신에게 그런 루머는 너무 끔찍하다고, 호소했다.

대중은 그 울음마저 가증스럽다고 비난했다. 인터넷에는 항우영에 대한 도를 넘은 악플이 넘쳤다.

프로그램을 하차한 항우영은 TE엔터테인먼트로 돌아왔지만 예정대로 핑크키위로 데뷔하지 못했다. TE엔터테인먼트는 논란이 가라앉으면 동정론이 떠오를 테니, 기다렸다가 다음 기회를 노리자고 항우영을 붙잡았다. 하지만 항우영은 회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계약을 파기하고 회사를 떠났다.

이후 논란이 가라앉자 회사의 예상대로 동정론이 떠올랐다. TE엔터테인먼트는 정정 보도를 요청하며 각 언론사에 보도 자료를 뿌렸다. 그 보도 자료대로 뉴스가 기사가 작성되었지만 조회수는 형편없었다.

그렇게 항우영은 묻혔다.

‘트윈 트윙클’은 꽤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종영했다. 최종 4인은 프로젝트 그룹으로 두어 달간 활동하며 전국 투어를 성공리에 마쳤다.

이후 두 명은 각자 기획사로 돌아가 각각 여자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했다. 한 명은 연기자로 전향하여 해당 케이블 채널의 드라마에 출연했다. 다른 한 명은 그 드라마의 OST를 불렀고, 케이블 채널의 모 회사에서 투자하는 영화의 조연으로 출연했다.

핑크키위는 항우영 없이 데뷔했다. 그녀의 자리는 다른 연습생이 메웠다. 그 연습생이 스캔들을 터트려 핑크키위를 무기한 활동 정지 상태로 만든 그 멤버였다.

[그래서 우리 회사 연습생들이, 아니 솔직히 말해서, 내가 그 프로그램이라면 진절머리를 치는 거야. 아이돌 트리니티라니? 그딴 걸 또 만들겠다고? 사람 인생 하나, 아니 여럿 망쳐놓고? 씨발.]

“……그런 일이 있는 줄 몰랐어요.”

[김현덕, 너는 어디 산속에서 도 닦다 왔냐? 완전히 떠들썩했는데 정말 몰랐어?]

“그러게요. 그런 것도 모르고 살았네요, 제가.”

현덕이 헛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숨이 찬지, 거칠어진 자룡의 숨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그러니까 난 반대야. 네가 거기 나가는 거. 그 누나도 못 버티고, 그렇게 병신 같은 일 당했는데, 네가 거길 왜 나가! 오 팀장도 네가 안 나간다고 하면 강요하진 않을 거야. 그러니까 안 나간다고 해. 뭐라고 하면 씨발, 걍 무시해버려. 네가 안 나간다는데 어쩔 건데? 너한테 연습생 그만두라느니 협박하지는 못할 거야. 회사에선 절대로 너 안 놓치고 싶어 할 테니까.]

“형은 저를 정말 좋게 봐주시네요.”

[씨발, 낯간지러운 소리 하지 마라. 그냥 안 한다고 하라고. 딴 말 말고.]

띠- 핸드폰에서 배터리가 부족하다는 알림음이 들렸다. 현덕은 충전기를 찾아 핸드폰에 연결하고는, 고개를 돌려 베란다 쪽을 바라보았다. 창 너머 하늘은 까맸다. 어느새 밤이었다.

오 팀장은 어떤 의도로 프로그램 출연 제의를 한 것일까. 현덕은 소회의실에서 봤던 오 팀장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진지한 얼굴이었다. 모든 말이 현덕을 위한 말이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모든 말이 현덕을 위하지 않는 말이지도 않으리라.

맹덕과 자룡은 모두 오 팀장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하고 있다. 맹덕은 아예 연습생 생활 따위 그만둬버리라고 하고, 자룡은 무조건 거절하라고 하고.

모두가 현덕을 걱정하고 위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착하고 순한 현덕은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형, 저 형 말 들으니까요.”

현덕은 창문에 비친 제 얼굴을 바라보았다.

