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Boy meet boy (5/36)

5. Boy meet boy

현덕이 들어온 이후로 한동안 남자 연습생이 들어오지 않았다. 여자 연습생만 두엇 들어왔을 뿐이었다. 오랜만에 들어오는 새로운 연습생은 TE엔터테인먼트 신인개발팀이 몇 달이고 공들인 엄청난 루키라는 소문이 퍼졌다.

오래 연습생 생활을 하였던 몇몇 연습생들은 거의 TE엔터테인먼트의 직원 취급을 받았다. 신인개발팀 직원들과도 꽤 친했다. 그들은 종종 회사 소식을 직원들에게 전해 듣고 다른 연습생들에게 퍼트렸다. 이번 새로운 연습생에 대한 소문도 그 루트를 타고 전해진 것이었다.

몇 달 동안, 신인개발팀이 다른 연습생을 발굴할 생각도 못 하고 영입하고자 매달렸다는 슈퍼 루키.

안 그래도 요즘, 핑크키위 스캔들로 무산되었던 보이 그룹 프로젝트가 새로운 컨셉으로 다시 준비 중이라는 소문이 슬슬 나고 있던 터였다. 남자 연습생들은 대부분 잔뜩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처럼 긴장한 채 하루하루를 보냈다. 새로운 연습생에 대한 소식을 들으려 귀를 곤두세웠다.

아직 초여름인데도 한여름처럼 덥던 어느 날, 오 팀장이 오랜만에 연습생들에게 얼굴을 비췄다. 그는 곳곳에서 연습 중이던 연습생들을 전원, 대형 연습실로 불러들였다.

2층 제일 구석의 보컬 연습실에서 노래 연습을 하던 현덕은 미처 그 소식을 전해 듣지 못했다. 자룡이 보낸 문자를 보고서야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고 대형 연습실로 향했다.

자신만 안 왔다는 자룡의 문자 때문에 마음이 급해진 게 탈이었다. 현덕은 앞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고 뛰었다.

계단을 올라 막 코너를 돌았을 때였다. 갑자기 눈 앞에 커다란 등짝이 나타났다.

“윽!”

현덕은 얼굴을 박고 그 반동으로 뒤로 넘어졌다.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바닥을 짚었지만, 균형을 잡지 못해 옆으로 데굴, 굴렀다. 어깨가 바닥에 부딪치고, 다리가 쓸렸다.

아팠다. 그리고 말도 못하게 쪽팔렸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부딪친 사람에게 사과해야 된다는 생각이었다.

“저기, 괜찮으세요? 죄송합니다. 제가 급해서, 앞을 못 보고 뛰었습니다. 죄송해요.”

현덕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그 바람에 부딪친 사람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눈구멍은 살가죽이 부족해서 뚫어놨나 보지?”

머리 위에서 신랄한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현덕은 지금이 조선시대이고 자신은 비천한 노비인데 반역을 저지르려고 임금님의 어깨에 감히 박치기를 한 대역죄를 지은 것이 아닌가- 생각할 뻔했다.

‘내가 잘못한 게 맞잖아. 갑자기 내가 튀어 나와 몸통 박치기를 한 거니까, 상대방이 화내는 건 당연해.’

“그렇긴 한데, 그래도 그렇지.”

울컥하지만 꾹 참았다.

“죄송합니다.”

현덕은 다시 한 번 사과했다.

“사과만 하면 단가? 사과할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하지만 얼음 칼로 저미는 듯 싸늘한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저기요, 제가 잘못했-”

다시 한 번 사과하며 고개를 든 현덕은,

“……!”

눈앞의 사람을 보고 돌처럼 굳어버렸다.

“눈 말고 입도 예의상 뚫어 놨나 보지? 왜 사과를 하다 마는지 무척 궁금하네.”

현덕이 부딪친 사람은 확실히 직원은 아니었다. 현덕 또래, 아니 자룡과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서 있었다.

큰 키에 마른 몸매. 보통 연예인을 보면 얼굴이 진짜 조막만하다고 그러던데. 이 사람의 두상이 딱 그랬다. 직업이 모델인가 의심할 정도로 비율이 좋았다. 물 빠진 엷은 갈색 머리카락은 탈색한 머리가 맞나 싶을 정도로 결 좋게 반짝였고.

