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연습생 김현덕
“자아, 거기 번개 머리. 눈 흐리멍덩하게 뜨지 말고. 눈앞의 나를 잡아먹겠다는 듯이 부릅떠 봐. 이 악물고, 세상에 불만을 가진 표정으로 날 쳐다보란 말이야!”
사진작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는 현덕의 머리보다 클 것 같은 렌즈를 낀 카메라를 한 손에 들고 서 있었다.
멍하니 사진작가를 바라보고 있던 현덕은 깜짝 놀라 눈을 껌벅였다. 그가 말하는 번개머리는 현덕이었다.
“고글. 입 삐죽하니 내밀고! 그래, 이 세상 따윈 내가 왕따 시키겠다는 기분으로! 번개머리, 눈 부릅뜨랬지!”
윽박 지른다고 없던 사회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만들어질 리 만무하건만. 사진작가는 도통 포기하질 못했다.
현덕은 사진작가의 요청대로 기괴한 포즈를 취한 채였다. 양팔을 양옆으로 뻗어, 마치 한겨울에 비쩍 마른 나무처럼 기괴하게 꺾었다.
앞에 있는 연습생은 내내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꾸불꾸불한 미역 머리로 얼굴의 절반 이상을 가렸는데. 양손을 앞으로 내밀어 마치 총을 쏘는 듯한 포즈를 하고 있었다. 물론 두 손에 총은 없었다.
옆에 선 연습생은 커다란 고글을 써서 입만 겨우 내보이고는, 물구나무를 섰다. 두 다리는 직각으로 뻗어 있었다.
현덕의 팔이 벌벌 떨리듯 다른 연습생들의 팔과 다리도 파들파들 떨렸다.
‘신종 고문인가? 이건 청소년 학대야.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냐?’
현덕은 패닉 상태였다. 호랑이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아날 수 있다는 속담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말인지 오늘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어떻게 정신을 차릴 수 있단 말인가. 호랑이 수십 마리가 노려보고 있고, 카메라를 든 대왕 호랑이는 이제 이 세상을 좀 증오해 보라고 어흥어흥 하고 있는데.
‘난 너무 세상을 쉽게 살려고 한 게 아닐까? 아이돌 연습생이란 걸 너무 쉽게 본 게 아닐까?’
현덕은 뒤늦은 후회를 하다가,
“야, 번개 머리! 눈 똑바로 뜨라고!”
눈을 부릅떴다.
정면에서 쏟아지는 조명 때문에 눈이 너무 뻑뻑하고 아파서 눈물이 났다.
‘이게 체계적인 트레이닝 시스템이라고?’
분명 오 팀장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TE엔터테인먼트는 체계적인 트레이닝 과정을 운영하고 있으며, 특히나 현덕같이 기초부터 트레이닝이 필요한 연습생의 경우에는 따로 기간을 두고 기본기를 닦아 준다고. 바로 어제 들었던 말이었다.
현덕은 자신을 칭찬하는 말보다 그 말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계약하고 돌아온 날, 설레는 마음에 쉬이 잠들지 못했다. 이불로 몸을 돌돌 만 채로 한참 꼼지락거렸다.
‘어떤 거부터 배울까? 내일 회사에 가서 신인개발팀 직원분과 의논하면서 시간표를 짜야 되겠지만. 내가 배우고 싶다고 하면 하게 해주겠지? 춤이랑 노래 말고 중국어도 배워보고 싶은데. 피아노도 배울 수 있으면 배워보고 싶어. 기타도!’
학교에서 배울 수 없었던 걸 새롭게 배울 수 있다니. 너무 기대됐다.
오 팀장이 자랑했던 TE엔터테인먼트의 연습생 트레이닝 시스템은 현덕의 마음에 쏙 들었다.
다른 기획사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TE엔터테인먼트는 월요일부터 토요일, 오후 1시부터 10시까지 1시간 단위로 연습생을 위한 강습을 운영했다. 연습실과 강사가 허락하는 한에서 원칙은 1:1 수업이지만 수준이 비슷하고 강습을 원하는 시간이 겹치는 경우 두세 명이 같이 수업을 받을 수도 있었다.
춤, 노래, 랩은 물론이거니와 일본어, 중국어, 영어 같은 외국어에 각종 악기나 작곡 작사 교육은 물론 인성교육이나 안전교육, 성교육 같은 교양 수업까지 강습은 다양했다. 필요하다고 생각해 요청하면 태권도 같은 운동이나 기타 개인기를 키울 수 있는 수업도 열어 주었다.
무료로.
데뷔를 하게 되면, 연습생 시절의 트레이닝 비용을 활동 수익에서 감한다고 했지만. 현덕은 그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데뷔를 안 한다면 그처럼 다채로운 수업을 마음껏 무료로, 1:1로 들을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현덕은 자신이 아이돌로 데뷔할 수 있으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용기를 내어 오디션을 보고 연습생 계약을 했기에 새로운 것들을 배울 수 있다는 기쁨만이 가득했다.
그랬기에 잠을 설치고도 아침 일찍 일어나고, 학교에 가서도 내내 싱글싱글 웃었다. 같이 어울리는 친구들이 뜨악해할 정도였다.
“왜 그래. 경시대회 못 나간 게 그렇게 충격이야?”
민철이 남몰래 물어볼 정도였다.
어차피 데뷔할 생각도 없었고, 학교 공부에 지장이 안 가는 선에서 연습생 생활을 하리라 생각했기에. 현덕은 친구들에게 자신이 TE엔터테인먼트의 아이돌 연습생이 되었다고 굳이 말하지 않았다.
학교 수업이 끝난 후 함께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자는 친구들의 제안을 거절했다. 집에 가서 입대를 앞둔 불쌍한 형이랑 놀아줘야 한다는 변명을 하고는 지하철을 타고 곧바로 TE엔터테인먼트로 왔다.
그랬건만.
현덕의 기대감은 산산조각이 났다.
2층 신인개발팀 사무실로 찾아간 현덕은 처음 보는 직원에게 붙잡혀, 어딘가로 질질 끌려갔다. 현덕이 어딜 가는 거냐고 묻자 직원은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피곤해서 말할 힘도 없으니 아무것도 물어보지 말라는 뜻이었다.
당황한 현덕이 눈만 데굴데굴 굴리는 새 엘리베이터는 6층에 멈춰 섰다. 현덕은 거기서 대여섯 명의 사람들, 자신들을 스타일리스트니 코디네이터니 등등으로 소개하는 또 다른 직원들에게 붙잡혔다.
분명 개인 물건을 보관할 수 있는 사물함을 제공해 준다고 했는데, 그런 건 없었다. 현덕의 책가방과 교복은 분장실 한구석에 처박혔다.
현덕은 하얀 천이 쳐진 탈의실에서 바지와 셔츠, 코트를 갈아입었다. 바지는 곰 가죽으로 만들었나 의심이 드는 털 바지였다. 셔츠는 나일론이었다. 코트는 빤딱빤딱한 에나멜 재질의 레인코트였다. 그마저도 형광 연두색이었다. 패션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현덕이 보기에도 이건, 도무지 평범한 상식의 사람이 입을 수 있는 옷이 아니었다.
직원들의 성화에 어쩔 수 없이 옷을 입고 나오자 다음 차례는 헤어스타일이었다. 젤로 머리를 감길 듯 범벅을 만들어 놓더니, 머리를 열두 가닥으로 나누어 각각의 가닥을 번개 모양으로 세웠다.
번개, 분명 번개 모양이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머리에 반짝이 풀을 바르고 군데군데 노란색 칠을 했다.
“머리를 염색하는 건가요? 안 돼요. 교칙에 금지되어 있어요.”
현덕이 기겁했다. 하지만 현덕의 어깨를 꾹 누르는 힘은 현덕이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집에 가서 머리를 감으면 원상복귀 될 거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현덕은 반항을 포기했다.
도깨비에게 홀린 것같이 분장을 마치고는 촬영실장으로 끌려갔다. 거기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 왁자지껄했다.
강렬한 조명 아래 더 강렬하게 생긴 사진작가가 서 있었다. 그의 뒤로는 아마도 이 기획사의 연습생이라 생각되는, 수십 명의 남자와 여자들이 무리지어 서 있었다. 대략 서른 명은 족히 되어 보였다.
‘이게 소수 정예라고? 그럼 다른 기획사에는 연습생들이 얼마나 많다는 거야?’
현덕은 놀랄 새도 없이 조명 앞에 서야 했다. 조명 앞에는 현덕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을 한 남자 연습생이 네 명 서 있었다. 현덕은 비어 있는 왼쪽에서 두 번째 자리에 멀뚱히 섰다.
그리고 사진작가의 호통이 시작되었다.
현덕은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한 채 사진작가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으며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갈고, 팔다리를 기괴하게 꺾어야 했다. 그러면서 이 세상을 증오하고, 학교와 어른들을 싫어해야 했다. 공부라는 틀에 나를 가둬버린 이 세상을 내가 쳐부수리라 다짐해야 했다.
현덕은 어제의 오 팀장을 만나 멱살, 아니, 팔소매 정도는 붙잡고, 짤짤 흔들며 물어보고 싶었다.
‘체계적이라면서요. 나 같은 초보는 따로 초보 코스가 있다고 했잖아요. 일대일 강습 받을 수 있다고 했잖아요!’