창문에 비친 얼굴은 공부도 하고, 아이돌 연습생도 하는 고등학교 남학생의 얼굴이었다. 한쪽 귀와 어깨를 맞대 핸드폰을 낀 채였다.

머리카락이 좀 길어져 있었다. 조금만 시간이 더 지나면 눈을 찌를 것 같았다.

‘자를 때가 되었구나.’

현덕은 자신의 앞머리를 만지며 씩, 웃었다. 창문에 비친 얼굴도 함께 웃었다.

“그 프로그램, 나가고 싶어졌어요.”

현덕은 대학교 때 그 고인 물 고시반 분위기를 꿋꿋이 견뎌, 고시방의 선배가 된 두 명 중 한 명이었다. 그래서 그 고시반을 정말 사법시험 공부를 위한 곳으로 바꿔버린 유일한 사람이었다.

***

다음 날, 현덕은 하교 후 TE엔터테인먼트가 아니라 집으로 갔다. 오늘은 TE엔터테인먼트에 가지 않느냐고 물어보는 어머니에게 땡땡이치는 거라고 말한 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집을 나섰다.

어머니는 현덕의 입에서 ‘땡땡이’라는 말이 나온걸 신기해했다. 학교도 아니고 방과 후에 다니는 기획사 연습을 하루 빠지는 것뿐인데도 “파이팅!”이라며 응원을 해줬다.

현덕은 동네 미용실로 갔다.

작년에 동네 유일의 이발소가 문을 닫았다. 그 틈을 기회로 삼아 이발소 옆 미용실은 젊은 남자 미용사를 추가 고용하여 동네의 갈 곳 잃은 남자 고객들을 끌어모았다. 현덕은 그 마케팅에 걸려든 고객 중 한 명이었다.

미용실에 들어서니 원장이 동네 아줌마들의 머리를 말아주고 있었다. 머리에 비닐을 뒤집어쓴 아주머니들은 소파에 편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주머니들은 미용실 직원들보다 먼저 현덕을 발견하고 인사를 건넸다.

“오, 김 판사네 둘째 아들!”

다들 현덕이 사는 아파트 같은 동의 이웃이었다. 낯선 얼굴도 있었고 익숙한 얼굴도 있었다.

“안녕하세요.”

현덕이 꾸벅 인사하자 머리 위로 칭찬이 쏟아졌다. 현덕이 민망함을 견디지 못하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는데,

“요즘엔 어찌 조용해. 이사 간 줄 알았잖아!”

아쉬움이 그득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른 아주머니들도 그러고 보니 그런 거 같다고 맞장구 쳤다.

“형이 군대에 가서요.”

현덕은 아파트의 같은 단지 내에서 인기리에 방영되는 가족 막장 드라마의 주연급 등장인물이었다. 그 드라마는 특급 주연의 부재에 장기간 휴방에 들어간 상태였다. 현덕은 아쉬워하는 팬들께 다음 시즌을 기약했다.

현덕을 아주머니들에게서 구해준 건 미용실의 유일한 남자 미용사였다.

“현덕 학생, 오랜만에 오네?”

남자 미용사는 물기 묻은 손을 수건으로 닦으며 현덕을 자리로 이끌었다. 현덕은 아주머니들께 다시 한번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저 둘째가 참 참하다니까.”

“그 집 엄마는 참 좋겠어.”

“쟤가 그렇게 공부를 잘한다며?”

“아이고, 얼굴도 하얀 게 예쁘네. 공부도 잘하고.”

칭찬 말씀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잘못 왔다. 잘못 걸렸어.’

현덕의 얼굴이 빨개졌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같은 동 아주머니들의 미용실 마실 시간에 올게 뭐람.

“아주 유명 인사야.”

미용사가 현덕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으으.”

현덕은 울상 지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미용사는 웃으며 현덕의 목에 긴 천을 두르고, 머리카락을 자를 준비를 마쳤다. 어떤 스타일을 원하느냐고 물어보는 과정은 자연스럽게 생략되었다.