살짝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눈은 독 안에 든 쥐를 노려보듯 날카로웠는데 엷게 미소 띤 입가와 날카로운 턱선은 퇴폐적인 느낌이 났다.

차가우면서도 나른한 분위기를 가진 미인이었다.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로 삐딱하게 서서 현덕을 내려다보는 얼굴은,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무척 익숙했다.

기억보다 앳되지만 분명.

현덕이 기억하기로는 분명-

“……우, 주민?”

‘제가 선택한 길이었습니다. 그에 따른 결과를 감당해내야 했지요. 그것이 버거웠다고, 힘들었다고, 하소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가 그렇게 살겠다고 결정한 것이었고, 그에 따른 결과도 제가 감당해야 하는 것이었으니까요.’

기억 속 목소리는 부드럽고 담담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자신에게 무례한 질문을 던지는 인터뷰어에게도 상냥하게 웃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는 현덕의 멘토였다. 비록 그는 현덕이 누군지도 몰랐겠지만. 사실 현덕도 그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몰랐다. 그래도 현덕은 그를 존경했다. 그처럼 당당하게 그리고 부드럽고 상냥하게 세상을 마주하고 살아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그 우주민이, 아니, 그 우주민의 어린 시절이 지금 현덕의 눈 앞에 나타났다.

“이 회사,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드는 게 없네. 그렇게 보안 유지하랬더니 내 이름을 막 말하고 다녔나 보지? 내 이름이 뉘 집 개 이름인가. 아무나 막 부르게 하네.”

그가 날카로운 눈꼬리를 살며시 접으며 웃었다.

사람의 웃음이 이리도 싸늘할 수 있다니. 그걸 지금 이 순간, 이 사람이 모습으로 실감해야 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

어떻게 대형 연습실까지 갔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주민을 올려다보니, 주민이 혀를 차며 돌아섰다는 것만 기억났다. 주민이 먼저 걸어가니, 몇 걸음 떨어져서 그를 뒤따라 걸었던 것도 같았다.

주민의 뒷모습은 조각상처럼 늘씬했다. 큰 키에 넓은 어깨. 곧은 허리. 긴 다리. 그는 뒤에서 봐도 미인이었다. 현덕은 그 아름다움에 감탄할 새도 없이 혼돈에 빠져들었다.

‘동명이인인가? 그래, 동명이인 일거야. 그러지 않고서야……. 하지만 저렇게 잘생긴 얼굴이 세상에 둘이나 있을 리가 없잖아.’

좀 더 어린 모습이긴 하지만. 저런 잘생긴 얼굴이 세상에 둘씩이나 있을 수 있다니? 그게 오히려 더 현실감 없게 느껴졌다.

‘욕이라니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닐까? 내 귀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거 아닐까? 상냥하게 말했는데 내가 멋대로 꼬아서 들은 건 아닐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방금까지 보컬 연습실에서 아무 어려움 없이 음악을 들었지 않았던가.

‘역시 이 모든 게 꿈인 건지도 몰라. 그래, 맞아. 내가 아이돌 연습생이라니. 꿈이 아니고 뭐겠어?’

머릿속이 온갖 생각으로 가득 찼다. 때문에 주민이 두어 번 자신을 돌아본 걸 현덕은 알지 못했다.

주민과 현덕이 대형 연습실로 들어가자 안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이 둘을 돌아봤다. 현덕은 슬쩍 옆으로 빠져 자신에게 손짓하고 있는 자룡의 옆에 가서 앉았다.

“뭐 하다 이제 와, 그리고 쟨 뭐야? 왜 같이 왔어?”

자룡이 속삭였다.

“오다가 부딪혔어요.”

“누구랑?”

“그러게요. 누구랑일까요.”

현덕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왜 그래, 오다가 무슨 일 있었어?”

잔뜩 풀 죽은 현덕을 본 자룡이 눈을 부라렸다.

현덕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자룡은 울컥 솟는 분기를 참지 못하고 현덕이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왜 그러는데? 말해봐.”

“그냥, 좀. 오 년 동안 혼자서 짝사랑했다가 일 초 만에 실연당한 상태랄까. 뭐, 그래요.”

현덕은 자룡의 손길을 따라 맥없이 흔들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첫사랑? 씨발, 너 우리 회사 여자 연습생 좋아했냐?”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암튼. 그런 게 있어요.”

