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다리 위에서
방과 후 종례 시간에 수학여행 이야기가 나왔다. 여행지는 제주도였다. 반 친구들은 비행기를 탄다는 기쁨에 빠져 잠시 자신이 인간임을 잊고 날뛰었다.
담임선생님은 지금 당장 제주도로 보내달라고 날뛰는 망아지들을 달래며, 수학여행을 갈지 말지를 조사하는 통신문을 나누어줬다. 몸이 아프거나 집안에 큰 일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빠지기 힘들 거라고 미리 경고해두었다.
현덕의 옆자리에 앉았던 민철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웬 한숨이야. 복 나가. 곧 기말고산데 복 아껴둬. 찍은 문제 맞아야지.”
현덕은 엎어진 민철의 팔을 툭, 건드리며 말했다.
중학교 때 어울렸던 친구들 중 같은 고등학교로 온 건 민철뿐이었다. 다행히 같은 반이 되어 범생이의 우정을 다져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정작 민철은 현덕이 고등학교에 올라오고서는 그룹 과외도 안 하고 치사하게 혼자 공부한다고 구시렁거리기는 했지만.
“현덕아, 난 왜 우리가 수학여행을 가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
“왜? 학교에서 당연히 가는 건데.”
“그러니까. 난 제주도에 관심 없고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야. 나 같은 사람은 굳이 안 가도 되지 않을까?”
“그래,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라도 한번 가자. 난 가고 싶은데, 너가 안 가면 나 심심해서 안 돼.”
“수학여행 갈 시간에, 그 기간 동안 공부를 좀 더 하는 게 내 삶에 이롭지 않을까?”
“그 말을 담임 쌤 앞에 가서 말해보시지?”
현덕의 말에 민철이 으아아- 괴성을 지르며 괴로워했다. 현덕은 그런 민철을 질질 끌고 하교했다. 그리고 그날, 현덕은 민철이가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을 TE엔터테인먼트 신인개발팀 소회의실에서 다시 듣게 되었다.
“난 왜 수학여행을 가겠다고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네.”
신인개발팀 직원의 말이었다.
매달 말일 경, TE엔터테인먼트의 연습생들은 한 달간 작성한 연습일지를 신인개발팀에 제출한다. 현덕은 한 달간 열심히 쓴 연습일지를 들고 신인개발팀에 왔다. 다들 외근을 나갔는지 사무실이 썰렁했다. 평소 자주 보던 더벅머리 직원만 남아 연습생들의 연습일지를 받아 검사하고 있었다.
현덕은 연습일지를 제출하며 학교 수학여행 일정을 말했다. 삼 일간 연습하러 나오지 못한다고 말하자, 더벅머리 직원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그는 현덕이 회사의 돈을 떼먹고 도망가겠다고 선언한 것처럼 굴었다. 다른 연습생들의 연습일지 위에 현덕의 연습일지를 턱- 소리 나게 던져버리고는 현덕을 데리고 소회의실로 들어갔다.
현덕은 장장 30분 동안 잔소리를 들었다. 자고로 연습생이란 데뷔 전까지, 오직 데뷔만을 목적으로 하여 노력하고 또 노력하여야 한다. 다른 연습생들처럼 출석 인정이 널럴한 문화예술고로 진학하라고 했는데도 말을 안 듣더니. 일반고로 진학해서는 수업을 꼬박꼬박 듣고 오후에야 슬렁슬렁 연습하러 나오더니. 이제는 수학여행을 가겠다고 말하는 거냐.
직원은 작정한 듯 말을 쏟아냈다.
그의 말대로라면 수학여행을 가겠다는 현덕은 대한민국 모든 아이돌 연습생들을 기만하는 이기주의자였다.
처음에는 직원이 하는 말이 이해가 안 돼서 가만히 듣기만 했다. 나중에 가서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냥 들었다.
들을수록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학생이 공부를 해야지. 공부를 포기하고 데뷔 준비만 하라고? 회사에 연습생으로 등록된 모든 연습생들을 데뷔시켜 줄 것도 아니면서. 다른 기획사도 이렇게 말할까? 아니면 여기 TE엔터테인먼트만 이렇게 말하는 걸까?’
현덕은 TE엔터테인먼트에 만연한 이런 생각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더벅머리 직원은 현덕에게 그래도 수학여행에 가겠느냐고 물어보았다. 현덕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은 화를 내며 이 일을 오 팀장에게 말하겠다고 했다. 마치 유치원생 아이가 친구에게 너 혼내주라고 내 엄마아빠한테 이를 거라고, 협박하는 듯했다.
현덕이 상관없다고 했다. 더벅머리 직원은 바로 오 팀장에게 전화하려는 듯 현덕을 놔두고 소회의실을 나갔다.
현덕은 잠시 동안 더벅머리 직원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오 팀장에게 전화하러 간 게 아니라 오 팀장을 만들러 간 건지, 더벅머리 직원은 도통 돌아오지 않았다. 현덕은 천장을 보며 숫자를 1부터 100까지 센 후 자리에서 일어나 소회의실을 나섰다.
대형 연습실로 가서 춤 연습을 하고 있는 자룡을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다. 형도 수학여행 안 갔다 왔냐고.
‘그 형이라면 안 갔다 왔을 거야.’
자룡이라면 안 갔다 왔다고 말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걸 당연하다고 말할 자룡을 상상하니 기분이 더 안 좋아졌다.
현덕이 소회의실 문을 닫을 때였다.
“연습일지를 무척이나 성실하게 쓰네. 김현덕 연습생.”
사무실의 창가 쪽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낮고 허스키한 음색이었다.
‘우주민?’
역시나. 주민이 창가에 기대 서 있었다. 손에 까만색 표지의 노트를 들고 있었다.
김현덕.
이름 석 자가 크게 쓰여 있었다. 현덕의 연습일지였다.
“내 댄스도보통지?”
“댄스도보통지?”
“…….”
현덕은 입을 꾹 다물었다.
생소할 수밖에. 그건 현덕만의 용어였다.
TE엔터테인먼트의 연습생으로서 사물함을 받은 날, 현덕은 얇은 노트 한 권을 함께 받았다. 매일매일 연습일지를 써야 된다고 했다. 그날 무엇을 배우고 연습했는지, 어떤 마음으로 데뷔를 준비하고 있는지 등등을 쓰라고 했다. 연습일지를 성실히 쓰는 것도 데뷔조에 들어가는 점수에 포함된다고 했다.
그래서 현덕은 매일 연습일지를 썼다.
다른 연습생들은 대부분 연습일지 쓰는 걸 귀찮아했다. 어차피 매일 똑같은 걸 배우고 연습해서 매일 똑같은 말을 쓰는데, 왜 매일 써야 되는지 모르겠다는 태도였다.
현덕은 그들과 달리 연습일지를 쓰는 걸 즐겼다. 매일 무엇을 배웠는지. 그때 기분은 어땠는지. 어떤 게 잘 되고 어떤 게 잘 안 되는지. 일지를 쓰다 보면 매일매일 연습생 생활에서 익히고 배운 걸 정리할 수 있어 좋았다. 옛날 사법시험을 준비할 때 꼼꼼히 플래너를 작성했던 생각이 나 감회가 새롭기도 했다.
현덕은 연습일지에 그림도 그렸다. 그날 배우거나 연습한 춤 동작 중 100% 소화하지 못한 동작을 잘게 쪼개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러면 춤 동작을 머리로 이해할 수 있어서 좋았다. 언젠가 맹덕은 현덕의 연습일지를 보고는 셜록 홈즈 소설에 나오는 춤추는 사람 그림 암호 같다고 말했다.
현덕은 매일 연습일지에 댄스 그림을 그리며, 자신의 연습일지를 ‘댄스도보통지’라고 이름 붙였다. 혼자만 생각하고 있는 이름이었다.
학교에서 한국사 시간에 정조 시대에 만들어진 <무예도보통지>에 대해 배웠다. 무술 동작을 그림으로 그려, 그 책을 보고 무술을 연마할 수 있도록 만든 책이었다.
그 책의 삽화를 보며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연습일지를 쓸 때 <무예도보통지>처럼 자신만의 <댄스도보통지>를 만들어보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 장 한 장 소중하게 적어나가고 있건만.
그것이 우주민의 손에 들려 있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현덕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뭐가?”
주민은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남의 물건 허락도 없이 만지는 건 절도죄에 해당합니다. 당장 손 떼요.”
펜, 지우개와는 정도가 달랐다. 저건 현덕의 고민과 노력이 들어가 있는 연습일지였다. 현덕과 직원 외에는 볼 수 없어야 했다.
현덕은 같은 연습생 신분인 주민이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니 주민은 더더욱 봐선 안 됐다.
“이게 절도죄라고?”
주민은 현덕의 연습일지를 두 손가락으로 집어 달랑달랑 흔들며, 현덕을 약 올렸다.
연습일지를 멋대로 읽은 것 이상으로 주민의 빈정대는 태도가 눈에 더 거슬렸다. 주민의 노래에 감탄하며 빠져들었던 게 고작 며칠 전이건만. 그때의 감동은 지금의 짜증에 밀려 단번에 사라졌다.
“다른 사람의 물건을 허락도 없이 만지고 사용하는 건 불법영득의 의사가 있는 것으로 판단되어 절도죄에 해당될 수 있으니까.”
현덕은 또박또박 말하며, 빠른 걸음으로 주민에게 걸어갔다. 그의 손에 들린 자신의 연습일지를 채가듯 빼앗았다.
“함부로 보지 말고. 당장 나한테 사과하세요. 미안하다고.”
“남의 연습일지를 함부로 읽은 게 절도죄에 해당한다? 법을 참 잘 아는 김현덕 연습생, 그러면 말이야.”
주민은 연습일지를 빼앗긴 빈손으로 현덕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남이 알려주지 않은 개인정보를 멋대로 알고, 사용한 죄는 뭐지?”
“그걸 나한테 묻는 의향이 무엇인지 몰라 대답하기 싫습니다. 일단 저한테 사과부터 하시죠.”
“나는 김현덕 연습생, 그쪽한테 내 이름을 알려준 적이 없거든. 그런데 저번에 날 처음 봤을 때, 내 이름을 불렀잖아?”
주민이 현덕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현덕의 귓가에 대고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무슨 죄에 해당하지?”
“…….”
현덕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말의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그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얼얼하게 만들었다.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이를 꽉 깨물고 정신을 단단히 붙들어 매었다.
“입은 얼굴에 씌운 가죽이 부족해서 뚫어놓은 건지. 잘못을 저지르고도 사과할 줄 모르는 사람 입에서 나온 질문에 굳이 답해주고 싶지 않습니다만.”
현덕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주민에게서 벗어났다. 주민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마주 바라보았다.
“오- 말 잘하네, 김현덕 연습생?”
주민의 입가에 미소가 진해졌다.
“똑똑해. 평범한 아이돌 연습생이라기엔 너무 똑똑해.”
“그건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
“궁금하네, 이렇게 똑똑한 김현덕 연습생이 내 이름 어디서 들었을까.”
“어…….”
현덕은 저도 모르게 멈칫, 하고 말았다.
내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죽었는데, 눈을 떠보니 다시 십대로 돌아왔거든? 그래서 내가 죽기 전에, 배우로 엄청 성공한 당신 인터뷰를 너무 감명 깊게 봤던지라. 당신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네.
……라고 말할 수 있을 리가.
현덕이 머뭇거리는 새 주민이 선수를 쳤다.
“출석부에서 봤다느니, 일지에서 봤다느니, 그런 평범한 변명은 미리 거절해두지. 난 출석부나 일지를 쓰지 않거든.”
주민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당황한 현덕은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대신 주민의 말에 힌트를 얻어 변명거리를 생각해냈다.
“여기 사무실 오가다가 우연히 그쪽이 쓴 계약서를 봐서, 낮선 얼굴 보고 그 이름 주인공인가 싶어 불러 봤을 뿐인데.”
TE엔터테인먼트는 꽤 큰 회사임에도 은근히 허술해서, 중요한 문서를 아무데나 두었다.
실제로 현덕은 연습일지를 내러 왔다가 한쪽에 쌓여 있는 회사의 중요 문서들이나 계약서 문서를 본 적이 있었다. 자세한 내용까지 읽진 못했지만 하단에 쓰인 이름과 사인 정도는 어렴풋이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런, 그랬구나.”