현덕은 처음 미용실에서 와서 ‘알아서 잘라주세요. 학교 학칙에만 안 걸리면 돼요.’라고 말하며 학교 두발 규정 안내문을 내밀었다.

그 안내문은 지금도 미용실 한구석에 붙어 있었다. 현덕과 같은 학교에 다니는 다른 학생들이 미용실에 왔을 때, 훌륭한 가이드라인이 되어주고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오더니, 요즘엔 너무 띄엄띄엄 오는 거 같아. 이번엔 두 달? 석 달 만에 온 거지?”

“네. 아마도요.”

“앞머리 길면 거치적거려서 공부하는 데 불편하다더니, 요즘에 공부 열심히 안 하나 봐?”

사각사각. 미용사의 가위질에 앞머리가 후두둑 잘렸다.

현덕은 전면 거울을 쳐다보았다. 앞머리가 짧아져 이마가 드러났다. 시야가 훤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게요. 머리 자르러 오는 것도 잊을 정도로 바빴나 봐요.”

“뭘 그리 열심히 해서, 머리하러 오는 것도 잊었대? 엄청 재미있는 일이었나 봐?”

미용사의 손이 현란해졌다. 서걱서걱, 머리가 한 움큼씩 잘려나갔다.

매일 아침에 화장실 거울을 보면서도 그리 많이 자랐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미용실에 오니 머리카락이 많이 자라 있었다는 게 실감이 났다.

그러고 보면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대학에 가서도 사법시험을 준비하면서도, 현덕은 꼭 한 달에 한 번 머리카락을 잘랐다. 아무리 바빠도 매달 이발하는 아버지를 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긴 습관이었다.

사법시험을 준비할 때, 바지가 닳고 찢어져 구멍이 뚫리는 줄도 모르고 살았다. 언제 샀는지 모를, 목이 길게 늘어진 티셔츠를 며칠씩 입고 다니곤 했다. 어머니와 형이 새 옷을 사다 주어도 몸에 익숙한 편한 옷만 입게 되어 늘 추리닝 차림이었다. 고시촌에 있다 보면 다들 비슷한 모습이기에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게 되었다. 그렇게 옷을 막 입고 다니긴 했지만, 그래도 머리는 항상 단정했다. 매일 잘 씻고 머리만 단정해도 사람 몰골은 유지할 수 있었으니까. 한 달에 한 번씩 미용실에 가는 걸 꼭 챙겼다.

그런 현덕이 석 달 넘게 미용실에 오지 않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머리 자라는 걸 못 느낄 정도로 빠져 있었다는 거네.’

어젯밤 자룡과 대화하다 문득 발견한 것이었다.

어제, 현덕은 베란다 창문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거기엔 눈을 찌를락 말락 하게 긴 앞머리를 만지고 있는 고등학생이 앉아 있었다. 그 고등학생은 매달 꼬박꼬박 다니던 미용실 오는 걸 잊을 정도로 TE엔터테인먼트에 출석 도장을 찍었다. 눈을 찌르는 앞머리를 귀찮다고 느끼지 못할 정도로 공부보다 춤과 노래 트레이닝을 받는 데 집중했다.

그러면서 언제나 변명했다.

‘나는 좀 재미있는 방과 후 활동을 하고 있는 거야. 정말 데뷔하고 싶지 않아. 데뷔조 선발에 제외돼도 조금도 섭섭하거나 서운하지 않았어. 그런 마음을 가지면 안 되거든.’

그러면서 그 중요한 성적이 떨어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습생 생활을 이어나갔다.

현덕은 고등학교에 와서 성적이 떨어졌다. 버라이어티하게 하락한 건 아니었지만, 중학교 때 전교 5등 안에 들던 성적이 전교 15등에서 20등에서 오락가락했다. 어머니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공부는 다르니 그 정도면 선방이라고 생각하시는 듯했다.