“그런 게 뭔데? 누구야? 씨발.”

어째서일까. 자룡은 더 받아 보였다.

“형. 근데 나 어지러운데, 이제 고만 흔들어주면 안 될까요?”

“아, 씨발, 미안.”

자룡이 얼른 손을 뗐다.

현덕은 아직도 문 앞에 서 있는 주민을 바라보았다. 마침 주민도 삐딱하게 서서는 현덕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딱 마주쳤다. 주민이 픽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뭐야.’

현덕도 대번 기분이 상해 버려 자룡 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핑크키위 스캔들 이후 남자 연습생들 중 몇 명이 다른 기획사로 떠났다. 핑크키위의 새 멤버가 정해진 이후 여자 연습생 몇 명이 또 TE엔터테인먼트를 떠났다. 그렇게 열 명 남짓이 떠나, 현재 TE엔터테인먼트에는 스무 명 정도의 연습생들만 남아 있었다.

그들의 앞에 서서 부산스럽게 왔다 갔다 하던 오 팀장은 문가에 삐딱하게 서 있는 주민을 보고는 반갑게 손짓했다.

“이제야 왔구나. 이쪽으로 와. 어서.”

오 팀장은 연습생들에게 주민을 소개했다.

나이는 현덕보다 두 살이 더 많은 열아홉. 고3이었다. TE엔터테인먼트 근처 고등학교를 다닌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주민을 소개하면서 이름을 말해주지 않았다.

‘소개의 기본은 이름 아닌가?’

현덕이 의아해하는 찰나, 옆에서 자룡의 목소리가 들렸다.

“씨발, 나보다 어리네.”

자룡은 어쩐지 주민이 마음에 안 드는 기색이었다.

‘하긴 자룡 형은 나도 별로 안 좋아 했지.’

현덕은 번개머리 시절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 팀장은 주민이 이번 주부터 바로 주간 평가를 함께 치르게 될 거라고 했다. 그 정도라면 다른 기획사에서든 기본기를 쌓고 온 연습생이구나, 하고 넘어갈 정도였지만. 덧붙여진 말이 모든 남자 연습생들을 술렁이게 만들었다.

주민은 TE엔터테인먼트에서 처음 연습생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고, 이번 주부터 연습생 기본 트레이닝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연습생 기본 트레이닝을 받으면서 주간 평가와 월말 평가도 받는다는 말이었다. 현덕과 전혀 다른 대우였다.

현덕이 알고 있는 한, 그리고 자룡의 경험상 TE엔터테인먼트에서 이런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기본 트레이닝을 받는다는 것은 기본기를 만든다는 의미였다. 기본기도 없는 연습생이 데뷔조 선발과 관련된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회사가 그 연습생을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의미였다. 소문이 무성한 새로운 데뷔조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했다.

연습생 생활을 꽤나 오래 한 연습생들은 단번에 오 팀장의 말을 알아들었다. 자룡의 눈에선 불똥이 튀었다. 다른 연습생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현덕만이 태평했다.

‘기본 트레이닝 받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주간 평가를 같이 한다고? 엄청 피곤하지 않으려나.’

현덕은 걱정스럽게 주민을 바라보았다. 첫 정이 무섭다고, 그렇게 당하고도 자꾸만 눈이 갔다. 하지만 싸늘한 주민의 얼굴을 보고는 눈이 마주칠까 무서워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까 복도에서 부딪혔을 땐 입가에 예의 그 엷은 미소라도 띠고 있었건만. 지금은 냉랭한 무표정이었다.

주민은 오 팀장이 자기를 소개해준 다음에도 고개를 숙여 인사하지 않았다. 수군대는 연습생들을 내려다보는 얼굴엔 조금의 인간미도 묻어 있지 않았다. 그 얼굴을 보고 있으니, 이전에 봤던 TV 속 주민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저런 게 우주민이라니.

‘정말로 우주민인 걸까?’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질문해 보았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부질없는 짓이었다. 현덕의 눈앞에 있는, 저 싸가지가 하늘을 찌를 듯한 사람은 분명 우주민이었다.

‘근데 왜 성격이 저 모양인거야.’

현덕이 기억하던 모습과 너무 달랐다. 아주 달랐다.

