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9. (228/228)
  • 외전 19.

    “으…… 으윽…….”

    나는 도무지 눈이 떠지지 않아서 침대 위에 엎드린 채 앓는 소리만 냈다. 밤새 누군가가 두들겨 팬 것처럼 아팠다. 온몸이 비명을 지르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괜찮아?”

    “……괜찮겠냐?”

    눈앞에 나타난 원수의 얼굴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강유현은 가증스러운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만행이 생각나 이를 아득바득 갈았다.

    마지막으로 숫자를 셌던 게 세 번쯤이었나. 그 뒤에는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길 반복하는 바람에 기억이 띄엄띄엄하긴 하지만, 적어도 다섯 번 이상은 했을 것 같다. 해가 뜨는 걸 보고 나서야 겨우 잠들 수 있었으니까.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이지 살아 있는 게 용할 정도였다. 내가 능력자가 아니었다면 분명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일어나. 뭐라도 좀 먹어야지.”

    “으윽…….”

    강유현이 내 몸을 조심스럽게 일으켰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자 무릎 위에 쟁반이 올려졌다. 그리고 뚜껑을 덮은 그릇이 올라왔다. 따끈한 김이 뚜껑에 난 작은 구멍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이게 뭐야?”

    “죽.”

    “……그렇게까지 아픈 건 아닌데.”

    방금 전까지 온갖 앓는 소리를 다 했지만, 이렇게까지 환자 취급을 하니 조금 뻘쭘해졌다.

    그래도 이렇게 챙겨 주는 게 나쁘지는 않았다. 나는 흠흠, 헛기침하며 뚜껑을 열었다.

    “오…….”

    뚜껑을 열자 먹음직스러운 달걀죽이 보였다. 달걀물을 입힌 노란 죽 위에 검은 김 가루와 참깨가 고명으로 올라가 있었다. 고소한 냄새가 풍겨와 위장을 자극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속이 거북해서 아무것도 먹기 싫었는데 말이다.

    “이거 네가 만든 거야?”

    “응.”

    “헐…….”

    이 자식, 요리까지 잘하다니. 대체 못 하는 게 뭐지? 과연 어디까지가 남자 주인공의 소양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잘…… 먹을게.”

    “그래.”

    “……?”

    숟가락을 들어 죽을 조금 떴다. 그러자 강유현이 내 옆에 걸터앉았다. 빤히 쳐다보는 게 좀 불편했다. 그래서 죽을 후후 불면서 강유현을 흘끗거리며 물었다.

    “너는 먹었어?”

    “나는 진작 먹었지.”

    “음…… 그래?”

    잠든 시간은 비슷했는데 나보다 훨씬 빨리 일어났던 강유현이었다. 예전에야 심각하게 불면증에 시달렸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오늘은 내가 너무 늦잠을 잔 거지. 나는 속으로 생각하며 죽을 한 입 먹었다.

    “……!”

    이게 정말…… 죽인가? 너무 맛있잖아. 놀란 얼굴로 죽 그릇을 내려다보다가 강유현을 쳐다봤다.

    “왜? 별로야?”

    “아니, 엄청 맛있는데.”

    “맛있다니 다행이네.”

    아닌 척하면서 강유현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칭찬받으니까 기분 좋은 건가. 이러니까 또 귀엽네.

    “……!”

    아니, 귀엽기는 무슨. 나보다 큰 사내놈을 보면서 귀엽다는 생각이나 한다니. 정말 내가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너…… 흠, 요리 잘해?”

    “그럭저럭. 살기 위해 뭐라도 만들어 먹어야 했다 보니.”

    “아…….”

    요리 실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게 그다지 좋은 이유 때문은 아닌 것 같다. 나는 더 어색해지기 전에 부지런히 죽을 떠다가 입 안에 넣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강유현과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할 수 있을 줄이야. 분명 아침에 서로 얼굴을 보면 민망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원래 그런 놈인 줄은 알았지만 강유현은 뻔뻔했고, 나도 생각한 것보다 충격이 크진 않았던 것 같다.

    “윽…….”

    물론 몸이 입은 충격은 컸지만 말이다. 죽을 다 먹고 그릇을 들고 일어나려고 하자 허리가 지끈거리며 아팠다. 그러자 옆에 있던 강유현이 얼른 나를 부축했다.