오 팀장은 분명 그 특유의 털털한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조만간 보이 그룹이 하나 데뷔하게 될 거 같아서 회사가 좀 어수선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게다가 우리 회사에서 구상하고 있는 이미지와 어울린다면 현덕 씨도 데뷔조에 들 수 있을 거라고도 말했고. 뭐가 잘못됐나?’
새삼 사진작가가 바라는 ‘어른에 대한 분노’가 무럭무럭 자랐다.
현덕은 조명 때문에 눈물이 맺힌 눈에 힘을 빡 줬다. 사진작가를 오 팀장 보듯 쳐다보니,
“좋았어! 이제야 감 잡았구나, 번개 머리!”
사진작가가 더없이 좋아했다.
현덕은 진한 허탈감을 느꼈다. 어째서인지 학교에서 배운 이육사 시인이 생각났다.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수감번호로 자신의 이름을 지은 이육사 시인님의 심정은 이런 거였을까.
‘내 뜻으로 내 이름을 버린 건 아니지만, 이름 말고 번개 머리라고 불리니 기분이 너무 슬프네요. 날 번개머리라고 부르는 이 TE엔터테인먼트를 부숴버리고 싶어요. 그래서 독립을 원……. 아니, 집에 가고 싶어요.’
현덕이 입술을 깨물었다.
7층 건물의 TE엔터테인먼트를 꽝꽝, 거대한 망치로 때려 부수고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 간절함은 고스란히 하얀 얼굴에 드러났다.
“번개 머리! 그래, 바로 그거라고!”
사진작가에게 이유 모를 칭찬을 들으면서 그렇게 하루가 끝나버렸다.
어느덧 밤 10시였다.
목이 쉰 사진작가는 수고했다며 연습생 다섯 명을 풀어줬다. 그때까지 내내 세상을 증오하고 학교를 탈출하고 싶어 해야 했던 현덕과 네 명의 연습생들은 비로소 자유를 얻었다.
다섯 명의 연습생들은 좀비처럼 비틀거리며 사진작가에게 가서 장장 네 시간 넘게 찍었던 결과물을 확인했다. 그리고 컨셉에 대한 비교적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네 명의 연습생들은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인 듯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을 듣기보다는 사진에서 자신이 어떻게 나왔나 보기 바빴다. 아무것도 모르는 현덕만이 가뭄 끝에 단비를 맞이하듯 사진작가의 설명을 경청했다.
예정대로 진행이 된다면 아마도 두세 달 뒤, TE엔터테인먼트에서는 새로운 아이돌 그룹이 데뷔하게 된다. 그 보이 그룹 컨셉은 이것이었다.
‘자신들을 옥죄는 어른들의 간섭, 주입식 학교 교육, 자본주의적 탐욕과 이기심에 물들어 약자를 핍박하는 세계정세를 벗어나 드넓은 우주 공간에서 평화와 자유를 꿈꾸는 10대 소년들.’
10대 소년의 순수함과 어른과 세상을 증오하는 거친 눈빛, 그리고 우주. 이 모든 컨셉을 4차원적 분위기에 모두 담아내야 한다고 했다.
형광 노랑, 연두, 파랑, 빨강, 보라색의 레인코트와 젤을 잔뜩 발라 세운 기괴한 헤어스타일이 스페이스 오페라 컨셉이었다니. 스타워즈 영화를 무척 재미있게 보았던 현덕은 심장이 아파왔다.
현덕은 사진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눈빛이 촉촉해서는, 뭐가 그리 억울한지 앞을 정면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번개 모양의 노랗고 까맣고 반짝반짝하는 머리는 확실히 지구에 사는 인간의 머리라 할 수 없어 보였다. 사람이 옷을 입은 건지 옷이 사람을 입은 건지 알 수 없는 형광 연두색의 레인코트는…….
현덕은 더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이 주 전부터 계속 컨셉 사진 찍고 있는데, 계속 찍은 사람도 있을 거고 아닐 건데. 앞으로도 계속 바뀔지 몰라. 여기서 누가 되고 안 될지 모르는 거야.”
등 뒤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기다렸던 원수, 아니 오 팀장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남아 있던 연습생들이 일제히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현덕도 얼결에 고개를 수그렸다.
오 팀장은 연습생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어제 봤던 털털하면서도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은 온데간데 없었다. 마치 군대 교관을 연상시키듯 무뚝뚝한 얼굴이었다.
“자기가 확실히 데뷔할 거라고 착각하지 마. 아직 데뷔조 확정된 거 아니니까. 그룹 컨셉 맞는 이미지 찾으려고 이리저리 이미지 맞는 연습생들 모아서 사진 찍어 보는 단계니까. 괜히 착각에 빠져서 나중에 실망하지 말고. 평소처럼 연습하고, 주간 평가랑 월말 평가 잘 준비하고. 알았지?”
“네!”
“네!”
“넵!”
“명심하겠습니다!”
현덕을 제외한 네 명의 연습생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몇 시간 동안 혹사당한 청소년들에게 이런 말을 하다니? 일단 고생했다는 말이라도 한마디, 먼저 하는 게 예의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 건 현덕뿐인 듯했다.
“좋아. 남아서 연습할 사람들은 연습하고, 아닌 사람들은 출석부에 퇴근 시간 적고 가라. 오늘도 고생했다.”
오 팀장은 바로 뒤돌아서 걸어 나갔다. 현덕은 그를 붙잡아 자초지종을 들을 기회를 잡지 못했다.
촬영장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사진작가와 직원들은 촬영장을 정리하느라 분주했다.
함께 사진을 찍던 연습생들은 자기들끼리 뭉쳐서 어딘가로 사라졌다. 늦은 시간까지 남아서 촬영을 지켜보고 있던 연습생들도 삼삼오오 자기들끼리 뭉쳐 움직였다. 집으로 가는 연습생들은 거의 없었다. 밤새 연습하자느니, 첫 차 타고 집에 가자느니,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현덕은 홀로, 그 가운데에 멀뚱거리고 서 있었다. 아무도 현덕을 쳐다보지도 말을 걸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현덕의 사진을 찍던 사진작가마저도 현덕을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꼭 투명인간이 된 것 같았다.
특히나 다른 연습생들에게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바로 어제, 오 팀장에게 숨겨져 있던 원석이니 뭐니 온갖 칭찬을 받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뭐, 이게 당연한 거지.’
현덕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분장실 쪽으로 돌아섰다.
‘내가 진짜 열여섯 살이었으면 꽤 상처였을 거 같긴 한데.’
그냥 웃음만 나왔다.
연습생 첫날부터 데뷔조에 합류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현덕이 어이없는 만큼 기존 연습생들도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일 터였다.
이제 막 계약한 신입 연습생이 다른 연습생들을 제치고 데뷔조에 들다니. 기존 연습생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촬영 내내 자신을 뒤쫓던 눈빛들은 여러 감정이 섞여 있었다. 그중에는 사진작가가 바라던, 지구를 부숴버릴 듯 강렬한 증오가 느껴지는 눈빛도 몇몇 있었다.
분명 열여섯 살의 중학생이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TE엔터테인먼트의 어떤 어른도 그런 상황에 처한 현덕을 돌봐주지 않았다.
촬영 막판에 들른 오 팀장마저도 어제와는 다른 태도였다. 버틸 수 있으면 버텨보라고. 아니, 이 상황을 신고식을 치르듯 버텨 내야 연습생이 될 수 있는 거라고 말하는 듯했다.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신인 아이돌 그룹 데뷔를 앞두고 있지 않았다면, 설사 그런 상황에 처했다고 하더라도 대뜸 데뷔조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하지 않았다면.
현덕은 평범한 연습생1이 되어 천천히 연습생 무리에 스며들었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연습생들과 친해져 연습생 세계의 생리를 천천히 익히고, 어떤 무리에 속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회사는 현덕이 그럴 수 있도록 배려해주지 않았다.
‘내가 끈기 있어 보여 마음에 들었다더니, 그 끈기가 어느 정도인지 시험해 보려는 건가?’
딱딱하게 굴던 오 팀장. 세상을 증오하는 눈빛을 보이라고 윽박지르던 사진작가. 제대로 된 설명도 안내도 없이 자신을 호랑이굴로 밀어 넣던 TE엔터테인먼트의 직원들. 모두가 방관자였다.
연습생들은 사진작가에게 구박받는 현덕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나라면 더 잘 할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들은 처음엔 경계 어린 눈빛을 보냈지만, 시간이 지나자 현덕을 비웃고 경멸하기 시작했다. 그런 태도의 바닥에는 질투심이 깔려있었다.
어째서 현덕이 자신들을 제치고 그 자리에 서 있는지 모르겠다는 시선이었다. 멋대로 판단하고, 현덕을 자기들보다 아래에 있다고 멋대로 깔보고 있었다.
익숙한 눈빛이었다. 대학교 고시반에 처음 들어갔을 때. 몇 년간 사시를 준비하던 선배들이 그런 눈빛으로 현덕을 바라 봤으니까.
시간이 지나고는 나이 어린 후배들이 현덕을 그렇게 보았다. 군대에 갔을 때는 공부만 하다 온 샌님이 뭘 알겠냐며 현덕을 비웃었다.
그럴 때면 현덕은 언제나 자신의 장기를 펼쳐내 견뎠다.
성실함, 끈기, 묵묵함.