‘아직 어려서 그런 걸까. 우리 형처럼 여태까지 사춘기라거나 질풍노도의 시기가 늦게 왔다거나. 그래서 지금 성격이 저따구인 걸까? 나중에 나이를 좀 더 먹으면 착해지는 거고?’

그나마 가능성 있는 가설을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덕이 봤던 인터뷰 영상 속의 주민은 서른 살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주민은 열아홉 살.

‘십일 년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니까.’

강산이 바뀌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저 뾰족뾰족한 주민이 둥글둥글해졌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내가 고작 인터뷰 영상 하나만 보고 사람을 잘못 본 건가.’

문득 든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생각하기도 싫은 가설이었지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시 준비에 찌들어 있었던 시절, 자살까지 생각했던 그날의 자신이 정상적인 상태였을까.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그때, 하필이면 주민의 인터뷰 영상을 보았고. 자신은 제멋대로 착각하며 그 뒤로 5년을 더 살아왔던 건 아닐까.

‘아, 이 가설은 생각만으로도 슬프다.’

자신이 열심히 살아온 시간의 근간을 흔드는 생각이었다.

‘설마. 아닐 거야. 그럴 리 없어.’

현덕은 섬뜩한 기분을 털어내려 애쓰며 오 팀장에게 집중했다.

오 팀장은 주민을 소개한 후에도 뭔가 더 할 말이 있는지 괜한 말을 하며 뜸을 들였다. 현덕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괜히 아무 연습생에게나 말을 걸며 연습생 생활이 힘들지 않냐고 자상하게 물어보았다.

현덕은 오 팀장이 드디어 연습생의 소중함을 알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최근 열 명 가까운 연습생들이 회사를 떠나자 회사도 어느 정도 경각심을 가진 게 아닐까 하고.

물론 현덕의 오산이었다.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은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는데. 우리 회사에서 새로운 남자 아이돌 데뷔 프로젝트를 진행할 거 같은데. 올해가 가기 전에 데뷔할 예정이고, 남자 6인조를 생각하고 있다.”

오 팀장이 뜸을 들였던 건 이 대형 발표 때문이었다.

주민의 등장에 웅성거리던 남자 연습생들이 일제히 침묵했다. 여자 연습생들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현덕은 옆의 자룡을 바라보았다.

자룡은 뚫어져라 오 팀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사냥감을 노려보는 표범같았다. 눈빛만으로도 능히 오 팀장의 얼굴 가죽을 뚫을 것 같았다.

“다음 주 주간 평가부터 본격적으로 심사 들어가서 기본 데뷔조 구성이 시작될 거다. 이번엔 삼 개월 안에 데뷔조를 구성해서 그 인원으로 쭉 갈 예정이고.”

“씨발. 삼 개월 안에 데뷔조 못 들으면 끝이라는 거잖아.”

자룡의 이를 갈았다.

모두들, 열망이 담긴 눈으로 오 팀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덕만 빼고.

‘나는 왜?’

현덕은 자신의 안을 들여다보았다. 자룡에게서 느껴지는- 활활 타오르는 듯한 그 무엇이 자신의 안에서는 느껴지지 않았다.

의욕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자룡만큼 절실하지 않았다.

춤과 노래를 배우는 건 재미있다. 하지만 자룡처럼 회사에서 밤을 지새우고 첫차를 타고 집에 들어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을 만큼은 아니었다.

다른 연습생들과 조를 짜서 무대를 준비하는 게 즐거웠다. 무대 위에서 짜릿함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그뿐.

현덕의 꿈은 여전히 판사였다. 반드시 데뷔하여 아이돌 가수가 되겠다는 꿈과 희망은 자라나지 않았다.

그 차이는 매우 컸다. 평소 스케줄에 맞춰 트레이닝을 하고 복습을 할 때는 느껴지지 않았던 간극이, 이렇게 데뷔라는 목표가 눈앞에 나타날 때면 섬뜩한 느낌이 들 정도로 분명해졌다.

‘나도 언젠가 느껴볼 수 있을까?’

의미 없는 소외감이라는 걸 알면서도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어차피 나는 그냥 연습생 생활을 경험해 보려고 시작한 거였잖아.’

이렇게 되뇌어도 허전한 마음을 감출 수는 없었다.

