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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4. (223/228)

외전 14.

“죄송하지만 저는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네, 그러세요.”

무슨 일 때문인지 짐작이 되는 나는 선선히 연승원을 보내 주었다. 그리고 미안한 표정을 짓는 연승원에게 말을 덧붙였다.

“어차피 내일까지 입원하는데요. 거처 문제는 내일 얘기하죠, 뭐.”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연승원이 뒤를 돌았다. 병실을 나가는 그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 별일 없겠지? 박윤성이 말려서 심단테가 죽지는 않을 거 같고, 내가 무사하다는 건 연승원이 말해 줄 테니까. S급 계약서를 써서 심단테가 기계를 처분하면 강유현이 길길이 날뛸 이유도 없어질 것이다.

그런데 왜 자꾸 찝찝한 느낌이 드는 걸까. 내가 심단테와 몰래 기계를 연구한 걸 말하지 않아서? 하지만 그건 말하지 않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나는 잘못한 게 없다. 이 일로 강유현과 박윤성이 나를 비난하는 게 이상한 거다.

하지만 자꾸만 강유현이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네가 다른 놈들과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정말, 그러면…… 나와 사귀어 주는 거야?

왜 하필 강유현이 가슴을 간질거리게 만들었을 때가 자꾸 떠오르는 거냔 말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할수록 반대로 가슴 속은 답답해져서 침대에 누운 채로 끙끙거렸다.

설마 이게 죄책감이라는 건가? 강유현에게 숨긴 게 있어서 내가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도 안 돼.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가족들에게 이용만 당하다가 정신 차린 후에는 이기적으로 살 거라고 다짐했었는데. 나는 딱 그렇게 내가 다짐한 만큼 살았을 뿐이었다. 그러니 내가 이런 찝찝한 기분이 들 이유가 없었다.

“……젠장.”

이 복잡한 기분의 정체를 알지 못한 채 작게 욕을 중얼거렸다. 대체 왜 강유현만 생각하면 이렇게 가슴이 답답해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

“다행히 심단테는 잘 설득했습니다.”

“예…… 그렇군요.”

박윤성은 여전했다. 내 정체를 알고 놀랐을 텐데도 겉으로는 하나도 내색하지 않았다. 너무 멀쩡해서 박윤성이 아직 모르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그건 내 한순간의 착각이었지만 말이다.

“다 한이진 능력자 덕분입니다.”

“저요?”

“네, 한이진 능력자가 숙소에서 심단테와 연락할 때마다 그를 추적했거든요.”

“…….”

미안하다, 심단테. 네가 좆 된 건 확실하게 내 탓인 것 같다.

속으로 심단테를 향해 심심한 사과의 말을 한 다음 박윤성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제가 전부터 심단테와 연락한다는 걸 알고 계셨군요.”

“네, 그자가 쓰는 단말기는 자기가 직접 만든 아이템입니다. 그래서 추적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저도 꽤 끈질긴 성격이라서요.”

“하하…….”

그래서 내가 심단테의 존재를 숨겼을 때 굳이 캐묻지 않았던 건가. 정말 두려운 사람이다. 박윤성이 적이 아니라서 다행이야.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내저었다.

“심단테와는 잠시 서로 이해관계가 맞았을 뿐입니다. 이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졌구요.”

“그 빙의란 것 때문이군요.”

“……네.”

“흐음…….”

박윤성은 손을 들어 제 턱을 매만졌다. 잠시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보는 박윤성 때문에 긴장되었다. 이윽고 진중한 표정을 지은 박윤성이 말을 이었다.

“사실 그 부분은 저도 놀랐습니다. 그리고 썩 기분이 좋진 않더군요. 제 예상 범위에서 벗어난 일이니까요.”

“…….”

박윤성이 기분 나빴던 건 딱 그것뿐인가. 심단테와 연락하는 일을 숨긴 건 예상했던 일이라 상관없는 거였고, 내가 빙의자라는 건 자기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기 때문에 기분이 나빴다니.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저로서는 한이진 능력자가 다른 세계로 돌아가는 걸 단념해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물론 확실하게 하는 것도 좋지만요.”

“……저도 계약서라도 쓸까요?”

“뭐, 우리 사이에 그 정도까지 하지 않아도 되겠죠. 그렇지 않나요?”

“하하…….”

“후후.”

말은 그렇게 해도 눈빛이 좀 무서운데. 나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박윤성의 시선을 피했다. 박윤성이 나를 따라 낮은 음성으로 웃었다.

“어쨌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강유현 능력자의 생각은 좀 다른 모양이더군요.”

“강유현이요?”

“네, 많이 불안해했습니다.”

“강유현이…….”

박윤성의 말에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어제도 느껴졌던 가슴 속 통증이 또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박윤성을 쳐다보며 물었다.

“제가 떠날까 봐서요?”

“그런 거겠죠.”

“하지만 몇 번이고 안 간다고 했는데…….”

“기본적으로 타인을 잘 믿는 성격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도…….”