현덕의 무기는 언제나 그러한 것들이었다.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지껄이며 사람을 제멋대로 평가하고 재단하는 사람들을 진지하게 상대할 필요가 있을까. 자기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장점이나 강점이 드러나면, 호들갑을 떨어대며 태세를 전환할 텐데.
‘내가 선택한 일의 결과는 내가 감당해내면 되는 거야. 다른 사람들의 시선 따위, 하나도 안 중요해.’
스물여덟의 겨울. 한 남자가 현덕에게 말해준 것이었다.
현덕은 돌덩이를 얹은 듯 무거운 어깨를 주먹 쥔 손으로 툭툭 쳤다. 그리고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사진을 찍을 때만 해도 내일 당장 그만두겠다고 말하겠다고 생각했건만. 막상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고 무시당하고 나니, 호승심이 돋았다.
‘이런 취급을 당하고 그만두는 건 쪽팔리는 일이지. 어디 두고 보자고. 계속 날 그런 눈으로 쳐다볼 수 있을지.’
언젠가 그만두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시기를 정하는 건 남들의 시선에 상처받아서, 남들의 무시에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는 아니어야 한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충분히 경험하고 즐겼다고 판단했을 때일 것이다.
데뷔조로 뽑힐지 모를 상황에서 컨셉 사진까지 찍었으면서, 현덕은 여전히 자신이 아이돌로 데뷔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현덕은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팔을 겨우겨우 들어 교복을 갈아입고 책가방을 멨다.
이 지친 몸을 끌고 집까지 어떻게 갈까 고민하며 건물을 나왔다. 오 팀장이 출석부 어쩌고 하는 얘기를 했지만, 전해 들은 바 없으므로 깨끗이 무시했다.
그리고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 첫날인데 어땠냐고 묻는 어머니와 형과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도 못하고 곧바로 잠들었다.
***
눈을 감았다가 뜨니 아침이었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현덕은 어제가 사라지고 오늘의 아침이 온 것을 확인했다.
“헉, 미친. 복습 안 하고 또 그냥 잤어.”
베개에 머리를 콩콩 박으며 절규했다.
“대체 왜, 자꾸 그냥 잠드는 거냐고.”
TE엔터테인먼트 연습생 생활을 한 지 어언 일주일. 매일 아침 현덕은 자신이 얼마나 의지박약한지 실감하고 있었다.
은 의지가 약하기 짝이 없는 자신을 실감하며 절규했다.
중학교 입학한 이후로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어제 배운 걸 어제 복습하지 못하고 자다니. 그것도 하루가 아니라 장장 일주일 내내.
맹덕은 자기도 처음 아르바이트 할 때는 한 달 내내 그랬다며, 한 달쯤 지나면 몸이 적응해서 괜찮아질 거라고 말해주었으나 전혀 위로되지 않았다.
TE엔터테인먼트에 가지 않는 일요일에 부랴부랴 한 주간 공부한 내용을 복습하긴 했지만. 시간이 부족해 예습은 꿈도 못 꿨다. 예습은 무슨. 복습이라도 하면 다행이었다.
현덕은 오늘이라도 일찍 학교에 가서 오늘 배울 내용을 예습하자고 생각하며 급히 일어났다. 그리고 오늘이 토요일인 걸 깨달았다.
“이제는 날짜도 헷갈리네.”
현덕은 교복 바지를 든 채로 허탈하게 웃었다.
교복을 다시 옷걸이에 걸어 넣고, 오늘 스케줄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오전에 공부를 좀 하다가 열두 시쯤 점심을 먹고 TE엔터테인먼트로 갔다가, 돌아오면 또 고꾸라져 잠들겠지.
“역시 관둬야 하나?”
현덕은 찬물로 세수를 하며 중얼거렸다. 어느새 입버릇이 되었다.
“학교 공부랑 균형을 잡고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도 아니야.”
친구들과 그룹과외를 하거나 단과 학원을 다닌 적은 있으나 그뿐. 현덕은 기본적으로 혼자 공부하는 걸 좋아했다.
학교 수업을 잘 듣고 예습과 복습을 철저히 하면 내신은 충분히 관리할 수 있었다. 과고나 외고를 갈 생각은 없으니 따로 학원을 다닐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공부에 소홀해지지 않는 선에서 TE엔터테인먼트 연습생 생활을 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학교에 갔다가 TE엔터테인먼트에 가서 이러저런 트레이닝을 받고 집으로 돌아와 가볍게 복습하고 잠에 든다. 이 얼마나 조화롭고 아름다운 스케쥴인가. 현덕은 자신이 이 스케쥴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엄청난 착각이었다.
연습생 생활은 만만한 게 아니었다. 특히나 현덕에게는 더욱 가혹했다.
일주일째, 현덕은 그 대단하다는 TE엔터테인먼트의 체계적인 연습생 트레이닝 시스템을 맛보지 못하고 있었다. 곧 데뷔한다는 보이 그룹 데뷔조, 거기에 포함될락 말락 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그 상황이 현덕을 고달프게 만들었다.
현덕은 지난 일주일 동안, 일요일을 빼고 6일 내내 TE엔터테인먼트에 갔다. 그중 4일을 컨셉 사진을 찍는 데 사용했다.
컨셉 사진을 찍는 연습생은 두 명을 제외하고는 매일매일 바뀌었다. 확정된 멤버 두 명을 중심으로, 그룹 컨셉과 멤버들과 이미지가 맞는 세 명을 찾는 듯했다.
현덕은 매번 형광 에나멜 레인코트나 털이 잔뜩 달린 까만색 코트, 의외로 정상적인 정장 차림을 오가며 분장을 해야 했다.
새로운 보이 그룹의 컨셉 담당자가 보기에는 현덕의 외모가 그룹의 컨셉에는 어울리나 데뷔가 확정된 두 명의 멤버와는 어울리지 않는 듯했다. 빼자니 아깝고 더하자니 애매한 계륵인지라, 현덕은 계속 컨셉 사진을 찍어야 했다.
4일을 제한 나머지 이틀은 현덕의 자리에 누군가 다른 연습생이 들어간 날이었다. 현덕이 뭘 해야 할지 몰라 신인개발팀의 회의실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그제야 회사는 오리엔테이션을 해줬다.
2층의 복도에 늘어선 철제 사물함 중 하나에 현덕의 이름표를 달아주었고. 뒤늦게 회사의 연습생 시스템을 설명해 주었다. 출석부라거나 주간 평가라거나 월말 평가 같은 것들도 알려주었다. 그리고 현덕을 방치한 것에 대해 뒤늦게 사과했다.
덧붙여 말하기를, 현덕이 만약 이번에 데뷔할 보이 그룹에 포함된다면 아주 빡빡하게 트레이닝해줄 거라고 했다. 그렇게 되면 학교에 다니기 힘들 테니, 대외 활동을 잘 인정해주고 이런저런 배려를 잘 해주는 문화예술고로 가는 게 좋을 거라고 말했다. 고등학생 연습생 중 상당수는 그 고등학교로 진학하거나 전학한 경우가 많다고.
현덕은 못 들은 척했다.
이어서 직원은 만약 현덕이 이번에 데뷔하지 못하게 됐을 때의 처우도 말해주었다.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천천히 기본기 다지기 트레이닝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직원은 그것이 마치 현덕에게 내려진 처벌이라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결국 지금 준비 중인 보이 그룹으로 데뷔하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고통을 받을 테니 잘 감당해내라는 뜻이었다. 현덕은 그의 말이 무척이나 무책임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현덕은 그 이틀 동안 TE엔터테인먼트의 연습생으로서 알아야 하는 기본 소양을 닦았다. 하지만 인간관계는 여전히 제로 상태였다. 직접적인 괴롭힘은 없었지만, 아예 투명인간 취급당하는 건 여전했다.
현덕은 회사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었다. 혼자서 쉬는 시간을 보냈다. 가끔 주변에서 현덕을 비웃는 듯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대놓고 들렸지만 무시했다.
할 게 없어 시간이 붕 뜨면 신인기획팀에서 매일 작성하라고 숙제처럼 내준 연습일지를 작성하거나 문제집을 풀었다.
그런 상황이 화가 나진 않았다. 연습생들이 밉지도 않았다. 연습생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건 그들의 인성이 못돼서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오히려 연습생들이 안쓰러웠다.
고작 일주일. 연습생 이름표를 단 청소년들이 얼마나 학대에 가까운 대우를 받고 있는지. 그 속에서 얼마나 끊임없이 경쟁하고 노력하고 있는지 경험하기엔 충분한 기간이었다.
“지금, 내가 뭐 어떻게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현덕은 제 또래의 연습생들을 생각하며 허탈이 웃었다.
씻고 나온 현덕은 책상에 앉아 공부를 했다. 공부 후엔 점심밥을 든든히 먹고, TE엔터테인먼트로 갔다.
“……음?”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데,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곧 새로운 신인을 데뷔시킨다는 설렘과 활발한 열기로 가득 차 있던 공간이 초상집처럼 착 가라앉아 있었다. 바쁘게 뛰어다녀야 할 직원들은 구석에 모여 수군대고 있었다.
복도나 화장실 근처에 연습생들이 모여 있는 것도 보였다. 바로 어제만 하더라도 6층 촬영장에 모여 있거나, 연습실에서 연습하느라 바빴던 사람들이 의욕을 잃고 널브러져 있었다.
‘무슨 일이 있나?’
