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5. (224/228)

외전 15.

“강유현…….”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강유현을 쳐다봤다. 이렇게 방 안에 떡하니 나타날 줄이야. 페어 아이템을 쓰지도 않은 거 같은데.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강유현을 보고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오, 흠, 오랜만이다.”

“…….”

괜히 헛기침이 나왔다. 나는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왜인지 강유현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사실 아직도 강유현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겠다. 심단테의 아지트에서 봤던 것처럼 화를 낼까? 역시 나에게 실망했을까? 박윤성의 말을 들었을 땐 아직도 나를 못 믿는 것 같았으니까.

나도 모르게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내가 불리한 상황에서 도망부터 치려고 하는 건 꽤 고질적인 문제인 모양이었다. 그걸 깨닫고 우뚝 멈춰 섰다. 하지만 강유현은 그런 나를 붙잡지 않고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었다.

“……뭐라고 말 좀 해 봐.”

“…….”

“강유현.”

차라리 화를 냈으면 좋겠다. 저렇게 쳐다보기만 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잖아.

강유현은 얼마 동안 그렇게 나를 보기만 하더니,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리 와.”

“…….”

나는 그 손을 빤히 응시했다. 제법 부드럽게 말하고 있지만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피하는 것도 찝찝했다. 나는 강유현의 얼굴을 흘끗 보고 그의 손을 잡았다.

“읏……!”

그리고 그러자마자 강유현에게서 뻗어 나온 검은 연기가 내 몸을 감쌌다. 순간 숙소를 덮쳤던 연기가 생각났지만, 그것과 달리 내 몸을 해칠 의도가 느껴지지 않아 순간 긴장했던 몸에 힘을 풀었다.

강유현은 연기가 우리를 감싸자 나를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 안기자마자 눈앞에 새카매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꽉 감았다.

“어……?”

다시 눈을 뜨니 주변 풍경이 달라져 있었다. 나는 여전히 강유현의 품 안에 안긴 채 주변을 흘끔거렸다. 처음에는 어두웠던 주변의 모습이 점점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여기는……?”

“내 아공간이야.”

“뭐?”

나는 깜짝 놀라서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강유현의 아공간은 소설에서 읽기만 했지 직접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것도 그럴게, 강유현은 자신의 아공간에 누구를 데려온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마음이 통한 히로인에게도 허락하지 않은 곳이었다. 이곳은 강유현의 나약한 자아도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헉, 저게 바로 피피…… 헙.”

나는 아공간 안을 둥둥 떠다니던 토끼 캐릭터를 보며 중얼거리다가 황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저 캐릭터는 강유현밖에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강유현이 어렸을 때 강수현에게 그려 주었던 검은색 토끼 캐릭터. 하지만 그때 강수현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저 캐릭터를 기억하지 못했고, 강유현 역시 게이트 안에 수백 년 동안 갇혀 떠도는 동안 기억 속에 파묻었다.

하지만 점점 그의 멘탈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강유현이 만든 아공간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기억 속 깊숙하게 묻혀 있었던 검은색 토끼 피피가 강유현의 나약함을 간직한 채 불쑥불쑥 나타나기 시작했다.

강유현은 그걸 깨닫고 피피를 멀리했다. 세상을 지켜야 한다는 압박감에 자신의 나약함을 상징하는 피피 따위는 그에게 쓸모없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눈에 거슬려서 없애 버리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애초에 피피는 강유현의 안에 있는 또 다른 자아였으니까. 결국엔 오서현 원장에게 상담을 받으면서 강유현은 피피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했었다.

“피~ 피~.”

“…….”

지금은 아주 자유롭게 떠도는구나. 원래는 강유현이 피피를 극혐해서 이렇게 나타나지 못하게 어딘가에 꽁꽁 묶어 놓기도 했었는데. 확실히 지금의 강유현은 소설 속보다 마음이 편해진 것 같았다.

“역시 피피를 알고 있군.”

“……!”

강유현이 중얼거리는 말에 나는 흠칫 놀랐다. 그럴 줄 알았다고 하는 듯한 뉘앙스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어디까지나 강유현은 내가 빙의자라는 걸 알았을 뿐이다. 지금 이 세계가 회귀 전의 세상이라는 건 모르고, 심지어 내가 로키 신이 쓴 소설로 이전의 세계를 알고 있다는 것도 모른다. 그런데도 강유현은 내가 피피를 알고 있었다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아니, 이것도 긴가민가하다가 내가 아는 체하니까 확신했겠지. 강유현은 항상 그런 식으로 정보를 알아냈으니까.

“……맞아. 알고 있었어.”

“너는…….”

강유현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하지만 무언가를 물으려고 했던 강유현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강유현은 이내 결심한 듯 다시 말을 이었다.

“이곳은 우리 말고 아무도 없어. 누구도 엿듣지 못해. 그러니까…….”

“…….”

“그러니까, 너에 대해 나에게 모두 말해 줬으면 좋겠어.”

“……!”

“너만 나를 알고 있는 건 불공평하잖아.”

강유현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나는 이제 더는 강유현에게 숨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알았어.”

결심한 나는 강유현을 향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이진’을 행세하던 내가 아닌, 진짜 ‘나’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때 가족들이랑 멀어지게 된 거야.”

이야기는 꽤 길게 이어졌다. 하지만 강유현은 한 번도 내 말을 끊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내가 하는 말을 듣기만 했다. 긴장했기 때문인지 다소 두서없이 하는 말에도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내가 원래 세계에서 살아온 이야기, 로키 신이 쓴 소설, 그리고 그 소설에 빙의한 것까지 말하자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 이후에는 강유현도 다 알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입을 다물고 눈치를 조금 보자, 가만히 있던 강유현이 나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

“응?”