주민은 연극을 하듯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쩌나? 미안하지만 난 아직 연습생 계약서를 쓰지 않아서 말이야.”
한 발, 주민이 현덕에게 다가왔다.
한 발, 현덕은 주민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현덕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다른 사람 앞이라면 이리 당황할 일이 없었을 텐데. 지금 눈 앞에 있는 사람이 하필이면 우주민이라서 문제였다. 현덕은 당황해 제대로 된 변명거리를 찾지 못했다. 다시금 어설픈 변명거리를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우연히 지나가다가 오 팀장님이 다른 사람들이랑 말하는 걸 들어서, 그래서 내 무의식에 그쪽 이름이 남은 거 같은데.”
“그래? 오 팀장은 자기 어린 딸을 두고 맹세컨대 회사 안에서든 밖에서든 내 이름을 단 한 번도 꺼낸 적이 없다고 하던데. 그럼 누가 거짓말을 하는 걸까나?”
“아니, 이름이 뭐라고 그렇게까지-”
“오, 이제는 이름을 아는 게 뭐가 중요하다고 주장해볼 참인가? 사과도 제대로 할 줄 모르기에 뚫린 입이 제 기능을 못 하는가 했더니 그건 아닌가 봐? 말 참 잘하네.”
“…….”
현덕은 눈을 도로록 굴리며 주민을 보았다. 웃음기가 사라져 무표정한 얼굴은 주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드러내지 않았다.
“어느 쪽이야, 말해.”
감정을 알 수 없는 얼굴만큼이나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어느 쪽?’
현덕이 눈을 깜박였다.
“널 이쪽으로 잠입시켜서 날 감시하라고 한 게 빌어먹을 늙은이인지, 뒤통수치는 게 취미인 백여우인지 솔직히 말하라고.”
말해줬으면 좋겠다면서 말할 틈은 주지 않았다. 주민은 단번에 현덕의 멱살을 잡아 올리더니 벽으로 밀쳤다.
“컥! 뭐, 뭐 하는, 거, 야!”
숨이 막혔다.
현덕이 고개를 저으며 팔다리를 버둥거렸지만 주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날카로운 눈이 대놓고 현덕을 노려보았다.
“나한테 들통 난 거, 널 보낸 쪽에서 알게 되면 어떻게 되려나? 모르긴 몰라도 네 신상에 이로울 것 같진 않은데.”
“뭐, 뭐를…….”
“빨리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내가 여기서 너 어떻게 해도 너 여기로 밀어 넣은 쪽들은 눈 하나 꿈쩍 안 할 테니까. 알잖아? 그러니까 괜히 뻗대지 마. 안 그래도 지금 기분 더러우니까.”
“……으윽.”
현덕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숨이 모자라서 나타나는 생리적 현상이었다.
‘뭐라는 거야, 이게.’
숨이 갑갑하게 막혀오는 가운데, 의식의 저편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야야, 김현덕! 얼른 발로 까버려!’
맹덕이었다.
현덕이 초등학생 때였다. 고등학생 맹덕은 어리고 순진한 현덕을 앞에 앉혀두고 일장 연설을 해댔다.
‘형 말 잘 기억해. 길가다 누가 널 위협하고 협박하고 그러면, 뒷일 생각하지 말고 일단 명치나 사타구니를 발로 까. 있는 힘껏. 뭘 하나 부러뜨리거나 터뜨려버리겠다는 마음으로. 뒷일은 내가 책임질 테니까.’
어린 현덕은 형의 말이 무척 무서웠다.
‘형아, 그러다가 그 사람 다치면 어떻게 해에.’
‘야, 야. 니가 그딴 새끼 걱정하면 어떻게 해! 이 자식,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려고.’
맹덕이 현덕의 작은 두 어깨를 두 손으로 감싸며, 현덕과 눈을 마주쳤다.
‘얌마, 김현덕. 똑똑히 기억해. 내 동생이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너처럼 맹한 녀석은 길바닥 한가운데 놔둬도 절대 남한테 무슨 해 안 끼칠 녀석이야. 그런데 그런 널 막 괴롭히는 놈이 있잖아? 그놈은 절대 나쁜 놈이야. 반드시 정의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놈이라고. 그러니까 인정사정 보지 말고 까버려!’
맹덕은 현덕을 세뇌하려는 듯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나쁜 놈에게 정의의 심판을 내려. 주먹으로 명치를 때리고, 발로 거기를 까버려. 이렇게, 이렇게!’
맹덕은 벌떡 일어나 주먹을 내질렀다. 다리를 높이 들어 걷어차는 시범을 보였다.
‘사람을 때리는 건 학교에서 나쁜 일이라고 그랬는데…….’
현덕이 울상을 지었다.
‘그래도 이 녀석이!’
맹덕은 현덕을 억지로 일으켜, 정권 내지르기와 발로 상대방 사타구니 사이를 정확히 가격하는 기술을 가르쳤다.
현덕의 귀에 그때의 맹덕의 목소리가 점점 선명하게 다가왔다.
‘까버려! 발로 팍! 까버리라고!’
현덕은 그때의 맹덕에게 대답했다.
‘응, 형. 나 깔게.’
현덕은 자신을 위협하는 나쁜 놈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나쁜 놈이 정의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곳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진을 입고 있는 그 부위는 같은 남자가 보기에도 실하고 건실해 보였다. 참으로 까는 맛이 있을 것 같았다.
근 일년간 현덕은 체력을 길렀다. 자룡과 함께 춤추며 민첩성도 길렀다. 지금의 현덕은 누군가에게 크리티컬 히트를 먹이기에 손색없는 레벨 업 상태였다.
퍽-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현덕은 주민의 다리 사이를 가격했다.
“윽!”
주민이 쓰러졌다. 현덕의 목을 조이던 손이 단번에 풀렸다.
다리 사이, 중요한 부위를 두 손으로 소중히 움켜쥔 주민은 제대로 비명조차 못 지른 채 바닥에 쓰러졌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허억, 허억. 으하아.”
현덕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두 손으로 자신의 목을 문질러 보았다. 보이진 않지만 손자국이 남아 있을 게 뻔했다.
현덕은 주민을 내려다보았다.
짜증날 정도로 잘생긴 얼굴은 이런 상황에서도 멋있었다. 하얗게 질려 숨도 못 쉬고 부르르 떨고 있는 모습에서 가련미가 느껴지다니. 누구든 지금 상황에서 주민을 본다면 그 미모 때문이든, 가격당한 부위에 대한 안타까움이든 간에 주민에게 동정을 금치 못하리라.
하지만 현덕은 아니었다. 현덕은 가련한 미모 따위에 흔들리지 않았다. 어릴 적 맹덕이 해둔 세뇌 덕분이었다.
맹덕이 가라사대, 발로 까라.
현덕은 발로 주민의 명치를 정확히 가격했다.
“……!”
주민은 비명조차 못 치르고, 숨넘어가듯 정신을 잃었다.
길쭉한 팔다리가 축, 늘어졌지만 현덕의 눈에는 뵈는 것이 없었다.
“우씨, 네가 우주민이면 다야?”
현덕은 퐁퐁 솟구치는 억울함을 어쩌지 못하고, 옷소매로 두 눈을 벅벅 문질렀다.
혼자만의 망상이라고 욕해도 할 말 없지만. 그래도 혼자 슬쩍 기대했던 우주민과의 만남은 이따위 것이 아니었다.
“줄곧 고마워하고 있었는데.”
만나게 된다면 꼭 말하고 싶었다. 죽을 마음을 먹은 내게 다시 살아갈 용기를 줘서 고맙다고.
하지만 어째서인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 다시 열여섯 살이 되었다. 그러니 이젠 우주민을 만난다 해도 그런 감사의 말을 할 순 없게 됐다.
시험에 합격한 서른세 살 김현덕이 서른다섯 살 영화배우의 팬미팅이나 사인회에 찾아가 악수를 하며 말하는 건 좋은 미담이 될 수 있겠지만. 열일곱 김현덕이 열아홉 연습생 우주민에게 네가 내 생명의 은인이라 말하는 건, 정신 병력을 의심받을만한 일이었다.
그래서 상식적인 수준에서 감동적인 재회를 기대했다. 아마도 연습생일, 혹은 신인 아이돌일 우주민을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상냥하고 다정한 우주민을 만나서, 함께 연습생 생활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아주 친해지진 못해도, 그래도 오며가며 얼굴을 마주친다면 서로 아는 척할 수 있을 정도로 친해지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다 멋쩍게 헤헤, 웃고 말았던 적도 있었건만.
어째서인지 지금의 우주민은 고작 이딴 우주민이었다.
‘내가 멋대로, 인터뷰 영상 하나 보고 착각한 걸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주민에게 멱살 잡힌 목이 따끔하게 아파왔다. 그 고통을 타고, 오늘 수학 선생님의 말이 생각났다. 수학 선생님은 3이란 숫자가 이 세상에서 가장 완전하고 안정적인 숫자라고 그랬다.
삼!
현덕은 다시 한 번 발끝으로 주민의 명치를 콱 차버렸다.
세 번째 발길질을 타고, 처음 우주민을 만났을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아 놓았던 마음이 폭포처럼 넘쳐흘렀다.
“네가 그러고도 우주민이냐!”
물론, 쓰러진 자는 말이 없었다.
***
신인개발팀 사무실 내에서 일어난 두 남자 연습생의 난투극은 단번에 TE엔터테인먼트 내에 퍼졌다.
현덕은 사건이 일어난 당일, 바로 슈퍼스타가 됐다. 연습실에서건 건물 복도에서건, 마주치는 연습생들 모두가 호의 어린 시선으로 현덕을 보았다. A급 연습생 중에서는 현덕에게 악수를 청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디에서부터 부풀려진 건지, 현덕이 그 신입 연습생의 얼굴을 곤죽으로 만들어버렸다고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었다.
‘제가 곤죽으로 만든 건 얼굴이 아니라 하체의 일부분인데요. 남자에게 아주 중요한 부위이긴 하죠.’라고 사실을 정정해야 했지만.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다니기엔 현덕의 컨디션이 좋지 못했다. 주민에게 멱살 잡혔던 목이 아파 말을 하거나 침을 삼킬 때마다 따끔따끔했다.
해명을 하려면 한도 끝도 없을 테니, 현덕은 말하는 걸 포기했다. 어차피 이번 주에 있을 주간 평가 때 주민이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나면 알아서 진실이 밝혀질테니.
대신 자신의 목에 난 멱살 잡힌 흔적을 핸드폰으로 잘 찍어두었다. 목은 개목걸이를 두른 것처럼 빨갛게 부어 있었다.
현덕은 최대한 상처의 면적이 넓게 나오도록 여러 번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 그 모습을 화장실에 들른 자룡에게 들켰다.
자룡은 눈덩이처럼 불어난 소문을 듣고 여기저기 현덕을 찾아다고 있었다. 세면대 앞에 서 있는 현덕을 발견하고는 대뜸 소리를 질렀다.
“씨발!”
우렁찼다. 가히 득음의 경지에 이르렀다 할 만 했다. 현덕은 자룡의 거대한 성량에 감탄했다.
“보컬로 전향해도 되겠어요. 랩 말고 노래 불러봐요.”
현덕이 웃으며 말했다. 말하는 게 편하진 않아 중간중간 캑캑, 숨을 쉬어야 했다. 목소리도 쉬어빠진 무말랭이 같았다.
현덕의 목소리를 들은 자룡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손으로 으깬 찐 감자 같았다.
‘잘생긴 얼굴을 저렇게 망가뜨릴 수 있다니.’
현덕이 신기해하는 동안에도 자룡은 씩씩대며 화를 냈다.
“씨발아, 너는 이런 상황에서까지 농담 따먹기를 하고 싶냐?”
그러더니 현덕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아 사진 찍는 걸 도와주었다. 매우 적극적이었다. 자룡은 다양한 각도에서 멍 자국을 찍었다.
“씨발새끼, 내가 정말 가만 안 둘 거야. 그 새끼.”
“형, 이미 내가 가만 안 놔뒀어요.”
“넌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 씨발, 얼탱이 없네. 지 목 이렇게 되는 것도 모르고 가만히 당하고만 있었냐? 그 씨발새끼, 이 쬐그만 놈 건드릴 데가 어디 있다고.”
“나…… 키 큰데.”
“나보다 큰 거 아니면 입 닥치고 있어라, 씨발, 욕 나오니까.”
말은 험했지만 부리부리한 두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 모습을 보노라니 순순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넵.”