궁금했지만, 붙잡고 물어볼 만큼 친한 사람이 없었다. 현덕은 그냥 2층 신인개발팀으로 가 출석부를 적고 사물함이 있는 복도로 걸어갔다.
사물함 앞에 섰을 때였다.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코를 훌쩍이며, 울음을 억지로 참는 듯한 소리였다. 밤에 들었다면 귀신이 나타났다고 놀랄 만했다.
현덕은 소리를 쫓아 사물함과 벽 사이 공간을 바라보았다. 그 틈에 사람이 한 명 앉아 있었다.
남자였고, 현덕이 기억하기로는 연습생이었다. 키가 크고 머리를 짧은 스포츠형으로 깎았는데, 머리카락이 예쁜 녹색이어서 자꾸 눈이 갔다. 무엇보다 눈이 부리부리하게 컸다. 그래서 유독 눈에 띄어 여러 번 쳐다 봤건만.
그 부리부리한 눈과 현덕의 눈이 마주쳤다. 한참 운 듯 눈이 새빨갰다.
“뭐야, 너- 왜, 왜, 여기에 와!”
그 연습생은 현덕을 보자마자 당황하며 급히, 일어서려 했다. 허둥지둥 움직이느라 현덕이 열어 놓은 사물함 문을 못 본 것 같았다. 사물함 문의 뾰족한 모서리에 머리를 박아버렸다.
“윽!”
연습생이 머리를 양손으로 붙잡고 쓰러졌다.
“헉, 괜찮아요?”
현덕은 다가가려다가 아차 싶어 일단 두 걸음 뒤로 물러서며 두 손을 들었다. ‘나는 결코 어떤 고의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네가 멋대로 내 사물함 문에 머리를 들이민 것이다.’라는 의미였다.
그런 현덕을 본 연습생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여기서 드디어 한 대 맞는 건가?’
현덕이 이 연습생을 기억하고 있는 건 단지 특이한 머리색이나 남자답게 잘생긴 얼굴, 부리부리한 눈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연습생은 현덕을 투명인간 취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납게 노려보는 연습생 무리의 선두 주자였다.
그는 현덕이 컨셉 사진을 찍는 내내 구경하는 위치에 놓여 있었다. 현덕이 컨셉 사진에서 제외된 이틀 동안에는 현덕의 자리에 서 있었다.
‘아마 내가 오기 전까지는 이 사람이 주요 멤버 후보이지 않았을까. 내가 온 후에 밀린 걸까.’
조심스럽게 짐작할 따름이었다.
언제고 자신에게 불만을 가진 연습생과 다투는 날이 온다면, 가장 유력한 후보는 이 연습생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연습생이 남들의 눈을 피해 구석에서 펑펑 울고 있다. 그리고 그걸 다른 누구도 아닌 현덕에게 들켰다.
‘회사 분위기 안 좋은 거랑 연관이 있는 건가?’
현덕은 왜 우는지 궁금하면서도, 그와 자신 사이의 주먹다툼이 오늘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이 눈이 부리부리한 연습생은 운동을 열심히 하는지 키만 큰 게 아니라 몸도 좋았다. 만약 한 대라도 맞는다면 꽤 많이 아플 것 같았다.
현덕은 안전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그때,
“씨발. 씨이발.”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연습생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그건 꽤 놀랄 만한 광경이었다.
“왜, 왜, 우세요?”
현덕은 남자가 이렇게 솔직하게 우는 걸 처음 보았기에 당황하였다. 하지만 이내, 예전에 자신이 학교에서 어머니를 안고 울었던 걸 떠올렸다.
‘내가 남한테 뭐라고 할 건 아니구나.’
역지사지의 마음을 되새기며, 현덕은 사물함에서 휴지를 꺼내 연습생에게 내밀었다.
“이거 쓰세요.”
“…….”
연습생은 현덕이 내민 휴지를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휴지를 받는 대신 현덕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너, 넌 왜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이런 상황에서 조금 우습지만. 현덕은 그 연습생의 목소리가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생겼는데 목소리까지 멋지네.’
현덕이 가지지 못한 묵직하고 낮은 저음이었다.
“음……. 제가 어때야 하는 거죠?”
현덕이 조심스럽게 되묻자 남자가 덥석, 현덕이 내민 손을 잡았다.
“씨이발, 데뷔가 무산되었는데 넌 왜 아무렇지도 않은 거냐고.”
연습생은 휴지와 현덕의 손을 통째로 잡은 채 아예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망했다고! 다 끝났어. 데뷔 못 한다고. 망할 핑크키위 스캔들 때문에.”
“아…….”
대체 무어라 위로를 해야 할지 말문이 막혔다.
현덕은 제 손을 문 녹색 털의 커다란 멍멍이를 바라보며 대략 난감하였다.
“저기-”
“씨이발,”
“그러니까, 저기요.”
“왜 하필, 흐으, 지금인 거냐고.”
“음…… 저기-”
“씨발!”
“…….”
녹색머리에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연습생은 현덕이 무슨 말만 하려 하면 타이밍 좋게 울음을 터트렸다. 현덕은 어쩔 수 없이 손이 잡힌 채 계속 어정쩡하게 서 있어야 했다.
“음, 제가-”
“이번에야말로…… 진짜, 데뷔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거 참 안-”
“씨발, 씨발. 왜 왜, 왜에-”
자신이 우는 사람을 달래는 데 큰 재주가 없다는 걸 이렇게 깨닫고 싶지 않았건만.
현덕은 더 이상 말로 위로하길 포기했다. 대신, 자유로운 한 손을 길게 뻗어 사물함에 있는 휴지를 마저 꺼냈다.
“저기, 이거요.”
휴지를 내밀자 연습생이 고개를 들어 현덕을 올려다보았다.
두 눈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느라 새빨갛게 부어 있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눈이 왕방울만 했다.
‘눈 진짜 크다.’
이런 상황에서도 감탄이 나올 만치, 눈이 참 컸다.
원체 잘생겼지만 눈이 커서 더 잘생겨 보였다. 이국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연습생은 한 손으로 휴지를 받아 크게 코를 풀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한 손은 여전히 현덕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이 손도 마저 놔주면 참 좋겠는데.’
아쉽지만 그래도 절반 정도는 성공했다 생각하며, 남은 한 손마저 떨쳐낼 방법을 고민했다. 그런데 그 연습생은 코 푼 휴지를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고는 다시 현덕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 왜?’
현덕은 속으로 한탄했다.
울고 있지만 않았어도 왜 남의 손을 함부로 잡느냐고 내외하며 떨쳐버릴 텐데. 우는 사람에게 차마 매정하게 굴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연습생이 했던 말이 마음에 와 박혔다.
‘데뷔가 무산됐다니, 보이 그룹 데뷔조에 들려고 많이 애쓰는 거 같던데.’
현덕은 매일 밤 9시나 10시쯤이면 퇴근했다. 퇴근할 땐 2층 신인개발팀 사무실에 들러 출석부에 귀가 시간을 적고 나가야 했다.
출석부에 시간을 적다 보면 위아래에 쓰인 다른 연습생들의 출퇴근시간을 볼 수 있었다. 서로 자극을 주고받으라고 일부러 공개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다른 연습생들의 기록은 현덕과 달랐다. 학교에 다니지 않는 건가 의심이 되는 시간대가 많았다. 오후 1시 출근은 양반이었다. 분명 오후 1시부터 연습생 트레이닝이 시작된다고 했는데 오전 9시, 10시에 출근했다는 기록이 많았다.
귀가 시간은 대부분 새벽 4시, 5시였다. 현덕처럼 오후 10시에 퇴근하는 연습생은 거의 없었다. 일찍 퇴근해도 밤 11시, 12시였다. 데뷔를 앞둔 보이 그룹 데뷔조 선발 기간이기 때문일까. 그래서 열심히 준비하기 때문에 이런 걸까, 싶었지만.
‘그렇다 해도 너무 심한 수준 아닌가.’
걱정되었다.
학교에서 고3이라는 이유로 학생들을 이렇게 잡아둔다면? 일반 회사에서 큰 프로젝트를 앞두고 있다는 이유로 한 달 넘게 직원들을 아침 9시부터 새벽 5시까지 매일매일 일을 시킨다면? 분명 TV 뉴스에 소개될 것이다.
그런 가혹한 상황을 십대, 이십대의 사람들이 견디고 있는 것이었다.
‘이 연습생도 아침 일찍부터 나와서 새벽까지 연습하고, 데뷔를 준비하고 그랬겠지.’
연습생 무리에 쉬이 섞이지 못한 현덕이 보기에도 그는 절실해 보였다.
갑자기 툭 나타나 데뷔조에 들어간다 만다 얘기가 나오는 현덕을 그리 죽일 듯 노려본 것도, 정말 데뷔가 절실했기 때문일 터였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서까지 바랐던 데뷔가 무산되었다.
‘감당하기 힘들겠지.’
현덕은 시험 공부를 하다 자살할 생각까지 해 본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이 연습생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열심히 준비했는데도 합격의 문턱을 못 넘을 때마다 현덕은 늘 자책했다.
‘내 공부가 많이 부족한 걸까? 그래, 내가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서 그런 거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공부했어도, 그래도 내 공부는 부족한 것이었다. 합격하지 못했으니까.