고등학교 공부는 어렵지 않았다. 한 번 해봤던 가락이 있어서 그런지 공부 시간만 어느 정도 확보하면 전교 1등도 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전히 수학이 어렵긴 했지만 그것도 결국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였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연습생 생활 때문이었다. 현덕은 매일 TE엔터테인먼트로 출근했다. 시험 기간에도 두어 시간 집에서 공부를 한 후 TE엔터테인먼트로 갔다.

신인개발팀에서 출석 체크를 하긴 하지만 연습 나오는 게 의무는 아니었다. 선택이었다. 연습생들 중에는 현덕처럼 매일 나오는 연습생도 있지만 아르바이트 등의 이유로 일주일 중 며칠만 연습하러 나오는 연습생들도 많았다. 자룡마저도 데뷔조 선발 기간이 아니면 금, 토는 아르바이트 때문에 연습하러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현덕은 매일같이 나가 트레이닝을 받고 연습을 했다. 조그만 연습실에서 노래를 했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연습생들과 팀을 짜서 주간 평가용 안무를 연습했다. 어려운 댄스 동작을 분석하고 쪼개 연습일지에 그려 넣으며 반복해 연습했다.

재미있었다. 즐거웠다. 그래서 매일 갔고, 매일 연습했다.

솔직히 주민과 다툰 이후 데뷔조 선발에서 제외되었을 때, 섭섭했다. 아쉬웠다. 그런 기분을 가져선 안 된다고 생각하고 꾹 눌러버렸지만.

‘계속 변명이나 늘어놓고 있었지. 고3 되기 전에 그만둘 거라고. 정말 내가 그만둘 마음이 있었으면 그만두겠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그만뒀겠지. 자룡 형이 죽으려는 걸 보고, 정떨어져서 회사에 그만둔다고 말했겠지. 그런데 난, 안 그랬어.’

연습생 생활은 언제나 현덕의 공부를 방해했다. 균형을 지키겠다고 애쓰는 건 자기기만이었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자신이 연습생 생활과 학교 공부 사이에서 어느 한쪽도 선택하지 못하고, 이도 저도 아닌 채 버티고 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다르게 살아보겠다고 생각했으면서 결국 똑같이 살고 있었던 거야. 공부해야 된다는 이유를 핑계로, 내가 느끼고 경험하고 있는 다른 것들을 계속 모른 척하고 있었어. 아무것도 아니라고, 별거 아니라고. 좋아서 하는 게 아니라 그냥 하는 거라고. 누가 나한테 강요하거나 억지로 시키는 것도 아니었는데. 내 발로 걸어 들어갔으면서 그렇게 맹숭맹숭하게 굴고 있었어.’

쪽팔리는 건, 그런 자신의 상태를 맹덕과 자룡은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둘 다 알고 있었던 거야. 내 마음이 확실히 잡혀 있지 않다는 걸.’

첫 번째 삶에서 사법시험을 준비하겠다고 했을 때, 맹덕은 말리지 않았다. 민철이나 다른 친구들도 응원하면 응원했지 말리진 않았다. 부모님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몇 번이고 시험에 떨어지고 또 떨어져도, 누구도 현덕에게 그만두라고 말하지 않았다. 현덕이 스스로 그만두겠다고 말하지 않으니 모두 그런 현덕을 믿고 기다려주었다.

친구인 민철은 취직하고 결혼하여 애를 키우느라 바쁜 와중에도 가끔 현덕을 찾아왔다. 함께 밥을 먹으며 항상 ‘넌 꼭 될 거야. 너 아니면 누가 사법고시 합격하겠냐.’라고 말해주었다.

그런데 지금, 연습생 생활을 하는 현덕에게는 아무도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다. 아무도 현덕을 믿어주지 않았다.

현덕은 부끄럼을 느꼈다. 그리고 자룡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보기에 내가 얼마나 같잖았을까. 공부 좀 하는 범생이가 놀러 온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텐데. 기분 나쁘고 우스워 보였을 텐데도, 그래도 날 진지하게 대해 줬어. 걱정해주고.’

맹덕과 자룡이 자신을 위해 화를 내는 걸 듣고야 비로소 자신의 상태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순간, 잊고 있었던 무언가가 욱하고 치솟았다.