‘나도 노래가 너무 부르고 싶어 죽을 거 같고, 춤을 잘 추고 싶어 죽을 거 같고, 그래서 정말 아이돌이 되고 싶어 미칠 것 같은, 그런 기분을 느껴볼 수 있을까? 그런 건 어떤 기분일까?’

현덕은 손을 들어 왼쪽 가슴을 문질러 보았다.

쿵, 쿵. 심장은 살기 위해 천천히 뛰고 있었다. 영원히 이 속도일 것 같았다.

조금 슬퍼졌다.

***

연습생들 중 아무도 주민과 주간 평가를 함께 하려고 하지 않았다. 호기심이나 호승심으로 주민에게 관심을 가진 연습생은 몇 있었으나 그들은 끝내 주민과 함께 무대에 서지 못했다.

주간 평가를 준비하는 일주일 동안 연습생 중 누구도 주민을 만나지 못했다. 회사에 나오긴 나오는지, 트레이닝을 받고는 있는 건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현덕도 괜한 호기심에 출석부를 뒤적여보았다. 연습실에 들어가기 전 근처의 다른 연습실 문을 둘러보며 주민의 이름이 있나 살펴보기도 했다.

하지만 신인개발팀 담당 직원이 일을 안 하는 건지, 출석부엔 주민의 이름이 없었다. 1인용 보컬 연습실이나 댄스 연습실의 사용자 이름표에도 주민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주민이 여러 연습생들이 모이는 대형 연습실에 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날이 하루, 이틀 쌓일수록 남자 연습생들은 주민에 대해 더 예민해졌다. 현덕을 견제할 때와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현덕을 깔보고 무시했던 연습생들이 주민에게는 위기감을 가졌다. 주민이 투명인간이 되어 연습생들의 목을 움켜잡고 있는 것 같았다.

주민의 이름을 모르는 연습생들은 그를 ‘싸가지 신삥’이라고 불렀다. 현덕은 자신이 번개머리였던 시절엔 어떻게 불렸을지 궁금했다.

토요일, 주간 평가가 열리는 날이 돼서야 주민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일주일 새 극적으로 달라진 건 없었다. 두 눈은 여전히 얼음으로 깎아 만든 듯 차가웠다. 엷은 갈색머리는 햇살에 비친 듯 반짝였다.

다른 건 복장뿐이었다. 이번엔 깔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하얀색 와이셔츠와 짙은 색 재킷, 윤이 나는 구두를 신고 있었다. 고등학생으로 보이진 않았다.

‘주말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 3세랑 비슷한 모습이네.’

현덕은 내심 감탄했으나 주민이 이쪽을 보려는 듯 고개를 돌리자 얼른 돌아섰다. 우연히라도 얼굴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복잡한 속내를 정리하기엔 아직 시간이 부족했다.

현덕은 엉킨 실을 한 올 한 올 풀어내듯 제 안에 엉킨 감정을 뽑아내보았다.

이 감정은 서운함이었다.

저 감정은 놀라움이었다.

또 이 감정은 어색함이었다.

다시 이 감정은 분노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감정은.

혼자 제멋대로 마음속에 담고 소중하게 생각했던 사람에 대한 감정이 포르륵- 사라져버릴까 봐 걱정하는 두려운 감정이었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이 감정들을 분류하고 가다듬을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우주민이란 사람을 어떻게 대할 건데?’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 다음 문제였다.

현덕은 동료 연습생 두 명과 함께 호흡을 맞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무대에서 내려오니 온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당장 샤워실로 달려가 씻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옆에 앉아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무대를 보는 자룡 때문이었다.

“씨발, 그 자식 얼마나 잘하는지 보고 나서 씻으러 가자고.”

저룡뿐이 아니었다. 땀범벅이 된 남자 연습생들은 모두 도끼눈을 뜨고 주민이 무대로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대개의 연습생들은 두 명에서부터 많게는 일고여덟까지 모여 무대를 준비했다. 혼자 준비하는 경우가 없진 않았지만, 흔하지도 않았다. 특히 남자 연습생들은 데뷔한 아이돌 무대를 모방하거나 과격한 춤을 추는 경우가 많아 혼자서 무대에 서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그런데 주민은 혼자 무대에 올랐다. 스탠드 마이크 앞에 서서 가만히 숨을 골랐다.