“네 원래 이름은 뭐야?”

“……!”

강유현이 그걸 물을 줄은 몰라서 놀랐다. 크게 뜬 눈으로 강유현을 보다가 대답했다. 괜히 쑥스러웠다.

“……박호수.”

“……?”

원래 내 이름을 들은 강유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의아한 어조로 물었다.

“그거 네가 스바르트알파헤임 던전에서 말했던 가명이잖아?”

“아…… 그걸 기억하고 있었어?”

손을 들어 뺨을 긁적거렸다. 그때는 기억이 돌아온 건 아니고 문득 떠오른 이름을 말한 것뿐이긴 하지만, 그래도 무의식중에 원래 내 이름을 떠올렸던 거겠지. 나는 흠, 하고 헛기침했다.

“그때는 정말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어. 내 기억이 돌아온 건…….”

“그럼 진명섭은 누구야?”

“뭐?”

내가 진명섭 이야기를 강유현한테 했었던가?

아, 소설을 추천한 친구 얘기를 하긴 했는데. 그래도 이름은 말하지 않았을 텐데……. 이름을 어떻게 안 거지?

고개를 갸웃하는 나를 강유현은 제법 매서운 눈으로 쳐다봤다. 나는 당황하며 대답했다.

“그냥, 오랜 친구……? 악우……? 그렇게 친한 친구는 아니었고…….”

“그놈 때문에 돌아가고 싶었던 거 아니야?”

“뭐? 아니야!”

나는 화들짝 놀라며 외쳤다. 순간적으로 정말 정색하는 반응을 보이자, 강유현의 기세가 조금 수그러들었다.

“정말 아닌 거지?”

“아니라는 데도 자꾸 그러냐.”

“그럼 저쪽 세계에서 좋아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

“뭐…… 그렇지? 그나마 여기서…….”

과거의 일을 떠올리다가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러다 강유현과 두 눈이 딱 하고 마주쳤다.

“…….”

“……”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뒤늦게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건지 깨달았다.

“아니, 그게…….”

어떻게든 무슨 말이라도 꺼내려고 했지만,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강유현이 나를 보는 눈이 짙어졌다.

“박호수.”

“뭐…….”

“호수야.”

“……!”

낮은 목소리가 예전 이름을 부르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강유현이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가 있던 나를 알아봤을 때도 이런 기분이 들었었다. 나는 상기되었을 게 분명한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건 이미 예전 이름이니까, 그 이름으로 부르지 않아도 돼.”

“그래도 불러 보고 싶었어.”

“…….”

왜 자꾸 그렇게 낯부끄럽게 말하는 거냐고. 항의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입술을 뗄 수가 없었다. 지금 입을 열면 나도 이상한 말을 할 것 같았다.

“좋아해.”

“……!”

“널 좋아해, 한이진.”

쿵, 쿵, 하고 심장이 뛰었다. 그동안 보인 강유현의 태도로 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그래도 직접 말하니 또 느낌이 달랐다. 나는 겨우 강유현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제 나도 내 감정을 인정해야 할 때였다. 터질 듯한 심장을 억지로 누르며 나도 입을 열었다.

“……해.”

“뭐?”

“……나도, 좋아한다고.”

결국 강유현을 차마 똑바로 보진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강유현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그래도 지금 내가 느끼는 기분과 똑같은 걸 느끼고 있겠지.

가슴이 뻐근하면서 벅차오르는, 그런 기분. 그리고 그런 게 표정에 다 드러났을 것이다.

“읏, 잠깐…….”

강유현의 손이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아공간 안에 들어왔을 때부터 몸을 밀착하고 있긴 했는데, 그보다 더 꽉 끌어안았다. 나는 당황하며 강유현을 밀어 내려고 했다.

“이제 더는 못 기다려.”

“너…… 흡…….”

강유현에게서 절절 끓는 목소리가 흘러나온 동시에 입맞춤이 시작됐다. 나는 키스하는 강유현의 어깨를 꽉 잡았다.

드디어 서로의 마음을 제대로 확인하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은 나도 똑같아서 이해하지만, 그래도 조금 급발진인 면이 있었다. 나는 옷 안을 파고드는 강유현의 손길에 놀라며 겨우 입술을 뗐다. 그리고 당황하며 외쳤다.

“야, 잠깐, 잠깐만……!”

“……왜?”

“그, 그러니까…… 음…….”

너무 당황했기 때문인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그저 강유현을 막을 생각에만 급급했던 나는 어두컴컴한 아공간을 둘러보다가 겨우 말을 이었다.

“아니, 이런 데서는 좀…….”

“…….”

“분위기가…… 좀 그렇지 않나? 너도 나도 처음이고…….”

그러나 갈수록 말이 이상해졌다. 지금은 서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니 다음에 하자, 라는 논리적인 말도 하지 못할 정도로 나 역시 조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런 나를 집요하게 응시하던 강유현이 입꼬리를 올렸다.

“여기가 아니면 된다는 거지?”

“뭐?”

“알았어.”

“……!”

강유현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또 눈앞에 새카맣게 변했다. 예의 그 검은 기운이 나와 강유현을 둘러싼 것이다.

눈을 질끈 감고 뜨자마자 이미 주변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여긴……?”

“내가 만든 안전 가옥. 박윤성도 여긴 몰라.”

“오…….”

그 말에 나는 그만 멍청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침실 안은 일반 호텔처럼 깔끔한 느낌이 들었다. 안전 가옥이면 자주 오는 곳은 아닐 텐데 청소 아이템이라도 놔둔 건가? 속으로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였다.

“이제 괜찮은 거지?”

“……!”

강유현이 침대 위로 나를 밀치며 물었다. 나는 푹신한 침대 위에 앉은 채 강유현을 올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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