    “내가 치울 테니 그냥 앉아 있어.”

    “아니…… 찝찝해서 씻고 싶은데.”

    “이거 치우고 나서 내가 도와줄게.”

    “뭐? 잠…….”

    붙잡기 전에 강유현이 그릇을 들고 쌩하니 방을 나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씻는 걸 도와주다니. 뭘 어떻게 도와주겠다는 거야. 뒤늦게 어젯밤의 민망함까지 한꺼번에 올라와 얼굴이 뜨거워졌다.

    “왜 그래?”

    “흠, 아무것도 아니야.”

    “……?”

    그릇을 다 정리하고 돌아온 강유현이 의아한 얼굴을 하더니 손을 뻗었다. 그리고 침대 위에 앉아 있던 내 몸을 번쩍 들었다. 나는 기겁하며 외쳤다.

    “야, 뭐 하는 거야!”

    “욕조에 물 받아 놨어.”

    “내가 갈 수 있어!”

    “지금 못 걷잖아.”

    담담하게 말한 강유현이 나를 안은 채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떻게든 내려가고 싶었지만 아직은 바둥거릴 힘도 없었다. 결국 나는 축 늘어진 채로 강유현의 품 안에 얌전히 안길 수밖에 없었다.

    에필로그

    “축하합니다. 한이진 능력자!”

    “축하드립니다!”

    “아니, 이젠 마스터라고 불러 드려야죠.”

    “아, 그렇군요.”

    길드 안에 모인 사람들이 각자 한마디씩 하는 것만으로도 왁자지껄했다. 나는 어색한 얼굴로 그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하하, 감사합니다…….”

    “자자, 파티 주인공이시니 단상에서 소감 말씀하시죠!”

    “아니, 그…….”

    멍하니 있던 나는 정신을 차리니 단상 위에 서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마이크까지 쥐여 준 상태였다.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단상 아래를 내려다봤다.

    오늘은 내가 정식으로 로키 길드의 마스터가 되는 날이다. 과거 빌런 길드로 이름을 날린 곳이었으니 이름을 바꾸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냥 놔뒀다. 이제 더 이상 연락은 되지 않지만 로키 신이 알면 삐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를 노리는 놈들 중에는 로키 길드처럼 과거 라우페이 길드의 밑에 있던 빌런 길드들도 있었다. 비록 장태산이 구속되면서 로키 길드에 남아 있던 기록들이 모두 정부와 협회 쪽에 넘어갔지만, 내 몸의 주인이었던 한이진은 로키 길드 출신이었다. 그런 인물이 길드 마스터가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경고가 될 수 있었다. 너희들의 정보를 내가 알지도 모른다는, 그런 어필이 되는 것이다.

    물론 정작 나는 로키 신이 연기한 한이진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빌런 길드의 숨겨진 정보 따위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래도 충분히 허세는 부릴 수 있었다. 이걸로 당분간 라우페이 길드의 밑에 있었던 빌런 길드들은 잠잠해질 것이다.

    [어, 그러니까…… 으흠.]

    나는 어색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단상 아래에는 로키 길드의 길드원들과 축하하러 온 타 길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애초에 우리 쪽 길드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고, 축하하러 온 타 길드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래도 괜히 눈에 띄게 하지 않으려고 파티 규모를 줄여서 이 정도 모인 거였다.

    새삼스럽지만 이렇게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니 내가 그동안 헛산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도 다 열심히 살았던 결과인 거겠지.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 사라지고 뿌듯한 마음도 느껴졌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마이크에 입을 대며 말을 이었다.

    [바쁘신 와중에도 길드 창설 파티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좋은 길드를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래도 조금 쑥스러워서 최대한 말을 짧게 했다. 그런데도 파티에 모인 사람들은 기꺼이 박수를 쳐 주었다.

    “멋지다, 한이진 마스터님!”

    “여기 한 번만 봐 주세요!”

    “휘익!”

    생각보다 조금 더 격한 반응이라 당황하긴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어색하게 단상 위에서 손을 흔들고 사진을 몇 장 찍은 후에 겨우 내려갈 수 있었다.

