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2.
“그렇게 말해 주시니 감사하네요.”
나는 겨우 그렇게 대답했다. 이채진이 저렇게까지 말하니 더는 겸손을 떨 수도 없었다. 계기야 어떻든 내가 한 행동으로 이채진이 나를 좋게 봐준 거였다. 그러니 나도 마음 놓고 그의 호의를 받아들이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앞으로의 거취 문제 말입니다만.”
“아, 네.”
이채진은 웃는 얼굴이 마치 신기루였다는 듯이 순식간에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정말 공과 사가 뚜렷한 사람이었다. 물론 그러는 게 나도 더 편하기는 하지만.
“저에게는 포션을 제작할 작업실이 필요합니다. 제가 허락한 사람 외에는 누구도 와선 안 되고, 보안도 물론 중요하겠지요.”
“음, 그게 말이죠. 사실 아직 제 거취도 정해지지 않아서요.”
나는 지금까지 한국에서 가장 보안이 확실한 곳에서 살고 있었다. 하지만 믿었던 그곳이 얼마 전에 뚫리고 나와 아이들은 내쫓기듯이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한 번 보안이 뚫린 숙소에는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어차피 길드를 만들기로 했으니 거취를 새로 정해야 했다. 그런데 과연 오딘 길드의 숙소를 능가하는 곳이 있을까? 대형 길드들이 연합해서 나를 지키려 숙소를 새로 만든다고 해도, 결국은 그 이상으로 보안이 좋아지진 않을 것 같았다.
우선은 다른 길드 마스터들과 상의해야 할 것 같은데. 으음, 하고 신음을 길게 내뱉자 이채진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보안 문제라면, 그분께 의뢰하면 어떨까요?”
“그분……이요?”
“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람들에게 추적당하지 않은 능력자가 있지 않습니까.”
“설마…….”
그 말을 듣자 누군가가 떠올랐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심단테 말인가요?”
“네.”
“음, 그 사람은…… 좀…… 힘들지 않을까요?”
내가 심단테와 아는 사이라고 말할 수 없으니, 은근슬쩍 돌려서 말했다. 그러자 이채진의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윤성 마스터 말로는 심단테 능력자의 거처를 거의 추적했다고 합니다.”
“네? 정말입니까?”
“네. 오래전부터 했던 일이라고 하더군요.”
“아…… 그렇군요.”
아무래도 박윤성은 심단테를 찾아내 보안 설비를 의뢰할 모양이었다. 하지만 과연 심단테가 그걸 들어줄까? 물론 힘으로 협박하면 심단테로서도 어쩔 수 없긴 할 테지만……. 그것도 정말 심단테를 찾아냈을 때의 일이겠지.
아직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도 그와 연락하긴 하지만 어디에 살고 있는지는 알지 못하니까. 나는 그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뭐, 그렇다면 박윤성 마스터가 알아서 하겠죠. 굳이 심단테가 아니라도 보안 문제는 어떻게든 해결할 테고요.”
“그렇죠. 정 안 되면 제가 했던 것처럼 주기적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도 방법입니다.”
“그건…… 상상만 해도 귀찮겠네요.”
“어쩔 수 없죠. 남들에게 우리는 걸어 다니는 보물단지로 보일 테니까요.”
“아……하하.”
자신의 처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이채진은 담담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걸 넘어서서 통달한 것처럼 보였다.
“그럼 이만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몸조심하십시오.”
“네, 이채진 능력자도요.”
몸을 일으킨 이채진이 간단한 인사를 하고 병실에서 나갔다. 나는 그를 돌려보내고 다시 침대 위에 앉았다. 아까보다 머리가 조금 더 복잡해졌다.
“심단테라…….”
확실히 심단테라면 오딘 길드의 숙소보다 더 보안이 좋은 거처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지만…….
역시 순순히 만들어 준다고 할 것 같지 않았다. 내가 겪은 심단테는 흥미 있는 게 아니면 철저하게 무관심한 인간이었으니까. 내가 이것저것 아이템을 강탈할 수 있었던 것도 트립 기계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니까였지. 아니었으면 말도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정도로 외골수적인 인간이었다.
만약 박윤성이 정말로 심단테를 찾아내면 난리가 날 것 같은데. 심단테는 그 성격에 죽어라 거절할 것 같고, 박윤성은 힘으로 굴복시키려고 할 것 같고……. 심단테는 단순히 돈으로 움직이는 속물은 아니니까 말이다.
“과연 어떻게 되려나.”
나로선 어떻게 돼도 상관없지만, 결과가 궁금하긴 하다. 내 일과도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심단테가 순순히 도와준다고 하면 앞으로 좀 편하게 거처에서 지낼 수 있고, 아니면 이채진이 말한 것처럼 불편하게 거처를 여기저기 옮길 수도 있었다.
“으음…….”