공부하는 걸 싫어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매일매일 공부하는 게 마냥 행복하고 즐겁진 않았다. 공부를 하다 보면 책 위로 눈물이 뚝, 뚝, 떨어질 때도 있었다.
책이 흥건하게 젖은 후에야 울고 있는 걸 깨닫곤 했다. 그렇게 울면서도, 공부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흐르는 눈물을 계속 옷소매나 휴지로 닦으며 책을 봤다.
그렇게 공부해도 시험에서 자꾸 떨어졌다. 그리고 떨어질 때마다 생각했다.
‘내가 부족한 거야. 그래서 떨어진 거야.’
누구도 원망할 수 없었다. 어떤 이유도 댈 수 없었다. 그저 자책하며 더 열심히 해야 된다고 스스로를 몰아세웠다.
그렇게 살아 왔던 삶이 테이프를 되감듯 되돌려졌지만, 그때의 기억과 감정이 지워진 건 아니었다. 그때의 자신을 기억하기에, 차마 이 연습생의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현덕이 생각하기에 이번에 데뷔가 무산된 건 천재지변으로 인한 재앙과 같은 것이었다. 어느 누가 핑크키위에게 스캔들이 터질 줄 알았겠으며, 그 때문에 보이 그룹의 데뷔가 엎어질 거라 생각했을까.
하지만 이 상황을 견뎌야 하는 연습생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운이 없어서, 내가 실력이 없어서. 이번에도 기회를 잡지 못한 거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정말 실력 있었다면. 그래서 데뷔해서 뜰 수 있는 연습생이란 확신이 있었다면 회사에서도 이렇게 쉽게 엎지 않고 데뷔를 시켜줬겠지.’ 라고.
현덕은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내가 그랬으니까.’
현덕은 눈물을 멈추지 못하는 연습생을 바라보며, 자신의 손을 빼내는 대신 그 연습생의 손을 꽉 쥐었다.
젖은 휴지에 싸여 붙잡혀 있던 손이 역으로 자신을 꽉 잡자, 연습생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씨발, 나는-”
“이거 그쪽 잘못이 아니에요. 열심히 노력했잖아요. 매일매일, 정말 열심히 했잖아요.”
“…….”
“그쪽이 부족해서 데뷔 못 하게 된 거 아니라는 거 알잖아요. 그냥 갑자기,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친 거예요. 그쪽은 정말 재능 있고 노력도 열심히 해서 데뷔할 수 있었는데, 갑자기 그냥 지진이 나고 태풍이 분 거예요. 그래서 지진 멈추고 태풍 지나갈 때까지만 잠깐 데뷔가 일시정지 된 거뿐이니까.”
현덕은 다른 한 손으로 연습생의 어깨를 툭툭 쓸어주었다. 자신이 시험에 불합격하고 움츠러들어 있을 때마다 맹덕이 자신에게 해주었듯이.
“진짜 노력하고 열심히 한 거 알아요. 잘했어요. 고생했어요. 그거 다 헛것 된 거 아녜요. 고스란히 그쪽 실력이 되어 있어요. 데뷔는 잠깐 밀린 걸 거예요, 스캔들 가라앉으면 분명 다시 시동 걸릴 테니까, 그때 데뷔하면 돼요. 당신, 꼭 데뷔할 거예요.”
“…….”
“내가 보기에 그 쪽 진짜 열심히 했어요. 정말 최선을 다했어요.”
열여섯 김현덕이 스물 여덟 김현덕에게 하고 싶은 말을, 현덕은 이름 모를 연습생에게 진심을 담아 말했다.
“난, 나는…… 나는…….”
후두둑, 부리부리한 눈에서 눈물이 방울째로 떨어졌다.
연습생은 이 이상 어떻게 더 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통곡했다.
이 울음 소리를 듣고도 복도에 아무도 나타나지 않을 수 있는 지, 현실감이 사라질 정도였다.
‘곧 이 울음소리를 듣고 신인개발팀의 누구든 나타나 이 연습생에게 격려를 해주겠지. 같은 연습생 처지인 내가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도움이 되고 위로가 될 만한 말을 해줄 거야.’
현덕은 이리 생각하며 계속, 연습생의 어깨를 다독다독 두드려주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부리부리한 눈의 연습생이 제풀에 지쳐 울음을 그칠 때까지.
***
연습생이 울음을 그치자, 현덕과 연습생 사이는 매우 어색해졌다.
“…….”
“…….”
“…….”
“…….”
둘은 차마 서로 눈을 못 마주치고 고개를 숙였다.
부리부리한 눈의 연습생은 척 보기에도 현덕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다. 게다가 모르긴 몰라도, 현덕이 여기 온 후 일주일 동안 현덕의 뒤에서 꽤나 현덕을 씹었을 것이다. 그런데 현덕을 부여잡고 펑펑 울었으니 얼마나 부끄러울까.
‘아무리 쪽팔려도 죽고 싶다는 생각만 안 했으면 좋겠는데.’
현덕은 바닥을 보며 생각했다.
부리부리한 연습생은 어찌할 바 모르고 돌처럼 굳어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붙잡힌 손을 타고 느껴질 정도였다.
‘내가 먼저 자리를 피해줘야겠다.’
현덕은 같은 자세로 오래 서 있느라 뻐근해진 다리를 툭툭 털며 목을 꺾었다. 으득, 으득, 관절에서 소리가 났다.
“그럼, 저 먼저-”
“어, 어디 가게?”
연습생이 화들짝 놀라며 현덕을 바라봤다.
“어…….”
현덕은 할 말을 잃었다.
놀이동산에서 엄마를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아이의 표정이 이렇지 않을까.
여전히 현덕의 손을 두 손으로 꽉 쥔 연습생이 그 큰 눈을 껌뻑였다. 쌍꺼풀이 없는 현덕과 달리 연습생은 쌍꺼풀이 짙었다. 속눈썹도 무척 길었다. 눈물에 젖은 큰 눈이 동공지진하자 그 비주얼이 심히 보기 좋았다.
이 얼굴을 정면에서 보며, 현덕은 ‘우리 이제 헤어져요, 여기에서 있었던 일은 제 기억에서 지울 테니까 걱정 마요. 그럼, 안녕.’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에구.”
한숨이 섞인 현덕의 목소리에 연습생이 움찔, 몸을 떨었다. 현덕은 그런 연습생의 손을 잡은 채로 잡아당겼다.
“일어날 수 있겠어요? 어지럽거나 그러진 않아요?”
“어어, 어.”
연습생은 현덕의 손을 잡은 채로 일어섰다. 잠시 비틀거리긴 했지만 금세 균형을 잡았다.
일어서니 확실히 현덕보다 키가 컸다. 사물함 문에 부딪힌 이마는 살짝 부어 있었다.
현덕은 열려 있는 사물함 문을 닫고 연습생을 잡아끌었다. 연습생은 고삐 맨 소처럼 현덕을 따라 걸었다. 현덕의 손을 놓지 않았다.
“일단 수분 보충을 보충합시다.”
현덕이 말했다.
연습생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현덕은 순해진 연습생의 손을 꼭 잡은 채로 회사 건물을 나가 좁은 골목 끝에 있는 편의점으로 갔다.
회사 건물 맞은편에 커다란 편의점이 있었다. 슬쩍 보니 연습생들이 우글우글 모여 있는 게 보여 그 편의점은 피했다. 자신은 상관없지만 이 눈이 부리부리한 연습생의 이런 모습을 함부로 노출하면 안 될 거 같았다.
골목에 위치한 편의점은 작고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안쪽에 테이블이 두어 개 놓여 있었다.
현덕은 연습생을 앉혀 놓고는 생수 두 병과 이온음료, 컵라면 등을 사서 계산했다. 요즘 계속 아버지와 아침식사를 같이 하며 용돈을 받아왔기 때문에 부담되진 않았다.
현덕은 일단 생수병 뚜껑을 따 연습생에게 주었다. 물을 충분히 먹인 다음에 이온음료도 마시라고 손에 쥐여 주었다. 그러고는 컵라면 두 개에 뜨거운 물을 부어 가지고 왔다.
“한참 울었으니까 피곤하고 배고플 거예요. 물 많이 마시고, 나랑 라면도 먹어요.”
혼자 먹으라고 하면 민망할까 봐, 현덕은 자신의 앞에도 라면을 두었다.
둘은 아무런 말 없이 3분을 기다린 후, 컵라면을 먹었다.
후루룩, 후루룩.
조용한 편의점에 두 명이 라면을 먹는 소리만 들렸다.
별로 배가 안 고프다고 생각했는데, 먹다 보니 컵라면 하나를 뚝딱 비웠다. 연습생도 울고 나니 확실히 허기졌는지 컵라면 하나를 뚝딱 해치웠다.
입가심으로 산 소시지를 까먹어도 영 입이 심심했다. 뭘 좀 더 사 먹을까 싶어 일어나려는데, 커다란 손이 현덕의 어깨를 꾹 눌렀다. 현덕은 도로 주저앉았다.
“과자는 내가 살게.”
연습생이 말했다.
목소리 울림이 좋았다. 현덕은 언제나 이런 목소리를 부러워했다. 자신이 꿈꾸던 목소리의 이데아를 만난 느낌이었다.
‘목소리 진짜 좋다.’
현덕이 새삼 감탄하는 동안, 연습생은 과자를 잔뜩 사와 테이블에 늘어놓았다. 센스 좋게 탄산음료도 사 왔다.