현덕은 휴지를 뽑아 자룡의 눈을 비벼주었다.
‘랩 하는 형이 눈물이 참 많네. 음악 하는 사람이라 천성이 예민한 건가.’
생김새만 보면 난 일생 동안 딱 세 번만 운다, 라고 말할 듯한 선 굵은 외모인데. 부리부리한 눈은 툭하면 눈물을 흘렸다.
나는 이 정도지만 우주민은 거짓말 좀 보태서 지금 생사를 헤매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해도 자룡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날 예정되어 있었던 저녁 시간대 보컬 수업은 취소되었다. 보컬 선생님도 소문을 들으셨는지 현덕의 목을 보고는 한숨만 푹 내쉬었다. 평소 목감기만 걸려도 프로정신이 없다고 화를 내더니, 이번만큼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현덕은 오 팀장에게 불려갔다.
또 신인개발팀 소회의실에 앉았다. 맞은편엔 오 팀장이 앉았다.
‘이제는 연습실보다 여기 회의실이 더 익숙해질 거 같아.’
현덕은 오 팀장이 준 따뜻한 물을 홀짝홀짝 마셨다. 오 팀장이 자신을 구석구석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하아-”
오 팀장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웬만한 연습생 같으면 오 팀장과 마주하는 상황 자체에 부담을 느껴 쫄았을 것이다. 잘못했다고 고개를 숙이거나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변명을 늘어 놓았을 것이고.
하지만 현덕은 그러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오 팀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목은 좀 어때, 현덕 씨.”
“네, 뭐, 그럭저럭.”
목소리가 안 나온다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말할 때마다 목이 약간씩 따끔한 정도였다. 목에 난 상처도 약을 바르고 긴 밴드를 붙여 크게 티 나지 않았다.
“다행이네. 아는지 모르겠지만 그…… 어제 현덕 씨랑 약간 트러블이 있었던 그 연습생은 의료실에 실려 갔었어. 한 세 시간쯤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고.”
“…….”
현덕은 빙긋 웃어 보였다. ‘그딴 자식 소식은 듣고 싶지 않은데.’라는 의미였다.
“병원에 가봐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상태였는데 본인이 워낙 강경하게 거절해서 병원까진 가지 않았고.”
오 팀장은 모르는 척 했다.
“그러니까 어제는 말이야, 현덕 씨.”
“상처, 찍어놨구요. 어제 야간에도 여는 병원 가서 진단서 떼어 두었습니다.”
현덕은 있지도 않은 진단서 타령을 하며 오 팀장을 얼굴을 보았다. 오 팀장이 얼굴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이번 일을 보고 받았을 때 오팀장은 가장 먼저 현덕의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는지부터 떠올렸을 것이다.
‘우주민은 내보내진 않겠다는 거네.’
현덕은 오 팀장의 태도에서 그가 우주민을 보호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연습생이 방출되는 경우는 두 가지다. 주말 평가나 월말 평가에서 계속 낮은 점수를 받을 때. 아니면 회사 내에서 분란을 일으키거나 개인적으로 사고를 친 경우. 현덕과 주민이 벌인 일은 후자에 포함되기 충분했다.
웬만한 연습생이었다면 현덕과 주민을 방출됐을 것이다. 하지만 오 팀장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현덕을 달래려 소회의실로 끌고 드어왔다.
현덕은 그게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분명 우주민 때문이리라.
‘어째서 이렇게 부드러운 태도를 보이는 걸까. 우주민이 이번에 데뷔조 구성한다는 그 6인조 남자 아이돌이 되는 건가?’
현덕은 종이컵에 남은 물을 마저 삼켰다. 물은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우주민은 배우가 되기 전에 아이돌로 활동했다고 했지. 그 아이돌 그룹이 이 아이돌 그룹인 건가?’
그렇다면 현덕은 여기서 주민의 앞길에 방해가 되선 안 된다.
생각 같아서는 물귀신 작전을 쓰고 싶었다. 주민에게 철썩 달라붙어 고소할 거라느니, 법정에서 보자느니 하면 회사에서는 주민을 데뷔조에 넣는 걸 포기할지도 모른다. 핑크키위 스캔들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최대한 안전하게 신인 아이돌을 데뷔시키고 싶을 테니 말이다.
‘그냥, 확- ……아니다.’
순간 강한 유혹이 들었지만, 현덕은 꾹 참았다.
‘싫다고 그 사람 인생까지 짓밟을 권리는 나한테 없어.’
홀리포스라는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한 후 큰 성공을 거두는 게 우주민의 삶이었다. 지금 우주민에 대한 정이 뚝 떨어졌다고 그 미래를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그 아이돌 그룹이 이 아이돌 그룹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거기까지 내가 신경 쓸 필요는 없는 거잖아. 아무튼 내가 이 우주민의 삶에만 끼어들지 않으면 되는 거지. 알아서 잘 굴러가라고.’
미련은 세 번의 발길질로 훌훌 털어버렸다. 아니, 털어버렸다고 생각했다.
“현덕 씨. 어제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전달 받았어. 명백하게, 현덕 씨 목을 조른 그 연습생 잘못이야. 현덕 씨는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현덕 씨를 혼낸다거나 어떻게 해보려고 부른 게 아니야. 그저, 현덕 씨는 워낙 어른스럽고 생각이 깊으니까, 어제 다툰 그 연습생을 이해해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부탁을 하려는 것뿐이야.”
오 팀장의 목소리는 매우 부드러웠다. 평소 연습생들 앞에서 내보이던 딱딱함은 어디에도 없었다.
“자세히 말해줄 순 없는데, 그 연습생 사정이 좀 복잡해. 좀 심각하게 안 좋은데. 그래서 현덕 씨를 좀 잘못 오해해서 이 사달이 벌어진 거 같은데 말이야.”
“그 연습생의 사정을 제게 정확히 설명해주셔야 제가 이해를 하고, 공감을 할 수 있을 텐데요.”
“그게 말이야, 워낙 개인적인 일이기도 하고. 그 연습생이 절대 남에게 말할 수 없다고 해서…….”
“그렇다면 저한테 이해를 바라시면 안 되지요.”
“현덕 씨, 그게-”
“어제 그 연습생은 저를 늙은이, 혹은 백여우란 사람들이 그 연습생을 감시하라고 이곳에 잠입시킨 게 아니냐고 따지고 물었어요.”
“아, 그건 내가 아까 그 연습생에게 충분히 설명해줬어. 오해가 풀렸을 거야. 현덕 씨가 언제 우리 회사 연습생이 되었는지 말해줬으니까-”
“저에겐 그 연습생에, 대한 어떤 말씀도, 안 하시면서, 그 연습생에게는 저와 관련된 정보를 쉽게 말씀하시는군요.”
“…….”
“그 또한 제가 불쾌감을 느낄 수 있는 부분 아닌가요?”
현덕은 차분하게 말했다.
“일을 크게 키우고 싶지 않다는 오 팀장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에 대한 제 조건은 하나입니다. 그 연습생이 직접 저에게 사과를 하는 것.”
“현덕 씨. 그건-”
“저는 진정성 있는 사과를 원합니다.”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 길게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오 팀장은 자신의 머리칼을 쥐어 뽑았다.
“아으, 내가 진짜 미치겠다. 그 연습생! 그노무 시키!”
그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현덕 씨. 잠깐 여기 좀 앉아 있어.”
오 팀장이 회의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얼마나 여기에 앉아 있으라는 걸까.’
궁금했지만 물어볼 틈이 없었다. 현덕은 뚱한 표정으로 회의실 문을 바라보았다.
‘일단 100까지만 세자. 그 안에 오 팀장님이 돌아오면 다행이지만 돌아오시지 않으면 2층 사물함에 가서 교과서를 꺼내와 복습이나 하자.’
라고 생각했건만.
괜한 생각이었다. 채 10을 세기도 전에 문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왜 사고를 쳐! 오자마자! 보안 유지를 원하면 서로 협조를 해야지. 우리만 보안을 유지하면 뭐 해, 본인이 이렇게 사고를 치고 다니는데!”
“보안 유지? 어떻게 보안 유지를 잘 하고 다녔기에 일개 연습생까지 내 이름을 알고 막 부르고 다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오 팀장과 우주민의 목소리였다.
‘최고의 방음을 자랑 한다면서?’
현덕은 유리문을 바라보았다.
닫혀 있어야 할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그 문틈을 통해 두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오 팀장은 주민을 어르고 달랬다. 연신 현덕에게 사과하라고 말했다.
주민은 현덕이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아는지 확실히 이유를 알기 전에는 그럴 수 없다고 버텼다.
오 팀장은 현덕이 너보다 반년도 훨씬 전에 이 회사와 계약을 했다고, 스파이라든가 감시자가 아니라고 단언했다. 그리고는 결국 자신을 희생했다. 기억에 분명, 회사에서 네 이름을 부르지 않은 게 분명하긴 한데. 요즘 바빠서 자신도 모르게 네 이름을 중얼거린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현덕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알기에 살짝 죄책감이 들었다.
주민의 분노가 오롯이 오 팀장에게 쏟아졌다. 자신의 상황을 까먹었냐고, 어떻게 그런 초보적인 실수를 할 수 있느냐고 싸늘하게 말했다.
오 팀장은 자신이 몇 번이고 사과할 테니까 너도 현덕에게 가서 사과하라고 말했다.
현덕은 둘의 대화를 듣다 웃어버렸다.
‘오 팀장님은 우주민이 나한테 사과하지 않을 걸 알고 있었구나. 그래서 나한테 일부러 둘이 대화 나누는 내용을 들려주고 있는 거고.’
오 팀장이 주민의 사과를 받아내 주겠다고 말로만 달랬다면 현덕은 오 팀장의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덕은 지금, 둘의 대화를 직접 들으며 오 팀장이 얼마나 노력하는 지 알게 됐다.
‘나랑 대화를 나눌 때도 이랬을 수도 있겠네.’
조금 전 오 팀장과 대화를 나눌 때 회의실 문이 열려 있었던가 생각해 보았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문이 살짝 열려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만약 회의실 밖에 주민이 서 있었다면, 그는 현덕이 주민이 생각하는 스파이 같은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지금, 주민은 현덕이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에 집착하고 있지 현덕에게 스파이니 뭐니를 말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그놈의 이름이 뭐라고, 이렇게 난리를 치는 거지?’
교통사고가 나기 전, 현덕을 비롯한 대한민국 사람들 대부분이 ‘우주민’이란 이름 석 자를 알았다. 간첩도 우주민 이름 석 자는 알 거라고들 말했다.
그런데 지금은 TE엔터테인먼트 내에서 누구도 우주민의 이름을 몰랐다. 우주민은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저렇게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고 있었다.
새삼, 십칠 년의 격차가 느껴졌다.
***
결국 주민은 현덕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현덕은 주민의 사과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신 사과하겠다는 오 팀장을 말렸다. 대신 주민을 마주칠 때마다 그의 트라우마를 자극해주었다.
현덕은 주민을 가끔 마주칠 때마다 빙긋 웃으며, 오른쪽 다리를 들어올렸다. 당장이라도 눈앞의 무언가를 까버릴 듯한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그 모습을 본 주민이 움찔, 놀라며 뒤로 물러서며 현덕은 자연스럽게 다리 운동을 하는 척했다.
그럴 때마다 주민은 치욕스러워했다. 하지만 이를 벅벅 갈면서도, 감히 현덕에게 다가오진 못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한마디만 했어도 이렇게 치사하게 놀리진 않았을 텐데.’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런 결말을 선택한 건 우주민이었다.
그렇게 현덕과 주민의 사이가 긴장감 있게 유지되는 동안 TE엔터테인먼트는 본격적으로 데뷔조 구성에 들어갔다.
자연히 연습생들의 귀가 시간이 늦어졌다. 자룡은 아예 휴학계를 내고 오전부터 새벽까지 TE엔터테인먼트 연습실에서 살았다.
그사이 현덕은 수학여행을 다녀왔다. 자룡은 조심스럽게, 수학여행을 꼭 가야 되겠냐고 말렸다. 현덕은 꼭 가야 된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연습생 생활은 힘들지만 보람 있고 재밌었다. 하지만 그 연습생 생활을 위해 고등학교 생활을 포기할 순 없었다.
TE엔터테인먼트 관계자들은 이런 현덕을 건방지다고 생각했다. 주민과 한바탕 하고 오 팀장에게 소송을 언급했던 것까지 겹쳐서. 현덕은 꽤 다루기 힘든 연습생으로 낙인찍혔다.