확실히 거처를 자주 옮기는 건 귀찮겠는데. 이채진은 예전부터 그랬으니 상관없겠지만, 나는 진득하게 한곳에서만 지냈기 때문인지 상상만 해도 참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내가 먼저 심단테에게 연락해서 도와 달라고 할까? 아니, 그건 좀 자존심이 상하는데……. 아니, 당장 또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는데 자존심은 무슨. 기계를 만드는 데 더 협력해 준다고 하고 살살 꼬셔서 돕게 하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인벤토리 안에 있던 심단테 연락용 핸드폰을 꺼냈을 때였다.
띠링, 띠리링, 띠링!
“……?”
뭐지, 이 미친 듯한 벨 소리는? 이렇게까지 소리가 크게 들릴 수도 있었나? 나는 의아해하며 전화를 받았다.
“너 무슨…….”
[으아악! 살려 줘요! 살려 줘!]
“뭐?”
[빨리 와서 나 좀…… 으아아악!]
“……?”
뚝, 하고 끊어지는 전화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전화가 끊어져 어두워진 화면을 쳐다봤다.
“아.”
지금 보니 메시지도 와 있었다. 나는 손가락을 움직여 메시지 창을 열었다. 그러자 전에 봤던 것과 비슷한 링크가 메시지로 와 있었다. 링크 위에는 무슨 말도 남기긴 했는데, 오타가 너무 심해서 알아볼 수가 없었다.
“뭐지…….”
분명 다른 몸에 빙의하는 링크가 틀림없었다. 찝찝하긴 했지만 심단테의 전화가 수상했기 때문에 가만히 있기가 뭐 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심하고 링크를 눌렀다.
“윽……!”
팟, 하고 눈부신 빛이 눈앞에서 터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꽉 감았다. 그리고 다시 슬쩍 떴다.
주위의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심단테가 준비한 몸에 임시 빙의한 것이다. 나는 심단테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으윽…….”
침대 위에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빙의한 다음에는 몸 상태가 최악이었다. 심지어 머리까지 지끈거리며 아팠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발을 움직였다. 그래도 다행히 몸은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었다.
조금 어두운 방을 빠져나왔다. 그러자 길게 이어진 복도 끝에서 쾅, 하는 소음이 들렸다. 나는 비틀거리면서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이윽고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저는 모른다니까요!”
“그럼 기억날 때까지 다 때려 부숴 주지.”
“으악, 안 돼요! 으아악!”
“……!”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악을 쓰며 소리치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분명 심단테였고, 그리고 다른 목소리는…….
나는 서둘러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문짝이 날아가고 엉망이 된 방 안의 풍경이 눈에 보였다.
“강유현……?”
“…….”
심단테는 무언가를 지키듯이 온몸으로 감싸고 있었고, 그 앞에서 강유현이 검을 치켜들고 있었다. 무엇보다 대체 강유현이 왜 여기 있는 건지 모르겠다. 복구 지역에 돌아간 게 아니었나? 왜 심단테의 아지트에 있는 거지? 머릿속이 팽팽 돌아갔다.
“……의외군. 이곳에 다른 인간이 있다니.”
“아…….”
뒤를 돌아본 강유현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검을 들고 있던 손을 내리고 나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흉흉한 기운을 거두지 않은 그에게 압박감이 느껴졌다. 순간 처음 강유현을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나를 보는 강유현의 눈이 그때처럼 차가웠다. 그러고 보니 지금의 나는 강유현이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다른 사람의 몸 안에 들어와 있으니까.
순간 가슴 속이 지끈거렸다. 결국 강유현과 나는 이런 관계였다. 모습이 바뀌면 알아보지 못한다. 애초에 강유현은 내 진짜 모습과 이름도 알지 못했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처음부터 빙의한 다음 만났으니 당연한 거다. 그런데 왜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걸로 섭섭함을 느끼는 건지 모르겠다. 강유현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사실을 짧은 시간에 수도 없이 되뇄다.
“잘됐군. 너 그 이상한 기계에 대한 걸 알고 있으면…….”
“……?”
“…….”
강유현은 말하다가 말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위아래로 훑었다. 파랗게 빛나는 강유현의 눈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뭐지? 나를 왜 저렇게 쳐다보지? 지금 스킬도 쓰고 있는 거 같은데…….
곤혹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자, 강유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윽고 그의 입술이 열렸다.
“너…….”
“응? 아니…… 네?”
“…….”
강유현은 계속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지만 계속 머뭇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눈살을 찌푸리던 그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그의 모습에 무언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너 설마…….”
“……?”
“……한이진?”
“……!”
나는 놀란 눈으로 강유현을 쳐다봤다. 정작 강유현도 그렇게 말한 주제에 무척 당혹스러워 보였다. 강유현답지 않게 떨리는 눈이 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분명, 강유현의 눈에 비친 나는 다른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스쳐 지나간 적도 없는 완벽한 타인의 모습인데. 그런데 어떻게 강유현이 나를 알아본 거지?
나는 떨리는 눈으로 강유현을 보며 입을 열었다.