둘은 과자를 까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아니, 현덕은 들었고 연습생이 주로 말했다.
연습생의 이름은 박자룡이었다. 나이는 열아홉 살로 고3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가수를 꿈꿨고, 초등학생 저학년 때부터 연습생 생활을 했다고 했다.
‘수능이 얼마 안 남았는데 괜찮은 건가,’
현덕은 조금 의아했지만 질문을 하는 대신 초콜릿 바를 먹으며 자룡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었다.
자룡은 초등학교 때 동네에 있던 백화점에서 열린 댄스대회에 나갔다가 눈에 띄어 연습생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 연습생 생활을 했던 기획사는 TE엔터테인먼트가 아니라 다른 곳이었다. 중소 기획사였는데 연습실이 하나뿐이라, 연습을 하다가도 데뷔한 선배님들이 오면 얼른 자리를 비켜줘야 했다. 당연히 제대로 트레이닝을 받지 못했다.
그 기획사에서 데뷔한 아이돌이 TV 음악 프로그램에 한 번 나가보지도 못하고 이상한 행사에나 다니는 걸 보고 도망 나왔다.
자룡은 중학교 때 학교 친구들과 댄스 동아리를 만들어 활동했는데 그 동네에서 꽤 유명했다. 덕분에 여러 기획사에서 이런저런 제의도 받았지만 가지 않았다.
처음 들어갔던 기획사에서 워낙 크게 데였기 때문에 정말 제대로 된 기획사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부모님 몰래 전단지 돌리는 알바를 하거나 영어 학원을 다니겠다고 뻥을 쳐서 받은 학원비로 댄스 학원에 등록했다. 그렇게 몇 달간 준비하여 TE엔터테인먼트 오디션을 봐 연습생이 되었다.
지금의 현덕보다 한 살 어린 중학교 2학년 때부터 5년간 TE엔터테인먼트 연습생 생활을 계속했다. 그리고 여러 번 아이돌 그룹 데뷔조에 속했으나 번번이 데뷔가 무산되었다.
핑크키위 전에 먼저 데뷔할 뻔했던 보이 그룹의 데뷔조에 들어갔으나 그 데뷔조 자체가 엎어졌다. 이후 남녀 혼성 그룹 프로젝트에 포함됐으나 컨셉이 바뀌어 남자들은 제외되고 여자들만 묶어 핑크키위로 데뷔했다.
핑크키위가 유명해지는 걸 지켜보며, 다음 순서는 나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버텨 왔다. 실제로도 회사는 핑크키위 다음 순서로 보이 그룹을 준비했다.
자룡은 연습생들의 주간 평가와 월말 평가에서도 항상 상위권에 랭크되어, 초기에 무난하게 데뷔조에 속했다. 하지만 보이 그룹의 컨셉이 정해지자, 컨셉과 어울리지 않는다며 데뷔조에서 제외되었다.
“으윽, 그 스페이스 오페라 컨셉?”
현덕이 자신의 머리 위에 손짓으로 삐죽삐죽한 번개 머리를 만들자 자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룡은 자신이 그 컨셉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 충격을 받았고 또 슬펐다고 말했다.
‘그 컨셉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칭찬이 아닌가.’
현덕은 차마 자신의 생각을 소리내 말할 수 없었다.
자룡은 자신이 그 컨셉을 소화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헤어스타일을 과감하게 바꾸었다. 짧은 스포츠머리로 자르고, 모아놓은 용돈을 탈탈 털어 녹색으로 염색했다. 탈색의 과정은 고통스러웠지만 다행히 색이 예쁘게 나왔다.
노력의 대가는 달았다. 형광 연두색이 잘 받는다는 평가를 받으며 다시 데뷔조 컨셉 사진을 찍어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데뷔할 수 있을 줄 알았어.”
이렇게 말하는 자룡은 어딘가 공허해 보였다. 체념한 듯, 담담히 말하는 모습이 서글펐다. 그 기분을 조금은, 정말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기에. 현덕은 그저 아까 한 말을 되풀이해줄 수밖에 없었다.
“꼭 데뷔할 거예요. 데뷔할 수 있어요.”
현덕의 말을 들으며, 자룡이 씩, 웃어 보였다. 울어서 퉁퉁 부었지만 그래도 참 잘생긴 얼굴이었다.
“고맙다. 김현덕.”
그가 처음으로 현덕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
핑크키위의 스캔들은 열애설이었다. 당사자는 핑크키위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멤버였다.
그저 다른 남자 아이돌이나 배우와 사귀는 정도였다면 새로운 보이 그룹 데뷔가 무산되는 상황까진 가지 않았을 것이다. 열애설을 부인하거나 인정하여 공개 연애를 선언하는 정도로 상황을 마무리하면 됐을 테니까.
하지만 열애설 상대는 결혼하여 자식을 둘이나 둔 사람으로, 연예계 대표 공처가로 소문이 자자했던 중년 배우였다.
중년 배우와 함께 차 안에서 입을 맞추고, 서로 좋아 죽겠다는 듯 팔짱을 끼고 어느 건물로 들어가는 사진이 찍혔다. 변명으로 묻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터뜨린 매체도 문제였다. 다른 매체였다면 미리 TE엔터테인먼트에 연락을 했을 것이다. 적당히 흥정하여 다른 특종거리와 맞바꾸거나 하는 등의 거래를 시도했을 텐데. 하필이면 이쪽 업계에서 모두 기피하는 3류 찌라시급의 인터넷 뉴스 매체였다.
때문에 TE엔터테인먼트는 어떤 대처도 하지 못한 채 스캔들을 맞닥뜨려야 했다.
여파는 컸다. TE엔터테인먼트는 비상체제에 돌입했다. 한창 잘 나가던 핑크키위는 모든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예정되어 있던 CF, 다른 가수들과의 합동 콘서트, 인기 웹소설 원작의 웹드라마 조주연 출연 등등. 예정되었던 모든 스케줄이 캔슬되었다.
핑크키위 담당 매니저들은 물갈이 되었다. 담당 팀은 시말서와 감봉 등의 처벌을 받았다. 회사의 직원들은 밀려드는 전화에 시달려야 했다.
팬클럽은 해당 멤버를 제외하지 않으면 더 이상 핑크키위를 지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회사 앞에는 매일같이 핑크키위의 불륜을 규탄한다는 사람들이 몰려 시위를 하는 통에 시끌시끌했다.
회사 안팎이 시끄러웠지만, 연습생들이 주로 사용하는 2층, 3층은 조용했다. 데뷔가 무산되었다는 절망감이 무겁게 깔렸다. 연습생들은 맥이 빠진 듯 설렁설렁해 보였다. 데뷔조 구성을 앞두고 새벽같이 나오고 새벽 첫차를 타고 귀가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보이 그룹 데뷔 프로젝트가 모두 중지된 상태에서도 현덕은 여전히 연습생들 무리 밖에서 겉돌았다. 그마나 이름을 알게 된 자룡은 잠시 마음을 추스르고 오겠다며 회사를 나오지 않고 있었다.
핑크키위 스캔들 문제에 신인개발팀 직원들까지도 동원된 터라, 현덕은 어떻게 트레이닝을 받아야 하는지 전혀 안내 받지 못한 채 또 방치되었다.
그래도 현덕은 매일 회사를 나갔다. 연습생이 사용 가능한 1인용 보컬 연습실을 신청해 거기서 시간을 보냈다.
연습실은 고시원 방보다 조금 더 컸다. 컴퓨터 한 대와 책상, 마이크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외창이 나 밖이 보이는 건 좋았다.
공짜로 독서실을 다닌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어차피 나중에 회사가 좀 진정되면, 연습생 기초 트레이닝이라는 걸 받을 수 있겠지. 지금 난리가 났는데 회사가 날 챙겨줄 정신이 없는 건 당연한 거야.’
현덕은 도서관에서 빌려온 <복식 호흡하는 법>, <보컬의 첫 걸음>. <대중문화의 이해> 등의 책을 읽었다.
컴퓨터를 켜 유튜브에 들어가 TE엔터테인먼트 소속 아이돌의 노래를 들어보기도 하고, 조금씩 따라 불러보기도 했다. 두어 시간 정도는 학교에서 배운 과목을 복습했다.
삼 주가 지나고서야 회사는 정상 체제로 돌아왔다.
스캔들의 주인공인 핑크키위의 멤버는 탈퇴하고, 은퇴했다. 핑크키위는 새로운 멤버를 영입하여 활동을 재개하기로 했다. 새로운 멤버는 여자 연습생들 중에서 선발하기로 하였다. 새로운 그룹을 데뷔시키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규모가 크지 않아, 비교적 조용히 진행되었다.
현덕은 비로소 TE엔터테인먼트가 자랑해마지 않는다는, 그 대단한 연습생 기초 트레이닝 프로세스를 밟을 수 있었다. 신인개발팀 직원과 상담하여 일주일 단위의 보컬과 댄스 강습 시간을 정했다.
첫 수업은 대망의 댄스 수업이었다.
드디어 새로운 걸 공부할 수 있다는 흥분과 기쁨에 휩싸인 현덕은 열의에 불타며 연습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10분 후.
현덕은 드넓은 댄스 연습실 바닥에 대자로 쓰러져 헐떡였다.
“얘, 얘! 너 괜찮은 거니?”