그 낙인은 꽤나 무거웠다. 데뷔조를 구성하기 위한 컨셉 촬영이 시작되었지만, 현덕은 단 한 번도 컨셉 사진을 찍지 못했다. 반대로 주민과 자룡은 거의 메인으로 자리를 잡고 매일같이 여기저기로 끌려 다녔다.
현덕은 언제나처럼 스케줄에 맞춰 트레이닝을 받고, 개인 연습실에서 복습을 했다. 귀가 전에는 연습 일지를 꼼꼼히 썼다. TE엔터테인먼트는 태풍처럼 휘몰아쳤지만 그 속에서 현덕은 태풍의 눈 속에 서 있는 것처럼 고요했다.
자룡은 짬이 날 때마다 현덕이 있는 개인 연습실에 놀러와 그런 현덕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너 고딩 맞아?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해탈한 것처럼 버틸 수 있는 거야?”
“전 지금 인생 2회 차거든요.”
현덕이 이렇게 대답하면 자룡은 재미없는 농담이라고 투덜거렸다.
자룡도 현덕도, 이번엔 현덕에게 가능성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룡은 자신의 일처럼 속상해하며 속 좁은 TE엔터테인먼트 직원들을 싸잡아 욕했다. 현덕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자룡을 달랬으나, 사실은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직원들에게 붙잡혀 끌려가는 자룡을 볼 때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상하기도 했다.
‘정신 차려. 분위기에 휩쓸리지 마.’
현덕은 그럴 때마다 자신을 타일렀다.
그렇게 세 달이 지났다.
새로운 남자 아이돌 그룹 데뷔조가 어찌 될지 대략 윤곽이 잡혔다. 연습생들 사이에선 대충 멤버가 누구누구일 거라는 말이 돌았다.
그 안에는 자룡과 주민도 포함되어 있었다. 둘은 컨셉 촬영에서 거의 빠진 적이 없던 터라, 모두 다른 연습생은 몰라도 이 둘은 확실하다고 말했다. 현덕도 그렇게 생각했다.
데뷔조 공식 발표가 나기 전날 밤. 현덕은 여느 때처럼 오후 10시쯤 연습을 마무리 지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룡이 있을 연습실로 갔다.
자룡은 빠른 비트에 맞춰 현란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현덕은 따라잡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현덕은 노래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높이 뛰어올랐다가 주먹으로 바닥을 치는 퍼포먼스를 마지막으로 노래가 끝났다. 현덕은 물개박수를 치며 자룡에게 다가갔다.
“왔어? 말을 하지.”
자룡이 연습실에 대자로 누워 현덕에게 손을 흔들었다.
현덕은 가방에서 물통을 꺼내 자룡에게 주었다. 자룡은 마시는 건지 얼굴에 뿌리는 건지 모르게 물을 마셨다.
“형, 집 안 가요?”
“내일 발표 나잖아. 겁나 떨려서, 씨발, 도저히 집에 못 가겠어. 그래서 걍 여기 연습실에서 밤새 연습하겠다고 신청해놨어.”
“밤새려고요?”
“그냥 조금만 더 연습하다가 저기서 자게.”
자룡이 손끝으로 연습실 구석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침낭이 서너 개 뭉쳐 있었다.
“그러지 말고 집에 가요. 오늘 같은 날은 그냥 일찍 가서 씻고 푹 자는 게 낫지 않나요? 나랑 같이 집에 가요.”
현덕이 자룡의 손을 잡아당겼다. 자룡을 질질 끌어 일으키려 했지만, 체급 차를 극복할 수 없었다. 자룡은 현덕이 잡아당기는 대로 조금 움직이는 척하다가 낄낄대며 웃었다.
“이 정도 힘으로 그 자식을 반 죽일 뻔했다고? 암만 생각해도 겁나 웃겨.”
“지난 일은 잊어버립시다, 우리.”
현덕은 자룡의 손을 확 놔버렸다.
“으악!”
자룡은 엄살을 부리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현덕은 빈 물병을 가방에 집어넣으며, 자룡을 보았다.
몇 시간씩 연습한 건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머리카락은 착 가라앉아 얼굴에 붙어 있었다. 요 몇 달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얼굴 살도 쪽 빠져 있었다.
현덕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커다란 연습실은 후끈했다. 자룡의 열기였다. 이런 열정을 가진 사람이 성공하지 못할 리 없다. 현덕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형은 꼭 될 거예요.”
“말만으로도 고맙네, 씨발. 진짜 그랬으면 좋겠어.”
대답하는 목소리는 가볍고 유쾌했다. 하지만 목소리에서 초조한 마음이 묻어났다.
현덕은 그것들을 모른 척했다.
“미리 축하할게요, 형. 나 내일 좀 늦게 올 수 있어서.”
“학교?”
“응. 그러니까 미리 축하해요. 데뷔조 든 거 축하합니다!”
“으아, 씨발. 네 축하 받으니까 갑자기 더 떨리기 시작했어.”
자룡이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래, 나 갈 테니까. 밤새 그렇게 굴러다녀요!”
“벌써 가냐? 씨발, 나 존나 떨리게 만들어 놓고 그냥 가? 진짜 가냐?”
“네, 진짜 갑니다.”
현덕은 자룡의 배웅을 받으며 가벼운 마음으로 TE엔터테인먼트를 나섰다.
조금도 걱정되지 않았다. 자룡은 주간 평가와 월별 평가에서 항상 1, 2등을 다퉜다. 이번 데뷔조 선발을 위한 컨셉 촬영에선 석 달 내내 참여하여 센터에도 곧잘 섰다. 이보다 확실한 지표가 어디 있을까.
현덕은 내일 데뷔조 발표에 자룡이 포함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마음 편히 웃었다.
***
다음 날.
현덕은 평소보다 두어 시간 늦게 TE엔터테인먼트에 도착했다.
건물 입구에 들어서는데, 누군가 현덕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쳤다. 현덕은 자신보다 큰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반은 까맣고 반은 녹색인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자룡 형?”
자룡은 현덕을 못 본 듯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비척비척 걷는 모습이 좀비 같았다.
언 듯 본 자룡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무엇보다 눈. 눈이 평소와 달랐다. 자룡 특유의 에너지가 담겨 있지 않았다. 끓어 넘치는 열정으로 주변 사람들까지 기운나게 만드는 눈이 아니었다. 타오르는 불길에 찬물을 끼얹은 듯, 다 타버린. 텅 빈 느낌의 눈이었다.
마치 자살을 결심했던 스물여덟 살의 김현덕 같았다. 지치고 지쳐 모든 걸 다 내려놓으려 했던 그 때.
“……!”
현덕은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1층 로비에 남자 연습생들이 몰려 있었다. 몇몇은 환호성을 지르며 서로 얼싸안고 있었다. 몇몇은 울거나, 바닥에 주저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현덕은 연습생들을 헤치고 게시판 앞에 섰다. 데뷔조 발표 공고문에 연습생 여섯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모두 다 익숙한 이름이었다. 한 이름은 낯설었는데 옆에 (가명)이라고 붙어 있었다. 우주민인 것 같았다.
그런데 여섯 개의 이름 중에 ‘박자룡’이 없었다.
박자룡.
이렇게 선명하게 쓰여 있어야 했는데.
없었다.
“……설마!”
현덕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자룡이 형! 박자룡!”
현덕은 건물 밖으로 뛰어나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녹색 머리, 녹색 머리를 찾아야 했다.
저 앞에서 녹색 머리가 보였다. 자룡은 택시를 타고 있었다.
“자룡 형! 야, 박자룡!”
자룡을 붙잡기 위해 뛰었지만 한 발 늦었다. 자룡을 태운 택시가 떠났다.
갑자기 눈앞이 새까매졌다.
‘안 돼, 정신 차려. 빨리 자룡이 형을 따라가야 된다고!’
뒤따라서 택시를 잡고, 쫓아가 달라고 말해서 쫓아가야 하는데. 말려야 하는데. 몸이 돌이 된 것같이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무력감이. 스물여덟 살 때 느꼈던 그 새까만 감정이 어디선가 터져 나왔다.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지만 도무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냐, 아냐. 나랑 다를 거야.’
현덕은 고개를 저었다.
‘설마, 설마, 그럴 리 없어. 나쁜 생각을 할 리가 없어. 지금까지 몇 번이고 데뷔가 무산됐어도, 단 한 번도 그런 생각 한 적 없다고 그랬어.’
손발이 덜덜 떨렸다.
‘데뷔하고 싶다는 열정 빼면 시체인 형인데, 그럴 리 없어. 나쁜 생각을 할 리가 없어. 나랑은 다르니까. 그때의 나랑은 달리, 재능 있고 성실하고 멋진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현덕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왜 아닐 거라고 생각해? 봤잖아, 그 눈. 네가 그때 그런 눈을 하고 있지 않았어?’
마음속에서 문득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안 돼. 빌어먹을. 안 된다고!”
아니라고 부인하는데도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현덕은 그 자리에 쓰러져 주먹으로 땅바닥을 쳤다. 아스팔트에 손등이 까졌지만, 아프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아아악!”
현덕은 바닥에 머리를 박고 소리를 질렀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헤어 나올 수 없는 랙에 걸린 것 같았다. 바이러스에 걸려 부팅조차 안 되는 컴퓨터가 된 느낌이었다.
생각하기를 멈춘 현덕을 흔들어 깨운 건, 지금 이 순간 제일 듣기 싫은 사람의 목소리였다.
“야, 너 뭐 하냐?”
순간, 눈앞이 환해졌다.
“……?”
현덕이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우주민이 있었다. 온통 까만 오토바이 위에 올라탄 채였다. 방금 도착한 건지 막 헬멧을 벗은 채, 현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젠 미치기까지 했나 보지? 미치려면 혼자 조용한 데서 곱게 미칠 것이지 남들 다 있는 곳에서 뭐 하는 짓이야. 혹시 남의 관심이 그리워서 쇼하는 거라면, 관람 값을 주면 되는 건가?”
정말 100원짜리 동전이라도 던져주려는 건지 재킷의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지금 이 순간, 거짓말처럼 눈앞에 나타나준 게 고마웠다. 주민의 말대로 미쳐버릴 것처럼 고마웠다.
“우주민!”
현덕은 용수철처럼 튕기듯 일어섰다.
“내 이름, 하-”
주민의 얼굴에 짜증이 들불처럼 일었다. 그 불길이 현덕에게 향하기 전 현덕의 두 손이 그를 붙들었다.
“살려줘!”
현덕은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의 멱살이 구원의 동아줄인 듯 붙잡고 매달렸다.
“나 좀 살려줘. 제발!”
현덕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살다가 힘든 일이 생기면 누구든 한 번쯤 생각해 보게 된다.
‘살아서 뭐 하나, 그냥 죽을까.’
친구들과 대화하다가도 입버릇처럼 한 번쯤 말하게 된다. 하지만 정말 죽고 싶을 땐 그런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죽을 수 있는 장소를 찾아 그곳으로 갔다. 그때 현덕이 그랬다.
생각만으로도 몸이 떨릴 정도로 끔찍했다.
그 고비를 어떻게 넘기고 살 수 있었을까. 돌이켜 생각하면 스스로가 대견하고 신기할 정도였다.
그런데 자룡이 그날의 자신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냄새가 났다. 비루먹은 당나귀는 십 리 밖에서도 서로의 존재를 알아챈다고 한다. 현덕은 본능적으로 그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스물여덟의 그때도, 열일곱의 지금도, 현덕의 앞에 주민이 나타났다.
‘아냐. 달라.’
현덕은 주민을 붙잡고 매달린 그 순간 정신을 차렸다.
스물여덟에 봤던 우주민과 열일곱의 지금 만난 우주민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스물여덟에 봤던 우주민은 현덕에게 삶을 지탱할 힘을 주었다. 그렇다면 열일곱에 만난 우주민은?
냉소와 비난을 던질 것이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혔다.
“…….”
현덕은 숨이 닿을 만큼 가깝게 마주한 주민의 얼굴을 보았다.
이렇게 똑같이 생겼는데. 분명 같은 사람인데. 어째서 우주민이면서 우주민이 아닌 걸까.
울컥, 이유 모를 설움이 몰려들었다. 이 우주민이 그 우주민이 아니라는 게 왜 이리도 서글픈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신 차려. 김현덕. 빨리, 박자룡을 쫓아가야 돼.’