현덕은 눈을 떠 앞의 거울을 바라보았다. 얼굴은 하얗지만 건강해 보이는 고등학생 김현덕이 미용실 의자에 앉아 이쪽을 보고 있었다.

‘도망치지 말자.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걸 하자. 그러기로 마음먹었던 거잖아. 어물쩍 넘어가면 안 돼. 내가 선택한 거니까 어떤 결과든 내가 감당하면 되는 거야. 내가 하겠다고 결정한 거면서, 맹숭맹숭하게 굴며 어물쩍 넘어가는 쪽팔리는 짓은 하지 말자. 김현덕.’

미용사는 금세 커트를 끝냈다. 다음에는 늦지 말고 다음 달에 바로 오라는 영업 멘트도 잊지 않았다. 현덕은 학생 할인을 받아 비용을 계산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어머니가 현덕을 반겼다.

“마침 잘 왔네, 땡땡이 연습생! 엄마랑 같이 마늘 좀 까자. 동창회 갔더니, 엄마 친구 중에 귀농한 친구가 마늘 농사 잘 됐다고 자랑을 하더라고. 그래서 나한테 한 접만 팔라고 했는데 그거 택배가 방금 온 거 있지. 마늘이 굵고 너무 좋아! 육쪽마늘이고.”

이유 없는 반가움은 없었다. 현덕은 자신의 노동력을 탐내는 어머니에게 붙잡혔다.

현덕은 마늘이 산처럼 쌓인 대야를 끌어 거실로 가져왔다.

“아들, 뭐 재미있는 거 하면 틀어 놔. 보면서 하자. 한참 까야되니까!”

“네에.”

현덕은 어제 자룡이 추천했던 ‘소녀 프로젝트 : 트윈 트윙클’을 찾았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 그런지 전 회 다시보기가 무료였다. 현덕이 1화를 누르자, 어머니가 빈 그릇과 과도 두 개를 들고 옆에 와 앉았다.

“어머, 아들. 이거 보게?”

“어머니, 이거 아세요?”

“그럼! 엄마는 이거 생방송으로 봤어. 나오는 애들이 다 예쁘고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 부르고 그래. 엄마가 저거 생방송 투표도 하고 그랬어.”

“어? 진짜요?”

현덕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기억하기로, 어머니가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은 일요일에 하는 전국노래자랑과 동물의 왕국이었다. 매일 저녁엔 드라마와 뉴스를 챙겨 보셨다.

‘어머니가 이런 프로그램을 보고 좋아하셨는지도, 난 몰랐던 거구나.’

교통사고 당하기 전 과거에도, 되돌아온 지금도 알지 못했다.

현덕은 눈을 껌벅이며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그립네- 라고 말하며, 프로그램의 오프닝을 따라 불렀다. 흥얼이는 입가엔 그야말로 엄마 미소가 한가득했다.

‘변한다고, 조금은 다르게 살아보겠다고 생각했으면서 나는 그대로였네.’

어제의 깨달음이 오늘도 현덕의 뒤통수를 퍽퍽 두들겼다.

“어머, 한다, 얘! 현덕아, 너도 봐봐. 이거 재밌어.”

어머니는 기꺼이 가이드가 되어, 아이돌 선발 프로그램은 처음인 현덕을 이끌어주었다. 현덕은 어머니의 설명을 들으며 TV를 보았다. 물론 두 손엔 과도와 육쪽 마늘이 들려 있었다.

프로그램은 오십여 명의 소녀들이 똑같은 교복을 입고 시청자들에게 인사하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우리는 트윈- 트윙클입니다!”

오십 명의 소녀가 일제히 외쳤다. 자막으로는 ‘당신의 소녀를 응원해주세요.’라고 자막이 떴다.

빠른 속도로 한 명씩 얼굴을 클로즈업해주는 걸 보았지만, 누가 누군지 영 분간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현덕과 다른 듯했다. 커트 머리 여자 연습생의 얼굴이 뜨자 어머니는 과도를 내려놓고 현덕의 팔을 찰싹찰싹 때렸다.