답답한 마음이 표출된 건지 애꿎은 박윤성을 붙잡고 늘어졌다. 그걸 깨달은 내가 입을 다물자, 박윤성이 피식 웃었다.

“두 분은 아무래도 대화를 좀 하셔야겠군요.”

“……네.”

“강유현 능력자는 주말쯤 복귀할 예정입니다. 그때 얘기해 보시죠.”

“알겠습니다.”

기운 없이 대답하는 나를 박윤성이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손을 들어 앞머리를 쓸어 올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강유현 능력자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

“왜 그렇게 한이진 능력자를 믿지 못하고 불안해하냐고 했더니, ‘그 녀석은 자신의 얘기를 전혀 하지 않아서 믿을 수가 없다.’라고 하더군요.”

“……!”

“저처럼 타인에게 필요 이상의 관심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 강유현 능력자가 그런 말을 해서 좀 의외였습니다.”

“아…….”

순간 망치가 머리를 내리치는 것 같았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설마 강유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강유현에게 내 얘기를 잘하지 않았다. 한이진의 행세를 할 때는 들킬까 봐 말을 아꼈고, 빙의자라는 걸 들키고 난 이후에도 딱히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말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로키 신이 쓴 소설을 읽은 탓에 강유현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었다. 물론 지금의 강유현은 회귀 전의 강유현과 엄연히 다른 인물이긴 하지만, 그래도 소설 속과 그의 과거는 똑같다. 나를 만나기 전까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일을 겪었는지 나는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굳이 나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나는 강유현에게 궁금한 게 없었으니까. 그리고 강유현도 내 과거를 궁금해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아니, 근데 궁금하면 자기가 물어보면 되잖아? 자기도 물어보지 않았으면서 왜 그런 말을 하는 건데? 결국엔 불만이 생겨 눈살을 찌푸리자. 박윤성이 또 픽 웃었다.

“나머지는 강유현 능력자가 오면 말해 보시죠.”

“크흠, 알겠습니다.”

“그리고 당분간은 다른 숙소에서 지내셔야 하는데 괜찮으시죠?”

“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병원에서는 퇴원해도 된다고 했고, 보안이 뚫린 원래 숙소로는 돌아갈 수 없으니 당분간은 오딘 길드의 본관 숙소에서 지낼 것 같다. 고등급 능력자들이 모인 기숙사가 있으니 아마 거기서 지내게 되겠지. 나는 박윤성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

주말은 금방 다가왔다. 그사이 나는 숙소를 옮겼는데, 의외로 쾌적하게 잘 지내고 있었다. 나 혼자만 독점하다시피 했던 숙소와 달리 기숙사는 종종 다른 능력자들과도 마주쳐서 오히려 더 좋았다. 역시 아무리 혼자 사는 게 좋아도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인 법이었다.

“아빠, 아빠아.”

“응?”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울상을 지은 용순이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왜?”

“나 공부하기 시러어…….”

아침부터 용순이가 나를 붙잡고 늘어졌다. 그러고 보니 이제 교육하러 서지안이 올 시간이다. 서지안을 불편해하는 용순이가 아침밥을 먹고 징징대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용순이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안 돼. 공부해야지.”

“지안 누나랑 공부하기 시러!”

“선생님이라고 해야지.”

“지안 선생님 시러!”

“하아…….”

나와 달리 서지안은 용순이의 떼를 잘 받아 주지 않는다. 그래서 사실 용순이와는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덕에 교육은 더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어떻게든 용순이를 설득하기 위해 한숨을 쉰 다음 다시 입을 열었을 때였다.

“어머, 그렇게 누나가 싫으니?”

“정말 시…… 헉……!”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대답하려던 용순이가 식겁했다. 그리고 부자연스러운 몸짓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서지안이 생긋 웃으며 서 있었다.

“우리 귀여운 용순이, 당사자가 없는 데서 나쁜 말 하는 사람을 뭐라고 했어요?”

“으윽…….”

“그런 나쁜 사람이 되면 안 된다고 했죠?”

“으으윽…….”

서지안을 보자 용순이는 땀을 뻘뻘 흘렸다. 역시 용순이의 기를 죽이는 건 서지안밖에 없었다. 나는 용순이에게 보이지 않게 서지안을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서지안은 자신에게 맡겨 달라는 듯이 더 생긋 웃었다.

“후우.”

그렇게 용순이를 서지안에게 맡기고 나서야 겨우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용식이도 오늘은 오딘 길드를 방문한 성유빈과 훈련한다고 했고, 나만 할 일이 없었다.

“음…….”

아니, 아마도 할 일이 생길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정확히 언제 온다고 하진 않았으니까. 나는 괜히 목이 마른 느낌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라?”

분명 물을 방 안에 가져다 놨던 거 같은데 아니었나. 어쩔 수 없이 물을 가지러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였다.

“오랜만이야.”

“……!”

아무런 기척도 없었는데 별안간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익숙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나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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