현덕은 이를 악물고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뒤로 물러서며 주민의 멱살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그때 주민이 현덕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치켜 올라간 눈이 현덕을 노려보듯 바라보았다.
“똑똑한 김현덕 연습생이 이렇게 나올 정도면 보통 일이 아닐 텐데. 쓸데없는 일에 요란 떠는 떨거지는 아니잖아?”
주민이 현덕의 손목을 움켜쥐고 잡아당겼다. 현덕은 휘청 하며, 주민 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주민의 까만 눈동자에 현덕이 비쳤다.
“말해.”
귓가에 와 닿는 강압적인 목소리에 현덕은 저도 모르게, 다시 주민의 라이더 재킷을 붙잡았다.
“자룡 형이, 데뷔조 못 든 거 보고 아무래도 자살하려고 그러는 거 같아. 따라가서 붙잡아야 돼.”
“어디로 간 건지는 알아?”
주민이 물었다. 현덕이 대답하려 입을 여는데, 헬멧이 쑥- 현덕의 얼굴을 덮었다.
“일단 타.”
주민이 한 손으로 현덕을 끌어 올렸다. 현덕은 종이인형처럼 가볍게 들렸다.
헬멧을 쓰고 보는 세상은 온통 회색빛이었다.
“그 대파머리, 어디로 갔어?”
“일단 택시를 탄 것만 봤어. 저 대로로 나갔으니까-”
현덕의 말이 끝나기도 오토바이가 움직였다. 현덕은 두 손으로 주민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오토바이가 대로 위를 달렸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한강다리 아니면 형 자취집으로 가는 쪽에 있는 대교, 둘 중 하나일 거야.”
현덕은 헬멧 바이저를 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판단이었다.
지금 있는 장소에서 가장 가까운 한강다리, 아니라면 평소 오가며 가장 익숙한 거리 어느 곳.
주민이 길을 안다고 소리치자, 현덕은 핸드폰으로 119에 신고를 했다. 119는 바로 출동하겠다며 현덕을 안심시켰다.
오토바이는 빠른 속도로 달렸다. 달리는 차 사이사이를 곡예 하듯 빠져 나갔다. 커다란 버스나 택시가 빵빵- 클랙슨을 울렸다. 하지만 현덕이나 주민이나 개의치 않았다.
일단 회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한강 다리로 갔다. 다리 끝에 도착하자마자 현덕은 목이 터져라 자룡을 불렀다.
“박자룡! 자룡 형! 어디 있어요, 형!”
현덕이 오토바이에서 뛰어내리려 하자 주민이 현덕을 붙잡았다.
“가만있어. 오토바이로 달리면서 보는 게 빨라.”
단단한 팔은 버둥거리는 현덕을 놓치지 않았다.
주민은 속도를 늦추고 다리 위를 지났다. 현덕은 오른쪽을, 주민은 왼쪽을 바라봤다.
보도 위로 걷는 젊은 남자를 볼 때마다 현덕의 몸이 꿈틀댔다. 하지만 다리를 건널 때까지 녹색 머리는 보이지 않았다.
“다음 장소로 가자.”
주민은 현덕의 헬멧 바이저를 내려주고 다시 속도를 올렸다. 현덕은 주민의 등에 바짝 붙었다.
“제발, 제발, 제발.”
그 숨소리가 고스란히 주민에게 닿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주문처럼 단 하나의 단어만을 되뇌었다.
도로는 붐볐다. 주민은 그 붐비는 도로 위를 귀신같이 달렸다. 갓길로 벗어나거나 때론 위험하게 차와 차 사이를 끼어들며 달렸다.
둘은 곧 자룡의 자취집으로 가기 위해 건너야 한다는 대교에 도착했다. 자룡이 몇 번이고 말했던 장소였다. 연습이 끝나면 밤늦게, 버스 막차를 타고 이 대교 위를 지난다고 했다.
검게 일렁이는 한강 위로 화려한 도시의 야경이 펼쳐지는 걸 보면 정말 오늘 하루가 끝났구나, 실감하게 된다고. 자룡은 웃으며 말했다.
자룡은 TE엔터테인먼트 연습생으로 합격한 후 혼자 상경했다. 연습생 생활을 하며 서울 어디 유명한 관광지에 가본 적도 없다고 했다.
그런 서울 촌놈에게는 밤에 버스 위에서 보는 그 풍경이 가장 아름답다고 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63빌딩이나 남산에 올라가 서울 야경을 제대로 구경해 보고 싶다고도 했다.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오후.
자룡은 늘 야경으로만 지나쳤던 대교 위에 서 있었다.
현덕과 주민은 동시에 자룡을 발견했다.
자룡은 허리까지 올라온 난간을 두 손으로 잡고 있었다. 하염없이 한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형! 박자룡!”
현덕이 소리쳤다.
주민은 급히 속도를 줄였다. 현덕은 오토바이가 멈추기도 전에 뛰어내렸다가 데굴데굴 바닥을 굴렀다. 온몸이 차가운 시멘트바닥에 쓸렸지만, 아파할 새도 없이 발딱 일어났다.
가까이 다가가자 자룡의 얼굴이 자세히 보였다. 자룡은 한강을 보며 울고 있었다. 현덕은 자룡이 우는 걸 꽤 여러 번 봤지만, 지금처럼 울고 있는 건 본 적이 없었다.
자룡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담담하다거나 차분하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지치고 지친 얼굴이었다. 자룡은 그런 얼굴로 혼자 울고 있었다.
자룡과 처음 대화하고 통성명을 했던 그 날도 자룡은 울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그때의 자룡은 억울하고 화가 나고 분해서 엉엉 울었다. 그건 살아있는 울음이었다.
지금의 자룡은 그때 보았던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저 지쳐 보였다. 너무도 지쳐 보였다.
“……현덕아.”
자룡이 고개를 돌려 현덕과 주민 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강바람에 질려 있었다.
현덕은 자룡에게 달려가려 했다.
“오지 마.”
자룡이 손을 뻗어 현덕을 제지했다. 현덕이 무시하고 한 발, 내딛자 자룡은 바로 제 상체를 난간 밖으로 들이밀었다.
“형!”
“다가오지 말아줄래.”
자룡이 부탁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현덕은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당장이라도 자룡에게 뛰어가 자룡을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보다 자룡의 몸놀림이 재빠르다는 걸 알고 있기에, 차마 움직일 수 없었다.
“자룡 형, 이건 아니에요.”
현덕은 애타는 마음을 가다듬고 최대한 평온하게 말하려고 애썼다.
“형, 하지 마요. 지금 무슨 생각 하든지, 그건 아무튼 아니에요. 그러면 안 돼요.”
“……이런 모습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그냥 모른 척 해주지.”
자룡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형이라면 날 모른 척했겠어요? 아니잖아요.”
“그런가.”
자조하듯 웃는 얼굴엔 피로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얼굴에 드리운 짙은 그림자는 고작 이십대 초반의 청년이 가질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 고단한 모습에 현덕은 울컥 울음이 치솟았다. 현덕은 그 울음을 억지로 삼키며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다.
“미안. 내가 너무 지쳤어.”
“그래도 이건 아니에요. 형도 알잖아요.”
“…….”
자룡이 다시 한강을 바라보았다. 그 틈을 타 자룡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했으나 자룡은 손을 들어 그런 현덕을 막았다.
“지금 나 못 본 거로 하고 지나쳐 달라고 하면 ……안 해줄 거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죽으면 안 된다고, 괜찮다고, 아직 젊지 않냐고. 다음에 꼭 좋은 기회가 있을 거라고. 이런 망할 회사 따위 때려치우고 너의 가능성과 재능, 실력을 알아봐주는 다른 회사로 가자고. 나도 같이 가겠다고. 아니면, 회사에 항의해보자고 뭔가 발표에 오류가 있었던 거 같다고. 네가 대뷔조에서 빠질 리 없지 않느냐고.
하지만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현덕이 품고 있는 말들은 눈앞에 서 있는 자룡이 담고 있는 절망감에 비하면 하찮기 그지없었다.
십삼 년, 법을 공부했다. 삼십삼 년을 살았고 다시 거기에 삶을 더하여 산 지 일 년 남짓.
싸가지 없게 구는 우주민을 발로 까고, 오 팀장에게 소송 어쩌고저쩌고 떠들어댔다. 그렇게 잘난 척하며 살아왔는데, 정작 이 위태롭게 중요한 상황에선 말 한마디도 감히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되지? 무슨 말을 해야 되는 거지?’
무슨 말을 해도, 어떻게 말해도, 자룡에게 닿지 않을 게 분명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현덕은 알 수 있었다. 옛날에, 현덕이 바로 그랬으니까.
입 밖으로 나가는 위로와 격려는 가볍다. 말하는 사람의 마음을 다 담지도 못하면서, 듣는 사람의 마음을 다 움직여 주지도 못한다. 그걸 알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자룡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하긴요, 형.”
비명처럼 내지른 말에,
“그냥 죽어.”
등 뒤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현덕은 큰 칼에 찔린 것처럼 등골이 서늘해졌다.
“우주민!”
현덕은 비명을 지르듯 소리치며 뒤를 돌아보았다.
주민은 오토바이를 도보 위에 세우고는 삐딱하게 서 있었다. 헬멧 없이 바람을 맞아서 그런지 코끝과 양 뺨이 살짝 붉었다.
“뭘 망설여? 그냥 지금 바로 뛰어내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입 닥쳐.”
“왜?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입 닥치라고!”
현덕은 당장이라도 주민에게 달려갈 듯 발을 굴렀다. 자룡만 아니었다면, 세 번이 아니라 삼백 번이고 삼천 번이고 주민을 깠을 것이다.
“싫은데?”
주민은 자룡을 신경 쓰느라 자신에게 다가오지 못하는 현덕을 보며 삐딱하게 웃었다. 상대방 성질 긁기 딱 좋은 웃음이었다.
“거기 대파머리. 잘 봐, 쟤 보이지?”
주민이 팔짱을 낀 채 턱으로 현덕을 가리켰다.
“평가 때마다 보니까 서로 붙어 앉아서 죽고 못 살던데. 꽤 친한 거 아냐? 그러니까 잘 알지? 쟤가 날 얼마나 싫어하는지.”
“…….”
자룡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평소에 날 보면 못 죽여서 안달 난 쟤가 오늘 어쨌는지 알아? 거기 너, 대파머리 잘못될까 봐 겁나서 나한테 살려달라고 매달렸어. 싹싹 빌더라고, 제발 너 좀 살려달라고.”
“우주민!”
“오, 내 이름을 부르다니.”
주민은 연극을 하듯 과장되게, 양손을 벌려 놀란 척을 했다.
“더욱더 마음껏 말하라고 내 성질을 더 돋워주네. 고마워, 김현덕 연습생,”
그리고는 다시 자룡에게 말했다.
“그 꼴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대파머리 너도 봤어야 했는데 말야. 아주 속이 다 시원해지더라고. 저 쪼그만 게 나 한 번 까고는 기고만장해져서는 나댔잖아. 그런 주제에 오늘은 아주 사정사정을 하더라고. 무릎까지 꿇고 빌 기세였는데, 내가 착해서 그것까진 못 봤지. 아, 새삼 아쉽네.”
주민이 현덕을 보며 검지를 까딱였다.
“지금 해볼래? 내 덕에 아직 살아 있는 저 대파머리 봤잖아. 죽기 전에 인사할 시간 만들어줬으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나한테 무릎 꿇고 고맙다고 해.”
“현덕이한테 함부로 말하지 마!”
자룡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
“……뭐?”
“뭔 상관이야? 이제 죽을 거면서?”
“…….”
주민이 환히 웃으며 자룡에게 손짓했다.
“지금 당장 죽어 봐. 널 걱정해서 여기까지 달려온 쟤 앞에서.”
“…….”
“넌 죽으면 그만이지만 쟨 널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갖혀 살겠지. 딱 봐도 허약하게 생겼는데, 밤에 잠은 제대로 자려나? 아, 당연히 아이돌 연습생 활동은 포기하겠지. 어떻게 계속 할 수 있겠어?”
“……!”
자룡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할 수 있으면 해 봐. 왜? 못 하겠어? 도와줘?”
주민이 팔짱을 풀고 자룡에게 걸어갔다. 정말로, 제 손으로 자룡을 잊어버리려는 듯했다.