불과 10분 전, 함께 잘 해보자고 파이팅을 외쳤던 댄스 선생님이 기겁하며 현덕에게 달려 왔다.
현덕은 선생님이 흔드는 대로 맥없이 흔들렸다.
“우욱!”
“얘! 너, 너, 여, 여기서 토하면 안 돼에!”
댄스 선생님의 비명이 연습실에 가득 울렸다.
현덕은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하여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최악의 불상사만은 어떻게든 참아내야 했다.
‘맞다, 지금 내 체력…… 개복치급이었지.’
문득, 학교에서 핸드폰을 걷기 전 민철이 보여줬던 미니 게임이 생각났다.
‘실제 개복치는 건강하다고 했는데. 내 체력은 개복치 게임에 나오는 개복치급이네.’
현덕은 빙글빙글 돌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댄스 연습실의 하얀 천장을 보며, 눈을 감았다.
***
현덕은 그대로 의료실에 실려 갔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땐 세 남자가 현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료실 담당자와 오 팀장, 댄스 선생님이었다.
“이 연습생은 그야말로 딱 생존에 필요한 만큼의 근육만 가지고 있네요.”
의료실 담당자가 말했다.
“이건 절대, 춤을 배울 수 있는 체력이 아닙니다.”
“얘가 데뷔조에 소속될 뻔해서 몇 시간씩 컨셉 사진 찍을 때도 얼마나 잘 버텼는데!”
오 팀장이 반박했다.
“그게 이 연습생이 가지고 있던 마지막 활기였을 겁니다.”
현덕은 댄스 선생님이 챙겨준 생수를 마시며, 자신을 불치병에 걸린 환자 보듯 하는 세 남자의 시선을 피해 눈을 내리 깔았다.
“운동…… 열심히 할게요.”
소심하게 앞으로의 포부를 밝혔지만,
“당연하지!”
“아니, 어떻게 살았기에 열여섯 살짜리 몸이 이 따위야? 그런 몸으로 어떻게 춤을 배워!”
의료실 담당자와 댄스 선생님의 잔소리만 한 바가지로 들었다.
“흠, 병약한 이미지 유지해서 밀고 가도 괜찮을 거 같은데? 병약 미소년 컨셉으로.”
“병약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얘, 아이돌 안 시키고 발라드 가수라도 시킬 거야? 아니, 안무 없이 서서 노래만 부르는 가수도 이 정도 체력으론 못 해! 절대 못 한다고!”
오 팀장은 현덕의 병약미를 높게 평가했다가 댄스 선생님에게 한소리를 들었다.
현덕은 그토록 궁금했던 TE엔터테인먼트의 체계적인 연습생 트레이닝 첫날, 오 팀장의 허락 하에 조퇴를 해야 했다.
일찍 집에 들어가자 부모님은 없고 맹덕만 있었다. 그는 베스킨라빈스 하프 갤런을 혼자 퍼먹으며 TV를 보고 있었다. 현덕은 배신감을 느끼며 숟가락을 들고 달려들었다.
“오랜만에 일찍 왔다? 요즘 맨날 늦었잖아.”
맹덕은 기꺼이 아이스크림을 내주며 현덕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오늘 있었던 일을 설명해주었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걸 미처 하지 못하고 쫓겨나듯 조퇴한 거라 억울한 마음이 목소리에 묻어났다. 현덕은 맹덕에게 투정을 부리듯 투덜댔다.
“뭐? 마지막 활기를 다 쓰고 왔다고?”
맹덕은 대놓고 어이없어하며 자신의 병약한 동생을 바라봤다.
“넌 그동안 공부는 무슨 체력으로 했냐?”
“앉아만 있었으니까. 그리고 나 요즘엔 학교 체육 시간에 꼭 운동 하거든?”
“퍽이나?”
형은 현덕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으며 비웃었다.
“진짠데…….”
현덕은 형의 구박을 받으며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다음날부터는 현덕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맹덕 쌤의 체력 증진 과외’를받는 학생이 되었다. 맹덕은 군 입대가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동생을 운동시키기 위해 이른 아침에 일어나는 기적을 선보였다.
TE엔터테인먼트에서는 댄스 트레이닝을 미루고, 현덕에게 회사 안 헬스장에서 PT를 받도록 했다. 다른 연습생들은 몸을 만들기 위해 PT를 받았지만 현덕은 체력을 기르기 위해 PT를 받았다.
다행히 보컬 트레이닝은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진도가 더뎠다. 체력이 부족하면 노래도 제대로 부를 수 없었다. 복식 호흡을 하며 노래를 좀 부르다 보면 하늘이 노래지고 천장이 빙글빙글 돌았다. 현덕이 비틀거리면 보컬 선생님은 얼른 수업을 멈추고, 현덕을 자리에 앉혀 쉬도록 했다.
그렇게 3개월이 지났다.
맹덕은 입대했고 현덕은 겨울방학을 맞이했다. 학교 친구들은 고등학교 선행학습을 위해 과외를 하거나 학원을 다녔다. 현덕은 계속 TE엔터테인먼트를 다녔다.
꾸준히 운동을 한 결과는 겨울이 다 지나고야 슬슬 나타났다. 비로소 현덕은 댄스 트레이닝을 다시 받을 수 있는 체력을 얻었다. PT 선생님이 현덕의 기초 체력을 보증해 주었다.
이후 현덕은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중간고사를 치르고 나서야 기본 트레이닝을 수료했다. 보통 연습생들이 3개월에서 6개월 정도면 수료하는 기본 트레이닝을 장장 8개월이 걸려서야 끝낸 것이다.
현덕을 가르친 선생님들은 모두 현덕을 좋게 평가했다. 체력이 없어 수업 진도가 늦었을 뿐. 현덕은 성실하고 착한 학생이었다.
현덕은 이제 기본기를 탄탄히 다진 연습생이 되었다. 그런데 장장 8개월 동안 기본기만 익히는 현덕을 바라보는 다른 연습생들의 평가는 선생님들과 전혀 달랐다.
연습생들은 현덕이 실력이 없고 게으른 데다가 의욕까지 없다고 생각했다.
“얼굴만 아니었으면 진작 쫓겨났을 걸?”
“저 얼굴도 성형한 거 아닐까?”
“그러게, 모를 일이지.”
“그나마 봐줄만한 게 얼굴 뿐인데. 진짜 얼굴이 아깝다.”
현덕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능한 잉여 인간 취급을 받았다.
‘신기한데?’
현덕은 뒤에서 수군대는 연습생들의 뒷담을 들으며, 항상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웃냐? 웃음이 나와?”
자룡은 그런 현덕을 보며 항상 제 가슴을 퍽퍽 치며 답답해했다.
자룡의 머리카락은 현덕이 기본 트레이닝을 받는 동안 제법 자라 반은 녹색이고 반은 까만색이었다.
“왜 그렇게 순해 빠졌어. 씨발, 그래서 이 험난한 연습생 생활을 어떻게 버티려고 그러냐? 넌 화도 안 나? 차라리 누구 한 놈 붙잡아서 대판 싸워버려.”
“뭘 굳이 그렇게까지 해요. 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멋대로 떠드는 거잖아요? 난 전혀 상관없어요.”
“씨발, 니가 못 하면 내가 한다.”
“뭘 그렇게까지. 하지 마요, 으아아, 하지 말라니까.”
현덕은 뛰쳐나가려는 자룡의 팔에 대롱 매달렸다.
운동을 꾸준히 하며 근육도 좀 붙고 체중도 늘었지만, 자룡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룡은 현덕을 고목나무에 붙은 코알라처럼 번쩍번쩍 들었다.
자룡이 열 받은 이유는 방금, 보컬 연습실 문 앞을 지나가던 연습생 몇몇이 현덕을 험담했기 때문이었다.
“김현덕 그거 완전 지진아 아냐? 얼굴도 허여멀개서, 뭐 그런 게 우리랑 같은 TE 연습생이라니. 같은 회사 소속이라고 말하기 존나 쪽팔려.”
“얼마나 버티겠냐. 이제 주평 들어가면 걔 얼마 못 가서 바로 방출될걸?”
“무슨 기본 트레이닝을 팔 개월씩 받냐? 얼마나 몸치박치길래? 그렇게 얼굴 믿고 연습생한다고 깝치는 것들은 정말 가만 두면 안 돼, 으휴.”
“자룡이 걔가 착해서 좀 돌봐주고 놀아주는 건데, 그거도 모르고 자룡이한테 들러붙는 거 봐라. 나중에 주평, 월평 할 때 자룡이한테 자기 끼워달라고 그러는 거 아냐? 그럼 박자룡, 걔한테도 겁나 손해일 텐데. 박자룡 걘 뭔 생각으로 그런 떨거지랑 어울리는 거냐?”
“낸들 아냐. 저번에 데뷔 무산되고 돌았나 보지.”
자신들이 지나친 연습실 안에 현덕과 자룡이 있는 줄 꿈에도 모르고 떠들어 댔다.
“형, 뭐 저런 말에 화를 내요. 진정해요, 진정해.”
현덕은 열심히 자룡을 말렸다.
자룡은 김샌 표정을 지으며 털썩 주저 앉았다.
“형이나 다른 친한 연습생들은 내가 열심히 한 거 알아주잖아요. 그럼 됐지. 형처럼 날 잘 아는 사람들만 내 욕 안하면 난 괜찮아요.”
“넌 좀 독해져야 돼.”