“어머? 방유진이네. 현덕아, 엄마는 쟤 응원했어! 쟤가 나중에 노랑 팀 리더가 되거든? 춤도 잘 추고 얼마나 노래도 잘 부르는지 몰라.”

2년이 지난 프로그램인데도 어머니는 출연한 여자 연습생의 상당수를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기억하는 연습생들은 그중 1차 탈락 발표에서 살아남은 연습생들이었다.

현덕과 어머니는 프로그램을 연달아 5편까지 봤다. 둘이 깐 마늘은 그릇에 수북이 쌓였다. 프로그램을 보며 마늘을 까는 건지, 마늘을 까기 위해 프로그램을 틀어 놓은 건지 헛갈릴 정도였다.

어머니는 여전히 노랑 팀 리더 방유진을 좋아했다. 방유진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박수쳤다.

현덕은 자룡에게 먼저 들은 말이 있어서인지, 항우영과 윤우희에게 자꾸 눈이 갔다. 둘은 정말로 친해 보였다.

50명의 여자 연습생들은 1차 탈락 발표에서 30명이 되었다. 그리고 미션을 수행하고 그 결과를 심사위원들에게 심사를 받았다. 심사위원들의 평가에 따라 순위가 결정되면 하위 순위의 연습생들은 탈락했다. 그때마다 생존한 연습생들도, 탈락한 연습생들도 눈물을 참지 못했다.

프로그램은 자룡이 말한 것처럼 자극적이었다. 편집이 악의적이라고 느껴지는 부분이 여럿 있었다. 어머니는 그런 부분에서 어쩜 저럴 수 있냐고 화를 냈다.

출연한 연습생들은 모두 필사적이었다. 데뷔를 꿈꾸며 울고 웃었다. 밤새 연습하고 구슬땀을 흘렸다. 미션 무대에서는 다투고, 다치고, 아픈 것도 다 잊고 웃었다.

그렇게 반짝반짝 빛났다.

현덕은 왜 오 팀장이 자신에게 이런 프로그램에 나가보지 않겠냐고 권했는지 알 것 같았다. 자룡이 왜 나가면 안 된다고 말렸는지 알 것 같았다.

“어머니.”

“응, 왜?”

“제가요, 저런 프로그램에 나갈 거 같아요.”

“어어, 어? 뭐?”

“저거 남자 버전 만들 거래요. 회사에서 저 보고 나가보지 않겠냐고 물어보더라고요.”

현덕의 손은 계속 움직이는데, 어머니의 손이 멈췄다.

“저 처음에는 안 나가겠다고 그랬거든요. 곧 있으면 2학년 올라가고 슬슬 수능 공부 집중해야 하는데 연습생 생활 계속할까 말까 고민되기도 하고. 자룡이 형 일도 있고 그래서 회사에 별로 좋은 감정도 안 들고. 괜히 티비 나가서 얼굴이나 알리고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난 정말 연예인 되고 싶은 거도 아닌데 저런 걸 왜 나가지 싶기도 하고, 그런 마음에서요. 근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제가 너무…… 이상한 거 같은 거예요.”

현덕이 고개를 들어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TV에선 방유진이 화려한 비보잉 기술을 선보이고 있었지만 어머니의 눈은 현덕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처음에 학교 앞에서 캐스팅됐을 때는 왠지 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형이랑 같이 오디션도 보러 갔고. 오디션 보러 갔을 때 말실수해서 탈락할 거라고 생각해서 좀 실망도 했어요. 근데 합격해서, 제가 연습생 생활 해보고 싶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엄마랑 둘이 가서 계약하고 왔지. 엄마는 그때 네가 연습생 해보고 싶다고 해서, 좋았어.”

“왜요?”