“하지 마. 그러지 마!”
현덕은 주민에게 달려들었다.
주민은 현덕이 잡아끄는 대로 걸음을 멈춰 섰다. 제 허리를 끌어 안고 끙끙대는 현덕을 손가락으로 현덕을 가리키며 자룡에게 물었다.
“보여? 얘 지금 이러는 거 보이냐고. 이런 애가 보는 앞에서 죽을 수 있겠어? 정말로?”
“…….”
자룡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필사적으로 자신을 말리려는 현덕이 안 보일 리 없었다. 고마웠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비참했다.
죽자고 생각하고 TE엔터테인먼트 건물을 나와 택시를 잡아 탈 때도. 의심스러워하는 택시기사에게 속이 안 좋아 좀 걷고 싶다고 말하며 대교 중간에 내렸을 때도. 대교 난간을 붙잡고 한강을 내려다볼 때에도. 이제 죽자고 생각해 난간 밖으로 몸을 내밀 때에도. 단 한순간도 두렵지 않았다. 그저 피곤했다.
‘이젠 됐어. 지쳤어. 더 하고 싶지 않아.’
이유는 이걸로 충분했다.
그랬는데.
그랬건만.
이제 와서야 몸이 떨렸다. 심장이 무언가에 죄이듯 아팠다.
텅 빈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아까와 달리 이번 눈물은 뜨거웠다.
“……나보고 어쩌라고.”
자룡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형. 제발요.”
현덕은 주민을 놓고 자룡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넌 정말 최악이구나, 대파머리.”
주민은 피식, 웃었다.
“우주민!”
현덕은 바로 몸을 돌려 주민에게 주먹을 날렸다. 정확히 주민의 명치를 노린 일격이었다.
“어이쿠, 무서워라.”
주민은 한 걸음 뒤로 크게 물러서며, 아주 쉽게 현덕의 공격을 피했다. 현덕은 중심을 잃고 크게 비틀거리다가 넘어졌다. 머리 위에서 주민이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대파머리, 얘 봐. 이렇게 까부는 거. 비쩍 말라서 비리비리해 보이는 게 힘도 좋아. 원래 무식하면 용감하다던데. 얘가 딱 그런 케이스 아냐?”
주민이 현덕을 손가락질하며 자룡에게 물었다.
“얘 이번에 데뷔조에 못 들었잖아. 아니, 아예 데뷔조에 뽑힐 기회조차 없었지. 왜 그랬는지 알아? 나 때문이야.”
“뭐?”
자룡의 눈이 커졌다.
“내가 수를 좀 썼지. 얘가 아무래도 내가 데뷔하는 데 방해될 거 같아서 말이야. 얠 좀 긁었어. 그러니까 바로 반응하더라고. 신인개발팀 사무실에서 날 까더라고. 그래서 내가 어쨌게? 그냥 맞아줬지. 그러니까 오 팀장이 내 말 듣고 얠 바로 아웃시키더라고.”
“너…… 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어떻게 현덕이한테!”
“넌 그렇게 말할 자격 없어, 대파머리. 얜 그래도 날 까기라고 했어. 그 이후에도 나만 보면 으르렁대면서 까불기라도 했다고. 그런데 넌 뭐냐? 얘만도 못해. 나 때문에 데뷔 무산 됐는데, 날 한 대 치러 오기는커녕 바로 죽을 생각부터 하고 있잖아? 그 정도 근성이면 어차피 넌 데뷔조 들어도 데뷔 못 해. 괜히 TE엔터테인먼트 돈이나 축내지 말고 그냥 죽어.”
“너, 지금 뭐라고……?”
“뭐? 나 때문에 너 데뷔 못 했다는 거? 설마- 진짜 몰랐던 거야?”
주민이 놀랍다는 듯 오버 액션을 취했다.
“얘 말고 너도 내가 넘어뜨린 거야. 내가 오 팀장한테 가서 그랬거든. 너 마음에 안 든다고. 너 데뷔조 들면 내가 나가겠다고. 그랬더니 오 팀장이 너 데뷔조에서 빼더라?”
“너, 지금 그, 말, 무슨 뜻…….”
“놀라긴. 다시 말해줘? 나 때문에 너 데뷔 못 한 거라고.”
주민은 자룡을 놀리듯 또박또박- 천천히 말했다.
“야! 이 씨발아.”
자룡이 주민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날렸다. 퍽 소리가 났다. 주민이 얻어맞고는 그 힘을 이기지 못해 뒤로 물러섰다.
“용서 못 해! 절대로 용서 못 해!”
자룡은 씩씩대며 다시 주민에게 달려들었다.
“김현덕, 쟤 붙잡아.”
주민의 목소리는 뜻밖에도 건조했다. 방금 전 자룡을 비웃던 목소리와는 완전히 달랐다.
“어, 어?”
현덕은 얼결에 자룡을 껴안았다.
“자룡 형, 형! 진정해요.”
자룡을 껴안고 밀며, 자룡을 주민에게서 떨어뜨려 놓았다. 그러자 주민이 일어나 주먹으로 자룡이 얼굴을 쳤다.
또 퍽- 소리가 났다. 조금 전 자룡이 주민을 쳤을 때보다 훨씬 셌다. 졸지에 주민의 공범이 된 현덕이 식겁할 정도였다.
자룡의 얼굴이 옆으로 홱 돌아갔다.
“형!”
현덕은 자신을 향해 쓰러지는 자룡을 감당하지 못했다. 천천히 땅바닥에 내려놓는 게 최선이었다.
현덕은 자룡의 상체만 끌어안은 채로 고개를 들어 주민을 보았다.
퉷-
주민은 피 섞인 침을 뱉으며, 자룡에게 맞아 터진 입가를 손으로 문질렀다. 그러다 현덕의 시선을 알아채고는 피식, 웃어 보였다.
“난 맞으면 꼭 갚아주거든.”
그 말이 천둥처럼 현덕의 귓가에 꽂혔다.
어느새 하늘을 붉게 물들인 노을이 주민의 얼굴에도 비추고 있었다.
한적한 대교 위에 선 주민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하지만 현덕은 그런 그의 외모를 감상할 여유도, 자룡을 구해줘 고맙다고 감사 인사를 할 틈도 없었다.
‘……난 그때 세 대나 때렸는데.’
수학 선생님 말 듣지 말고 그냥 한 대만 깔걸.
***
자룡이 기절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경찰차가 도착했다. 현덕과 주민이 미처 알아채지 못했지만, 이미 대교 아래에는 119 대원들이 도착해 있었다.
한강변에는 119 구급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119 구급차가 대교 위로 올라와 자룡을 실었다. 현덕과 주민도 구급차에 함께 탔다.
구급차에서, 그리고 병원에서 자룡은 여러 번 검사를 받았다. 한쪽 뺨이 심하게 부풀어 오르고 입안이 터져 피가 차 있는 걸 빼면.
자룡은 진료 중 잠들었고, 간호사는 대체 누가 이랬냐고 물었다. 주민은 못들은 척했고 현덕은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경찰들은 현덕에게 자룡의 보호자 연락처를 물었다. 현덕은 자룡의 부모님 연락처를 몰라서 TE엔터테인먼트 오 팀장의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경찰들이 전화 통화를 하러 밖으로 나간 새 현덕과 주민은 자룡의 곁을 지켰다. 간호사는 환자를 깨우지 말고 놔두라고 당부하고는 침대 주변을 빙 둘러 커튼을 쳐줬다.
병원 침대에 누운 자룡은 편안해 보였다. 감긴 두 눈이 여전히 절망감에 차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현덕은 일단 자룡을 구했다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현덕은 밖으로 툭, 나와 있는 자룡의 손을 잡았다.
자룡의 손은 크고, 상처가 많았다. 여기저기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기획사 연습생 생활을 하며 춤을 배운 손이었다. 툭하면 삐고, 부러지고, 긁혔던.
평생 판사로서 살아오신 아버지와 웹툰 작가가 되겠다고 그림을 그렸던 형의 손은 하얗고 부드러운 편이었다. 중지의 옆 부분에 굳은살이 있지만, 자룡의 손에 비하면 턱없이 고운 손이었다. 그래서 현덕은 자룡의 손을 볼 때마다 감탄했다.
자룡의 손은 언제나 크고 강해 보였다. 현덕은 단단한 손을 가진 자룡의 강한 의지와 열정이 부러웠다.
그런데 오늘, 그 손이 떨리는 것을 봤다. 눈에 보일 정도로 덜덜 떨며 지치고 지친 모습을 드러냈던 자룡을 봤다.
그리고.
‘떨고 있었어.’
현덕은 옆을 바라보았다.
주민은 벽에 삐딱하게 기대서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로 위에서 주민이 자룡에게 다가갈 때. 현덕은 그가 자룡의 멱살을 잡고 다리 아래로 밀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싸가지 없어도 그렇게까지 막나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지금에야 할 수 있었다.
그 당시에는 정말로 주민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허리를 붙잡고 말렸다. 그때 현덕은 주민의 몸이 떨고 있는 걸 알았다. 자룡만큼 주민도 떨고 있었다.
현덕은 자신의 빈손을 보며, 가만히 주먹을 쥐어 보았다. 주민의 허리를 껴안았을 때의 감촉이 아직도 손바닥에 남아 있었다.
자룡의 떨림은 굳이 닿지 않아도, 눈으로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절박한 것이었다. 그건 일종의 구호 요청이었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음에도, 그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서도 포기할 수 없는 한 가닥 생의 의지였다.
주민의 떨림은 자룡처럼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격렬했다. 제 안으로 모든 감정을 꾹꾹 내리눌러 담고는 그 압박을 견디지 못해 몸부림치는 듯 했다. 그 격렬함에 놀라서 현덕은 몇 번이고 제가 끌어안고 있는 사람이 그 우주민이 맞는지 다시 쳐다보고 확인하였다.
‘왜 그렇게 떨고 있었던 걸까.’
현덕은 주민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덕은 주민의 시선을 잡기 위해 재킷을 잡아당겼다. 주민이 미간을 찌푸리며 현덕을 내려다보았다.
‘감히 내 옷을 왜 만지냐는 의미는 아니겠지.’
살짝 기분이 상했지만, 재킷을 잡아 당기던 때의 초심을 잃지는 않았다. 김현덕은 고마움을 아는 동방예의지국의 고등학생이니까.
“고마워.”
“김현덕 연습생. 말이 좀 짧은 거 같은데.”
주민은 다른 의미로 동방예의지국의 싸가지였다.
현덕은 아차 싶었다.
서른세 살에서 열여섯 살로 돌아온 뒤, 가장 힘든 게 말투였다. 열여섯 살, 열일곱 살이 되었음에도 속은 여전히 서른세 살의 김현덕이기에 가끔 이렇게 말실수를 했다. 그나마 아무에게나 말을 트고 편히 말하는 성격이 아니어서 실수가 많진 않았다. 마음속으로 내내 싸가지라고 생각했던 주민을 마주하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말이 짧아졌다.
“정신이 없어서, 실수를 했네요. 미안해요.”
“원래 생각 없이 내뱉는 말이 진심을 드러낼 때가 많지.”
주민은 웃으며 고개를 까닥였다.
“정신이 없으면 아무한테나 반말하고 그러나 보네. 착하고 예의 바르다고 칭찬이 자자하던데, 아닌가 봐. 내숭 떠는 타입?”
“…….”
‘이 사람의 머릿속엔 사람이 사과하면 받아주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는 걸까.’
주민에게 사과를 하는 족족 좋은 소리를 들어본 경험이 없었던 현덕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저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재앙의 주둥이.
현덕으로서는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인간상이었다.
말이 험하면 험하고 말 것이지. 인성이 더러우면 인성이 더럽고 말 것이지. 싸가지가 없으면 싸가지가 없고 말 것이지. 말이 험한 주제에 인성까지 더러운 듯하고 게다가 싸가지까지 없다니.
“그쪽이야 말로요. 머리는 어깨 위가 허전해서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줄 알았는데, 생각이란 것도 할 줄 아나 보네요.”
현덕은 웃음이 사라지려는 얼굴에 힘을 주어 억지로 웃었다. 주민은 어디 한 번 계속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저 잘생긴 얼굴이 저렇게 싸가지 없게 보일 수 있다니.’
현덕은 감탄하였다.
“생판 모르는 남한테 스파이니, 백여우 부하니 뭐니 미친 소리만 해대는 사람인 줄 알았거든요. 제대로 사과할 줄도 모르는 거 같았고.”