    “후우…….”

    “수고하셨습니다. 한이진 마스터.”

    “아…… 그 호칭 정말 어색하게 들리네요.”

    “이제 익숙해지셔야죠.”

    곁에 다가온 박윤성이 그린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너무 낯간지러워서 나는 어색한 웃음만 흘렸다.

    “축하드립니다, 한이진 능력자…… 아니, 마스터!”

    “감사합니다. 성유빈 능력자.”

    “길드 파견은…… 제가 꼭 가고 싶었는데……!”

    “하하…… 발키리 대장님이 그러시면 안 되죠.”

    “크윽……!”

    성유빈은 분하다는 듯이 주먹을 꽉 쥐었다. 나는 그녀를 보며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전에 박윤성이 말한 대로 나를 지키기 위해 대형 길드 연합이 로키 길드에 길드원을 각자 파견해 주기로 했는데, 프레이야 길드에서는 해송연 능력자와 구슬 능력자가 왔다. 성유빈 능력자는 본인이 꼭 파견 가고 싶다고 송차현 마스터에게 말했던 모양인데, 당연히 전투 부대의 대장을 다른 길드에 파견할 리가 없었다.

    “제가…… 대장만 아니었으면……!”

    “그런 말씀 마시고 좀 진정하세요.”

    “죄송합니다. 한이진 마스터님. 언니 좀 데려가겠습니다.”

    “아, 그러세요.”

    보다 못한 발키리 대원들이 성유빈을 질질 끌고 갔다. 볼 때마다 여전한 성유빈의 뒷모습을 웃으며 쳐다봤을 때였다.

    “형, 형! 축하해!”

    “고마워, 도결아.”

    “나도 빨리 형 길드 들어가고 싶어!”

    도결이는 아직 어리고 경험이 부족해서 오딘 길드에 조금 더 있다가 내 길드에 들어오기로 했다. 나는 손을 뻗어 도결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형도 많이 노력할게.”

    “헤헤.”

    강아지처럼 몸을 비비적거리던 도결이는 구슬이 와서 핀잔을 주자 투덜거리면서도 같이 디저트를 먹으러 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구슬과 꽤 친해진 모양이었다.

    “한이진 마스터님! 정말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해송하 능력자.”

    “축하드립니다. 한이진 마스터님.”

    해송하와 해송연도 나에게 얼굴을 비쳤다. 여전히 오빠인 해송하는 연상으로 보이지 않았고, 해송연은 참 무뚝뚝한 얼굴이었다. 남매를 상대하고 나서는 기운이 조금 빠지고 말았다.

    “으앗……!”

    그래서 뒤로 빠져 조금 쉬려고 했는데, 별안간 누군가가 내 몸을 잡아끌었다. 누군가하고 보니 강유현이었다.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그를 쳐다봤다.

    “너 뭐 하는 거야?”

    “쉿.”

    “……?”

    아무리 구석이라고 해도 사람들이 많이 모인 파티장 안이었다. 그런데 나를 뒤에서 끌어안은 강유현은 비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차피 다른 놈들한테 안 보여.”

    “너…… 능력을 고작 이런 데에다 쓰냐.”

    “후후.”

    기막힌 얼굴로 강유현을 보다가 몸에 힘을 풀었다. 어차피 나도 지쳤으니, 강유현을 이대로 인간 쿠션으로 쓸 속셈이었다. 강유현은 그런 나를 부드럽게 안았다.

    “지쳤으면 이만 나갈까.”

    “어떻게 그래. 내가 주인공인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작게 중얼거린 강유현이 나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할 수 있어.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 테니까.”

    “…….”

    진지한 눈을 보자 이유를 알 수 없는 안도감이 온몸에 퍼졌다. 나는 이제 더는 살기 위해 안달하지 않아도 된다. 내 길드가 생기고, 나를 아껴 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고, 맹목적으로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도 있다. 나는 손을 뻗어 강유현의 뺨을 쓰다듬었다.

    “고마워, 강유현.”

    “…….”

    아무 말 없이 나를 내려다보던 강유현이 고개를 숙였다. 곧 입술에 따뜻한 게 닿았다. 나는 눈을 감으며 강유현의 목을 끌어안았다.

    외전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