“현덕이 네가 공부 말고 다른 거 해보고 싶다고 한 건 그게 처음이었으니까. 어릴 때 맹덕이랑 같이 피아노 학원도 보내보고 태권도 학원도 보내봤는데, 네가 영 재미없어 하기에 몇 달 보내다 말았거든.”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손가락으로 현덕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그런데 네가 먼저 하고 싶다고 했잖아. 딴 것도 아니고 갑자기 연예인이 되겠다고 해서 놀라긴 했는데. 그거 계약하러 가기 전에, 엄마가 친구들 중에 그런 쪽으로 빠삭한 애들한테 좀 물어봤거든. 그런데 정말 연예인으로 데뷔하는 건 천 명에 한 명 될까 말까 하고, 대부분 그냥 연습생 생활로 끝난다고 하더라고. 엄마 친구 중에는 아들이 너무 말썽을 피워서, 차라리 어디 딴 데 가서 사고 치지 말고 기획사에서 친구나 사귀고, 춤이나 배우라고 일부러 연습생으로 집어넣기도 하고 그랬다고 하더라고. 그 말 듣고 엄마는 부담 없이 너 연습생 계약해준 거야.”

“저도요, 비슷한 마음이었어요. 그냥 방과 후에 춤이랑 노래 배우는 그런 학원 다니는 거라고, 그런 생각으로 다녔어요. 아니, 그런 생각으로 다닌 줄 알았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아닌 거 같아요.”

현덕은 어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 나 그거 하는 게 재미있어요. 공부만큼 재미있었어요.”

이게 현덕의 진심이었다.

“근데 공부랑 같은 선상에 두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좀 이상하게 굴었던 거 같아요.”

“엄마가 옆에서 보기엔 현덕이 넌 성실하게 열심히 했어. 하나도 안 이상했어.”

“그래서 한번, 제대로 해보고 싶어요.”

“지금보다 제대로? 저 프로그램 나가는 게 제대로 하는 거니?”

어머니가 물었다.

“제 생각에는 그래요. 여전히 제가 연예인으로 데뷔할 수 있다거나 그런 생각은 안 들지만요. 끝까지 해보고 싶어요. 연습생 생활이란 게 결국 데뷔하지 못하면 끝없이 계속되거나 그만두는 거로 끝나는 거 같더라고요. 그런데 저 프로그램 나가면 끝이 있는 거잖아요. 탈락해서 떨어지면 끝이니까. 그래서 저 프로그램 나가서, 정말 제대로 한번 마음먹고 해보려고요. 그러고 떨어지면 마음이 후련할 거 같아요.”

떨어질 걸 걱정했다면 사법시험을 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악의적인 편집을 당하거나 불이익을 받을까 봐 걱정돼서 프로그램에 나가지 않는다면, 지금 잡은 터닝 포인트를 놓쳐버릴 것이다.

‘학교 앞에서 오디션 제의를 받았던 것처럼, 저 프로그램 제의를 받은 게 또 하나의 터닝 포인트가 돼 줄 거 같아.’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어렴풋이 과거- 스무 살 때가 떠올랐다. 막 사법시험을 준비하고자 했을 때. 두꺼운 민법책을 사서 그 겉표지를 손으로 쓸어보았다. 공부할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렵겠지, 힘들겠지, 몇 번은 떨어지겠지. 그래도 계속하면 합격할 수 있을 거야. 어떤 내용일까, 공부하고 싶다.’

설랬다.

그 설렘은 십삼 년이란 시간 동안 무뎌지고 깎여 먼지조차 안 남고 사라져버렸지만. 그래서 열여섯 살의 김현덕으로 돌아왔어도 다 타고 남은 재처럼 굴었지만.

지금 다시, 그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설렘이 손끝에서부터 피어올랐다. 정전기가 난 것처럼 손끝이 찌릿찌릿했다.

현덕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그런 현덕을 지켜보는 엄마의 눈엔 웃음이 맺혔다.

“현덕아.”

“네.”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다 해봐. 그래도 되는 나이야, 네 나이는.”

현덕에게 있어, 현덕의 삶에 있어 최종 결정권자의 결재가 떨어졌다. 두말할 것 없는 ‘승인’이었다.

현덕은 씩, 웃으며 자신 있게 말했다.

“최대한 높이 올라가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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