곧 MR이 흘러나왔다. 현덕도 어느 정도 흥얼거릴 수 있을 만큼 유명한 곡이었다. 다른 연습생들이 주간 평가 때 많이들 불렀던 노래이기도 했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 지겹기까지 했던 곡이건만.

주민이 부르자 전혀 다른 곡이 되었다.

“……!”

주민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 현덕의 맑고 깨끗한 목소리와는 정반대였다. 그 저음이 문을 두드리듯 톡톡, 귓가에 부딪혔다. 부드럽게 살랑이며 귓가를 간지럽히더니 클라이맥스에 이르러서는 아예 음표를 움켜잡으며 휘몰아쳤다.

음의 바다에 빠진 것 같았다. 이 세상에 자신과 이 노래만 존재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현덕은 멍하니 무대 위의 주민을 바라보았다. 주민이 나른하게 서서 눈꼬리를 접고 웃었다. 그러더니 한 손으로 스탠딩 마이크를 움켜쥐고, 살짝 고개를 숙여 속삭이듯 가사를 중얼거렸다.

살짝 감았던 눈을 뜰 때, 그 까만 눈동자가 현덕과 마주쳤다.

현덕은 지독한 갈증을 느꼈다. 눈물이 나지 않을 때까지 하염없이 울고 싶어졌다. 무언가를 애타게 바라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절망감.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다는 슬픔. 그저 한없는 먹먹함. 그 모든 것이 현덕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적셨다.

그리고. 혹은 그래서.

이 텅 빈 음에 자신의 음을 더하고 싶었다. 한 가닥 생각이 싹을 틔우고 하늘을 향해 손을 뻗어 피어올랐다.

노래를 부르고 싶다. 소리를 내 노래를 부르고 싶다. 이 목소리와 함께 화음을 내고 싶다. 이 목소리를 감싸주고 싶다.

처음으로 강렬한 욕구가 치솟았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뜨겁고 고통스러운 감정이었다. 뱃속에 커다란 불구덩이가 생겨난 것 같았다. 활활 타올라, 제 몸을 집어삼켜 하얗게 태워 재만 남겨버릴 것 같았다.

뜨거운데. 아픈데. 그 와중에도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가 감미로웠다. 귀를 막고 도망치고 싶을 듯 무서우면서도 눈물 나게 어여뻤다.

“아……. 왜…….”

현덕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 상태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주민의 노래가 끝날 때까지 숨조차 마음대로 쉴 수 없었다.

노래가 끝나고, 주민의 마지막 숨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나왔다. 그제야 현덕은 긴 숨을 내쉬었다. 온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약간의 탈수 증세까지 느껴졌다. 세상이 빙빙 돌았다. 현덕은 더듬더듬, 손을 뻗어 옆의 단단한 것을 붙잡았다.

붙잡힌 건 자룡의 팔뚝이었다.

“김현덕? 야, 씨발, 너 괜찮아?”

걱정 어린 자룡의 목소리가 100m 떨어진 곳에서 나는 소리처럼 울렸다.

“괜찮, 괜찮아. 형, 나 잠깐, 좀 어지러워서.”

현덕은 목을 쥐어짜 말하고는 눈을 감았다. 아직도 뱃속에서 불덩이가 일렁였다.

한참 뒤에야, 현덕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내내 쥐고 있던 자룡의 팔을 놓으니 손바닥이 축축했다.

고개를 들어 무대를 봤다. 주민은 없어진 지 오래였다. 마지막 순번의 연습생 무대가 진행되고 있었다.

현덕은 주민의 노래를, 무대를 되짚어 보았다.

객관적으로 따지자면 주민의 노래는 완벽하지 않았다. 두어 군데의 음정이 불완전한 했다. 가사가 틀린 부분도 있었다. 중간에 두어 구절은 허밍으로 대신하기도 했다. 가사를 까먹은 듯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주민의 노래는 현덕을 비롯한 대형 연습실 안의 모든 관객을 휘어잡았다. 현덕만큼은 아니었지만, 다른 연습생들도 몰입해서 주민의 무대를 지켜봤다. 오 팀장을 비롯한 신인개발팀 직원들도 비슷한 상태였다.

‘이런 게 끼라는 거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연예인이 될 재목이 있는 거구나.’

현덕은 실감했다.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매력이란 게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났다. 그 형상의 이름은 우주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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