“난 또 무슨 소리를 하나 했네. 그-”
“그래도 오늘 고마웠어요.”
현덕은 뭔가 말하려는 주민의 말을 끊고 다시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주민의 얼굴에서 싸가지 없는 미소가 삐끗, 어긋났다.
“뭐가?”
“자룡이 형 뛰어내리지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 말 한 거죠.”
“왜 그렇게 생각해? 나랑 신인개발팀에서 붙고 나서 너 데뷔조 들어갈 기회조차 없었잖아?”
“물론 그쪽이랑 있었던 일 때문에 좀 마이너스 됐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었을 거예요. 주간 평가나 월말 평가 점수를 생각해보면, 난 중상위권이긴 했지만 데뷔조에 들 만한 성적이 아니기도 했고. 데뷔조 컨셉에도 딱히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물론 작년에 연습생이 되자마자 데뷔조 컨셉 사진을 찍을 때도 그 컨셉이 자신과 어울린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리고 이건 분명히 하죠.”
현덕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며 주민과의 사이를 벌렸다.
“우린 한판 싸우고 만 게 아니었어요. 당신의 절도죄와 무례한 인신공격에 대한 대가로 내가 당신을 응징한 겁니다. 이를테면 벌금을 안 내거나 못 내는 사람들이 일정량의 노동으로 그 벌금을 대신하는 것과 같은 거죠.”
현덕은 한 발자국 더 물러섰다. 자연스럽게 움직인다고 움직였으나 물러서는 한 발자국의 보폭이 너무 컸다. 그런 현덕을 가만히 바라보던 주민이 피식, 웃었다.
“왜? 내가 너 칠까 봐? 아까 대파 머리가 맞는 거 보니까 겁이 나나 보지?”
주민이 한 발자국, 현덕에게 다가섰다.
“그 한 대가 꽤 강력했는데 말이야.”
“그러니까 그때 당신이 나한테 까였던 건-”
현덕은 얼른 한 발자국 더 뒤로 물러섰다.
‘쓰러진 뒤에 두 대 더 발로 찬 건 기억 못 하고 있구나.’
나름 희소식이었다. 덕분에 잔뜩 굳어 삐걱대던 어깨가 조금 가벼워졌다. 3년 구형보다는 1년 구형이 집행유예로 풀려날 가능성이 월등히 크니까.
현덕의 안색이 밝아지자 주민은 기분 나빠했다.
“무슨 생각이지?”
한 발자국. 주민이 현덕에게 걸어왔다.
“나한테 고작 ‘한 번’ 까인 거로 탕감해주기엔 내가 받은 정신적 고통이 너무 큰 게 아닐까, 하는 생각?”
현덕은 ‘한 번’이라고 강조하여 말하고는 다시 한 발자국 물러섰다.
등 뒤에 살랑대는 감촉이 느껴졌다. 간호사가 자룡이 누운 침대 주변에 빙 둘러 친 커튼이었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주민이 단번에 현덕과 자신의 사이를 좁혔다. 숨이 닿을 듯 둘 사이가 가까워졌다.
“종잡을 수가 없네, 김현덕 연습생.”
탈색된 갈색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까만 눈동자에 현덕이 담겼다.
“살려달라고 매달리지를 않나, 내 이름 함부로 부르면서 반말을 하질 않나, 이제 와서는 새삼 나한테 한 대 맞을까 봐 겁에 질려 있질 않나.”
주민은 웃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도대체 이 작은 머리통 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 있는 거야?”
현덕은 입을 꾹 다물었다. 차마 할 수 없는 말을 삼키기 위해서였다.
‘뭐긴, 너 재수 없다는 생각이지. 열아홉 살 우주민이 이따위인 줄 알았으면 만나고 싶다고 바라지 않았을 텐데, 하는 후회만 가득하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 피아노나 아름다운 악기를 연주해야 할 것 같은 손이었다. 물론 실제 음악가들의 손은 오랜 연습으로 무뎌져 있겠지만.
그런데 이 아름다운 손으로 머리통을 후려갈기거나, 뺨싸대기를 때린다면? 조금 전 자룡이 기절한 걸 봤던 현덕에게는 그 손이 마냥 아름답게만 보이지는 않았다.
‘맞는다!’
현덕은 눈을 질끈 감으며 커튼을 두 손으로 꽉 쥐었다.
다가올 충격을 기다렸건만. 얼굴이나 명치가 부서질 것 같은 보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머리카락이 당겨지는 느낌만 들 뿐이었다.
‘어?’
현덕이 실눈을 뜨고 주민을 보았다.
그 공포의 손가락은 현덕의 머리카락 끝을 살짝 잡아당기고 있었다.
“…….”
“…….”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현덕의 머리 위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맙소사. 너 진짜. ……하!”
문장으로 이어지지 못한 단어들이 웃음을 타고 흩어졌다.
“…….”
현덕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런 현덕을 지켜본 주민은 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쪽팔려. 매우, 무척, 아주 많이.’
지금 이 순간 물거품이 되어 사라질 수만 있다면 문어 마녀에게 목소리라도 내놓으리라, 기꺼이.
‘난 당장 여길 빠져나가야겠어.’
현덕은 로봇처럼 삐걱삐걱 움직이며 몸을 돌렸다. 단 1초라도 여기 더 있다가는, 여기서 주민의 웃음소리를 계속 듣다가는, 오늘 한강 물이 몇 도인지 확인하고 싶어질 것 같았다.
현덕이 커튼을 젖히려 하자,
“어딜!”
주민이 재빨리 현덕의 양옆 커튼을 움켜쥐었다.
“윽!”
현덕은 커튼에 얼굴을 박고는 중심을 잃었다.
주민은 참새를 잡듯 현덕을 커튼으로 폭- 감쌌다. 그러다 커튼의 고정대가 휘청이는 걸 보고는 얼른 현덕 쪽으로 몸을 붙이고, 커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현덕은 커튼에 싸인 채 주민과 두 다리가 얽혔다. 눕지도 서지도 못한 어정쩡한 자세였다.
그런 현덕을 지탱하는 건 오로지 주민이었다. 주민은 현덕의 얼굴 양옆의 커튼을 움켜쥔 채로, 현덕을 향해 잔뜩 몸을 가까이 댔다.
현덕의 숨과 주민의 숨이 섞였다.
둘은 서로가 굉장히 묘한 자세로 몸을 붙이고 있다는 건 전혀 깨닫지 못했다.
‘내가 아무리 지금 고등학생이래도, 군대도 다녀왔고 그랬는데. 저 정도에 쫄아버리다니.’
쪽팔리고도 쪽팔려서 견딜 수 없이 쪽팔렸다. 현덕은 커튼에 얼굴을 박은 채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런 현덕을 보는 주민의 얼굴에선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이봐, 김현덕 연습생-”
주민이 잔뜩 놀리는 목소리로 현덕을 불렀다. 그 때 커튼이 확- 걷혔다.
“으악!”
“뭐야!”
현덕과 주민 모두 커튼을 놓치고 쓰러졌다.
주민은 그런 현덕의 위로 넘어져 현덕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주민의 잘생긴 이마가 현덕의 명치에 박혔다. 퍽.
보복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이루어졌다.
“윽!”
현덕은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순간 하늘이 노오래졌다.
“사, 살려……!”
현덕은 오로지 살기 위해 주민의 얼굴을 두 손으로 밀쳐냈다. 밀쳐낸다는 게 주민의 목젖을 손날로 치는 모양새가 되어버렸지만.
“컥!”
주민은 양손으로 제 목을 움켜쥐며, 옆으로 쓰러졌다.
“너, 또…….”
그렇게 장렬하게 전사한 두 연습생 앞에 화난 어른 두 명이 등장했다.
“환자가 절대안정을 취해야 하는데, 지금 뭣들 하시는 겁니까!”
한 분은 간호사님이요,
다른 한 분은 오 팀장이었다. 얼마나 급하게 뛰어온 건지 옷은 흐트러진 데다가 온통 땀범벅이었다.
그의 그런 모습을 알아봐 주어야 할 그의 회사 연습생들은 각자 명치와 목을 부여잡고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느라 바빴다. 누구 하나 오 팀장에게 왔냐고, 따뜻한 인사 한마디 건네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오 팀장은 그 둘을 내려다보며 허탈하게 물어보았다.
“……너희, 뭐 하냐?”
***
경찰에게 연락을 받고 병원에 도착한 오 팀장의 모습은 평소와 달랐다. 늘 단정한 정장 차림에,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양복 재킷은 어디다 팔아버렸는지 흰 와이셔츠 차림이었다. 그 와이셔츠는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넥타이도 오는 내내 얼마나 잡아당긴 건지 헐렁하게 늘어져 목에 걸려만 있었다. 무엇보다 신발이 짝짝이였다. 구두 한 짝, 슬리퍼 한 짝을 발에 꿰고 온 오 팀장은 걸을 때마다 신발 높이가 안 맞아 절그럭댔다.
모습이 엉망이었으나 그럼에도 오 팀장은 오 팀장이었다. 그는 척척, 상황을 정리해나갔다. 우선 병원 땅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두 명을 붙잡아 다 복도 의자에 얌전히 앉혀 놓았다. 그리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현덕에게는 그동안 착실하게 연습생 생활했으면서 요즘엔 왜 이러는 거냐고 혼냈다. 화를 낸다기보다는 큰 소리로 물어보는 정도였지만, 현덕은 충격을 받았다.
‘형이랑 싸운 적이 없어서 아버지한테도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나름 새로운 경험이었다.
주민에게는 대놓고 화를 냈다. 원흉이 주민이라는 걸 아는 것 같았다. 현덕은 오 팀장이 화를 낼 때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권선징악의 결말이네.’
아직도 명치가 싸르르하게 아파왔다. 현덕은 명치를 쓸어내리며 주민을 쳐다봤다. 하지만 주민이 오 팀장의 잔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제 목을 손으로 감싸는 걸 보고는 얼른 눈을 깔았다.
“두 사람 다 내가 땡 해줄 때까지 얼음이야, 얼음!”
유치원 다니는 딸이 있다더니, 이럴 때면 그 면모가 드러났다.
현덕과 주민이 짜게 식은 표정을 짓는 걸 보고도 오 팀장은 떳떳했다.
“치고받고 싸우든 좋아서 얼싸안고 죽든 살든, 회사 안에서 해라. 회사 안에서! 제발! 싸우더라도 얼굴은 서로 때리지 말고! 그 정도 매너는 지키고! 어?”
물론 연예기획사 팀장다운 한마디는 빼놓지 않았다. 그리고는 간호사에게 사과하고, 자신에게 전화를 걸었던 형사를 찾아 흡연 장소를 찾아다녔다.
오 팀장은 담배 냄새를 물씬 풍기는 경찰들에게 인사하며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천의 얼굴을 가진 직장인의 표본이었다.
한참 경찰들과 입씨름을 하고 난 후 오 팀장은 현덕을 불러 당시 상황을 자세히 물었다. 이후 의사를 찾아가 자룡의 상태에 대해 묻고 회사 법인카드로 병원비를 계산했다.
현덕은 자룡이 깨어날 때까지 곁에 있고 싶다고 말했다. 오 팀장은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형사와 간호사와 의사를 상대할 때는 그리도 곰살궂게 웃더니만. 영업용 가면을 벗어던진 얼굴은 꽤나 피로해 보였다.
“내가 자룡이를 잡아먹거나 하지는 않을 거니까. 일단 오늘은 집에 들어가고,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회사에서 하자. 자룡이가 깨어나면 내가 잘 챙길 테니까 걱정하덜 말고.”
“하지만, 팀장님!”
“자룡이 깨면 내가 걔랑 둘이서 해야 할 말이 있어서 그런 거야. 그러니까 현덕 씨가 오늘은 조금만 양해해주면 좋겠어.”
오 팀장이 두 손으로 얼굴을 쓱쓱 쓸어내렸다.
“안 그래도 오늘 데뷔조 발표 난 거 가지고 내가 자룡이랑 얘기 좀 하려고 했는데 말이지. 그래서 회사에서 계속 자룡이를 찾고 있었는데, 그새 사고가 났네.”
오 팀장의 말에 현덕의 눈빛이 흉흉해졌다.
‘이제 갓 이십 대가 된 애를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은 게 누군데.’
안 그러려고 해도 절로 목소리가 뾰족해졌다.