“무슨 소리. 나 아주 독해요.”
현덕이 웃으며 말하자,
“씨발, 독이 무슨 뜻인지 모르냐? 공부도 잘한다는 녀석이? 넌 순해 빠졌어, 이 순딩아.”
자룡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고만 좀 웃어, 사내 자슥이, 뭐 그리 실실 잘 쪼개냐. 시발, 뭐,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그렇긴 하지만.”
자룡은 그만 좀 웃으라고 현덕을 구박했다.
막상 현덕이 우울해하거나 웃지 않으면 무슨 일 있나 싶어 안절부절못할 거면서. 항상 말만 이렇게 험하게 했다. 현덕은 그런 자룡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현덕이 수료한 기본 트레이닝은 본격적으로 트레이닝을 받기 전 단계였다. 기본적인 춤 동작을 몸에 익히고, 목소리와 박자감을 다듬는 과정이었다. 이 과정 동안에는 주간 평가와 월말 평가를 받지 않았다.
이미 기본기를 갖추고 들어온 연습생들은 기본 트레이닝 기간 없이 바로 주간 평가와 월간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인지 기본 트레이닝 기간 없이 바로 주간 평가나 월간 평가를 받는 게 실력을 인정 받은 거라는 인식이 연습생들 사이에서 팽배했다.
기본 트레이닝을 받더라도 누가 좀 더 짧은 기간 내 수료하는지가 자랑거리가 되었다. 기본기를 제대로 다지고 트레이닝을 받기 위해 TE엔터테인먼트 연습생이 된 자룡이 보기엔 코웃음 나는 모습이었다.
현덕이 연습생들이 공용으로 사용하는 커다란 연습실에서 춤 동작을 복습할 때면, 자룡은 종종 현덕과 함께 했다. 기본기를 되새기려 현덕을 따라하기도 하고, 현덕의 연습을 도와주기도 했다.
그렇기에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
현덕은 기본기가 탄탄했다. 그 8개월 동안 배운 걸 전부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꾸준히, 성실히 진도 나가는 걸 보노라면 가끔 소름이 돋기도 했다.
‘공부에만 범생이가 있는 게 아니라 여기에도 범생이란 게 존재하는 건가?’
이 업계에서 눈에 툭 튀는 천재는 오히려 흔했다. 현덕처럼 차근차근, 꾸준히 해나가는 노력하는 거북이가 오히려 드물었다.
자룡은 현덕이 연습하는 걸 볼 때마다 토끼와 거북이가 달리기 시합을 하는 옛날이야기가 생각났다. 회사의 어중간한 연습생들은 낮잠을 퍼 자고 있는 토끼였다. 지금 현덕을 비웃는 연습생들 대부분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현덕에게 따라잡히고, 또 추월당하리라.
‘나도 그러지 않으려면 정신 차려야 되겠는걸.’
현덕은 자룡에게도 좋은 자극이 되었다.
‘연습생으로 보낸 햇수가 길다고 느긋하게 있다간,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콩알만 한 녀석에게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게 될지도 몰라.’
현재 자룡과 현덕의 실력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현덕은 이제 막 기본기를 익힌 초보 연습생에 불과했다. 자룡은 누가 무슨 음악을 틀어도 그에 맞춰 춤출 수 있는 수준이었다. 새로운 아이돌 춤은 하루면 거의 완벽하게 커버해냈다. 그럼에도 자룡은 현덕을 인정했다.
자룡은 그렇기에 현덕이 무시 받는 상황이 싫었다.
“씨발, 내 눈앞에서 네 욕하는 자식들 보이면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누가 형 앞에서 그러겠어요. 아까도 형이 여기 있는 줄 알았으면 절대 그렇게 얘기 못 했을걸요?”
“됐고. 넌 얼른 주평이나 받자. 너 주평 받는 걸 보면 쟤들도 정신 차리겠지.”
매주, 매월, 연습생들은 몇몇 씩 모여 팀을 짜 무대에 선다. 연습생들은 실제 무대에 서는 것처럼 복장을 갖추고 헤어와 메이크업까지 준비하기도 한다.
실력은 천차만별이었다. 자룡처럼 소위 A급 연습생들의 무대는 데뷔한 아이돌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하지만 학예회 무대를 보는 것처럼 엉성한 무대도 더러 있었다.
‘다음 주의 내 무대는 정말 유치원 학예회 같지 않을까? 일단 누가 날 주간 평가 무대 준비에 끼워줄지도 모르겠고.’
안 그래도 다음 주 첫 주간 평가가 걱정되어 죽겠건만. 자룡은 현덕이 타고난 천재처럼 다음 주 주간 평가를 멋지게 해낼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 자룡이 싫지 않으면서도 얄미웠고 고마우면서도 웃겼다.
현덕은 자룡이 앉아 있는 의자 다리를 발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형은 날 너무 높게 평가하는 거 같아요.”
“정확하게 평가하고 있는 거야. 모르냐? 지피지기 백전백승? 적을 잘 알아야 다 이겨버리는 거야. 연습생한테 같은 연습생은 다 적이야. 너도 내 적이거든? 널 존나 잘 알고 있어야 다음에 또 데뷔조 설 때 널 이길 거 아냐.”
“아닌 거 같은데.”
“네 생각이 맞는지 내 말이 맞는지는 다음 주 주평을 보면 알겠지. 너 주평 누구랑 할 거냐? 할 사람 없음 나랑 하자.”
자룡이 슬쩍 제안했다.
‘이럴 줄 알았어.’
현덕은 고민하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왜!”
“이유는 형도 잘 알 텐데요?”
“……나 막 너 챙겨주거나 동정하는 거 아니거든?”
“네에, 그러니까 싫어요.”
“김현덕!”
“싫어요!”
“너 진짜 싫어?”
“네, 싫어요.”
“너 진짜 잘 생각해 보고 말해. 딴 애들은 나랑 같이 못해서 안달이라니까?”
“네, 그러니까 싫어요.”
“야, 너- 너무 그렇게 단호하게-”
“싫어요.”
“…….”
“그렇게 쳐다봐도 싫어요.”
“치사한 놈.”
“네, 싫어요.”
“알았으니까 그만해라. 그만하면 마이 묵었다 아이가.”
“…….”
“나 요즘 개인기 연습하는 건데, 별로야?”
“네.”
“……우씨.”
자룡의 제안은 더없이 고마웠지만, 조금 전 문 밖에서 떠들고 지나갔던 연습생들의 말처럼, 자룡에게 방해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현덕은 그동안 친해진 다른 연습생들에게 조심스럽게 접촉했다. 실력이 좀 있는 연습생들은 당연하게도 거절했다. 평가 점수가 낮은 연습생들은 현덕을 받아줬다. 현덕은 그들과 조를 짜 주간 평가를 준비했다.
현덕이 속한 연습조는 요즘 한창 뜨고 있는 남자 아이돌 그룹의 노래를 준비했다. 노래 파트를 나누고 동선을 짜 안무를 연습했다. 처음 주간 평가를 준비하는 것이기에 파트 욕심을 부리지 않고 가장 분량이 적은 파트를 맡았다.
항상 혼자 댄스와 보컬 수업을 듣고 연습하다가 여러 사람들과 함께 무대를 준비하게 되니, 색달랐다. 다른 사람들과 안무를 맞추고 동선대로 움직이는 게 꽤나 재미있었다.
현덕은 자신과 동료 연습생들이 마치 당구공 같다고 생각했다. 각도를 계산하여 큐대가 부딪치는 대로 움직이고 멈추는.
함께 무대를 준비하는 연습생들은 현덕의 실력에 놀랐다. 워낙 소문이 안 좋지만, 성격이 순해 보이고 나이도 어려서 모두 하기 싫어하는 파트를 맡기려고 데리고 왔던 건데.
현덕은 매우 열심히 연습에 참여했다. 실력도 나쁘지 않았다. 막 기본 트레이닝을마친 상태라 모르는 게 많았지만 가르쳐주면 잘 따라왔다. 한 번 가르쳐주고 다음 날 동선을 맞춰보면, 감탄이 날 만치 잘했다.
그 주 토요일.
현덕이 속한 평가조는 아주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무대를 본 연습생들은 현덕에 대한 생각을 고쳤다.
‘저 자식, 제법인데?’
일방적인 무시가 호기심과 견제 어린 시선으로 바뀌는 건 한순간이었다.
처음은 다른 연습생들에게 도움을 받으며 준비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바뀌었다. 현덕이 다른 연습생에게 물어보는 것보다 다른 연습생들이 현덕에게 물어보는 경우가 많아졌다. 언제부터인가는 현덕이 자신을 끼워달라고 요청하는 경우보다 연습생들이 현덕에게 와서 함께 하지 않겠느냐고 물어보게 되었다.
현덕은 자룡과 같은 A급에 들어갈 정도는 아니지만, 중상위권에는 속해 꾸준히 좋은 평가를 유지했다.
자룡은 이만하면 나랑 무대를 해봐도 되지 않느냐고 매주 말을 걸었지만, 현덕은 못 들은 척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렇게 봄이 지났다. 겨울처럼 싸늘하게 굴던 연습생들이 봄바람처럼 산들산들하게 현덕에게 다가온 지 얼마 되지 않았건만. 더운 기운이 한껏 몰려오기 시작했다.
더운 기운과 함께 새로운 남자 연습생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