“자룡 형을 탓하시는 건가요?”
“아니, 아니. 내가 그 정도로 막돼먹은 인간은 아니지. 현덕 씨 눈엔 그렇게 보일지 몰라도.”
오 팀장은 손사래를 쳤지만 현덕의 굳은 얼굴은 풀리지 않았다. 오 팀장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좀 부탁해. 나 좀 봐주라. 응? 오늘 말고는 안 될 것 같아서 그러는 거니까. 내일 말하자고, 모레 얘기 좀 하자고 미루다가 자룡이가 또 잘못될까 봐 걱정돼서 이러는 거야, 내가.”
오 팀장은 정말 자룡을 걱정하고, 자룡에게 부채감을 가지고 있는 듯 굴었다. 얼굴과 목소리에서 미안한 감정이 묻어났다. 그래서 현덕은 더 화가 났다.
‘정말 걱정했다면 데뷔조 발표가 나기 전에 미리 언급이라도 해줬어야지. 아니, 자룡 형을 데뷔조로 선발했어야지. 박자룡이 뭐가 부족해서!’
하고 싶은 말이 목 끝까지 치솟았지만, 현덕은 입을 꾹 다물었다.
주민은 의자에 앉아 병원의 하얀 벽에 등을 기댄 채 그런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눈은 현덕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오늘 일은 정말 고맙고, 미안하게 됐고. 이제 나머지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걱정 말고 집에 가서 쉬어.”
“팀장님이 제게 고맙고 미안하실 일이 아니지요. 고맙다거나 미안하다는 인사는 자룡이 형이 깨어나면, 형한테 받을게요.”
현덕은 고개를 저었다. 꾹꾹 눌러 담은 원망과 불만이 드러나지 않기를 바랐으나 날 선 목소리는 여지없이 마음을 드러냈다.
“자룡 형, 잘 부탁드려요.”
현덕은 오 팀장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돌아서 걸어 나갔다. 힘을 주어 내딛는 걸음걸이가 ‘나 지금 불만 있소.’라고 말하고 있었다.
주민은 그런 현덕의 뒷모습을 보며 픽, 웃더니, 일어나 현덕을 따라나서려 했다.
“잠깐.”
오 팀장이 그런 주민을 불러 세웠다.
“저한테도 용건이 있으십니까?”
주민은 돌아서서 삐딱한 자세로 오 팀장을 보았다. 다른 연습생들이 이랬다면 바로 트레이닝 스케줄에 인성교육을 넣거나 회의실로 불러 호되게 혼을 냈을 것이다. 하지만 오 팀장은 주민을 혼내는 대신, 목소리를 낮춰 달래듯 말했다.
“방해받으면 데뷔 못 한다고 이름까지 숨기자고 제안한 건 너였잖아. 내가 그래서 연습생 계약서도 안 쓰게 해줬는데, 지금 뭐 하고 다니는 거야. 요즘 왜 이렇게 주변이 시끄러워. 애먼 연습생을 모함하지 않나, 그 연습생이랑 회사에서 치고받고 싸우지 않나. 그리고 이젠 그 연습생 데리고, 다른 연습생이 자살한다는 데까지 찾아가? 물론, 이번 건 잘한 일이고 고맙긴 하지만.”
오 팀장은 ‘니가 왜?’라는 표정이었다.
“왜? 내가 용감한 시민상으로 오늘 9시 뉴스에 제보해줄까? 얼굴이랑 이름이 전국에 까발려지게?”
“할 수 있으면 해보시든지.”
“설마 나 엿 먹이려고 이러는 거니? 우리 회사랑 내 능력이 어디까지 되는지 시험이라도 해보게? 합격점이 나야 널 데뷔시킬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거냐?”
“생각하시는 거 하고는.”
주민이 픽, 웃었다.
주민의 웃음은 종종 상대를 더 열 받게 하는 효과를 내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야, 너!”
이런 순간에서도 오 팀장은 주민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 투철한 계약 이행 정신만은 높이 살만 했다. 어쩌다 어린 연습생 하나한테 흘렸다는 게 이상할 만큼.
주민은 오 팀장에게 박수를 쳐줬다. 짝짝짝. 박수 치는 소리에 따라 오 팀장의 얼굴이 구겨졌다.
짝. 조금 구겨지고.
짝. 좀 더 구겨지고.
짝. 완전히 구겨졌다.
“어린애들 연습생으로 거느리면서 회사 생활하셔서 그런가, 생각하는 게 딱 그 수준에만 머물러 있으시네.”
“너, 인마 말을 해도!”
“그래도 어른인데. 어떻게 어른이 미성년자에게 이렇게까지 화를 낼 수 있는 거죠? 너무 무섭네요. 오랫동안 마음의 상처로 남을 것 같습니다?”
주민은 전혀 상처받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너! 아, 혈압.”
오 팀장이 뒷목을 잡으며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쓰러지면 무조건 네 탓이다. 알았냐?”
“산재를 신청하셔야지, 미성년자를 겁주는 게 말이 됩니까. 항상 그런 식으로 일하시나 봅니다?”
주민은 오 팀장에게 고개 한 번 까딱이지 않고 돌아섰다.
“야, 거기 안 서?”
등 뒤에서 오 팀장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굳이 귀담아듣지 않았다.
병원 밖으로 나서니 현덕이 서 있었다. 현덕은 발끝으로 툭툭 시멘트 바닥을 차고 있었다. 머리 위로 그늘이 생기자 고개를 들어 주민을 봤다.
“설마 날 기다린 건가?”
싸가지 없는 목소리에 살짝, 아주 살짝 기대심이 어렸지만. 현덕은 그런 걸 눈치챌 만큼 세심한 성격이 아니었다.
“인사는 하고 가야 할 거 같아서요.”
“설마 돌아가는 길도 같이 가자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주민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얘랑 같이 돌아가려면 오토바이가 있어야 하는데.’
그제야 오토바이 생각이 났다.
구급차에 올라타며 오토바이를 대교에 두고 왔다. 일단 그걸 되찾으러 가야 했다.
“젠장.”
오토바이 타고 구급차를 따라올걸.
주민은 뒤늦게 후회하며, 어떻게 ‘현덕과 함께’ 대교로 돌아갈지 고민했다.
현덕은 쯧, 혀를 차는 주민을 보고는 얼른 손사래 쳤다.
“아뇨, 저는 택시 불러 놔서, 그거 타고 가면 돼요. 저기서 기다려주시고 있어요.”
“……뭐?”
“택시요, 택시.”
현덕이 제 등 뒤에 서 있는 택시를 가리켰다.
“팀장님하고 얘기 나누시기에 그사이에 먼저 나와서 택시 불렀거든요. 그냥 가려다가, 그래도 그건 아닌 거 같아서.”
현덕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무튼, 어쨌든, 오늘 고마웠어요.”
“……”
주민은 뭔가 억울해졌다. 그런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안녕히 가세요.”
현덕은 그런 주민을 버리고는 쌩하니 택시를 타러 갔다. 현덕이 탄 택시가 시야에서 사라지기까지, 주민은 움직이지 못했다.
“뭐야, 저건.”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 느낌은 주민이 자신이 탈 택시를 콜 하는 순간, 분명한 형태를 띠었다.
“설마, 나 엿 먹이겠다고 그런 건가?”
너랑 같이 타고 갈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러진 않겠다. 네가 타고 갈 택시도 불러주거나 잡아줄 수 있었겠지만 그 또한 굳이 그러진 않았다. 그런 의미로 자신을 기다렸다가 눈앞에서 택시를 타고 간 게 아닐까.
그것도 모르고 자신은 현덕과 ‘함께’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
주민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누구와 살짝 스치기만 해도 구역질이 났었는데 현덕은 괜찮았다. 발로 까이고 오토바이를 같이 타고, 박차기를 당하고 넥슬라이스까지 당했는데.
주민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개미 떼가 들끓듯 간지러워야 하는데 간지럽지 않았다. 살갖이 벌겋게 부어 오르지도 않았다. 게다가 조금 전엔 ‘함께’ 돌아갈 생각까지-
‘내가 미쳐가나 본데.’
허탈한 웃음은 대교로 돌아갔을 때 절정에 이르렀다.
한 쪽에 세워두었던 오토바이가 없어졌다. 주민은 112에 전화했다. 누가 가져갔다면 신고하면 될 일이고, 경찰이 가져갔다면 돌려달라고 요청하면 될 일이었다.
다행히 금방 소재가 파악됐다. 현덕과 주민이 구급차를 타고 갔을 때, 경찰이 현장을 수습하며 오토바이를 끌고 갔다고 했다. 안 그래도 소유주 조회를 해서 연락을 할 예정이었다고.
오토바이의 행방을 확인한 후 주민은 난간 위로 올라섰다.
강바람은 뺨을 갈기듯 매서웠다.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니 시꺼먼 물이 출렁였다.
주민은 한참 동안 강물을 바라봤다.
“내가 김현덕, 그 애처럼 그랬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주민이 한강의 일렁이는 물결을 보며 중얼였다.
“그랬어도 당신은 죽었을까. 내 눈앞에서?”
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는데, 현덕이 생각났다. 마치 김현덕이 정답이라는 듯.
자룡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던 현덕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주민은 현덕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왜 그렇게까지 걱정해주는 거야. 피도 안 섞인 남이면서. 저게 뭐라고 그렇게까지 필사적인 거지?’
그리고 자신에게도.
‘왜 난 걔만 보면 이상해지는 거지?’
TE엔터테인먼트에 도착했을 때 익숙한 뒤통수가 보이길래 무슨 일인가 싶어 불렀더니-주민은 이것마저 자기답지 않았다며 스스로를 비웃었다-현덕이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매달리며 살려달라고 말했다.
그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대로 시간이 멈춰버린 줄 알았다.
언제나 주민을 사로잡고 있었던 건 까맣게 죽어버린 눈이었다. 무감각해져서 무엇으로도 움직이지 않던 두 눈. 천장에 매달려 흔들리며 주민을 저주하던 눈.
잠깐 동안이지만 현덕에게 붙잡혀 있던 그때. 저주와 같던 그 주박에서 벗어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 번 대화해 본 적은 없이, 주민은 자룡이 누군지는 알았다. 언제나 현덕과 찰싹 붙어 앉아 시끄럽게 웃던 대파머리 연습생.
주민은 그 대파머리가 서 있던 곳에 똑같이 서서 현덕이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주민이 본 건 필사적으로 자룡을 설득하려 애쓰던 현덕의 뒷모습뿐이었다. 앞을 보지 못했기에 현덕이 어떤 얼굴로 자룡을 바라봤는지 알 수 없었다.
‘TE엔터테인먼트 앞에서 나를 붙잡을 때 같은 얼굴이었을까? 아니면 그거보다 더 심한 얼굴이었을까.’
상상해보려고 해도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어떤 얼굴이었기에 그 대파머리가 주저했던 걸까.’
현덕은 주민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주민이 자룡을 열 받게 해서 자룡을 살린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주민이 보기에 결국 자룡을 살린 건 현덕이었다.
자룡은 현덕을 보자마자 흔들렸다. 정말 죽을 듯 초연한 표정이었으면서 현덕을 보자 당황하고 갈등했다. 주민은 그런 자룡에게 조미료를 뿌린 것뿐이었다.
적어도 김현덕 앞에서는 안 죽을 거면서. 그래도 단념 못 하고 죽겠다고 서 있는 꼴이 우스웠다. 화가 났다. 그래서 말 그대로 갈군 것뿐이었다.
만일 현덕이 오지 않았다면. 그럴 리 없겠지만 주민 혼자서 자룡을 찾아왔다면 자룡은 주저 없이 죽었을 것이다. 주민이 지켜보든 말든.
주민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내쉬며, 몸을 돌렸다. 난간에 등을 기대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보았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인데도, 자기보다 어리고, 자길 걱정해주는 남자애 앞에서 차마 죽을 수 없어 주저하던데.”
필사적이던 뒷모습이. 뻐기듯이 택시를 타고 훙- 가버리던 뒷모습이. 자꾸만 생각났다.
“당신은 당신 아들이 울면서 매달리는데도, 어떻게 내 눈앞에서 그렇게 죽어버릴 수 있었나요.”
주민이 뒤덮은 그림자는 주민이 품은 현덕의 뒷모습을 꿀꺽, 삼켜버렸다. 그처럼 환하고 따뜻한 것을 주민에게 허락할 수 없다는 듯.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